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IVF란
‘나에게 IVF란’은 대학에서 IVF 활동을 하면서(2008년 ~ 2011년) 생각했던 것들, 경험했던 것들을 주로 담고 있고 졸업 이후 IVF 관련된 일들을 정리한 글입니다. ‘나에게 IVF’란은 IVF 3년차였던 2010년에 처음으로 썼고, 졸업 후 2013년에 한 번 수정을 했습니다. 이 글은 싸이월드 블로그에 올라가 있던 2013년 버전을 보완한 것입니다. 2017년 버전.
2010년 당시에는 리더를 하면서 IVF의 경험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적었습니다. 멤버들에게 여러 모임과 활동이 ‘좋다’고만 할 게 아니라 어떤게 좋았는지, 나는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정리해서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간 IVF하며 모아뒀던 강의안들을 모두 보고, 또 누군가에게 받은 편지들도 보고, 제가 메모해 뒀던 일기글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정리해서 기억들을 남겼고 또 되새겨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3년에는 2010년 이후의 삶과 졸업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정리하고 싶어서 비슷한 방식으로 자료를 살펴보고 글을 보완했습니다.
2017년, 지금은 갑자기 이 글이 생각이 나서 다시 꺼내 정리합니다. 졸업 이후의 내용은 IVF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 내용을 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보완 해 나갈 예정입니다. 다만, 다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빼고 쓰려 노력했습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나이에 맞게(?) 말 줄임표나 ‘ㅋㅋㅋ’ 같은 걸 없애고 정리해봤습니다. 그런걸 없애면 조금 지루할 것 같긴 하지만. 그리고 IVF가 아닌 분들도 이해할 수 있게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최대한 부풀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제가 저에 대해 정리한 것이다보니 과장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안해서 읽어 주세요.
1년차 1학기 (2008년 봄)
아무 것도 몰랐던 1년차 1학기. 그때는 뭔가 당연히(?) 선교단체에 가입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가두모집을 하는 곳에 찾아가 IVF에 가입했습니다. 아마 처음으로 갔던 모임이 1, 2년차 대면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학과 대면식 같은 무거운 분위기가 아니고 그냥 놀고 밥 먹고 그랬던 것 같은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또 다양한 사람들이 있어서 신기하기도 했구요. 사실 그 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학 생활이 조금 재미가 없었던 것 같고,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었는데 수업도 영 재미가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수능을 좀 못쳐서 원하는 대학에 못갔던 실망감도 있었던 것 같고, 그냥 진이 빠져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큰모임(예배 모임)이 매주 화요일에 있었는데 그 때 기타를 배우고 있어서 큰모임에는 한 세 번 정도 갔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 너무 좋았던 사경회가 기억에 남습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해 하루씩 강의 하셨는데 필기를 제대로 안해서 남아있는 자료가 없네요. ‘성경 말씀을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던, 뭔가 돌을 깬 듯한(?)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큰모임엔 시간이 안맞아서 못(안)갔지만, 소그룹 시간에 꼬박꼬박 참석했습니다. 소그룹은 보통 3년차 리더 1명과 1, 2년차 멤버 3~5명 총 4~6명 정도로 구성되었습니다. 같은 소그룹이었던 누나들도 재밌었고 또 리더형도 잘 챙겨줘서 편안한 마음으로 소그룹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IVF에 마음을 열게 된 것 같습니다.
1년차 여름학기 (2008년 여름)
IVF에서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도 학기 중 못지 않게 ‘뭐가’ 많기 때문에 여름’학기’라고 표현해봤습니다. 1년차 여름 수련회는 2008년 전국수련회였습니다. 강원도 어느 스키장에서(여름이니까 잔디밭) 수련회를 했었습니다. 5천 여명이 모인 수련회. 솔직히 좀 어떨떨했고 집중이 잘 안됐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어쨋든 저는 그 수련회를 계기로 하나님이 나를 참 많이 기다리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더 많이 보고 기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나름) 성령 충만한 2008년 하반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수능 이후로 그 때까지 너무 맹탕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이 때를 기점으로 너무나 기도하고 싶어지는, 기도하면 설레는 그런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원래 IVF는 방학 때도 뭐가 많긴 하지만 이 때 저는 거의 아무데도 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번 정도 동기들과 놀러(잠포) 갔던 것 같고 그 외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년차 2학기 (2008년 가을)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사랑에 대해 말만 하지 말고 참된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참되게 살고 있으며, 실제로 하나님 안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또한 그것은 스스로를 비판할 일이 생기더라도
그 힘겨운 자기비판을 멈추게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심하는 마음보다 크시며,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친구 여러분
그렇게 마음을 살핀 뒤에 더 이상 우리가 자책하거나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고 자유롭게 됩니다.
손을 내밀어 우리가 구한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 지어주신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은
처음 받은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는 그분안에서 충만히 살고, 그분도 우리 안에 사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안에 깊이 머무르고 계신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방식입니다.
요한일서 3:18~24
2학기 부터는 본격적으로 IVF 모임에 다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큰모임 말씀이 요한일서 말씀이었는데요 굉장히 새로웠습니다. 사람에게 관심이없던 나에게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전해주었고,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물씬 심어주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건 따로 갈 수 없다는 것. 지금까지도 제 삶의 가치관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연차모임도 많이 갔었습니다. 그 때 간사님 캠퍼스 사역 마지막 학기라 그간의 노하우를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기독교 단체에서 독서법, 자아상, 시간관리, 리더십, 이성교제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부터 제겐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왜냐면 그 때까지만 해도 흔히 이야기하는 ‘총체적 복음’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썬데이 크리스천이 문제라는 건 알았지만, 그걸 극복하는 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착하게’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지극히 일상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성경적 인식이 없었습니다.
연차모임의 강의 내용이 너무 좋았었고 제대로 정리해 두지 않은 것, 녹음 해 두지 않은 것은 이미 2010년도부터 아쉬워했었고 지금도 아쉽네요. 제 기억으로는, 대인관계 강의를 통해서 다양함을 인정하는 폭이 넓어졌던 것 같고, 이성교제 강의는 이제껏 들은 것 중에 제일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제일 좋았다는 건, 제일 공감이 되고 또 제일 제 생각과 부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때 일기장에 메모해 둔 걸 담아봤습니다.
목차
#1 좋아함
#2 객관적으로 알아가기
#3 주관적, 체험적으로 알아가기
#3-1 둘이지내기
#3-2 공부하기, 차이 수용하기
#3-3 결혼준비하기
#1 좋아함.
#2 객관적으로 알아가기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여유있게 주위사람을 통해서 열린관계 바로 NO or YES하지 않기..
