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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까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Let your Life Speaking (2014.3.21.-22.)

 


제목만 봐도 지금 봐야 할 책.

 

첫 장에 이렇게 적혀 있다.

 

한밤중에 깨어나

지금 내 삶이 정말 내가 워하던 것일까?’ 물으며

잠을 설쳐 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2000년에...쓰여 진 것 같다. 왠지 풍기는 포스는 1960년쯤 쓰여진 거 같음;

 

 

1. 인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라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 (Let your life speak).”

그 날은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물론, 그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이다

최고의 진리와 가치가 당신의 삶을 이끌도록 하라. 매사에 최고의 진리와 가치를 기준으로 행동하라.’

당시 나에게는 바로 그런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그 말의 의미를 더욱 구체화할 수 있었다. 나에게 네 인생의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라는 말은 바로 마틴 루터 킹 2, 로자 파크스, 마하트마 간디, 도로시 데이처럼 숭고한 목표를 가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내가 찾을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을 늘어놓고는 그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대부분 어처구니없는 결말이었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언제나 그 결과는 비현실적이었고 진정한 나 자신을 왜곡하는 것이었다. 원인은 나의 내면에서 밖으로 뻗어나간 삶이 아니라 바깥 세계에서 안으로 밀려들어온 삶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마음에 귀 기울이기보다 영웅들의 인생을 흉내내는 고상한길을 찾았던 것이다. (p14-15)

 

나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떤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바람직한 일, 의미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내 마음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기 전에, 인생이 당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에 귀 기울여라.”

당신이 어떤 진리와 가치관에 따라 살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당신이 어떤 진리를 구현하고 어떤 가치를 대표해야 할지 인생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들어 보아라.”(p15-16)

 

그런게 있는 것 같다. 남이 시켜도, 돈을 준다고 해도 못할 일을 굳이 나서서 하고 싶은 마음. 마치 지금 이렇게 글 읽고, 글을 정리하는 것처럼. 내 마음 속에서 바라는 것, 추구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듣는데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 참모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참모습이 내가 원하는 인생의 모습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은 내 의도가 아무리 진지하다 할지라도 결코 참된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p18)

 

 

2. 이제 나 자신이 되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한 까닭에 소명의 의미에 대해 맨 먼저 배웠다. 신 앞에서 겸허하고 세상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정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적 전통에서 자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내가 깨달은 소명의 개념은 왜곡된 것이었다. 소명이란 자신을 향해 외부에서부터 들려오는 도덕적인 요구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뭔가 지금의 자기 모습보다 더 훌륭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상을 그리고 있었다.

소명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자아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시작된다. 죄 많은 자아는 이라는 외부의 강제적 힘을 동원해 바로잡지 않는 한 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늘 내 인생을 잘 꾸려 나가기에는 부족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졌다. 내가 기대되는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차이 때문에 죄의식을 만들어 내면서 그 격차를 좁히기 위해 몸부림치느라 지쳐갔다.

오늘날 내가 이해하는 소명의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소명이란 성취해야 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소명의 발전이란 얻기 힘든 상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소명은 나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되라고 저쪽 바깥에서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본래 타고난 그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 신이 주신 본연의 자아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온다.

그것은 기묘한 선물이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던 때의 바로 그 모습인 자아라는 선물이다. 이것을 선뜻 받아들이기란 다른 사람으로 변신을 꾀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나는 그 어려움 때문에 때로 그 선물을 외면하거나 감추어 두기도 했고, 그것으로부터 달아나거나 함부로 써 버리기도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가! (p29-30)

 

소명은 멀리 있는게 아니구나. 내 안의 목소리, 내 안의 소리를 듣는 것부터.

 

나의 손녀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런존재로 이 땅에 온 것이었다. 아이는 장차 세상이 부여할 어떤 이미지로 만들어질 재료로 태어난 게 아니었다. 아이는 이미 자기만의 형상을 선물 받았으며 자기만의 숭고한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p31)

 

이미 가지고 있는 것. 활용.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재능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난다. 그래놓고는 인생의 절반을 그 재능을 내버리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미혹되어 잊어버리고 산다. 젊은 시절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는 별 상관 없는 기대들에 둘러싸인다. 우리의 자아를 알아 주기보다는 어떤 틀 안에 끼워 맞추려는 사람들의 기대 말이다.

