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폴 투루니에의 책이다.
폴 투르니에(1899-1986)는 스위스의 내과의사로 의사와 환자가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인격 의학'을 주장했으며 현대 심리학과 기독교를 통합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책 날개)
1958년에 쓰여졌고, 미국에서 1962년에 번역된 책을 한국에서 2001년에 번역했다.
'여성 그대의 사명'은 이후에 폴 투르니에 책 읽고 싶었고 반은 김준 덕에 읽는다. 죄책감.. 죄책감.
덕분에 책 많이 읽는다. 감사.^_^
제1부 죄책감의 범위
제1부는 죄책감이 생기는 영역을 열거해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정말 다양한 영역에서 죄책감이 생기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로 인해 삶의 전 영역에서 고통받고 살아감을 알 수 있다.
제1장 열등감과 죄책감
이 책에서 저자는 의학적인 임상 경험을 통해 얻은 사실과 성경의 가르침 사이의 연관성을 찾으려 한다(p10)
판단은 죄책감을 불러오게 되어 있다.
개체성(독립성, 개별성)의 형성은 바로 비밀을 가짐으로써 이루어진다. 한 아이가 부모가 모르는 자기만의 비밀이 전혀 없거나 부모가 모르는 비밀을 친구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 아이는 자신이 부모와 구별되는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p15)
자기의 주장에 대해 너무나 절대적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
보통 강자는 약자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더구나 약자는 늘 자신에게 불리하게 생각하는 법이다(p16).
오랫동안 지속되는 죄책감은 다른 사람의 행위나 단언, 비판, 경멸, 심지어 아주 부당한 비난 등으로 인해 계속해서 약자의 마음속에 새겨지게 된다.(p17)
비난 뿐만 아니라 충고도 다른 사람을 깎아내릴 수 있다.(p17)
비난은 열등감과 죄책감이라는 은밀한 감정에서 나온다(p18)
죄책감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비난, 사회적인 멸시, 열등감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후회나 양심의 가책, 수치심, 당황함, 불편함, 혼란, 수줍음, 심지어 겸손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용어는 뚜렷한 경계선 없이 서로 얽혀 있다.(p19)
제2장 사회적 암시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죄책이다(p22)
우리가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취향이나 소망, 신념을 내세우며 자신을 계발하고 자신의 성향에 따라 자유롭게 성장해 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대한 두려움이다(p22)
-> 그 사람의 특성과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죄책감을 심어줄 수 있다.
사회적 암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책감의 근원이다(p22)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거나, 자신의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교화시키고,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은 매우 기분 좋은 일이다. 환자는 그렇게 함으로써 매우 정당한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며 그것이 실제로 치료 효과를 나타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낫지 않은 다른 환자들은 그 일을 통해 더 큰 슬픔과 심지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p28)
복음서는 병을 고치는 믿음에 대해 말할 때 때때로 고통당하는 사람의 믿음을 언급한다. ...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사람 즉 환자의 부모나 환자의 병고침을 위해 나아온 자들의 믿음을 더 자주 언급하신다.(p28)
훌륭한 권면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넌 이걸 해야 하고 또 저걸 해야 해. 참아야 해. 버텨야 해. 받아들여야 해. 희망을 가져야 해. 싸워야 해..." 그러면 환자는 인내심과 희망이 없고 적절하게 대응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p29)
나는 종교가 사람을 해방시키는 대신에 망가뜨릴 수 있다는 분명하고도 비극적인 사실을 제기하지 않고는 여러분과 함께 심각한 죄책감의 문제를 연구할 수 없다.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것처럼 믿음에 관한 모든 선언에는 피할 수 없는 반대 측면이 존재한다(p30)
제3장 시간의 문제
(이 장의 문제의식)
시간을 낭비하는 가운데 나는 나 자신을 일하도록 만드는 데 필요한 죄책감을 점차 쌓아 간다(p34)
우리는 모두 지나치게 일하고 피곤해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큼이나 우리를 지치게 한다.(p37)
시간 관리의 전반적인 문제는 사람이 노쇠해짐에 따라 훨씬 더 심각해진다. 이는 노년에 겪는 고통 중 하나로서 급기야는 강박 관념으로 발전할 수 있다. 과연 어떤 활동을 포기해야 하는가? 힘들어도 계속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런저런 일을 포기함으로써 해야 할 과제를 저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오만함을 드러내고 건강을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가?(p38)
-> 나도 노년기에 접어든걸까? 이런 고민을 종종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서 나에게 주어진 일을 회피하는 건 아닐까?
산다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자유롭게 의식적으로 선택하는가? 가끔이긴 하지만 우리는 주변 상황에 의해, 혹은 우리의 나약함에 의해, 때로는 우리의 습관 혹은 심지어 죄책감에 의해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는가?
...
나는 나의 도움을 구하는 요청을, 예를 들면 강의를 해 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나는 항상 마지못해서 그 일을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을 꺼리며 그렇게 할 경우에는 후회한다. 어제,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리는 또 다른 강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 당당하게 비난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만일 요청을 거절한다면 나는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만일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나 자신이 흔들린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p38-39)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큰 책임을 지셨지만 별로 서두리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p42)
예수님은 그분이 놀랄 만한 일을 해 내길 바라며 열광하는 군중을 어떻게 피해 갈 수 있는지를 알고 계셨다(요6:15). 그분은 비범한 평정으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정해 주신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가나안 여인의 청을 거절하는 법도 알고 계셨다(마15:22-28).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발견하고는 마음을 바꾸어 진정한 내면의 자유를 보여 주는 법도 알고 계셨다. 그 자유야말로 우리가 열망해 왔던 것이다. 그 자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길을 따라서,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말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저것보다는 이것을 하거나, 일을 하거나 쉬거나 하는 자유이다. 믿는 자든 아니든 우리는 내면의 개인적인 영감보다는 세상적인 가치 - 그것이 아무리 고상할지라도 - 에 따라 살아가는 것에 대해 항상 죄책감을 느낀다(p43)
3장에서 이야기하는 시간 사용, 다음장에서 이야기하는 재정사용.
