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힐링캠프 재방송을 보고 이 책을 바로 샀다.
음.. 어떻게 정리할까? 이런 전기류를 읽고 나면 정리하기가 애매하다. 그때그때 느낀건 많은데 읽다보면 마치 소설책 읽듯 정신없이 읽어버려서 책이 너무 깨끗한..
1부 만남
1부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의 만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1982년 8월,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서 판사를 지망했다. 연수원 성적이 차석이어서, 수료식에서 법무부장관상을 받았다. 사법고시 합격자 수가 많지 않던 때여서, 연수원을 마치면 희망자 전원이 판사나 검사로 임용됐다. ... 그때가 82년이었으니, 내가 시위로 구속된 75년은 불과 7년 전 일이었다. 사실 75년 4월에 유신반대 시위를 했다고 하면 더 설명이 필요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대답하자 “그때가 위수령 때인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위수령은 그 보다 몇 년 앞선 1971년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유신헌법 만들땐가?” 이러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위수령, 유신선포와 유신헌법 제정, 긴급조치 등 1970년대의 역사 흐름을 쭉 설명해야 했다. 그분은 법원 내에서 판결문 잘 쓰기로 명성이 높았고, 나중에 대법관까지 하셨던 분이다. 그런데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받으며 저항했던, 그 때문에 시국사범이 돼 투옥되고 재판받아야 했던, 엊그제의 역사를 법원 고위직에 있는 분이 모르다니 믿을 수 없었다. 판사들이 현실세계와 동떨어져 사는 모습을 본 셈이었다. 씁쓸했다. 결국 임용이 안 됐다.(p23-24)
“사람은 친구를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고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입니다” 이렇게 인사를 했다. 선대본부장이라는, 체질에 맞지 않는 직책을 맡아준 후배에게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는 나이도 여섯 살 차이가 나고, 고시도 5년 위면 대선배다. 그런데 그 말씀 덕분에 나는 지금도 과분하게 ‘노무현의 친구’라는 호칭을 듣고 있다.(p31)
노변호사와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물론 먼저 기반을 잡은 그분은 좀 넓은 평수 아파트를 소유해 살고 있었고 나는 작은 평수에 세 들어 살고 있었지만, 편하게 교류했고 마음을 나눴다. 댁에 자주 놀러가기도 했고 그 분 고향마을인 봉하에 함께 따라가기도 했다. 변호사 사무실 전 직원이 1년에 두 번 정도 가족들까지 데리고 야유회도 가는 인간적인 분위기였다.(p33)
시국사건과 재야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노 변호사와 나는 두 가지를 각별히 신경 썼다.
첫째는, 우리 스스로 깨끗해야 했다. 당시 독재 권력이 흔히 쓰는 수법을 잘 알고 있었다. 비리나 약점을 찾아 협박하거나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수법이다. 뒷조사로 탈세, 사생활 비리 등을 캐내 사람 망신 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신세 망치고, 민주화운동에도 누를 끼칠 수 있었다. 대의와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절제하고 조심했다.
...
둘째는, 시국사건에서도 단지 변론 뿐 아니라 수사와 재판절차까지 형사소송법의 규정을 관철하려고 노력했다. ... 내가 변호사 개업할 당시만 해도 법정에서 형사소송법을 지키지 않는 관행이 수두룩했다. 피고인을 서서 재판 받게 하는 건 기본이었다. 포승줄로 묶어놓고 수갑을 채워서 재판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나하나 법조문을 들이대며 시정할 것을 재판장에게 요구했다. “수갑을 풀어 주십시오”, “포승을 풀어 주십시오”, “의자를 준비해서 앉게 해 주십시오.”(p43-45)
나는 ‘변호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선은 여기까지다’라는, 스스로 설정한 행동의 한계가 있었다. 나 뿐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변호사는 변호사의 방식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노 변호사는 그렇지 않았다. 경계가 없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그대로 행동했다. 후일 정치인 노무현도 같았다(p48)
6월항쟁은 전국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이었지만, 나는 그 운동의 중심을 서울이 아닌 부산으로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부산에서 제일 먼저 국본을 결성했고, 기간 내내 시위를 가장 치열하게 전개해 타 지역 시위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보다 결정적으로는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돼 서울 등 타지역의 시위가 급격히 위축됐을 때 부산에서 가톨릭센터 농성과 함께 더 많은 시민들이 더욱 치열하게 시위를 전개함으로써 항쟁의 불꽃을 되살렸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항쟁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p64)
대우조선 노동자들이 거리 시위를 하던 중 이석규씨가 최루탄에 맞아 숨진 비극적 사고였다. 서울에서 이상수 변호사, 부산에서 노 변호사가 현지에 가서 그들을 돕다가 ‘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걸렸다. ‘3자 개입’은 당시 흔히 악용되던 악법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장례식 방해는 어이없는 법의 올가미였다.
... 아마 대한민국 역사상 장례식 방해라는 죄명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한참 후에 민주당 백원우 의원이 노 대통령 영결식에서 같은 혐의로 기소됐다.(p67-68)
좌절된 6월항쟁의 성공을, 정치를 통해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찬성의견도 많았다. 나는 찬성했다. 본인이 하고 싶어 한다고 느꼈고, 또 출마하면 당선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 변호사는 개인적 야심은 없었다. 단지 국회의원이 되면 노동자들을 더 잘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변호사 업무정지 중이었던 것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국 노 변호사의 정치진출을 대체로 찬성하는 쪽으로 논의가 정리됐다. 본인도 그렇게 결단을 내렸다.
