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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국기독교의 역사 정리


한국기독교의 역사.pdf



한국기독교의 역사 정리



이 자료는 단행본 ‘한국기독교의 역사’ 1~3권을 정리한 내용에 2017.3.21.~5.23.까지 진행 되었던 역사강좌 ‘한국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길을 찾다’ 의 내용을 추가한 것입니다. 한국기독교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자료를 공유합니다.




제1장 기독교의 동양 전래


1. 도마와 시리아교회의 동양 선교


1) 시리아와 인도선교


(1) 기독교의 동양 선교

① 고대 동서 교역로를 통해 이루어짐 (팔레스틴 - 시리아 - 바벨로니아 - 페르시아 - 중앙아시아 - 인도 - 중국)


(2) 최초의 시리아 선교

① 예수 승천 후 사도 도마가 다대오를 에뎃사에 보내어 아그바루스를 치료하고 세례를 주었으며 그곳에서 복음을 전함. 

② 이후 다대오는 아르메니아를 거쳐 페르시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함. (유세비우스(4세기 가이사랴 주교)의 기록)


(3) 도마의 인도 선교

① 도마행전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전도할 때, 도마는 동쪽으로 진출하여 인도에서 전도.

② 도마행전은 동방의 영지주의적 성격을 띄어 서방 기독교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함

③ 16세기 로마 가톨릭 선교사, 인도 서남부 해안 말라바르 (케랄라) 지역에서 사도 도마에 의해 복음을 전달받았다고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공동체 발견

④ 인도 동남부 밀라포르(첸나이) 지역에서 도마의 순교와 관련된 것으로 알려진 유적 발견

⑤ 4~5세기 활동했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 제롬, 요한 크리소스톰, 세르빌의 이시도르 등 서방 교부들의 문헌에서 도마가 일관되게 ‘인도의 사도’로 언급됨


2) 중국선교

(1) 초기

① 시리아교회 선교단 (단장: 알로펜) 당태종 전광 9년 (635) 중국에 도착.

② 당 태종 재상 방현령을 보내 환영

③ 수도 장안에서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토록 배려함

④ 조정이 인정하는 종교의 하나로 선포

⑤ 승려를 두어 포교하도록 함

⑥ 장안 의령방에 대진사라는 사원이 건축됨


(2) 교회의 한자 명칭

① 파사교: 페르시아에서 왔다고 해서 페르시아의 한자음역인 파사(波斯)를 붙인 이름

② 대진교: 로마에서 왔다고 해서 로마의 한자음역인 대진(大秦)을 붙인 이름

③ 경교(景敎): 광명정대한 종교라는 뜻


(3) 당 고종

① 기독교를 진종(眞宗)이라고 부름

② 경사(景寺)를 설립

③ 알로펜을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라 부를 정도로 후대함


(4) 전개

① ‘삼이사(三夷寺)’의 하나로 국가의 보호를 받음

② 중국의 고위관리 중 신자가 나옴: 고력사, 곽자의, 이사

③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 건립: 781년 장안 대진사 경내, 당 태종부터 덕종까지 150여 년간 경교의 역사를 담고 있음


(5) 경교가 중국에서 유행한 이유

① 중국의 문화적 전통에 맞추어 선교하려는 노력

② 교회의 명칭을 ‘경교’, 성령을 ‘현풍(玄風)’, 기도를 ‘수공덕(修功德)’, 교당을 ‘사(寺)’, 수도사를 ‘승(僧)’, 주교를 ‘대덕(大德)’, 사도를 ‘승가(僧伽)’, 죄악을 ‘악업(惡業)’, 삼위를 ‘삼신(三身)’ 또는 ‘삼위(三威)’, 천부를 ‘천존(天尊)’ 등으로 번역함

③ 조상에 대한 제사 허용

④ 일부다처제를 묵인

⑤ 결과적으로 페르시아의 네스토리우스파와는 다른 토착적 중국종교로 변모함


(6) 쇠퇴 1 - 회창멸법

① 무종(845)이 도교의 교세회복을 위해 실시

② 원래 불교를 탄압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모든 외래 종료로 확장됨

③ 대진사의 재산이 국가로 귀속되고 경교승들도 환속됨


(7) 쇠퇴 2 - 황소의 난

① 875년 황소의 난 때 외로종교에 거부감을 갖고 있던 반란군이 장안의 경교신자들을 살해

② 신자들은 만주나 몽골 등 변방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계속함



2. 중세기 서방 교회의 동양 선교


1) 원대의 야리가온


(1) 개요: 박해를 피해 변방에 은둔해 있던 경교신자들과 돌궐 계통의 네스토리우스파 신도들이 중국에 들어와 ‘야리가온(也里可溫)’이라 불리며 원 황실의 보호를 받게 됨