내가 제일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그만큼 죄책감을 많이 느끼기도 하는 부분이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하든 잘못된 건 아닌 거 같은데,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다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제4장 돈의 문제
(이 장의 문제의식)
돈은 수많은 죄책감의 근원이며 게다가 모순되는 죄책감의 근원이기도 하다. 우리는 돈이 부족해서 수치심을 느끼지만 돈을 벌고 소유한 것에 대해서도 부끄럽게 여긴다.(p47)
-> 진짜 맞는 말. 돈이 없을 때는 없는대로 말하기 부끄럽고, 돈이 있을 때는 있는 대로 말하기 부끄럽다.
사회 곳곳에 은밀히 숨어 있는 갖가지 비판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냉담하다는 말을 듣게 되며, 말을 많이 하면 잘난 척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 문제는 가난함이나 부유함에 있지 않고 사람들이 모이면 불가피하게 서로를 비교하는 데 있다(p46-47)
의사는 자신보다 못 사는 사람들에게 정상적인 치료비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끔 있는 일이지만 질병 때문에 재정적 타격을 입은 환자를 무료로 치료해 줄 경우 의사 자신의 가족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이것은 모든 직업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양심 있는 회사원은 자신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확신이 없으면서도 월급을 올려 달라고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또한 그는 아내가 자신의 수입으로 힘겹게 살림을 꾸리는 것에 대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p48)
우리는 시간 관리 문제에서처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돈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구체적인 일에서도 매일 작용한다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도 우리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 자신은 소유자가 아닌 청지기임을 인정해야 한다.
스스로를 청지기로 여기는 것은 진실하고 성실한 생각이지만, 한편 이것은 부자가 자신의 부유함 때문에 느끼는 양심의 가책을 완화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을 멀리 덜어져 있는 주인의 소유물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여기는 것은 매우 편리한(도덕 관념이 강한 사람에게는 혼란스러운) 생각일 수 있다. 멀리 있는 주인의 지시는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솔직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돈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p49)
정당하게 누릴 만한 특권이라 하더라도 모든 특권에는 죄책감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능력 있는 사원의 진가를 아는 고용주가 그에게 아주 책임 있는 일을 맡길 때, 그 사원이 다른 동료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도 같다.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찬양을 하게 된 소녀는 선발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친구들에게 이런 죄책감을 느낀다. 다른 사람의 부러움이나 시기는 우리 속에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p51)
-> 장교로서 누리는 특권, 혜택들. 몸 쓰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이래저래 혜택 받는 것들..
아픈 이들이 수없이 많은데도 나는 건강하고, 불행한 사람이 부지기수인데도 나는 행복하며, 돈이 없어 쩔절매는 사람도 많은데 내게는 돈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하기 싫은 일의 부담에 눌려 한숨짓는 이들이 많은데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괴로움과 소외, 어둠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도 나는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어 믿음의 빛을 따라 살 수 있다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
"자네는 고통을 받고 있어. 그것은 바로 왜곡된 책임감 탓이라네. 우리는 세상 전체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 좀더 바로 보자면 우리 자신과 관련된 작고 직접적인 환경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네. 우리가 이 범위 안에서 성실하다면 우리는 깨끗한 양심을 가질 수 있다네."
...
그러나 이렇게 위안을 주는 생각들도 나에게는 충분하지 않다.
...
물론 내 친구인 정신과 의사는 이 사람도 나와 같이 병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질병이 있다.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이 질병은 광범위한 '양심의 억압'이다. 세상이 극심한 고통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은 매우 도덕적이고 자기의 직접적인 책임에 대해서는 극도로 민감한 사람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대규모의 고통이 자신의 행동 반경 밖에 있다고 단정하면서 자신을 위안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이런 식으로 사악한 부정은 일종의 보편적인 공범 관계를 통해 계속 존재한다
...
실제로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아무리 훌륭한 이유를 내세운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인간으로서의 연대감은 모든 사람의 영혼에 깊이 박혀 있다. 특히 자기 주변 사람이 관련되어 있을 때 이를 더욱 예민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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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삶과 사역은 죄책감의 짐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무게를 더하게 한다. 더구나 그것은 예수님의 경우와는 달리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게 되고,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잘못을 발견하게 되며, 그것으로 인해 더욱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다
(p52-58)
죄책감..
나이가 들수록 미안할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다. 셀 수 없이 많다. 끊임없이 미안하다.
멘붕.
