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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공개념/책

노동 빈곤과 토지 정의 -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2013.6.14.~15.)


이 책은 fb에서 이벤트로 받은 책.

 

 

추천사

 

노동자의 빈곤이 극심해지던 19세기 말, 교황 레오 13세가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고 불리는 유명한 회칙1891년에 발표하고 몇 달 후에 헨리 조지가 이에 대한 반론으로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역자 서문 : 해제를 겸해서

 

양식이 부족한 것은 하느님께서 임무를 다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노동 의욕을 가진 인간이 가난이라는 저주에 빠지는 것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물자의 원천에 잘못이 있어서도 아니고, 약속하신 양식이 지상에 풍부하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인간이 불경스럽게도 창조주의 자비로운 의도를 거스르면서 토지를 사유재산으로 만들고 관대한 아버지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토지에 배타적 소유권을 설정한 후, 이를 극소수에게 부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외의 어떤 답도, 혹 그것이 종교의 형식을 갖춘다고 해도 실제로는 무신론적인 답일 뿐입니다.

 

헨리 조지의 대표작 진보와 빈곤에 비해 공개서한이 가진 장점을 세 가지만 들어 보자. 첫째로, 길이가 짧다. ... 둘째로, ‘공개서한을 쓴 1891년은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을 출간한 지 12년이 흐른 시점이다. 헨리 조지는 그 기간 동안 세계적 관심과 비판 속에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공개서한에는 이런 과정에서 쌓아 올린 내공이 녹아들어 있다. ... 셋째로, 사회문제에 관한 종교의 책무에 관심을 갖는 독자에게는 특히 공개서한이 도움이 된다.

 

 

. 저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잠시 살다 가는 존재로서 하느님 세상의 평등한 피조물이며 하느님 섭리 속에서 평등한 백성입니다.(p19-20)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노동의 필요성과 노동의 능력을 주시면서 노동의 원료도 같이 주셨습니다. 원료란 곧 토지입니다. ... 인간은 토지 위에서 그리고 토지로부터 삶을 얻으며, 토지의 사용을 통해서만 공기와 햇빛, 물과 같은 다른 요소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주의 평등한 피조물이며, 하느님의 섭리 속에서 평등한 생존과 욕구 충족의 권리를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평등하게 토지를 사용할 권리가 있으며, 평등한 토지 사용을 부정하는 제도는 어떤 것이든 도덕적으로 옳지 않습니다.(p20)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권리에서 비롯되는 재산권만이 유일하게 완전한 재산권입니다. 이러한 재산권은 노동에 의한 생산물에 대해서만 인정되며 하느님의 창조물에 대해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사람은 그 물고기에 대한 재산권을 취득하며 이 배타적 권리를 팔거나 증여하거나 남에게 양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다에 대해서는 이런 권리를 취득할 수 없습니다. 바다는 남에게 팔 수도, 줄 수도 없고 남이 사용하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습니다.

또 풍차를 건설하는 사람은 자신이 바람을 이용하여 생산한 물자의 재산권을 취득합니다. 그러나 바람 자체에 대한 재산권을 취득하여 바람을 팔거나 남이 사용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습니다.

또 농사 짓는 사람은 자신의 노동으로 재배한 곡식에 대한 재산권을 취득합니다. 그러나 곡식을 자라게 한 태양이나 토지의 재산권은 취득할 수 없습니다. 태양이나 토지는 모든 세대가 사용하도록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베푸시는 선물로서 아무도 독차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p21)

 

노동 생산물에 대해서는 정당한 소유권이 인정되지만 토지에 대해서는 소유권이 아니라 사용권만 인정될 수 있습니다.(p22)

 

토지에 대한 배타적 사용권을 갖더라도 다른 사람의 동일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정도에 그쳐야지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지상에 사는 사람이 카인과 아벨 둘뿐이라고 하면 합의 해서 땅을 나누어도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자 자신의 땅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행사해도 됩니다. 그러나 새로 출생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이 세상에 나올 수 없으므로 출생은 곧 하느님의 하사물에 대해 평등한 사용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카인과 아벨이 새로 출생하는 사람의 토지 사용을 거부한다면 이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같습니다.(p23)

 

토지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살인이며 토지 사용 대가를 다른 사람이 징수하는 것은 강도짓입니다.(p23)

 

사적 이용의 장점과 공동 소유의 정의를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토지에서 노동 투입 여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가치를 모두 징수하여 공동으로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p24)

 

저희는 모든 사람이 아무 때나 어떤 토지든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공동 소유 방식으로 평등한 토지권을 구현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토지를 균등하게 분할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균등 분할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또 분할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합니다.

저희는, 개인의 토지 이용을 인정하고 증여매각상속의 자유도 완전히 허용하는 가운데 토지에 과세하여 공공 목적에 사용하자고 제안합니다.9p24)

 

토지는 사적으로 사용하되 그 토지가 사용자에게 주는 특별한 이익의 가치를 공동체에 납부하도록 하면 두 법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p25)

 

이 모든 조세는 도덕법칙에 위배됩니다. 오로지 개인에게만 속하는 것을 강제로 징수합니다. 양심적인 사람보다 비양심적인 사람을 유리하게 합니다. 누군가는 팔고 누군가는 사야할 물건의 가격을 올리는 결과를 낳습니다. 아니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듭니다. 정부를 부패시킵니다. 지키지 않을 선서를 하게 합니다. 상업에 족쇄를 채웁니다. 근면과 절약에 벌금을 물립니다. 인간이 향유할 부를 줄이고 빈부격차를 벌립니다.

-> 근면과 절약에 벌금을 물리는 것. 예를 들면, 인플레이션 아니면 적금 탈 때 세금내기.. 이거 왜 내는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안 그래도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냥 저금하면 손해인데. 내가 번 돈 내가 아껴서, 모아서 다른사람이 대출 할 수 있게 해주는데 왜 세금을 내라는거지?

