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스토트의 책.
1980년에 쓰여졌다.
제1장 온전한 인격
첫 번째 주제로 우리의 ‘인격적 통합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통합성(integrity)이란 무엇인가? 내가 제안하는 통합성이란 통합된 그리스도인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다. 통합된 그리스도인이란 말과 됨됨이가 이분화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통합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뜻이며, 삶의 여러 부분이 단일한 전체로 연합됨을 말한다.(p6)
사회적 통합은, 상이한 인종이나 부족 또는 계급이 어떤 국가 또는 민족에 대한 충성심을 공유함으로써 통일되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생활하는 인간 공동체를 말한다.
...
개인적 통합이란, 인격의 상이한 부분들이 하나의 충성심으로 연합되어 있으며 또한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를 묘사할 때 쓰는 말이다.(p6)
1. 예수 그리스도, 우리 지성의 주
사고의 성숙을 추구해야만 하는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 때문이다.
1) 지성의 적절한 활용은 우리의 창조주를 영화롭게 한다
우리의 창조주는 합리적인 하나님이며, 우리를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합리적인 인간으로 만드셨다. 또 우리에게 그것을 이해시킬 목적으로 자연과 성경을 통해 합리적인 계시를 주셨다.(p10-11)
2) 지성의 적절한 활용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의 풍요롭게 한다.
믿음의 경우, 우리는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신앙을 가질 수 없다. 경배의 경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경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종해야 할 계명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할 수가 없다. 신뢰할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가 없다. 증거해야 할 좋은 소식이 없다면 우리는 증거할 수가 없다. 그런데 약속, 명령 그리고 좋은 소식의 계시 모두가 성경 안에 있다. 성경과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없다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가능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다운 온전한 생활이란, 그분이 신적 주도권을 갖고 하신 말씀에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p12)
성경에 따르면 신앙이란 합리적인 신뢰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그에 대한 합리적인 계시에 기초한 신뢰이다. 이 신뢰는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신뢰할 만하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신뢰할 만한 것을 신뢰하는 것은 언제나 합리적이다. 게다가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이유는 그 분의 성품과 약속 때문이다.(p14)
3) 지성의 적절한 활용은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의 증거를 강화한다
2. 예수 그리스도, 우리 감정의 주
전적부패란 모든 사람이 나쁠 대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선해야 할 만큼 선한 자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요점은, 타락이 우리에게 전체적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부분, 즉 우리의 지성, 우리의 감정, 우리의 양심, 우리의 성,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끼쳤다. 인간성의 모든 부분이 타락으로 인해 비뚤어지고 왜곡되어버렸다. 우리의 감정은 무엇이 선한지에 대하여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길잡이가 되었다. 우리의 지성과 감정은 신뢰할 수 없다. 우리 혼자 힘으로는 올바르게 사고할 수 없다. 우리 혼자 힘으로는 올바르게 느낄 수도 없다. ‘내 생각은 분명 맞다’ 또는 ‘내 느낌은 분명 옳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내가 사고하고 느끼는 것은, 무엇이 선하고 올바른지를 분별하는 데 매우 주관적이고 위험스러우며 신뢰할 수 없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성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 아래 종속되어야만 하며, 우리의 감정 또한 그리스도의 주 되심 아래 종속되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지성을 통제하셔야만 하며, 또한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셔야만 한다.(p20-21)
3. 예수 그리스도, 우리 의지의 주
1) 두 가지 의지가 있다는 사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지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동시에 사람의 아들인 예수의 의지이다.(p23)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인간의 의지의 관계는 반역도 아니고 흡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복종, 그것도 자발적인 복종이다. 예수님의 아버지를 거스려 자신의 의지를 행사하지도 않으셨고, 반면 자신의 의지를 거두어 들여 아버지께 흡수되기를 갈망하지도 않으셨다. 그 분은 자신의 의지를 계속 지닌 채 그것을 아버지께 복종시키셨다.(p24)
2) 나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켜야만 하는 이유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의 사랑은 온유하며 동정적이다. 그는 최선의 것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신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잠재력을 그를 섬기는 데 사용함으로써 인간으로서 완성되기를 원하신다. 그의 의지는 적극적이고 건설적이며 사랑에 찬 것이다. 그것이 우리 아버지의 의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반역하는 것은 몹시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p25-26)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 즉 우리의 인격적 성숙 – 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예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통치, 곧 주되심 아래 종속시키는 것이다.(p26)
제2장 직업과 소명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을 때, 그 부르심은 이러한 개념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다. 즉 한편으로는 은혜로운 잔치로 초대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 있는 소환이다. 내 생각에, 우리의 부르심 또는 우리의 소명에 대해 성경에서 말하는 바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무언가를 하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되라고 부르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해서, 성경에 따르면 소명이란 단순히 우리의 직업보다는 우리의 성격과 우리가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것에 더 많이 관련된다.(p28)
1. 우리의 기독교적 소명
1)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께로 부르신다
2)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에로 부르신다
3) 하나님은 우리를 교제에로 부르신다.
