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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Rich Chrisrians in an Age of Hunger (2014.8.25.-)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저자
로날드 사이더 지음
출판사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 | 2009-01-17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30년간 복음주의의 사회적 양심을 일깨워 온 현대의 고전! 20...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읽게 된 이유

대학 다닐 때 이 책 제목을 보고는 무슨 제목이 이런가 싶었다. 그때 나는 부유한 시대를 사는 가난한 그리스도인이었기에. 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무슨 부유한 그리스도인. 지금은 부유해졌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서 잘까 걱정 안해도 되고 먹고 입는 것 이 외에 돈을 쓸까말까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또 가난한 그리스도인이 될 예정이긴 하다만은.

모던 클래식 시리즈는 표지 디자인, 책 내부 디자인 모두 고급스러워서 거창한 책을 읽는 기분이 난다. 모든 책을 이런 마음 가짐으로 읽어야 할 텐데...

 

저자

로날드 사이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1939년에 태어났다. 전공은 역사인데 저서들은 거의 사회 참여에 관한 책들이다.

 

쓰여진 연도

1977년에 쓰여졌다. 35년 여 전. 이 즈음에 쓰여진 책들을 읽어도 전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음을 여러차례 경험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비슷한 것 같다. 우리가 미국이나 유럽의 전철을 밟고 있어서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5판 서문 (2005)

 

 

1부 가난한 나사로와 부유한 그리스도인들

 

1장 십억의 굶주린 이웃

 

기아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만 영향을 끼친다. 가난한 사람들은 보통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하게 죽기 때문에, 모든 나라의 부자들은 이 같은 기아를 마음 편하게 무시한다. 그러나 재정의되고 재분배된 기아는 여전히 만연해 있다. 형편이 좋을 때 조차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린 채로 잠자리에 들며, 가난한 아이들의 뇌는 식물 상태가 되고 몸은 질병에 걸려 일찍 죽기 쉽다. (p35)

 

단백질 결핍으로 인한 영구적 뇌손상은 세계 가난의 가장 파괴적 양상 가운데 하나다. 전체 뇌 발달의 80퍼센트는 수태 시점부터 두 살 사이에 일어난다. 뇌가 제대로 발달하려면 적절한 단백질 섭취(개발도상국의 다섯 살 이하의 전체 어린아이 중 3분의 1이 넘는 아이들이 갖고 있지 못한 것)가 필요하다. 1980년대 초에 멕시코에서 실시된 한 연구는 영양이 매우 부족한 어린아이들이 적절하게 음식을 섭취한 아이들보다 지능지수가 13점 더 낮다는 것을 발견했다. 의학은 심각한 영양 실조가 돌이킬 수 없는 뇌손상을 야기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p38-39)

 

 

2장 풍요한 소수

 

 

2부 가난한 자와 재물에 대한 성경적 관점

 

3장 하나님과 가난한 자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이 가난한 자들을 학대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시키셨음을 보여 준다. 물론 우상 숭배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우리는 매우 자주 우상 숭배라는 이스라엘의 영적문제는 기억하는 반면, 경제적 착취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간과한다.

주전 8세기 중엽은 솔로몬 시대 이래로 유례 없는 정치적 성공과 경제적 번영을 누리던 시대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 시대에 예언자 아모스를 보내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반갑지 않은 소식을 선포하게 하셨다. 아모스는 현재의 번영과 엄청난 경제 성장 이면에서 가난한 자들이 억압당하는 것을 보았다. 아모스는 부자들이 힘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는”(2:7) 것을 보았다. 또한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여 부유하게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6:1-7). 법정에서조차 부자들이 재판관을 매수했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5:10-15). (p88)

 

예수님의 실제 사역은 누가복음 4장의 말씀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분은 나병환자와 멸시받은 여인들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다. 예수님은 병든 자와 눈 먼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들을 먹이셨다.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굶주린 자를 먹이지 않고 헐벗은 자를 입히지 않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지 않는 이들은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셨다(25:31-46).

하나님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역사상 최고의 순간에도 그분은 여전히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키셨으며 자기 백성들이 그와 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주된 이유다. (p93)

 

풍요한 그리스도인들은 소돔성 사람들이 저지른 성적 범죄는 기억하면서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은 잘못은 잊어버린다. 성적 범죄가 마음을 덜 괴롭히기 때문인가? 우리가 경제적 이해 때문에 성경을 왜곡되게 해석한 것은 아닌가? 분명히 우리는 그랬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신실하게 믿는다면, 받아들이기 힘든 성경 본문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받아들여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이 부자들을 무시무시한 엄벌이 처할 것이라는 사실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부자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하신다). 다만 많은 부자들이 일상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거나 무시하기 때문이다. (p107)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적당한 생활 수준을 누릴 만한 돈을 벌 기회를 갖기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권능을 부여하신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성경의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 편에 서시는 이유는 편애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관심을 보이시는 공평한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p118)

 

 

4장 경제적 나눔과 경제 정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모든 땅을 소유하시고, 그 땅을 받아 사용하게 될 사람들이 지켜야 할 중요한 요구 사항들을 만드셨다. 그러나 각각의 가정은 여호와의 다스림 아래 자신의 땅을 소유하였다. 이스라엘의 이상은 땅의 소유권을 가족 단위로 분산시키고 여호와의 절대적인 소유권 아래 청지기직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한 학자에 따르면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토지 소유 형태는 자유로운 소작농이 족속들로부터 동일한 크기의 작은 땅을 할당 받아 소유하는 것이었다.

