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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건투를 빈다 (2014.2.2.-8.18.)



건투를 빈다. 2008년에 쓰여진 김어준의 책. 상담 고민을 다룬 책인데, 대인관계를 주로 다룬다. 읽고 나니 세계관 책이라는 생각이 드는.. 맞아 맞아..라는 생각과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첨예하게 대립하게 만드는 책. 진로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만 쏙쏙 들어온다.

 

핵심메시지는_ 진로: 생각만 하지 말고 하면 됨. 결혼: 나와 전혀 다른 한 존재와 떠나는 여행.

 

자신의 상황만이 각별하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자존감이 무르다는 방증이다. 자존감이 든든한 자는 자신이라고 해서 특별할 게 없다는 걸 인정한다. 특별하지 않다는 게 스스로 못나거나 하찮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무심하다. 누가 나를 무시하지는 않는지 사주경계하느라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고.

이 말은 남이 어떻게 생각해도 아무 상관 없다는 말과는 다르다. 남이 날 나쁘게 생각하면 기분 나쁘고, 남이 날 좋게 생각하면 기분 좋은 건 당연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힘을 낭비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신이 못나거나 하찮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까.(p32)

 

독일엔 정차 시 버스의 한쪽 면을 기울여 버스 계단의 턱을 없애고 휠체어가 올라탈 수 있도록 만든 시내버스가 벌서 십 년 넘게 운행되고 있다. 그들이 휠체어를 찬 장애인들이 남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버스를 탈 수 있도록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버스를 만든 이유는 장애인을 특별히 불쌍하게 생각하거나 비장애인들이 미안한 마음에 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마음먹어서가 아니다.

밧줄이나 장비의 도움 없이도 누구나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해 계단이란 게 발명됐다. 마찬가지다. 대중교통이란 대중 누구나 그걸 타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어야 하는 거다. 그리고 그 누구나에 장애인도 포함되어야 마땅한 거다. 그래서 누구나탈 수 있도록 버스를 개조한 게다. 장애인을 구분 지어 특별히 배려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에 그야말로 누구나 포함된다고 여기는 사고,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상대적이고 입체적으로 사고하나는 건 그런 거다.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는 능력, 그렇게 세상을 보편타당한 시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을 우린 지성이라고 한다. 역시 언제나 문제는 지능이 아니라 지성인 것이다. (p37)

 

오늘 우리 사회에서 상품만큼 개인의 정서적, 문화적, 사회적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해내는 물적 구현물이 얼마나 더 있는가. 비난은, 그러니까 명품이 지금 제공해주고 있는 그러한 정신적 서비스를 대신할 뭔가를, 우리 사회가 충분히 제공할 수 있고서야 비로소 적절할 수가 있는 거다. 특히 아주 어릴 적부터 일등 이외에는 모두 패배자를 만드는 이 승자독식의 한국 사회에서, 일등이 될 수 없는 나머지 절대 다수가 그나마 명품의 권위를 빌려서라도 기죽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그 애절한 실존적 자구 행위를, 그 철저한 방어기제를 어느 누가 함부로 천박하고 하찮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모든 책임을 개개인의 품성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하기나 한 것인가 말이다. (p51)

 

모든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감당하는 거다. 사람들이 선택 앞에서 고민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선택으로 말미암은 비용을 치르기 싫어서다. 당신은 그 관계로써 이젠 정숙한 아내, 윤리적 엄마가 아니다, 란 사실 감당하기 싫다. 그로 인한 죄의식, 불안 비용도 싫다. 반대 선택도 마찬가지다. 설레는 가슴, 정서적 충만, 격정적 사랑 잃고 건조한 결혼,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기 싫다. 둘 다 갖고 싶다. 선택하기 싫은 거다. 하지만, 공짜는 없다. 우주 원리다.