호젓한 곳에서 나 혼자 즐기는 내적 평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는 물론 서로와의 화해이기도 한 것이다
4)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함에로 부르신다.
여러분이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닮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라. 우리는 성품과 행위가 그리스도를 닮도록 부르심받는다.(p32)
5) 하나님은 우리를 증거에로 부르신다
6)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으로 부르신다
7)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으로 부르신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하여 그 분과의 교제와 그 분이 주시는 자유를 즐기고, 그를 닮아 가는 가운데 자라도록 그리스도께로 부르심을 받는다. 둘째,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서로서로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셋째, 우리는 세상을 섬기고 우리의 빛을 비추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2.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섬김
1)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섬기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2)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의 섬김은 일생의 직업을 포함한다.
진실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직업과 관련하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삶을 섬기는 일에 바쳐야 한다는 점이다.(p37)
직업을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를 부르신 섬김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p37)
3) 사역들은 매우 다양하다
3. 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일이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창조의 결과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p42)
1) 일은 일하는 자의 성취를 위함이다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과 그 분의 지배권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창조적 일에 대한 우리의 잠재력은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 형상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러므로 일은 우리 인간성의 불가결한 부분이다.(p43)
2) 일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이다
성경은 일을, 공동체를 위해 공동체에 의해 수행되는 공동체의 사업으로 본다. 일은 공동체를 위한 섬김이다. 일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섬김이다.(p44)
3)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의존한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에게 의존하신다. 루터는 이를 구체적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당신을 통하여 소의 젖을 짜기까지 하신다.” 소에는 많은 양의 젖이 있지만 누군가가 그것을 짜 내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p45)
일이란 육체적 일이건 정신적 일이건 또는 둘 다이건, 일하는 자에게는 성취를, 공동체에는 유익을, 하나님께는 영광을 가져오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에너지를 쏟는 것이다.(48)
제3장 사회적 책임
1. 하나님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1)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특별한 백성으로 택하셨을 때에도 다른 민족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셨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서 보는 바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면, 또한 구스인(이디오피아인)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p52)
2) 하나님은 칭의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2. 인간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그리스도인들은 헉슬리와는 다른 이유로, 즉 인간이 미래에 진화될 모습 때문이 아니라 창조에 의해 이미 되어진 모습 때문에 인간을 섬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아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이다.(p55)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육체와 영혼, 그리고 그의 공동체의 복지에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그들의 존엄성 때문이다.(p56)
3. 그리스도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나는 성경적 그리스도(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 혜택 받지 못한 자들, 세리와 죄인들, 굶주린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셨던 분)를 온전히 변론하고자 한다. 특히, 우리가 이른바 크리스마스 그리스도(성육신의 그리스도로서 실제로 우리 세상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육신과 피와 인간성을 취하신 그리스도)를 회복할 것을 호소한다.(p59)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씀은 추상적이므로 구체저긴 사랑의 행위로 구현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행위는 모호하여서, 복음의 선포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 필요하다(p60)
4. 구원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1) 우리는 구원자와 주님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2) 우리는 사람과 믿음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칭의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그 믿음은 홀로 설 수 없다. 선행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임이 증명된다.(p63)
5. 교회에 대한 좀더 나은 교리
사회가 부패해 갈 경우 사회를 탓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회를 그대로 방치하면 사회는 저절로 그렇게 된다. 문제는 ‘교회가 어디에 있느냐’에 있다. 사회가 부패해 간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는 교회에 대한 더 나은 교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 가운데 있고, 세상이란 교회가 봉사하고 증거하도록 부름받은 영역이라는 것이다.(p65)
