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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기독교기본진리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2014.8.27.-9.12.)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2014.8.27.-9.12.).pdf




 

대천덕 신부님과 관련된 책을 읽고 싶던 차에 사서 읽게 되었다.

이 책은 1960년대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에게 강의한 내용을 중심으로 1990년에 출간된 책의 개정판이다.

 

1부 살아계신 하나님

1.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나

2.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인들이 하나가 되어 사랑하게 될 때 세상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맺는 열매와 사랑, 그리고 일치가 있기 때문에 비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p31)

농사는 씨를 뿌리고 거둬들여야 할 적기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역사의 진행 과정을 억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수확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수확기를 앞당기거나 늦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수확이 풍성하도록 힘쓸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는 수확에 비유할 수 있으며, 그날에 수확을 풍성하게 거두기 위해서는 맡은 바 자기 몫을 열심히 행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는 명령에 지금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p32-33)

그러면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것은 행위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진리를 파악하는 일입니다. 탐구와 실천은 함께 손을 잡고 나아가는 것으로, 실천은 늘 탐구해야 할 방향을 지시해 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재능과 기회를 따라 공정한 질서와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회적 관계성을 내포하지 않는 인간의 행위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은 최고 중요한 사명입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는 것은 인도주의적인 자유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이 명시하시는 것입니다. (p34-35)

탐구하기!!

3.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행위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이십니다.

구원자이십니다.

사랑이십니다.

변함없는 분입니다

공의로우시고 편벽됨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애써 찾아야 할 뿐 아니라 일단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면 그분의 뜻을 기꺼이 실행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의사 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고의적인 반역을 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관념조차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할 따름인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 주시지 않음으로 가능한 한 오랫동안 그들이 이런 재난을 면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p41)

4. 사랑

5. 십자가

십자가는 우리에게 사랑이 수평적 차원 및 수직적 차원을 함께 가지고 있음을 상기시켜줍니다. 인간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실로 타인을 사랑(자기희생을 토대로 한 아가페적인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p53)

6. 성령

만일 어떤 사람이 성령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어 따르겠다고 약속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성령의 권능으로 거듭나고 새로운 생활을 영위하며 성령의 권능을 통해 주님을 증명하기 위해 성령을 청하게 됩니다. (p60)

7.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아브라함의 행적이 하나님 나라에 관한 가장 초기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자라온 문화와 결별하여 유목민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문화가 보장해 주는 모든 안정마저 포기했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유목민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문명화된 도시인 우르를 떠나 유목민이 된 유일한 인물입니다. (p63)

그러나 400년 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고 다시 광야의 유목생활로 이끌고 갈 무렵에는 장기간에 걸친 노예생활 탓으로 그들의 도덕성이 완전히 손상되어 버렸습니다. 노예란 주인의 보호를 받으며 -비록 조금이라도 독립의 기미를 보이면 심하게 매를 맞아야 하지만-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해 주는 동안만큼은 어떤 의미에서 안전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점차 그들은 노예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안정만을 추구하는 노예근성에 안주하고 역경과 중노동을 피하려 들게 되었습니다. (p63)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고유의 문화를 강조하고 평등과 정의의 이상을 충실히 지켜 노예제도 및 고리대를 배척한 무리가 있던 반면, 가나안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고 토지 투기와 고리대 및 노예 소유를 통해 부유해진 ‘친동화파’가 있었습니다.