 

누군가는 팔고 누군가는 사야 할 물건의 가격을 올리는 결과로부터 보호무역이라는 이론이 나왔습니다. 이 제도는 복음을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정치경제학을 모르신다고 전제하며, 국가 번영의 법은 하느님의 법과 같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 이론은 국가 간 불화를 정당화하며 적대적 관세 전쟁을 확대하라고 부추깁니다. 번영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 국민의 생산에 제약을 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국민이 자기 나라 국민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인간이 형제가 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 원리가 아니라 타국인에게 손실을 입히는 것이 시민의 미덕이라고 합니다.(p28)

-> 폭풍 같은 비판이다. 그리스도께서 정치경제학을 모르신다고 전제하는 교만함. 결국 이 말 안듣다가 1, 2차 세계대전. 빵 터짐. 결국 이 전쟁은 식민지 싸움, 땅 뺏기 싸움. 무역 흑자 적자 때문에 일어난 전쟁. 토지 제도와 무관하진 않을 거 같다.

토지가치를 징수하여 정부 수입으로 삼는 동시에 노동 생산물에 대한 조세를 철폐하면 노동자는 노동의 산물 전부를 가지며 개인은 정당하게 개인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됩니다. 산업에 부담을 주지 않고 상업을 제약하지 않으며 절약을 처벌하지 않습니다.(p29)

 

사회성장과 더불어 증가하는 토지가치를 공공 목적으로 징수하지 않으면 생산을 축소시키고 분배를 왜곡하고 사회를 부패시키는 다른 조세를 징수해야만 합니다. 그 결과 모든 사람에게 속해야 하는 것을 일부 사람만 소유하게 됩니다. 토지개량을 위해 필요한 사용권의 확실성과 자연권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자연의 기회에 대한 평등권을 선진 문명에 맞도록 결합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내버리게 됩니다. 또 사회생활의 기초에서 사람 간의 부당한 불평등을 야기하며, 생존할 권리와 일할 기회와 문명의 혜택과 하느님의 선물을 누리를 사람에게 대가를 지불하도록 강제하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수가 당하는 이런 착취는 발전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착취를 야기합니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가치가 토지소유권을 가진 자에게만 집중되는 사회에서 인구 증가와 사회 발전이 예상되는 경우, 토지의 매점과 투기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생활과 노동에 필요한 천연 요소가 인위적으로 희소해지고 생산은 위축됩니다. 파괴적인 전쟁만큼이나 심각한 재앙을 초래하는 경제 불황이 되풀이해서 야기됩니다.(p32)

 

빛 속의 어둠, 강함 속의 약함, 부유 속의 빈곤, 민란을 야기할 정도의 들끓는 불만과 같은 현 문명의 특징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거부하고 그 의도를 무시하는 데서 생기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반면 우리가 하느님의 분명하고 단순한 정의의 규칙에 따라 개인 노동의 생산물을 모두 개인에게 귀속시키고, 공동체의 성장에 의해 토지에서 발생하는 가치를 모두 공동체에 귀속시키면 공공수입을 마련하기 위한 사악한 방식을 피할 수 있습니다. 또 모든 사람이 창조주의 하사물에 대해 평등한 기회를 갖게 되는 동시에 노동을 투입하고 그 결실을 향유할 때 평등한 기회를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특별한 강제 조치가 없어도 토지의 매점은 사라지게 됩니다. 토지 소유는 단지 계속적인 사용을 보장할 뿐이고 누구도 사용 목적 외로 토지를 취득하거나 보유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등 토지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국가가 이익을 징수하여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므로 그에게 돌아가는 부당한 이익은 없습니다.(p33)

 

하느님께서 인간 문제를 서툴게 다루신 것도, 인색하게 다루신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인구를 너무 많이 내신 것도 아니고, 물자를 충족하게 베푸시는 데 소홀하셨던 것도 아닙니다. 단순히 동물적 생존을 위해 대중이 벌어야 하는 치열한 경쟁이나 우리 문명을 특징짓는 그 엄청난 부의 축적을 의도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도 하고, 더 불경스럽게는 그것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질서라고 하기도 하지만, 이런 폐단은 우리가 하느님의 도덕법칙을 부인하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정의의 법칙인 황금률은 단순히 말로만 그치는 법칙이 아니라 진정한 사회생활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을 지키면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와 여가와 풍요가 생깁니다. 이 법칙을 지키면 문명은 극빈자에게도 생필품은 물론 모든 편리품과 적당한 수준의 사치품까지 마련해 줄 수 있습니다. 들의 백합화가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듯이 하느님의 나라와 공의를 추구한다면 물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는데, 이는 단순한 몽상가의 말이 아닙니다. 정치경제학의 최근 연구결과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께서는 완벽한 진리를 설파하신 것입니다.(p35)

 

. 토지사유제는 정당하지 않습니다.

 

사유재산의 종류가 하나는 아닙니다. 적절한 결혼은 하느님의 법에 부합하지만 일부 국가에서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 근친혼까지 적절한 결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유재산이 모두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도덕한 결혼이 존재하듯이 부도덕한 사유재산도 존재합니다.(p37)

 

매매란 정당성을 주는 행위가 아니라 소유권을 이전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도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재산권이 매매를 거친다고 해서 도덕적 정당성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노예를 노예 사냥자의 재산으로 인정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노예 매입자의 정당한 재산이 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토지재산권에 관한 교황님의 논리에 따르면 노예 재산권도 정당화됩니다.(p39)

 

다른 사람이 살아가야 할 토지를 소유하는 것과 다른 인간 자체를 소유하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두 경우 모두 소유자가 상전이 되지 않습니까? 소유자가 다른 사람의 노동을 강제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노동의 결실을 소유자가 취할 수 있고 노동자를 부릴 수 있지 않습니까? 소유자가 다른 사람의 생사를 결정할 힘을 쥐지 않습니까? 토지를 박탈하면, 혈관을 베어 피를 흘리게 하거나 목을 졸라 숨을 쉬지 못하게 할 때처럼 사람이 죽습니다.