(2) 유물

① 십자문양을 새긴 비석: 복건성 천주, 북경, 신강, 몽골 중동부

② 구리십자가: 요녕성 안산, 강소성 양주, 절강성 항주

③ 대부분 1200~1360년대에 제작됨


(3) 한계

① 토착화를 위한 노력이 부족하였음

② 지배층이 믿는 외래 종교로 인식됨


2) 경교의 한국 전래


(1) 경교의 한국 전래 주장의 배경

① 경교가 유행한 당대에 신라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서 당과 밀접히 교류함

② ‘삼국사기’에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지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이는 보석, 의복, 물품 명칭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신라와 아랍권의 무역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됨


(2) 고든(E.A.Gordon)의 주장

① 경주 불국사 석굴암의 신장,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상과 통일신라 왕릉의 십이지상, 무인사 등에 경교적 요소가 나타난다고 주장


(3) 김양선의 주장 

① 십자가 형태의 석제물: 1956년 불국사에서 발견

② 동제 십자가: 전남 해남 대흥사 소장

③ 관음상: 마리아상과 유사


3) 가톨릭교회의 동양 선교


(1) 배경

① 동서방교회의 대분열 (The Great Schism, 1054) 이후: 가톨릭교회 안에서 이방인선교에 대한 자각운동이 일어남

② 십자군운동 (1095): 동방에 대한 관심과 선교적 관심이 커짐


(2) 프란치스코회 (Franciscans)

① 1209년 창설

② 십자군운동을 지원하였고 점령지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함


(3) 카르피니 몽골 파견(1246)

① 1245년 리용에서 열린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황의 전권대사 자격으로 파견되어 몽골 정종 즉위식 참석

② ‘몽골의 역사’ 저술: 몽골에 퍼져 있던 야리가온의 존재를 알리면서 가톨릭 선교의 가능성 제시


(4) 루브루크와 크레모나 카라코룸 방문(1253)

① 징기스칸의 증손 사르탁이 소문과 달리 기독교인이 아님을 알고 실망

② 몽골의 야리가온 및 유럽에서 포로로 잡혀온 기독교인들의 실태 소개

③ 압록강 부근까지 여행하였으며 고려를 ‘카울레(Caulej)’로 표기하여 한국을 최초로 서양에 소개하였다고 알려짐


(5) 몬테 코르비노(1294)

① 원의 수도인 북경에서 성종의 지원을 받으며 선교활동 전개

② 1305년 현재 북경에 2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으며 6000여 명이 세례를 받음

③ 신약과 시편을 몽골어로 번역

④ 야리가온 신자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킴


(6) 중국교구 창설 (1307)

① 코르비노를 대주교로 임명

② 천주, 항주, 양주 등지에도 교회가 설립됨

③ 천주에는 독립교구가 창설됨


(7) 한계

① 몽골인을 주 대상으로 삼아 한인(漢人)에 대한 선교가 부진함

② 로마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도중에 많이 희생됨

③ 중국에서도 풍토병 등으로 고통을 겪음

④ 후임 대주교가 활동하지 못함 (니콜라스 - 여행 중 사망, 마리뇰리 - 정치적 혼란으로 3년만에 귀한, 토마소∙프라토∙카푸아 - 임지까지 도착 못함)


3.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의 동양 선교


1) 인도선교


(1) 예수회

①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 안에서 자각운동의 일환으로 조직된 선교단체

② 스페인 출신의 로욜라와 하비에르가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 (1534)

③ 목적: 가톨릭교회 개혁, 선교에 주력

④ 외방선교회로 인정 (1540)


(2) 성과

① 하비에르(1541): 인도 고아에 진출하여 8년 동안 활동하면서 약 10만 명에게 세례를 베푸는 성과를 거둠


2) 일본선교


(1) 배경

① 포르투갈 선원인 핀토의 권유를 받고 일본선교에 관심을 갖게 됨

② 알바레스 선장의 소개로 일본인 안차로 일행을 만나 그들을 고아의 신학교에 입학시킨 후 일본선교를 구체적으로 계획함


(2) 전개

① 가고시마 도착 (1549. 8.): 토레스 신부, 페르난데스 수사, 안지로

② 교토 진출: 2년 3개월 간 전도하며 1,500여 명의 개종자를 얻음

③ 기리시단 다이묘: 영주, 다이묘 (큐슈 지방의 오토모∙오무라∙아리마 가문, 교토 지방의 다카야마∙고니시∙이케다 가문 등)