가는 분이나 보내는 사람들이나 개인적 입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산민주화운동권을 대표해 파견돼 간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 진영이 선거에 적극 결합했고, 선거운동도 운동권 방식으로 마치 민주화운동을 하듯이 했다.(p70-71)
그 후 그는 대선 행보를 본격 시작했는데, 그 내용이 여느 정치인들과 달랐다. 주변의 참모들은 당연히 조직을 키우고 돈을 준비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그 대신 각 분야별 전문가들로 학습팀을 꾸려 국정운영에 필요한 학습을 열심히 했다.
외교안보, 교육, 복지, 경제 등 분야별로 젊은 전문가들을 청해 브리핑을 듣고 토론했다. 아마 전체 일정의 절반 이상을 학습에 몰입했을 것이다. 그때 학습에 도움을 줬던 전문가들 중에 후일 참여정부에서 발탁된 이들도 꽤 있다. 외교안보분야의 이종석 장관 같은 분이 대표적이다. 대선 때 그가 보여준 발군의 토론 능력과 대통령 재임 중 보여준 탁월한 지적능력은 그 학습을 통해 이뤄졌다. 참으로 노무현다운 대선준비였다.(p95)
2부 인생
2부에서는 문재인의 개인 史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 부모님 고향은 함경남도 흥남이다. ... 부모님은 1950년 12월 흥남철수 때 고향을 떠났다. ... 미군이 피난민들을 데려다 준 곳은, 경남 거제도에 임시로 마련된 피난민 수용소였다. ... 아무 연고없는 남쪽에서 제대로 생활할 수 있는 준비도 전혀 없이 낯선 땅의 삶을 시작했다. ... 아버지는 포로수용소에서 노무 일을 했다. 어머니는 거제에서 계란을 싸게 사서 머리에 이고, 나를 업은 채 부산에 건너가 파는 행상을 했다.(p106-109)
아버지는 원래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실패한 이후에는 더욱 말수가 없어졌다. 나는 우리 집의 가난도 아팠지만, 분단과 전쟁 때문에 아버지가 당신의 삶을 잃은 것이 늘 너무 가슴 아팠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서 제적당하고 구속됐다가, 출감 후 군대에 갔다 왔는데도 복학이 안 되던 낭인 시절, 내가 제일 어려웠을 때에 돌아가셨다. 불행했던 삼이 불쌍했고, 내가 잘 되는 모습을 조금도 보여드리지 못한 게 참으로 죄스러웠다.(p111)
급식을 나눠주는 그릇이 없었다. 강냉이떡은 그래도 괜찮았지만 강냉이죽일 때가 문제였다. 도시락을 싸온 아이들의 도시락 뚜껑을 빌려서 죽을 받아먹도록 했다. 도시락 뚜껑이 부족할 때엔 2명이 교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나도 그렇게 급식을 받았다. 도시락 뚜껑을 빌릴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다. ‘학교에서 그릇을 제공해 주거나, 그게 어려우면 집에서 그릇을 가져오게 하면 될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개인적 경험 때문에 요즘 무상급식 논쟁을 관심 있게 본다. 참여 정부 때 ‘방학 중 결식아동’에 대한 급식을 처음 시작했다. 첫 방학이 끝난 후 점검해 봤는데 전달률이 뜻밖에 낮았다. 원인을 알아보니 아이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안흔 전달방법이 강구되지 않아 차라리 굶는 쪽을 선택한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급식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아이들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p117-118)
-> 이건 참..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 알 수 있을까?! 휴..
가능하면 혼자서 해결하는 것, 힘들게 보여도 일단 혼자 해결하려고 부딪혀보는 것, 이런 자세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p119)
-> 누가해주지 않으니까. 누가 밥을 차려주는 거 아니고, 누가 공부하라고 하는거 아니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고민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거..
가난이 내게 준 더 큰 선물도 있다.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버티게 한 나의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p119)
점차 학교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책을 읽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습성은 아버지 덕이 컸다. 아버지가 장사를 다닐 때 한번 장사를 떠나면 한 달 정도 만에 돌아오시곤 했다. 그럴 때 마다 꼭 내가 읽을 만한 동화책이나 아동문학, 위인전 같은 것을 사 오셨다. 안데르센 동화집, 강소천 선생의 아동 문학, 어린이용 플루타르크 위인전 같은 책들이었다. ... 책 읽는 재미를 알게 되고 난 후로는 늘 책에 굶주렸다. ... 새 학년이 되면 나는 내 책뿐 아니라 3년 위인 누나 책까지 뒤져 읽을거리들을 한꺼번에 다 읽어치우곤 했다. 국어나 사회생활 책에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도서관을 알게 됐다. 읽을 책이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그 재미에 빠져 2학년 때 3개월 가량을 매일 도서관 문 닫을때까지 있따가 의자정리까지 도와준 다음 집으로 돌아오기를 계속한 일도 있었다.(p123)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 도서관에 가거나 책을 대출받아 읽는 것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계속됐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소설에서 시작해 외국소설로, 그리고 점차 다른 책들로 독서영역이 넓어졌다. 닥치는 대로 읽었기 때문에 ‘사상계’같은, 의식을 깨우치는 잡지도 비교적 일찍 접했다. 야한 소설책도 일찍 읽어봤다. 체계적인 계획이나 목표 없이 마구 읽었다. 중・고등학교 6년간 무척 많은 책을 읽었다. 독서를 통해 세상을 알게 되고 인생을 알게 됐다. 사회의식도 생겼다.(p123-124)
-> 아.. 중고등학교 다닐 때 책 쫌 많이 읽을걸.. 아니 공부하는 것보다 책 읽는 걸 좀 더 할걸.. 후회된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 지금 많이 읽어야지.. 나중에 나중에 나이 먹었을 때 후회하지 않도록. 아_ 그때, 정말 원없이 후회없이 읽었지. 할 수 있도록.