노예제의 핵심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대가 없이 가로채는 권한을 인정한다는 데 있습니다 토지사유지는 노예제와 똑같습니다. 노예소유자는 노예의 생산물 중에서 노예가 생존할 만큼은 남겨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소위 자유국가라는 곳에서 노동자층의 대다수가 그 이상을 얻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탈리아나 영국의 농업노동자는 과거 미국 남부의 노예보다 노동의 결실을 얼마나 더 많이 가져가고 있을까요?(p41)

 

토지의 전유가 진행되면서 땅 없는 사람에게 더 이상 돌아갈 몫이 없게 되자 토지사유제가 노예제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토지사유제는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남모르게 노동을 착취할 수 있는 더 경제적이고, 더 간편한 방식입니다.(p42)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족이나 아일랜드를 정복한 영국인은 국민을 분할하지 않고 토지를 분할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럽의 노예선이 유럽이 아닌 신세계로 노예를 보낸 이유입니다.(p42)

 

자연을 원료로 삼아 인간이 생산한 것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해도 단지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 우리 모두를 위해 마련된 원천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p45)

 

교황님은, 일시 사용으로 소멸되는 물자만이 아니라 장래에 사용할 물자에 대해서도 인간의 이성으로 인해 권리가 발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용으로 소멸되는 음식이나 땔감 그리고 수리를 통해 여러 세대에 걸쳐 존속할 건물과 같은 경우에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원료를 취하는 원천인 자연의 항구적인 물자에 대해서도 인간이 사적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고 추론하시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인간은 자기 노동으로 생산한 토지의 결실은 사적으로 소유해도 됩니다. 이런 물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의 흔적을 잃고 원료가 나온 원천인 자연으로 돌아가므로 특정인이 소유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토지 그 자체를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토지는 계속해서 생산 원료를 추출해야 하는 원천일 뿐 아니라 인간의 몸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p45-46)

 

교황님이 속계의 군주라고 가정하고 이집트처럼 비가 오지 않는 땅, 샘도 개울도 없고 오로지 나일 강과 같이 수량이 풍부한 하나의 강에서만 물을 구할 수 있는 땅을 통치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을 풍요롭게 하려고 신하들을 보내면서 정의를 행하고 번영하게 만들 것을 명하셨는데, 신하 몇이 강에 대한 소유권을 설정하고 일반인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물 한 방울도 이용할 수 없게 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결과 신하 몇 사람은 일하지 않아도 부유해지고 일반인은 물값을 내느라고 열심히 일해도 생존이 어려울 정도의 빈곤에 빠졌다는 보고를 받으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p48)

-> 봉이 김선달

 

토지에 투입한 노력은 그 결실에 대한 소유권을 발생시킬 뿐 토지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다에 노력을 투입할 때 잡은 물고기에 대한 소유권은 발생하지만 바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p52)

 

고가의 빌딩도 대가를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일정기간의 사용권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건축하고 있습니다. ... 토지와 개량물의 가치를 분리할 수 없다고 하셨지만 개인 간의 거래에서는 상시적으로 분리 거래되고 있습니다.(p52)

 

개량물의 가치와 토지가치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경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개량물을 가진 토지는 개량물이 없는 토지보다 언제나 비싼 값에 매각 또는 임대되기 때문입니다. (p53)

 

국가가 앞으로 계속해서 토지가치에만 과세한다고 하더라도 토지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형식상으로는 여전히 토지소유자이며 언제라도 사용권과 개량물을 증여하거나 매각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노동 투입 또는 자본 투자로 인해 토지에 부가하거나 축적한 재산은 자신이 소유하며 또 완전한 금액을 받고 처분할 수 있습니다.(p53)

 

토지소유자가 자신의 노동 없이 소유권 덕에 노동 생산물을 풍부히 얻는다면 이는 필시 다른 사람이 노동과 땀의 결실로 정당하게 얻은 것을 권리 없는 자가 가로채서 향유하는 것이 됩니다.(p54)

 

우리가 자부해 마지 않는 19세기에 수백만의 영국인이 겪고 있는 빈곤과 절망과 압박과 타락이 13세기 영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하였습니다. 또 실제로 기근이 든 시기를 제외한다면, 노동자 중에서 자신이 죽으면 아내와 자식이 가난해질까 염려할 정도로 빈곤한 사람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p56-57)

 

또 교황님은 신명기를 인용하시어 하느님의 법이 토지사유제를 승인한다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의 아내를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집이나 밭,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재산은 무엇이든지 욕심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이웃의 밭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고 해서 하느님의 법이 현재와 같은 토지사유제를 승인하고 있다고 해석한다면, “남종이나 여종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으니 하느님께서는 노예제를 인정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종이나 여종은, 다른 부분과 종합해서 볼 때 한시적 하인과 영구적 노예를 다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라는 단어는 사용과 개선의 대상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토지 자체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각각 사용권과 소유권이 발생합니다.(p58-59)

 

성경의 그 어느 곳에도 노동 생산물에 대한 재산권과 같은 권리를 토지에 대해 인정하는 제도를 정당화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시는 땅이라는 표현처럼 어디에서나 토지를 하느님의 대가 없는 하사물로 다루고 있습니다.(p59)

 

토지사유제를 취하는 부유한 국가에서 자녀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이라도 물려줄 수 있는 가장은 5%도 채 안 되며 대부분은 자신의 장례비도 남겨 주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일부 가정의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기대 이상으로 부유한 유산을 물려받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는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토지사유제 때문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혜택마저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생존하고 일하기 위해 타인의 허락을 간구해야 하며 평생 힘들게 일해도 그 소득으로는 기아와 빈궁을 면하기 어렵습니다.(p61)

 

젊은이는 결혼을 두려워하고, 결혼한 부부는 애 낳기를 두려워하고, 어린이들은 적절한 영양 섭취와 보살핌이 없어 죽어 가고, 공부하거나 뛰어놀아야 할 시기에 힘든 노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성인이 되더라도 상당수는 영양 결핍, 신경과민, 정신적 미숙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런 상황은 단순한 고통만이 아니라 범죄를 예고하지 않습니까? 감옥과 사창가를 예고하지 않습니까?(p64)