성경이 평등과 정의라는 유목민적 이상과 친동화파적 이상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한 유목집단이 주변의 선진문명에 맞서 그처럼 완벽하게 자신의 이상을 지킬 수 있었던 예는 역사상 일찍이 없었습니다. (p64)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다음 다섯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곳이면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입니다. 따라서 한 개인의 마음속에도 하나님 나라는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어떠한 집단도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가 됩니다. 셋째,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 조직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므로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역사의 어느 시점, 어느 나라에 존재하는 교회라도 현존하는 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식민지’(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대사관(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대리인들로 구성된 집단 혹은 구역) 혹은 지하 세포 조직’(지하 교회 네트워크)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유형의 집단 중 어디에 속하게 되는지는 교회에 대한, 그 지역의 세속 사회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겠지요. (p66-67)

8. 인류와 종말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행동을 취하시도록 기다리는 것 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A.D. 1000년 무렵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종말을 가져오고 평화의 천년 왕국 혹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리라고 기대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자 그들은 하나님 나라란 사람들의 영혼이 죽은 후에 가게 되는 비물질적인 세계를 가리킨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생각은 천당’, ‘극락혹은 신들의 처소에 관한 이교적 개념과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런 개념에 대한 진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도래할 종말과 차후 이 땅 위에 이루어질 하나님에 의한 창조 행위에 대해 다시금 문자 그대로 기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점입니다. 성경은 어떤 일이라도 아무런 원인 없이 ‘우연하게 발생하는’ 법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오히려 성경은 모든 인간이 그들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하며, 역사의 사건이 진행되는 가정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까지를 포함해 인간의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어떤 행동을 취하실 것이라고 무조건적인 예언을 하는 듯이 보일 때에라도, 사람들이 겸손해져 순종의 길로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자신의 뜻을 돌이키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돌이키신다라는 말은 물론 신인동형(동성)’'인 말이지만, 이 이야기는 인간의 행위와 태도가 역사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효과마저 가진다는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메시지는 네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초래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과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모면하려는 사람들은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서 위안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p73-74)

대천덕 신부와의 대담

좀더 나은 인간 생활을 이루기 위한 신부님의 궁극적인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로교 교리문답에 따르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성품이 지닌 여러 결함들이 변화되어야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지녀야 할 아름다움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는 무질서한 상태로부터 그것이 질병이든, 전쟁이든, 빈민굴이든, 굶주림이든, 압제든 간에 질서를 회복시키는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목적을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도록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보다 더 아름다운 세계 안에 살 수 있도록 헌신할 때, 우리와 다른 사람들 모두가 더욱더 풍요로운 아름다움과 질서를 누릴 수 있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즐겁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에 대해서는 기쁨이요, 하나님께는 영광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역할을 담당하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서만 이웃에게 기쁨과 영광을 위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며 인류의 종으로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p76-77)

2부 다스리시는 하나님

1. 과학에 대하여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특별계시의 여러 사실들이 일반계시의 여러 사실들과 모순될 수 없으며, 신학상의 모든 발견과 과학생의 모든 발견도 서로 대립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모든 것은 사실에 의해 검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사실에 관한 이 두 가지 이론이 서로 모순될 경우에는 신학적 해석이나 과학적 해석 가운데 어느 한쪽 또는 양쪽을 모두 사실과 부합하도록 수정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p92)

그동안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어 과학자들을 위한 교회의 적극적인 후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과학자 한 사람이 자기 재력으로 개인 실험실을 운영하며 독자적으로 연구를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적 연구의 복잡성 때문에 대규모 공동 작업이 요구되는, 종합대학으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결과 보다 많은 과학적 연구가 정부의 후원 아래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과학자들의 자유는 점진적으로 상실되어 왔습니다. 과학이 교조적인 정치적 요구에 예속되는 현상이 나타났고, 연구 방향도 생명 구원보다는 대량 파괴와 관계되어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때 교회는 정부에게 건설적인 연구를 후원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어떤 정치적인 계획에 구속당하지 않고도 독자적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는 통로를 발견하여 과학자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종교적인 이단 박해가 현대의 정치적 이단 박해로 대치된 오늘날, 교회는 진리탐구를 수호함으로써 인간 사회에 해방을 가져오는 요인이 될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된 것입니다. (p97)