나는 원래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역사과목이 가장 재미있었고, 성적도 제일 좋았다. 지금도 나는 역사책 읽는 걸 좋아한다. 처음 변호사할 때 ‘나중에 돈 버는 일에서 해방되면 아마추어 역사학자가 되리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p129)
10월 유신은, 법대생에게는 더더욱 황당한 일이었다. 유신헌법이 만들어지자 기존의 법전과 교과서들이 무용지물이 돼버렸다. ‘그래도 법학이 과연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법학이 과연 학문인가’라는 회의가 법대생들을 짓눌렀다. 수업에 들어가기 싫었다. 새 학기가 돼 학교 문이 다시 열렸을 때 있었던 헌법교수의 첫 강의가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꽤 유명한 헌법학자였던 그 분은 자신이 쓴 헌법학 책을 강의 교재로 썼는데, 휴교기간 동안 유신헌법 책을 새로 쓰고 새 책으로 강의를 했다.
100분 강의 내내 학생들을 바라보지 못하고, 교실 천장만 바라보면서 강의했다. 유신헌법 책을 쓰고 유신헌법 강의를 할 수 밖에 없는 부끄러움을 제자들에게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p130)
-> 와..진짜 황당하겠다. 하루아침에 기존 법들이 의미 없어지면. 헌법이 개정되면 어떻게 될까? 부분 개정이 아니라 유신헌법처럼 거의.. 새로운 헌법이 등장하면. 근데 그 헌법이라는게 제대로된 법이 아니라 독재 정권의 앞잡이라면..
1975년 새 학기가 시작될 때 대학가는 어느 학교라고 할 것 없이 유신정권과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넘쳐흘렀다.(p137)
학생들이 다 모였는데 총학생회장이 오질 않았다. 학교로 오다가 경찰에 붙잡혀 예비 구금됐다고 했다. 총무부장인 내가 총학생회장 대행으로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했다.(p138)
시위가 끝난 후 우리 발로 걸어가 체포됐다.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수감됐다.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p139)
구속과 동시에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구류를 당한 학생들까지 포함해서 한꺼번에 16명이 제적됐다. 1980년에 가서야 복학이 이뤄졌다.(p139)
차가 막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차 뒤를 따라 달려오고 계셨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팔을 휘저으며 “재인아! 재인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호송차가 떠나면서, 어머니는 금방 멀어졌다.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어지는 호송차를 바라보고 계셨다. 내 소식을 듣고 부산에서 급히 올라오신 모양이다. 면회를 안 시켜주니 헛걸음을 하다가, 그 날 검찰로 넘어간다는 말을 듣고 혹시 볼 수 있을까 하여 일찍부터 와서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호송차에 올라타는 내 모습을 멀리서 보고 달려오신 것이다.(p139-140)
-> 이런 시절이 있었다. 이런 역사가 있었다.... 누구는 데모하다가 잡혀가서 군대로 강제로 끌려가고 학교에서도 짤리고. 그런 시절이..있었다.
구치소에 있을 때, 아내가 뜻밖의 면회를 왔다. ... 구속됐다는 말을 듣고 걱정이 돼 와 봤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면회시간 내내, 접은 신문을 품에 안고 있었다. 내 모교인 경남 고등학교가 무슨 대회인지 전국 야구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스포츠면 톱기사였다. 고교야구가 인기절정이던 시절이다. 야구를 대표 스포츠로 여기던 학교 출신이어서 나는 그 때 야구를 매우 좋아했다. ... 아내는 그런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내가 기뻐할 뉴스를 가져온 것이다. 세상에 내가 아무리 야구를 좋아한들 구치소에 수감된 처지에 야구소식에 무슨 관심이 있을까? 그래도 그런 생각을 한 아내가 귀여웠다. 감방에서 그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나곤했다.(p142)
석방된 지 얼마 안 돼 입영 영장이 나왔다. 신체검사도 안 받은 상태였다. 신체검사 통지서와 입영통지서가 함께 날아왔다. 입영 전날 신체검사를 받고 다음날 입영하는 일정이었다. 강제징집이었다.(p149)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에 배치됐다. 자대로 바로 가지 않고 4주간의 공수훈련과 6주간의 특수전 훈련, 2주간의 여단 전입훈련을 다 거친 다음에야 자대에 배속됐다. 관등성명부터 외게 했는데 ‘여단장 준장 전두환’ ‘대대장 중령 장세동’이었다.(p155)
아내가 몇 번 면회를 왔다. ... 그 시절 군대 면회는 무조건 먹을 것을 잔뜩 준비해 오는 것이었다. ... 그런데 아내는 먹을 건 하나도 가져오지 않고 안개꽃만 한 아름 들고 왔다. 아무리 오빠가 없어도 그렇지,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였다. 면회소에서 아무 것도 팔지 않을 때이니, 꽃을 가운데 놓고 얘기만 나누다 돌아왔다. 나도 우스웠지만 음식 대신 꽃을 들고 내무반으로 돌아온걸 본 동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p161)
내가 복무할 동안은 훈련만 했을 뿐 실제로 폭동진압에 출동한 일은 없었다. 제대 후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내가 근무하던 제1공수여단 제3대대가 부산에 투입됐다. 내 조수였던 후임병도 그때 부산에 왔다. 광주항쟁 때는 다른 공수여단이 진압군으로 투입됐다. 폭동진압은 아니지만 12・12 군사 쿠데타 때는 전병주 사령관에게 항명하고 반란군 주력부대로 투입되기도 했다. 군복무를 좀 더 늦게 했다면 나도 역사를 거스르고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역할에 동원됐을지도 모를 일이다.(p164)