#3 주관적,체험적으로 알아가기 - 닫힌관계
#3-1둘이 지내기
서로의 좋은점에 끌리고.. 추억을 만드는 시기..
추천)당일여행, 걷고 뛰고 달리고 오르는 데이트.
#3-2 DANGER
위기..
1)알만큼 아는 시기 - 서로의 차이로 힘들어 지는 시기
2)귀가시간정하기
3)감정 표현하기
4)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하나님 알아가기 커플학교..>>다양함을 누리기..다양한 하나님 누리기
5)추억여행(어린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장소)
6)판단해줄 사람 찾고 그 판단에 순종하기
#3-3결혼준비
1)결혼을 준비 하고 또 고민하고 가정을 기도로 준비
2)혼수장만을 위한 데이트
3)결혼한 가정 방문하기&양가 부모님 형제 만나기
4)각자 프로포즈 준비..
@기타//
$교제기간 이나 시작 시간이나..모든 時的문제는 딜레마
$둘 사이의 교제를 지켜볼(지도해줄) 교제 커플이나 부부 두기.. 사귈 때-막 결혼한/막 결혼 했을 때-막 아기낳은/막 아기 낳았을 때-아이들이 다 큰 부부만 남은
$선교하듯..찌라시돌리기
$원투원=원빙데
$교제는 짧게 결혼은길게
그리고 소그룹. 1학기 땐 4명이었는데 2학기 땐 6명이었습니다. 게다가 3명은 중고등학교 동창. 이 때도 소그룹 가면 참 편했던 것 같습니다. 다 익숙한 얼굴이라 그런지. 굉장히 뭔가 시끄러웠던 기억이 남네요. 자세한 기억은 프라이버시인듯합니다. 그분들의 프라이버시.
1년차 겨울학기 (2008년 - 2009년 겨울)
드디어 BLC를 떠납니다. 무려 10일짜리 수련회. 듣도 보도 못한 이런 수련회를, 20만 원 가까운 회비를 내고 다녀왔습니다. 거기선 무언가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걸 자꾸만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 죄책감. 그리고 뭔가 2010년에도, 2013년에도, 2017년에도 아직도 정리되지 않는 뭔가 패닉의 상태(?) 느낌이 남아있습니다. 그런 영적인 느낌도 남아있습니다. 뭔가가 떠나간 것 같은 느낌(?) 상실감(?)
주로 BLC때는 1주차 때 복음에 대한 이야기, 2주차 때는 공동체나 운동성이나 등등 여러 주제에 대해 다룹니다. 그해 BLC에서도 역시 1주차 때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회심부터 시작했던 이야기.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믿는 회심, 그리고 회심이란 마음와 말을 고백일 뿐 아니라 삶과 행동의 변화라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 번에 6시간, 8시간 설교가 있었는데 지금 다시 그 때의 녹음 파일을 들어봐도 시간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BLC 기간 중에 편지를 많이 주고 받는 문화가 있습니다. 그 때 주고 받았던 편지 중에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관계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계속 되는데 왜 더 심해진 것 같을까요.
2년차 1학기 (2009년 봄)
여기서, 잠시 슬럼프 기간이 있습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늘 3~5월 쯤 뭔가 컨디션도 안좋고 일도 안풀리고 집중도 안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때는 아마 전공 공부 따라가기 힘들어서 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전공 수업을 들으면서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함 그런게 많았던 것 같고 그걸 따라가려면 IVF활동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했던 시기였습니다.
여러 모임에는 꼬박꼬박 참여했는데 자료도 다 있는데 메모된 게 없네요. 큰모임 가기만 하면 마음이, 그냥 감정적으로 힘들었던 것 같고 다른 모임에서도 특별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2년차 여름학기 (2009년 여름)
이 때 여름에는 대구지방회 여름수련회가 있었습니다. 보통 여름수련회 때 새신자를 대상으로 한 수련회도 함께 진행합니다. 한 쪽은 일반팀 수련회, 다른 한 쪽은 EBS 수련회라고 부르는데요 저는 이 때 EBS 수련회에 부리더로 참여 했습니다. 리더였던 누나와 함께 1명의 새벗(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요. 사실 리더가 거의 모든 걸 진행하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었습니다만 원투원을 할 때 긴장했던 것 같고, 또 함께 부리더를 했던 동기들과 같이 아침 기도 시간을 가졌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5일 동안 수련회가 진행되었고 그 시간을 통해서 ‘사람에게 복음이 왜 필요할까’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모태신앙이라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영접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었고 자연스럽게 그 과정을 겪어왔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계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데, 그렇지 않은 문화에서 살아 온 사람에게는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련회 준비모임과 수련회 그리고 그 이후 부산선교까지, 이 때의 여름은 ‘복음’이 ‘타인’에게 어떤 의미일까에 대해 많이 많이 많이 고민하게 해 주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아마 프로그램 중에 자신에게 편지 쓰는 시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생각이 정리되어 있는 편지 내용을 남깁니다.
To. 형빈
형빈아. 수고했다. 난생 처음 이런 수련회에 와서 많이 낯설고 어려운 상황들도 잘 보내고 이제 거의 수련회 막바지에 이르렀네. 마지막까지 이 수련회에 올지 말지 고민하면서 그래도 이 수련회를 택한 너가 참 신기하고 감사하다. 이 수련회를 잘 누렸는지 궁금하다. 찬양,강의 ,GBS,OTO,등등 모든 수련회의 프로그램이 새벗들을 위한 것임에 동신에 너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찬양시간에 들었던 수 많은 사랑노래가, 저녁강의를 통해 들었던 기독교의 복음에 대한 정리가, 아침특강때 들었던 창조론,자아상 등의 강의가, 새벗과의 OTO을 하며 새벗이 하던 그 고민이, 인생그래프를 그리며 너의 삶을 나누던 것이,, GBS시간이.. 모두 다 새벗을 위한 것만 아니라 너를 위한 일정이라는 것을. 그 한 순간 한 순간에 모두 다 집중하진 못했겠지만 그 때 들었던 생각들, 느낌을, 지식들, 고민들 잘 정리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분명히 있는데 그걸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 나에게 당연한게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모태신앙이라 정말 쉽게 믿게 된 것에 대한 감사, 왜 새벗들에게만 자신을 돌아보라고 과거를 돌아보라하고 편견을 깨라고 하면서 나는 그러하지 않는가에 대한 반성, 내 안에 여전히 사랑없음, 열정없음에 대한 한탄, 정말 복음이 필요한가에 대한 고민,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아니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그에게 여전히 부족한 기독교인들이,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는가 등등... 수많은 질문과 고민 속에서 잊지 말고 계속 이어나가자 보다 더 많은, 큰 믿음을 위해. -09.7.3.-
From. 형빈
수련회 이후 부산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사전 준비 모임까지 포함하면 거의 2주간의 일정인데요, 이 시간 동안 노방전도를 1주일 정도 진행합니다. 지금은 노방전도가 필요한가, 오히려 불쾌감만 주는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지만 그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전해야할까 하는 부담과 고민이 전부였던 시간이었습니다. 특히나 저는 내성적이라서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 조차 쉽지 않았는데 아침부터 오후까지 길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며 참 많이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EBS 때 했던 고민들도 이어졌었구요. 복음이 필요할까, 이 사람들에게 복음이 왜 필요할까 이런 고민이 계속 됐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한 분 중에는 두 분이 영접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하면 될까요 아니면 그냥 안되보여서 읽어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제게 복음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킨건 BLC도 아니고 수많은 말씀과 소그룹도 아니고 정작 내가 전해야 하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제 성격이, 성향이 드러나기도 하네요.