제5장 우리의 내면 세계
각자가 갖고 있고 알고 있는 자신의 모든 결점을 걱정하며 의식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어떤 사건이나 일로 인해 갑자기 밝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p60)
콤플렉스나 은밀한 상상, 유혹, 공허하고 털어놓을 수조차 없는 꿈들, 다소간 의식적이고 뚜렷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 충동적인 모든 것이 우리 내부에서 자라난다. 우리가 이를 깨닫고 혼란스러워할 때 이것들은 우리의 의지의 통제를 받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며, 억누를 수 없고, 발견될까봐 전전긍긍해하는 우리의 또 다른 자아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밝혀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도저히 그 수치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끔찍한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p67)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것들은 우리를 수치스럽게 한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더 우리를 수치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로 통합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숨겨진 존재와 드러난 존재의 이중성을 없애지 못하는 무력함이다. ... 이것은 각 사람 안에 자신의 의지나 지성, 혹은 지식으로 다스릴 수 없는, 알 수 없는 힘이나 충동 그리고 억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희미하게 느끼는 자신에 관한 죄책감이다.(p69)
우리가 아무리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일지라도 우리의 깊은 내면의 존재와 밖으로 보이는 외견상의 존재는 언제나 확실히 분리된다. 내적인 통찰력을 많이 확보하면 할수록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심리적 분석을 더 잘 할수록 우리는 내면의 일관성이 부족한 것을 더욱 확실히 깨닫게 되며, 또한 그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워한다.(p71)
-> 5장에서 말하는 우리의 내면세계는 한마디로 혼돈과 공허.
제6장 우리의 외부 행동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행한 사악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행치 않은 선에 대해 누구나 경험하는 죄책감이다. (p73)
우리가 범한 잘못에 대해 비난받으리라고 상상하는 도덕주의에 반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행하지 않은 친절한 행위들을 언급하신다. 여기에 유일하게 더 광범위한, 심지어 무제한적인 죄책감이 있다(p73)
우리는 젊은 시절 동안에는 자신을 속일 수 있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우리가 하지 않은 행동을 보완해 준다. 우리가 꿈꾸고 희망하는 것은 실제로는 모자라는 것을 보완해 준다. 우리는 여전히 미래에는 과거와 현재에 대한 설욕의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신기루는 점점 사라진다. 우리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도록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고백해야 한다.(p75)
우리가 어느 한 면에서는 성공했을지라도 어느 날 우리는 그것에 쏟아 부은 열심이 단지 수많은 다른 실패들을 옆으로 밀어 내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느 한 분야에서의 성공이 다른 분야에서의 절망을 보충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대조되어 서로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p77)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 대할 때 우리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즉,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마비되거나, 우리가 처한 환경에 따라 살아가거나, 일상적인 일에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하거나(생기가 없어지거나), 순응주의에 의해 빈약해지는 것 등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특별한 은사를 활용하는 것 대신에 다른 사람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낀다. 여기서 사회적으로 암시되는 거짓된 죄책감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 사이의 대립이 자명해진다. 어떤 시인은 내게 자신은 시를 쓰기 시작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밥벌이를 하는 대신에 종이에 끄적거리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해 비난당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는 자신이 받은 재능을 그냥 묵혀 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막연하지만 더 참된 죄책감을 느낀다(p79)
인간은 하루 종일 도망한다. 우리는 모두 계속해서 달아난다. 침묵 혹은 잡담 가운데, 무기력 혹은 지루함 가운데, 식탁 혹은 서재에서의 즐거움 가운데, 혹은 신문을 보거나 뜨개질을 하면서, 스포츠를 즐기거나 난로가에서, 재치 있는 말을 나누거나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면서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감을 은폐시키기' 위해 공적인 규제를 내세우고 그 뒤에 숨는데, 이것은 죄책감에 대항해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책임에 대한 회피는 그 죄가 훨씬 더 크다. 우리는 이제 분노 속에 숨거나 친절함 가운데 숨는다. 자기 만족이나 겸손함 가운데, 감상적인 생각이나 공격성 가운데, 순응주의나 자유 분방한 생활 가운데, 신경 발작이나 자신을 다스림 가운데, 병이나 금욕주의 가운데 숨어 버리는 것이다.
자신에게 성실하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느 누구와 대화를 하든지 한결같이 자기 본연의 모습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마음 속 깊이 느끼는 확신이나 그러한 확신에 대해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의심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킨다. 우리는 감정을 숨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더 열렬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자연스럽고 거침 없이 그리고 두려움없이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p82-83)
-> 이 장에서 말하는 외부행동이란 내면의 생각과 행위가 불일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경제학에서 말하는 '외부효과' 즉 경제학에서 어떤 경제 활동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에게 의도치 않은 혜택이나 손해를 발생시켰으면서도 이에 대한 대가나 비용을 치르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위키)를 말하는게 아닐까 싶다.
제2부 비판의 정신
제7장 참된 죄책감과 거짓된 죄책감
죄책감이 어디서부터 솟아나는지를 이해해야한다.
오디에의 주장에 따르면 기능적 죄책감과 가치 죄책감이 있다.
'기능적 죄책감'이란 사회적 암시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금기에 대한 두려움, 혹은 타인의 사랑을 잃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가치 죄책감'은 확실한 기준을 저버린 것에 대한 진정한 자각이다(p93)
-> 기능적 죄책감은 사회적 관습(관계) 속에서 생기는 죄책감인 것 같고, 가치 죄책감은 자기 스스로 생각했을 때 느끼는 죄책감인 것 같다.
