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위한 코이노니아
- 저자
- 대천덕, 벤 토레이 (엮음) 지음
- 출판사
- 홍성사 | 2012-08-08 출간
- 카테고리
- 종교
- 책소개
- 대천덕 신부가 외쳤던 통일에 대한 비전!▶ 이 책은 한국어와 영...
이 책은 대천덕 신부의 아들인 벤 토레이가 대천덕 신부의 글을 엮어 쓴 책이다. 특징은 책의 앞쪽에는 한글로, 같은내용을 뒤쪽에는 영어로 썼다는거. 영어 부분은 나중에 영어공부용?^^;으로 다시 읽어봐야겠다_
대천덕 신부는_
1918년 중국 산둥 성 지난(濟南)에서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루번 아처 토리 주니어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중국과 조선의 평양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미국 데이비슨 대학교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당시 양심적 병역거부의 실천을 위해 병역대신 선원으로 근무하는 대체복무를 하였다.
당시 미국의 신학생들은 신학교에서 계속 공부하거나, 입대하는 두 가지 길을 선택해야 하였는데, 대천덕 신부는 미국과 전쟁중이던 독일로부터 상선이 공격받을 위험이 있는데도 청사진을 읽는 선원으로 근무함으로써 병역을 대신 한 것이다.[2]
선교에 대한 의견차이로 장로교회와 대립을 보여 성공회로 교파를 옮겼으며 1949년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았다. 성공회 성 키프리안 교회(영어: St.Cyprian Episcopal Church)등에서 목회하였으며, 1957년 성공회대학교의 전신인 성 미가엘 신학원의 재건립을 위해 한국에 입국하여 1964년까지 학장으로 일하였다.
1965년 강원도 태백시에 성공회 수도원인 예수원을 설립하여 빈부의 격차가 없는 평등사회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2002년 노환으로 별세하였으며, 현재까지 예수원에 남아 생활하는 유족으로는 벤 토리(Ben Torrey, 한국명 대영복) 신부가 있다. 현재인(Jane Grey Torrey)사모는 2012년에 별세하셨다.
흔히 벤 토리 신부도 아버지 대천덕 신부처럼 성공회 신부일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는 성공회 신부가 아닌 동방 정교회 전통을 잇는 교회인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의 사제이다. 벤 토리 신부는 예수원 내의 삼수령 수련원 원장으로 북한선교를 위한 "네 번째 강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위키백과)
머리말
머리말은 벤 토레이가 썼다.
아버지(대천덕 신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늘 역사적 상황과 원문의 문맥을 이해하려 애썼고, 서로 모순되는 것과 서로 관련되는 것을 찾아 비교하며 읽었습니다. 이런 탐구를 통해 그는 새로운 발견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가끔은 교회와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진 이해와 상충됨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그는 성경 말씀을 깊이 탐구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일에 능력을 갖기 위해 성령세례를 구하고 그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성령세례를 구하는 기도를 했을 때 그에게는 어떤 은사가 왕창 부어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감정적 체험도 없었습니다. 그런 모든 일들은 오랜 뒤에 찾아왔지요. 어렸을 때 한번은 아버지께 아버지는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걸 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가지 증거가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구하는 자에게는 주신다고 약속했다는 것, 아버지는 그 약속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구했으므로, 따라서 그는 받은 것입니다. 두 번째 증거는 이전보다 더 많은 문제에 자꾸만 부딪히게 되었다는 사실! 아버지 안의 성령이 자꾸 그를 현재의 상황과 갈등을 일으키도록 이끌었던 거지요.(p10-11)
1부 하나님과 교회와 통일
1장 통일 한국을 위한 영적인 전제조건
통일을 위한 기도의 첫째 전제조건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남한의 교회가 통일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서로에 대한 사랑을 부어 주시고,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진행해 나가야 할지 성령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p20)
시편85편 10절에는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기 위해, 그리고 우리 땅에 복 주시기를 구하기 위해서는(12절) 이 네 가지 요소, 즉 인애, 진리, 의, 화평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p21)
통일을 위한 첫째 조건은 남한 교회의 분열에 대한 회개입니다.
...
