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 작년 이맘 때 쯤 산 것 같다.
노무현 대통령 사후에 쓰여진 자서전 형식의 책이다.
자서전.. 노 대통령의 생전 자료들을 토대로 쓰여진 책이다.
2010년. 출간.
일직근무를 섰던 지난밤에 읽었다.
다 적을 순 없고..
줄 그은 거 위주로 적어야겠다..
프롤로그 실패와 좌절의 회고록
제1부 출세
노무현은, 말이 별로 없고 여간해서는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거나 폐를 끼치는 일이 없는 아버지와 매사에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돈이 없어 수모 당하는 것을 분하게 여기시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p44-45)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 진학 아니 중학교에 진학하기도 어려웠었다. 그러나 형님의 도움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66년) 어려운 가정 상황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막일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고졸인 사람이 사법시험을 치기 위해서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을 통과 해야 해서 그 시험을 쳤다.
육군으로 입대하고 전역 한 뒤(71년) 권양숙 여사와 사귀기 시작해 결혼을 했다.(73년)
그리고.... 한참뒤..ㅋㅋ.. 75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78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돈 걱정을 크게 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알아보고 굽실거리는 사람도 많았다. 살맛이 났다. 출세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은 어느새 슬며시 녹아 없어지고 말았다(p69).
제2부 꿈
부림사건(81년 전두환 정권이 반국가단체를 만들어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지역 지식인과 교사, 학생을 구속했지만 이들은 사회과학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정부 비판을 한 것이었다.)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변론을 하면서 자신과 가족, 부모형제를 먼저 챙기면서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사회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는 논리가 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이웃의 고통과 권력의 부정부패, 사회적 불의를 내 문제가 아니라고 모른 체하면 내 삶이 부끄러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p79-80)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82년) 변호인단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88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로부터 영입제안이 들어와서 부산 지역구에 출마하였고 당선되었다.
88년 가을 국회에서 5공 청문회가 열렸는데 그 과정에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유투브에 검색해보면 나옴.)
3당합당(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으로 김영삼과 결별하게 된다. 이 3당 합당으로 인해 호남과 영남의 지역갈등 구도가 형성되었고, 정치의 영역에서 기회주의 문화 판치게 되었다.
3당 합당에 반대한 채 다시 부산에서 총선을 치뤘지만 낙마했다.
이후 민주당 최고워원이 되어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어 정책연구를 시작했다.
계파가 아니라 정책을 통해 조직을 만들려고 했다.
95년에는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하지만 이 또한 낙마한다.
그리고 96년 종로에서 제15대 총선을 치르지만 낙마한다.
97년 대선에서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선거 운동에 참가한다.
그때까지 조선 건국 이래 600년 역사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정권교체가 없었다. 권력의 편에 서야만 비로소 권력을 이어받을 수 있었던 역사였다. 권력에 맞섰던 사람 가운데 패가망신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자손들의 앞길까지도 막아버렸다. 적어도 무사하게 밥이라도 먹고 살려면 권력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비를 가리지 말고 납작 엎드려 살아야 했던 기회주의 역사가 무려 600년이었다. 결국 이회창 씨도 조순 씨도 권력에 줄을 서야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간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런 역사를 마감하고 양심과 신념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세상을 만들려면 정권교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하면 권력에 줄을 대는 방식이 아니라 나름의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 살아온 유능한 사람들을 국가 운영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p140-141)
백 가지 제도보다 민주주의 혁명의 경험, 정권교체의 경험, 이런 것들이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는 것이다. 이론과 제도도 중요하지만 정권교체가 중요하다. 정권교체가 될 가능성이 있으면 김대중 총재를 돕겠다.(p146)
98년 치뤄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종로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0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에 다시 출마해 낙마했다.
링컨의 연설문을 읽으면서 새로운 깨달음과 위안을 얻었다. 역사를 보면 정치인들이 집단적 불신과 적대감을 부추기는 곳에서는 언제나 불행한 일이 생겼다. 나는 지역 분열주의를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추구하겠다는 목표에 도전했다가 실패했을 뿐이다. 상대 후보와 싸우지 않았으며 부산 시민과 싸우지도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앞으로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물으면 링컨 대통령이라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링컨 대통령은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 준 겸손한 지도자였다(p161).
그 때의 낙선 이후 노사모가 생겨났다.
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8개월도 안되는 짧은 부임기간이었지만 국정운영 전반을 보고 배울 기회였다.
자율과 분권, 투명과 공정, 부단한 학습과 지식의 공유 등의 기본원칙을 이 기간에 세웠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내가 하는 일을 돌아봤다.