-> 100년전에 쓰여진 이 이야기를 읽으며 지금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하거나 뛰어놀아야 할 시기에 힘든 노동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오늘과 쫌 다르지 않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별반 다를게 없다. 뛰어노는 아이들은 별로 없으나 공부는 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공부인지 노동인지 잘 모르겠다. 혹사당하기는 매 한가지 아닌가?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이 모두 다 하고 있는 그것. 자라는 청소년들이 하고 있는게 공부인지 아니면 장래에 먹고 살기 위해 이미 시작된 노동인지 알쏭달쏭하다. 이런 상황은 단순한 고통만이 아니라 범죄를 예고할 뿐..이라는 말도 점점 증가하고 있는 강력범죄, 이상한 범죄 이야기들을 볼 때 다를 게 없는 것 같고.

 

이런 국가의 대다수 국민이 조국이라는 곳에 대해 무슨 애착이 있겠으며 조국의 부름을 받아도 무엇을 위해 싸우고 목숨을 바치겠습니까? 예를 들어 교황님의 조국인 이탈리아만 해도 국민의 대다수가 모국의 토지에 무슨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까? 토지 소유자로부터 특권을 매입하지 않는 다음에는 감옥이나 빈민구제소밖에 갈 곳이 없습니다.(p65)

 

노동 생산물에 대한 사유재산권이 자연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자연이 이런 권리를 노동자에게 주었고 또 노동자에게만 주었기 때문입니다. 생산물은 사람의 노력에 대해 자연이 반응한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p66-67)

 

교황님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토지단일세는 소토지 소유자들에게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이익을 가져다줍니다. 이들에게는 노동자 겸 자본가로서의 이해관계가 토지소유자로서의 이해관계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토지 담보나 임대 등을 통해 이익을 취하는 대토지 소유자 내지 거대 재산가들도 상대적으로는 손실이 있겠지만, 사회가 번영하고 도덕이 개선되므로 절대적으로는 이익입니다. 그러나 교황님은 손익 계산에 앞서 더 강하고 단호하게 판단하실 것입니다. 교황님은 인간으로서의 의무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으로 인해, 옳고 그름을 모호하게 만드는 말에는 한순간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실 것입니다.(p68)

 

모든 토지소유자에게 동일한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지대를 징수하고 모든 사람을 위해 사용한다면 보상 요구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보상을 한다면 오히려 불의가 다른 모습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토지소유자는 종전에 취하던 지대 대신 이자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p68-69)

 

노동의 결실인 토지가치를 가져간 사람도 과거의 것은 그대로 가지라고 하면서 앞으로는 노동에 대한 착취를 끝내자는 것입니다. 과거는 덮어 두되 앞으로 공동체에 당연히 귀속되어야 할 지대를 토지소유자가 지불하라는 것입니다.(p69)

 

. 사회주의는 해결책이 아닙니다.

 

사회주의자가 추구하는 바는 자본을,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대자본을 국가가 소유하고 최소한 거대 산업은 국가가 운영하는 것입니다.(p70)

 

사회주의자의 핵심적 특징인 사회악을 치유하기 위해 국가 기능을 확대하자는 것입니다.(p70)

 

저희는 진정한 재산권을 신성하다고 믿기 때문에 강제적 공산주의는 파괴적인 강탈행위로 간주합니다. 물론 자발적 공산주의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은 상태라는 점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또 공산주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보지도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와 가톨릭교회 내에는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공산 사회의 사례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바오로, 토마스 데 아퀴노, 프라 안젤리코, 유명한 가르멜 수도회와 프란치스코 수도회, 예수회 등이 공산주의자였습니다.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의 숲속에 사는 야만족에게 십자가를 전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고, 선교를 위해서는 어떤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은 공동체였습니다. 이런 사례를 알고 있는 이상, 완전한 사랑이 다른 모든 동기를 대체하는 사회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자신은없습니다. 그렇지만 공산주의는 강렬한 종교적 믿음이 사회 전체에 스며들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며, 이것은 오로지 정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p71)

 

사회주의의 핵심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고 왕을 요구했을 때 빠진 그 망상, 도처에서 민주주의를 부패시키고 독재자를 세운 그 망상이 존재합니다. 이는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이 국민의 이익을 위할 수 있다는 망상이며, 인간이 만드는 정부라는 장치가 각 국민의 지혜와 덕성보다 개인의 일을 더 잘 처리해 낼 수 있다는 망상입니다.(p73)

 

저희는 자본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자본은 노동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자도 본질적으로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봅니다. 부의 축적에도 상한을 두지 않으며, 부자라고 해서 빈자에게는 부과하지 않는 특별한 부담을 지우지도 않을 것입니다. 경쟁도 나쁠 것이 없다고 봅니다. ... 공동체의 발전에 의해 토지에 발생하는 가치는 공동체를 위해 환수하는 동시에 개인에게 속하는 것은 모두 개인에게 줄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피한 독점은 국가의 기능에 맡기고, 사회 전체의 건강, 안전, 도덕, 편의성을 위해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제한과 금지를 철폐할 것입니다.(p75)

 

모든 사회주의는, 자연 발생적인 질서는 적절하지 않거나 조화되지 않은 질서이기 때문에 우리 문명의 불행을 야기한다고 보고, 인위적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거나 기존 질서를 개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국가가 인간의 지능을 활용하여 경제 관계를 적절하게 조직화해야 한다고 합니다.(p75-76)

 

저희는 인간이 번영을 달성하고 파멸을 피하려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최상위의 법이 하느님의 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p76)

 

저희가 제시하는 개혁안은 자연에 대한 평등한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보장하고 정당한 노동 투입에 대한 모든 법적 제약을 제거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인간의 법과 도덕법칙이 일치하게 됩니다.(p77)