통일을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정의입니다. 만약 북한에 정의를 회복시킬 방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들과 대화할 근거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은 현재 북한 체제를 옳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남한의 크리스천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에 대해 이해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정의를 구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남한은 하나님의 나라에 근접해 있습니까? 남한에 정의가 있습니까? 정의는 무엇입니까?(p22-23)
남한이 토지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낼 때에야 북한과 함께 나눌 대화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너무 복잡하고 집행 불가능하며 옳지 않은 (다시 말해 불의한) 법률에 의해 남한에서 땅 투기를 계속 허락하고, 아니, 부추긴다면(건물이나 집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땅 투기를 부추깁니다), 우리는 북한과 대화할 게 없습니다.(p24)
자비는 정의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나라에 정의가 없을 때 가난한 사람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고아와 과부는 착취당하고 무시당하게 됩니다. 또 자비를 행함으로써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마침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는 너무나 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의가 시행된다면 자비의 손길이 필요한 불행한 사람이 적어져 나머지 공동체 성원들이 그들의 필요를 쉽게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p24-25)
하나님께서 자비와 정의와 함께 반드시 연관시키시는 세 번째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네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임을 자랑하면서, 자기는 하나님의 법을 다 지키며 교회의 기둥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동행에 겸손함이 없습니다. 만약 이런 교만한 태도로 북한 동포와 얘기를 나눈다면 모든 게 헛수고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종교적 태도와 관계에서 겸손함을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오직 이러한 겸손한 태도로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거나 그 현현을 보지 못한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갈 사람은 우리뿐입니다.(p25)
추론해 보건대 북한 정부의 철저한 반종교정책은 북한 주민의 삶에 커다란 영적 공백을 남겨 놓았을 것입니다. 한국에는 늘 샤머니즘의 흐름이 있어 왔기에, 북한에도 어떤 형태로든 샤머니즘이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마르크스주의 아래서 오히려 확대됐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암암리에 행해지겠지만, 정부 당국도 기독교와는 달리 샤머니즘에 대해서는 눈감아 주었을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를 위협적인 존재로 봅니다. 기독교는 정의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샤머니즘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샤머니즘에는 윤리적 이상이 없고 단지 기도와 제사로 복을 구하려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남한의 기독교인 중에도 이런 샤머니즘 정신을 가신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기도와 금식, 교회 출석을 통해 복을 받기 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의 하나님이 샤머니즘의 잡신들보다 훨씬 크다고 생각하며, 기독교인들은 좋은 것을 얻어 내는 온갖 비책을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식의 기독교를 들고 북한에 가면 반기는 이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잘못된 이유로 인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은 결코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오로지 그들의 이기심만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는 남한의 개인주의가 북한의 전체주의보다 낫다고 자부하지만, 실은 똑같은 겁니다. 자기를 섬기고 탐욕스럽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정의와 자비를 해치고,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니까요.(p26-27)
북한의 전체주의와 남한의 무책임한 개인주의를 연결해 줄 중간 지대가 있을까요?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코이노니아 현상입니다.(p27)
2장 코이노니아(통일논단, 1993)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학교에서는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성경에만 나오는 표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3년 전까지 그렇게 믿었습니다. 제가 그러한 사실에 의문을 가지고 확인해 보니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그리스 문학 전반적으로 자주 쓰여 왔고, 적어도 1,000년 동안 그 의미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p29)
그리스 문학에서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상호 간의 헌신과 책임, 일생 동안의 헌신을 전제로 하는 관계에 사용되었습니다. 또 부부나 친형제자매(사촌은 포함되지 않음) 관계, 사업상 신뢰를 맹세한 파트너, 군사동맹을 맺은 두 왕, 위기 상황에 반드시 도와주겠다는 맹약을 한 사이에 사용되었습니다.(p30)
3장 탐욕은 우상숭배(통일논단, 1994)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심각한 가뭄은,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P33)
4장 샤머니즘(통일논단, 1994)
샤머니즘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샤머니즘이 유교나 불교 또는 어떤 형태의 유일시니교보다 원시적이므로 가장 먼저 생겨난 것이라 추정합니다.(P36)
샤머니즘은 포괄적인 용어로,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보통 그렇지요)는 가정 아래 (산이나 호수, 샘, 나무 바위에 산다고 여기는) 잡신을 이용해 기도 응답을 받으려는 모든 형태의 노력을 포함합니다. 복음은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이러한 영들이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훨씬 더 능력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림으로써 모든 잡신의 권세도 무너뜨림)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 바로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하늘로부터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기만 하면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싶게 하시고, 또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무당이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p37-38)
이러한 샤머니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는 열쇠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보내신 성령을 받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의 기도는 그저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가 될 것입니다.(p38)
금식이나 40일 기도 등을 우리의 영성을 강화하고 더욱더 성숙에 이르게 하기 위한 영적 훈련으로 삼는다면 좋은 일이지만, 하나님에게 무엇을 강요하기 위한 방법이라면 그것은 샤머니즘적인 것입니다. 형식은 샤머니즘이 아니지만 정신은 샤머니즘인 것입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마음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열망,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그 일을 이룰 수 있는지를 찾아내려는 모습입니다. 샤머니즘적인 마음 자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의지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속여서 자신의 일을 이루어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 자세가 모두 오늘날 교회 안에 존재합니다.(p38-39)