오디에의 견해를 살펴볼 때, 기능적 죄책감은 신경증적 죄책감이고 '거짓된 죄책감'과 동의어이고 가치 죄책감은 '진정한 죄책감'과 동의어이다.(p94)
융의 견해에 따르면 참된 죄책감은 자기 자신과 관련된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며, 자신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깨뜨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다.(p94)
폴 플래트너 박사에 따르면 참된 죄책감은 주어진 상황에서 총체적인 자아 즉 총체적인 책임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기를 거부하는 것이다(p95)
마틴 부버에 따르면 참된 죄책감의 특징은 항상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며 나-당신의 관계를 붕괴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타인에 대한 죄책감이다(p95)
성경의 관점에서 불 때 '참된' 죄책감은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 다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 질서가 파괴된 것으로 나타난다.(p96)
자신에 대한 죄책감은 융의 심리학적 언어이며, 타인에 대한 죄책감은 마틴 부버의 실존주의적 언어이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은 성경에서 말하는 종교적 언어이다(p97)
인간의 참된 죄책감은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질책받는 것들로부터 나온다.
...
융 학파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은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이 바라시는 모습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틴 부버의 타인에 대한 죄책감 또한 인간 관계의 신성한 질서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이다(p97)
나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거짓말, 책략, 폭력, 복수 등 보편적으로 책잡힐 만한 행동이 성경에서 거룩한 영감에 대한 신실한 순종의 예로 제시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특정한 행동이 사회에서 비난받을 만한 것인가 아닌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명령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이다!(p101)
-> 마지막 부분이 이 장의 결론이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에 따라 죄와 죄가 아닌 것이 결정된다.
제8장 누구나 비난을 한다
불행한 일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판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표현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p105)
갈등은 이익 집단들간에, 대립하는 이데올로기 사이에 그리고 우파와 좌파 사이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가장 동질적인 집단들, 즉 사회주의나 박애주의, 이상주의 혹은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위원회와 교회 협의회에도 존재한다. 이러한 갈등은 가장 괴롭고 진을 빼며 죄책감을 가장 많이 갖게 한다. 때로는 반대자에게 자비를 보이려고 자신의 분노와 공격성을 삼켜 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그것은 증오로 변하며 자비는 위선으로 바뀌게 된다.
이 모든 갈등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삶으로부터 물러나야 하는데, 이는 결국 후퇴나 항복 같은 궁극적인 죄를 짓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인생에는 갈등이 있게 마련이고 실로 인생이란 갈등을 기초로 한다. 심지어 가장 작은 세포조차 끊임없이 환경에 맞서서 자신을 지켜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다. 다른 것을 잡아먹지 않는 것은 잡아먹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호되게 공격해야 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다. 물리적인 힘의 채찍을 거절하는 드문 용기를 지닌 간디조차도 마음의 채찍을 사용해야 했는데, 마음의 채찍이라고 해서 언제나 덜 아픈 것은 아니다
(p109-110)
...
우리는 몇 가지 죄책감 가운데서 선택을 해야 한다. 자기 주장을 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죄책감과 침묵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죄책감 중에서 말이다(p110)
다른 사람들을 일깨우고 해방시키려는 우리의 열심은 우리로 하여금 비판의 죄를 수반하는 심판관과 안내인의 역할을 하도록 할 수 있다.(p111-112)
오늘날 철학과 문학이 얼마나 양심의 가책이라는 짐을 지고 있는지 보라. 소설, 수필, 연극, 영화 등 모든 것이 죄책감의 문제를 다룬다. 형식적인 죄책감과 누가 정말 죄인인지 결정하는 일의 불가능함 그리고 깊숙이 자리잡은 죄책감, 널리 퍼져 있고 신랄한 죄책감,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그 죄책감이 이끌어내는 반발 등(p115)
제9장 누구나 자신을 방어한다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리게 되면, 아무리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할지라도, 혹은 그것을 마음속 깊이 숨기거나 나 자신도 거의 혹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지라도, 그러한 판단은 그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틈을 만들고 절망스럽게도 내가 그에게 효과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방해한다. 나의 판단은, 그를 그의 잘못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그 잘못에 더 깊이 빠지게 만든다(p117)
내가 여기서 반박하고 있는 것은 매우 널리 퍼져 있는 한 가지 착각이다. 그 착각은, 그렇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비난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언제라도 선의로 이런 실수를 범하는데,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데 더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거나 더 높은 도덕적 이상을 가지고 있을 때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오로지 그들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완벽한 모습을 보기를 바라며, 그들의 불완전함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그들에게 그것을 고치도록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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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희망적인 일인가! 그런데 바로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난다! 비난이라는 저지를 당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정당화라는 방어적 반사 작용을 보이게 된다. 비난에 대한 답변이 즉각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다. 갖가지 자기 주장이 흘러넘쳐 그의 생각을 온통 채워 버리므로 그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거나 수치를 느낄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오만 가지 훌륭한 이유를 들 수 있다.(p118)
모든 비난은 파괴적이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 모두가 사람들의 비판에 대해 그러한 두려움을 갖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갖가지 두려움을 느끼면 자기 보존 본능을 드러낸다. 우리는 기아나 추위, 혹은 야수에 대항해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쏟는 것과 똑같은 힘을 가지고 비난에 대항해 우리 자신을 옹호한다. 그것은 치명적인 위협이기 때문이다.(p120)
어느 누구도 의지의 노력으로 비판의 정신을 없앨 수는 없다. 내게 충격을 주고 나로 하여금 그를 비난하게 만든 그 친구의 결점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내가 아무리 여러 번 "나는 그를 비난하고 싶지 않아"라고 나 자신에게 말할지라도 나는 그를 판단한다. 그러나 그가 자책하고 있는 잘못을 내게 말할 때, 내가 나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친구에게 그것에 대해 자유롭게 말하자마자 비판의 정신은 증발해 버리고 만다.(p125)