 

토지사유제로 인해 사회가 땅을 가진 계층과 못 가진 계층을 분할되는 곳에서는, 토지사유제 자체를 건드리지 않는 한 경제사회도덕 등 각종 분야의 어떠한 발명과 개선도 빈곤을 예방하거나 단순 노동자의 전반적인 상태를 향상시킬 수 없습니다. 발명과 개선이 노동 생산을 증가시키거나 노동에 필요한 요소를 줄이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해도 그것이 보편화되는 순간 토지소유자의 소득만 증가할 뿐 단순 노동자에게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난 노동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노동에 필요한 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어떤 능력도 무용지물이며 그저 겨우 생존할 수 있는 소득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

우리 시대의 발명과 발견은 노동의 생산력을 엄청나게 증가시켰고 노동하는 데 필요한 각종 요소의 비용을 크게 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선이 단순 노동자의 소득 증가로 연결된 곳이 있습니까? 결국 토지가치를 엄청나게 올려 혜택이 주로 토지소유자에게 돌아가지 않았습니까?(p78-79)

-> 무슨 일을 한든 땅위에서 해야 하기 때문. IT 산업도 땅 위에서, 소프트웨어 개발도 땅 위에서. 땅의 가치가 올라가면 그 혜택은 땅 소유자에게 돌아간다.

 

생산력을 높이고 낭비를 줄이고 노력을 절감하는 모든 발명과 개선은 동일한 산출을 위해 투입되는 노동을 줄여 주는 효과가 있으므로 이를 노동절약적 발명과 개선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사람에게 토지 사용권이 인정되는 자연스러운 상태의 사회에서는 노동절약적 개선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노동을 할수록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심어 주신 강한 본성에 따라 자신의 삶을 더 많이 향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수 대중이 노동력을 제외한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노동을 투입할 기회가 다른 사람에 의해 주어지는 부자연스러운 사애에서 노동 수요란, 기회를 부여하는 자가 원하는 서비스에 대한 수요에 불과하며 인간 자체의 상품화를 초래할 뿐입니다. 따라서 노동절약적 개선의 자연스러운 효과는 임금을 상승시키지만, 토지사유제가 조성하는 부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상업적 수요를 줄여서 임금을 낮추고 단순 노동자를 기아와 극빈의 상태에 빠뜨립니다.(p80)

 

하느님인들 무슨 수가 있겠습니까? 태양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으시고 공기에 새로운 힘을 주입하시고 토양에 새로운 힘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은혜는 토지소유자에게 귀속될 뿐, 단순 노동자에게는 이익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를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의성을 열어 주시어 인간이 새로운 물질, 새로운 제도, 새로운 힘을 발견한다고 해도 증기기관과 전기 등 우리 시대의 수없는 발견과 발명이 하지 못했던 것처럼 인간의 빈곤을 덜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또 하느님께서 음식과 의복 등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물자를 하늘에서 내려 주시거나 땅속에서 솟아나게 하시더라도, 우리의 법제도에서는 이것이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하느님의 은혜가 증가하고 확대되더라도 인간에게 혜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저주가 되지 않겠습니까? 특권층은 신나게 부를 끌어모으는 반면 토지를 박탈당한 계층은 더 심한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리지 않겠습니까?(p81)

 

. 회칙의 해결책도 정답이 아닙니다.

 

토지사유제는 노동 생산물에 대한 사유제와 본질적으로 같으며 똑같이 정당하다는 것이 바로 그 잘못된 전제입니다.(p82)

 

교황님이 정확하게 묘사하신 불행한 현실이 문명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것은 이런저런 국지적 오류나 사소한 실수 때문이 아닙니다. 토지사유제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는 문명 발전 그 자체가 원인이며, 금세기의 뚜렷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적 발전과 물질적 성장 그 자체가 원인입니다.(p83)

강력하고 절대적인 지배자라면 이런 규제를 통해 노예 상태를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있고, 민주국가는 가부장적 기능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그리스도교 세계에는 토지사유제가 빚어내는 산업 노예제가 만연해 있는데, 산업 노예제에서는 주인이 노예에게 노동을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노예가 주인에게 노동을 간청합니다. 이처럼 규제의 가장 큰 어려움은 규제의 수혜자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부터 나옵니다. 예를 들어 아동의 공장 노동 제한에 대한 장애 요인은 고용주가 아닙니다. 가난에 쪼들린 엄마가 자기 자식의 나이를 속이거나, 자식에게 그렇게 하라고 가르칩니다.(p85)

-> .. 대박.. 서로 와서 일을 하겠다고 하는 현실. 그 체제...대박...

 

과도한 노동을 좋아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엄마도 뛰놀아야 할 자식을 일터로 보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노동자가 위험하고 비위생적인 작업 환경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택 과밀처럼 모두 빈곤이라는 독침 때문입니다. 원인이 되는 빈곤을 건드리지 않는 한 교황님이 권장하시는 규제는 그저 부분적일시적 결과를 낼 수 있을 뿐입니다. 원인이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여기를 억제하면 저기에서 문제가 불거집니다.(p86)

 

국가가 토지를 모두 매입하여 소자작농 체제를 이룩한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아일랜드에서 보듯이 토지의 시장가격을 올려서 서민층이나 후손은 토지를 취득하기가 더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교황님이 선언하셨듯이 국가는 더 낮은 계층과 높은 계층의 사람들을 조화 속에서 똑같이 포용하는 단일체라고 한다면, 그래서 국가가 어떤 국민의 토지 매입을 지원한다면, 다른 국민이 나귀, 가게, 연장, 원료 또는 자신이 잘 사용할 수 있거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물품을 구입할 때도 국가가 똑같이 지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p88)

 

토지사유제를 유지하면서 토지를 분할 소유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p88)

 

입구는 열려 있어 계속 사람이 들어오는데 출구는 닫혀 있는 방에 갇힌 모습, 이것이 오늘날 대중이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토지사유제라는 빗장으로 굳게 잠긴 출구를 열어젖혀 전체의 압력을 줄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방 안에 갇힌 사람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압박을 줄이려면 다른 사람을 밀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가장 약한 사람이 벽 쪽으로 밀려날 것입니다. 노동조합이나 상업길드가 택하는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황님이 권장하시는 평화적인 단체라 하더라도 자기 단체원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려면 다른 사람을 밀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자선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노동자가 스스로를 돕도록 일자리를 마련해 주려는 박애단체조차 토지사유제가 빚어내는 맹목적이고 무자비한 경쟁상황 속에서는 공격성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를 도우려면 다른 이의 이익을 침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고 다른 사람의 임금을 깎아서 자기네 수혜자를 지원한다는 따가운 비판을 줄이려면 땅을 팠다가 도로 메우는 식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밖에 없습니다.(p91)

->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갈등 문제와 유사하다.