만약 우리가 북한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당신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며, 십일조를 바치고, 금식하고 기도하면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단지 어떤 샤머니즘을 또 다른 샤머니즘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p39)
진정한 기독교는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모든 탐욕을 비워 내고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랑과 열망으로 가득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p40)
2부 회개와 부흥
1장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신앙계-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1997,09)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와 나라 전체를 위한 기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을 떠나서는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 했던 것을 회개하고, 주님을 찾도록 기도해야 합니다.(p45)
예수님은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것, 자기가 한 말을 지키는 것, 즉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종류의 이자도 받지 말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은행이나 신용조합이 파산하지 않고 사업을 계속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수료를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돈을 빌려 주는 힘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을 부유하게 만든다면, 이것은 고객의 돈을 착취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p46-47)
우리가 나팔을 불어야 할 영역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성적(性的) 관계의 영역입니다. 대중매체, 특히 텔레비전의 영향은 우리의 가치관과 도덕을 파괴해 왔습니다. 쉽게 이혼하는 것이 ‘정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 결혼 서약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 대(代)가 가까이 살아가는 한국의 전통 가족 제도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바로 이러한 가족 제도가 정상적이라고 말합니다.(p47)
텔레비전은 두 가지 명백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먼저 돈을 벌고 쓰는 데 집중하게 해 돈이라는 신을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둘째로, 성에 대해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을 미혹하여 기혼자들은 배우자에게 충실한 것을 구식으로 여기며, 젊은 사람들은 자유 연애가 통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p48)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부모 모두가 사업을 하거나 공장에 다니며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p49)
이는 저임금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충분한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걸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임금 문제에 관해 실로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가족에게 편안한 삶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급여를 지불한다면, 그것은 생산품의 가격을 높이게 될 것이고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반면, 다른 나라의 임금 수준으로 급여를 낮춘다면 한 사람의 수입으로는 가계를 꾸려 나갈 수가 없어도 아내도 직장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이면의 근본적 문제를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토지의 문제입니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나라 중 하나로 꼽힐 만큼 땅값이 엄청납니다. 땅값은 모든 종류의 사업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떠한 사업도 땅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모든 사업에서 땅값 또는 토지 임대료가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을 주셨는지 알아보고, 우리가 그의 법을 불순종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시다.(p50)
정의는 ‘토지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사람이 만든 물품처럼 사거나 팔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토지를 축적하여 토지 가격을 올리는 것을 허용하는 우리나라의 법은 여호와나 예수님의 법이 아니라 바알의 법입니다. (p50)
대천덕 신부의 글 전체에 나타나는 ‘바알의 법’과 이와 비슷한 표현들은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에서 유래한다. 북이스라엘 왕국에 오므리 왕조를 세운 오므리 왕의 아들 아합 왕은 악명 높은 이세벨을 왕비로 맞는데, 이세벨은 시돈의 페테키아 왕 엣바알의 딸이다. 레위기 25장에 상세히 기술된 성경의 법에 따르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로부터 저마다 땅을 상속받는다. 이 땅은 원래 야훼의 것이다. 그들은 야훼로부터 받은 이 당을 영구히 팔 수 없다. 일정 기간 남에게 빌려 줄 수는 있는데, 결국 그 소유권은 원래 할당된 주인 가족이나 부족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페네키아의 신 바알을 숭배하던 이세벨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이세벨과 바알 법에 관한 한, 왕은 자기가 이세벨에겐 야훼의 소유권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었다. 이세벨은 나봇을 거짓 죄를 뒤집어 씌워 돌로 쳐 죽이고 아합에게 포도원을 가지라고 했다. 이 행위와 이 행위로 인해 페네키아의 바알 법 체제가 들어오게 된 것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이세벨뿐만 아니라 아합과 오므리 왕가 전체를 통렬히 비난했다.(p51)
정부가 토지에 임대료를 부과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토지가치세라 부르기도 합니다. 나라의 모든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은 어떤 개인이 아닌 국민 정체에게 임대료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실제로 복잡한 토지개혁처럼 토지 문서나 규칙을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정부가 국민을 위해 임대료를 걷으면 당장 땅값이 내려가 누구든 사업에 필요하면 적절한 값으로 땅을 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반면 지금은 땅값 때문에 집값이나 사업 비용이 배로 들어 노동자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지불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정부가 일단 ‘토지가치세’ 또는 ‘토지 임대료’를 징수하기만 하면, 사업 비용이 낮아지고 적절한 임금을 지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제도는 미국의 여러 도시(미국의 토지세는 연방정부가 아니라 지방자치정부가 징수합니다)뿐 아니라 대만, 홍콩, 그리고 싱가포르에서 실시되고 있습니다.(p51-52)
우리나라의 경우, 남한 방식으로 통일된다면 남한의 지주들이 북한으로 몰려가 땅을 사고 관리하여, 북한에는 부유한 남한 지주가 소유한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만 남게 될 것입니다. 북한은 이렇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남한을 두려워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전쟁 무기가 아니라 우리 식의 평화입니다!(p52)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할 또 하나의 죄악이 있습니다. 학교와 대학에서 널리 가르치는 진화론이 바로 그것입니다.