이 해 여름의 이런 경험 덕분에 IVF를 지속적으로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앞에 적은 대로 전공 공부의 압박 때문에 IVF를 그만해야하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학점을 잘 따고 싶은 욕심이나,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심은 별로 없었는데, 이런식으로 학교를 다니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정도로 전공 공부가 어려웠고 수업시간에는 마치 외국 유학생이 된 듯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됐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름의 경험 덕분에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공동체, 복음을 체계적으로 전하고 관계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공동체가 잘 되면 좋겠어서 이 세상에 꼭 필요해 보여서 그 일원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공부에 대해서는, 물론 공부도 중요하지만 수업시간, 또 개인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최선을 다하고 필요하면 나중에 다시 로스쿨에 가서 배우자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차피 로스쿨에 가면 똑같은 내용은 또 배울테니까요. 그 때 당시 그런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다만, 그 선택으로 인해 법에 대한 지식적 전문성이 없어진 건 분명한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전문성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만 하는 건 아니고 책 보면서 공부를 해오긴 했습니다만 아직도 너무나 부족한 것 같습니다.
2년차 2학기 (2009년 가을)
이 때 큰모임은 정말 신기했습니다. 간사님이 하는 말은 그냥 그대로 내 일기였던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아침 시간 지키라는 이야기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고 그것말고도 여러가지 우선순위의 문제나 등등 저에게 벌어진 일을 제가 하고 있던 생각을 고스란히 큰모임 때 다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근데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나네요. 대신 일기장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찾아보면 되지만 시간 관계 상…)
이땐 교제하는 커플이 여러 명 드러났습니다. 그 이후로는 전체적으로 정체되어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근데 저는 그 와중에, 여성과 관계하는 법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VF 생활을 하면서 관계하는 부분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여자들과 있을 때 더 불편하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그냥 일단 많이 만나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일부러라도 원투원을 잡고 많이 만났던 것 같습니다.
이성교제에 대해서 거의 큰모임 때마다 이야기가 나왔었고, 연애 중인 여러 커플이 있었기에 자연스레 공동체 내 연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때는 연애하지 않는 공동체 내의 문화가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연애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닫힌 관계가 형성될텐데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다양한 사람을 충분히 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다양한 성향의 이성을 충분히 알아 가는 건 앞으로 남은 삶을 살 때 각자에게 모두 유익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고 다양성을 충분히 이해할 때 사회 생활이나, 가정에서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연애 하지 않는(?) 걸 선택했고 덕분에 더 마음 편히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리더를 앞둔 학기였기에 리더의 역할을 잠시나마 체험해봤습니다. 연차모임에서도 그랬고 ‘껍데기’라는 행사에서 디렉을 맡으면서 행사 준비도 했었습니다. 노방 담당자, DPM 담당자도 했었습니다.
2년차 겨울학기 (2009년 - 2010년 겨울)
이때의 BLC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잉여’ 굉장히 심심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원투원을 많이 못했던 것 같고, 덕분에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한 10통을 썼는데 뭘 썼는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잘지내보자 뭐 그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 전 학기 참 잘 살았구나 이런 위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교만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습니다.
BLC 이후에는 리더인터뷰 그리고 리더훈련 그리고 사회부 캠프 그리고 지부수련회 그리고 개강. 폭풍 같은 2010, 2011년이 시작됩니다.
리더에 지원할 때 ‘리더지원서’를 내야 합니다. 리더지원서는 자기소개서처럼 질문이 있고 그에 대해 답을 다는 형식인데 영성 부분, 생활, 가정환경이나 살아온 이야기 등을 담을 수 있도록 질문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열어 봤는데 참 여전하다 싶네요. 사람이 잘 안 변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점은 좋은 점 대로 여전하고 안 좋은 점 또한 안 좋은 대로 여전하네요. 아무튼 이런 리더 지원과정과 인터뷰 과정을 통해서 나를 알아가고 또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리더가 되기로 확정된 후에는 챕터를 했고, 리더훈련을 받았습니다.
챕터는 다음 한 학기 동안 공동체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입니다. 이 때 다음 학기 IVF의 목표는 무엇으로할 것인지, 그에 대한 세부 내용과 시행일자를 정하고, 담당자를 정하고, 소그룹 정하고 등등등을 정합니다. 사실 3년차때까지는 챕터가 별 재미가 없었는데 4년차 때 챕터를 진행하면서 재미를 느꼈습니다. 해봐야 느끼는 성향이 여기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리더 훈련은 일주일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출퇴근 형식으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진 진행이 되었고 그 안에 여러 강의와 워크샵이 진행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IVF 안에서 참 많은 콘텐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복음이 총체적이고 또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리더훈련 때는 리더십, 소그룹 인도, 전도, 시간관리 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오프닝 하는 걸 배웠었습니다.