 

상업길드나 노동조합과 같은 성격의 노동단체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법칙에 따라 힘으로 싸우게 되므로 누군가는 다칩니다.(p92)

 

노동단체는 자신들의 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를 굶주리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즉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쟁의 불참자를 제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 중에는 적군이라면 친동생에게도 총을 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쟁의 불참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 역시 일자리를 구하는 같은 편입니다. 비난하는 사람보다 형편이 더 어렵고 더 굶주리는 같은 편입니다. 배고파 애원하는 아내와 자식을 둔 사람인 경우도 많습니다.(p92)

 

이번 협약이 지속된다면 부두 노동자 중 정규직이 늘어나고 임금도 높아지며 작업 환경도 향상될 것이다. 이것이 협약이 적용되는 노동자에게는 무조건 이익이 된다. 그러나 다른 측면도 있다. 분명히 고용이 축소되고 일자리 수도 줄어들 것이다. 정규직이 늘어나는 만큼 하층 임시 노동자는 전보다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되고 노동자 중 적자”(適者)만이 생존하게 된다. 다른 경우도 그렇듯이 부두 노동단체도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결과를 낳는다. 산업 경쟁에서 뒤처진 실업자 계층, 즉 부스의 사회계층 분류에서 “B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번 변화에서 얻는 게 없을 것이다. 오히려 다른 문 하나가 닫혀 버린 것이다. 이 문은 대부분은 일자리로 가는 마지막 문이다.(p94)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노동조합주의가 부분적인 완화책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또한 교황님의 입장에서 그 자체가 선이라고 권장하실 만한 도덕성을 노동조합주의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교황님이 토지사유제를 지지하시는 한 그 이상 무엇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p94-95)

 

. 그리스도교는 토지사유제 철폐를 명합니다

 

임금은 기본적으로 노동이 만들어 낸 것에서 나오므로 자가노동을 하여 자신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사람은 자기 노동의 결실이 임금입니다. 어부, 뱃사공, 마부, 행상, 농부는 모두 고용주 없이 자신의 서비스나 생산물을 직접 팔아 임금을 벌지 않습니까? 교황님의 해결책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아예 고려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가노동자를 우선 고려해야 합니다. 사람이 고용되어 받을 임금은 자가노동으로 벌 수 있는 임금에 의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모든 고용주는 부자이고 이들이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임금을 상당히 올릴 수 있다고 전제하십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대다수 고용주는 노동자처럼 경쟁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도산의 위기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고용주는, 다른 고용주가 보조를 맞추어 준다면 모를까, 임금을 올려 주고 싶어도 올릴 수 없습니다.(p95-96)

 

정의가 실현된다면 기술 수준이 매우 낮은 사회에서도 모든 건강한 인간은 자신의 생계를 꾸려갈 수 있습니다. 노동절약적 수단이 있는 우리 시대에는 누구나 그보다 훨씬 더 쉽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회정의가 실현된 사회라면, 특별한 종교적 동기나 불가피한 불운이 없는 한, 가난은 불명예이며 무기력과 나태의 결과일 뿐입니다.(p99)

 

부자는 아첨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부자는 사악한 충동을 쉽게 만족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런 충동을 자극하는 각종 수단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부자는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고 늘 조심해야 하고, 친절한 행위와 다정한 말 뒤에 숨어 있는 저의를 자주 의심해야 합니다. 부자에게는 조금이라도 관대하게 대하면 염치없이 구걸하는 거지와 계략으로 재산을 긁어내려는 사기꾼이 달려듭니다. 가족도 부자를 사랑하지 않고, 재산 상속의 기대에 부풀어 그가 죽기를 바랍니다. 빈곤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물질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의 높은 품격을 억누르고 왜곡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정당하지 않은 부를 소유하는 것 역시 인간의 고귀한 품성을 억누르고 왜곡합니다.(p100)

 

저희가 모든 사람의 평등한 자연권을 회복시키려는 것은 특정 계층이 아니라 모든 계층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불의는 누구에게도 이익이 안 되며 정의는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신앙을 통해 이해하고 사실을 통해 인지하기 때문입니다.(p102)

 

저희는 평등을 빌미로 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을 침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p102)

 

창조주의 경제법칙이 지닌 아름다운 효과로 인해, 개인이 정직하게 부를 취득하면 세상의 부도 동시에 증가한다고 생각합니다.(p102)

 

토지사유제를 옹호함으로써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인권, 즉 인생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부정하면 반드시 다음의 둘 둥 하나로 귀결됩니다. 하나는 악마야 꼴찌를 잡아가라는 식으로 평등한 생명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p103)

 

교황님은 인생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평등권은 부정하시지만 인간의 생존권은 인정하시기 때문에, 노동자는 취업권만이 아니라 고용주로부터 일정 수준의 임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권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고용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으며 고용주가 동의하지 않는 높은 임금을 요구하거나 압박할 권리 역시 없습니다. 고용주가 노동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억지로 일을 시키거나 노동자가 동의하지 않는 임금을 주면서 일하라고 강요할 도덕적 근거가 없는 것처럼, 노동자도 고용주에 대해서 이렇게 요구할 도덕적 근거가 없습니다. 노동자의 자연권을 부정하는 원천적인 잘못 때문에 이런저런 억지 정당화가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생존권이라는 지상 명령에서 근거를 찾습니다. 그 자체로는 절도나 신성모도이나 심지어 살인에 해당하는 행위도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허용된다는 것입니다.(p103)