④ 수적 증가: ‘기리시단 다이묘’의 개종은 가족과 성 주민의 개종으로 이어져 200,000명으로 교세가 확장됨 (1587) 

⑤ 소년사절단: 큐슈의 명문 오토모∙아리마∙오무라 가문이 구성한 소년사절단이 로마교황청에 파견되기도 함 

⑥ 상류층 개종 배경: 신앙적 동기 뿐 아니라 선교사를 통해 스페인∙포르투갈과 무역하고 서양의 신무기를 얻으려 함


(3) 탄압 (1587)

① 배경: 기리시단의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자 이를 경계함, 예수회에 이어 선교사를 파송한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의 적극적인 선교활동

② 전개: 사법으로 규정하고 금교령을 반포함

③ 도쿠가와 이에야쓰: 금교령 반포 (1612)

④ 입항 금지 및 외국인 선교사 추방 (1639)


(4) 숨은 기리시단

① 일본의 전통종교인 신도나 불교를 기독교와 혼합시킨 일종의 토착적 기독교 형성

②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얻고도 가톨릭교회로의 복귀를 거부함


3) 중국 선교


(1) 초기

① 카르네이로 중국주교로 임명됨 (1568)

② 발리냐니 40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마카오에 도착 (1573)

③ 루지에리와 릿치 중국 도착


(2) 전개

① 유럽식 성당 건축 (1584): 루지에리와 릿치 광동성 조경에 3층짜리 성당 건축

② 성교실록 간행 (1584): 루지에리

③ 산해여지전도 제작 (1584): 릿치가 제작한 세계지도

④ 문화적 접근을 통해 효과를 거둠

⑤ 루지에리는 민중계층, 릿치는 지배계층을 선교 대상으로 삼음

⑥ 루지에리 사망 (1607) 


(3) 릿치 중심의 중국선교 전개

① 사서 번역: 라틴어로 번역 후 중국인으로부터 ‘태서학자(泰西學者)’ 칭호 얻음

② 식자층 지지 확대: 남창에 6년간 머물며 ‘천주실의’, ‘교우론’, ‘서학기법’ 등 저술

③ 남경 관리의 지원으로 신종 알현 (1601) → 선무문 안의 사찰을 교회로 사용하도록 함

④ 학자들과 교류: 천문, 수학, 척학, 기독교에 대한 대화를 나눔

⑤ 세례: 이지조, 서광계, 풍응경 등 유명한 학자들에게 세례를 줌

⑥ 저술: 천주실의, 기하원본 저술 및 양의현람도 제작

⑦ 천주성모회 조직


(4) 결과

① 교인이 2,000여 명에 이름 (1610)

② 1630년대에 이르러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누스회 등에서도 선교사를 파송함

③ 청국 황실은 예수회 활동을 묵인하였고 예수회 신부들도 황실에 봉사함


(5) 전례논쟁

① 배경: 예수회는 중국의 유교문화를 존중하며 공자묘 참배나 조상에 대한 제사 허용

② 전개: 다른 선교단체의 비난

③ 결과: 교황이 예수회를 해산시킴 (1773)

④ 영향: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누스회 등은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면서 청국 정부와 갈등 → 100여 년간 박해 받음


제2장 천주교의 한국 전래


1. 일본과 중국을 통한 천주교 접촉


1) 임진왜란기 천주교 유입설


(1) 고니시 유키나가

① 기리시단 다이묘 중 하나였음

② 웅천으로 후퇴할 무렵 본국의 예수회 신분들에게 종군사제를 보내달라는 서한을 띄움 (고니시 부대 장병의 사기진작을 위함)

③ 스페인 출신 세스페데스와 일본인 수사 한칸 레온 파송

④ 웅천의 일본군 진지에서 성사 집행 (1594)

⑤ 기리시단 다이묘인 아리마 하루노부의 요청으로 라구나 신부 등이 내한함 (1597)


(2) 의의

① 조선인 포로 중 약 7천명의 개종자가 있었음

② 그 중 복자위에까지 오른 순교자가 있음


2) 소현세자와 선교사의 교유


(1) 청의 유화정책

① 예수회 중심의 천주교회에 대해 유화정책을 펼침

② 마테오 릿치 이후 아담 샬과 베르비스트 등 학자 출신의 예수회 신부들이 천주교회를 이끔

③ 황실의 신임을 얻어 중국의 역법 개수작업에 착수함 (아담 샬은 흠천감 관리가 됨)