가정, 학교, 직장, 종교 단체에서 우리는 참자아를 버리고 사회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교육받는다.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와 같은 사회적 압력에 짓눌려 자기 본래의 형상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질 때도 있다. 또한 우리 자신 역시 두려움에 내몰린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참자아를 배반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우리는 인생의 전반부를 살면서 본래 타고난 재능이 있었음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다가 혹시라도 눈을 뜨고 깨달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되면, 나머지 후반의 인생을 바쳐 원래 갖고 있던 선물을 되찾기 위해 애쓴다. (p32-33)

 

이 즈음에 저자의 어린 시절 장래희망 이야기와 어릴 때 놀던 모습이 적혀 있다. 다 적기엔 너무 많네. 내 이야기를 적자면,

 

아마 6살 때 쯤? 나의 첫번째 장래희망은 방송국 PD였다. TV를 보면 항상 프로그램의 마지막에 출연자와 스탭의 이름이 떴는데 그 때 제일 마지막 줄에 있던 연출을 하고 싶었다. 총 감독. 그땐 아마 이런 마음이었던 것 같다. 드라마를 찍기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장소를 예약하고, 일정을 계획하고, 빈틈없이 진행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고, 이렇게 일이 돌아가게 하기 위한 조직을 꾸리고 역할을 나누고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행정적인 일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틀리지 않게, 생각한 대로 딱딱 진행되고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것에 흥미가 있었던 것 같다. 카메라 찍는 것도 재미 있었다. 사진찍는 것도 흥미가 있었고, 가끔 만질 수 있던 캠코더로 녹화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 네모난 화면 안에 내가 원하는 장면을 담을 수 있다는게, 또 기록할 수 있다는게 좋았던 것 같다. 6살짜리가 뭘 안다고.. 쓰다보니 희안하네; 물론 지금은 방송국 PD가 될 생각이 전혀없다. 완전 힘들 것 같다. 머리가 깨지지 않을까. 밤새는 직업은 일단 PASS.

그 다음 장래 희망은 야구선수였다. 내가 야구를 알게된 게 아마 6~7살쯤이었다. 그러니까 94~96년 사이? 내 기억에는 그즈음해서 대구에 연고를 둔 삼성 라이온즈 성적이 안 좋았다. 항상 하위권. 야구장에 가서 봐도 지고, TV로 봐도 졌다. 그래서 삼성이 이기는데 도움이 되는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아마 투수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동네에서 야구를 하면 투수로 던질 때 더 잘 되고 재미있었다. 학급문고에 삼성에 도움이 되는 투수가 되고 싶다는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그다음 장래 희망은 공무원(영혼없는.) 그다음엔 고등학교 다닐 때 바뀌었는데 법조인? 변호사?(사회제도를 만들어 가는 일을 하고 싶었다. 의사가 사람 몸을 고친다면 변호사는 사회 제도를 고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 했었다.) 그 다음은.. -ing ㅎㅎ;

 

그리고 어릴 때 놀던 모습은, 5살 이전에 놀던 기억은 없고, 6살 땐 자전거 탄 기억밖에 없다. 7살 이후로는 레고나 로봇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장난감 자동차도. 장난감이 많아서 항상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서 놀았던 것 같다.

로봇이 여러개 있으면 각각의 역할이 있었다. 착한편 나쁜편, 얘는 대장이고 얘는 배신하는 사람이고 ㅋㅋ.. 레고를 가지고 놀 때도, 그땐 사람이 더 많았다. 40? 걔들도 다 역할이 있었다. 역할에 따라 드는 무기도 다르고, 갑옷도 다르고, 차를 타는 사람도 있고. 자동차도 마찬가지. 레이싱하는 차가 있었고, 군대차량이 있었다. 주로 피난가는 시나리오가 많았던 것 같다. 레토나로 추정되는 짚차가 앞장을 서고 다른 일반 승용차들이 이어서 지나가고.. 그러다가 갑자기 다른 군대차량이 쳐들어오고 등등의 시나리오.