 

불완전해서 무서운 게 당연한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포에 스스로 맞서겠다고 나서는 것, 그거야말로 존중할 만한 선택 아닌가. 종교인들은 그런 태도를 신에 대한 오만함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인간이 어찌 거대한 신의 섭리를 다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거다. 그러니 를 버리고 신에게 의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불완전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삶의 공포와 마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대해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 여긴다. 난 그렇게 믿는다. (p62)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냥 그 일을 하는 거다. 실패를 준비하며 핑계를 마련해두는 데 에너지를 쓸 게 아니라, 토 달지 말고, 그냥, 그 일을 하는 거, 그게 그 일을 가장 제대로 하는 법이다. 그런다고 하고 싶은 대로 다 되느냐.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겠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 거지. 하지만 해보지도 않는데 그걸 도대체 어떻게 알겠나. 하지도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되길 바라는 건 멍청한 게 아니라 불쌍한 거다. 자기 인생에 스스로 사기 치는 거라고. 그리하여 난 꿈을 말하는 대신 이렇게 외쳐야 한다고 믿는다.

하면, 된다! 아님 말고.”

 

명절은 이제 씨족 행사도, 집단 귀향도 아니다. 평소 마땅한 분량의 가족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자들이 그 죄의식을 탕감받으러 가는 날. 그러니 길이 막혀 다행이다. 차에 갇힌 시간만큼 속죄의 진정성은 입증된다. 도착한 자식들이 부모와 대화의 절반을 얼마나 길이 막혔는지에 소비하고 나머지 절반은 언제 가야 안 막히는지에 쓰는 건 그 번제의 의례다. 명절은 그렇게 죄의식만으로 작동한 지 오래다. 즐거울리 없다. 명절이 다시 즐거워지는 길은 미풍양속 따위와는 상관 없다. 부모는 신분이 아니라 실체다. 가족극의 배역이 아니라 구체적인 여자와 남자다. 그들은 숭고한 효의 대상이 아니라 애틋한 관심의 대상이다.

독립하자. 어른이 되자. 그래서 빚 없는 가족을 만들자. 명절이 즐거워지는 건 그 덤이다. (p109)

 

당신이 부모의 보호를 어느 순간부터 거부하면, 부모, 서운할게다. 그러나 그건 세상 모든 부모가 거쳐가는 부모의 통과의례다. 그건 그것대로 온전히 부모의 몫이라고. 당신이 대신할 수 없는 거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대신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부모가 생략하고 건너뛸 수도 없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망설이느라 정작 자신의 삶이 지체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다. 부모로부터 분리되지 않고서 어른 되는 경로란 없다. 그러니 사실 지금 걱정해야 할 건 부모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다. (p123)

 

이 땅에서 이기적이란 판정은 곧 패배를 뜻한다. 해서 파업의 전위에는 항상 민주인권이 선다. 그러나. 그래 봐야 공격은 어김 없이 후방에 엄폐해둔 정당한이기심에 곡사로 쏟아진다. 파업과 이기주의는 그렇게 동의어다. 그래서 더욱 죽어라 민주인권에 매달려본다. 하지만 소용없다. 서로 숨기고, 간파하는 지점이 뻔하다.

참 희한하다. 모든 경제주체는 반드시 이기적이어야 한다. 자신의 이익은 누가 대신 보호해주지 않는다. 어떤 경제주체를 이기적이라 공격하는 게 마땅하려면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면 누군가 대신 그들 이익을 보장해줘야 한다. 혹은 공격하는 자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든가. 그러나 누구도 제 이익을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이 포기한 이익을 대신 건사해주지도 않는다. 이해가 엇갈릴 때 이기적이 되는 건 그래서 욕심이 아니라 권리다. 그런데 우린 이기심 그 자체가, 공격 대상이다. 희한하다. 악상이 떠오르려 한다. (p143)

 

능력이란 게 업무를 재빨리 파악하고 문서를 예쁘게 꾸미고 보고서 잘 만들고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절대 아니다. 당신 회사의 사장이나 이사가 그런 능력이 출중해서 그 자리에 간 게 아니라고. 사람들의 욕망과 갈등을 중재하는 정치력, 일의 큰 방향성을 가늠하는 통찰력, 인간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부리는 용인술, 상대로부터 신뢰를 얻어내는 태도, 자세, 외모, 말투를 비롯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능력이 분명히 있었기에 그 자리에 가 있었기에 간 거다. 그리고 그런 능력 중에는 실제 일의 업무보다는 업무 이외의 분야에서 발휘되는게 훨씬 더 많다. 그러니 매일의 업무만 보고 그 사람 능력의 모든 면을 봤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p179)

 

사실 선택은 그렇게 하나도 안 복잡하다. 문제는 당신이 어느 쪽으로도 결정을 못 하는 거지. 왜 결정을 못하느냐. 겁나서 그렇다. 그래서 그 시스템 아래서 살아남겠다고 결정하거나 아니면 그 시스템을 박차고 나오겠다고 결정하거나 해야 하는데, 그 어떤 결정도 하지 않은 채, 그냥 쭈그리고 앉아 푸념이나 하고 있는 거다.