...
대학에서 확고하며 당연하게 여겨지는 진화론적 사고가 오늘날 우리가 도덕을 잃게 된 근본적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적 순결이라든가 결혼생활의 충실함, 모든 관계에서 진실을 말해야 하는 등의 도덕적 규약이 다 무너졌습니다. ‘적자생존’은 실제로 ‘가장 잔인한 자의 생존’을 뜻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거나 하나님의 도덕 법칙을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말고 오직 부와 명성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삶의 모든 면을 철저히 이기적이고 부도덕하게 행동하는 게 가장 현명한 일이라는 걸 뜻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지식이 하나님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지식은 사회의 파괴부터 시작해서 결국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병든 몸과 마찬가지로 병든 사회는 그 병을 고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p53-54)
2장 정의 (신앙계-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1996.08-09)
히브리어와 헬라어 체데크(TSEDEQ)와 다이크(DIKE)
의는 유교 전통에서 온 것으로, 올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한 사람의 조상에 대한 관계라든가 가족 구성원과의 관계, 그리고 더 넓게는 공동체와 사회와의 관계에서 올바른 관계를 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P57)
2. 성경은 ‘정의’를 요구하는가?
먼저 마태복음 6장 33절부터 시작합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정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의무가 정의를 추구하는 것임을 분명히 명시합니다.(p59)
즉 정의가 없으면 제사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의 죄로 희생되셨고 덕분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면서 정의를 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바리새이나 사두개인과 같은 배를 타고 있는 것입니다. 정의의 제사를 드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p61)
3. 현실적 수준에서 정의란 무엇인가?
‘권리’라는 말은 히브리어 ‘체데크’나 ‘미쉬팟’의 또 다른 뜻인데, 땅이 없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땅이 없는 사람은 생계를 잇기 위해 지주가 요구하는 대로 뭐든지 지불해야 하니까요. 땅 없는 소작인은 노예보다도 못합니다. 노예는 살아 있는 동안 음식, 거처, 그리고 의복을 공급받습니다. 땅 없는 소작인은 언제라도 아무 갈 데 없이 길거리로 쫓겨날 수 있습니다.(p65)
먼저 하나님의 정의와 나라를 구하려면(만약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의 현 경제 시스템을 정의로운 시스템으로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봐야합니다. 모든 사람이 혜택을 받고 참으로 자유롭게 되는 정의로운 경제 체제로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을 찾아봐야 하는 것입니다.(p66-67)
율법은 이자 받는 일을 금합니다. 이자는 (지주제도와 함께) 현대 경제제도의 핵심을 이룹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신용조합이나 협동조합을 만들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지 않고도 또 막강한 금융기관의 횡포에 휘둘리지 않고도 돈을 빌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자 받는 일을 불의로 봅니다. 마찬가지로 공동토지신택을 이용하면 국가가 토지가치세 정책을 세울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토지 문제를 지역 단위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적 경제 원리를 현대적으로 적용한 예로, 대만에서 가장 착실하게 시행되고 있습니다.(p68)
성경이 언급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점은 무게와 측량의 문제입니다.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일을 사용하라 나는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 땅에서 나오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19:36) 표준 도량형은 자유의 표지입니다! 인플레이션은 자유를 파괴합니다.(p69)
우리 현대사회에서는 킬로그램, 미터, 리터 등 엄밀한 측량 단위를 쓰고 있지만, 이 원칙을 화폐에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화폐 가치가 계속 하락합니다. 1킬로그램의 금값은 계속 오르고, 1리터의 우유도 지난해 보다 비싸졌지만, 오늘날 하루 임금은 몇 년 전 받던 것보다 못하고, 선조들과 비교하면 훨씬 더 못합니다. 이는 도적질입니다.(p69)
모든 사람들이 서로 잘 알고 있는 작은 지역사회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 뇌물의 유혹은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결정이 중앙정부에 달려 있으면 있을수록, 불의의 위험은 더욱 커집니다.(p73)
4. 큰 소리로 외치기
시편 72편은 정의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정의란 가난하고 압제받는 자들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의 주된 관점은 만약 우리가 정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압제자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강자와 약자간 투쟁에 중립이란 없습니다. 침묵을 지키는 교회는 압제자의 편에 서 있는 것입니다.(p75)