2. 인간의 지위

3. 기독교는 관념론의 한 형태인가

4. 기독교는 오늘을 위한 것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이란 본질적으로 선하게 창조된 세계 사악한 무질서의 상태로 전락했지만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여 아직은 유기적인 완성의 가능성이 있는 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실제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부패한 것인 아닙니다. 마치 산산조각 난 위대하고도 완벽한 예술작품처럼 현재의 무질서한 세계는 언젠가는 다시 회복되어 구속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구속이란 무질서해진 인간 생활의 여러 활동 영역 및 관계들 가운데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악이란 인간 생활의 여러 활동 영역 가운데 스며든 무질서로, 인간 생활의 활동 영역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회복 가능한 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지니는 심히 고통스러운 속성 그 자체를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모든 사람 이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생활에 널리 침투한 악의 실재에 대해 가장 절실하게 애통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무질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서 온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간의 거듭 되풀이되는 반항 때문에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합리적인 관리자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 땅에서 충족시키는데 자발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과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창조세계를 본래의 질서대로 유지할 뿐 아니라 인간의 역사 가운데 질서 있는 발전을 계속 전개함으로써 보다 풍요로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를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목적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반역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중대한 도덕적 타락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뿐 아니라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전능하신 분으로, 얼마 동안은 인간의 불순종을 참으실 테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려고 고집하는 자는 마침내 멸망을 자초하고야 말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질서는 인간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적인 안간이 자신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능력에만 의지해서는 도저히 죄악을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러한 무질서가 엄청난 재앙일 뿐만 아니라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재앙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p116)

5. 비성경적 사회에 성경적 해결책을

진정 하나님께서 창조자이시라면, 또 전지전능하시다면, 모든 것을 본질부터 완벽하게 아시는 분인데 어찌 일반 사회와 경제와 정부에 대한 바른 지침을 주는 데 부족하시겠습니까? 이를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기준이 너무 높아 계속 사회가 신적이 제도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적당히 넘겨짚어 생각하곤 합니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가설은 우리 성경 교사들이 구약에 가득한 일상생활의 단순하고도 명백한 원칙을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같이 구약의 모든 사실을 영적으로만 해석하고 상징적으로만 다루어 왔기 때문에 구약을 매일 읽어도 구약이 말하는 현실 세계를 생생하게 보지 못하고 다만 숨겨져 있는 우화적 의미만을 탐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p124-125)

성경, 특히 구약은 본 논의에 대해 단순하고 실용적이며 현실엘 극히 적합한 사회·경제제도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경제학이 모든 인간 생활의 밑바탕임을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먹고 입고 잘 집이 있어야지만 생존할 수 있으며, 집단으로 사는 경우에는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방법을 결정해 어떤 형태라도 규칙을 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들이 발전해 나가면 결국 경제법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단순하고 가장 기본적인 경제법을 제시합니다. 사회 전체가 이 법을 실행하려면 어느 개인이나 사회의 일부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여 하나님의 경제법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 그들의 모든 시도를 재빨리 포착하여 제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문제없이 시행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제법을 무너뜨리려고 획책하는 자들은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민중을 기만하고 잠재우기 위해 달래는 등 갖은 애를 씁니다. 이리하여 일단 법이 폐기되면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다시 세우기가 불가능해집니다. (p126)

6. 성경적 경제 원리

요약하면 희년의 방법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본권을 주는 것입니다.

(1) 토지를 되무를 수 있는 권리(토지를 매도한 때부터 희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하는 임대료의 나머지 금액을 지불하고 되무를 권리)

(2) 토지를 되무를 능력이 없는 경우, 희년에 자기 땅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권리

(3) 안식년에 자신의 부채를 탕감받을 수 있는 권리

역사의 과정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를 주셨으며, 그분의 역할과 말씀에 대한 이해도 다양한 생활 방식과 관습 및 이념에 부합하도록 재해석되고 조정되어 왔습니다. 교회가 생기고 3세기 동안 교회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공동체 생활을 실천한 결과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는데, 국가에 의한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계속 확산되고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수용하게 되면서 아무런 토지개혁도 도입하지 않은 채 교회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는 지주제도를 용납했고, 오히려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몰면서 암암리에 지지하기까지 했습니다.

