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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공부/01. 글쓰기 (with 정인)

[정인]3주차+4주차 - 취업시장과 맥도날드화: 청년들이 '나답게' 살 수 없는 이유


나 답게 사는 삶(1월 셋째주).hwp

도대체 맥도날드화 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리처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책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맥도날드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막스 베버의 합리화 이론의 현대판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이 개념은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기업 맥도날드에서 발견되는 효율성,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자동화를 통한 통제라는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산업전체와 일상생활에서도 확고히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고안되었다. 맥도날드화는 미국사회뿐 아니라 전세계로, 사실상 사회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맥도날드화가 초래하는 비인간화된 사회를 비판한다. 인간이 계산, 측정, 통제의 대상이 되어 인간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에 우려의 목소리를 낸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현대 사회에 대한 조지 리처의 통찰을 따라 한국의 취업시장을 맥도날드화로 포착하고자 한다. 이로써 맥도날드화의 쇠 감옥에 갖혀 나다움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청년들의 불행한 현실을 조명하고, 끝으로 한국 사회에서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인문학 열풍 현상을 살펴봄으로써 고찰할 것이다.

조지 리처가 맥도날드화로 이름지은 현대 사회의 지배적 특성은 자본주의와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질서가 화폐를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가치를 계산하고 예측하며 통제하는 맥도날드화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칼 맑스가 인간의 본질이라 했던 노동조차 맥도날드화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한국의 취업시장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양을 뜻하는 ‘specification’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제품을 구입하기 앞서 합리적 선택을 위해 제품의 수준을 비교하고 평가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영미권에서는 그 사정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단어가 스펙이라는 줄임말로 쓰여 제품이 아닌 인간을 겨냥하고 있다. 기업들에 의해 구직 청년들의 노동 능력을 비교 평가하는 지표이자, 계산가능한 단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 항목으로는 영어 공인 점수를 비롯한 각종 어학능력과 자격증, 인턴 및 공모전 수상 경력 등이 해당된다. 리서치기관 엠브레인의 ‘2013년 취업 스펙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졸업생을 포함한 취업준비생의 95.6%는 취업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스펙을 꼽았다. 이는 곧 청년들이 취업시장에서 지난 날 꼼꼼하게 사양을 비교하며 구입했던 자신의 스마트폰처럼 변모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본질을 상품화하는 기업의 스마트한 사원으로 선택받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스펙열풍현상은 맥도날드화의 특징 중 하나인 계산가능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물론 취업시장에서는 이외에도 효율성, 예측가능성, 자동화를 통한 통제와 같은 맥도날드화의 다른 모습들도 나타나고 있지만 지면의 한계성 이는 논외로 한다.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과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각종 열풍이 해마다 불어온다. 이러한 열풍은 사라졌다 금새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수 없이 반복하는데, 그 모습은 늘 메마른 일상을 적셔주는 놀이라는 단비로 내려옴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스펙열풍은 어떠한가? 그것은 열풍이라는 가면을 쓴 중풍은 아닐까. 인간을 계산대 위에 올려 놓고 가격을 매기는 일을 놀이에 빗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맥도날드화된 취업시장의 현실은 이러하다. 취업을 준비하는 모든 청년들의 삶은 스펙이라는 표준화- 앞서 언급했던 영어 공인점수, 자격증 등- 저울을 통해 가치가 매겨진다. 기업으로부터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청년들은 치열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삶은 먹고 살기 위해청년들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운명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그 삶은 감옥의 죄수와 같다. 내 삶은 없다. 짜여진 시간 안에서 누군가의 규율’-, 정해진 기업의 입사조건, 즉 스펙충족에 따라- 에 따라 행동하도록 통제된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죄수와 달리 교도관이 없이 스스로 자신을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나다움이란 사라진다. 어릴 적 꿈꿨던, 그리고 지금 내가 간절히 욕망하는 나만의 삶. 그것은 맥도날드화된 취업시장의 현실로 인해 아프게 자취를 감춘다. 출소를 기다리며 새 인생을 기대하는 죄수처럼 청년들은 입사를 기다리며 나다움을 포기하는 댓가로 찬란한 회사생활사회생활을 꿈꾼다. 그것만이 청년들이 나다움의 상실을 감수한 채 현실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버팀목이다. 하지만 석방된 죄수들의 삶이 사회로부터 낙인을 벗어던질 수 없듯이, 입사 후 청년들의 삶은 더욱 정교하게 기업의 메뉴얼대로 빚어져 빛 좋은 개살구가 된다. 이제 나답게 산다는 것은 몽상이 된다. 나다움을 포기하면서까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취업이(더 정확히 말하자면 근무조건과 임금이 좋은 기업에 취업하는 것이) ‘인간다운삶과 직결된다는 사회적 인식과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인 경제활동이 자본가가 아닌 이상 샐러리맨으로 살아야만 가능하다는 사실 두가지에 기인한다. 그래서 우리는 취업시장에서 나다움을 포기하고 맥도날드화된 삶을 사는 청년들을 쉽사리 비난할 수 없다. 이 문제는 현실적 딜레마로서 매우 풀기 어려운 숙제다. 맥도날드화의 쇠 감옥에서 벗어나 나답게 사는 것을 가능케 하는 대안은 진정 없는 것일까?