나도 작고도 작지만 행정일을 하는 자리이고, 리더의 자리인데 이런 원칙들을 세워나가며 시간을 보내야하지 않을까.. 싶었다.
제2부를 읽으면 덤으로 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의 정당 변천사를 알 수 있게 된다.
대략.. 복잡하다.
이합집산..
선거 때 마다 당명이 바뀌거나 해체되거나 등등등 난리다 난리..
제3부 권력의 정상에서
2001년 정치권을 지배한 것은 대세론이었다. 이회창과 이인제의 대세론.
그러나 노무현은 이회창 씨를 분열주의의 상징으로, 이인제 씨를 기회주의의 화신으로 간주했다.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참여했으나 선거캠프는 초라하였다. 경선캠프에는 국회의원이 한 사람도 없었고 후보인 자신도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선에서 승리하였다.
경선 승리 직후에는 지지율이 치솟았으나, 이후 하락세가 거듭되어 각종 보궐선거에서 줄줄이 참패했다. 당내에서는 후보교체를 요구하는 움직임도 생겼다.
월드컵 이후 정몽준씨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게 되어 대선은 삼파전 양상으로 바뀌었는데 이 과정에서 노무현의 지지율은 더욱 더 낮아졌다.
11월 후보 단일화를 거쳐서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반박
국민의 정부 마지막 해인 2002년 1인당 국민총소독(GNI)은 1만 2,100달러였다. 내 임기 마지막 해인 2007년에는 2만 1,695달러가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 임기 말 외환보유고는 36억 달러에 불과했다. 텅 빈 금고를 넘겨받은 김대중 대통령이 IMF 채무를 조기 상환하고 1,234억 달러를 채워 내게 넘겨주었다. 나는 그것을 두 배가 엄는 2,620억 달러로 만들어 이명박 대통령에게 넘겨주었다.
(P209)
취임 직후 중요한 국가 과제를 점검해 보았다. 꼭 해결해야 하지만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채 묵혀 온 무제가 너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을 저장하는 시설을 만드는 사업이었다. 이것은 노태우 대통령 이래 20년이나 끌어 온 해묵은 과제였다.
...
행정수도 이전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논의였다.(p226)
이라크 파병은 옳지 않은 선택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당시에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는 회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서 파병한 것이다. 때로는 뻔히 알면서도 오류의 기록을 역사에 남겨야 하는 대통령 자리, 참으로 어렵고 무거웠다(p245)
국가가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을 희생시켜도 되는가?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해 젊은이들을 징집해 전쟁터로 내보내는 일을 지금까지 모든 국가가 다 해 왔다. 인류 문명이 아직 그런 수준에 있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올까? 확신할 수 없다. 목숨을 걸고 그 먼 이라크까지 자원해서 간 우리 군인들이 너무나 고맙고 미안했다.(p246)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상호 신뢰를 증진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서 불안감을 갖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다. 북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흡수통일이나 무력 공격이다(p250).
개방 전략은 아무리 정밀하게 연구하고 분석해도 위험과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선택의 폭도 좁다.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위험을 안고 뛰어들거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위험을 회피하는 것. 이것 둘뿐이다. 세계 경제의 흐름을 보면 장기적으로 FTA를 회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적어도 낙오를 면하려면 그 불확실성을 안고 뛰어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차피 뛰어들 것이라면 남보다 먼저 해야 앞서 갈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다(p255).
권력기관의 정치적 중립화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정보원과 검찰이었다. 국세청도 문제가 있었다.
...
나는 제왕적 대통령이 되기를 거부했다. 장관과 공무원들, 여러 헌법기관과 정부기관들이 자기 책임 아래 자주적이고 자율적으로 국민을 위해 일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
...
임기 내내 한 번도 국정원장의 독대 정보보고를 받지 않았다. 정례보고든 수시보고든 독대보고는 없었다. 국정원장의 보고를 받을 때는 관련 장관이나 청와대 참모를 반드시 배석시켰다. 대통령이 국정원장의 독대보고를 받으면 대통령은 저절로 제왕이 된다. 국정원의 보고는 안보 정책과 대북 정책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정원법 규정이야 어떠하든, 국정원은 정치, 정부, 사회, 문화, 언론, 기업 등 사회 전체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방대한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 잘 훈련받은 요원들이 습관적으로 정보를 수집한다. 대통령이 국정원장과 독대해서 다른 누구도 모르는 정보를 보고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국정원의 정보 집중력은 더욱 강해진다. 대통령에게 보고되기를 바라는 정보를 자발적으로 국정원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정원의 정보 수준은 더욱 높아지고 권력은 강화된다(p269-270).
