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국 목사님이 쓴 책. 사둔 신앙서적이 다 떨어?져서 알라딘 보관함을 돌아다니다가 눈에 들어온 책. 왠지 읽어야 할 것만 같아서 샀다.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초대하기 위한 책인 듯 하다. 나도 날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기에.
디자인이 예쁘다.
2013년에 발행된 책.
프롤로그
첫 번째 이야기 - 세 가지 문과 세 가지 장애물
기독교를 접하는 데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녀 기독교를 문화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인생의 위기 순간에 도움을 받거나 어떤 특별한 경험을 한 경우이고, 나머지 하나는 삶의 의미를 찾으며 탐구하는 경우이다.
나는 셋다 경험이 있는 것 같다. 요즘엔 주로 어떤 의미 있는 삶을 살까에 대한 고민을 하는 중인데, 어떨 땐 특별한 경험을 하기도 하고, 어떨 땐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져 하나님을 찾기도 한다. 습관적으로 QT할 때나 설교를 들을 때. 특별한 경험은 일상 속에서 소소한 기도 응답 받을 때. 소소하지만 일찍 일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나, 일 할 때 좀 더 나은 대안을 찾을 때나, 연락할 때나 등등.
두 번째 이야기 - 무신론과 유신론, 소통하시는 하나님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면 난 기독교인이 되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이 있는 것, 증명하지 못하잖아? 그런데 어떻게 신을 믿어?”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저는 되묻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신이 있다, 없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신념 체계 또는 세계관이나 전제점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런 신념 체계, 세계관, 전제점은 우리가 철저하게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 여부는 과학이나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전제점, 세계관의 문제라는 것이죠.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과학과 종교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며,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입니다. 과학이 눈에 보이고 검증할 수 있는 대상을 연구한다면,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 특히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과학과 종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존재이지요. (p36-37)
저는 많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무신론과 유신론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각 개인이 선택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시점엔가는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정말 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것이 물질과 시간과 우연에 의해서 몇십억 년이나 되는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죽으면 다시 물질로 돌아가는 그런 존재, 무로 돌아가는 존재인가? 나의 정신도, 도덕도, 미적 감각도 다 이렇게 생성된 것인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는 어떤 특별한 분에 의해서, 어떤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는가? 어떤 특별한 원리에 의해서 내가 지음을 받았는가?” 이것은 전제의 문제이며 선택의 문제입니다. (p37-38)
→ 나는 왜 유신론을 선택했나? 신의 존재가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하기에는 이상한 일들, 우연한 일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세 번째 이야기 - 진정한 행복의 두 가지 조건
사람들은 명예를 추구하지만 명예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난 정치인도, 연예인도 아닌데 내가 무슨 명예를 추구하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명예란 자기 이름값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아, 그 사람은 필요한 존재요, 가치 있는 존재야”라는 평가를 받을 때 기쁩니다. 이것을 명예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평가를 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이런 평가를 받으면 모두 행복해 합니다.
그런데 명예를 얻으면 참된 행복에 이르게 될까요? 약간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사람의 평가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늘 진심을 알아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거짓이 화려하게 포장되어 오히려 박수를 받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실 명예라는 것도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기에는 부족합니다.
세 번째로 권력이 있습니다. 이 역시 ‘나는 정치가가 아니라서 권력이 필요 없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권력이란 다른 사람에게 조종되지 않는 정도의 힘을 뜻합니다. 회사에 들어가면, 대다수의 조직의 맨 아래에 머물러 있길 원하지 않고 계속 승급하기를 원합니다. 통제받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시키는 일만 하지 않고,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의 힘은 있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p58)
→ 명예, 권력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 같다. 다른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이고 싶고,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이고 싶은 욕심.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시에는 따르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고. 이게 참 무서운거구나 싶다. 예전엔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이런 욕심이 커지는건가. 나도 모르는 틈에 내 안에 들어와 있네.
제가 관찰한 행복의 진정한 조건 첫 번째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때 행복해집니다. 연애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복한가요?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착각’(!)해서 그렇습니다. 짧은 시간이라 해도 그 착각이 참 아름답기는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무조건 사랑한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원히 뜨거울 것 같았던 이성간의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시들해집니다. (p61)
행복의 두 번째 조건은 삶의 의미, 삶의 목적입니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사랑만으로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행복의 또 다른 축은 삶의 의미와 목적입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찾으면 행복해집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살아야겠구나. 이렇게 살 때 내 삶이 의미있고 내 존재가 가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사람들은 행복해집니다. (p63)
→ 20대에겐 진로와 결혼. 행복해지기 위해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나를 무조건 사랑해줄 사람을 찾아서, 의미있는 일을 하며 살기위해서 고민하고 고민하고 있나보다.
