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왜 읽게 되었을까? 이 책은 언제 샀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우리나라에서 20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이분이 어떤 분인지도 몰랐고 이름도 거의 처음 들어 본 것 같다.
이 책은 김형수라는 분이 여러 사료와 증언을 수집해 쓰셨다. 지은이는 소설가이자 시인.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으면서 소설책을 읽는 듯 한 착각이 들었다. 술술 읽혀서 좋았던 책.
프롤로그
‘폭력’이 20세기의 속성이었다. 그 속성의 관리자이자 경영자이고자 했던 워싱턴이나 모스크바의 두뇌집단들은 막대한 힘으로 이 세기를 지배했대. 그들은 부지런히 세계를 이념에 따라 찢어 가졌다. 진영의 유지를 위하여 반목과 충돌을 원격조종하기도 하고 손수 전쟁을 이끌기도 한다. 한국은 그러한 힘들이 각축한 몇 개 안 되는 시범 국가 중의 하나였다.(p40)
20세기적 대결이 다른 곳에서는 국가를 단위로 해서 벌어졌지만 한국은 하나의 영토에서 벌어졌다. 남북 어느 쪽도 미완의 국가에 불과했다. 이제 이곳에서 이념의 경계는 거의 완벽한 단절의 기능을 수행한다.(p42)
문익환은 이 불행한 세기의 원년(1918년-러시아 혁명이 일어남)에 태어났다.
...
그는 북간도에서 태어나서 초 ․ 중 ․ 고교 과정을 마치고 21세 때 일본신학교에 유학한다. 동경 시절에 알게 된 전도사 박용길과 1944년에 결혼하고, 만주 신경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46년 월남하여 이듬해에 30세의 나이로 한신대를 졸업하면서 목사 안수를 받는다. 그리고 149년에 다시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했다가 전쟁이 발발하다 33세의 나이로 유엔군에 지원해 통역자로서 정전회담에 참여한다. 그의 신분적 정체성이 최종 확정되는 것은 1955년, 미국에서 돌아와 한신대 ․ 연세대에서 구약학을 강의하면서, 그리고 한빛교회 목사가 되면서였다. 그 후 1968년부터 신 ․ 구교 공동 성서번역 책임위원으로 매진하고, 1976년에 ‘3 ․ 1 민주구국선언’에 연루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진다. 이때가 바로 59세. 그는 원로의 나이였지만 재야운동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내어 77세에 별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12년간의 옥살이를 하는 수난의 삶을 산다. 그 기념비의 하나로써 ‘방북’은 통일운동의 최고 업적이 되어 후에 남북 양측의 극적인 공감대로 사용되었다.(p45-46)
제1장 문익환의 선사시대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중국 길림성 화룡현 지신진 명동촌 동거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간도 땅을 중국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는 우리 선조들이 쌓았던 성터가 남아 있었고, 땅 속에서는 우리 선조들이 쓰던 활촉이 무더기로 나왔으며, 절구 같은 생활 도구들이 땅을 가는 보습에 걸려 나왔다. 거기는 남의 나라가 아니었다.(p69)
그는 문익점의 후손인데 그의 생애는 문익점의 이미지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하나는 ‘나’로 사는 사람과 ‘우리’로 사는 사람의 행동양식에 관한 것이다. ... 부유한 나라를 여행한 사람이 열매를 가져오는 것과 종자를 가져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자신을 위한 것이고 그 저간에는 다분히 과시욕이 있지만, 후자는 뒷세대를 위하는 것이고 개인이 누려도 될 영광이 공동체에게 반납된다.
또 나는 우리들 행적의 ‘지방성’에 관한 것이다. ... 문익환의 역사의식 동시대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근대 유럽이 가르쳐준 세계사 이전의 세계사 상을 알고 있었으며, ‘민족’, ‘국가’, ‘국경’에 대한 겨우 2백 년 묵은 지식들을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p79)
근자에도 더러 대안학교를 세우고 세속 지대로부터 이주하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지금으로부터 1백년 전의 상황에서 나라의 앞날과 후세의 교육을 위해 몇몇 가문이 모여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상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정치적 이주를 감행했다고 기록에 남긴다. 하나, 간도는 비옥한 곳이다. 둘, 계속 방치하면 남의 땅(중국)이 된다. 셋, 그곳에 공동체를 만들어 나라를 일으킬 인재를 기르자.
마음을 같이한 네 가문 1백41명, 종성에서 세 가문, 회령에서 한 가문이 아침 6시에 출발하여 강을 건넜을 때는 점심이 지나 있었다.(p85)
구한 말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그들이 건설하고자 한 것은 하나의 독자적인 이상사회였다.
이주자들은 매우 빠르게 마을을 갖추었다.
...
그들의 공동체는 유례없이 뜨거웠다. 쫓기듯 두만강을 건넌 망명자들은 불과 20년 만에 북간도에 엄청난 사회를 구축해버렸다. 성공은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화전이나 일구던 난민들의 가슴에 조선의 미래를 고민하던 기세등등한 실학자들이 뛰어들어 희망의 씨를 뿌렸으니.... 지식과 인덕과 지도력을 겸비한 네 가문의 정예부대 1백41명이 뛰어들자 북간도는 흡사 ‘작은 공화국’을 방불케 했다.
망명자들은 그들이 일군 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다. 지도자 김약연은 이내 ‘북간도의 대통령’이라 불리었다. 그래서 두만강을 건너온 정처 없는 손님들이 끝도 없이 붐빈다. 조국에서 온 여러 조직과 사회단체, 또 임시정부 요원들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북간도 최초의 신식 학교인 이상설의 ‘서전서숙’도 그 기반을 김약연이 제공했다. 그들의 자치단체 ‘간민회’는 중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외교활동도 수행했다. 이동휘가 찾아와 망명생활을 하다 가고, 신식 교육기관 명동학교가 설립된다. 그리하여 기미년 만세운동 때는 명동중학교의 브라스 밴드가 용정까지 출동하는 기염을 토한다. 울분, 절망, 비탄, 망국 감정 따위에 아무도 전염되지 않았다. 학생들은 마치 애국단체처럼 움직였는데, 그 속에는 영화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도 있었다. 조선 땅에 흔하고 흔한 일제의 앞잡이도 서식할 수 없었다. 일제 헌병이나 경찰은 그곳을 다녀가는 용기만으로도 일계급 특진이 되었다.(p89-90)
-> 대박. 이런 일이 있었다니. 이 글을 읽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 서전 서숙, 명동학교란 곳이 있다는 건 수업시간에 들었는데 그 배경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그 때도 있었구나.
서진 서숙을 세운 이상설이 설립 6개월 만에 헤이그 밀사로 떠나게 되어 아이들을 가르칠 사람이 없어졌다. 그래서 간도의 이 무리(?)들은 어떤 선생을 구해 왔는데 이 선생이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공부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이 선생은 정병태로 신민회에서 서전서숙 재건을 목적으로 비밀리에 보낸 사람이다. 신민회에서 북간도 지역 민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북간도 교육단을 조직했는데, 그 단장에 정재면, 고문에 이동회, 이도녕, 재무는 유흥원(유한양행 유일한 씨의 부친)이었고 활동 목적은 조선 독립을 위한 인재 배출이었다. 그들이 모두 기독교를 중시한 것은 시대정신의 발현이었다.(p97-98)
“여러분도 이제 이름을 가져야 합니다. 며칠 생각해봤는데 우리 함께 주님 안의 자녀라는 뜻으로 ‘믿을 신(信)’ 자 돌림으로 지으면 해요. 각자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아버지나 오빠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다다가 ‘신 뭐’라고 짓기로 합시다.” ... 문익환은 자신이 문익점의 후예라는 것도 잊지 않으려 했지만 ‘신’자 여성들의 아들이라는 점도 결코 망각하지 않으려고 노렸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을 교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 의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信) 자 항렬로 한 동기가 되었던 것 아닙니까? 신 자 때문에 가문 족벌의 장벽을 훨훨 떨쳐버리고 한겨레 의식이 확인 확산된 것 아니겠습니까(p100-101)
제2장 점화된 불꽃
문익환의 아버지는 국민회 소속의 ‘독립신문’ 기자였으며, 어머니는 북간도 여성계에 없어서는 안 될 유지가 되어 있었다. 문익환이 9개월째 되던 해 3.1 운동이 일어났고 이 때 문익환의 어머니는 연행되기까지 했다.