이후 2월 초에 사회부 캠프를 갔습니다. IVF 중앙회 차원에서 겨울마다 겨울학교를 진행했었습니다. 선교, 예배, 기자, 문서, 사회 학교가 있었던 것 같고 저는 그 중에 사회 학교에 갔었습니다. (이후에 기자학교, 문서학교에도 갔습니다) 2년차 여름학기 때 복음을 전하면서 느꼈던 충격과 깨달음과 함께 이 곳 사회부 캠프에서의 경험이 IVF를 계속하는 큰 축이 되었습니다. 복음전도와 사회 선교 이 두가지가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 두 가지가 왜 중요한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회부 캠프에서는, 양진일 목사님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통해 본 기독교와 사회참여’, 이시종 간사님이 ‘오늘날 대학과 20대, 그리고 IVF운동’, 윤환철 국장님이 ‘한반도 평화와 한국 교회의 책임’, 구교형 목사님이 ‘오늘날 사회 이슈와 그리스도인의 자세’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간을 통해 지부별로 Action Plan(앞으로 무엇을 할 지 기한별로 분류하는 도구)을 짜는 시간도 있었구요. 동기 5명이 함께 갔었습니다. 그래서 더 실질적인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 2학기 때 사회부 모임을 하게 되는 계기도 됐었구요. 무엇보다도 강의가 좋았습니다.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에 대해 인상 깊었던 순간은 이 때가 처음인데, 특히 이시종 간사님 강의를 들으면서 IVF를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생겼습니다.
원래 사회문제나 역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법학을 전공과목으로 선택했었고 이 때도 그리고 2017년 현재도 사회 제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때가 2010년 2월이니까 7년이 지났습니다. 나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조금 더 나아졌는지 계속 고민이 듭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하며 살자는 생각을 하고 있고 이 생각은 2010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당시에 함께간 동기들과 Action Plan을 짰는데 그 파일을 열어보니 여러가지가 담겨있네요. 물 아껴쓰기도 있고, 이 때가 지방선거가 있는 해였는데 부재자 투표에 대한 설명을 하자는 내용도 있고 기독교 역사 공부도 있고 등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는데 아무튼 그런 과정 모든 게 재밌었던 경험이었습니다.
3년차 1학기 (2010년 봄)
학기가 시작되고 리더로서 소그룹을 맡았습니다. 여러가지 아이디어가 있었고, 준비가 있었고 또 계획이 있었지만 결국 중요한 건 관계라는 걸 깨달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많은 신입생들을 만났던 것 같습니다. 10명 정도를 만났던 것 같은데 정작 IVF를 계속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았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아마 일기 어딘가에 적혀 있을텐데 시간이 나면 찾아봐야겠습니다.
리더가 되면 학기 중 진행되는 행사(신입생 환영행사, MT, 가두모집 등등) 중 1개의 디렉터(담당자)를 맡게 됩니다. 저는 1학기 때도, 2학기 때도 가두모집을 통한 신입생 모집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3명 정도가 한 팀이 되어 디렉터를 맡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가두모집이라는 것이 늘 반복적으로 진행되어 오는 것이라 특별할게 없을 수도 있지만 저는 가두모집을 통해서 신입생을 모으는 것이 엄청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계속 가두모집 디렉터를 맡았습니다.
가두모집 디렉터를 하며, IVF의 장점은 ‘공동체성’ 그리고 ‘좋은 사람 많음’에 있다고 보고 그 이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방법이 뭘까를 고민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얼굴이 나온, 표정 좋은 사진들을 천막 주위에 걸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고 그 사진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끌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두모집 현장에서 IVF를 소개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운영에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2, 3년차의 공강 시간을 조사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적으면 그 때 그 때 부를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 것도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3년차 여름학기 (2010년 여름)
여름수련회에 리더로 참여했습니다. 일반팀 소그룹 리더를 맡았는데 생각해보면 일정이 너무 빡빡했던 것 같습니다. 아침 기도 시간부터 저녁 집회 후 리더모임까지 그렇게 5일을 버텨야(?)했는데 보통 아침 기도모임에 가려면 5시에 일어나야했고 저녁 집회 후 리더모임은 1시쯤 끝났으니까 4시간 정도 밖에 못잔 것 같네요. 게다가 중간에 쉴 시간도 없고 원투원 시간을 건너 뛸 수도 없어서 참 피곤했던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이에 반해 부산선교는 완전 생생하게 기억이 남습니다. 이 때는 디렉터로 참여했습니다. 주 역할은 서기였는데 IVF에서는 보통 총디렉, 인력국, 지원국, 진행국 이렇게 나뉩니다. 근데 이 때 특이하게 역할을 나눴던 거 같네요. 사실 5명이 준비했었기 때문에 나누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6~70명 정도가 참여하는 수련회였기 때문에 준비할 것도 많았고 또 비용을 최소화 해야 해서 힘들게, 어렵게 준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팀웍이 좋아서 재밌었던 것 같고 저는 일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꼼꼼하게 챙기는(?) 그런 면이 있고 또 좀 더 효율적, 좀 더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었던 것 같고 덕분에(?) 눈에 들어 이후 대표가 되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 때도 챕터를 하고 패밀리(4~6개 소그룹이 모인 단위) 리더들 내에서 역할 분담을 했습니다. 그 때는 패짱 (패밀리장), 재정공동체 회계 담당, 아침 기도 모임 담당이 필요했는데 기도모임 담당을 하고 싶어서 다른 리더와 역할을 나눠서 사회 관련 기도제목으로 기도를 나누는 금요일 기도모임 담당을 했습니다.
기도모임은 평일 아침에 1시간 정도 학교 곳곳에서 진행이 되었습니다. 벤치에서 하는 경우도 있고 빈 강의실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시간 동안 개인 기도제목을 나누기도 하고 또 학교와 사회 그리고 세계를 위해 기도했었습니다.
3년차 2학기 (2010년 가을)
2학기 때는 1학기 때와 다른 변화가 있었습니다. 인원 구성에 조금 변화가 있었는데 한 해 선배들이 대부분 IVF 활동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자발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학기 중에 재정공동체라는 걸 했습니다. 용돈을 다 같이 모아서 같이 쓰는 방식이었는데 저는 3, 4년차 때 재정공동체를 했었습니다. 리더 그룹별로 4~6명이 함께 재정을 사용했었고 대체로 매주 쓸 만큼의 돈을 받아 쓰고 그 외에 추가로 필요한 돈은 같이 논의 해서 사용했었습니다. 용돈을 함께 쓰는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지만, 돈을 함께 쓰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더 커졌던 것 같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돈과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어디에 쓰는지, 시간을 어디에 쓰는지가 그 사람의 가치관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의 삶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재정공동체는 서로를 더 사랑하고 더 관심 갈 수 있는 매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돈은 개인 가지고 개인이 관리하며 많이 버는 것도 개인의 몫, 적게 버는 것도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가치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때 재정공동체의 경험이 없었다면 조금 더 돈을 헤프게 쓰고 조금 더 나를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큰모임에서는 빌립보서를 통해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과 함께하는 삶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 있든 기뻐할 수 있는 삶, 누가 뭐래도 복음이 전해지기에 기뻐하는 삶 '고난 가운데 복음과 함께 사는 법.’ 바울은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기뻐했고, 그 가운데 자기자신이 살 것인가 말 것인가도 결정했습니다. 어떤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 따라 사는 삶, 끝까지 살아내는 삶.