 

책도 많이 봤다. 글을 늦게 배운 덕분에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틈만나면 읽었다. 주로 위인전을 읽었다. 거의 위인전만 읽었다. 몇 번이고 돌려 읽었다. 특히 장군들은 한 10번씩 본 것 같다. 어디 차타고 놀러 갈 땐 광개토 대왕이나 강감찬 장군이나 을지문덕 장군 위인전이 손에 들려 있었다. 또 다른 책은, 그림책을 자주 봤다. 동물이 나오고 백설공주가 나오는 그럴듯한 그림책은 잘 보지 않았고 월리를 찾아서같은 류의 사람 많이 나오는 그림책을 좋아했다. 한쪽을 펴놓고 한참 동안 멍하니 보면서, 아 여기서는 이런 이야기가 펼쳐지겠구나, 이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여기선 이런 일이 있구나를 상상했다. 또 다른 그림책(이름은 기억이 안나는.)은 중세의 성, 타이타닉호 내부, 지하철 내부, 유전 내부, 기차 내부, 우주선 내부, 비행기 내부 등을 그려둔 책이었다. 거기에도 사람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걸 보면서도 아 이 사람은 밥을 먹고 있구나, 여기서는 잠을 자면 되겠다, 여기는 조종석이구나..이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역시 서양사람들의 생각은 쫌 다른 것 같다. 우리나라 동화책들은 하나 같이 뭔가를 이야기해주려고 하는데, 내가 봤던 책들은 내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도록 유도하고 있으니.. 암튼 이런 책을 주로 읽었다. 삼국지도 많이 읽었고.

 

그리고 쫌 이상한것도 했는데. 계약서를 썼다. 계약서를 써서 1, 2, 3... 조문을 적고 싸인을 하고. 동생이랑 약속을 할 때 이렇게 했다. 이렇게 적어두는게 재밌었다. 내가 유리했으니까 그랬겠지만. 계약서를 본 적도 없는데 어디서 배운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때 쯤? 신문기사를 보고 사설을 잘라서 공책에 붙여놓고 기사에서 말하는 제도의 문제점이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에 대해 적었다. 몇 번 안하긴 했는데 이런건 또 어디서 배웠나 모르겠다.

 

 

인간의 자아가 지닌 본성 역시 능력과 한계를 함께 지니고 있다. 자기가 가진 재료에 대한 이해 없이 소명을 구한다면 그 인생은 아름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비롯한 주위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무언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에 몸 바치면서 꾸며대기를 해봐야 아무 소용 없다. 소명과도 전혀 상관 없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 본성을 유린하는 무지하고 건방진 시도이며 결과는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p38)

 

어둠의 경험은 진정한 나의 자아로 돌아오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내가 빛 속에 머무르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나는 또 다른 이유 때문에 사실을 밝히고 싶다. 늘 그래왔듯이 오늘날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데 우리 어른들은 자기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꼭 감추어둔 채 그들을 모질게 대한다. 젊은 시절, 내게 자신의 어두운 경험을 얘기해 준 어른은 드물었고 대부분은 성공만 거듭해 온 것처럼 행동했다.

이십대 초반, 내게도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을 때 나는 나만 홀로 구제불능의 실패를 겪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인류가 참가하는 여행에 나도 함께 승선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내 여행 이야기 역시 다른 사람들의 것과 별 다를 게 없다. 단지 나는 나의 여정과 고생스런 경험 몇 가지를 자세히 얘기함으로써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소명에 대한 통찰력을 이끌어 내고 싶다.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에게 정직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다. 또 한편으로는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조금씩, 다른 개인적 경험이 자아와 소명에 대해 일러주는 바가 많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싶어서이다. (p42-43)

 

여기에 바로 소명을 찾아가는 길에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복잡성과 이중성에 대한 교훈이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엉뚱한 이유를 걸고 옳은 행위를 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대학을 떠난 행위는 옳았지만 대학의 부패때문이라는 이유는 틀린 것이었다. ‘학자로서의 자질 부족이라는 진짜 이유는 당시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두려운 것이었다. (p54)

왠지 대구를 떠나온 것도 이런 비슷한 게 있는 것 같다. 타지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보다 주변 사람들, 안전한 곳에서 떠나 오는게 내게 더 큰 깨달음을 주는 것 같다.

 

소명을 향한 여행 중 겪게 되는 회의와 우울증을 극복함으로써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즉 자기를 돌보는 것이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나의 유일한 재능,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재능을 잘 관리하는 책무일 뿐이다. 아무 때라도 우리는 참자아에게 귀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보살핌을 줄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많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p59)

 

나를 잘 돌아보는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하는 길.