문익환은 아버지가 유학을 떠난 뒤부터 여자가 많은 집에서 지냈다.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남성들은 말할 때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핵심적인 사건만 전개하면서 그 의미를 분석하고 설득하려는 듯한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항상 주인공도 자기 자신이 아닐뿐더러 영역도 주변 사람과 사건들의 나열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간다. “여성은 몸 속에 다른 사람을 위한 자리를 항상 준비하고 있어서”(문영미)라고 말한다.(p122)
몸은 허약하고 감정은 풍부하며 직관은 예리한데, 일찍부터 병약하여 평생을 두고 만성두통에 시달렸다. 병마는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친다. 그가 오만에 빠지거나 자신감에 넘치는 아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일찍이 신이 내린 생물학적인 명령에 속했다.(p122)
제3장 광야에서
당시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은진학교 교실에서도 역시 ‘흙’의 주인공처럼 되고 싶어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이상촌운동’에 생애를 바치기 위해서 상급학교 진학도 아예 숭실학교 농업과로 가려는 사람조차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런 유행 풍조에 쐐기를 박았다.
국가 성립되려면 국토․ 국민․ 주권, 이 세가지가 모두 갖춰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주권이 없는 노예의 상태이다. 주권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이상촌 운동은 낭만적이고 멋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엄혹한 현실 앞에서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농민들의 거주지나 생활환경이 조금 나아져본들 그것이 처한 상태는 꼼짝없이 주권을 빼앗긴 노예의 처지 그대로인 것이다. 그게 무슨 수로 인간다운 삶이 될 수 있는가? 정치적 독립이 없는 사회에서 진정으로 참된 운동은 하나뿐일 것이다. 정년 이상촌 운동을 하겠거든 먼저 빼앗긴 나라부터 찾아라.(p168)
히틀러가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미화시키려 했다면 문익환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미화시키려 했다. 이기적인 삶과 이타적인 삶의 차이는 어쩌면 자아를 섬기느냐 세계를 섬기느냐의 사이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이기적인 인간이 세계를 끝없이 자신의 욕망 아래로 포섭시키려 노력하는 데 반해 이타적 인간은 ‘세계의 온전성’을 지키기 위해 무한한 자기 헌납을 감행한다.
명동학교와 은진학교를 다닌 문익환은 평양의 숭실학교로 편입한다. 저자는 당시의 평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문익환이 숭실학교에 적응을 잘한 이유의 하나를 평양이 기독교의 도시라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평양에는 19세기 후반부터 서양의 선교사들이 방문하기 시작하여 1893년에는 이미 북장로교의 선교지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아버지도 거쳐 가고, 김약연 선생도 신학 수업을 평양에서 했다. 더군다나 숭실학교는 그러한 기독교 교육의 온상이었으며, 문익환에게 세계의 광활함을 가르친 삼촌 문학린의 모교였다.(P176)
숭실학교의 교장이던 조지 맥퀸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장직이 취소되었고 이에 저항의 의미로 동맹퇴학이 감행되었다. 문익환과 윤동주는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학업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용정에는 기독교 계통의 은진, 민족주의 계통의 대성, 사회주의 계통의 동흥, 친일계통의 광명 이렇게 네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5년제 정규학교는 광명밖에 없었다.(p181)
문익환과 윤동주는 광명학교를 선택한다.
광명학교는 한마디로 황국신민문화를 체험하는 교육기관이었다. 조선인 학생들이 스스로 일본 국기 아래서 즐겁게 황국을 숭배하는 곳, 신사참배를 아예 신성한 의무로 여기고 경건하게 거행하는 곳, 그 따위 학교에 제발로 찾아가 속해 있어야 하다니! 신사참배 문제로 숭실학교를 자퇴했던 문익환으로서는 그 같은 모순을 해결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문익환은 이렇게 술회한다.
솥에서 뛰어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만든 악연을 문익환은 내내 참아왔지만, 하늘은 그의 인생이 끝나서 상여에 실리는 날 젊은 날의 상처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하필 그곳을 대표하는 동창생 하나가 그와 나란히 생을 마쳤는데, 이름이 정일권이었다. 문익환과 정일권, 같은 해에 태어나서 같은 날 죽지만 두 동창생(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는 학교였다)의 삶은 너무도 달랐다. 그래서 신문들은 모두 20세기의 한국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이 극적인 생애들을 대조시켰으며 장례식은 정확히 대립되는 세력에 의해 치러졌다.(p185)
만군 계열의 보스는 아무래도 정일권이다. 1937년 봉천 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군 소위로 있던 그는 모교인 간도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에 가서 졸업예정자들을 모아놓고 졸업 후의 진학지도 연설을 했다.(p186)
정일권이 강조한 것은 ‘군에 입대하는 것이 장래를 보장받는 길’이라는 점이었다.
...
정일권을 축으로 한 만군 출신 장교들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에 직・간접으로 엄청난 배경이 되어주었다. 인맥의 중심이 광명학교 동창이었음은 물론이다. 심지어 민간인으로 5・16에 참가해서 ‘혁명공약’과 선전문들의 인쇄를 맡았던 광명인쇄소(인쇄소 이름이 왜 하필 광명이란 말인가!)의 이학수 사장까지 용정의 광명학교 출신이었다. (p186-187)
학교를 졸업 한 이후 문익환은 특별한 일을 하지 않고 지냈다. 무엇을 해야할지 몰라 방황하며.
생각해보면, 당시 모멸을 극대화시켜서 받아들이기에 딱 좋을 만큼 그는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꿈꾸는 가슴 속에서 젊음의 기운은 솟구쳐 올랐지만 인생의 좌표는 세워지지 않았다.
... 시대의 복판을 가로지르기에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고민하면 할수록 인간의 영혼이라는 넓은 미개지와 마주칠 뿐이었다. 더 많은 교양이 필요했다. 배우는 것, 더 많은 책으로부터 얻는 것, 강의를 듣는 것, 열심히 노트하는 것, 선생님의 말을 경청하는 것. 문익환은 그것이 세상에 나아가는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끝없이 공부를 하는 그에게 아버지는 길림사범학교를 권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사범학교에 가지 않았다. 어는 날 문득 다른 깨달음이 찾아왔던 것이다. 이를테면, 세계와 마주하여 깨어 있는 자들이란 누구인가? 명동촌을 세웠던 김약연선생, 명동학교에서 아버지를 가르친 정재면 선생, 자신을 가르친 한준명 선생. 그분들이 선택한 길이 교사였던 것인가. 그는 마침내 자기 시대에 관하여 한 가지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 명동의 꿈은 끝났다. 줄타기 곡예사를 구해 줄 공중 그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심연 너무 구름다리에 불을 밝혀 줄 등불은 없다. 선대들이 해오던 애국계몽운동은 바닥이 났으니, 이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 한다.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었다. 그가 존경하는 이들은 모두 교사이기 이전에 목사였고, 목사이기 이전에 애국자였다. 목사가 어떻게 애국자일 수밖에 없는지를 그는 누구보다도 가까이에 있는 아버지를 통해서 배우고 있었다.(p192-194)
-> 진로에 대한 고민. 시대에 대한 고민 속에서 무엇을 하며 어디로 향할지에 대한 고민. 애국자라는 말이 어떤 정치를 하거나,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자, 정의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 사람을 보면, 그런 삶을 보면 자연스레 따라가고 싶어지니.