초기 이스라엘의 농업 경제에서 땅은 기본적인 자본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확대 가족이 어느 정도의 삶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자원이 되도록 땅이 분배된 것 같다. (p125)

 

나봇의 포도원 이야기(왕상 21)는 조상 때부터 각 가계에 내려오는 땅의 중요성을 예증해 준다. 구약 성경에서 고대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라는 구절이 자주 나오는 것도(예를 들어, 19:14;27:17 24:2; 22:28; 5:10), 이스라엘의 사회적 이상은 각각의 가정이 생활 필수품을 얻기 위해 필요한 땅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개념임을 지지한다. (p126)

 

하나님은 50년마다 모든 땅을 원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은 신체 장애, 가장의 죽음 또는 타고난 재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가난해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같은 불리한 조건들로 말미암아 생계를 꾸려 갈 기본적인 자원이 부족해져서 빈부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지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가운데 어떤 가정도 그 땅을 영원히 잃는 일이 없도록 보장하는 법을 주셨다. 50년마다 땅을 원소유주에게 돌려주어, 모든 가족이 공동체의 존귀한 일원으로서 직분을 다할 수 있는 충분한 생산 자원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다. (25:10-24)

 

이 놀라운 명령의 신학적 기초는 무엇인가? 바로 여호와가 모든 만물의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여호와가 토지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토지를 영원히 팔 수 없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25:23) (p128)

 

이 구절이 부유한 박애가들에게 무성의한 자선보다는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희년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제도적 구조였다. 희년에 자신의 유업을 돌려받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였다. 토지를 돌려 주는 것은 부자들이 기분 내키면 시행하는 자선 사업이 아니었다. (p129)

 

희년 원리가 자유로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자에 똑같이 근본적으로 도전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소유주이시다. 게다가 각 사람이 자신의 생활을 꾸려 나갈 수단을 가질 권리가, 구매자의 재산권이나 전적으로 자유로운 시장 경제보다 우선한다. 동시에 희년은 그 같은 권리 뿐만 아니라, 각 구성원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는 가정이 관리하는 사유 재산의 중요성도 분명하게 확언한다. 이 본문이 국가가 모든 땅을 소유하는 공산주의의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각 가정이 자신들의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는 자원을 소유하기 원하신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정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다!(이는 아주 중요한 가정 옹호본문이다) 사람들에게 역사를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자유를 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국가나 소수의 엘리트들이 토지와 자본을 집중 소유하는 권력의 집중화와 전체주의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p129-130)

 

주전 10세기에서 8세기까지 토지 소유의 집중 현상이 생겨났다. 가난한 농부는 자기 땅을 잃고 소작농이나 노예가 되어 갔다. 예언자들은 앞에서 묘사한 초기의 분산된 경제 체제를 파괴하는 경제적 억압과 정치적 암살, 뇌물을 받는 일 등을 철저하게 비난했다. 엘리야는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갈취한 것에 대해 책망했다(왕상 21). 이사야는 한 지방에서 혼자 살게 될 때까지 땅을 계속 넓히는 부유한 토지 소유자들을 공격했다. 작은 땅을 가진 농부들은 망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15:5-8)

그러나 예언자들은 책망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모든 땅이 다시 각 사람의 소유가 될 미래의 정의의 날에 관한 강력한 종말론적 소망을 표현했다. 다가올 정의와 완전의 날, ‘끝날에는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4:4; 참고 슥3:10)이다. 지도자들은 더 이상 백성을 압제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백성이 다시 자신들의 조상의 땅을 회복하도록 보장해 줄 것이다(45:1-9, 특히 8-9). (p131)

 

가난한 자의 땅을 갈취한 압제자를 탄핵하고 모든 백성이 다시 한 번 자신들의 땅의 열매로 인해 즐거워할 새 날에 대한 비전에서, 우리는 각 가족이 생계를 꾸려 나갈 경제적 수단을 소유한다는 사회적 이상을 발견한다. 핵심 규범은 모든 백성이 최소한 책임 있게 일함으로써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데까지 기본적인 경제적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론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한 경제적 결과에 대해서는 평등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리고 좀더 성실히 노력해서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p131)

 

토지제도에 대해서 어디서 이렇게 알게 된 걸까 궁금해서 각주를 찾아봤다. 알파벳으로 된 많은 서적들이 있었다. 옳으면, 맞으면 해야하는, 해야한다는 생각. 쫌 단순하긴한데, 이게 맞으면 이거 해야지. 땅이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가족의 소유라는 마인드가 와닿는다. 공동체를 위한 제도. 어느 한 사람을 위한 제도이기도 하지만, 공동체가 함께 살 수 있는 제도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도, 그 가족의 이웃도,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성경은 그냥 은혜 받는 도구가 아니다. 잘 살 수 있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책이기도 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적어주신 책이다.