사실 당신만 그러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선택을 못 하는 진짜 이유는 답을 몰라서가 아니니까. 그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하기 싫어서니까. 그렇게 날로 먹고 싶어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눈치만 보며 사는 거, 사실 그 역시 하나의 생존 방식일 수 있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정말 자신은 손에 흙 하나 안 묻혔는데 주변 정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서 저절로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도래하는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거라면 지금처럼 주댕이 내밀진 말아야 한다. 조용히 생존 자체에 만족해야 한다. , 당신이 원하는 건 뭔가. 선택을 하시라. 푸념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p186)

DO Do Do

 

극히 남성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곳이라면 그렇게 정면 승부에 기력을 쏟느니 일찍 털고 나오는 게 현명하다. 그런 조직, 업종이라면 승진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힘들어진다. 대개 그런 조직, 업종의 상층부가 실력을 발휘하는 방식은 업무를 열심히 하는 게 아니다. 남자들끼리의 학연, 지연을 비롯한 각종 연줄과 의리와 인연 등이 실력을 좌우한다. 그리고 그런 건 공범 의식 가진 남자들이 목숨 걸고 지키고자 하는 기득권이다. 인터셉트, 매우 힘들다고. 그러니 본격적인 승부를 걸기 전에 먼저 직장 문화부터 꼼꼼히 살펴보는 게 우선이다. 그런 후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떠나는 게 낫다. 아니면 그냥 묻어서 가거나. 다행히 세상이 바뀌고 있긴 하지만 주류는 여전히 그러하다. 미안하다, 여자야. (p195)

 

한 조사를 보면,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재밌는 공통점 주 하나가 30대까지도 이런 저런 일을 전전하다 30대가 한참을 지나서야 비로소 해당 분야에 정착했다는 거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그 전까지 배운 건 전부 남들 이야기니까. 스스로 겪고 배우고 부대낀 게 아니니까. 스스로 겪고 부대끼는 가운데 자신에게 맞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즐겁게 하다 보니 어느 날 성공해 있더란 거다. 그 일을 처음부터 목표로 한 게 아니라. 그러니 남들 그만 부러워 하고 당신이 뭘 잘할 수 있는지, 언제 즐거운지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는 게 옳다.(p199)

 

당연히 가이드 해야지. 내 인생 아니라고 막 말하는 게 아니라, 씨바, 20대 후반밖에 안 됐는데 뭘 그리 걱정하나. 당연히 해보고 싶은 걸 해봐야지. 뭘 그렇게 대단한 걸 손에 쥐고 있다고 벌써 놓길 두려워하나. 손에 든 걸 놔야 다른 걸 잡을 수 있지.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가 해보고 싶은 게 명백하게 있는데 그걸 시도조차 안 해보고 접는 거야. 몰라서 못 하면 할 수 없지. 근데 당신은 알잖아. 그 자체가 행운이야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거든. 당신 690년쯤 살 건가. 22세기에 한번 시도해보려고? 어차피 앞으로 한 50년 살면 기력 떨어져요. 기력 있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도전해봐야지. 아직 20대에 불과한데 괴로운 걸 왜 억지로 하고 앉았어. 해보고 싶은 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국에. 왜 사나. 행복하려고 사는 거잖아. 불행하면 관두는 거야. 대신 가이드가 당신한테 무한한 행복만 가져다줄 거라곤 기대하지 마. 그런 건 없으니까. 세상에 좋기만 한 건 없잖아. 그건 당신도 알지? 가이드가 재미없으면 또 다른 거 하는 거지 뭐. 직업 하나만 가지고 평생 사는 거 그거 요즘은 자랑 아냐. 겁내지 마. 질러. (p207-208)

 