기독교 국가와 그에 고용된 성직자들은 온갖 종류의 자선사업에 돈을 씀으로써, 정의를 행하지 않는 자신들의 불순종을 덮어 왔습니다. 만일 그들이 정의를 행했더라면 자선 사업의 십중팔구는 필요가 없어졌을 것입니다.(p75)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압제당하는 자가 땅을 차지하고(돈을 주고 사는 게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땅을 받게 되고), 주의 은혜의 해(이것은 희년으로, 희년이 되면 모든 땅은 원래 소유자에게 돌아가며, 여기에는 아무도-심지어 이방인도 제외되지 않습니다)를 전파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p76)
예수는 병자를 고치거나 슬픈 사람을 위로하거나 사람들에게 친절해지라고 말해서 처형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구약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리고 땅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그를 따랐기 때문에 처형된 것입니다.(p76)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좋은 소식입니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교회의 주된 임무이며, 결코 부차적인 일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성직자에게 사례비를 지급하게 되면,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고 프로그램의 재정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장하는 사회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의 명령을 받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p78)
3장 영적 전쟁과 IMF(통일논단 1993)
3부 하나님과 가이사
1장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신앙계-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1999 05)
레위기 25장은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으로,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대여되었으며(1950-1953년 한국의 토지개혁처럼), 만일 다른 사람의 땅을 사용할 경우, 토지를 상환하는 희년이 될 때까지 원 주인에게 그에 상응하는 토지 임대료를 주어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토지를 분배한 지 50년이 되면 땅은 무상으로 원주인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대부분의 현대 경제에서 이것은 ‘토지가치세’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세금이 아니라 임대료 또는 대여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선 이것을 땅의 원주인에게 지불하라고 하십니다. 만약, 땅을 사용하는 사람이 해마다 임대 가치를 모두 지불한다면, 50년째 재분배하는 목적이 달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 해가 희년 전 해인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며, 혹은 모든 해가 희년인 것처럼 되어 땅 주인은 다시 땅을 임대할 것입니다.(p88-89)
많은 나라에서 정부 지출의 상당 부분이 온갖 종류의 세금을 걷는 데 들어갑니다. 그 온갖 종류의 세금은 정부의 운영 기금과 사회복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과된 것이지요. 만일 토지 임대료만으로 세금을 걷는다면, 정부의 지출은 30퍼센트 정도 줄어들 것입니다.(p89)
땅이 없는 사람에게는 자유도 없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지주의 손에 달려 있거나, 그들에게 먹고살 일자리를 주는 사람 손에 전적으로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특히 집 없는 자들 뿐 아니라 외국인과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토지를 제공하여, 거기에 집을 짓거나 사업을 시작하거나 생산적 일을 해서 스스로 자립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민주주의’를 한다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진짜 권력은 국민이나 유권자에게 있는게 아니라, 땅을 가진 지주들에게 있습니다. 종종 이들은 누구인지조차 알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지주들은 눈에 보이는 권력자 뒤에 은밀하게 숨어 그들을 조종하기 때문입니다.(p93)
코이노니아란 ‘함께 나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물질적인 문제건 실제적인 문제건 지적인 문제건 영적인 문제건 함께 나누고, 지혜를 구하기 위해 함께 만나 기도하고 또 서로 올바른 해결책을 찾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 각 사업계와 법조계, 정치계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서로 찾아가서 조언을 나누고 도움을 주는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합니다.(p97-98)
2장 하나님과 가이사(신앙계-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1998 02)