전체 교회사를 훑어보면 여러 시대에 걸쳐 코이노니아’(서로 나눔 공동 생활) 혹은 토지 소유에 관한 성경적 개념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많은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러한 운동은 집권자들에 의해 철저히 좌절되었는데, 이는 현실에 어두운 순진한 신학자들이 금전에 매수되거나 이들을 비호했기 떄문입니다.

이후 희년 개념을 현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는 토지가치세 도입과, 19세기와 20세기에 일어난 민주화 과정의 진전과 더불어 개혁에 대한 진지한 노력은 널리 확산되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 당국은 지주제도인 바알의 법을 대부분 계속 지지하며 경제학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해 버리거나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와 보면 그분은 자신을 희년, 즉 자유의 해를 선포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이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의미함)….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 (자원의 해, the voluntary year of the Lord)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4:18-19).

이 말씀은 희년이 정부에 의해 선포되기를 기다리지 말고 성령을 받은 신자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희년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오순절에 초대교회가 성령을 받자마자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p134-136)

하나님은 만인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모두 이러한 전 우주적인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비옥한 이 땅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로, 이 땅을 평등하게 사용할 권리를 갖습니다. 그럼에도 불의에 기초한 인간의 법은 이 비옥한 지구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루 사용하도록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특권층만이 사용하도록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헨리 조지에 의하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현시대의 수수께끼와, 퇴보와 같은 경제적 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p138)

7. 인구문제

인구 과잉 현상을 경고하는 주장들이 계속 들려오는데, 누구라도 세계지도를 가져다가 지구상의 개간할 수 있는 땅을 계산한 뒤 그것을 총인구로 나누어 보면 인구문제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토지에 대한 천부의 권리를 부정하려는 지주들이 문제의 핵심을 숨기고자 조작한 신화에 불과합니다. 전 세계 인구를 모두 미국 전역의 개간 가능한 땅으로 이주시켰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래도 인구밀도는 남한의 4분의 1에 불과합니다. (p142-143)

지금도(이미 우리가 사용해 온 농사법으로) 전 세계 인구를 열 번 먹이고도 남을 만한 엄청난 양의 식량을 경작하기에 충분한 면적의 토지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구라고 하는 풍요로운 행성을 주셨습니다. 사태가 악화된다고 해서 그분을 비난하지 맙시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법 가운데 어떤 것을 무시해 버렸는지 살펴보고 그 법에 따라 살며 일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이 지구를 에덴동산처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p143)

8.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사업을 할 때 그리스도인의 동기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확장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유해한 사업, 즉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사업에 종사해서는 안 됩니다. 선하고 유익하며 건설적인 사업에 종사하면서 윤리적인 방법, 즉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계명 및 하나님의 원칙에 부합하는 방법으로 사업을 경영해야 합니다. 또 그와 같은 사업을 찾아 윤리적인 방법으로 경영해 가는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은 사업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하나님께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p150)

3부 일하시는 하나님

1.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오지만 모두 같은 뜻이 아니고, (제 입장에서 본다면) 그 의미를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한 개인이 마음 안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께 충성을 바치기로 했을 때 그 마음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18:2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두서너 명, 즉 모임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세계교회입니다.

넷째는 천년 왕국입니다.

다섯째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분류할 수 있..(p157-158)

여기서 먼저란 말은 사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할 수 없는, 어렵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령 받는 것을 좋은 감정이나 감화·감동을 받는 것으로 아는데, 그것이 우리의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실천하기 위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 한다고 해도 헛된 일일 뿐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여러 번 읽거나 듣고도 그 말씀을 실천하려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그저 시와 같이 듣기 좋은 것일 뿐 실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p161-162)