그런데 사람들은 난감한 상황에 부닥치면 대부분 그렇게 상황 자체를 따지는 데 매몰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비용을 지불하지 않을까부터 따진다. 말하자면 셋 다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 좋은 해법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좋은 해법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지금처럼 상황이 당신의 통제권 바깥에 있을 때 가장 중요한 건, 상황 자체가 아니라, 당신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 당신 스스로 알고 있느냐 하는 거다. 친구를 대가로 치르더라도 동생을 얻고 싶나. 그럼 고백하는 거다. 동생의 괴로움은. 언니의 고통은. 안타깝지만 그건 그들 몫이다.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는 건 상관없다와는 다르다. 상관있지만 할 수 없다. 그건 또 그것대로 부닥치는 수밖에. 어떻게 하면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까부터 고민해봐야 한다. 아무 결정 모 한다. 출발점은 내가 그걸 얼마나 원하느냐, 여야 한다. 그런 후 그다음을 감당해 가는 거다. 순서가 그렇다.

만약 내가 묻는다면, 나라면, 동생에게 고백한다. 이기적이지 않고서 한 사람을 독점적으로 사랑할 순 없는 법이다. 그게 배타적인 사랑의 본질적 속성이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럼 종교인이 되어야 하는 거다. 언니에게도 착하고 동생에게도 착한 사람이 되고자 자신에게 닥친 사랑을 포기한다면 애초 그런 사랑은 할 자격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고백한다고 된단 보장은 없다. 동생에겐 동생 나름의 고민이 있으니까. 하지만 사랑하게 된다는 것, 그렇게 좋은 게 공짜일 리 없지 않은가. 도전해야지.(p222)

 

완전연소. 서로가 상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남김없이 주고 받아 더 이상 아무런 아쉬움도, 미련도 없는 정서적 충만감에 다다른 연애를 말하는 건데, 그런 걸 경험하고 나면 상대가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나게 되더라도 서로를 붙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기원해줄 수 있게 돼. 태울 수 있는 건 모조리 다 태워버린 거니까. 그런 거 흔히 겪는 일도 아니고 누구하고나 겪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한데, 연애의 절정이란 그런 거야. 시시한 연애 열 번보다 그런 연애 한 번이 백만 배 낫다. 그러니 당신이 연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에 최대한 집중해. 그래도 그녀가 떠난다? 그럼 인연이 거기까진 거야. (p244-245)

 

연인, 남이다. 연인이 남이라는 걸, 이 기본적인 걸,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 참 많다. 그들은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부족해서라고, 울부짖는다 이런 자들과 놀면 안 된다.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이런 자들은, 사랑과 폭력을 구분할 줄 모른다. 사랑이란 모든 걸 내 뜻대로 할 수 있어 하는 게 아니라 ,어떤 것도 내 뜻대로 되지 않건만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하는 거다. (p257)

 

그럼 어쩌란 거냐. 이거 본인이 자주 하는 이야긴데, 처음 외국 가봐. 온통 다른 것만 보여요. 버스만 타도 다 달라. 토큰, 회수권, 현금, 정기권, 카드.... 다 신기해. 차이점만 눈에 띄지. 그런데 충분히 많은 나라 거치고 나잖아, 그런 어느 순간, , 버스 타면 돈 낸다, 하는 것만 남아요. 인간이 사는 곳이면 으레 통하기 마련인 보편 상식.

사람, 그냥 그거 쥐고 살면 돼요. 그거 쥐고, 주눅 들지 않고 액면가로 세상 사는 거, 그렇게 인생, 한 마리 행복한 동물로 살 수 있으면, 그게 장땡이라고. 나머진 다 잡소리야. 내 말 한번 믿어봐. (p280-281)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행복하다는 거, 일정의 신화야. 사랑으로 결혼해도 불행해지는 커플 부지기수고, 조건 맞춰 결혼해도 잘 사는 이들 적지 않아. 중요한 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어떤 것인가에 있는 거야. 돈과 외양이 훨씬 중요한 사람도 있고 생의 불확실성과 흥분을 함께 누리는 게 더 중요한 사람도 있다고. 결혼에서 가장 먼저 할 질문은 `누구랑'이 아냐. `나는 언제 행복한가'라고. 사랑이냐 조건이냐 따지는 게 잘못된 게 아니라 자기가 어떤 놈년인지도 모르면서 엉뚱한 것만 따지고 자빠진 거, 그게 멍청한 거라고. (p290-291)

 

처자들아, 그거 아시나들. 결혼은 `그 놈'이 아니라 `그런 놈인 줄 안 놈'이랑 한다는 거. 통상 `그 놈'`그 놈'의 각종 행위에 대한 당신들의 무죄 추정, 아전인수, 주관 해석의 누적이 만들어낸,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상상 속의 `그 놈'이다. `그 놈'은 실체가 아니라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걸 보니 내 사랑은 아마도 이런 사람임에 틀림없어' 수준의 짐작으로 창조된, 당신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가공인물이란 거다.