비난과 자기 방어의 논리적 태도가 각자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거리낌없이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의 태도로 바뀌는 것이다.(p126)
제10장 죄책감의 단일성
참된 죄책감에 대한 두려움은 항상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존중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즉 유아적 죄책감에 대한 두려움과 관계가 있다.(p131-132)
유아적 죄책감은 우리에게 도덕성의 세계를 일깨우며, 우리의 가장 진정한 죄책감 가운데 활동하기 시작하는 양심의 민감함을 가지도록 우리를 훈련시킨다(p134)
-> 이 장에서는 죄책감의 근원이 동일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제11장 비판은 파괴적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할 때마다 우리에게 강요되는 스스로에 대한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성경은 용기를 가르쳐 주는 학교이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이며, 때로는 갈등이 불러일으키는 불가피한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우리의 확신을 지지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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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또한 우리의 삶에 대한 도덕적인 감시를 하고 우리의 행위에 대한 심판자가 된 다른 사람들의 계속되는 주장과 판단에 의해 우리 자신이 엉망이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지키라고 말한다.(p141)
비판은 항상 파괴적이다. 아내는 최근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는 항상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근거가 충분한지 아닌지가 아니라 그것이 그 사람에게 건설적인 것인지 파괴적인 것인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해요."(p147)
돌이켜보건대 우리는 비판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어떻게 인류를 무력하게 만드는지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비슷하게 만들고 비인격적인 행동 양식 안에 묶어 두는 순응주의의 원천이다.(p147)
어떤 사람이건 주위에서 사랑과 확신을 심어 줄 때 놀랍게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판단받지 않는다고 느낄 때, 다른 사람들의 비판이 우리를 숨막히게 하는 그 힘을 가늠할 수 있다.(p148)
-> 비판하는 것. 책을 통해서 고민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모략'을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비판은 어떤 형태로든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의 죄를 고백하라'에서는 죄에 대해서 어물쩡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게 맞는가 싶었는데 또 이 글을 읽으니 그건 아닌 것 같고. 내가 책을 읽으면서 어떤 오해가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배제와 포용'에서도 왠지 이런 고민을 다룰 것 같다.
제12장 의사는 비판하지 않는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성직자보다는 오히려 의사나 심리 치료사를 찾아가는 것은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p154)
의사는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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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편에서 회복을 위한 필수 조건은 모든 비판에서 벗어나 폭넓게 받아들이는 자세이다(p154)
처음에는 편견 없이 듣는 것이 쉽다. 환자가 우리를 신뢰하기 때문에 훨씬 더 쉽다. 우리가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쉽다. 그러나 만약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 즉 그 가족과 주변 환경, 그의 문제 모두를 알고 있는 사람을 치료하는 경우, 편견 없이 듣는 것은 훨씬 어려워진다(p154)
객관적인 의견은 항상 어느 정도 비판의 성격과 힘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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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찾기 위한 공통적 탐구라는 선의에서 행해졌을지라도, 모든 지적인 논쟁은 다소간 권력을 위한 싸움이나 지배를 위한 투쟁의 의미를 갖는다. 각자는 자신은 옳으며 다른 편은 결국 틀렸으며 또한 그에 대해 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자신이 더 큰 자인 것처럼 느낀다. 엄밀하게 말해서 판단(비판)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판단하지 않고 사는 것은 숨쉬지 않고 사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제, '나는 생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나는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160)
삶의 특성은 상호 교통을 통해서 형성된다. 그 상호 교통이라는 것은 무해하고 감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값을 치러야 하는 약속인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비판에 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산다는 것은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하는 것은 실수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며, 또한 실수를 저지른 죄책을 짊어지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책임에 대한 두려움은 어떤 일에 개입함으로써 일어날 수도 있는 결과적인 죄책감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인간의 비판의 파괴적인 결과를 당하지 않기를 열망하면서 더 엄청나고 확실한 파괴의 길 - 비겁함과 도피의 길 -에 들어선다 (p161-162)
제3부 반전
제13장 멸시받는 자의 방어
하나님은 자각된 죄책은 없애 버리시지만 억압된 죄책은 일깨우신다(p167)
실로 반전이 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 약한 자, 멸시받는 자를 더 좋아하신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의인보다 죄인을 더 좋아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것은 성경적인 관점으로 정확하게 설명되며 현대 심리학으로 확증된다. 즉 모든 사람은 똑같이 죄책의 짐을 지고 있다. 의인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단지 그것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죄책을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와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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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약한 자, 가난한 자, 낮은 자, 죄인들 - 자기 자신의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을 인식한 자들-과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택하심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의 경멸과 자기 경멸로부터 구원한다.(p171)
심리학자는 이 모든 것에 최고의 흥미를 느낀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제기된 모든 죄책감, 즉 열등감과 혼동되는 죄책감, 타인이나 사회, 편견, 수치심, 사회적 판단에 대한 유아기적 의존 등 죄책감은 바로 '행위'의 죄책감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병의 원인이 되는 도덕주의적 죄책감을 의미한다.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망가뜨리는 갖가지 상호 판단은 '행위'의 국면에서 일어난다. 그들을 화해시킬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공통된 비참함에 대한 인식인데, 이것은 '존재'의 국면에서 발견될 수 있다. 모든 판단과 갖가지 경멸의 표현은 "저것은 행해졌고... 저것은 행해지지 않았다"는 것에 의지한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행위'의 개념을 강요하고 싶은 주제넘은 욕망을 내포한다.