(2) 소현세자와 아담 샬

① 소현세자의 거처인 동화문 안 문연각과 아담 샬의 거처인 동문안 동천주당이 가까웠음


(3) 소현세자의 귀국 (1645)

① 아담 샬의 선물: 천문, 역산에 관한 서책과 천구의 등 과학기물과 ‘성교정도’ 등 천주교 서적 몇 권과 구세주상 한 장을 증정

② 소현세자: 천주교 서적과 구세주상은 사양하고 대신 선교사 한 명을 동행시켜 달라고 요청

③ 중국인 궁녀 감독관으로 선발된 환관 5명 중 천주교인을 포함시킴

④ 소현세자의 죽음: 귀국한 지 70여 일만에 돌연 사망하였고 중국인 환관과 궁녀는 본국으로 돌아감


2. 서학의 유입과 신앙공동체의 형성


1) 서학의 유입


(1) 부연사행

① 외교사절

② 선교사와의 만남: 대화를 나누고 서학서적과 서양기물을 선물로 받아옴 (정두원, 이이명, 홍대용)

③ 학문적인 관심, 주된 관심은 천문과 역학 같은 서구의 과학지식


(2) 서학 연구

① 이익의 실용적 학문 연구

② 벽사파와 북학파로 이어짐


2) 신앙공동체의 형성


(1) 최초의 교리 실천

① 홍유한: 1770년 서학서적을 읽은 뒤 7일마다 하루씩 노동을 하지 않고 기도와 금욕생활을 실천함


(2) 교리연구회

① 권철신, 정약전이 주도

② 천주교 교리 연구를 목적으로 외딴 절에 모임

③ 10여 일 동안 교리를 연구하며 종교적 진리에 접근

④ 아침기도, 저녁기도, 주일에 노동 금지, 금육재 등 천주교에서 요구하는 계율을 지키기 시작함

⑤ 참여자: 김원성, 이총억, 권상학, 권철신, 정약용, 정약전, 이벽

⑥ 이벽의 이승훈, 북경에서 천주교 가르침 받음 (1784.1. 영세명 ‘베드로’)


3.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박해


1)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


(1) 천주교 신앙의 확대

① 이승훈, 양반계층과 중인계층에게 전교함

② 서울, 경기도 마재∙양근∙포천 지방, 충청도 내포∙예산 지방, 전라도 전주∙진산 지방에 천주교 신앙이 확산됨


(2) 신앙공동체 형태

①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어 준 인물을 ‘신부’, 교리를 가르쳐 준 인물을 ‘대부’라 부름

② 평의회 조직: 공동체의 제반업무 추진


(3) 사제단 구성

① 가성직제도 (1786): 로마교황청이나 북경 주교의 허락을 받지 않음

② 각종 성사를 집행함

③ 이 당시 천주교인은 1천여 명에 이름


(4) 독성죄 논란

① 유항검, 무자격자의 성사집행은 독성죄에 해당한다고 주장 (1787)

② 윤유일, 북경에서 북천주당의 로신부를 만나 조선의 신앙공동체 상황을 알림

③ 로신부, 사목교서를 써 줌 (내용: 신품성사를 받지 않았으므로 미사를 거행할 수 없고, 영세를 제외한 성사를 집전할 수 없다)

④ 프란치스코회 소속 구베아 주교, 조상제사를 금지 → 상당수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게 됨


2) 을사추조적발사건과 진산사건


(1) 을사추조적발사건 (1785 봄)

① 형조의 금리들이 명례방(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화상을 압수

② 형조판서 김화진, 김범우만 체포하고 나머지 양반계층 교인들은 훈방

③ 김범우는 유배된 후 1년만에 유배지에서 처형 (조선 천주교회 첫 순교자)


(2) 정미반회사건 (1787 겨울)

① 이승훈∙정약용∙강이원 등이 김석태의 집에서 서학을 공부한 사실이 폭로 됨

② 이승훈∙정약용의 친구인 이기경이 홍낙안에게 폭로

③ 홍낙안이 국앙에게 알려 성죄치토하도록 요청

④ 유하원∙이경명 등도 같은 취지의 상소를 올림

⑤ 정조, 북경으로부터 서학서적 수입 엄금


(3) 진산사건 (1791. 11.)