대부분 멀쩡한 처자들이 그렇게 `그 놈'이 아니라 `그 놈인 줄 안 놈'이랑 결혼한다. 그래 놓고 속았다고 혹은 변했다고 말들 한다. 그러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 후 스스로 인물 하나를 가공해냈던 것일 뿐, 상대는 결혼 전이나 후나 변한 거라곤 복부의 피하지방 수치 밖에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이 비극을 가슴 아파하여, 본인 나름대로 터득한 이 유전자 레벨의 착시현상을 최소화하는 비급을 인류애 차원에서 공개코자 하니 세상 처자들은 이를 널리 익혀 행복한 결혼의 지표로 삼기 바란다. (p292-293)

 

본인, 20대 시절 여행 경비 마련을 위해 시즌이면 가이드 알바 꽤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배낭여행 커플들 만나봤다. 여행 초기 그들 행복 게이지는 당연히 하나같이 만땅이다. 멋진 거 보지, 돈 좀 있지, 종일 놀지, 매일 밤 하지.. 부러울 게 없다.

그런데 대충 유람 일주일을 전후해 열에 일곱 정도는 산발적 교전을 시작하고 열흘이면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그 중 절반은 귀국 후 절교 선언에 이르고, 일부는 아예 현지에서 헤어진다. 이건 수년간 수백의 커플을 통해 축적된 통계치요, 경험칙이다. 그렇게 여행 가서 열애 일곱은 박 터지고, 상당수가 현지에서 바로 헤어진다는 거, 이거 직접 목격하지 않으면 참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다. 왜 그러냐.

...

이렇게 해결 방법에 대한 사전지식이 전무한, 난생 처음 겪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면 , 그때부터는 각자 타고난 본연의 문제 해결 능력이 그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그 바닥의 깊이와 넓이는 개인차가 엄청나다.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이 바닥의 깊이와 넓이는 나이나 학벌, 재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한 마리 짐승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본능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능력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각자 지닌 본연의 문제 해결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다.

...

예산 부족하고 일정 자유로운 배낭여행에선 이런 종류의 크고 작은 돌발 상황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문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처리해내는 `그 놈'들의 해결 능력이 문제가 되는, 그런 날들이 연속되는 과정에서 커플 중 열에 일곱은 `그 놈'들의 실체를 목격하게 되는 거다. 그걸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처자들이 아예 현지에서 헤어지게 되는 거고.

그러나 열에 셋은 오히려 돈독해지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는 그런 위기 상화에서 드러나게 되는 `그 놈'문제 해결 능력-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답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능력-에 반해서다.

....

두 번째는, 그렇게 생소한 공포에 대처하는 방식이 서로에게 맞을 때. ... 집안, 학벌, 재산 등에 의해 가려졌던, 공포에 대처하는 서로의 방식이 그렇게 죽이 맞는지 아닌지는 그들도 그때 처음 알게 된다. 왜냐. 국내에서 바닥의 공포까지 드러낼 일이란 게 연애 중에 대체 뭐가 있겠나. 생각해보시라.

이들 열에 셋은, 결혼해도 좋은 커플이다. 왜냐. 결혼 생활이란 게 사실은 배낭여행과 본질적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연애에선 결코 알 수 없었던 약점과 한계가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거니와, 싱글일 때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종류의 갈등에 부딪히게 될 뿐 아니라 그 갈등에 대한 정답이 따로 없어 결국은 각자가 타고난 본연의 품성과 문제 해결 능력이 그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게다가 문제에 맞서 나가는 능력이 일반의 예상과는 다르게 학벌이나 재산이나 집안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점에서도 결혼과 배낭여행은 유사하다. 해서 난 결혼의 자연이혼률을, 배낭여행의 커플 브레이크 비율인 70퍼센트대라 본다. 실제의 이혼률이 그만큼 가지 않는 건 순전히 결혼이란 제도가 가진 사회경제적 복잡성과 강제성 때문이고.