제4장 외길의 시작
문익환은 도쿄로 유학을 떠난다. 도쿄에서 관동조선신학생회라는 모임에 참여하는데 그곳에서 장차 아내가 될 박용길을 만난다.
한편 문익환은 거대한 파시즘체제의 틈바구니에서 순응할 염치도 저항할 용기도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미워하고 있었다 새 로 접한 신학의 세계는 하나의 사이버 대륙처럼 그를 현실 바깥의 세계로만 끌어가려 했다. 현실로 돌아오면 언제나 머리가 지끈거렸다.(p203)
문익환은 1943년 동원령을 피해 귀국한다. 그리고 서울에서 박용길과 결혼한다. 결혼 한 뒤 다시 용정으로 떠났다. 그리고 윤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잘한 일이었던가? 문익환은 자신이 구겨진 휴지처럼 역사의 구석지에 버려져 있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확실히 문익환이 생각지 못한 제2의 길을 간 장준하와, 그보다 더한 제3의 길을 선택한 윤동주, 송몽규의 진로에 비추어 형편없이 초라한 것이었다. 문익환은 엄청난 절망감에 빠졌다. 육체는 밥으로 살찌지만 정신은 기아와 고통으로 성장한다. ... 윤동주는 가정형편도 어려운데 고비마다 실패하면서 꿈의, 새벽의, 시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에 반해 그 무렵의 문익환은 출가 이전의 모세와 같았다. 한없이 선량하고 순수하지만 그의 영혼은 아직 현실의 복판을 맛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p222-223)
용정에서 전도사로 일하던 문익환 부부는 해방이후 1946년에 5백 명에 이르는 대규모 피난민을 이끌고 고난에 찬 남행을 시작했다.
제5장 한없는 침묵과 고독의 성
문씨 일가가 북간도를 등진 것은 월남이 아니라 망명이라 해야 옳았다. 지리적으로는 중국에서 조선으로 이동한 것이지만, 정서적으로는 고구려의 대지를 버리고 외국 군대의 우산 아래로 피해 들어온 셈이었다.(p251)
문씨네 가계가 북쪽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 하나는 북간도 명동촌이 정치적으로 김구 노선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김약연 선생은 임시정부로부터 내각의 수반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문재린 목사는 김규식의 도움으로 베이징 유학을 하고 독립신문 기자가 되었으며 송몽규도 김구의 군사학교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그것은 문화적으로도 마찬가지여서 이승만과 종교가 같다는 점, 또 문재린 목사가 캐나다와 영국에서 유학했던 만큼 영어에 능란하고 자유주의에 친화적이라는 점, 결정적으로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수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문씨 일가가 러시아혁명 이후 대륙에서 활약한 공산당과 맺은 악연은 화해할 수 없이 치명적인 것이었다. 코민테른 3차 회의가 결정한 1국 1당 원칙에 의해 중국 공산당의 조선인들에게 ‘고구려 마을(명동)’을 빼앗겼고, 일제에게 구속되어 간신히 살아나온 아버지를 공산당이 다시 죽음 앞으로 내몰았으며, 기사회생한 후에도 소련군 사령부에 끌려가 다시 수난을 겪었다. 그로 인해 문재린 목사는 물론 문익환까지 반공의 태도가 확고해지게 되었다.(p254)
문익환은 서울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고 곧장 아버지가 있는 경북 김천으로 내려갔다. 더는 걷기 어려울 만큼 만삭이었던 아내 박용길이 아이를 낳을 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문익환은 그곳에서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교회 육영재단이 운영하는 배영중학의 영어 교사로 취직을 했고, 박용길은 곧바로 몸을 풀어 장남 호근을 낳았다.(p258)
김천에서 문익환은 신학 교육을 계속 받는다. 그리고 서울에 홀로 올라와 전도사 생활을 한다.
정치적으로는 미래를 꿰뚫어볼 혜안을 얻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립이 어려웠으며, 신학적으로는 아직 갈증이 많은, 그러면서 여성적인 감수성과 병약한 신체를 가진 서른 살의 움익환이 뛰어넘기에 세파의 물결은 너무도 높고 사나웠다.(p277)
문익환은 홀연히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49년 여름, 미국행 여객선에 올라 탄 것은 말 그대로 ‘도미(渡美)’였다.(p279-280)
‘신 앞에 선 인간’을 탐구하는 지상의 수재들이 가고 싶은 대학, 프린스턴신학교는 굉장한 권위를 거느리고 있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자유당 때 내무장관을 지냈던 최인규가 첫 번째 유학생이고 문익환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문익환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고급 언어를 구사하는 이 세련된 동양의 신사는 오히려 유창한 영어로 미국인을 놀라게 했다.(p281)
문익환이 유학을 떠나 있는 동안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사실 제2차 대전이 종결되는 순간부터 미국 군사력은 급격한 감소를 보였다. 대전이 종결된 1945년 8월에 미국은 1천1백42만 명의 병력과 2백 18개에 달하는 비행단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이 되자 병력은 3백64만, 비행단의 수는 불과 48개로 격감되었던 것이다. 까닭에 미 국방성은 몇 번이나 예산 증액을 요청했지만 위회는 태평스럽기만 할 뿐, 대전 중에 늘릴 대로 늘린 막대한 군수산업은 불황의 늪에 빠져 들숨날숨이었다. 획기적인 계기가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당시 애치슨 국무장관의 고문으로 있던 덜레스가 38선을 시찰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그는 시찰 다음날 대한민국 국회에서 저 유명한 ‘You ar not alone’이라는 연설을 했다.
유엔은 거의 만장일치로 한국에 정치적 자유를 부여했으며, 한국 영토의 불가침에 대한 어떠한 위협에도 대항할 것이다. ... 그대들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곧장 도쿄로 날아가 유엔 극동사령관 맥아더와 국방장관 존슨과 통합 참모본부 의장 브래들리를 만나 4자 회동을 시작한다. 정확히 개전 일 주일 전에 미국의 군사정책을 결정하는 유력자 네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p284-285)
문익환은 유엔 사령부에서 통역 일을 했다.
문익환이 유엔극동사령부에서 근무하는 것은 누가 봐도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도쿄역 앞 마루노우치 빌딩에 자리한 ATIS(Allied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Section: 연합군 번역 통역 섹션)에서 그는 20세기의 국제질서를 만들어내는 중대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ATIS는 전선에서 노획해 온 문서들을 분류하고 번역해서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는 곳인데, 한국인 스테프는 약 30명, 사령부 안에서도 우수한 인재들을 모아둔 엘리트 부서였다.(p297-298)
문익환이 판문점에 당도한 것은 1951년 늦가을이었다. 회담은 언제나 3자가 나서서 진행되었다. 한편에는 미국측 대표, 맞은편에는 조선측 대표와 중국 대표. 공용어는 영어. 미국 대표가 말을 건네면 미국측 통역자(문익환이나 정경모)는 우리말로, 또 중국측 통역자는 중국어로 통역을 하고, 반대쪽에서 조선 대표가 뭐라고 하면 영어와 중국어 통역자들이 동시 중개를 하는 회담이었다. 한국측 대표는 발언권이 없으니 미국측 옵서버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한국어도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파견되어 있었다. 그 좁은 회담장에서 가끔 터져나오는 일본어가 한국측 장군의 목소리라는 사실은 현실의 서글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p303-304)
하지만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지겨운 공방 끝에 마지 못해 체결된 휴전협정의 풍경을 당시의 ‘조선일보’는 이렇게 묘사한다.