1) 일반적 견지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 전도와 사회 활동 둘 다에 부름받았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 다른 전문 사역에 부름받았다
3) 긴급한 경우에 우리는 양자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책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이 되도록 부름받았다. 우리는 사회적 양심을 갖도록 부름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얻어맞고 누워 있는 이 가련한 사람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강도 만난 자에 대한 자신들의 수치스러운 무관심을 변명할 수 없다. 그와 같이 긴급한 경우에는, 자신의 전문 사역 분야가 아니더라도 그들은 봉사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와 반대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즉 사회 봉사 또는 의료에 부름받은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의사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증거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증인이자 종이다. 그리고 우리의 전공이 무엇이든지 간에 긴급한 경우에 기회가 올 때, 우리는 양자를 다 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p66)
4) 지역 교회는 이러한 다양한 사역이 함께 모이는 자리이다
제4장 세상과 구별되는 삶
유사함은 인간의 특성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기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다르게 되도록 부르시기 때문이다. 로마서 12:2에서는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명령한다. 즉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다르게 되라는 부르심이다.(p69-70)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은 나머지 인류와 구별되어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9p70)
1. 소금과 빛
1)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소금과 빛의 비유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비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분리시킨다. 이 두 공동체는 상호 대비되어 존립한다.
2) 그러나 이 두 비유는 그리스도인들이 비기독교적 세상과 비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소금이 광에만 쳐박혀 있다면 쓸모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사회에 버무려져야만 한다. 우리는 고상하고 작은 교회라는 광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비기독교적 사회에 침투해야만 한다.
소금의 효과는 소극적이다. 즉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다. 빛의 효과는 적극적이다. 즉 어두움을 비추는 것이다.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효과는 우리의 사회적 책임을 특히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회가 점점 타락해 가는 것을 막는 소금처럼 말이다. 반면에 어두움을 비추는 빛의 효과는 예수님의 빛을 퍼뜨리는 우리의 복음 전도라는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p73)
3)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침투해 들어갈 때는, 자신의 독특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2. 예수님은 우리를 좀더 큰 의로 부르신다
그리스도인의 의는 마음의 내적 의이다.(p77)
3. 예수님은 우리를 좀더 넓은 사랑으로 부르신다.
사마리아인이 일종의 문화적 장벽을 넘어선 봉사를 행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강조하셨던 점이다. 우리의 이웃은 인종적・종교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문화, 종족, 국가, 종교 또는 그 무엇과도 상관없이 그를 섬기도록 부름받는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계속해서 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에 대한 참된 해석이다.(p78)
사랑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신 대로 그리스도인 공동체 밖에도 사랑은 있다.(p79)
4. 예수님은 우리를 좀더 깊은 경건으로 부르신다
5. 예수님은 우리를 좀더 고상한 야망으로 부르신다
예수님은 결국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는 자신과 자신의 물질적 안락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이것은 부와 권력과 명성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설명해 준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그리고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하나님의 나라 및 그의 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p84)
주기도문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시작한다. 그러나 여러분도 알다시피, 물질적 필요는 이 다음에 나온다. 즉 물질적 필요를 간과해서도 안 되지만, 우리의 생각을 몰두해서 기도해야 할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 하나님의 이름과 뜻이어야 한다는 것이다.(p85)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타협을 포기하라. 마지못해 하는 마음에서 돌아서라.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에서 최우선에 놓으라 그를 여러분의 주로 삼으로. 그의 기준을 따르라. 그러면 여러분의 소금이 짠 맛을 낼 것이며, 여러분의 빛이 비췰 것이다. 그리고 비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마5:16) 것이다.(p88)
제5장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
1. 구약의 하나님은 선교의 하나님이시다
구역은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이며 모든 민족의 주이고 모든 인간의 하나님임을 계시한다.(p92)
2. 복음서의 그리스도는 선교의 그리스도이시다
3. 사도행전의 성령은 선교의 영이시다
4. 서신서의 교회는 선교적 교회이다
5. 요한계시록은 선교적 완성이다
역시 존스토트.
나의 안전과 안락....을 위해 타협하지 말고...
2013.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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