 

신명기 15장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이상적인 진술이요 이스라엘의 악한 행동에 대한 실제적인 언급이다. 4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모든 명령에 순종한다면 더 이상 가난한 자들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 기준을 준수하지 못할 것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11절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항상 있을 것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눠 줄 수 있는 자원보다 극빈자들이 언제나 훨씬 더 많을 것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무시할 수 있다는 결론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11)

신명기가 암시하는 내용은, 예수님이 알고 계셨던 대로 죄악된 사람들과 사회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26:11) 하지만 하나님은 무관심을 정당화하기보다, 이러한 지식이 가난한 자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새로운 정의를 촉진하는 구조적 장치를 창출하는 데 사용되도록 하신다. (p134)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은 기다리던 메시아 왕국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기대에 어긋난 것이었다. 예수님은 로마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모집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유 유대국을 세우려고 시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고립된 개인주의적인 예언자로 계시지도 않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셨다. 예수님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순종하기로 결의한 제자들로 이루어진 가시적인 공동체를 세우셨다. 예수님의 새로운 공동체는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가치대로 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서 경제적인 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가 변화되었다.(p139-140)

 

예루살렘 교회에서 변화된 경제 관계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루살렘 교회의 관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그들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서로에 대해 책임을 졌으며 전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나눔은 피상적이거나 가끔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정기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었다”(2:45). 현재 보유하고 있는 현금보다 필요가 더 클 경우에 그들은 재산을 팔았다. 예루살렘 교회는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주었다 법적 재산권이나 미래의 재정적 안전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의 필요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다른 지체들에 대한 무제한적인 경제적 책임과 광범위한 경제적 나눔을 의미했다. (p146)

각 사람의 필요를 어떻게 판단할까? 사치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할까? 그냥 판단하지 않고 필요로 하는대로 주면 되는건가? 어려운? 아니 애매한 문제인 것 같다.

 

코이노니아는 어떤 사람과 교제를 나누는 것 또는 어떤 일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들은 주 예수님과 교제를 누린다 (고전 1:9). 예수님과 코이노니아를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가된 예수님의 의를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예수님과 코이노니아를 경험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자기를 희생하며 십자가를 지는 삶에 동참하는 것을 수반한다(3:8-10).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가장 강력하게 경험한다. 성찬에 참여할 때 신자들은 십자가의 신비에 참여(‘코이노니아’)하게 된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코이노니아’]함이 아니냐”(고전 10:16).

그러고 나서 바울은 곧바로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와의 코이노니아를 수반한다고 말한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 10:17; 또한, 요일 1:3-4을 보라). (p151-152)

 

 

5장 재산과 소유에 대한 성경적 관점

 

소유는 종종 가난한 자들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기 때문에, 또 사람들을 분쟁과 전쟁으로 이끌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 심지어 그것은 사람들을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탐심의 올가미에 걸리게 한다. (p172)

 

어리석은 부자는 탐심 많은 사람의 전형적인 예다. 그는 탐심에 사로잡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데도 더욱더 많은 소유물을 얻으려고 애쓴다. 그리고 더 많은 재산과 부를 쌓는 데 크게 성공한 부자는 물질적 소유가 자신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다는 신성모독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같은 태도는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그 부자는 미쳐 날뛰는 바보다. (p173)

 

성경적 신앙은 음식과 소유물 또는 성에 대한 금지를 본격적으로 고결하게 생각하는 금욕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것처럼 그 같은 피조물들이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반지에 지나지 않는다. 때때로 특정한 환경(긴급한 선교나 가난한 자들의 필요와 같은)으로 인해 그러한 것들을 누리는 것을 자제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의 일부이며, 연인이 준 반지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의 증표다. 그것들을 연인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애정의 표시로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들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놀라운 선물이 된다. (p176)

아 요즘 주된 고민. 애플제품. 이걸 사용하는건, 구입하는 건 소유일까 탐욕일까.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해서 만든 기술이 집약된 기계. 그걸 활용해서 생활의 편리를 위해 사용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을 알리는데 사용하면 소유일까 탐욕일까.

 

창조 세계가 선하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살펴본 성경의 다른 주제들과 상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를 부인하고 가난한 자들을 돕고 복음을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적인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생활 수준을 낮추어야 하는 이유는 음식과 의복과 재산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 세계는 선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애정의 표시로 이 훌륭한 세상을 주신 하나님은 형제자매들과 그것을 나누어 가지라고 요청하셨다. (p177)

생활수준을 낮추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굶주리고 있는 이유는 경제 제도의 문제이지, 전체적인 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경제 제도를 바꾸기 위해 애써야지 나의 부를 줄이는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께 순종하는 자를 물질적 번영으로 복 주신다고 가르치지만, 물질적으로 번영한 자가 모두 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은 것이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부와 번영이 언제나 의의 표시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다. 이 같은 생각은 특히 부유한 나라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부와 번영은 이스라엘의 경우처럼(3장을 보라) 죄와 억압의 결과일 수 있다. 중요한 판단 기준은 번창하는 자들이 억눌린 자들을 위해 정의를 실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지 여부다. 번창하는 자들이 그 명령에 순종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가증스럽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p179)

 

하나님은 정의에 기초한 번영을 원하신다. 존 테일러가 매우 멋진 말로 지적했듯이, 물질적 소유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충분함이다. 잠언 30::8-9이 그 점을 완벽하게 요약하고 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가냐 할 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부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때때로 순종에 대해 물질적 풍요로 보상하신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부유한 사람이 크리스마스 선물 바구니를 만들어 구제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킨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베풀어지는 자선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를 원하신다. 그리고 정의란 희년과 안식년에 부채를 면제해주는 행위와 같은 것들을 의미한다. 정의는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생산 자원을 갖도록 보장하는 경제 구조를 의미한다. 정의에 대한 그와 같은 성경적 관심이 없는 번영은 명백한 불순종을 의미한다. (p180-181)

 