‘판문점 조인식장에서 최병우 특파원 발’ 백주몽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너무나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학교 강당보다도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측 기자단만 해도 약 1백 명이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열 명이 넘는다,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도 한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 악수도 없고 목례도 없었다. ‘기이한 전쟁’의 종막다운 기이한 장면이었다. 북쪽을 gdigk여 나란히 배치된 두 개의 탁자 위에 놓은 각 18통의 협정문서에 교전쌍방의 대표는 무표정으로 사무적인 서명을 계속할 뿐이었다. ... 조인이 계속 되는 동안 유엔 전폭기가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쏟고 있는 폭탄의 작렬음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었다.
...
해리슨 장군과 남일 장군은 쉴 새 없이 펜을 움직인다. 각기 36번씩 자기 이름을 서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의식에 따르는 극적 요소도 없고 강화에서 예기할 수 있는 화해의 정신도 엿볼 수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전’이지 ‘평화’가 아니라는 설명을 잘 알 수 있었다.
...
관례적인 합동 기념촬영도 없이 참가자들은 해산하였다.(p310-312)
문익환, 정경모 등은 비록 한국인 군속일지언정 엄연한 유엔극동사령부의 일원이었고, 그곳에서 달러로 받는 월급이 상당했다. 특히 박용길의 형부가 당시 일본대사관의 서기관이어서 두 가족이 함께 살았는데, 한 지붕 아래 미제 승용차를 두 대나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월남과 피난과 전쟁 속에서 태어나 배고픈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자녀에 대한 마음의 빚을 한 사람에게만은 지지 않을 수 있었다. 바로 막내 문성근이 그런 윤택한 환경에서 태어났던 것이다.(p313)
제6장 시 정신 예언자 정신
문익환은 프린스턴의 마지막 시간들을 성서에 심취해서 보냈다. 어떠한 예술적 진리도 통일성도 없는 그 유서 깊은 묵시문학을 통하여 문익환이 추구한 것은, 한마디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p325)
그 무렵 한국의 기독교는 참혹하게 변질돼 있었다. 전쟁을 겪으면서 그리스도의 정신이 왜곡되어 거의 종교개혁이 필요할 정도였다. 막대하게 쏟아진 서방의 구호물자는 교회의 자립정신을 빼앗고, 교인들로 하여금 남을 도우려는 마음보다 받으려는 생각만을 만연케 했다. 또 전쟁의 이름으로 가정이 파괴되고 인명이 훼손당한 수많은 죽음과 상처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물질적 축복과 정신적 위로도 받자는 기복신앙에 사로잡혀 깨어날 줄 몰랐다. 게다가 북측 정권의 탄압을 피해 대거 남하한 기독교 세력들이 이승만 정권과 연대하면서 반공은 열심히 외쳤으나 다른 사회문제에는 기형적으로 무관심했다. (p329)
문익환은 한국신학대학에서 교수로 일한다.
그의 깎아지른 원칙주의는 학생들에게 일체의 요행심리를 허용해주지 않았다. 대부분 지방에서 갓 올라온 어린 제자들을 짧은 시간 내에 목회자로, 교회 지도자로 길러내기 위해 문익환은 시간엄수, 책임감, 올바른 글쓰기, 말하기 등을 엄격하게 가르쳤다. 다른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온 대학원생들에게는 부족한 공부를 보충시키느라 집에 데려가 몇 시간씩 과외지도를 해주기도 했다. 그로 인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가 그의 것이 되었다. 학사과장을 맡았을 때는 납부금을 하루만 늦게 내도 등록을 안 시켰으며, 구약이나 히브리어 한 과목 때문에 낙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p331)
...
신학도란 자신만이 아니라 남들을 챙겨주어야 하는 사람들인데, 자신에게 철저하지 못하고서야 무슨 일을 하랴는 깎아지른 듯 한 지론을 그는 무려 10년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다.(p336)
전후 복구의 어두움 속에 버려진 대다수 민중은 극도의 궁핍과 오욕 속에서 살았다. 고아의 무리가 거리를 누비는 패거리를 형성하고, 질병을 앓거나 부상당한 거지들이 지갑을 가진 사람만 보면 달라붙어 구걸하며, 사지가 절단 되거나 굶주린 어른들이 어린아이나 젖먹이를 안은 채 떼지어 다녔다. 돈이 되면 무슨 짓이든 하는 애처로운 여인네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 주말이면 미군 기지로 질주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그것을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지난 후에도 펠리니 영화와 같은 비극의 흔적이 서울 도심의 청계천 변을 떠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같은 시대 상황 가운데 문익환은 수유리 한신대 교무실에서 신분적으로 몰락하고 지성적으로 외로운 영혼들과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p345-346)
...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이 온통 분단의 귀신에 들려 있는 까닭인데, 가령 이승만은 여전히 정적이 나타나면 제거해버리는 비열한 통치를 지속하고 있었다. 새로운 국가를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권력을 사유화하면서 오직 경찰력에 의존하는 장기 집권을 꾀했던 것이다.
...
그리고 그 결과는 곧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드러나, 이제 갓 조직된 진보당의 조봉암은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부산시 영도구의 선거위원을 지낸 어떤 사람은 개표 현장을 본 순간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어서 등골이 오싹했다고 한다. 여기도 저기도 조봉암 표뿐이어서 어쩔 수 없이 조봉암 표를 가운데 넣고 상하로 이승만 표를 한 장씩 붙인 샌드위치 표 묶음을 만들었지만 이승만의 표는 상하로 붙일 것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선관위 발표에 따르면 이승만 505만표, 조봉함 220만 표였다. (p347-348)
당시 구시대의 틀을 깨고 나온 기독교장로회의 신학자들에게 아마도 4・19만큼 강렬한 충동을 준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김재준 목사는 즉시 한국 기독교의 회개를 외치기 시작했고, 깨어 있는 목회자들은 새삼 현실에 다시 눈뜨는 흥분과 참회를 체험했다. 그러나 누구도 문익환만큼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당시 한빛교회 청년 김창필이 목사님(문익환)께 유서를 남기고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죽은 것이다.
“기독교는 곧 아편이다”라는 명제에 나는 찬동하지 않겠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중독증에 걸려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분명히 ‘기독교 중독증’이라고 썼다. 죄에 대한 불감증과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는’ 증상을 드러내는 병. 종교성의 그늘 아래서 인간성이 죽고 존재의 온전성이 파괴된 대다수 기독교도들의 은총의 남용을 문익환은 자기비판을 하면서 비판했다. 한국 기독교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러면서 제시한 것이, 독일 나치스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에 가담해서 싸우다가 사형당한 독일의 젊은 목사 본회퍼의 기독교였다.(p349)
문씨네 가계는 이렇게 실로 3대에 이르는 십 수 명의 거물들이 한 지붕 아래서 공존의 훈련을 거듭한 끝에 순전히 토의와 자율로 운영되는 결사체(?)가 되었다. 이것은 이후 문씨네 가족과 다른 가족들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 되었다. 가족들은 매일같이 식탁에 앉아 심포지엄을 방불케 하는 토론을 벌였다. 그때서야 문익환은 자녀교육 이야기를 수필에 쓴다.