소그룹은 조금 더 부담이 적었던 것 같고 조금 더 편했습니다. 그래서(?) 이것 저것 제가 하고 싶은 걸 많이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만원의 행복도 하고 성경공부도 5과까지 했고, 새삶길도 3과까지 했고, PBS도 2번했고, 시간관리 강의도, 중간평가도. 그렇게 이것 저것 쉬는 날 없이 했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사회부 모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주일 저녁시간에 모여서 책 나눔도 하고, 특정 주제에 대해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이 때 2010년이라 당시 주요 이슈였던 용산참사, 4대강 문제, 무상급식, 동성애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회심’을 읽고 돌아가며 발제를 해 왔습니다. 이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매주 주제를 미리 정해 관련 자료를 각자 준비해 왔고 그에 따라서 자료를 돌아가며 읽거나 영상을 본 뒤 해당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IVF 활동 전체가 자발성에 기초해서 운영되긴 하지만 다른 모임에 비해 이 모임의 자발성은 훨씬 더 컸습니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고, 더 에너지가 났던 모임이었습니다. 당시 모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매 주마다 올린 후기글에 있습니다.
http://www.cyworld.com/01037527095/4744445 - 용산참사
http://www.cyworld.com/01037527095/4756417 - 용산참사
http://www.cyworld.com/01037527095/4886553
http://www.cyworld.com/01037527095/5054496
http://www.cyworld.com/01037527095/5071195
http://www.cyworld.com/01037527095/5108762
http://www.cyworld.com/01037527095/5145572
http://www.cyworld.com/01037527095/5159888 - 사회 LGM
http://www.cyworld.com/01037527095/5184164
이 때도 가두모집 디렉터를 맡았습니다. 이번에도 조금 더 시각적인 매개물을 통해 효과를 얻기 위해 IVF를 설명하는 작은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사진과 함께 IVF모임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는데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3년차 2학기를 보내고 그 다음 학기에 계속 활동을 할 지를 정할 시기가 왔습니다. 저는 IVF를 3년차까지 하는게 좋다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마지막 두 학기 동안엔 취업준비를 하는게 필요해 보였고, IVF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시에 학사장교로 군대를 갈 생각이었고 그래서 학교는 계속 이어서 다니지만 IVF 활동을 계속할지는 고민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대표로 일 년 더 할 것을 제안받았고 그 다음해에 대표를 하게 됩니다. 직전 대표가 다음 대표를 선정하는 방식이었는데 그 때 이야기를 하며 공동체에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해 보여서 1년 더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저 같은’이란 크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는, 행정적인 일을 잘 하는 사람 그리고 또 하나는, 하기로 한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 그런 부분이 공동체에 필요해 보였고 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맡게 되었습니다.
4년차 겨울학기 (2010년 - 2011년 겨울)
대표는 동아리 회장 같은 역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 서야 할 일이 많고 외향적인 사람이 맡아 온 게 일반적이었는데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돌아보면 굉장히 부담스러운 시간이었고 그래서 더 노력하고 준비하며 열심히 살았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4년차가 된 후에 가장 먼저는 리더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 해 전에는 인터뷰를 받는 입장에서 이제는 인터뷰를 하는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인터뷰는 간사님과 4년차 3~4명이 함께 들어가서 리더지원서와 기존의 경험들을 근거로 여러 질문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1시간 동안 진행이 되고 몇몇의 경우는 그 시간이 더 길어지기도 합니다. 인터뷰라는 형식을 통해서 리더로 세워질 (보통) 한 해 후배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약 15~20명 정도 였던 것 같고 그 인터뷰가 일주일 내내 진행됐었습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인터뷰가 진행되고 그 전에 기도모임, 그 후에 인터뷰 내용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서 거의 12시가 되어서 집에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만나면서 참 사람은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한 살 많은 (또는 동갑) 사람을 판단한다는게 어려웠고, 또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중요한건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고 함께 공동체를 꾸려가는 것이라 생각 했었습니다. 인터뷰 결과로 누구는 리더가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리더가 되지 못했는데 큰 차이가 있었다기 보다 리더로 활동하게 나은지 아니면 멤버로 활동하는게 나은지를 고민하고 결정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인터뷰를 거쳐서 뽑힌 리더들과 함께 챕터를 진행했습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표가 할 역할들이 드러났습니다. 챕터는 다음학기의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할 지, 어떻게 할 지, 언제 할 지를 결정하는 시간입니다. 또한 각 안건은 만장일치가 될 때, 이의가 없을 때 통과되기 때문에 이견을 잘 조율하고 정리하는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보통 1주일 동안 매일 12시간 이상씩 진행되는데 이 회의의 사회를 봐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준비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준비하며 기도하며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 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지, 어떻게 동기부여를 할 것인지 등등등을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때의 챕터는 어떻게 진행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 후 여름학기 때 챕터는 훨씬 더 여유있게 또 편하게 진행을 했었고 의견 조율도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2월에는 대학가 학생기자학교를 갔습니다. 3년차 때 사회부 캠프를 갔었던 것처럼 이 학생기자학교에도 함께 가서 기사 작성법 등 글쓰기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의를 통해 홍보, SNS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만해도 스마트폰도 많이 쓰지 않던 시기라 SNS로 무언가를 한다는 게 낯선 때였는데 이 때를 계기로 트위터 계정도 활용하고 블로그 활동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되었습니다. IVF에서는 중앙회 차원에서 ‘대학가’라는 잡지를 발행합니다. 학생기자학교를 수료하면, 이 잡지의 학생기자 자격이 생겼습니다. 다만, 아무래도 수도권 중심이라 회의에 참여하기는 어려웠지만 재정공동체와 타 학교 탐방 기사를 작성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겨울 EBS 중보기도팀으로 참여했습니다. EBS 수련회는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은 새신자 (IVF에서는 ‘새벗’이라 부릅니다)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수련회입니다. 여름과 겨울에 각 1번씩 진행이 되었고 새신자가 속해 있는 소그룹에는 리더, 부리더가 있고 자원봉사자, 중보기도팀이 있습니다. 보통 리더는 3년차, 부리더는 2년차가 맡았고 자원봉사자는 4년차 이상, 중보기도팀은 연차에 상관 없이 맡았던 것 같습니다. 이 때는 일주일 동안 기도하는게 맡은 역할(?)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에겐 엄청난 쉼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겨울 내내 인터뷰와 챕터 그리고 리더훈련 등으로 진이 다 빠져 있었는데 기도하며 에너지를 얻고 쉴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4년차 1학기 (2011년 봄)
이 때 큰모임의 말씀은 누가복음이었습니다. 저에게는 큰모임이 일주일 중 가장 부담스러운 모임이라서 사실 말씀이 잘 기억에 남지 않았습니다. 여기 온 사람들이, 큰모임에 온 사람 한명 한명이 즐거웠으면, 기뻤으면, 누렸으면 좋겠다는 부담감이 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큰모임 준비를 4년차가 했습니다. 설교는 간사님이 하시고 그 외의 자리 준비나 광고 등은 4년차들이 했습니다. 제가 아마 광고와 마무리를 했던 것 같은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네요.