 

하지만 그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것 때문에, 사회 운동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은 중대한 결정을 한다.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삶을 살 것을 결심한다. 더 이상 내면에 깊이 간직한 진실과 상반되는 외면의 방식을 가장하며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진정한 자아를 주장하며 그것을 표출하며 살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은 사회 변혁의 파문을 일으킨다. 수백만 명의 자아를 위해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p61)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차별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디서 그런 용기를 얻는가? 로자 파크스와 같은 사람들의 인생을 살펴보면 답은 간단히 나온다. 이런 사람들은 처벌의 개념을 바꾸었다. 그들은 남이 가하는 처벌보다 자기 스스로를 비하함으로써 스스로에게 내리는 처벌이 더욱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자 파크스 이야기를 보자. 그녀가 버스 앞자리에 앉자 얼마 후 경찰관이 차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거기 계속 앉아 있으면 당신을 감옥에 집어넣겠소.”

그렇게 하세요......”

로자 파크스는 아주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내가 사십 년 넘게 스스로를 가두었던 감옥에 비하면, 벽돌과 철망으로 만들어진 당신네 감옥이 뭐가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나는 이제 막 인종차별이라는 제도를 거부함으로써 그 감옥에서 빠져 나온걸요.”(p64-65)

 

세상은 자신을 위해서 또 사회와 정치적 활동을 위해서 순례에 나설 열정과 인내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세상은 지금도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진리를 기다린다. 나의 진리, 당신의 진리, 우리의 진리. 그 진리는 우리 각자가 이 땅에 처음 올 때 씨 뿌려진 것이다. 그 진리를 잘 경작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인류의 진정한 소명이라고 나는 믿는다. (p67)

 

 

3. 길이 닫힐 때

 

미국인의 신화는 한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에 대한 것이다. 서부개척시대를 열고, 빛의 속도를 넘어서며, 달에 사람을 착륙시키고, 현실 공간이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쓸모없는 것들로 가득하게 된 순간, 사이버 공간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불가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희망이라는 미국의 유산을 소중히 생각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불가능은 없다는 생각만을 고집한다면, 길이 닫힐 때 일어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자꾸만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p80)

 

우리나라에도 이런 신화가 있지 않나.

 

세상에는 그렇게 되어야 할 의무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내 능력 밖의 일인 경우가 있는 법이다. 만약 내가 본연의 나와 상관없는 어떤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면, 한동안은 남에게나 나에게 근사해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한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은 결국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맞는다. 나 자신과, 남을, 우리의 관계를 왜곡시키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이 좋은일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 큰 해악을 끼치고 말 것이다. 내가 나의 본성, 관계의 본성이 아닌 어떤 일을 하려고 덤빈다면, 그 순간 나의 등 뒤에서 길이 닫힐 것이다. (p86)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후는 소위 탈진이라는 상태이다. 대개는 너무 많은 것을 주려는 데서 나오는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내 경험상 탈진은 내가 갖지 않은 것을 주려고 할 때 나오는 결과이다. 탈진은 분명 공허함이지만 내가 가진 것을 주는데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주려고 해도 아무 것도 없음이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 내 본성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선물이 나의 참다운 본성, 유기적인 실체 속에서 생성된 것이라면 내가 그것을 주어 버린다 해도 스스로 다시 생겨날 것이다. 또한 그러한 베풂의 결과는 탈진이 아니라 비옥함과 풍요로움이며 나를 새롭게 할 것이다.

오직 내안에 자라지 않는 어떤 것을 주려 할 때, 그 행위는 나를 고갈시키며 다른 사람에게도 해가 된다. 강요되고, 기계적이며, 실체가 없는 선물은 해악만 불러온다. (p90)

 

그런 것 같다. 어떤 건 조금만 해도 힘들고, 어떤 건 아무리 해도 힘들지 않음. 희안하다.

 

내가 알고 있는 신은 우리가 이상적인 자아에 도달하도록 어떤 추상적 기준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단지 우리가 창조된 본성, 즉 우리의 능력과 한계를 그대로 존중하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그렇지 않은 삶을 살려 할 때 현실의 힘이 우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신이 우리를 인도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바로 우리 등 뒤에서 길이 닫히는 것이다. (p91)

 

도덕과 그 결과물은 신이 만든 현실의 구조에 이미 녹아 들어가 있다. 도덕 기준은 우리가 손 내밀어 잡아야 할 무엇이 아니며, 도덕적 결과는 우리가 기다려야 할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자아와 타인, 세상의 본성을 따르는지 거역하는지를 지켜보면서.