① 전라도 진산의 천주교인 윤지충(정약용의 외종)∙권상연이 체포되어 처형됨

② 윤지충, 조상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땅에 묻음

③ 멸륜패상∙무군무부의 난행을 범하였다는 죄목으로 참수됨

④ 결과: 북경 천주교회와의 연락 단절

⑤ 중인계층의 교인들이 천주교회를 지켜감


3)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


(1) 신부영입운동

① 구베아 주교(북경), 마카오에 있던 중국인 오 신부를 조선선교사로 임명 (1791) → 잠입 실패

② 구베아 주교, 주문모 신부를 조선선교사로 임명 → 잠입성공 (1794)

③ 신부 체포령 (1795. 6.) → 윤유일∙지황∙최인길 체포∙처형


(2) 성과

① 여성교인들의 증가가 두드러짐 (강완숙의 역할) → 양반계층 부녀자와 궁녀도 입교함

② 명도회 결성: 조선인 스스로 신앙훈련을 하도록 함. (회장: 정약종)

③ 교인 수 증가: 4천여 명 → 1만여 명


제3장 천주교회의 수난과 발전


1. 신유박해와 황사영백서사건


1) 신유박해


(1) 배경

①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으로 조선 천주교회 발전

② 천주교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정부는 탄압에 나섬

③ 남인시파(채제공: 천주교 묵인)에서 노론벽파로 주도권이 넘어감 → 남인시파의 제거 명분으로 천주교 박해


(2) 전개

① 천주교 배척 상소(1800): 노론벽파 뿐 아니라 남인벽파도 천주교 배척 상소 올림

② 천주교인 체포 (1800-1801)

③ 오가작통 실시 (1801. 1.)

④ 주문모 체포: 은언군, 은언군의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 모두 사약을 받음

⑤ 주문모 군문효수(軍門梟首)됨


(3) 결과

① 3백명 이상이 희생됨

② 천주교인이 아니었음에도 청남계 인물드리 함께 제거됨 → 노론세력의 정적제거에 이용되었음을 보여줌


2) 황사영백서사건


(1) 개요

① 황사영이 체포될 때 장문의 서한이 함께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이 문제됨 (1801. 9.)


(2) 황사영백서의 주요 내용

① 신유박해의 경위와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들의 행적

② 폐허가 된 조선 천주교회를 살리는 방도


(3) 황사영백서에 적힌 천주교회를 살리는 방도 세 가지

① 청국의 황제가 직접 조선국왕에게 서양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는 방법

② 청국의 황제와 친한 중국인 천주교 신자를 조선에 파견하여 평양과 안주 사이에 무안사를 두고 조선의 정치를 감호케 하며, 또 청국의 공주를 조선왕비로 삼아 천주교를 확산시키는 방법

③ 서양함대를 동원하여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강제로라도 천주교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법


(4) 결과

① 황사영 능지처참

② 정부, 천주교 탄압의 명분을 확보함

③ 1백여 명이 처형되고 4백여 명이 유배감


2. 조선대목구 창설과 기해박해∙병오박해


1) 조선대목구 창설과 파리외방전교회의 한국선교


(1) 신유박해 이후

① 교인들은 숨어 살거나 고향을 떠나야 했음

② 교우촌 형성: 신앙공동체 재건

③ 배교했던 교인들이 돌아오고 교인들의 순교에 감명 받아 입교하는 경우도 생김

④ 교회재건운동 전개: 권기인, 홍우송, 정하상, 이여진, 신태보 등


(2) 신부 파송 요청

① 1차: 권기인, 로마교황과 북경 주교 앞으로 신부파송 요청 편지 작성(1811) → 중국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파송하지 못함

② 2차: 정하상, 북경에 들어가 신부파송 요청 → 로마교황 레오 12세, 조선에 독립된 포교지를 설치하여 교황청에 직속시키고 포교사업은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함

③ 태국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출신 브뤼기에르 신부가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됨 (1831) → 파리외방전교회와 북경 천주교회의 갈등으로 입국하지 못한채 사망함 (1835. 10.)


(3) 조선대목구 설치 의의

① 진취적인 한국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된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신부영입운동의 결과

② 북경교회로부터 독립됨


2)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1) 천주교회의 재건

① 프랑스인 신부 3명이 들어와 활동 (모방∙샤스땅 신부, 앵베르 주교)

② 교인이 6천 명에서 9천 명으로 증가 (1838)

③ 배경: 노론시파인 김조순의 등장으로 천주교에 대한 대규모 박해가 없었음


(2) 기해박해

① 배경: 풍양조씨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순원왕후가 박해령(사학토치령 邪學討治令) 포고함 (1839)

② 전개: 프랑스 신부 3명을 포함해 50여 명이 참수되고 20여 명이 옥사함


(3) 병오박해

① 배경: 기해박해 이후 페레올,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 등이 교회재건에 나섬