검찰의 정치적 독립
검찰 개혁과제 중 첫번째로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들고 있고, 두번째로 검찰권 행사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들고 있다.
이를 위해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을 추진했고,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를 만들어 수사권을 주는 것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언론과의 관계.
언론관의 관계에서는 두 가지를 감당하려고 했다.
하나는 정치 권력과 언론의 유착관계를 단절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이 누리는 부당한 특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p278)
언론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책임의식 부족이었다.
언론은 시민의 권력이어야 한다. 시민을 대신해 정치 권력과 시장 권력을 감시하고 억제함으로써, 권력이 시민의 권리와 가치를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다(p279)
제4부 작별
대통령 임기 동안 국가균형발전을 이루려고 노력한만큼 퇴임 후에도 지방에서 살려고 했다.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와 친환경 농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인근 습지인 화포천 일대를 보존하는 일에도 노력을 했다.
에필로그 청년의 죽음
연민의 실타래와 분노의 불덩이를 지니고 살았던 그는, 반칙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대한민국을 그런 믿음 위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 믿음이 국민의 마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한, 노무현이 대통령일지라도 그 시대는 '노무현 시대'일 수 없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다 이루지 못했던 꿈을 마저 이루기 위해 전직 대통령으로서 시민으로서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다. 그런데 자신의 존재가 그 꿈을 모욕하고 짓밟는 수단이 되고 말았다.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그는 생명을 버렸다. 그가 생명을 던진 그 자리에, 이제 '사람 사는 세상'의 꿈만 혼자 남았다.(p351)
노무현 대통령을 왜 진보주의자라고 할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들었던 의문이다.
FTA를 옹호하고, 미국의 요청에 응해 이라크로 전투병을 파병하고, 헌법 질서를 수호하고, 법대로 처리하려 하고, 권력 기관을 독립시켜 자율성을 보장하고..
연립정부를 수립하려 하고, 초법적으로 군림하려하는 언론을 비판하고..
이 책만 읽어서는 보수적인 사람인 것 같은데..
내가 이렇게 느낄 정도로 세상이 많이 변화해온 건가.
대통령.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선거..
07년 대선 때는 투표권이 없었을 뿐더러 고3이라서 대선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고
올해는 군인아저씨가 되는 바람에
세상과의 단절로 이야기가 끊겼을 뿐 아니라
공무원으로서 자체검열을 열심히 하고 있으며..^!^
인터넷도 안되고, TV도 없어서 가뜩이나 대중매체와 소외된 곳에서 더 소외되고 있다.
어릴 때 기억은 난다..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 재임 기간에 신문을 더 많이 보고, 정치에 대해 더 많이 관심 가졌던 것 같다.
2002년에.. 6학년이었으니..
주로 중학생 때..
그 때 집에서 아마 조선 일보를 받아봤던 기억이 나는데..
그 당시 기억으로도 이건 쫌.. 아니다.. 싶은 억지성 기사와 사설이 잦았다.
ㅎ.ㅎ.... TV를 봐도 대통령은 바른말 하는 착한 사람인 거 같은데 국회의원들은 억지를 부리는 나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게임이나 하던 중학생이 뭐 이런저런 복잡한 걸 알았겠나_
'닥치고 정치'에서 저자가 앞으로는 박정희와 노무현 두 망자간의 대결이 지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런 것 같다.
그럴 것 같다.
이상하게 잔상이 자꾸 남는다.
어른들이 박정희에 대한 잔상이 남는 것과 비슷한 걸까?
09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 월요일 어느 교수님이 검은 넥타이를 매고, 검은 양복을 입고 눈물 비슷한걸 보이신 적이 있었다.
왕정도 아니고..
이.. 민주화된 21세기에.. 대통령이 죽었는데 눈물을 보이다니.
TV에서는 그런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만이 눈물과 함께 조문을 했다.
나도 아직.. 그날 그 소식을 들었던 상황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동기 몇몇과 동방에서 잠포를 하고
차를 타고 집으로 아침 6시쯤 돌아왔다
어질어질 해서 자려고 이부자리를 펴는데
라디오에서 어렴풋이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알렸고..
TV를 틀어보니....
그날 야구를 보러 갔었는데 애도의 표현으로 응원단이 응원을 하지 않았다.
전구장이 그러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참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것 같다.
참..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 같다.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노무현 대통령은 죽음을 통해서까지 국민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어 했다고.
그 메시지가 올바른 것..이라면, 세상이 조금은 더 바뀌겠지?
진심은 통하겠지..
정의는 승리하겠지_
201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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