 

사람이 가진 자연권은 다른 사람에게 고용이나 임금을 요구할 권리가 아니라 자가노동을 할 권리입니다. 즉 창조주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토지라는 풍성한 원천에 자신의 노동을 투입할 권리입니다. 토지단일세의 효과처럼 이 원천이 개방되면 정상적인 노동 수요는 노동 공급과 보조를 맞추게 됩니다. 노동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은 자유로운 거래를 통해 서로 이익을 얻게 되며, 노사 분쟁을 일으키는 모든 원인이 사라지게 됩니다. 토지라는 원천이 개방되면 모두가 자유로이 자가노동을 할 수 있어 노동 기회는 더 이상 선심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가노동으로 벌 수 있는 것보다 적게 받고 남을 위해 일할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임금은 필연적으로 완전한 수준으로 상승하게 되며,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는 상호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만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p104-105)

 

끝 모를 불만족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 사실로 인해 인간은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존재가 되고 또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족을 모른다고 탓해서는 안 됩니다. 불만족이야 말로 모든 발전의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성 베드로 성당에 돔을 올린 것도, 칙칙한 캔버스 위에 마돈나의 천사 같은 얼굴이 빛나게 한 것도 불만족 덕입니다. 천체의 무게를 측정하고 그 성분을 분석한 것도, 창조적 지성이 발휘되어 경의로운 걸작이 줄을 이어 등장한 것도 불만족 덕입니다. 대양 여객선으로 대서양을 좁힌 것도, 전기를 이용하여 머나먼 곳에 소식을 전한 것도 불만족 덕입니다. 현대 문명의 업적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미래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도 불만족 덕입니다. 인간의 수준을 낮춰 동물로 만들지 않는 한 불만족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p106)

 

자선은 정말 고상하고 아름답고 감사한 것이며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 일입니다. 그러나 자선은 정의의 기총 위에 행해져야 합니다. 자선이 정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노동자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은 노동이 착취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착취를 정당화하면서 자선을 권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태평스러운 대책입니다. 자선이 정의를 대신하도록 권장하시는 것은 전임 교황님들이 이단으로 단죄하신 것, 즉 복음보다 법이 앞선다든지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도덕적 의무를 면제한다는지 하는 주장과 본질적으로 유사합니다.

불의가 존재하는 곳에서 자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자선은 불의로 인한 영향을 부분적으로 완화시켜 줄 뿐입니다. 자선만으로는 치유할 수 없습니다. 또 자선이 할 수 있는 것조차도 부작용이 있습니다. 근본적이고 일차적인 덕성이 결여된 차선책 내지 부차적인 덕성은 부작용을 낳기 마련입니다. 침착도 덕성이고 근면도 덕성입니다. 그러나 침착하고 근면한 도둑은 더 위험합니다. 인내도 덕성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참으면 잘못을 용인하는 결과가 됩니다. 지식을 추구하고 지력을 높이는 노력은 덕행입니다. 그러나 악한 자가 지적 능력을 갖추게 되면 악을 행하는 능력도 커집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악마는 늘 영리합니다.

정의를 저버리고 부인하는 사이비 자선은 부작용도 낳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부금 수령자의 기를 꺾고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합니다.(p107-108)

 

부자는 기부금을 내면서 인간에 대한 의무를 자기 몫 이상으로 이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의 칭찬을 받을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하느님의 선행인 것을 마치 자신의 선행인 듯 착각합니다.(p108)

 

교황님,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권리를 부정하면서 하느님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자선은 현재 노동이 처해 있는 문제를 전혀 해결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하더라도, 남을 위하여 불 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토지사유제가 있는 한 빈곤은 계속될 것입니다.

현대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진정으로 자신의 재산을 희사하려는 부자가 있다고 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필요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줍니까? 처지가 어려운 몇 사람을 도울 수는 있겠지만 노동자 전체의 상황을 개선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 오히려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짓습니까? 교회의 그림자에 빈곤이 만연하고 그로 인한 범죄가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학교를 짓습니까? 토지사유제의 불평등을 직시하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면, 단순 노동자에게 교육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교육이 확산되면 임금에 미치는 교육의 효과는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 대학을 많이 가면 많이 갈수록 대학을 졸업했는지 여부가 임금에 미치는 영향력은 줄어든다.

병원을 짓습니까? 지금도 일자리를 찾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생명을 구하고 수명을 늘리면 압박이 가중될 뿐이라고 노동자들이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모범 임대주택을 짓습니까? 집세를 싸게 하지 않는 한 그가 도우려는 대상 계층을 더 몰아붙일 뿐입니다. 집세를 낮추면 사람이 몰리고 일자리 경쟁이 심해져 결국 임금을 더 떨어뜨리게 될 것입니다.

실험실과 과학학교와 물리실험용 작업실을 설치합니까? 토지사유제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발명과 발견을 자극하면 노동을 맷돌에 넣고 돌리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 노동을 맷돌에 넣고 돌리는 결과.. .. 쩐다.

임금이 낮은 지역에서 높은 지역으로 노동자를 이주시킵니까? 처음에는 이주를 돕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곧 등을 돌려 이주 중단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주자들이 자신의 임금을 낮춘다는 이유를 들며 말입니다.