교회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운영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사회의 여러 기관 가운데 하나쯤으로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윤리를 가르치기 위한 학교와 같은 교육 기관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일반 대학에서 법학이나 의학이나 그 외의 다른 과목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별다름 없이 공부할 뿐입니다. 실제적인 것만 생각하고 기적이나 기대에 관한 관심이 너무나 부족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 온 세계의 교회를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만들어서 세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만이 많은 신학교에 팽배해 있음을 봅니다. 세계를 변화시키도록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더라도 우리 신자들은 세계를 바꾸기 이전에 자신이 활동하는 영역에서 직접 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기적을 기대하지도 않고 초자연적 지도를 받을 기회나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실 기회도 주지 않고 오직 자신의 머리로, 이론적인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건설하라고 하지 않고구하라고 했습니다. ‘건설하라는 것과구하라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구하기 원한다면 먼저하나님이시여,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나의 왕이 되시고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되도록 허락하소서!”라고 기도한 다음, 주님께 무조건 복종하기로 약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능력을 받을 기대도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능력 있는 분이라면 그분은 그 능력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실 방법 또한 아십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내 마음속에 들어오신 것은 기적입니다. 이미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내 마음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까?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어 내 안에 거하셔서 내 마음을 변화시키고 주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마음과 실행할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지혜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려 주고, 그 일을 시작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까지도 인도해 주시며, 그 다음에 성공의 열매를 주시든지 고난의 십자가를 주시든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인도하실 것입니다. (p163-164)

우리가 할 일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령님이 내 마음에 오시기를 구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도 성령님이 오셔서 무조건 복종하기로 한 단체가 되도록 기도하며,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든지, 구역이나 친구끼리 모이든지 주여! 우리에게 무조건 복종할 마음을 주시고 지혜와 능력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먼저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온 세계 교회를 위하여 주여, 교회를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허락하여 주시고 주께 복종하는 교회가 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회에 좋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p168)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상상력을 포함해 모든 인간에게 창조력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러나 짐승들은 다릅니다 짐승들은 집을 지을 때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항상 똑 같은 것을 짓습니다. 꿀벌을 보더라도 아주 재미있게 모여 공존하지만 창조력도 없고, 사랑도 느끼지 못하고, 기계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사랑 할 수 있으며 창조력이 있으므로 영원토록 의미 있는 일을 할 것입니다.

각 사람이 그의 재능대로 창조력을 발휘해 그림을 그리든지, 조각을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음악을 하든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하고, 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관심이 있어서 전시회가 많이 생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많은 전시회를 열어 각자가 창조한 것을 남에게 보여 주고 서로가 좋다!”고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타락하고 식어 가는 우주가 변해 훌륭한 우주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업자가 되어 매우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p171-172)

     주위에 재능 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난다. 하나님은 분명 각 사람에게 창조력을 주신 것 같다. 이 땅에서 각 사람의 창조 활동이 자유로워질 때 더욱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의라는 것은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는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구약성경에도 불공평한 대우를 받거나 눌림을 당하고 이용당하거나 속임을 당한 자, 빼앗김을 당한 자들을 위하여 를 행하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교인들은 대부분 에 대해 관심이 없고, 관심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인 방법으로 정부를 통해서만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여 노력해 보지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많이 노력하지만 거의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어느 정도 착하다는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보다는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해 보는 사람이 조금은 낫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무관심한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자기 힘만 의지하는 이단자들이라고 합니다. 물론 인간적인 방법, 자기 힘으로만 하겠다는 것이 옳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도, 자기들의 힘으로도 실제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 무관심한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p175-176)

년 전에 닉 토마스라는 천주교 신부님을 만났는데 그는 오랫동안 가난하고 억울한 자들을 위해 일해 왔습니다. 그는 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도록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의 방법은 옳지 않았습니다. 사회적인 방법이나 정치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사용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어서 낙심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하지 않고 다만 이론적으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심령이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주위에 있던 다른 신부들과 수녀, 수사들이 성령세례를 받으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성령이 마음 속에서 초자연적인 지혜로 놀라운 능력을 행한다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시험해 보고 싶은 욕망이 생겨 성령세례를 받기 위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은 뒤 그의 마음이 많이 변화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관심이 전보다 커졌지만, 겸손하게도 되어 자기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고 다만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야 하며 그분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p176-177)

     정말 맞는 말이다. 하루하루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되지 뭐 다른 거창한게 있을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매일 구하고, 그 뜻을 따라 매일 살자.