입대 후 많은 일은 생전 처음 해보는 것이었지만, 막상 해보니 다 해낼 수 있더라는 경험, 그것이 나를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변호사를 할 때나 청와대에 있을 때 처음 겪는 일이 많았다. 내 개인적으로 처음일 뿐 아니라 참고할 만한 선례가 없을 때도 많았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부딪쳐 가야 했는데, 그럴 때 그런 마음가짐이 큰 도움이 됐다.(p165-166)
장인과 장모님 앞에서, 들이댄 권총에 손을 들기도 하고 또 수갑이 채워져 연행되기도 했으니 참으로 민망한 순간이었다. 떠나는 버스에서 밖으로 내다보니 다들 아무 소리도 못하고 망연자실 서 있었다.(p178)
면접시험을 며칠 앞두고 안기부 요원이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그가 지정한 호텔에 나가 ‘인터뷰’에 응했다. 묻는 핵심은 하나였다. ‘지금도 옛날 데모할 때와 생각이 변함없느냐’는 것이 요지였다. 일종의 사상 검증이었다. 대답하기 정말 곤혹스러웠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오갔다. 그러나 젊을 때였다. 자존심을 굽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그때 생각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생각이 변함없다”고 버텼다. (p185)
2차 시험 합격도 운이 좋았다. 시험 전 마지막 두세 달을 공부에서 손을 뗐기 때문에, 전형적인 시험문제들이 출제됐으면 합격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해 2차 시험에는 전형적이지 않은 문제들이 많이 출제됐다. 특히 헌법과목은 마지막 두세 달의 집중공부가 아무 소용없는 뜻밖의 문제가 출제됐다.(p185-186)
박원순 변호사, 박시환 대법관, 송두환 헌법재판관, 이귀남 범무부장관, 천성관 전 검찰총장 후보, 이번에 새로 대법관이 된 박병대 판사, 박정규 전 민정수석 등이 모두 연수원 동기들이다.(p187)
나는 연수원 시절 판사를 지망했다. 체질에 맞을 것 같았다. 연수원에서 모의기록으로 판결문을 쓰는 공부를 했는데, 재미있었다(p190)
그 사건을 처리하면서 사람을 처벌하는 일이 내 성격에 맞지 않다고 느꼈다. 사람을 처벌한다는 일은 늘 부담스럽고, 마음이 불편했다. 식품위생법 위반사건 같은 것을 처리할 때도 소행으로 보면 처벌해야 마땅한 일인데도, 막상 사정을 살펴보면 장애인이라거나 생계형 범죄라는 등의 딱한 사정 때문에 단호한 처벌을 결정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내 무른 성격 때문에 검사는 안 맞겠다고 생각했다(p192)
시위전력으로 결국 판사 임용이 안 돼 변호사의 길로 나서게 됐다.(p192)
3부 동행
첫 조각은 파격 그 자체였다. 특히 사회분야 쪽은 거의 다 파격이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때 개혁적 인사들이 한두 명씩 내각이나 청와대에 발탁됐다가 견디지 못하고 물러나오는 모습을 봤다. 그래서 나는 개혁적 인사들이 일거에 내각과 청와대의 대세를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선인의 생각도 같았다. (p207)
오랫동안 인권변호사로 활동해 온 고영구 변호사를 국정원장에 발탁한 것도 깜짝 놀랄 만한 인사였다. 당선인은 국정원의 환골탈태를 위해 처음부터 인권변호사를 발탁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한참 선배 인권변호사이자 성품이 깐깐한 분을 국정원장에 임명함으로써 청와대는 물론 대통령 자신까지도 법에 어긋나는 지시나 부탁을 하지 않도록 방어망을 쳐 버린 것이다.(p213)
청와대 근무시간이 길어 사생활이 크게 없어진 것 말고는, 이전 생활과 아무 차이가 없었다. 달라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런 걸 신기하게 받아들였다. 업무 외 시간에 내 차를 직접 운전하는 것,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먹는 것, 다른 사람들처럼 줄서서 기다리는 것, 비행기나 기차의 일반좌석을 이용하는 것 등의 모습이 오히려 특별한 것인 양 신기해했다. 조그만 연립주택에 사는 것도, 수행원 없이 혼자 다니는 것도, 심지어 휴일에 등산가서 시민들과 맞닥뜨리는 것조차 특별한 일인 양 여겼다. 그동안 고위 공직자들에 대해 갖고 있었던 이미지와 너무 다르다는 것이었다.(p221)
청와대 생활은 힘들고 고달팠다. 업무 자체도 벅찬데다 매일 언론보도에 신경 쓰고,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종일 기자들 전화 받고 응대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나는 직접 휴대폰을 받았는데, 미묘하고 복잡한 사안의 경우 언론대응을 어떻게 할지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렇다고 전화를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특히 민정수석 고유 업무 외에 청와대가 관심을 가져야 할 노동사건과 갈등사안까지 담당해 업무량 자체가 많았다. 어떤 일이 끝나면 다음 일을 하는 식으로 일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많은 사안이 동시다발로 진행됐다. 내 한계용량을 늘 초과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p223)
보통 직장은 직책이 높아질수록 일에 여유가 생기는 법인데, 청와대는 아래 행정요원, 행정관, 비서관, 수석비서관 순으로 직책이 높을수록 거꾸로 일이 많았다. 나는 첫 1년 동안 치아를 10개쯤 뽑았다. 나뿐 아니라 이호철 비서관과 양인석 비서관을 비롯해 민정수석실 여러 사람이 치아를 여러 개씩 뺐다. 웃기는 것은 우연찮게도 나부터 시작해서 직급이 높을수록 뺀 치아수가 많았다.(p226)