민주주의에 대한 두 가지 다른 견해가 있는데, 모두 18세기에 생겨나서 우리에게로 이어져 왔습니다. 하나는 프랑스혁명의 이상으로 인본적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미국독립혁명 이상으로 신본적인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중요하며,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다스릴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설 것이고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며, 투표할 자유가 주어진다면 당연히 선한 것에 표를 던지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미국 사람들은 모두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미국혁명은 신본주의적 사상에 지배되었으며, 사람들에게 투표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면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투표하여 신을 따르는 정부를 수립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며 정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이 정신은 구약의 정신과 흡사합니다.(p103-104)
3장 인플레이션과 하나님의 법 (통일논단 1994)
현대사회는 정확하고 정직한 무게와 도량형을 내세우지만, 금융 체계(은행과 화폐)의 부정직성은 그 말을 무색케 합니다. 은행과 정부는 아무것도 없는 데서 돈을 찍어 내서는, 마치 그것이 중요한 가치를 가진 것처럼 통용시킵니다. 그 결과, 모든 나라에서 화폐 가치는 계속 하락하고 노동자들은 아버지가 생활 했던 똑같은 금액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제가 20대였을 때는 미국에서 숙련된 노동자 한 명의 노동이면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지만, 요즈음은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 부부가 함께 일해도 가족을 부양하기 힘들어 허덕입니다. 임금은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으려고’ ‘올라가’지만, 절대 따라잡지 못합니다. 실질 임금이 계속 하락하다가 결국 위기가 닥쳐야 피를 뿌리면서 정의를 회복하려는 노력들이 생겨납니다. 이런 위기가 닥치기까지 ‘축소시킨’ 에바로 인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갑니다.(p115)
정부가 권위를 이용하여 돈을 찍어 내는 건 모든 국민들로부터 일정한 비율의 돈을 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모두에게 똑같은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닙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 타격이 큽니다. 날마다 오늘 번 돈이 어제 벌이보다 조금씩 적게 됩니다. 저축을 한다 해도, 이자로 얻는 만큼 인플레이션으로 잃게 됩니다.(p116-117)
진짜로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습니다. 감자를 키우는 데 드는 노동 시간, 한 사람이 건강하게 살기 위해 먹어야 할 감자의 수 등. 사람들이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시장에 가지 않아도 된다면, 그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같은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감자를 키우는 데 들어간 비용보다 싼 값에 감자를 팔아야 하고, 대신 감자를 팔아서 번 돈보다 비싼 값에 쌀을 사야 한다면, 큰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p117-118)
권력자들이 서로 경합해 더 높은 땅값을 매기고, 땅값은 계속 올라갑니다. 인플레이션 비율이 10퍼센트라면 토지 ‘가치’의 상승률은 50퍼센트나 100퍼센트, 아니 더 높아질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인플레이션의 타격을 받지 않기 위해 땅에 투자한 사람들이 자기가 쓸 수 있는 모든 권력과 힘을 동원해 (보통 땅이 많으면 권력도 많지요) 정부가 토지가치세를 부과하지 못하도록, 토지 임대료를 징수하지 못하도록 싸우는 것입니다. 그들은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싫어합니다. 선지자나 설교자가 이런 얘기를 시작하면, 그들은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필요하면 생명을 위협해서라도 침묵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p118)
4장 이자에 대한 성경적 대답 (통일논단 1994)
은행 이자도 여전히 높아서 다음 두 가지 문제가 여전히 있습니다. 첫째, 극빈층 사람들은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가 없고, 둘째, 어떤 사람은 단지 돈을 빌려 주는 것만으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성경은 이러한 두 가지 문제에 주목합니다. 하나님은 농사나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자본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아주 작은 이자나 이자 없이 돈을 빌릴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자가 무거운 짐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일하지 않고 돈을 버는 사람들에게도 관여하십니다. 은행에서 일하는 직장인 월급을 받는 것과 주식을 가진 사람이 일하지 않으면서 점점 더 부유해지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돈 관리의 윤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특별히 장애가 없다면)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기생충이요 가난한 사람의 압제자입니다. 지금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받아야 할 것이 공제되어, 일하지 않는 자의 주머니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착취입니다. 이것은 윤리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이 여러 농장을 사서 모든 농부에게 수확의 일부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주는 일하지도 않으면서 점점 더 부유해지는 반면, 고된 일을 하는 농부들은 그나마 풍년이면 가까스로 연명할 수 있지만, 흉년이 들면 굶어 죽기도 합니다. ... 역사를 통해 볼 때 가장 생산성이 높은 나라들에서 가장 심한 빈곤과 굶주림이 나타났습니다. 추운 나라들에서는 상대적으로 이런 문제가 덜했습니다.(p120-121)
-> 왜 괜히 전라도가 생각날까...