염려하지 않는 삶은 예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솔직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맘몬은 어떤 신비로운 이방신이 아니다. ‘맘몬’(mammon)이라는 말은 부나 재산을 가리키는 아람어다. 부자 청년이나 삭개오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부 사이에서 하나를 정해야 한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상인처럼 하나님 나라와 풍요한 삶 사이에서 하나를 정해야 한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13:45-46; 또한 44절을 보라) 예수님과 그의 나라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유를 포함한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p185-186)

 

 

6장 사회악: 사회 구조 속에 심겨진 죄

 

우리가 구조악으로부터 이익을 보는 특권 계층에 속한다면, 그리고 그 악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도 그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분 앞에 죄를 짓게 된다. 사회악은 개인적인 악만큼이나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든다. 그리고 사회악은 더 교묘하다. (p198-199)

 

하지만 다르게 산다는 것(구조적 불의를 변화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은 결코 모든 것을 하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 각자는 나름의 독특한 은사와 부르심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죄에 대해 금식하고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구를 해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 정의를 촉진하는 조직에 가입하고 후원해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정치가로 입후보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개인의 생활 양식을 어떻게 바꾸어야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질문 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혹은 긴장을 풀고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한 시간을 냈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기를 원치 않으신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들로 하여금 집중하기 원하시는 제한적이고도 구체적인 일이 무엇인지 그분께 기도하며 여쭈어야 한다. 결국 우리를 하루 24시간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사회적 죄를 바로잡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하도록 부르심 받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기쁨과 의미로의 초대이며, 우리 이웃을 축복할 수 있는 기회이고, 역사의 주님과 동역자가 되는 놀라운 기회다. (p208)

 

 

3부 가난의 원인은 무엇인가?

 

7장 빈곤의 복합적인 원인들

 

물론 우리는 결코 진공 상태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적절한 교육의 부재, 실업, 인종 차별, 아동기에 겪은 부모의 방임 등 이러저러한 복합적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서, 좋은 선택보다는 죄된 선택을 내리기 쉬운 환경을 형성한다.

하지만 사라들이 빈곤을 창출하는 데 기여하는 개별적인 선택을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현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복음 전도 및 반역적인 죄인들을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일 몇몇 형태의 빈곤을 해결하는 데 중심이라는 사실을 가려 버리는 것이다. 죄된 개인적 선택이 한 개인의 빈곤에 중대한 기여를 할 때에는, 영적 변혁을 포함하지 않는 어떤 해결책도 소용이 없다. (p216)

 

궁극적으로 세계는 유한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난 20세기 동안 보여 주었듯이,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데 필요한 것을 더 많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높다. 지식을 자연에 적용하면 놀랄 만한 새로운 산물이 생겨난다. 우리가 원유라고 알고 있는 검고 끈적거리는 물질은 누군가가 그것을 차와 비행기와 전기 발전기를 가동하는 데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기 전까지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결과 엄청난 재화(또한 애석하게도 환경의 파괴)가 새로이 생산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적절하고 쓸모 있는 과학 기술을 습득하도록 돕는 것은 가난을 줄이는 한 가지 핵심적인 방법이다. (p220-221)

과학기술은 하나님을 닮은 인간이 창조해내는 인류를 향한 선물이 아닐까. 과학기술이 환경파괴를 한다는 이유 등 여러 이유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이것도 분명 창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 덕분에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편리해지고 여유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다를 순 있겠지만, 과학기술을 만드신 그분의 뜻은 이랬을 거라 생각한다. 온전히 회복되는 날에 과학 기술도 살아 있을 것 같다.

 

 

8장 오늘날의 구조적 불의

 

앞 장에서 논의했듯이, 풍요한 북반구가 세계의 모든 가난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원인이 있다. 하지만 부유한 자들이 세계 빈곤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는 여전히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16:19-31)에서 나사로의 가난이 부자 이웃의 억압 때문이라는 암시는 없다. 그 부자는 단지 돕는 일에 소홀했을 뿐이다. 그는 태만의 죄를 범했고 결국 지옥에 갔다. (p235)

 

하지만 지난 몇 십 년의 상황을 볼 때, 많은 곳에서 시장 개혁이 단기적으로는 빈곤을 증가시켰다. 동구와 구소련의 많은 사람들은 공산주의 치하에 있을 때보다 살림이 더욱 어렵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와 남미의 가난한 사람들 역시 시장 개혁이 도입되면서 더 가난해졌다. 그것은 시장 개혁의 불가피한 결과인가? 아니면 여러 정부가 군사비 예산보다는 교육과 보건 예산을 삭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인가? 아직 대답은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보통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부의 적절한 역할로 가난한 사람들이 유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의 가난한 사람들은 30-40년 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잘살게 되었다. 시장 개혁과 토지 개혁, 교육 분야 투자 등과 같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부의 활동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등지의 매우 가난했던 많은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p242-243)

맞는 말이기는한데, 예전보다 잘살게 된거 맞긴 한데, 그만큼 빈부격차는 더 커졌다.