자신이 소유하는 토지를 내놓거나 지대를 받지 않거나 지대를 시장가격보다 깎아줍니까? 새로운 토지소유자 또는 토지소유자에 준하는 계층을 만들 뿐입니다. 몇몇 사람은 부유해지겠지만 노동자의 전반적인 상태를 개선하는 데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고전시대에는 공공정신이 충만하여 거액의 사재로 도시를 개선한 시민들이 있었는데 이런 사람이 되기로 결심합니까? 그리고 정말로 도시가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좁고 굽은 길을 넓고 똑바른 길로 바꾸고, 공원을 짓고 분수를 세우고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철도를 부설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도시를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단장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겠습니까? 분명히 하느님의 하사물이 가로챈 자들이 그 이익을 차지하지 않겠습니까? 토지가치가 상승할 것이고 개발의 영향으로 집세도 올라 토지소유자의 배를 불릴 것입니다. 이런 계획을 발표하기만 해도 투기가 일어나 토지가치는 엄청나게 올라갈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부자가 어떻게 노동자의 상태를 개선할 수 있겠습니까?

부자가 인간의 생래적 권리를 박탈하는 근본적인 잘못을 철폐하는 데 힘을 쓰지 않는 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정의를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느님의 정의는 비웃을 것입니다.(p109-111)

-> .........................

 

회의주의자였던 로마 지도자들은 온갖 신에 대해 너그러웠고 저급한 미신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했었으나 평등권에 기반을 둔 이 종교에 대해서만은 예민하게 대처했습니다. 노예와 빈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킨 이 종교, 십자가에 못박힌 목수를 중심에 둔 이 종교,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평등한 아버지이시고 모든 인간은 평등한 형제임을 가르치는 이 종교, 정의의 지배가 빨리 도래하기를 소원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는 이 종교를 로마 지도자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워하였습니다.(p114)

 

부록 1 헨리 조지의 해결책에 대한 의문과 해명

 

현행 세제가 오히려 사유재산제에 어긋난다. 소득세는 각 개인의 노력과 기여에 의해 발생한 소득인지, 아니면 그와 무관한 불로소득인지를 따지지 않고 모두 과세 대상으로 삼는다. 부가가치세도 생산적 노력에 의해 증가한 가치에 매기는 세금이다. 반면 지대세는 소유자의 노력과 무관하게 발생하는 토지가치에 과세하므로 진정으로 사유재산제에 충실한 세제다.(p127)

 

부록2 헨리 조지와 사회주의

 

토지개혁가 헨리 조지와 사회주의의 비조 마르크스는 둘 다 빈곤의 원인을 찾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라는 점, 그리고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사회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본 점에서는 공통된다. 바로 이런 공통점으로 인해 그들은 서로에게 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빈곤의 원인과 그 해결책에 대해서는 견해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양자는 본질적으로 융합할 수가 없었다. 헨리 조지는 사회가 진보하는데도 불구하고 빈곤이 사라지지 않거나 더 심해지는 근본원인이 토지의 사유에 있다고 진단하고 그 해결책으로서 토지 지대의 환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빈곤의 근본원인이 자본의 사유에 있다고 규정하면서 자본의 사회화를 주장하였다.(p130)

 

대다수 주민이 믿을 것이라고는 자기 몸 하나밖에 없는 무력한 노동자로 전락해 버린 암담한 사회라면 사회주의 쪽의 사회관이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토지만 개방되면 노동자도 어렵지 않게 자영업을 시작할 수 있어 남에게 일자리를 구걸할 필요가 없는 사회라면 헨리 조지의 말이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따라서 두 사람의 견해차에는 당시 경제 상황의 차이가 작용했을 것이다.

유럽 대륙은 오래전부터 토지가 독과점되어 노동자가 토지를 쉽게 취득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 이런 희박한 가능성을 가지고 사회개혁안을 마련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반면 헨리 조지가 살았던 미국에서는 토지가 상당한 정도로 개방 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이론자였던 엥겔스도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의 서문에서, 1885년까지 미국에는 서부 개척지의 값싼 토지가 있어 유럽식의 무산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거의 일치된 견해라고 하였다. 이런 사회 환경에서 자란 헨리 조지는 토지만 개방되면 노동자도 충분히 잘살 수 있고 착취도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p140-141)

 

두 사람이 살았던 나라의 국민 일반이 가진 정부관에도 차이가 있었다. 마르크스가 태어난 독일 등 유럽 대륙에서는 단체주의 전통이 강하여 정부가 공동체의 관리 기구 내지 지도기구 역할을 하는 것을 국민들이 당연시했다. 반면 헨리 조지가 태어나 살았던 미국은 개인주의 전통이 강해 국민들은 정부가 커지는 데 대해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정부가 발휘했던 행정능력의 차이도 양자의 견해차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p141)

 

헨리 조지는 맨손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미국의 서부개척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토지만 있으면 자립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평생 자신의 손으로 가족의 생활비를 벌지 못한 채 앵겔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또 병약했기 때문에 맨손으로 자립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차이가 사회 현실을 인식하는 데에도 작용하였을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개인의 생계를 국가가 책임져 주는 사회를 기대하게 되었고, 헨리 조지는 자립을 원칙으로 하는 사회를 기대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p144)

 

헨리 조지는 지대를 환수하면 다음과 같은 효과를 통해 빈곤이 해소된다고 하였다.

첫째로, 지대환수에 따라 다른 세금이 감면되면서 나타나는 효과이다.(p148)

둘째로, 지대가 정상화됨으로써 임금을 높이는 효과이다.(p148)

헨리 조지의 임금결정이론은 임금은 생산의 한계, 즉 지대를 지불할 필요 없이 개방된 자연의 최고생산점에서 노동이 얻을 수 있는 생산물에 의존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자가노동을 하여 벌 수 있는 것보다 더 적게 받고는 고용주를 위해 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지대를 지불할 필요가 없는 한계토지의 생산이 사회의 최저임금이 된다는 것이다.(p149-150)

 

지대환수는 직접적으로는 창업에 필요한 토지의 공급을 늘려 주고 토지취득비용을 줄여 준다. 또 간접적으로는 좋은 경제 여건을 조성하여 창업 실패의 위험을 줄여 준다.(p152)

 

두근 두근 심장을 뛰게하는 글들이다.

비유 대박.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 살아야지. .. 독하게 살자. 젊은이.

 

2013.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