나와 내 아내와 내 형제와 내 자식은 모두 세상에 던져진 미지의 씨알들이다. 우리는 움이 틀 때에 한 번 놀란다. 잎이 날 때 또 한 번 놀란다. 꽃이 필 때 다시 한 번 놀란다. 열매가 열릴 때 진정 놀란다. 그리고 그 열매를 먹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인생을 놀라움으로 진정 알게 되는 것이다. 나나 아내나 형제나 자식에게서 어떤 움이 틀지, 그 움에서 어떤 잎이 날지, 또 자라서 어떤 꽃이 필지, 그 꽃이 지고는 어떤 열매가 맺을지 모르면서 키우고 가꾸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란 놀라움의 연속이다. ... 내 가정에서는 노랑꽃이 피었다가 빨간 열매가 맺게 되어 있는데, 분홍꽃이 피어야 하고 주홍 열매가 맺어야 한다고 결정해놓고, 그런 방향으로 가정을 이끌어가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놀라움의 연속이 아니라 실망의 연속일 것이다.(p365)
밥 먹는 속도가 유난히 느리고 식사시간이 긴 것은 문익환네 가족들의 특징이 되었다. 그 긴 식사시간 안에 그들의 토론식 가정문화가 담겨 있었다.(p366)
문제가 있다면 50세가 되어서도 아직 길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그를 말할 수 없이 위축시켰으며, 의기소침하게 했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요절한 송몽규나 윤동주에 비추어서도 그러했고, 안병무, 강원용 등 용정에서 은진중학교를 나온 민족주의적 기독교도들의 지성에 비추어서도 그러했으며, 김재준 목사의 다른 제자들이나 장준하 등 동경신학생 출신들과 견주어도 그러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이 우수했으며, 프린스턴 신학교까지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초라한 것은 그였다.(p372-373)
제7장 두드려라, 부서질 것이다
당시 문씨 형제의 관심은 산업문화의 병폐에 있었다. 산업사회는 단지 기계문명만을 발달시킨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온통 물질 중심으로 묶어버렸다. 삶의 보람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하는 것은 소유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유하는 것만을 성공으로 여기게 만드는 제도였다. 하여, 무한경쟁과 물신화를 불러일으켜 인간성과 환경을 동시에 파괴했다. 소유 만능이 아니라 더불어 위하고 아끼면서 공유하는 사랑의 삶이 들어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창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많이 생산해서 골고루 소유하자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공산주의 제도도 개인의 보람을 확대시키고 삶의 태도를 성숙시킬 수 있는 대안이 못 되었다. 민중운동은 그래서 발전했다. 공동체가 깨어진 상태에서 개발독재에 휘말리면서 사회의 구성원들은 걷잡을 수 없이 파편화되고 분절화되는데, 식어가는 연대감을 다시 살리고 공동의 선을 마련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인가?
...
“꿀단지는 다 집에다 숨겨놓고 몸만 왔다갔다하는” 관습적 교회 활동의 대안을 찾는 실험이었다.
이스라엘의 키부츠 공동체, 미국의 코이노니아 공동체들을 공부하기도 하고 경제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 땅을 사고 집을 짓는 문제, 아이들 교육 문, 심지어는 숟가락, 젓가락을 몇 개 가져와야 할지까지 꼼꼼하게 준비했다. ... 개인주의와 권위주의와 물질만능주의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들이며 ‘나’ 대신 ‘우리’, ‘물질’ 대신에 ‘생명’을 소중히 가꾸고 즐기는 삶을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p411-)
-> 대안 공동체...
박정희는 정치적으로는 극단의 권위주의를, 경제적으로는 대대적인 중공업 추진을, 대외적으로는 분단 상황을 이용하는 정책으로 발 빠르게 대응했다. 위기의 물꼬를 틀어 막기 위하여 중앙정보부원들을 곳곳에 풀어놓은 상태에서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 박정희의 율사들은 새로운 헌법을 쓰면서, 거기에서 대통령 임기에 대한 모든 제한을 제거하며, 내각과 심지어 국무총리까지 임명하고 해고할 수 있는 권한,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지명하는 권한, 시민의 자유를 중지하고 파괴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자신들이 입안 과정에서 빠뜨린 것을 무엇이든 다시 법령으로 다스릴 수 있는 권한까지를 포함시켰다.(p419)
문동환과 암병무가 정치교수 1호가 되어 1975년 6월 12일자로 문교부의 압력에 의해 학교에서 쫓겨나고, 얼마 안 되어 서남동, 이우정, 이문영 등도 실직 교수가 되었다. 그 실직 교수들이 문동환의 주도로 ‘갈릴리 교회’라는 특수한 교회를 만들 때 문익환은 기꺼이 동참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열린 첫날, 장준하가 약사봉에서 등산길에 실족사했다는 전화가 왔다.
...
갈릴리 교회에 장준하를 참석시키기로 하고 시간이 안 되어 일 주일을 미뤘는데, 그 사이에 그만 사고가 난 것이었다.(p422-423)
박정희와 장준하의 불화는 뿌리 깊었다. 장준하는 합법적인 제도정치의 틀 안에서 박정희와 싸우기 위하여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었으며, 박정희에 대한 비방으로 ‘구속’의 첫 발을 내디딘 사람이었다.
...
어떤 사람이나 다 일정 자격만 갖추면 모두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 박정희만큼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대통령을 시켜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장하고 했던 것이다.(p423-424)
일제에 맞서 싸울 것인가 탈출할 것인가 부역할 것인가 회피할 것인가를 준엄하게 답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윤동주도 장준하도 박정희도 문익환도 똑같이 그 역사의 물음 앞에 서 있었고, 그에 어떻게 응답했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이 결정되어버렸다.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조선인을 끌고 갈 때 윤동주는 학도병으로 무기를 받아서 그것을 일본에게 겨누는 길을 구상하였고(이것이 그를 옥사시킨 이유였다), 장준하는 학도병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넘어갔으며, 문익환은 만주 봉천으로 회피하여 그리스도의 길을 걸었다. 그때 그들은 모두 일제에게 충성하여 윤동주들을 죽이고 장준하들을 공격하는 친일부역자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한데, 박정희는 그 친일부역자 안에서도 가장 용서하기 어려운 최상급의 길을 선택했었다. 1942년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금메달을 수여받음과 동시에 졸업생을 대표하는 답사를 낭독할 때 그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만주국의 왕도락토를 지켜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는 성전에 차며, 저는 벚꽃처럼 산화하겠습니다.