그때 대통령과 우리는 검찰 개혁의 출발선을, 검찰의 정치적 중립으로 봤다. 즉 ‘정치검찰’로부터 벗어나는 게 개혁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이 목표는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정치권력이 검찰의 정권의 목적에 활용하려는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고, 검찰 스스로 정권의 눈치 보기에서 벗어나는 ‘문화의 문제’로 봤다.(p238)
대통령은 기회 있을 때마다 직간접으로 당신의 그런 의지를 전달했다. 민정수석실도 검찰에 주요 사건의 지시 내지는 조율을 하지 않았다. 이 원칙은 참여정부 기간 내내 철저하게 견지했다. 대선자금 수사로 대통령 측근들에게까지 수사의 칼날이 와도 검찰이 원칙과 소신대로 수사할 수 있도록 모두 허용했다. 우리 쪽의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겪으면서도 검찰수사의 독립성과 중립을 보장해 줬다. 그렇게 마련된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앞으로 검찰 스스로 잘 지켜나가길 원했다.(p238)
국정원 개혁의 전통적 과제는 수사상의 인권침해와 위법한 정보수집 활동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이미 국민의 정부 때 큰 진전이 있었다. 참여정부는 국정원의 국가보안법위반 범죄에 대한 수사권을 북한과 관련된 범죄로 한정함으로써, 수사과정의 인권침해 소지를 원천적으로 없애려 했다.(p241)
국정원의 탈권력을 위해 대통령 스스로가 국정원을 정권의 목적으로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국정원에도 초법적이고 월권적 권한을 주지 않으려고 했다. 국정원장의 주례・대면보고와 독대보고를 없앤 것이 그것이다. 대신 대통령은 국정원이 생산하는 정보를 대통령과 청와대에만 보고하지 말고, 관련 정보별로 소관부처 및 관련부처에도 보내주도록 했다. 국정원 정보를 정부 전체가 공유하도록 한 것이다.(p242)
국정원 개혁의 핵심은, 국세청을 ‘보복성 세무조사’, ‘표적성 세무조사’나 하는 정권운용 수단으로 삼지 않는 것이었다.(p245)
-> 다... 다.. 말아먹었네..
북핵문제는 철저하게 대화를 통해 외교적 방법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대통령 소신은 확고했다. 그러나 그렇게 이끌어가기 위해선 미국정부의 협조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자면 우리도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p268)
파병 방침을 발표하는 문안을 외교부가 준비해 왔다. 초안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때문에 치러지는 이번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며, 우리의 파병이 향후에 전후재건 복구사업 등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크게 도움이 된다.’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었다. 대통령은 “나는 이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인지 모르겠다”면서 그 표현을 쓰지 못하게 했다. 또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경제적 이익을 위해 우리 젊은이들의 고귀한 생명을 사지에 내모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경제적 이익은 파병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국민들에게 한반도 평화와 한미동맹이라는 현실적 이해 때문에 파병한다는 점을 솔직하게 밝히라고 지시했다.(p269)
대통령이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은,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이었다. ‘총리결정 권한’, ‘내각구성 권한’, ‘연정’ 같은 것은 그렇게 될 경우에 자신의 권한을 양보할 용의를 밝힌 것으로서, 선거제도 개혁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권은 노 대통령의 거듭된 선거제도 개혁요구에 아무 답이 없었다. 시민사회진영도 마찬가지였다. 옳은 말, 필요한 일이라며 동의는 했지만 별 노력을 기울여주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서울의 시민사회진영은 지역구도 타파나 지방화, 분권화, 국가균형발전 같은 과제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옳다고 동의는 했지만 절실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우선순위가 있는 문제냐’라고 말하기도 했다. “양극화 해소가 시급한 마당에 대통령이 지역구도 타파 같은 우선순위가 덜한 문제에 너무 매몰돼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평가하기도 했다.(p314)
-> 지역구도해소가 양극화 해소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이유. 아무리 양극화 해소에 대한 좋은 방법을 알고 있어도 그 사람이 뽑히지 않는다. 영남에서는 누가 나와도 그 당 사람이면 된다. 전라도도 마찬가지.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다들 지역주의의 어드벤테이지를 등에 업고 뽑힌 사람들이니 지역구도 타파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아무리 옳은 말 해봤자 입만 아픈거.. 욕심을 비울 수 있다면, 더 큰 걸 생각할 수 있다면, 10년 뒤 20년 뒤에 이땅에 살아갈 사람을 배려 할 수 있다면....