그러니 누군가와 심각하게 결혼을 생각한다면 그 전에 최소 보름 이상 - 한 달 정도면 충분하고- 배낭여행. 한 번은 다녀오시라. `그 놈'이 누군지 알게 될 테니까. , 반드시 타이트한 예산으로 가야 한다. 돈으로 모든 위기를 무마해버리면 `그 놈' 바닥이 안 드러난다. 그렇게 해서 최소한 `그 놈'의 바닥은 파악하고 결혼을 하든 말든 해야 할 것 아닌가.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상황도 안 된다? 뭐 사정이야 누군들 없겠나. 그러나보름 투자해 50년 건지는 거다. 이보다 남는 장사가 어디 있나. (p293-297)

 

정말 맞는 말인 것 같다. 여행을 가게 되면 낯선 상황에 처할 일이 많다. 늘 살아오던 곳에서 하던 일만 할 때랑은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어려운 일, 문제의 상황을 접했을 때 내가 어떤 존재인지도 잘 드러나는 것 같다. 특히 외국여행을 가면 말도 안통하지 돈도 없지 잘모르는 것들 투성이. 인생은 외국에서 배낭여행하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 상황에서 결혼 하기 전에 둘이서 여행을 떠나는게 가능할까. 그냥 아무 일?없이 갔다오면 될 거 같은데. 그게 괜찮은 사람.. 내 또래에 그런 사람은 있겠지만, 그게 괜찮을 부모님은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확실히 남는 장사인 거 같긴 함.

 

두 번째, `저는 죄인인가요?' 학생이 말한 느낌-두려움, 바닥에 내려간 느낌,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 수치심 등등의 제목은? 죄의식. 좋아하는 남자랑 좋아서 했는데 대체 그게 어디서 왔을까? 정답, 남자들이 발명했다. 진짜? 진짜. ? 다른 놈들이 자기 여자 채 가는게 겁나서. 여자들 꼼짝 못하게 하려고. 정말? 정말. 섹스에 관한 한 수컷들은 다른 수컷들 절대 못 믿어요. 그래서 수컷들은 대신 암컷들을 통제하기로 한 거예요. 정절, 순결 따위의 족쇄 이데올로기를 고안한 거죠. 열녀비가 뭐예요. 남자가 자기 죽고 나서조차 여자가 딴 놈한테 가는 게 싫은 거라. 죽을 때조차 곱게 안 뒈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이란 게 다 권력의 문제라는 거예요. 힘있는 쪽이 자신에게 유리한 가치를 신화화해 불변의 질서인 양 유포하는 거죠. 종교도 동원되고 문학도 동원되고. 상징 체계는 다 동원돼요. 그래서 남자들의 욕심이 합법, 율법, 도덕으로 변장을 하죠. 생각해봐요. 여자가 불편한 걸 왜 여자가 만들겠어요. 여자가 불편한 건 다 남자들이 발명한 거예요. 그러고는 어릴 때부터 학습시켜 스스로도 믿게 만드는 거예요. 그리고 혹여 그 경계를 밟는 행위는 다 품성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리죠. 저렴한 년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죠. 그래서 항상 감시하지 않아도 여자 스스로 제어하도록. (p318-319)

근데, 순결이나 정결의 문제는 여자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고 남자에게도 해당하는 것 아닌가. 남성 중심의 시절에는 이렇게 여성을 통제하기 위해서 순결을 강조했을 지 몰라도, 지금은 쫌 바뀐 것 같긴 한데. 그리고 좋아서 해도 죄의식이 드는 건, 사회적 영향 교육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책임지지 않을 일을 했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서 성이란 대를 잇는 건데 그것에 대한 생각없이 하니까 뭔가 모를 부담감이 생기는 것 아닐까.

 

이 모든 게 국가가 국민을 계도, 계몽할 대상으로만 취급했던 시절의 잔재다. 기본적으로 개인이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의 가치관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그에 대한 결과 역시 스스로 책임진다는, 자기결정권의 개념이 우리에겐 그동안 너무 약했던 게다.