성적도 우수한 조선인 생도가 일본 천황에게 이토록 무서운 충성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박정희는 일본 육사에 입학할 수 있는 특전을 얻었다. 그리하여 다시 1944년 일본 육사 57기를 3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오카모도 미노루’라는 이름의 일본군 소위가 되었다. 그후로도 박정희는 충성경쟁에서 앞서가며 일본 14연대를 거쳐 만주국 보병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전속돼 주로 만리장성 부근의 팔로군 활동지역에서 게릴라 소탕전을 독전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
한 사람은 민족의식을 일찍부터 깨우친 광복군 출신이요 한 사람은 출세욕에 불타는 일본군 장교였으니, 장준하는 박정희의 윤리적 약점을 절대로 용서하려 들지 않았다. ... 장준하가 용서할 수 없는 점은 기회주의적 처신 때문에 역사의식이 형성될 턱이 없는 자가 감히 위정자를 자처하고 나선다는 점이었다. (p424-426)
사람들은 그를 민족민주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생각했으며, 세간에서는 그에게 ‘재야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런가 하면 그가 기자회견을 통해 분열된 범야권 단일화를 제의하자 윤보선 전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신민당 총재, 양일동 통일당 당수가 한 자리에 앉는 4자회담이 열렸으며, 그 자리에서 장준하가 제의하고 촉구한 야권 통합에 무조건 합의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곧이어 다가오는 8월 15일을 기해 김대중과 장준하 간에 모종의 중대결단을 내리기로 약속한 가운데, 그의 상봉동 집에는 시도 때도 없이 곧잘 주먹만한 돌덩이가 날아들곤 했다. 그러던 8월 13일, 문익환은 이우정, 문동환, 안병무, 서남동, 이문영 등과 갈릴리 교회를 시작했고 바로 그날 장준하의 부음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문익환은 장준하가 실족사 했다는 자리에 쏜살같이 달려가서 여러 가지 정황을 수집해본 결과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타살이라고 확신했다.(p430)
문익환은 민족열사 장준하 영결식의 장례위원장을 맡았는데, 그때 이미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 유난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정희 유신독재를 호되게 비판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문익환 목사였다. 기자로서 이런저런 현장을 많이 보고 섬뜩한 일도 겪어보았지만 서슬 퍼런 유신독재의 괴수를 향해 그렇게 직격탄을 날리는 소리를 들으니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었다. 그 얼굴과 목소리는 기독교회관 강당 뒷자리의 그 부드럽과 유순한 모습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
...
문익환은 장준하의 관을 당 속에 내리면서 약속했다. 그의 죽음을 땅에 묻어서는 안된다! 그래, 네가 하려다 못한 일을 내가 해주마!(p432)
장준하를 땅에 묻지 않고 역사 속에 살리는 일로 그가 생각한 첫 사업은 ‘사상계에 실린 장준하의 사설들을 모아 책을 펴내는 것이었다.(p435)
바로 그 시기에 개진된 베트남에 대한 사색은 문익환의 세계인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제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제국주의에서 해방된 민족들은 당연히 자주독립을 얻어야 했다. 그런데 이미 물러난 구제국주의 국가들이 다시 돌아와 재침략을 꾀했는데, 베트남은 그렇게 해서 다시 들어온 프랑스를 순식간에 격퇴시켜버렸다. 그러자 다시 미국이 들어와 20세기의 양심을 실험한 전쟁이라는 야비한 무력 행사에 나섰다. 부패하고 사대적인 남베트남의 매판세력은 미국을 등에 업고 반외세 민족세력과 싸웠다. 문익환은 사회주의 정권을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베트남 전쟁의 본질이 민족해방전쟁이요 통일전쟁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
1974년 ‘구정 공세’ 때 월맹군이 사이공 시내로 들어가 미국대사관까지 점령하는데도 사전에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은 것은 사이공 시민 정체가 월맹군 편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 ‘민이 하나가 된다면 세계 최강의 힘을 가진 외세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사회주의자이기 이전에 민족주의자였으며,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전 민족의 뜻을 하나로 모은 영웅이었다. (p436-437)
때마침 그해는 ‘동아일보 광고사태’를 놓고 민심이 폭발하는 “민족사의 빛나는 한 장”이 열리고 있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노조를 만들고 ‘자유실천선언’을 발표하면서 치고 나가자 중앙정보부가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넣어서 광고를 주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서 백지 광고란을 의견광고로 채우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것이다. ... 그때 가장 많이 게재된 의견이 윤동주 ‘서시’의 첫 구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었다.(p438)
‘장 형이 있었더라면, 세상이 이렇게 조용하지는 않았을텐데. 쉰 일곱번째 맞는 3・1절을 그냥 지나가서는 안 될 것 같아서 해보는 소리였다. 군사독재의 쇠사슬에 눌려서 말 한마디 못 하고 있는 질식할 것 같은 때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은 후세에 남겨야 될 것 아닌가?’
...
오늘로 3・1절 쉰일곱 돌을 맞으면서 1919년 3월 1일 전 세계에 울려 퍼지던 민족의 함성, 자주독립을 부르짖던 그 아우성이 쟁쟁이 울려와서 이대로 앉아 있는 구국선열들의 피를 땅에 묻어버리는 죄가 되는 것 같아 우리의 뜻을 모아 민주구국선언을 국내외에 선포하고자 한다.
(p441-442)
제8장 꿈을 비는 마음
역사학자 강만길은 이렇게 평가한다.
문익환에게는 구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에 의한 1970년대의 ‘유신’통치가 일본제국주의자 조선총독에 의한 1910년대의 무단통치에 비유되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식민지배를 종식시키려는 역사의식을 가진 종교인을 중심으로 발단된 사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역사의식을 가진 종교인으로서 1976년 3・1절을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p476)
1976년 3월 10일, 당국은 3・1사건을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전복 선동사건’으로 규정하면서 관련자 전원을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입건한다고 발표하였다.(p483)
문익환으로 인해 유신정권이 묵사발이 된 첫 장소는 법정이었다. 피고들의 구성이 더없이 화려했다. 전직 대통령, 한 번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던 사람, 전 외무장관, 한국의 사상가요 양심의 상징, 야당의 거물, 기독교계 장로, 신구양 교회의 지도자들, 대학교수, 거기에 남자만 있으면 그림이 안 되니까 여성 그리고 변호사들까지 대거 참여해 극적 효과를 높이고 있었다.(p486)
재판은 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려 매주 한 번씩, 대개 화요일에 진행되었다. 당국의 통제는 엄격해서 방청하려는 사람들을 막고 몸수색을 하고 핸드백까지 다 뒤졌다.(p487)
공방은 이내 피고인들이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강의실이 되어버렸다. 3・1민주구국선언서에 스르는 정치, 경제, 외교,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논리적으로 설파하고 긴급조치 유신헌법 등의 부당성을 반론의 여지없이 논박해버리는 김대중의 해박함과 달변은 보는 사람을 질리게 했다. ... 안병무, 서남동은 민중신학을 전개하고, 문동환은 문교정책이 어떤 각도에서 세워져야 할지를 알게 되ᄋᅠᆻ다고 김대중이 감탄할 만큼의 교육학 강의를 펼쳤다. ... 언론은 이 법정을 ‘민주교실’이라고 이름지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민주대학 강의실에 수업 받으러 간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었다.(p488-489)
아내들은 무수히 많은 ‘시각적인 보도자료’를 생산하게 되었다. ... 접는 부채에 ‘공개 재판하라!’는 구호를 써두었다가 일정한 장소에서 한꺼번에 부채를 펴기도 하고, 양산에 큰 글씨로 ‘민주주의 회복 만세’, ‘공정한 재판을 하라’등을 써두었다가 기습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신이 나서 몰려드는 것은 외신기자들이었다. ... 한국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독재국가인가 하는 것을 그만큼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은 없었다.(p495)
아내들을 이끌고 형사를 따돌리는 일에 박용길은 금방 고수가 되었다. 태시를 잡는 척하다가 갑자기 아무 버스나 잡아타기도 하고, 버스를 타는 척 택시를 타버리기도 했다.(p496)
이 같은 과정은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거시었다. 1974년 갈릴리 교회에서 만들어진 구속자가족협의회가 3・1사건 가족들의 활발한 활동을 거치면서 곧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민가협)로 성장해가는 것이다.(p499-500)
내세의 축복을 아름답게 그려줌으로 현실의 괴로움을 잊게 하기도 하고, 가난한 형편을 하느님의 예정으로 믿고 참고 나가도록 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남이 잘사는 것은 하느님의 애정이요 축복이기 때문에 바라볼 필요도 없고, 오늘의 가난 속에서 하늘나라를 쳐다보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만을 소중하게 여기고, 위로를 받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되면 종교는 아편이 됩니다.(p508-509)
‘정치와 종교의 통일’은 문익환이 신학을 시작한 후 최대의 고민이요 과제였다. 신학의 주제가 언제나 ‘지금 이곳에서의 삶’에서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 그 때문에 가능했다.(p513)
제9장 예언자적 질주
12월 13일자 조간은 그에게 또다시 어두운 앞날을 예시하는 최초의 징조라고 할 수 있었다. 1면 톱기사가 이랬다.