우리가 보아 왔듯이, 이러한 메커니즘은 계속 스스로 재생산해서 죄책감과 비판 그리고 반발과 냉담함이라는 무자비한 쳇바퀴에 모든 사람을 붙잡아 놓는다. 무엇이 이 악마적인 노예화를 깨뜨릴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행위의 죄책감으로부터 존재의 죄책감으로의 전환이다. 점잖은 사람과 자유로운 기질의 사람이 갖는 공통점은 그들의 인간성, 즉 비참함, 고통 그리고 인간 조건과 '존재'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공통되는 낮아짐과 공통되는 해방 안에서 그들을 결속시키고 화해시키며 하나 되게 한다.(p175)
제14장 금기로부터의 해방
예수 그리스도는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의 유죄를 선언하시고, 모든 사람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죄인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최후의 일격을 가하신다. 그리히여 사람들이 죄가 없다고 자랑하며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써 죄책감을 없애주는 은혜를 얻도록 하신다.(p182)
제15장 정신 분석과 죄책감
정신분석학은 전혀 죄책감을 '제거하지' 않는다. 정신 분석학은 죄책감을 제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전환시켜 준다. 가령, 어떤 남자가 성적인 본능을 더 이상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성적 본능을 인정하지 못한 과거의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자의 죄책감은 금기와 관련이 있는 반면 후자의 죄책감은 자신에 대한 신실함을 동반하기 때문에 훨씬 더 진실하다는 의미이다. 내용은 달라지지만 죄책감은 항상 존재한다(p192-193)
제16장 양심의 억압
의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느낀다. 죄는 성경이나 교회의 창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 속에 보편적으로 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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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의 무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러한 반사적 자기 합리화를 나타낸다. 현대 심리학은 이러한 반응을 '양심의 억압', 즉 죄책감을 의식 영역에서 몰아내 무의식 영역으로 억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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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오로지 자신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때로는 참으로 교묘하고 신중하게 하는 말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p203-204)
모든 국가가 자국의 첩보망을 적의 스파이 활동에 대항하는 '방첩'이라고 부르고 있다 무기 사용은 항상 정당 방어 행위에 속한다고 여긴다. 그리스도인조차 그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으며 그들은 두 가지 형태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 군인일 경우, 살인 방법을 배우고 있다는 죄책감과 자기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국토 수호를 위한 일인데 그 일 하기를 거부한다면 반역자가 된다는 죄책감을 가질 수 있다.
세상에는 절제되지 않은 갈망이 너무 많고 다른 사람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진실한 고발 또한 참으로 많다. 이러한 갈망과 고발은 사람들 간의 갈등을 계속해서 악화시킨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투사함으로써 그 죄책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소문과 스캔들이 주는 쾌감은 타인의 죄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억압된 죄책감이 주는 소외감과 고독감을 어느 정도 해소하려는 욕구를 채워 준다.
대규모적 차원에서 그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일상적인 삶의 사소한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럽게 느낄 때 타인들에 대해 불평하게 된다. 그것은 수건돌리기 놀이와 같다. 사람들이 원 모양으로 앉은 상태에서 노래를 부르며 자기한테 넘어온 수건을 옆 사람에게 빠르게 전달한다. 노래가 끝났을 때 수건을 갖고 있는 사람은 벌칙을 받아야 한다. 모든 인간은 수건 돌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다. 죄책감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계속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p209)
세상에 악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불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하거나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공의롭고 선하신 분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내게는 인간의 삶의 드라마를 너무나 피상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많은 신자들보다도 그 사람이 하나님을 더 진실하게 경외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을 하나님께 투사하고자 하는 욕구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거룩을 진지하게 사유한다. 그는 또한 양심의 민감함과 자기 개인의 죄책감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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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신의 죄책감을 타인들과 하나님께 투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죄책감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결과 생긴 타인들과 하나님에 대한 반항심은 악에 대한 새로운 충동의 원천이 되며 따라서 더 많은 죄책감의 원인이 된다.(p211)
제17장 죄책감의 각성
양심의 억압, 반사적 자기 합리화, 타인에게 죄책감을 투사하는 것은 죄책감의 문제에 대한 거짓된 해결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반응들은 치유를 위한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의를 강화시키기 때문에 오히려 참된 해결책에 장애가 된다. 심리학적 관점이나 성경적 입장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이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죄인임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회개하며,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p213)
영적인 생활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능동적인 과정이다. 인간의 참회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움직임 곧 방향의 전환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는 정적인 속성이 아니라 움직임 곧 맹공격이다.(p218)
성경은 죄책감 때문에 만신창이가 된 사람에게 용서와 은혜의 확실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죄책을 부인하는 사람에게 그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무서운 위협을 가한다.(p218)
죄책감(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것이든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든)은 분노와 반항심과 두려움으로 연결되며 이것들은 악을 행하게 한다. 그리고 악이 극에 달하면 또다시 죄책감을 낳는다. 결국 문제는 죄책감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대화, 그분의 질문과 금지 명령은 인간이 이러한 악순환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막으시고, 죄책을 인식함으로써 회개와 은혜에 이르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수많은 노력인 셈이다(p223)
제18장 인간의 조건
어느 누구도 죄책감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죄책감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억압하느냐 인정하느냐에 따라서 두 가지 상반된 과정을 겪는다. 억압할 경우, 분노, 반항, 두려움과 염려, 양심의 마비, 자신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의 퇴화, 공격적인 성향의 계속적인 우세로 나타난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인정할 경우 회개, 하나님의 용서로 말미암는 평안과 안전함으로 나아가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양심은 점차 순화되고 공격적 충동은 계속해서 약화된다.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는 인간의 완벽한 순종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이 그분께 청종하는 이들의 순종을 이용하신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의 잘못과 마음의 완악함도 이용하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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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역을 하다가 좌절을 맛보게 될 때 자동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그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나의 잘못인가? 상대방의 잘못인가?' 그러나 그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단순히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때가 있으며 우리는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개념을 매우 자주 발견한다. 나의 잘못은 바로 참을성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분의 계획은 나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다. 나의 실패는 나의 존재를 초월하는 그분의 계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다. (p236-237)