안식년에 부채를 탕감하는 것은 사업 원칙이나 경제체제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공의’의 영역이 아닙니다. 낮은 이자로 빌려 주는 건 ‘공의’라 할 수 있지만, 원금 상환이나 이자와 상관없이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는 건 ‘자비’에 해당합니다.(p122)
4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장 노동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또 인간도 유익한 일과 창조적인 일을 분주히 하라고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아담이 각종 동물의 이름을 짓는 걸 봅니다. 이것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하는 일이며, 전혀 쉽지도 않고 또 상당한 시간이 요구되는 일입니다.(p129)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는 기독교 체제가 아니라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사람들에 의해 구성된 체제이기 때문에,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그들 잘못이 아닌데도 고된 중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단지 그들이 이 체제에 대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조적인 두뇌로 노동을 절감하는 온갖 기계를 개발한다 할지라도, 착취자들은 그것을 또한 통제해서, 결국은 악용할 것입니다.(p130)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항상 무엇인가 하고 계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항상 창조적인 일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잘못을 바로잡고 우리가 어질러 놓은 것들을 정리하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p131)
노동은 즐겁고 창조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료를 착취하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더럽고 위험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면 체제를 개선하려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권력이 없다면, 체제가 허용하는 어떠한 종류의 일이라도 해나가되 그 일을 하나님께 하듯 합시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축복하시고 사용하시도록 기도하고 만일 그 일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면 변화시켜 주시도록 기도합시다.(p132)
-> 하나님이라면 이 일을 어떻게 하실까? 를 고민하며 일하기. 노동하기.
2장 기독교 노동 윤리 (군복음화 후원회 원고 1997.07)
한국인은 열심히 일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왜 일을 하는지, 그리고 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과연 건강한 것인지에 대해 잘 생각 해 보지 않으며, 특히 자신의 노동관이 기독교적인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p134)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 역시 창조적인 일을 해야 합니다. 인간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하여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에 열의를 품어야 합니다. 인간은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하라고 할 때까지만 일하고 하나님이 쉬라고 하면 쉽니다. 칠일째 안식일도 노동윤리의 일부입니다.(p136-137)
우리 그리스도인의 노동윤리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의해 지지됩니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받았기에 일하고,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일합니다.(p138)
하나님은 저를 창조적인 사람이 되라고 창조하셨으며, 자연(아름다움과 질서와 유용함)과 그리스도(화해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것) 속에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심으로써 창조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질서나 아름다움을 드러내거나 손상당한 것(육체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심미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을 드러내는 형태를 띨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아무 대가를 못 받을 수도 있는데) 우리 옆의 친구와 동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입니다.(p138)
3장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신앙계-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1999 02)
야훼의 법은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고, 바로 이 율법 아래서 안정되고 공정한 경제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바알 제도는 원래 시돈(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은 시돈 왕의 딸입니다)에서 행해진 것으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카르타고를 거쳐 로마로, 다시 로마를 거쳐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에까지 퍼진 것입니다.(p142)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데도 코이노니아를 이용하여 빈둥거리면서 여기저기 다니며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이나 하고 교회의 도움에 기대어 지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공짜로 먹여 줘선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합니다. 그들도 무언가 쓸모 있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만일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교회의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 정원을 가꾸거나 집수리를 하거나 아무튼 뭐든지 그들이 할 수 있는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p143)