계엄령이 계속되는 시내에서 총격전 끝에 계엄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 헌병에게 체포・연행되었다.
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 정승화는 박정희가 시해되던 날 밤, 김재규의 호출로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내란동조 혐의를 받고 있었고,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전두환 본부장은 같은 달 12일 오후 8시, 정 참모총장의 체포를 위해 헌병대를 파견했다. 그 헌병대가 참모총장 공관의 경비병력과 총격전을 벌여 장교 1명 병사 2명이 사망했으며, 4명이 중상, 16명이 경상을 입었다. 나중에 ‘12・12사태’로 불리는 이 사건의 본질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정 총장에게 일으킨 명백한 군사반란이었다.(p552)
그러던 5월에 신군부는 재야 정치인들을 탄압하며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엮어 문익환도 조사를 받게 되었다. 책 그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있는데 어찌 옮겨 적어야할지...
8월 4일, 용산 국방부의 군사법정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피고들은 자신들의 혐의가 정확히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모르는 상태로 재판에 임했다. ... 비공개 군사재판! 내신기자는 한 사람도 들어오지 못했고, 외신기자 두 명에게만 방청권이 주어졌다. ... 가족들은 육군본부 입구에서 군용버스에 태워졌는데, 버스는 재판정 건물에 다다르기 전에 마당에 세워져 모든 소지품이 압수되었다. 특히 필기도구는 절대불가였다. ... 재판정 안에는 재판관이 잇는 단상만 빼고 3면 전체가 제복을 입은 헌병들로 메워졌다. 피고석은 그 앞이고, 피고들은 온몸이 묶인 채 양편에 헌병들을 달고 있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여서 민둥머리의 사복 청년들이 가족 한 사람당 두 명씩 붙어서 감시를 했다. ... 피고 가족들은 성명서를 쓸 때마다 재판이 개판이라는 뜻에서 “검사도 검사, 판사도 검사, 변호사도 검사”라는 표현을 단골로 썼다. ... 어쩔 수 없이 가족들은 각기 한 사람씩 역할분담을 했다. 재판관이 하는 말만 외우는 사람, 검사관이 하는 말만 외우는 사람, 변호사가 하는 말만 외우는 사람 등으로 나누어서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이 되면 얼른 밖으로 나와서 잊어버리기 전에 자기가 외운 것을 읊어내고 그걸 받아적기로 한 것이다. (p585-589)
‘인권외교’를 기치로 내건 카터가 낙선하고 미국 군수자본가들의 지원을 받는 레이건이 당선되었다는 것은 지구촌의 정세가 전쟁의 암운을 드리우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수자본가들의 관심은 무기 장사에 있으며, 그들이 거느린 영화산업을 통해 발탁된 배우 출신의 정치인은 대통령이 되는 순간 필히 전쟁을 선호하는 정책을 펼치게 되어 있었다. ... 전두환 세력에게는 희소식도 그런 희소식이 없었다.
그와 때를 맞추어 한국 사회도 변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세력은 먼저 악명 높은 중앙정보부를 폐지하고 국가안전기획부를 발족했으며 강압적으로 언론기관을 통폐합시켰다. 또한 기존의 정당과 정치가들의 활동을 모두 정지시키고 한국 정치 지형도를 인위적으로 재편해버렸다.... 1981년 2월 새 헌법에 의해 대통령선거인단의 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전두환은 90.2퍼센트라는 압도적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저 유명한 ‘제5공화국 시대’를 열었다.(p605-606)
국토의 서남단을 지리적으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지도를 그려 섬 하나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섬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는 비상계엄령이 내려져 있었다. 나머지 지역의 국민들은 눈이 가려지고 입에 재갈이 물렸다. 섬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그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 그 상태로 전쟁이 일어났다. 한 번 동란을 겪은 후 무려 30년 동안이나 실전을 준비해온 국군을 한편으로 하고, 대학생, 실직 가장, 청소년, 부랑아, 아녀자들로 구성된 폭도(?)를 다른 한편으로 한, 실로 경악할 만한 전투였다. 첨단의 무장을 한 대한민국 국군은 특전단을 전면배치하고 사방에 응원군을 대기시킨 상태에서 베트남전을 방불케 하는 시가전을 펼쳤다. 폭도라는 이름의 시민군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민간인 대오를 이끌고 시민들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며 지구전을 꿈꾸었다. ‘미국이 알면 도와줄 것이다, 아니 세계 민주주의 시민들이 악독한 군사정권을 압박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지역의 국민들은 왜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는가?' 시민군은 사무치는 외로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어갔다.(p606-607)
->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설명
제10장 고독 속에서 불타는 연대기
문익환은 67세에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의장을 맡는다. 이 조직은 여러 재야단체연합체여서 여러 가지 의견충돌이 있었다.
재야의 회의는 때로 성과라고는 없는 ‘열매 없는 흥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는데, 그는 하필 그런 회의를 넌더리나게 싫어하는 성미였다. 배운 사람들의 입심에 진저리를 치거나, 급하다고 생각될 때는 의논 없이 혼자서 행동하여 말마디나 하고 싶은 논객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는 그 같은 기질을 발휘하면서도 연대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말 그대로 기적같은 리더십을 만들어냈다.(p623-624)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한미연합사령관에 있고, 한미연합사령관은 주한미군사령관이 겸하고 있다. 미국은 당시 광주학살을 자행했던 제7공수특전단의 투입을 거부하여 광주 대학살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제7공수특전단과 제20사단의 병력 투입에 동의했는가? 미국의 지원을 업고 들어선 전두환 군사정부가 학원 탄압을 무자비하게 자행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학생들을 강제징집, 제적, 투옥하였으며, 강제징집된 6명의 학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민통련은 강력하게 항의했다.(p626-627)
1986년 5월 20일 오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광주항쟁의 민족사적 의의’라는 주제를 걸고 문익환을 초청하는 강연회를 가졌다. ... 눈앞에 빤히 바라보이는 학생회관 옥상에서 원예과 1학년 이동수 군(23)이 온몸에 불을 붙여 뛰어내린 것이다. ... 경찰은 이를 문익환이 선동한 결과라고 뒤집어씌우면서 분신의 배후조종자로 지명수배했다.(p631)
이 사건과 관련한 재판정의 모습이 문성근에 의해 희곡 대본처럼 기록되어 있다. (p634 이하)
민통련의 최대 과제는 민주화와 민족통일입니다. ... 민주헌법의 조건으로 첫째, 대통령직선제, 둘재, 인권이 철저하게 보장된 민주헌법, 셋째, 통일지향적인 헌법입니다. ... 민통련의 원래 강령은 민중궐기론입니다. ... 저는 정부가 국민의 압력 없이 민주개헌을 할 것이라고는 추호도 믿지 않습니다. ... 방법으로는 서명운동, 대중집회 등이 있습니다. (p649-651)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워지는 법이다. 탄압의 강도가 최고조에 이른 그 겨울의 어느 순간에 결정적인 반전의 시기가 오고 있었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에서 물고문을 받다가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민청련 의장 김근태 고문사건과 권인숙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의 뒤를 이어 터진 이 사건으로 국민들의 원성이 전국적으로 드높아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를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오히려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 6월 9일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서 중태에 빠지고 말았다. ... 전국 18개 도시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목청이 울리고 시위대와 시민은 하나가 되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명동으로 모여든 사람들, 어디선가 시작된 애국가 그리고 박수와 환호 소리, 만세 소리. 처음에는 학생과 노동자들에 의해서 촉발된 시위에 넥타이부대가 가세하자 시위대 주변의 모든 건물에서 창문과 옥상이 열리고 일제히 꽃잎 같은 지폐 조각들이 흩날렸다. 차량 속에 있던 삶들은 경적을 울렸고, 거리에 나선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 그 여파는 6월 하순까지 지속되어 26일, 전국 34개 도시에서 무려 1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은 6월 20일, 백악관에 한국대책특별반을 편성해 운영하는 등 당황한 빛을 보이더니, 한국 민중의 시위가 반미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여 직선제 개헌 수용을 종용했고, 전두환 정권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내세워 6・29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p659-661)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통련은 어떤 후보를 지지할지 갈림길에 놓였다.