능력과 한계를 지닌 우리 본성의 실체에 맞추어 살려는 노력이야말로 매우 도덕적인 삶의 방식이다. 존 미들턴 머리는 이 진리를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전통적인 선의 개념에 도전하고 있다.

선한 사람이 선해지는 것보다 완전해지는 것이 더 나음을 깨닫는 것은, 그가 이전에 지녔던 올바름이 화려한 면허증이었던 데 비하면 험하고 좁은 길로 들어서는 것과 같다.”

내가 아는 신은 만물의 본질인 근원 시스템에 고요히 거하신다. 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애굽기 3:14).” 모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신은 도덕 규범이 아닌 본질적인 존재와 자아에 가까운 분이었던 것이다. 내가 믿는 바대로 우리가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면 우리가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 역시 똑같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p92-94)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철학이야기. 존재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것 같다. 율법이나 규정이 아닌 존재. 죄가 아닌 본성도 있다. 선한 본성도 있다는 걸 기억하자.

 

서로 상대의 한계와 책임을 짚어 주는 대신 재능의 반대편을 보라고 권한다. 어떤 장점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영혼의 구멍을 채우려는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구멍에 대해 잘 알아서 거기에 빠지는 걸 피해감으로써 더 나은 교사가 될 수 있다. (p95)

 

상대방의 장점 찾기. 장점이 있으면 약점이 있기 마련이고, 약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기 마련이다.

 

등 뒤에서 길이 닫힐 때 단지 그것을 어떤 전략상의 실수에서 빚어진 결과로 치부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내가 더 똑똑했더라면, 또는 내가 더 강했더라면 문이 그렇게 쾅 닫혀 버리진 않았을 텐데. 그러니까 내가 더 노력하면 닫힌 문을 쳐 부술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유혹이다. 길이 닫히는 것에서 어떤 안내를 얻지 못하고 계속 저항한다면 내 본성에 있는 한계를 무시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내가 타고난 재능을 무시하는 것이며 참자아를 망가뜨리는 것이다. (p97)

 

얼마전에 읽은 크리티컬 매스와 다른 내용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그 책에서도 각자 고유의 크리티컬 매스가 있을 거라도 얘기를 했던 것 같다. 뭐든 다 된다가 아니라.

 

문이 닫힐 때면 나머지 세상이 열린다는 역설이다. 우리는 닫힌 문을 두드리는 걸 그만두고 돌아서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뒤쪽에 있는 다른 문에 다다른다. 그러면 넓은 인생이 우리 영혼 앞에 활짝 열려 있다. 문이 닫히면 방안에 들어갈 수 없지만, 그것은 곧 그 공간을 제외한 다른 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p98)

 

그게 안되면, 그거 빼고 나머지는 다 되는 것.

 

열리지 않음에 대한 내 걱정, 그 걱정 때문에 나는 계속 닫힌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 걱정에 가려 숨겨진 비밀을 보지 못할 뻔했다. 나는 이미 내 새로운 인생의 땅을 딛고 서 있었고 내 여행의 다음 행보를 내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저 몸을 돌려 내 앞에 놓인 풍경을 보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인생을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반대의 것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하며, 한계와 능력 사이의 창조적 긴장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본성을 왜곡시키지 않도록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타고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믿어야 한다.

길이 닫힐 때면 불가능을 인정하고 그것이 주는 가르침을 발견해야 한다. 길이 열릴 때면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우리 인생의 가능성에 화답해야 한다. (p99)

 

좋은데 너무 애매하고 추상적이다. 어렵다. 한계와 능력을 어떻게 아나?

 

 

4. 모든 길은 아래로 향한다

 

첫째,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진실을 얘기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내가 바라는 생각을 얘기했다면 그녀의 마음을 감동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는 속임수 감지기가 그냥 작동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예민하게 작동한다.

둘째, 우울증은 종교적이든 과학적이든 어떤 가치에서 나오는 도식적이고 단순한 대답 대신 우리 문화를 무시하는 신비를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신비는 사람 마음 속 깊은 경험 하나 하나를 둘러싸고 있다. 자기 마음의 어둠 또는 빛을 향해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는 신의 궁극적인 신비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신비를 그저 설명해야 할 수수께끼나 해결해야 할 문제로 바꾸어 놓으려 한다.

