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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시

해인으로 가는 길(2012.10.30.)

 

 

 산경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 했다

산도 똑같이 아무 말을 안 했다

말없이 산 옆에 있는 게 싫지 않았다

산도 내가 있는 걸 싫어하지 않았다

하늘은 하루 종일 티 없이 맑았다

가끔 구름이 떠오고 새 날아왔지만

잠시 머물다 곧 지나가버렸다

내게 온 꽃잎과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다

골짜기 물에 호미를 씻는 동안

손에 묻은 흙은 저절로 씻겨내려갔다

앞산 뒷산에 큰 도움은 못 되었지만

하늘 아래 허물없이 하루가 갔다

 

 

 

산벚나무

 

아직 산벚나무 꽃은 피지 않았지만

개울물 흘러내리는 소리 들으며

가지마다 살갗이 화색이 도는 게 보인다

나무는 희망에 대하여 과장하지 않았지만

절망을 만나서도 작아지지 않았다

묵묵히 그것들의 한복판을 지나왔을 뿐이다

겨울에 대하여

또는 봄이 오는 소리에 대하여

호들갑떨지 않았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경박해지지 않고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요란하지 않았다

묵묵히 묵묵히 걸어갈 줄 알았다

절망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듯

희망도 무서워할 줄 알면서

 

 

다시 가을

 

구름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덜 관심을 보이며

높은 하늘로 조금씩 물러나면서

가을은 온다

차고 맑아진 첫 새벽을

미리 보내놓고 가을은 온다

 

코스모스 여린 얼굴 사이에 숨어 있다가

갸웃이 고개를 들면서

가을은 온다

오래 못 만난 이들이 문득 그리워지면서

스님들 독경 소리가 한결 청아해지면서

가을은 온다

 

흔들리는 억새풀의 몸짓을 따라

꼭 그만큼씩 흔들리면서

.....

 

너도 잘 견디고 있는 거지

혼자 그렇게 물으며

 

가을은 온다

 

 

피반령

 

돌아보니 산은 무릎까지 눈발에 잠겨 있다

담채처럼 지워져 희미한 능성

내려와서 보니 지난 몇십년

저런 산들을 어찌 넘었나 싶다

희인 지나면 수리티재 또 한 고개

그러나 아무리 가파른 산도

길을 지니지 않은 산은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멀리 서서 보면 길보다

두려움이 먼저 안개처럼 앞을 가리지만

아무리 험한 산도

길을 품지 않은 산은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길은 언제나 바로 그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는 걸

 

 

 

김형, 이 산속에서 혼자 지낸 지 세 해가 되었습니다. 그 세 해 동안 나는 정지해 있었습니다. 나도 내 생활도 정지해 있었고 괄호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생략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워지는 시간이 그러나 나는 좋았습니다. 내 몸이 정지신호를 먼저 보내지 않았다면 나는 이런 귀한 시간들을 만나지 못했을 겁니다. 마음의 균형이 깨어져 몸의 균형이 따라서 깨진 상태로 계속 무언가를 한다고 휩쓸려 다녔다면 더 많은 일을 그르치고 말았을 겁니다. 그리고 내 삶은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말았을 겁니다.


몸이 정지신호를 보내 육신을 쓰러뜨리는 것은 잘못 살았다는, 잘못 살고 있다는 경고입니다. 아니, 경고를 이미 여러번 보냈는데도 무시한 것에 대한 벌입니다. 저는 그 벌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며 세 해를 보냈습니다. 벌받는 과정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생각하였습니다.


세 해 동안 나는 그저 간소하고 단순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나를 빈 밭처럼 내버려두었습니다. 전처럼 그 밭이 무엇을 심을 것인가 몇 모작을 할 것인가를 궁리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모여 그 밭이 농사지은 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토의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사례를 만들어 남에게 자랑할 거리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내버려두었습니다. 밭도 그렇게 그냥 있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내 생의 겨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혼자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새소리 물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 사람 사는 동네하고도 멀리 떨어진 산속 외딴집은 적막하고 무서웠습니다. 밤에는 혼자서도 문을 꼭 걸어잠그고 잤습니다. 법주리. 동네 이름은 법주리인데 부처의 법은 어디 머물고 있는지 안 보이고 나무와 숲만 보였습니다. 적막하고 낯선 산중으로 유폐된 내 삶이 측은하기도 했습니다. 사방이 고요하여 나 혼자 소리치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나도 자연히 고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요함에 조금씩 익숙해져가자 혼자 있는 건 나만이 아닌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낙엽송도 혼자 서 있고 두충나무도 혼자 있었습니다. 나리꽃도 저 혼자 피어 있고 고라니도 산비탈을 혼자 건너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도 다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낙엽송도 숲의 다른 나무들과 같이 섞여 있고, 냉이꽃도 꽃다지와 함께 있으며, 고라니도 멧비둘기와 같이 있었습니다. 숲과 별과 벌레와 계곡물과 너럭바위와 같이 있는 것이지 혼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며, 숲이 내 폐릐 바깥이고 내가 숲의 뱃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그래도 내가 형편이 가장 나았습니다. 비를 맞지 않고 잠자리에 들 수 있고, 겁내지 않고 물을 마실 수 있으며, 다른 짐승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없는 것도 나였습니다.


...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찾아와 나와 함께 지내기 시작하면서 하늘의 별들이 수없이 지붕 위에 와 모여들었습니다. 별들이 몰려와 노는 걸 보기 위해 유리창 밑에서 자다가 밤에 몇 번씩 깨기도 했습니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내 생애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시간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러나 김형, 이렇게 살면서 개운하지 않은 구석이 한 군데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삶이 나 하나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삶이란 점입니다. 간결하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사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나 하나만의 온기를 위해 나무를 하고 나 하나만의 허기를 메우기 위해 밭을 일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무를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의무,내가 짐져야 할 것들을 짐지지 않고 물러나 있는 것 같은 죄스러움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 속에서 보다 더 가치 있는 의무를 만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작고 하찮은 것이든 보잘것없는 것이든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을 향한 더 의미 있는 의무를 만나게 되는 날이 자연스럽게 오리라 생각합니다.

 

 

2012.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