2. 교회의 사회적 책임

교회는 탐욕을 단호히 거부해야 하고 어떠한 도둑질도 막아야 합니다. 저는 기독교 대학을 다니면서 탐욕은 인간 본성이기 때문에 어떤 경제 구조도 인간의 탐욕에 근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인간은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한 인간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또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은 타락한 인간을 위해 제정되었으며,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50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탐욕이 정당화된 것은 도둑질을 정당화한 결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p183)

광범위하게 무시되어 온 것은 성경이 말하는 기본적 사회정의에 대한 개념입니다. 성경의 기본적 정의는 모든 생산, 즉 수입은 토지노동이라는 두 요소를 요구한다는 기본적 경제 원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토지 없는 노동은 무효하며 노동 없는 토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토지가 없이는, 다시 말해 공간이 없이는, 공장도, 농장도, 어장도, 산림도, 해양 무역(부도), 광산도, 유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요소에 관해서는 많이 강조해 왔습니다만,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실제로 대지주라는 사실은 연막 속에 감추어져 왔습니다. 자본이란 동결된 노동에 불과합니다. 자본이 생산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토지와 노동의 획득이 우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자본주의란 실질적으로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의 손 안에 장악된 봉건주의의 한 형태입니다.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자유인이란 사실상 농노나 노예보다 못한 것입니다. (p184)

3.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기도 사역

예수님은 자신과 친밀한 교제를 갖고 순종하며 동행하는 자들에게만 이와 같은 기도의 응답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분과 교제함으로써 그분 안에 거하게 됩니다. 또 그분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는 그분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계명 가운데 하나는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 먼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11:25) (p198)

평화와 정의를 추구하는 데 기도가 그토록 중요한 또 한 가지 이유는 우리의 싸움이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두려운 정치인이나 민족주의적 경향의 장군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을 파괴하고자 하는 마귀의 능력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6:12). 영적인 전쟁, 즉 중보기도를 통한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우리는 군국주의와 사회적 불의 및 가정 파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p201)

4.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

5. 한국 교회 공동체의 실패와 회복

사회학적으로 볼 때, 이 세상의 대부분의 원시적인 공동체에는 장로(연장자), 행정가, 교사라는 세 부류의 지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장로는 제사를 수행하고 전통을 보존합니다. 행정가는 시장이나 더 작은 행정구역 단위의 장을 맡아 봉사하지만 일반적으로 보수를 받지 않습니다. 보수는 교사들만 받습니다. 또 교사들만 외부에서 영입합니다. 그런데 그 교사들은 마을의 종교 의식이나 행정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장로와 집사와 교사에 대한 아주 자연스런 구분을 알게 됩니다. 교회의 장로들은 성찬식을 집도하며 세례를 베풀고, 집사들은 교회를 운영하며 재정을 관할합니다.

신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남자건 여자건 보수를 받는 교사가 되어야 하며, 그들은 교회의 성례나 행정에 대해서는 손을 떼야 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사회학적으로만 온당한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것이며, 교회의 부패를 최소한으로 줄여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p229-230)

6. 중국의 예수 가정

7. 예수원의 생활과 비전

8. 중보기도의 집

우리 주변에는 기계나 조직, 혹은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중요한 일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지 않으면 그것들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신자로서 마땅히 취해야 다음과 같은 일들을 우리가 실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떠한 도움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있는 모든 자연적인 방법들을 사용하고, 둘째로 최선의 노력을 다할 있도록 축복 주시거나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셋째로 인간적인 노력에 전혀 기대할 없을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권능을 나타내시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p251)

9. 기독교 교육을 위한 학교

10. 토지문제 해결을 위한 한국헨리조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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