② 전개: 김대건 등이 체포되어 처형됨 (1846)


(4)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의 특징

① 서울 경기 뿐 아니라 강원, 전라, 경상, 충청 등 한강 이남 전역에 대해 박해가 일어남 → 천주교인이 전국에 분포되어 있었음을 반증

② 양반∙중인 계층의 비중이 줄어든 반면 상민계층과 여성교인이 급증함



3. 병인박해와 조선후기 사회변화


1) 천주교회의 재건과 발전


(1) 배경

① 은언군의 손자가 옹립됨 (1844)

② 신유박해 때 사사된 은언군 내외와 며느리 신씨, 이승훈이 신원됨

③ 천주교에 대한 완화정책이 12년 동안 계속 됨


(2) 천주교회의 재건

① 1836년 이후 30년 동안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20명이 내한함

② 기해박해∙병오박해 직후 1만명 미만이던 교인이 2만 3천여 명으로 증가함 (1865)


(3) 신학교 설립 (1856)

① 충청도 배론에 다블뤼 신부가 원장, 뿌르띠에 신부가 교수가 되어 10여 명의 학생을 가르침


(4) 교리서 보급

① 한한불자전: 다블뤼 신부 편찬

② 조선 천주교회사: 조선인 순교자 자료

③ 성교요지: 초기 교인들의 신앙 요체를 보여줌

④ 주교요지: 정약종이 지은 교리집

⑤ 보급: 서울 두 곳의 목판 인쇄소를 통해 대량으로 인쇄됨

⑥ 의의: 한글의 대중화에 기여


2) 대원군의 집권과 서양선박들의 출현


(1) 국내 정세

①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 함 (1864)

② 신정왕후 조씨, 흥선군의 아들을 왕으로 삼음 (고종)


(2) 이양선의 출현

①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로드 암허스트호가 황해도 장산곶과 충청도 고대도에 나타남 (1832)

② 영국 군함 사마랑호가 제주도와 전라도 해안에 나타남 (1845)

③ 프랑스 함대 사빈느호∙끌레오빠뜨르호∙빅또리외즈호가 충청도 외연도에 나타남 (1846)

④ 프랑스 군함 비르지니호가 서해안 일대에 나타남 (1856)

⑤ 러시아 함대를 보내어 통상요구함 (1855)


(3) 대원군과 천주교

① 집권 이전 불우했던 시절에 교인들과 접촉하기도 함

② 그의 부인인 민부대부인은 천주교 교리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기도문을 외울 정도였음

③ 고종의 유모인 박씨는 ‘마르다’라는 세례명을 가진 독실한 교인


3) 병인박해


(1) 배경

① 신유박해 때 유학자 계층의 서학배척

② 기해박해 때 정치세력간 갈등

③ 서양제국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

④ 민중계층의 불만이 민란의 형태로 분출됨

⑤ 대원군은 대외적으로 쇄국정책, 대내적으로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위기를 벗어나려 함


(2) 전개

① 1866년부터 1873년까지 7년간 지속됨

② 전국적으로 순교한 교인이 8천명으로 추산됨


(3) 결과

① 병인양요(1866): 7척의 군함이 강화도를 점령함, 프랑스 신부 살해에 대한 응징


(4) 신미양요 (1871. 6.)

① 개요: 1866년의 제너럴 서면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미국의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4척의 군함이 강화도 점령

② 결과: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 재현


제4장 기독교의 수용


1. 중국을 통한 한국선교 시도


1) 귀츨라프의 내한


(1) 한국 최초의 성경 전달

① 영국함선 충청도 서천군 마량진 일대 탐사

② 선박을 조사하기 위해 승선한 마량진첨사 조대복과 비인현감 이승렬은 성경 한 권씩 증정받음


(2) 기독교의 동양 선교

① 영국인 케어리의 인도선교 (1793)

② 모리슨의 중국선교 (1807)

③ 미국인 저드슨의 미얀마 선교 (1812)

④ 스코틀랜드 출신 밀른의 마카오 선교 (1813)

⑤ 영국회중교회 메드허스트의 말래카 선교 (1817)


(3)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 귀츨라프

① 네덜란드선교회 소속으로 사이암 선교, 중국 선교에 나섬

② 영국 동인도회사로 부터 통역 겸 의사로 동승해달라는 요청을 받음

③ 귀츨라프는 전도문서, 선물, 한문성경을 가지고 군함 로드 암허스트호에 오름

④ 황해도 장산곶 부근에 도착해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고 서적과 물건을 줌 (1832. 7. 17.)