또 대표는 리더모임을 진행하는 역할이 있었습니다. 리더모임은 보통 찬양 - 말씀 나눔 - 사역보고 - 논의 이렇게 진행이 됐었습니다. 매주 열리긴 했지만, 리더들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서 더 잘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사실 IVF는 소그룹 중심의 운동체였고 그렇기에 소그룹 멤버들과 소통할 길은 리더를 통하는 길이 거의 유일했습니다. 이 때문에 리더모임 시간에 충분히 논의하고 충분히 이야기해 필요한 움직임을 이끌어 내야했습니다. IVF는 운동체였습니다. 돈을 주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고, 혜택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도 아니라 100% 자발성으로 이루어지는 활동들이었습니다. 물론 큰 고민없이 그냥 휩쓸려(?) 지내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자발성을 이끌어 내기 위해 끊임 없이 동기부여하고 움직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내야 했습니다. 그러한 자발성의 핵심은 관계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고, 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리더이고 그렇기에 그 리더들을 움직여야 공동체가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리더모임 준비를 위해 많이 노력했고 또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보통 금요일 저녁에 리더모임이 있었는데 전날엔 일찍 집에 가서 모임을 준비하고 또 금요일 점심시간에도 기도하며 준비하며 그렇게 리더모임을 진행해 갔던 것 같습니다. 특히 사역보고는 지난 일주간의 모임 참석 통계를 돌아보고 각종 광고를 하는 시간입니다. 주로 어디에 참여해 달라 어디에 참석해 달라 이렇게 시간과 에너지를 요하는 광고가 많았습니다. 그 광고들을 준비하면서 왜 해야하는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저 스스로를 설득하는 과정을 많이 거쳤던 것 같습니다. 금요일 아침 시간에는 찬양콘티와 세부적인 시나리오를 짜고, 점심시간에 센터 골방에서 기도하며 준비했고 틈틈이 오늘은 어디서 밥을 먹을지도 정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마음이 무겁고 답답하고 가난했지만 4년차 1학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비슷한 생각으로 1학기 때는 리더들을 많이 만나려고 했습니다. 돌아보니 15명 정도의 리더를 2번 이상 만났던 것 같습니다. IVF에서 만났다는 것은 보통 원투원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2~3시간 정도 여러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바로 한 학년 아래 후배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아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도 많이 가졌던 것 같고 또 리더할 때의 어려움들을 많이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친구들에게 그 시간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주로 듣는 편이고 또 제가 평범하진 않아서 저의 이야기들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에게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대표를 하다보면 앞에 서야 할 상황이 많이 있었는데 인간적인 관계가 형성된 뒤에 앞에서 섰을 때는 아무래도 말하기가 편했던 것 같습니다. 큰모임이라 리더모임 때도 그랬고 그 외에 여러 활동 중에도 조금 더 제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4년차 때는 종종 땜빵으로 아침 기도 모임을 진행했었습니다. 모든 모임 중에 기도 모임이 제일 마음 편했습니다. 이 시간은 제가 무엇을 더 많이 말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편했던 것 같습니다. 갑자기 기도 모임 담당자가 참석하지 못했을 때 준비할 틈 없이 땜빵을 하게 되다보니 어느 정도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시간에 함께 해 달라는 기도 - 시편이나 그날 QT 말씀 묵상 - 말씀을 두고 기도 - 서로의 기도제목 나눔 - IVF 행사나 상황에 관련 기도 - 같은 소그룹 사람들을 두고 기도 - 연차별 기도 - 캠퍼스를 위한 기도 - 한국 사회를 위한 기도 - 북한, 통일을 위한 기도 - 세계의 특정 상황을 두고 하는 기도 - 오늘 하루를 두고 기도. 이렇게 기도를 했었고 이 순서(?)를 따라서 요즘도 기도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습관이 된 것 같은 기도 순서. 3년차 때도 그랬지만 이 때도 기도 모임을 인도하다보면 기도할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기도라는 것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니 기도를 할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긴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다보면 많은 일이 생기고, 많은 일을 듣게 되고, 또 많은 사람을 알게 되는데 그 모든 것을 두고 이야기하다 보면 늘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겠지만.
학기 중 모임 외에도 보통 매월 1회 정도 있는 특별(?) 행사가 있습니다. 가두모집이나, 신입생 환영회, 종강파티, 1박, 리더캠프 등등. 행사에 대해서는 기획안을 확인하고 목적 및 방향성을 점검하는 정도에서 더 이상 개입하지는 않았습니다. 보통 디렉터는 3년차가 맡는데 이 때 선배 연차가 개입하면 자발성이 약화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또 역량이 부족하다면 부족한대로 그 행사를 치뤄보아야 성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로는, 어느 행사에서 운전을 하며 오가는 길을 돕다가 타이어가 터져서 생을 마감(?)할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 리더캠프는 저와 또 한 명의 동기가 디렉터를 맡아서 준비했습니다. 리더캠프는 보통 1박 2일로 리더들만 함께 MT를 가는건데 이 해에는 마침 쉬는 날이 겹쳐서 2박 3일로 지리산 둘레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같이 걸으면서 이야기도 많이하고 또 저녁 시간에는 나는요(각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는 시간)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행사 준비하는 이골이 나서 거의 2시간 만에 숙소 예약과 교통편 확인 등 준비를 마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당일 가보니 걸어야 할 거리가 너무 길어서 다들 고생이 많았습니다. 교통비, 숙소비, 세끼 분의 식사를 포함해서 회비 5만 원 씩만 모았는데도 숙소는 좋았고 음식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만 지금 생각해도 엄청나게 걸었던 것 같습니다.