 

문화적인 부패는 삶 전체를 지배하려는 시장의 제국주의적 경향에서도 발생한다. 어떤 관계가 수요와 공급에 기초한 단순한 경제 교환의 상호작용으로 규정될지라도 그것이 효율성만 지난다면 대체로 선하게 여겨진다. 시장 가격에 근거해서 텔리비전 판매원을 선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배우자를 택하는 것도 똑같은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하는가? 부모 중 한 명이 집에 남아서 어린 자녀를 돌볼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어떠한가? 숙련된 전문 인력이 부모 노릇을 하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것보다는 하루 종일 아이를 돌보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더 이로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귀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셈이다. 신체의 장기, 성 혹은 입양할 아기는 결코 시장에서 거래되서는 안 된다. “성이 교환 가능한 상품이 되면 그것은 매춘이다.” 인생의 모든 측면을 자기 방식대로 조직화하려는 시장의 제국주의적 경향은 품성과 문화를 부패시키고 파멸시킨다. (p247)

 

그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놀라운 일은 최근 몇 십 년 동안 영양실조에 걸린 그리고 심지어 기아에 처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개발도상국에서 부유한 나라에 다량의 식량을 유출했다는 사실이다. 자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데도 부유한 나라에 기꺼이 식량을 수출하는 이유는, 그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갖지 못한 돈을 부유한 나라 사람들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난한 나라의 유력한 사람들은 수출로 벌어들인 소득으로 첨단 과학 기술과 원유, 사치품의 값을 지불한다. (p275)

 

다국적 기업은 선진국이 개발도상국 사람들과 접촉하는 최첨단에 서 있다. 따라서 다국적 기업은 가난에 시달리는 전 세계의 나라들에게 부유한 나라에서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전달해 준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풍요한 북반구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인상을 심어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다국적 기업은 또한 집중적인 광고를 퍼부어 댐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한 이들과 똑같이 살도록 애쓰게 만든다.

그 결과 물질주의적 태도가 도처에 퍼지며,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수입 중 터무니없이 많은 부분을 쓸모 없는 물건 (에이본 화장품이나 청량 음료)을 사는 데 소비한다. 더욱더 터무니없는 일은 가난한 나라에서 행하는 미국 담배회사들의 적극적인 광고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미국 담배로 폐를 망쳐 버리도록 유혹한다.

가장 잘 알려진 유해한 예는 네슬레 회사의 경우로서 그들은 모유로 아이를 잘 키우고 있는 제3세계 여성들에게 끈질기게 조제분유를 판매했다. 회사 대표들은 간호사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는 어머니들에게 아기를 조제 분유로 키우라고 권했다. 네슬레는 틀에 박힌 수법으로 공공연히 무료 조제 분유 샘플을 나눠 주었다. 종종 산부인과 병동에 필요한 물품을 기증하면서 샘플을 나누어 준 것이다. 조제 분유를 사용하자 산모의 젖은 곧 말라버려서, 원한다 해도 모유를 먹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부모들은 조제 분유를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분유 깡통에 써 있는 지시 사항을 읽을 수 없거나 분유를 탈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없어서, 아니면 더 오래 먹이기 위해 분유를 지나치게 묽게 탔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조제 분유에는 아기들에게 필요한 영양소가 결핍되어 있다. 위생적으로 잘 준비했다 해도, 조제 분유에는 모유에 들어 있는 면역 단백질이 결여되어 있다. 그 결과 종종 아이들은 우유로 키운 아기 질병이나 심각한 영양 실조 그리고 설사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유니세프의 보고에 따르면, 분유로 키운 아기는, 생후 6개월 동안 모유만 먹은 아기보다 병에 더 잘 걸리며 죽을 확률이 25배나 높다. 유니세프는 1990년에, 생후 처음 6개월간 모유만 먹었더라면 죽지 않았을 아기가 백만 명이나 된다고 보고했다. 어머니가 아기 곁에 없어서 아기에게 분유를 먹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많은 어머니들이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광고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P286-287)

 

 

4부 실천적 제안

 

9장 더 검소한 삶을 위한 생활 방식

 

가장 검소한 생활 수준을 유지하게 해주는 방법은 아마도 공동체 생활일 것이다. 보통 한 가정이 이용하는 주택, 가구, 전기 기구, 공구 및 자동차는 열 명 또는 스무 명이 이용할 수 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 많은 돈과 시간을 다른 활동에 사용할 수 있다. (p322)

 

세계 모든 사람들과 공유하였을 때 오랜 기간 유지될 수 있는 개인 생활 양식을 개발하라.

 

필수품과 사치품을 구별하라

 

소비에 대한 정당한 또는 부당한 이유를 구분하라.

 

일시적 유행으로 인한 호기심에서 생긴 취미와 재능을 구별하라. 재능과 취미를 개발하는데는 비용을 지출하라. 그러나 성공적인듯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이유만으로 최신 유흥이나 오락에 빠져들지는 말라. 각 사람은 독특한 관심사와 은사를 갖고 있다. 그러한 영역에서 각자의 창조성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다른 많은 영역에서 많은 일을 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이따금씩 벌이는 축하연과 규칙적인 일상 생활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감당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물건을 사는 것을 지양하라. 우리가 버는 양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는 무관하다.

(p324-325)

물건 살 때 기준으로 두면 좋을 것 같다.

 

현대인들은 성경적인 의미의 인간 한계를 잃어버렸다. 우리는 더욱더 많은 것, 더욱더 빠른 것을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과 결혼, 가족, 환경을 파괴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저하게 다르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런 생각을 끊어 버릴 슬기를 가져라”(23:4, 새번역). 안식일은 억제와 중용을 배양하는 하나님의 도구다. 안식이란 더욱더 많은 것들을 생산하고자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필사적으로 일하고자) 미친 듯이 애쓰는 일을 중단하는 것이다!