⑤ 한국관리, 중국황제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 (1832. 8.)


2) 윌리암슨의 한국선교 지원


(1) 중국 문호 개방

① 아편전쟁 이후 중국과 영국간 남경조약으로 상해∙영파∙복주∙하문∙광주 등이 개항됨 (1842)

② 미국과 망하조약 체결 (1844)

③ 프랑스와 황포조약 체결 (1844)

④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와 천진조약 체결 (1858) → 조계지 설정 (이후 9개국 28개처의 조계지 허용)

⑤ 서구열강, 선교지역의 확대와 선겨활동의 자유 및 선교사의 치외법권 등을 요구


(2) 윌리암슨의 선교

① 북중국과 동몽고에서 성경반포, 복음전파

② 만주에서 개시에 참여한 한국상인들에게 전도 (1867. 봄.)

③ 로스, 매킨타이어, 다우드웨이트에 영향을 미침


3) 토마스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1) 토마스의 1차 한국 선교

① 부인과 함께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중국 상해에 도착

② 부인이 사망하고 런던선교회 상해주재 책임자 무어헤드와 불화로 사표 (1864)

③ 청국해관에서 통역으로 근무 (1865)

④ 윌리암슨의 소개로 한국에서 건너 온 천주교인을 만난 뒤 한국선교의 열망을 품음 → 한국 서해안 도착 (1865. 8. 13.)

⑤ 2개월 반을 머물며 한국말을 배우고 성경을 반포함

⑥ 서울로 이동 중 태풍을 만나 만주로 귀환


(2) 토마스의 2차 한국 선교

① 제너럴 셔먼호에 통역으로 승선함 (1866. 8.)

②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죽임을 당함 (1866. 9. 2.)


2. 만주에서의 성경 번역∙출판과 선교


1) 로스∙매킨타이어와 한국인 개종자


(1) 스코틀랜드장로교회의 한국선교 시도

①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중국선교 개시 (1862)

② 로스, 중국어와 만주어 및 중국고전 공부 (1872. 8.) → 중국어로 설교 가능해짐 (1873. 5)


(2) 로스의 1차 고려문 여행 (1874. 10.)

① 고려문: 봉황성 아래 작은 마을로, 청국과 조선의 국경이자 양국 사이의 합법적인 교역이 이루어지던 관문

② 한국상인들에게 전도하였으나 영국산 면제품인 ‘양목’에만 관심을 갖는 것에 실망

③ 여관에 찾아온 50대의 한 상인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움 → 그 상인에게 한문 신약성경과 ‘훈아진언’을 건네줌 → 상인은 그것을 아들과 그 친구들에게 주어 일게 하였고 이들이 뒷날 한국개신교 최초의 수제자들이 됨


(3) 당시 한국상인들의 국경무역 실태

① 자립적 중산층 출현: 청국과의 무역을 통해 성장한 상인 (의주) → 한문과 만주어에 능통,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의식을 소유 → 이들이 로스∙매킨타이어를 만났고, 성경 번역


(4) 로스의 2차 고려문 방문 (1876. 4.)

① 배경: 강화도조약(1876. 3.)으로 한국의 문화가 개방되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음

② 한국어 첫걸음 발간 (1877): 의주상인 이응찬의 도움으로 발간된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 

③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번역 (1878. 봄): 이응찬과 한국인 한두 명의 도움으로 번역함.

④ 한국사 간행 (1879)


(5) 한국 기독교 최초의 세례

① 백홍준과 이응찬을 비롯한 4명의 한국인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음 (1879)

② 최초의 수세자(1879. 1.): 고향의 부모에게 예수를 공개적으로 시인함 → 세례를 받은 뒤 영구의 중국인 교회 출석해 성경을 배우고 성경번역을 계속함

③ 백홍준: 구도자로서 3~4개월을 지낸 뒤 세례를 받고 의주로 돌아가 의주교회의 초석이 됨

④ 이응찬(1879. 7.): 세례 받음

⑤ 이응찬의 의사 출신 친척 (1879. 12.): 세례 받음


2) 성경의 번역∙출판


(1) 1기

① 시기: 1874년 가을 - 1877년 여름 

② 활동: 로스는 한국어, 한국 소설∙역사∙문화 익힘


(2) 2기

① 시기: 1877년 여름 - 1879년 4월 (로스 안식년 휴가)

② 활동: 마태복음에서 로마서까지 번역


(3) 3기 

① 시기: 1879년 5월 - 1881년 5월

② 활동: 신약번역 완성 (1879)