4년차 여름학기 (2011년 여름)
이 때 여름 수련회는 EBS 자원봉사자로 참여했습니다. 이것 저것 일하며, 간식 만들고 세팅하고, 음향 만지고 그렇게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유독 동갑이 많아서 재밌게 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이 해 여름에는 다른 활동을 최대한 안하려고 했습니다. 일이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도저히 안 돌아갈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아서 어떤 행사를 맡아서 하기 보다는 PBS(성경공부) 모임과 책 모임을 했었습니다. 로마서 PBS를 시작해서 몇몇과 함께 나누었고, 책 모임에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웰컴투 하나님 나라’, ‘역사를 바꾼 복음주의 학생운동이야기’, ‘가치란 무엇인가’, ‘다시 찾은 법률가의 소명’을 읽고 나누었습니다.
사실 IVF는 책을 많이 읽는 것으로 유명한데 저는 신앙서적을 그 때까지 10권도 안 읽었던 것 같습니다. 못 읽었다고 생각하긴하는데 아무튼 그래서 그 때 (사실상) 처음으로 신앙서적들을 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것들, ivf에서 하고 있느 것들이 참 귀하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칠 때 이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때 했던 고민들을 떠올리며 힘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8월엔 전국대표자대회가 있었습니다. 전국의 대표들이 모여 강의를 듣고 또 나누는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조 안에서 마음껏 웃으면서 푹 쉬었던 것도 좋았고 운동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고민할 수 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복음, 세상, 공동체 라는 개념이 막 등장한(?) 시기라서 그 개념들을 배우며 이후 살아가는데 큰 영향을 줬던 것 같습니다. 복음을 아는 것, 세상을 아는 것, 공동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또 그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진로를 선택했고 어디에 살지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챕터는 저 나름대로는 재밌게 그리고 큰 어려움 없이 진행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때는 진행을 하는데 좀 여유가 생겨서 발언을 많이 하지 않거나 소수인 사람의 의견을 많이 들어보려 했습니다. 소수자까지 포함해 함께 갈 수 있어야 멤버들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또 그럴 때 동력이 생길 것 같았구요.
예비리더인터뷰도 진행했습니다. 예비리더인터뷰는 2년차를 대상으로 진행되었고 리더인터뷰와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했습니다.
리더캠프로 일주일 동안 포항 바닷가에 놀러갔습니다. 날씨가 안좋아서 바다에서는 많이 못놀았지만, 안에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뭐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고 그냥 같이 시간을 보냈다는 기억만 남네요.
4년차 2학기 (2011년 가을)
이 때는 2년차들과 함께 소그룹을 했습니다. 보통 4년차는 소그룹을 맡지 않는데 챕터를 거치면서 이렇게 진행이 되어서 2년차들과 함께 한 학기 소그룹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꼬박꼬박 모일 수 있는 것 자체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소그룹을 하게 되면서 일주일에 저녁 시간 모임이 4번이 되었습니다. IVF에서는 기본적으로 3번 모임이 있습니다. 보통 소그룹, 큰모임, 연차모임 이렇게 세 번인데 이 때 저는 여기에 4년차 모임까지 더 해서 4번이 되었습니다. 소그룹 모임이 그냥 가면 되는 모임이 아니고 준비를 해야 하는 모임이라서 힘들긴 했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재밌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리더모임은 1학기와 크게 다른 점은 없었는데, 리더일지를 메일로 받게 되면서 일이 더 많아졌던 것 같습니다. 리더일지는 리더들이 자신과 소그룹 멤버들의 상황과 기도제목을 적은 글입니다. 매주 1번 제출을 해서 4년차들이 봤었습니다. 그런데 리더일지를 파일로 받으면서부터 그 내용을 보고 이메일로 피드백을 해 주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시간이 엄청 걸렸던 기억이 납니다. 만나서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한 거긴 한데 참 그 때는 무슨 에너지가 그렇게 많았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 때는 다음 대표를 생각하고 결정하는데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썼습니다. 제가 대표가 된 것처럼 저도 다음 대표를 뽑아 했기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2학기에도 리더들은 1번 이상씩 만났고 소그룹 멤버들은 3번 정도 이상 만났던 것 같습니다. 이 때는 주로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진로가 중요한 것 같고 IVF 이후에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게 꼭 필요해 보였습니다. 앞에 적은 것 처럼 저는 IVF는 3년 정도만 하고 그 이후에는 진로 준비를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3년차들이 되도록 더 하지 IVF 활동을 하지 않도록 유도(?)하려 했었습니다.
마지막 겨울방학 (2011년 - 2012년 겨울)
겨울 수련회에서는 지원국 디렉터를 맡았습니다. 지원국에서 제가 한 일은, 식재료 준비, 간식 준비, 분리수거하기, 쓰레기 비우기, 정수기 물 채우기 (물 한 번 대박 쏟음), 밥사들과 소통, 들어오고 나가는 아이들과 교통편 소통, 토크쇼와 홈커밍데이 소망의 밤 담당. 그 때 수련회는 이상하게 엄청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잠도 많이 오고 뭘 특별히 안해도 피곤했던 시간들. 그렇게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모임을 마치고 수련회가 끝나뒤에는 군에 가기 전까지 실컷 책을 봤습니다.
1월 아니면 2월에 리더 내림식이 있어서 참석했었고 또 2월에는 졸업예배에 참석 했었습니다. 문서학교에도 갔었네요.
졸업예배 때 마지막(?)으로 소감을 나누는데요. 그 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많이 부끄럽지만 그 당시 미리 준비했던 내용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올립니다.
[졸업예배]
일단 저의 상황, 저의 근황을 먼저 나누자면, 아시다시피 취직을 했습니다.
입혀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으로 취직했습니다.
합격 축하한다고.. 졸업증명서 보내라는 문자가 어제도 왔던데....
종업원 수를 기준으로 했을 때 국내 업계 순위 3위의..
3년 계약직으로 4대보험이 보장되는 곳..
연봉은,, 2천에 주5일제에 출퇴근..
경제가 어렵다, 일자리가 어렵다 하는데 그거 다 거짓말인거 같고,, 누구나 다 취직할 수 있는거 같아요. ^^^^^^^^^
15주간 다이어트 및 체력 훈련을 받고 난 뒤에 비행기 소리가 크게 나는 곳 근처로 발령 받게 됩니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아저씨라 불리우는 사람이 됩니다.. 군인 아저씨__
일정(Take my life를 펼치시고.)
3월 12일 월요일 DPM이 끝난 뒤 악수식이 있습니다. 손을 깨끗이 씻고 DPM 장소로 오시면 됩니다.
3월 20일 경 FB에 편지 보낼 주소가 공개될 예정입니다.