잘못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물질 세계는 좋은 것이며, 재화를 창출하는 우리의 일 역사(가난한 자를 자립시키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문화를 형성하고 선교하는 일에 적절한 관심을 보일 때에도 우리의 유한함과 창조주에 대한 의뢰를 결코 잊지 않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의미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하던 일을 중단하고 잠잠히 거하며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루 종일 좋은 것을 생산하지 못했다거나 심지어 선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지 못했다 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유한하다. 우리 손으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교만한 생각은 참람한 것이다. 일주일 중 하루는 휴식을 취하고, 가족들과 즐기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p340-341)

 

 

10장 사랑 가운데 서로를 돌보기

 

교회는 사랑에서 비롯된 도전의 공동체가 되어야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서로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편안한 동호회가 되어 있다. 교회가 우리 시대의 물질 만능주의에 저항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공유하려면 광범위한 개혁이 필요하다.

앞 장의 분석이 조금이라도 옳다면, 성경의 하나님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현대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살 것을 요청하고 계시다. 우리는 회개하고 물질주의와 성과 경제적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보다 물질이 더 중요시되고 있다. 직업의 안정과 월급의 증가가 굶주리는 아이들과 가난한 소작농들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12:2)라는 경고는 매우 타당하다. 성경의 계시는 물질주의적이고 음란한 현대 사회가 지닌 기본 가치의 많은 부분에 도전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개인의 힘으로는 말이다. 고립된 개인이 라디오와 텔레비전 광고판에서 쏟아지는 반기독교적 가치관에 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풍요한 사회의 가치관은 서서히 그리고 교묘하게 우리의 마음에 파고 든다. 그 같은 가치관에 도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참여해 성경적 가치관에 무조건적으로 헌신한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근본적인 정체성을 찾아감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의 사고 방식을 개조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강력한 그리스도인의 교제권 속에 있어야만 신실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은 없다. 초대교회는 강력한 기독교적 친교를 경험했기 때문에 로마 문명의 부패한 가치관에 저항할 수 있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후원 하에 격주로 개최되는 볼링 대회 정도의 시시한 교제, 설교를 듣고 난 후 친교실에서 다과를 먹으며 세련된 잡담을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초대교회의 코이노니아는 거의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과 나누는 것이었다. (p346-347)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암만파 교도들을 본받아 외딴 농촌으로 물러나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도전하고 증거하고 바라건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현대 사회의 한복판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만큼, 성경의 규범을 버리고 현대의 가치관에 동화되라는 압력이 격렬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형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필요하다.(p350-351)

 

이상적인 가정 교회를 시작하려면 여러 가정 또는 독신자들이 서로 한두 블럭 내에 있는 집을 구입하면 된다. 많은 도심지에서, 특히 인구 변동이 심한 인근 지역에서 비싸지 않은 집이 자주 매물로 나온다.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집에 살거나 한 블럭 떨어져 살면 차와 세탁기와 건조기와 냉장고와 잔디깎는 기계(또는 정원을 돌보는 장비) 같은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기에 편리하다. 또 가까이 살면 서로 정직하게 분별 있는 생활 양식을 찾아 나가도록 돕는 열린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결성하기도 쉽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교회 구조에 대한 책에서 교단들이 (특히 도시에서) 교회 개척을 하면서 가정 교회 모델을 채택할 것을 제안한다. 가정 교회 구조는 융통성이 있으며, 이동하기 쉽고, 포괄적이며, 인격적이다. 가정 교회 구조는 분리해서 자라날 수 있으며, 효과적인 전도의 수단이고, 전문적인 지도력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p360)

이상적이네. 이렇게 살면 좋을 것 같긴한데, 어느 정도의 직장에 대한 포기가 필요하다.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는 것. 아니 그냥 관심 있는 여러 일 중에 다른 걸 선택하는 것. 근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점점 내가 뭘 한다고 뭐가 되겠나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이렇게 조용히 지내는 것도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11장 공평한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내가 조금 적은 비용으로 산다고 해서 굶주린 어린아이에게 먹을 것이 공급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수많은 북미와 유럽 사람들이 쇠고기 소비량은 줄이면서 공공 정책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동이 반드시 개발도상국의 굶주림을 덜어준다고 할 수 는 없다. 분명 가난한 국가의 경제 개발을 촉진하는 민간 기관에 돈을 기부한다면, 굶주림이 줄어들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 엘리트들과 국제 무역 양상이 가난한 이들이 새로이 발견한 희망을 짓밟고 파괴한다면, 검소한 생활 양식과 교회 활동은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공공 정책의 변화 역시 필수적이다. 공의가 넘쳐나는 물처럼 흐르려면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 (p369)

 

분명 정의로운 관계에 관한 성경의 진리는 먼저 교회에 적용되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공동체 생활 속에서 정의에 관한 성경의 원리를 구현하는 새로운 사회가 되어야 한다.(3:6-9; 6:16; 벧전 2:9-10). 실로 교회 자체가 변화된 사회 경제적 관계의 가시적인 모델이 될 때, 정부에 대한 모든 호소가 진실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 사회 활동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 교회 교인들에게 그대로 실천하라고 설득하지도 못하는 내용을 법률로 제정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p370)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한 것이겠지? 완전할 수 없으니, 완전한 공동체가 될 수 없으니 그 때까지 미룰 수는 없는 것 같다. 교회가 완전한 공동체가 되고 난 뒤에 세상에 그 방식을 알리고 적용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정의에 대한 성경의 원리는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임의적인 규칙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엇이 영속적인 평화와 사회적 조화 그리고 피조물의 행복을 가져올지 아셨기 때문에 사회 정의에 대한 기본 원리를 계시하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시사해주는 소재로 가득하다. 그리고 교회는 완전한 정의와 평화가 구현된 최종적인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모델(분명 불완전한 것이긴 하지만)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교회가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될 때 사회 내에서 강력한 누룩과 같은 영향력을 발휘한다(13:20-21)