성경은 누구든 착취하는 것을 금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체제가 여러 가지 형태의 간접적인 착취를 합법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착취하려고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을 착취하고 그 착취로 상당한 이익을 얻는 기관에 투자함으로써 간접적인 착취를 할 수 있습니다. 때로 나와 착취당하는 사람이 서너 단계 쯤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단계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 자신이 착취당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성경은 이자를 금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돈을 빌려 준다면, 나는 그가 삶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그를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에게 일종의 사례를 받는다면, 나는 그 사람을 이용하여 나 자신을 부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빌려 준 돈에 이자가 없다면, 그는 짧은 기간 안에 돈을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높은 이자를 물리면, 그는 빌린 돈을 결코 갚을 수 없게 되고, 어떠면 평생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할 뿐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일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 사람으로부터 이 모든 돈을 받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착취하는 것입니다.(p144-145)
그러나 성장의 자연법칙이 있습니다. 과일나무를 심고 잘 돌봐 주면, 해마다 많은 과일을 수확하게 될 것입니다. 건강한 기업도 똑같은 법칙을 따를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그런 회사의 주식을 갖고 있다면, 그 배당금은 적법한 것이며 그 주식을 팔게 될 경우 투자한 것을 받게 됩니다. 성장하는 기업이라고 해서 반드시 착취하는 기업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업이 자연스러운 성장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면, 그것은 남의 것을 훔치거나 남을 착취하는 사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이러한 기업은 도산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2년간 주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일 제가 그런 회사의 주식을 산다면 저는 그들이 남을 착취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p148)
가장 단순한 형태의 땅 투기는 자신이 일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농토를 가진 농부의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남는 농토를 논이 없는 농부에게 빌려 주고 그 대가로 수확의 절반을 받기로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주 열심히 일한 사람과 똑같은 수입을 얻게 됩니다. 만일 땅 주인이 땅이 상당히 많아서 땅이 없는 농부 두세 명 이상에게 수확의 반을 나누는 조건으로 빌려 준다면, 그는 일을 전혀 하지 않고도 순식간에 큰 부자가 될 것입니다.(p149)
어떤 형태든 도박이나 투기는 일하지 않고 먹으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한탕주의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내기 바둑이나 카지노뿐만 아니라 주식시장, 땅 투기 그리고 다른 여러 형태의 일들이 힘 안 들이고 이익을 얻으려는 발상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p150-151)
바알 제도의 많은 악을 피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협동조합을 통해서입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단결하여 기업을 만들고, 공정한 방법으로 운영하고, 각자 무슨 일을 하든지 업무에 관계없이 이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미국에는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 몇몇 토지조합이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땅을 사서 건설적으로 이용하여 사람들이 비싼 임대료를 내지 않고 농장이나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빌려 줍니다. 이익이 얼마가 되건 조합원들에게 재분배됩니다. 또한 신용조합이나 신용협동조합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들의 기능은 은행과 같지만, 조합원 소유이기 때문에 조합원들에게 이익이 재분배됩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습니다.(p151-152)
4장 빚지는 것 (신앙계-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1998 09)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탐욕과 권력욕으로 그리고 성경의 토지법에 관한 가르침에 대한 무시는 결국 이슬람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인생 후반기를 성경적 경제제도를 시행하자고 탄원하는 일에 바쳤던 톨스토이의 말을 러시아 황제가 귀담아들었더라면, 러시아는 오늘날 건강한 기독교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톨스토이가 미쳤다고 했고, 러시아는 공산국가가 되었습니다. 만약 중국이 쑨원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날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중국은 쑨원의 말을 듣지 않았고, 공산 국가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가 발생한 뿌리와 이슬람이 발생한 뿌리는 같습니다.(p159)
길지 않은 책인데 이것 저것 놓치고 싶지 않은 글들이 많아서 엄청 줄치며 읽었네^^; 잡지에 기고된 글들이라 그런지 더 담백한 것 같다. 통일과 관련된 책인줄 알고 지난 달레 읽었는데, 제목과는 달리 통일에 대한 언급, 북한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불로소득을 줄이는 방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별히 지대를 조세로 거두는 제도를 도입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인간이 그것을 개인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유도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노동을 통해 돈을 벌고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자를 많이 받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돈을 빌리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면, 최소한의 유지만 할 수 있을 정도의 이자만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한국 기독교의 샤머니즘적 성향에 대해서도 공감이 되고.
f.b 책공망
‘대천덕 신부의 통일을 위한 코이노니아’를 소개합니다.
약간 낚시성? 제목인데요,^^;;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주로 이야기합니다. 인플레이션의 문제점, 기독교가 샤머니즘적 성격을 띄는 것의 문제점, 토지를 개인이 사유하는 것의 문제점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로 90년대에 쓰여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여러모로 지금에도 유효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정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아! 그리고, 구성상 특이한 점은, 한글로 쓰여진 것과 똑같은 내용이 영어로 쓰여져서 책의 반틈을 차지하고 있습니다.ㅎㅎ
201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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