하나님은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의 죄책감은 없애 주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그들을 가혹하게 대하심으로써 그들이 죄책감을 깨닫고 동일한 회개와 은혜의 체험으로 인도받게 하신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모두 자기 죄를 느끼는 동시에 완악한 존재이다. 우리는 모두 죄책감을 경험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합리화와 양심의 억압이라는 기제를 동원하여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끊임없이 애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성경적 반전의 양측면이 동시에 필요하다. 즉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기 위해 은혜의 확신이 필요하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간절히 자신을 위탁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채찍이 필요하다.(p237-238)
제4부 반응
제19장 신적인 영감
3부에서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자기 만족감에 젖어 죄책감을 억압하는 사람들에게는 경고하셔서 죄책감을 들춰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실제로 이 두 가지 모습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고 혼재하며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칠 위험이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즉 도덕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개인적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p247)
율법 혹은 도덕률이 가진 제한적이고 억압적이며 치명적인 점은 그것의 비인격성이다. 율법에 의존한다는 것은 인격체가 아닌 사물에 의존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 메시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인격체이시며 자신과 살아 있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우리를 부르신다고 전하고 있다. 율법은 명령하고 금지한다 - 명령하는 것 이상으로 금지한다. 인격체는 말하고 격려하고 지시하고 이해하며, 깊고 통찰력 있는 지각으로 계속 인도해 주며, 형식적 행동 체계로부터 동기라는 더욱 심오한 체계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p248)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이것이 바로 비밀이다. 그로 인해 자신에게 훨씬 더 엄격해지지만 동시에 병적인 양심의 가책에서 해방된다. 인생은 끝없이 새로워지는 즐거운 모험이 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하나님은 모든 환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와 교회의 모든 가르침은 우리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지식으로 인도해준다. 그러한 것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이렇게 해서 의식의 영역이 확대된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친밀한 접촉 가운데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방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허용 가능한 것은 무엇이며 원리상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와 같은 율법주의적 관심사가 사라지고 우리의 행동에 대한 궁극적 동기로 강조점이 전환된다.(p250)
-> 율법이나 원칙,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모험.
하나님이 우리를 주관하시도록 맡기고 눈과 귀를 열어 그분이 주시는 개인적인 영감에 의존하는 대신 스스로 일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것- 비록 훌륭한 원리, 심지어 성경에서 도출한 원리를 따를지언정 - 이 우리의 진정한 실패라는 발견이다(p252)
본질적인 문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때에 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다.(p252)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로 걸어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더 이상 도덕성이나 율법, 심지어 선악에 대한 이성적 혹은 영적 구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의 교제 그리고 그분의 영감에 대한 우리의 집중이라는 더 유연성 있고 생생한 인격적 문제이다. 우리는 도덕주의와 무관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도라는 개념은 성경 전체에서 발견된다. 하나님이 일반적인 원칙을 주시기도 하지만 특정한 상황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아주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말씀하시는 경우가 더 많다.(p253)
진정한 삶이란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삶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한 채 더 이상 그분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p256)
제20장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
가장 열렬한 신자들 중에서도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확신에 찬 자를 찾아보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가? 이러한 현상은 대부분 지금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심리적 태도 즉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새겨진,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p259)
모세의 법에는 개인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있으며, 한편으로는 민족의 공동체적 정화를 목표로 하는 연례적인 대속죄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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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적 제례 의식은 죄에 대한 인간의 연대 책임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평화를 누리기 위해 각자 자신의 죄에서 정결하게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정결한 사회적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그 곳은 수동적으로 악에 전염될 위험이 방치된 곳이다.(p262-263)
모든 의식과 희생 제사는 모든 것에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심리적인 율법의 표현으로, 바룩 박사나 칼 융 박사와 같은 이들의 현대적 연구를 통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과 제사에는 또한 원시적 의식 구조에 속하는 주술적 정신도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실제로 효험이 있지만 사람들이 죄책에 대한 유아적 개념을 계속 가지고 있을 경우에만 그렇다. 사람들은 제대로 행해진 의식을 통해 값이 치러졌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덕 의식이 민감해지고 인간이 개인적인 책임감을 인식하는 한, 의식의 효용성에 대한 확신은 파괴될 것이다. 아무리 치밀하게 의식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양심의 평화를 주기에는 더 이상 충분치 못하다. 더 확실한 형태의 속죄가 필요하다(p268)
제21장 대가를 지불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죄책감을 완전히 없애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의식을 행함으로써 죄의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죄를 인정하면 하나님이 바로 죄책감을 해결해 주신다(p271)
죄를 도말하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대한 놀라운 선언은, 모든 인간의 직관적 인식 곧 어떤 것에 대해서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과 충돌한다. 이것에 대한 답은 성경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메시지이며 최상의 계시이다. 그것은 값을 치르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이 단번에 모두를 위하여 그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이다. 그것도 지불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르셨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죽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이었다. 하나님이 그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치를 대가는 아무 것도 없다.(p275)