참여정부 이전까지는 법무부장관이 검찰총장에게 이런저런 지휘를 하는건 아주 다반사였다. 수사권 지휘라는 절차조차 필요 없었다. 그냥 말만 하면 됐다. 지금 정부는 도 어떤가. 법무부장관은 검찰총장만 지휘할 수 있는데도, 장관 또는 법무부 간부가 지검장이나 수사검사에게 직접 전화해서 수사에 관한 지시를 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참여정부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법이 정한 방법을 쓴 것이다. 따라서 당시 수사권 지휘야말로 법무부장관이 평소 검찰총장에게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이었다.(p316)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대통령은 줄곧 ‘장사꾼 논리’를 강조했다. “100% 국익 기준으로 하라. 우리가 이익이 되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안 하는 거다. 협상 과정에서 국익에 배치되면 안 해도 좋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 중단해도 좋다.” 이 점을 늘 강조했다. 대통령의 이런 접근법은 협상단에 큰 힘을 실어줬다. 배짱과 배포로 협상을 하게 만든 것이다. 대통령은 중동 순방을 떠나기 전날에도 협상팀을 불러 “협상이 되면 물론 좋지만 안 돼도 내가 책임지는 거고, 돼도 내가 책임지는 거다. 본부장은 철저하게 장사꾼 논리로 협상하고 한・미동맹 관계나 정치적 요소들은 절대로 의식하지 말라. 모든 정치적인 책임은 내가 진다”라고 역설했다.(p347)
비서실장을 하는 동안 가장 큰 일은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다. 참여정부의 남북정상회담 기본 원칙은 국정원, 통일부 등 대북 관련 공식기구를 통해서 공식적으로 추진한다는 것이었다(p349)
“힘이 모자라거나 시운이 안 되면 패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패배하더라도 우리의 가치를 부둥켜안고 있어야 다음의 희망이 있는 법이다. 당장 불리해 보인다고 우리의 가치까지 내버린다면 패배는 말할 것도 없고, 희망까지 잃게 된다”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당시 우리 진영이 열린우리당을 깨고 나간 일을 대통령은 그렇게 봤다. 대통령은 “계산하지 않는 우직한 정치가 길게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길”이라고 늘 강조했다(p366)
“대선에서 질 수도 있다. 이기면 좋지만 늘 이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러나 패배하면 패배하는 대로 다음에 대한 희망을 남기는 패배를 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의나 원칙을 지키면서 대선에 임해야 한다. 특히 명분을 버리면 안된다. 대의도 원칙도 명분도 다 버리고 선거에 임하면 이기기도 어렵고, 패배 후의 희망까지 잃게 된다”(p367)
양산에 새 둥지를 틀었지만 집은 말이 아니었다. 주거용으로 충분히 준비를 못 한 상태에서 들어갔기 때문에 본채에서 먹고 잘 상황이 아니었다. 거의 한달 반가량을 계곡 옆에 있는 별채의 작은 단칸방에서 지냈다. 여전히 겨울인데 아궁이에 나무를 때며 살았다. 세면실이나 화장실도 없어서 세수는 계곡에서 하고 볼 일도 밖에서 해결했다. 정말 유배생활 같았다.
...
닭은 걸핏하면 방안으로 들어오는 지네 퇴치용으로 키우고 있다. 유기농 달걀을 얻는 보람도 있고, 또 때로는 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가 부화되는 것을 보는 재미도 있다. 마당에 뱀이 들어올 때도 있어서 공업용 백반을 사서 마당 주변에 뿌리기도 한다. 채소도 가꾸고 있다.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 밭인데도 둘이서 다 못 먹을 정도로 거둔다.