5월 11일 금요일 오전 11시 경 신관 3층 도착 예정 / 2박3일 휴가.
일년 중 가장 중요한 날 6월 27일이나 그 다음날 임관식이 있습니다.
7월1일부터 1주일 휴가_ 정식 취업이고 모든 온라인 활동에 복귀합니다.
세 달 전에 준비한 멘트는 여기까지구요.
이제부턴 어제 준비한 건데, 해주고 싶은 말 보다..
내가 이렇게 살고 싶다는
소망을 나누고 싶어졌습니다_^^.
BLC가 끝나고 학사의 삶이 이미 시작되었는데.
좋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고 그렇네요.
이제 2주 뒤면
진짜 진짜 시작인데
동일하게, 어떤 삶이 펼쳐질 지 기대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나마 3년 동안은 정해진 테두리 안에 살게 되지만 그 이후에 삶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된 것 없고,, 이제 앞으로는 그런것들 투성이라...
어디서 살지, 무엇을 할지, 누구와 살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시간들인데..
어디서 살아가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크심을 기억하며 그 안에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배려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 뿐 아니라 내가 사는 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 그렇게 변화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 못하는 일에 너무 눌리지 말고, 이미 하고 있는 일을 즐기며 그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졸업식처럼, 인생은 너무나 귀하지만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의 연속인데 매순간 매순간 알차게..
마음껏 즐거워하고, 마음껏 슬퍼하고..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졸업식., 학업을 마쳤다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이자 캠퍼스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것인데
또 한편으로는 파송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캠퍼스에서 ivf 운동을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캠퍼스 선교사라면,
사회로 나가는 학사들 한 명 한 명도 세상 속 선교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고 철없는 새내기 학사라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건지 모르겠는데,,
월급을 쓰는 것, 시간을 사용하는 것, 군인 아저씨들과의 관계, 사회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 군대 이후의 진로를 정하는 것, 교제하고 결혼하는 것..
당장 내 눈 앞에 펼쳐질 이런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또 그 과정 속에서 여러분들과 이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함께 고민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요즘 밀월일기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자매들은 절대 읽으면 안되는 금서,,, 읽다보면 토할거 같아서.. 식후 30분 이내에는 절대 읽으면 안되는,, 책인데
그 책 머리말에 이렇게 적혀있더라구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이야기(큰 이야기)를 품고 사는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그 큰 이야기를 닮은 작은 이야기를 짓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밀월일기)
여러분의 작은 이야기도 듣고 싶고, 나의 작은 이야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리더든 그렇지 않든 ivf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해나가는 동역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학사가 되어서도, 대표였던 형, 오빠가 아니라 어떤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해나가는 한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고
또 함께 이야기 나누고 함께 고민하며.. 동역 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한 사람과 4년간, 3년간, 2년간, 1년간.. 함께 해준 많은 분들..
많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는데
다들,,
참.. 미안하고 아쉽고,, 또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책 많이 본 것 외에, 다음 대표한 후배를 많이 만나서 여러 가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제가 인수인계 과정 없이 바로 대표를 하게 되어서 힘들었었는데 그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자 그런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2달 동안 10번을 만났던 것 같고 여러 자료와 또 노하우(?)를 전수해 주었습니다. 뭘 전해줬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네요.
군 생활 1년차 (2012년)
3월에 입대를 했고 5월에 2박 3일 휴가를 나왔고 6월 27일에 임관식을 했고 그때 3박 4일인지 4박5일인지 휴가 있었고 7월에 특기교육을 받고 7월 말에 사천으로 갔습니다.
이 기간에 참 많이 만났었습니다. 그리워서 많이 만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편지도 많이 썼던 것 같습니다. 엄청 많이 써서 남들은 제가 여자친구 있는 줄 알았다고.. 편지지가 모자라서 달력 뒷면에도 썼던 것 같은데 아무튼 엄청 썼습니다. 사실 사람이 그리운 것도 있었지만 글을 너무 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기초군사훈련을 받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게 글을 못 읽고 글을 못 쓰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성경책은 읽을 수 있어서 구약을 다 봤던 것 같고, 일기장이랑 노트에는 원없이 무언가를 썼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2012년에는 계속 만나고 만나고 또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겨울 수련회 밥사로 갔습니다. 겨울수련회 마다 보통 그 전 해에 졸업한 사람들이 가서 밥을 해줍니다. 그렇게 회비 내고 밥 해 주러 온 사람을 밥사라고 부르는데 저도 2012년에서 2013년이 되는 겨울에 밥사로 갔었습니다. 휴가 내고 한 1주일 정도 있으면서 밥을 했는데 다시 돌아와서 휴유증이 생길 정도로 계속 밥만 했었습니다. 3끼를 다 해야했기에 설거지 하고 돌아서면 밥 때, 또 돌아서면 밥 때라서 정말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한 동안은 밥 먹을 때 이 밥과 반찬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오는지 머릿속에 맴돌 정도로.
이 무렵 즈음에 진로 고민을 하면서 또 공동체에 대한 고민도 했던 것 같습니다.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것 좋아보였고 또 필요해보였습니다. 다른면도 있겠지만, 군 안에서 장교들이 근처에 살며 함께 어울려 가는 모습이 좋아보였고 또 그렇게 살면 내 삶도 함께 할 사람들의 삶도 풍성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렇네 내가 좋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은 좋지만 그 너머의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 또한 한국 사회의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하는데 그 속에서 마주할 한계들은 어떻게 극복할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 고민이 이어져서 지금의 진로를 결정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공동체가 중요하고 또 필요하고 그 안에서 대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대안이 공동체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만, 나는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일이 조금 더 힘들어보이기도 했고 또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해 보였고 또 제가 생각하는 가치를 실현하는게 필요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일궈 가는 것도 하나님 나라 운동이고 제도를 바꿔가는 것도 하나님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둘 간의 우열은 없었고 무엇을 더 먼저 할 것인가만 선택했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동시에 하기엔 어려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 비서 1년차 (2016년)
원투원 그룹을 알게되었습니다. 아마 2013년이나 2014년에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원투원 그룹은 IVF했던 졸업 학사들이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를 알리며 학생이나 다른 학사와의 만남을 도와주는 페이스북 그룹입니다. 이곳을 알게 되어 정치나 정책을 만드는 일을 하시는 분이 있는지 찾아봤는데 잘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에는 군인이었기에 공군 장교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라는 글을 올렸었습니다. 이후 국회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시 관련 글을 올렸었고 그 글을 보고 몇명이 메시지가 와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한 그 그룹을 통해 여의도 직장인 모임을 갖게 되어 여의도에서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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