나아가서, 어떤 세속 사회가 사회 정의에 대한 성경의 기준을 더욱 신실하고 적절하게 적용할수록 그 사회는 더 많은 평화와 행복과 조화를 누릴 것이다. 분명 죄 있는 개인들과 사회는 대단히 불완전한 근사치 이상의 수준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사회 구조는 성도와 죄인 모두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 체계를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p370-371)

 

그리스도인들이 경제 구조의 불의한 측면을 변화시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주장이 곧 중앙 집권적이고 통제적인 사회를 강요하는 폭력 혁명에 대한 요구는 아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방법은 원수들에게까지도 비폭력적인 사랑을 베푸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과격한 폭력 사용을 거부한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는 과격하지 않은 압력(혹은 힘)을 사용하는 것이 포함된다. 음주 운전이나 과속 운전에 대한 처벌 규정을 법으로 제정하는 것은 적절하면서도 과격하지 않은 을 사용하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 대한 국가의 외교 정책을 변경하거나, 무역 거래를 더 공정하게 하거나, 다국적 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제한하거나, 외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늘리는 법률을 통과시킬 때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수가 동의할 때에만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p373)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성경의 정의를 추구하는 외교 정책은 다국적 기업들의 경영에 기꺼이 윤리적 통제를 가해야 한다. 그것이 다국적 기업 및 그 기업의 미국 내 주주들의 단기적인 경제적 관심사가 아니라 해도 말이다. 정치적 행동에 의해, 그리고 네슬레 불매 운동과 같이 잘 계획된 시민 저항에 의해, 그리스도인 시민들은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국적 기업들이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p379)

 

또한 앞에서 말했듯 총체적인 성경적 관점을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7장에서 보았듯이 어떤 종교적 세계관은 빈곤에 대해 숙명론적인 태도를 낳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힌두교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보통 가장 빈곤한 사람들이다)은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낮은 계층으로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현재의 운명을 끈기 있게 참아 내야만 내세에서 더 나은 조건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동방의 종교는 역사와 물질적 실체를 피해야 할 환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성경은 창조된 물질 세계가 선하다는 것을 긍정하며, 역사의 창조자이자 주인이신 하나님이 지금 세상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를 요구하신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총체적인 성경의 메시지를 나눌 때, 선교사와 다른 이들은 기아와 빈곤과 불의와의 전투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선교사들이 외국에서 정치 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교사들은 총체적인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으며, 가르쳐야만 한다. 왜 선교사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회심한 사람들에게 신약의 서신서는 가르치지만 구약의 예언서는 가르치지 않았는가? 2부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성경이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편이라고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선교사들은 이 주제를 중점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는 우리 주님의 대위임령을 받아들인다면, 억압받는 자를 위한 정의라는 성경적 메시지를 (그것이 소수의 지배 계층의 비위를 거스린다 해도) 감히 생략하거나, 강조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p381-382)

 

한국 정부의 기적은 조직적인 토지개혁으로 시작되었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자기 땅을 소유한(소작인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농부들의 비율은 50페선트에서 94퍼센트로 뛰어올랐다. 대만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두 나라 정부 모두 보건, 교육, 직업 훈련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 결과, 양국 국민들은 최신 과학 기술을 이용할 능력을 갖추었다. 노동 생산성은 매년 10퍼센트씩 증가했다. 그러한 성장의 절반은 정부가 교육과 전문 기술에 투자한 결과였다. 행동주의적 정부가 한국과 대만 경제 성장의 중심이었다. (p391)

!

 

정치가들은 이 개념을 종종 그런 식으로 이용하긴 하지만, GDP는 조악한 경제적사회적 복지 측정 수단일 뿐이다.(8장에서 논의한 것처럼). 우선 GDP는 경제적 거래(즉 돈의 주인이 바뀌는 활동)만을 측량한다. 그것은 가정 혹은 공동체의 무보수 노동은 전혀 계산하지 않는다! 어떤 부모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집에 있으려고 유급 직장을 떠난다면, GDP는 내려간다. 한 부부가 이혼을 한다면(그렇게 하면서 변호사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한 채의 집을 팔고 두 채의 집을 사기 위해 부동산업자에게 돈을 지불하며, ‘전문적인탁아소에 비용을 지불한다면) GDP는 올라간다! 지역 사회를 개선시키기 위한 자원 봉사는 전혀 계산에 들어가지 않는다.

GDP는 또한 부정적인 것들을 긍정적인 성장으로 계산한다. 범죄는 간접적으로 GDP를 증가시킨다. 더 많은 변호사, 경찰, 재판관, 감옥 그 밖에 온갖 종류의 범죄 예방 장치들은 모두 GDP를 증가시킨다. 텔레비전과 홈 비디오가 부모와 조부모들이 읽어 주는 이야기를 대신할 때 GDP는 올라간다. 담배 광고가 중독성 애연가를 만들어 낼 때 GDP는 올라간다. 도박, 알코올 중독, 포르노도 마찬가지로 대단한 결과를 가져온다.