마당이 넓어 여름에는 그야말로 풀과의 전쟁이다. 이런저런 일 때문에 한두 번 주말을 그냥 넘기면, 해야 할 일이 잔뜩 밀린다. 누가 무슨 운동을 하냐고 물으면, 운동은 안하고 노동을 한다고 대답한다. 일하는 요령이 없고 서투르니 시간이 더 많이 들고 힘도 든다. 그래도 내가 꿈꿔왔던 생활이어서 마냥 좋다. ‘아예 그런 생활로 생계까지 해결하는 전업농이 될 수도 있을까’ 때때로 꿈같은 생각도 해본다.(p387)
-> 와.. 이거 진짤까? 진짜..??.. 진짜??... 퇴임한 대통령 최측근이 이렇게 산다. 진짤까??..!! 근데 이렇게 사는거 완전 부럽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동물...은 별로 안키우고 싶긴하지만 ^^;;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기업의 표적이 되기 시작했다. 우리들병원 이상호, 김수경 회장이 세무조사를 받은 데 이어, 창신섬유 강금원 회장은 검찰 수사를 받았다. 그러다 강금원 회장은 끝내 구속됐다. 2008년 7월, 태광실업이 세무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검찰수사가 세종증권 매각비리로 확대되면서, 대통령 형님 노건평씨가 수사타깃이 됐다. 나중에 모두 알게 됐지만 형님이 문제의 시작이었다.(p397)
“결국은 다 내 책임이다. 내가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무능했고, 장래에 대해 아무런 믿음을 못주니 집사람과 정상문 비서관이 그렇게 한 게 아니겠는가. 다 내 잘못이다”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오래 정치를 하면서 단련이 됐지만, 가족들은 단련시키지 못했다”는 말도 했다.(p399)
검찰에 도착했다. 이인규 중수부장이 대통령을 맞이하고 차를 한잔 내놓았다. 그는 대단히 건방졌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태도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중수1과장이 조사를 시작했다. 대통령은 차분하게 최선을 다해 꼬박꼬박 답변을 했다. 대통령의 절제력이 놀라웠다. 검찰의 조사를 지켜보면서 검찰이 아무 증거가 없다는 걸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박연차 회장의 진술 말고는 증거가 없었다. 대통령과 박 회장 말이 서로 다른데, 박 회장 말이 진실이라고 뒷받침할 증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통화기록조차 없었다. 통화기록이 없다는 것은 통화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었다.(p403)
대통령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박연차 회장에 대해 원망이나 서운한 말씀을 한 번도 안 하셨다. 박 회장도 버티다가 도저히 어떨 수 없는 궁지에 빠진 것으로 이해를 했다. 박 회장이 언젠가 자유로워지면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박 회장의 궁박한 처지를 애써 이해하려 한 이유는 또 있다.
그의 딸들까지 조사를 받았다. 외환관리법위반 혐의였다고 한다. 또 태광실업이 받은 시설자금 융자 관련 조사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가족과 기업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어르면 버티기 어려운 법이다. 그런 얘기들이 들려왔다.(p403-404)
대통령은 어쩌다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했다. 가난이 그를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가난이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 그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자신처럼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한 일이 인권변호사였고, 민주화 운동이었다. 정치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치에 대한 그의 진정성이 그를 대통령까지 만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 자신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에 변호사 하면서 가난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다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을 돕는 삶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은 도로 가난해졌다. 봉하마을은 외진 곳이어서 땅값이 엄청 싼데도 사저 건축비용이 없어 은행 대출을 받았다.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돈도 빌리게 됐다. 대통령은 나에게 “내 자신만 정치적으로 단련되었지, 가족들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결국은 대통령에게 퇴임 이후의 대책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p406)
4부 운명
정부는 우선 ‘서울광장’에서의 노제를 반대했다. 시민들의 감정이 격해져 대규모 시위로 번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당일 새벽까지 결정을 못했다. 이런 논리로 설득을 했다. ‘설령 노제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운구 행렬이 서울광장을 지나야 한다. 그럼 틀림없이 많은 인파가 운구 행렬을 막을 것이다. 오도 가도 못한 상태에서 즉흥적인 노제가 열릴 가능성이 크다. 별로 바람직하지도 않고, 정부는 더 곤란해질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우리 통제 하에 질서정연하게, 정해진 시간 동안 노제를 치르는 게 좋을 것이다.’ 그 논리에 정부가 입장을 바꿨다.(p420)
...
아마도 정부측에서는 대통령의 노제에 많은 국민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싫었을지 모르겠다. 대한문 앞 분향소 등을 대하는 태도가 그랬다. 정부가 국민장을 결정했다면 비록 국민들의 추모를 강제하지는 못하더라도, 정부 측에서는 추모의 예를 다하고 많은 국민들이 추모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p421)
-> 너.무.해.
김대중 대통령은 정부 측의 거부로 영결식에서 추모사를 할 수 없게 되자, 영결식 전날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를 타고 서울역 분향소를 방문해 추모 말씀을 하셨다. 그 뿐 아니었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가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을 낼 때,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의 추모사를 추천사로 써 주시기까지 했다. “노무현 당신, 죽어도 죽지 마십시오”로 시작해서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도 죽지 않습니다”로 끝나는 간절한 추모사였다.(p422)
(전문)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교동에서 독일 〈슈피겔〉 지와 인터뷰를 하다가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 내가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지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상주 측으로부터 영결식 추도사 부탁을 받고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못했습니다. 정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추도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추도사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나는 아주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조문객이 500만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것이 한과 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노무현의 한과 국민의 한이 결합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입니까. 1980년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1987년 6월항쟁을 전후해서 박종철 학생, 이한열 학생을 포함해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런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이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시민이 각성해서 시민이 지도자가 될 정도로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 안 하는 정부는 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 그것조차 못한다면 좋은 나라와 민주국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은 타고난,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가진 우리 헌정사에 보기 드문 지도자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을 사랑했고, 가까이했고, 벗이 되고자 했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서민 대중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일하게 자신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갖은 치욕과 억울함과 거짓과 명예훼손을 당해 결국 국민 앞에 목숨을 던지는 것 외에는 자기의 결백을 밝힐 길이 없다고 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500만이 통곡했습니다.
그분은 보기 드문 쾌남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뜻을 계속 이어가서 끝내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했다고 해도 서거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
나는 이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가 그런 후배 여러분의 정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뷰하고 오연호 대표 기자가 쓴 이 책을 보니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후에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책으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공부하십시오.