고민 끝에 내린 대안은 두 김씨를 상대로 ‘정책 세미나’라는 일종의 공개 심사를 해보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민통련은 종묘 옆의 백천여관에 널찍한 방을 얻어 김종철, 이해찬, 임채정, 김병곤 등 젊은 실력파들을 모아 사흘을 밤샘한 끝에 질의서를 만들었다. 통일, 외교, 국방, 교육, 문화, 농수산, 교통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정견을 묻는 내용이었다. ... 결과는 너무도 분명했다. 김영삼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할 뿐 아니라 사안마다 시각의 차이를 보였지만 김대중은 조목조목 대답할 뿐 아니라 민통련에서 애써 만든 질의서의 오류까지 지적하여 질문자들을 쩔쩔메게 하기도 했다. (p667)
그날 밤 개표 방송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했다. 예를 들면, 밤 11시 29분에 86.3퍼센트가 진행된 부산의 각 후보 득표상황은, 노태우 555,963표, 김영삼 957,886표, 김대중 190,095표, 김종필 43,844표였는데, 그로부터 21분 뒤인 12시 정각에는, 노태우 557,935표, 김영삼 960,021표, 김대중 58,745표, 김종필 43,969표가 되었다 개표가 진행될수록 단 한 표라도 많아지는 것이 원칙이건만 21분 동안에 김대중 후보는 131,350표나 줄어들어 있었다. 민통련 간부들은 기가 막혔다. 구청 마당에는 정체불명의 투표함이 네 개나 뒹굴고 있고, 텔레비전에서는 컴퓨터 집계라는 미명하에 도깨비놀음이 벌어지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다. ... 대책본부가 이틀 밤을 새우고 나서 돌아온 사흘째에 구로구청은 죽음의 장소로 바뀌었다. 많은 사람이 옥상까지 쫓겨 올라갔다가 경찰에 떠밀려 수십 명이 5층 옥상에서 시멘트로 된 마당에 떨어진 것이다. 당시 현장에서 불구자가 된 양원태의 증원 요지는 이랬다.
12월 18일 오전 6시50분, 쇠파이프를 든 백골단이 새까맣게 몰려와 기겁을 한 농성자 수십 명이 5층 옥상으로 올라가 비상구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버텼으나, 30분도 안되어 비상구가 깨지고 백골단들이 마구 휘두르며 갈기는 쇠파이프를 피해 뒷걸음질 치다가 아래로 떨어졌는데, 하늘이 도운 듯 정원의 회양목에 걸려 허리를 꺾이는 부상을 입고 살았다. (p672-673)
제11장 거인
문익환은 분단으로 인한 불안을 종식하고 아시아 지역의 평화, 냉전체제의 마감을 위해 북한으로 갔다.
문익환의 공식일정은 평양 봉수교회에서 부활절 예배를 보는 것부터 시작됐는데, ... “저는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요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
그의 설교는 부활에 대해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북측 사람들의 인식을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예수의 죽음은 갈릴리 민중의 죽음이었습니다. 기다리던 구원, 자유와 해방이 예수와 함께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따르던 민중은 예수의 죽음과 함께 죽었던 겁니다. 그의 죽음이 민중의 죽음이었다면, 그의 부활은 민중의 부활일 밖에 없습니다.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난 민중의 모임이 교회였던 것입니다. ... 민족통일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일만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통일 운동은 부활신앙을 역사 속에서 사는 일입니다.”(p713-714)
이후 김일성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북한에서 돌아온 문익환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고무・찬양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용시키는 국가보안법이 잘못된 것이지요. 서로 고무・찬양해야 통일이 잘되는 것이에요. 내가 주 아무개 검사에게 심문받을 때 “이봐 주 검사? 집에서 부인하고 이불을 덮고 사랑할 때도 고무・찬양해야 잘 된다구”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그야 그렇지요”하며 웃더군요.
“검사님이 공소장 낭독하는 것을 들으니 ‘북괴’, ‘북괴’하는데, 노 대통령이 북의 김 주석을 만날 때 ‘당신, 북괴 수령이오?’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어요? 한 입으로는 북괴! 또 한 입으로는 민족공동체! 정부의 정신분열증은 전 국민에게 정신분열증을 일으키게 하고 있습니다.”
...
“45년이나 남이 그어놓은 금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아직도 이 금이 지워질까 봐 와들와들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나라의 역사가 맡겨져 있다는 것을 참으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문익환은 평소에 주장해오던 분단의 병폐를 낱낱이 지적했다. 민족문제를 고민하다가 절망한 젊은 대학생들의 죽음도, 국제사회에서 당하는 분단독재의 수모도, 1천만 이산가족의 눈물도, 노동자・농민의 가난도, 남북 권위주의 체제의 강화도, 그 모든 원인이 쌍방간에 한 해에 쏟아붓는 10조 원에 이르는 분단 비용에 있음을 성토했고, 남들이 우리 땅에 그어놓은 분단선을 걷기 위해 서로 적대할 것이 아니라 ‘고무’ ‘찬양’할 것을 역설했다. (p745-746)
제12장 황혼이 없는 생애
당국은 문익환의 방북을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의 빌미로 삼았고, ‘5공비리 청산’,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을 요구하던 재야세력은 공안정국의 한파에 휘말렸다.(p755)
민주세력 안에서 군부와의 야합을 통해 선거에서 다수표를 차지한 김영삼 정부는 많은 변절자들을 권력의 사람으로 징발해갔다. 그리고 그 변절자들의 이벤트에 가까운 개혁 공세는 민주세력을 대단한 혼란에 빠뜨렸다(p771)
에필로그
전기를 읽었다기보다 한국 1900년대史를 읽은 것 같다. 하.. 뭐라 쓸 말은.. 없는데 읽으며 계속 울고 싶었던 역사 이야기..
갈 길을 몰라 방황하던 이야기가 있어서 위로되었고, 여기저기 피해?다닌 이야기에도 위로받았다. 참. 사람 인생은 어찌될지 모르는 것 같다. 앞으론 더 오래들 살텐데 정말 어찌될지 모르겠다. 나의 삶도 나중에 역사 속에서 했던 선택들로 이루어지겠지? 주어진 순간 순간들 최선을 다해 살아야지.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2013.2.16.
'역사 > 한국현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발 사진종합(2013.12.18.-30.) (0) | 2014.01.26 |
---|---|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전문 (0) | 2013.06.06 |
운명이다 (2012.10.31.) (0) | 2013.06.04 |
문재인의 운명 (2013.3.25.~27.) (0) | 2013.06.04 |
내가 살던 용산(2012.12.20.) (0) | 2013.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