네 번째 이야기 -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오늘날 우리의 세상
‘다스린다’는 말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스리는 것을 뜻합니다. 즉, 피조물 본래의 가치가 최고로 나타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고 발전시켜 최선이 될 수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p80-81)
절망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서서히 자신을 포기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자신을 포기할 때 나타나는 첫 번째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게으름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대강 살아도 되는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시간을 잘 쓸 필요가 뭐 있어. 오늘 저녁에는 집에 가서 치킨이나 시켜 먹으면서 TV나 보지 뭐.” “아침에 일찍 일어날 이유가 뭐가 있어? 그렇게 일어나고 싶지도 않고, 하고 싶은 일도 없는데, 뭐.” 그렇게 매일 매일을 적당히 살아갑니다.
이런 마음은 일종의 포기이고, 이런 모습이 좀 심해지면 자기를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증오하고 괴롭힙니다. 그런 모습이, 현대인에게는 다양한 중독으로 나타납니다. 중독의 특성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현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절망스러운 상황과 그 속에 있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뭔가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 중독입니다. 게임, 인터넷, 술, 도박, 쇼핑, 포르노, 성, 일, 관계 등 현대에는 다양한 중독이 있습니다. (p85)
→ 깨어진 관계.
다섯 번째 이야기 - 세상이 깨진 이유와 죄의 본질
인간의 지적 능력, 예술적 창의력, 박애적 사랑, 사회적 협력 등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즉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 자리에 계실 때, 제대로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지 종교적 영역이라는 인생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 인생의 핵심 부분입니다. 이 관계가 깨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사람들과 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 있는 근원적인 힘과 지혜를 잃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인생은 추락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p100-101)
죄란 우리 인간 세상과 사회를 가능하게 하신,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무시하며 살아가는데, 어떻게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깨끗하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문제가 없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는 우리의 현재 삶에 심각한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대충 만들어놓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서 만들어놓으셨습니다. 일종의 원칙이 있죠. 모든 행성이 일정한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만물이 그러한 원칙에 따라 존재하고, 동물들도 각각의 원칙을 지키며 존재합니다. 그러나 인격적 존재인 인간의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함으로 당연히 그분이 세운 원칙도 같이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주신 원칙을 무시하면, 누가 가장 큰 피해를 볼까요? 하나님일까요? 아닙니다. 당연히 그 원칙을 무시한 사람이 피해를 봅니다. 죄란 우리에게 심각한 손해를 끼치고 마지막에는 결국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듭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p104-105)
인간관계를 맺는 법, 특히 사랑하는 법, 돈을 벌고 쓰는 법, 불의를 다루는 방법,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법,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과 자원을 사용하는 법 등 인생을 살 때 필요한 여러 법칙이 있는데, 이 원리를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이 원리들을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한 인간들은 이런 원리들도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p106)
여섯 번째 이야기 - 하나님의 해결책과 나의 응답
먼저 예수님이 특별한 점은, 그분이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인간과 다른 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이 한계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 인간이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이지요. 인간의 눈높이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p124)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리 스스로가 중심이 되었던 것의 대가를, 우리 자신이 치러야 합니다. 아니면, 누군가가 대신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의 문제를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있을 뿐 아니라, 이 반역에 대한 대가도 스스로 지불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진 우리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은,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모든 죄과와 책임을 다 지기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러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이것이 사복음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여러분과 저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시기 위해서입니다. (p129)
그 사랑 때문에 나 자신의 가치를 다시 발견합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아도 됩니다. 절대적인 존재가 나를 사랑하시고 가치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나의 배경, 학력, 외모, 능력, 연봉, 직장, 그 무엇으로도 평가받지 않습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최고의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평가는 내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가치를, 그 진정한 가치를 절대자 앞에서 발견하는 것이죠. 또 하나님이 우리의 사랑이 우리 내면에 들어와 깊어질수록 우리는 주변 사람들도 넉넉하게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그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p133-134)
일곱 번째 이야기 - 계속 되는 우리의 여행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있는가?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해서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가?’ 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이런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떠났기에 이 깨진 세상에서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의 잘못이든, 이웃의 잘못이든,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람들과 나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저지른 과오든,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우리가 얼마나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고통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귀한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고통을 통해 나와 세상의 한계를 깨닫게 하시고, 여러분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p155-156)
→ 고통에 이런 의미가 있긴하구나. 세상이 얼마나 망가졌는가를 보여주는 것. 아플 때 종종 가끔 종종 이런 생각을 할...까?;ㅎㅎ;;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내가 믿고 싶은 것, 나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도라고 부를 수 있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미 하신 일, 그리고 앞으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는 성경에 나타난 진리를 믿는 것이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전인격적인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하신 일,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완전한 죄 사함과 자녀 삼아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시고,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의 백성들을 통해서 일하고 계시는 것을 믿는 것이며, 마지막 날에 오셔서 만물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p166-167)
에필로그
201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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