그래서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김대중 대통령이 헌화한 후 권 여사님에게 다가와 위로를 할 때였다. 나는 바로 뒷줄에 앉아 있어서 그 모습을 생생히 봤다. 나라의 가장 큰 어른이라고 할 분이 그 자리에서 슬픔과 비통함을 못 이겨 그만 무너지셨다. 얼굴이 마구 일그러지면서 통곡하듯 오열을 했다. (p424)
영결식을 마친 다음 운구 행렬이 ‘서울광장’으로 향할 때에는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엄청나게 많은 시민들이 시내 중심부를 가득 메워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운구차를 뒤따르는 우리에게 힘내라고 격려를 했다. 거대한 인파가 운구차와 함께 서울광장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특히 서민들이 많았다. 젊은 여성들도 상대적으로 많았다. 장애인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평범한 시민들이 대통령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운구차에 손이라도 대보려는 사람들이 많아 운구 행렬은 더디고 더뎠다.(p425)
석함에 부장품을 두 개 넣어드렸다. 하나는 대통령 서거 후 추모인파를 촬영한 추모영상이다. 또 하나는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이란 5부작 다큐멘터리 DVD다. 추모영상은 국민들의 추모의 마음과 이별의 눈물을 담은 것이다. 당신이 국민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이 아님을 보시라고 넣어드렸다.
다큐멘터리는 대통령 임기 내내 혼신의 힘을 다한 5년을 기록한 것이다. 실패한 대통령, 실패한 정부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청와대를 떠났다. 진보진영으로부터도 진보를 망친 장본인인 것처럼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가 우리를 정당하게 평가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 때 5년간의 기록이야말로 평가의 토대가 될 것이다. 대통령은 모든 걸 혼자 안고 떠났다. 인간의 법정을 거부하고 역사의 법정을 선택했다.(p432-433)
참여정부 인수위 시절, 훗날 이명박 정부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학교 선배로부터 자료 하나를 넘겨받은 적 있다. 책으로 치면 여러 권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당선될 경우 당선 일부터 퇴임 때까지의 국정운영 프로그램을 담은 내용이었다
연도별, 분기별, 월별로 나름의 국정개혁과제를 배치하고, 그걸 다시 주별, 일별 계획으로 나눴다. 선거일정 등을 고려해 중요 개혁과제 시기를 정하고, 그에 맞춘 홍보계획까지 담고 있었다. 심지어는 당선 세레머니를 당사에서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하지 말고 동네 주민들과 어울려 축하와 함께 국정에 대한 당부를 듣는 모습으로 한다거나, 취임 전까지 매주 지방을 방문해 대학생들과 호프미팅을 한다는 구체적 방안까지 있었다.
이회창 후보 당선용으로 만든 것인데 소용없게 됐으니 우리라도 참고하라고 준 것이다. 국정개혁 방향이나 범위가 우리와 많이 달라 활용할 수는 없었다. 다만 대통령 일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도움이 됐다. 그때 그들이 집권했다면 계획대로 실제 실행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집권 후 국정운영을 사전에 그토록 치밀하게 계획해 두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놀라웠다.
솔직히 참여정부는 그런 것 없이 정권을 맡았다. 대통령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준비를 갖추고 있었을 뿐, 정당이든 연구소든 이쪽 진영 어디에서도 그런 준비를 한 곳은 없었다. 그런 것이 우리의 부족한 점이었고, 한계였다고 생각한다.(p459)
휴. 이제야 정리하네.
이제야 읽었네
이제야 알았네.
이 책의 내용들이 좀 더 대선 기간에 홍보?되었으면...
언론이 참 중요한 것 같다. 공정한 언론_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글을 읽으면 역사를 배울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70년대, 80년대 시대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독재에 반대하다가 잡혀가고 군대에 끌려가고 복학도 잘 안되고 출세도 못하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닐텐데, 누군가의 희생으로 세워진 오늘일텐데. 감사히, 소중히 살아가야지.
참여정부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꾸 읽다보니까 무슨 소설 같다. 저게 진짜 실현 가능한 일인지, 있었던 사실인지,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이 거짓말 아닌지, 저게 진심인지. 잃어버린 5년+앞으로 5년.. 어쩔꺼.
F.B 책공망
조금 철 지난 ‘문재인의 운명’입니다. ^^;
이제야 읽었네요.
이 책은 문재인, 노무현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가 2/3라고 해도 될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대학생 시절에 데모하던 이야기, 그러다가 군대로 끌려 간 이야기, 인권변호사 시절 이야기, 참여 정부에 대한 이야기, 퇴임 이후의 이야기 등을 자세히 들을 수 있습니다.
책을 다 읽었는데 조금 생뚱맞게도 이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때 추도사를 하려고 했으나 정부의 반대로 하지 못한 내용이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라는 책에 적혀 있다길래 찾아 읽어 본 추도사 전문..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로 시작해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로 끝나는 추모사.
책을 읽으면서(이 책뿐 아니라 참여정부에 관한 이야기를 읽거나 들을 때), 이게 진짜 있었던 일인지, 가능한 일인지, 그냥 이상적인 이야기 아닌지, 혹은 거짓말 아닌지 의심이 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잃어버린 5년+(5년?)을 살아야하는데..
그래도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이 한 마디에 힘을 얻고
주어진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_^.......
201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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