왜냐하면 말끔히 해결해 낼 수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를 강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비에는 결코 해답이 없다. 신비는 다 풀리는 거라고 억지를 부리면 인생은 더 진부하고 더 희망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신비의 해결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니까. (p109-111)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게 있다. 사람의 한계가 있다. 열심히 하면 뭐든 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은 것 같다.

 

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쓸모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p115)

 

........

 

나의 치료사는 몇 시간 동안이나 내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난 뒤에 내 인생의 회복을 도와 줄 이미지를 하나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우울증을 당신을 망가뜨리려는 적의 손아귀로 보는 것 같군요. 그러지 말고 당신을 안전한 땅으로 내려서게 하려는 친구의 손길로 생각할 수 있겠어요?”

우울증을 친구로 생각하려는 제안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고 심지어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는 알고 있었다. 아래로, 땅으로 내려서는 것이 완전함의 방향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이미지를 받아들이자 나는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p120)

 

나에게 생기는 일들, 나의 단점들을 적으로 보지 말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로 보는 건 어떨까?

 

 

5. 다시 세상으로 돌아오다

 

우리는 리더십이라는 개념에 종종 거부감을 나타낸다. 자신을 리더로 생각하는 것은 주제넘어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지나친 자기 확대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공동체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맞다면 리더십은 모든 사람의 소명이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도피일 수도 있다. 우리가 공동체라는 이름의 밀접하게 짜여진 생태계에 살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인도를 받아야 하고 또 모든 사람이 인도해야 한다.

심지어 한때 오만한 태도로 학교를 떠나갔으며 대표자가 될 자질이라곤 없는 나같은 사람도 좋든 싫든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내가 있는 자리에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다. 단지 내가 지금 이 땅에서 내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 역시 이 땅에 살면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떤 종류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p135)

 

모든 사람이 누군가를 인도하고, 인도 받아야 한다. 나는 누구를 인도하고, 누구의 인도함을 받고 있나? 공동체로 살고 있나?

 

 

6.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의 인생이 끝없는 계절의 순환과 같다는 개념은 투쟁과 기쁨, 손실과 이득, 어둠과 빛을 부정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포용하도록, 그리고 그 안에서 성장의 기회를 발견하도록 기운을 북돋아준다. (p172)

 

아이러니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 부족은, 사실 우리가 부족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이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물건들을 쌓아 두면 적게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하니 나는 결코 충분하다는 생각이 안 들 것이다. 내가 권력의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싸운다면, 지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나는 결코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질투를 느낀다면, 나는 그 사람을 멀리 쫓아 버릴 것이다. 내가 쓴 어휘들이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선택인 듯 거기에 집착하면 새로운 가능성의 연못은 말라버리고 말 것이다. 우리는 부족을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법칙처럼 받아들인다. 마치 사하라 사막의 마지막 오아시스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 경쟁을 벌임으로써 오히려 부족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인간 세상에서 풍요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풍요는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려는 의식을 가지고, 공동으로 저장한 것들을 자축하고 함께 나눌 때 찾아온다. , 사랑, 권력, 어휘, 부족한 자원이 무엇이든 그것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서로 돌려 쓰면 그 자원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이 진짜 인생의 법칙이다. 진정한 풍요는 든든하게 쌓아놓은 음식이나 현금, 권력, 애정에 있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공동체 안에 속해 있을 때 찾아온다. (p191-192)

 

공동체.

 

풍요는 공동의 행위이자 복잡한 생태계에서 이루어지는 공동 창조이다. 그 생태계 안에서 각각의 부분이 전체를 위해 기능을 발휘하며 그 대가로 전체가 이들을 지탱해 준다. 공동체가 그냥 풍요를 창출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곧 풍요이다. 우리가 자연의 세계로부터 이 공식을 배울 수 있다면 인간 세상도 변화할 것이다. (p193)

 

공동체가 곧 풍요이다.

 

 

정말 너무 좋은 책, 너무 좋은 글이다. 어제 오늘 이 글을 안 읽었다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선택을 했을까. 너무 훌륭하고 시기 적절한 글에 감사하다.

 

 

 

2014.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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