그러니 나로선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행심 좀 가지면 안 되는 건가. 살다 요행 좀 바라면 안 되는 거냐고. 그거 하다가 또 열심히 일하면 되잖아. 그렇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놔두면 안 되겠나. 국가가 개인의 삶에 개입해서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고 가르치는 거 좀 안 하면 안 되겠냐고. 어찌 죄의식 가지고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는 항목이 그리고 많냐 말이다. 국민 해먹기 피곤해 못 살겠다. (p325)

 

사실 당신이 그렇게 반응하는 거, 당신 혼자만의 잘못은 아니다. 사악한 왕비, 그 악당 보스만 딱 제거하고 나면 남는 건 오로지 오래오래 완벽한 행복이더란 어린 시절 동화부터 온갖 드라마, 영화, 소설, 게임 따위 들이 몇 가지 갈등 뚝딱뚝딱 해결하고 클라이맥스 위기만 잘 넘기면 그 뒤론 행복 가득한 미래만 남는다는 식의 서사 구조, 대량 유포해왔으니까.

그리고 마찬가지의 세계관으로 삶에서의 갈등과 스트레스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몇 가지만 고치면 누구나 완벽한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사발치는 오늘날의 온갖 처세술과 성공학이, 그런 단선적 행복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으니까. 당신이 갈등과 스트레스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런 스토리 통해 때때로 고단한 삶에 대한 위로를 받는 것까진 좋다. 하지만 그걸 실제 도달 가능한 자신의 행복 모델로 수용하는 순간, 오히려 진짜 불행이 시작되는 거다. 왜냐, 실제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거든. 삶이란 게 마지막 순간까지도 갈등과 스트레스 그리고 무엇보다 불확실성과 부대끼는 거거든. 그 다툼이 끝난다는 건 당신이 죽거나 혹은 미쳤다는 걸 의미하거든. 그러니 갈등과 스트레스는 비정상적이기는 커녕 거꾸로 당신이 제대로 살아 있단 방증이다. 그 자체로 매우 정상적인 삶의 일부라고.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에게 평생에 걸쳐 언제나 삶의 한 요소일 수밖에 없는 걸 비정상으로 간주하고 어떻게 행복해질 수가 있겠나.

그러니 문제 그 자체를 문제 삼지 말고 그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지에만 언제나 집중하시라. 그러지 못하고 문제 자체에 주도권을 넘겨주고 휘둘리고 마는 자들, 왜 유독 내 삶에만 이리도 문제가 많으냐며 스스로 비탄해 마지 않는다. 그들의 불평, 불만 들어주는 것처럼 고역도 없다. 갈등과 스트레스가 있거들랑 기꺼이 갈등하고 스트레스 받으시라. 그게 갈등과 스트레스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다. 그렇게 불완전한게 정상이다. (p327-328)

 

드라마는 안보는 걸로. 영화도 자제하는 걸로. 삶에 별 도움이 안되는 것 같다. 무서운 세계관 교과서들. 물론 이야기나 스토리텔링이 의미있고 가치 있지만, 지금과 같은 방송 시스템 하에서 만들어지는 드라마는 독약인 것 같다.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방송시장에서 무슨 선한게 나올까. 소자본으로도 이야기를 전달 할 수 있는 책이 더 낫고, 차라리 유투브에 굴러다니는 영상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선택장애현상도 드라마의 영향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에서는 무언가 심각한 고민을 하는 장면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삶의 어려움도 잠시 지나가버리고, 어쨋든 좋은게 좋은거. 화목한 가정에,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복잡하고 지리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시간적 금전적 제약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복잡다단한 선택 상황이 주어질까.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다양한데 드라마에는 결국 다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이 등장한다. 문화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문화를 선도하는 것 같다. 문화를 만드는 역할. 그게 바른지 생각해 보아야 할 대상인. 드라마를 보는 것 보다 책을 보는게 더 건전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냐하면 드라마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중독성이 있어 상상의 나래에 빠져들게하고, 세계관을 빠르게 전달하면서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수단.

사람을 통해 채울 수 없는 걸 드라마를 통해서 대리 만족을 얻고 드라마를 통해서 경험한다고 해결이 되나. 불완전한 상황과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불완전한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를 보는게 어쩌다 한두번 하는게 아니라, 매일 밤 반복 된다면 중독아닐까. 삶의 다양한 부분을 건드리고, 세계관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야동 보는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게임은 게임 할 그 시간에만 문제가 되지만, 드라마를 통해 배운 삶의 방식은 일상 생활의 선택과 선호에도 쉽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2014.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