구원은 사상이 아니라 인격이다. 구원은 자기를 버리신 예수님 자신 -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의 임재 안에서는, 우리에게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온갖 끝없는 논쟁과 모든 사소한 도덕주의적 규정과 타인의 비판에 맞선 자기 방어가 모두 물러간다.(p277)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특권은 우리가 용서받았으며 그 용서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제자들에게 주신 "온 천하"에 다니라는 명령은, 단순히 '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며 기적과 치유의 역사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시적인 증거를 확장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변화인 '메타노이아' 즉 죄에 대한 자각과 그 죄의 도말을, 교만한 자의 낮아짐과 애통하는 자들의 회복을 전파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말은 아니다. 구원은 이미 존재하며 모든 인간을 위해 제공되고 확보되어 있다. 모든 것이 이루어져 있다.(p279)
제22장 조건 없는 사랑
프로이트는 부모의 사랑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유아의 마음에 죄책감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정상적인 삶에서 겪는 모든 마음의 상처는 사랑을 받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과 연관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유아는 자신이 거부당하고 있으며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죄책감의 불안은 바로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한다는 불안이다. 부모의 사랑은 조건적이며 자신이 잘할 때만 부모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인상을 받는 것이다(p282)
시대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와 동일한 생각을 투사해 왔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이 선할 경우에만 자신을 사랑하고 죄를 범하면 사랑을 거두어 가시는 분으로 그린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이것이 인간 문제와 심리학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마저 그분의 사랑을 잃을까봐 두려워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 거짓된 개념은 지금도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만연하며 예수님은 바로 이 생각을 도말하시려고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며 우리의 선함이나 선행이 아니라 우리의 비참함과 죄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 주신다.(p282)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회개가 조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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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들의 회개를 사랑의 조건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용서의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거나, 회개했으니까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용서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솟아나온 것이었다. 실제로 아버지에게는 아들을 용서하는 마음이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p283)
하나님이 조건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라면 구원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그 조건을 이루려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리고 능력의 한계에 부딪히면 우리는 그것을 위장하게 된다.(p284-285)
우리는 모든 도덕적인 해결책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공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유아적 두려움 탓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야 이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하게 된다(p285)
제23장 고백의 방식
메데 박사는 특별히 심리치료는 결국 영혼의 치유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밝혀 주었다. 진료 도중 우리는 환자의 억양이나 잠시 동안의 침묵을 통해, 아니면 심지어 아무런 예고도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그가 지금 실제로는 고해성사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p296)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용서의 메시지를 선포할 책임이 있으며, 특별히 고통으로 짓눌린 수많은 영혼을 접하는 우리 의사들은 그 책임이 더 크다(p296)
고백이 하나님의 용서의 전제 조건인지에 대한 문제가 또다시 제기된다. 나의 대답은 역시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에 이르는 조건이 아니라 길이라는 것이다. 사실 조건을 논의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자유를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든 그것은 성경과는 이질적인 합리적인 사고로 종교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성경은 경험된 사건들을 기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의사들이 병력을 실제로 경험하고 목격한 것으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성경은 어떻게 그 일이 발생하였는가를 다룬다. 성경은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생존하였던 사람들의 예를 통해서 고백의 모습을 보여준다.(p299)
-> 성경은 고백할 것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고백 했음을 기록한 것.
그러나 고백은 조건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수많은 사람이 따라갔던 길이며 항상 동일한 결과를 낳았던 방법이다.(p301)
우리가 모호한 표현을 통해 회피하고 싶고 은폐하고 싶은 어떤 말을 엄격할 정도로 정확하게 표현할 때, 고백의 진실성과 그 효과가 드러난다(p302)
고백은 흔히 죄책감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결정적인 종교적 경험일 뿐 아니라, 이에 '더하여'(마 6:33) 육체적, 심리적 질병이 갑작스럽게 사라지는 치유의 경험이기도 하다(p303)
고백을 듣고 난 뒤에 사죄의 문제가 있다.
고백을 듣고 난 뒤에는 사죄의 선언을 해야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성경의 약속을 상기시킴으로서.(p304-305)
-> 존스토트는 '너의 죄를 고백하라'에서 죄사함의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생긴다고 이야기한다.
제24장 멜기세덱의 반차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이 있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복에 대한 일반적인 선언이 있었고 그러한 선언은 이 기묘한 인물인 멜기세덱이 주도하였다. 그의 이름은 '의의 왕'이라는 뜻이며 '평화'와 '구원'을 의미하는 살렘이라는 왕국의 왕이었다. 멜기세덱은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p311-312)
인간적 문제는 죄책감이라는 보편적인 문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용서에 대한 보편적 필요, 특정 교회가 특정 형식으로 전해 주기 훨씬 이전에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주신 보편적 복에 대한 필요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하부 구조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본래적 상태의 인간 본성, 육체적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며, 자유로운 동시에 책임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한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죄인이 되었고 죄책감으로 고통당하지만 또한 용서를 받는다.(P314)
인간이 자신의 죄책감을 억압하고 타인의 죄를 비난한다면 끝없는 고통과 악순환만 존재할 것이다. 자신이나 다른 이들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죄책감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p316)
온통 죄책감. 산다는 건 죄를 지어가는 과정일까? 죄책감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 죄를 용서하고 사하여서 죄책감을 없애신게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는 것. 모든 사람에게 죄사함의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
201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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