박근혜 정부 들어 스펙열풍 못지 않은 거센 바람이 바로 인문학 열풍이다. 곳곳에서 열리는 인문학 강의와 더불어 쏟아지는 인문학 서적이 이를 반증한다. 인문학은 인간 그 자체를 성찰하는 학문이다. 인간다움 그리고 인간다운 세계가 과연 무엇인지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함께 비추어 고민하고 대답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여기는 인문학은 맥도날드화의 쇠 감옥을 벗어나 나답게 사는 삶에 용기를 불어넣어 그것을 실현 가능케 하는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 성벽도 무너지고 있다. 그것은 맥도날드화의 성은을 입어 비인간화를 통해 가장 많은 혜택을 보는 기업들이 인문학 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아이러니한 현상 때문이다. ‘아이폰 인문학으로 대변되는 기업들의 인문학 운동은 회사의 이윤 창출에 도움이 되는 지식들만 뽑아내, 일 잘하는 사원으로 훈육하는도구적 인문학을 다루고 있다. 결국 인문학도 다른 의미에서인간을 겨냥하게 되었다. 청년들은 이제 나다움을 성찰하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는다. 인문학의 맥도날드화로 인해 그들은 나다움을 잃기위해서 인문학을 공부한다. 이제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벽 끝에 매달려 맥도날드화의 심연을 내려다보는 일뿐이다.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하면서 인간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인문학의 맥도날드화가 시사하는 바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청년들로 하여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추동해주는 동력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나는 그러한 동력들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좀비가 인간이 아니듯, 인간을 맥도날드화의 쇠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동원되는 모든 것들은 제 아무리 인간다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더라도 결국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다시 인간은 유럽의 중세사회 때처럼 영혼을 저당잡혔다. 이제는 기독교가 아닌 맥도날드화라는 새로운 동력이 인간을 움켜쥐고 있다.

 

첫 문장으로 필자가 인용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보자. 도대체 맥도날드화 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세상에서 청년들이 맥도날드화로부터 영혼을 되찾을 방법은 과연 무엇인가? 2000년전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세상을 소리 높혀 외쳤던 한 청년이 만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행했던 일을 떠올려본다. 십자가에 자신을 내던져 처참하게 찢겨지는 것. 맥도날드화된 한국 사회에서 나답게 산다는 것도 결국 이와 같이 죽음을 담보로 하는 삶은 아닐까?

 

 

참고자료(약식): 조지 리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및 관련 논문, 강신주 강연, 엠브레인 취업 스펙조사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