환경 오염은 GDP를 두 번 올려 준다! 공장이 오염원이 되는 폐기물을 방출하면서 제품을 생산할 때 한 번, 그리고 국가가 오염된 곳을 청소하느라 수십억 달러를 들을 때 또 한 번 올라가는 것이다. (p393-395)

 

인간의 만족이 계속적으로 공급되는 물질에서 온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우상 숭배적인 생각이다. 진정하고 지속적인 기쁨은 하나님, 이웃, 자아 그리고 세상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온다.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 창조된 몸과 영혼을 가진 존재다. 따라서 상당한 물질적 자원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증가하는 물질적 부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신학적으로 이교적일 뿐 아니라 환경적으로도 파괴적이다. 그것은 또한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우리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다.

우리는 풍족한 삶을 재정의해야만 한다. 충분함의 신학을 개발해야 한다. 우리는 잠언 23:4의 말씀이 영혼에 깊이 스며들 때까지 묵상해야 한다. “부자 되기에 힘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우리는 더 검소한 생활 양식, 사람들이 수입과 이득을 최대화하기보다는 자녀 양육, 여가, 공동체 봉사를 선택하도록 허용하는 기업 정책 그리고 과소비를 저지하는 거시 경제 정책 및 광고 관행을 개발해야 한다. 무제한적인 경제 성장은 성경적 목표가 아니라 경제적 바벨탑이다. (p398)

 

단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좀더 검소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소비재에 더 많은 돈을 쓰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이 수입을 저축한다면 심각한 실업이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저축한 수입을 가난한 나라의 개발을 추진하는 기독교 기관에 헌금한다면, 고용이 그리 크게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원조금을 받은 사람들은 재화를 생산하고 적절한 수준의 물질적 복지를 이루는 데 필요한 상품들을 사기 위해 그 돈을 사용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품들을 사는 데 사용된 달러는 결과적으로 선진국에 있는 기업의 물건을 사기 위해 되돌아올 것이다. 선진국들이 더 적게 소비하고 더 많이 나누면 개발도상국들의 자생적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재화와 자산을 좀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일을 촉진할 수 있다. (p400)

 

수년 전에 아이젠 하워 대통령이 목소리 높여 했던 말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 “제작된 모든 총, 물 위에 띄운 모든 군함, 발사된 모든 로켓은 결국 굶주리면서도 먹지 못하며, 추우면서도 옷을 걸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뚝질한 것이다.” (p437)

 

희년에 대한 하나님의 요청의 중심에는, 부를 생산함으로써 자신들의 생계비를 벌 수 있는 수단을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는 사회 경제학적 구조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담겨 있다. 우리는 상호 의존적인 오늘날의 세계에서 이러한 성경의 원리를 적용할 새롭고 구체적인 모델들을 찾아내야 한다. 나는 현대적 희년의 모델을 공식화하고 발전시키며 실행하는 데 자신들의 삶을 바칠 새로운 세대의 경제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이 나오기를 바라고 또 기도한다. (p441)

 

 

후기

 

관대한 그리스도인이 선한 지구의 하사품을 모든 사람이 나눌 수 있도록 오늘날의 경제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부유한 이웃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부자와 가난한 자의 분리가 심해져서 굶주림과 죽음 뿐 아니라 내전과 테러와 전쟁이 증가할 것이다. (p445)

 

 

 

 

생각보다 희년에 대한 이야기, 토지제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놀랐다.

구구절절이 맞는 이야기인데 답답하다. 이걸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사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검소한 생활이라는게 어느 정도까지를 이야기하는건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물들을 누리는데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이 든다. 전자제품이나 문화, 예술, 스포츠, 여행 같은 건 말할 것도 없고 하다못해 동네에서 자연을 누리는데에도 그렇다. 어디까지가 사치이고 어디까지가 누리는건지 모르겠다. 그냥 마냥 내가 마음 편한대로 살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은데. 책에서 제시하는 기준들은 크게 와닿지 않는다. 아직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다만, 저렇게 다 주고 나면 집 값 비싼 우리나라에서는 어디서 사나 싶다. 집값 싼 시골에서 살면 되겠지, 근데 그러면 제도는 누가 고치나. 결국 있는 사람들만 서울에 모여서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결정을 하게 되는 거 아닐까. 조선시대로 돌아가나.

공동체가 답인가. 결국 돌고돌아 예수님의 방식을 보여주는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게 답인가 싶다. 아니 답이다 싶다. 딜레마인 것 같다.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지금 생각하기에는 직업과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가는게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사회 초년생이라서, 20대라서 이럴 수 있지만 공동체를 하려면, 가까이 살려면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 같다. 같이 살 수 있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하면 되겠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한다는게. 아무튼 그래도 저래도 공동체로 함께 모여 지내며 하나님의 방식을 보여주는게 제일 효율적인 것 같다. 제도를 바꾸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차피 막힐 것 같다.

읽다보니 미국이 정말 강대국이구나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미국인이 쓰다보니 확실히 스케일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에 대해 의견을 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는게, 다국적 기업에 대한 압박이 가능하다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 정도의 국력이 되니까 가능한 거겠지.

 

아무튼, 사회 제도의 문제, 개인의 소비 생활의 문제를 다룬 책이다. 미국에서 쓰여진 책이지만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내용이 많은 것 같다. 나에게도. 언제 또 읽고 나누고 싶은 책이네.

 

 

할 일

- 10월까지: 토지제도에 대한 정리 열심히 하자

- 취직하고 결혼할 때: 가까운 곳에서 살자

 

 

2014.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