(4) 4기

① 시기: 1881년 6월 - 1886년 가을

② 로스의 번역 원칙: 본문의 뜻과 일치하면서 한국어 어법에 맞는 절대직역, 영어본보다는 ‘개정 그리스어성경’을 기준으로 함(당시 최신 개정판)


(5) 번역 방법

① 1차: 관리 출신 학자가 한문성경 번역

② 2차: 로스와 이응찬이 그리스어 성경을 참고하여 번역

③ 3차: 1차 번역자, 로스, 이응찬이 수정

④ 4차: 로스가 그리스어 성경과 그리스어 성구사전 및 메이어 주석 등을 참고∙대조하면서 어휘를 통일


(6) 번역에 참가한 한국인

① 초기: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첫 번째 수세자, 네 번째 수세자, 최성균

② 의주 방언의 한계: 서울 출신 학자(전직관리), 임오군란으로 국경에서 좌천된 군인, 서간도 한인촌에서 온 학자


(7) 출판

① 음절별 한글 연활자: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지원으로 35,563개의 음절별 한글 연활자 도착 (1881. 7.)

② 인쇄기: 상해에서 구입

③ 심양 문광서원: 2명의 중국인 인쇄공과 김청송 식자공으로 채용

④ ‘예수셩교문답’과 ‘예수셩교요령’ 간행 (1881. 10.): 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기독교 문서, 수천 권이 인쇄되어 만주와 일본을 거쳐 한국에 반포됨


(8) 성경인쇄

①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 (1881 말): 한국개신교 최초의 번역 성경

② 예수셩교 요안내복음젼서 (1882. 5.)

③ 예수셩교셩셔 누가복음 뎨자행적 (1883. 10.): 아딩턴의 지원으로 3천부 간행, 누가복음을 수정하여 사도행전과 함께 묶은 합본성경

④ 예수셩교셩셔 요안니복음 (1883. 10.):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표기, 서울말 채택이 늘어남

⑤ 예수셩교셩셔 맛대복음 (1884): 5천부

⑥ 예수셩교셩셔 말코복음 (1884): 5천부

⑦ 예수셩교 요안니복음 이비쇼서신 (1885): 1만부

⑧ 예수셩교젼셔 (1887): 최초의 한글 신약전서, 총 339쪽, 5천부 발행

⑨ 예수셩교셩셔 맛대복음 (1891): 5천부


3) 반포사업과 교회들의 설립


(1) 성경반포

① 권서 또는 매서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성경을 짊어지고 마을마다 들어가 반포함

②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인 1880년대 초 만주와 국내 여러 신앙공동체 조직됨


(2) 한문성경

① 1882년 한글성경이 간행되기 전까지 한문성경이 반포됨

② 매킨타이어, 의주에 있던 두 명의 개종자와 십여 명의 구도자의 요청으로 성경과 소책자 보냄

③ 성경과 소책자가 발각되어 의주의 백홍준 3개월간 투옥

④ 한국인, 매킨타이어 찾아가 성경을 배움 (1881)

⑤ 한글성경이 나온 이후에도 지식층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포됨


(3) 김청송의 한인촌 활동 (1882)

① 로스, 한인촌에 김청송 파송

② 활동: 고향인 집안을 중심으로 한글 복음서와 전도책자 반포 → 개종희망자가 나타남

③ 김청송에게 받은 성경을 읽고 기독교를 알게 된 한국인들이 로스를 찾아감


(4) 로스의 1차 한인촌 활동 (1884. 11.)

① 로스, 웹스터 한인촌 방문 

② 4개 마을, 75명의 남자에게 세례를 베품


(5) 로스의 2차 한인촌 활동 (1884. 여름)

① 수세자 100명, 남자 세례요청자 600명,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수 천 가정이 있었음


(6) 디아스포라 (1885)

① 한국인들의 신앙생활을 반란음모로 오해한 중국인 지주가 구타하고 가옥을 파괴함

② 중국인들의 박해를 피해 국내로 들어와 신앙생활을 함


(7) 서상륜의 활동

① 서상륜이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 권서로 파송됨 (1882. 10.)

② 의주를 거쳐 서울 도착 (1883. 1.)

③ 로스의 사역 보고 (1885. 3. 8.): 서울지역 70여 명이 세례 받기를 원함, 서울 서쪽에 설교당을 만들어 모이고 있음, 서울 남쪽에 20여 명이 모이고 있음


3.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출판과 선교


1) 이수정의 개종과 활동


(1) 이수정의 개종 과정

① 온건개화파 양반학자

② 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감 (1882. 9.)

③ 도쿄 도착 후 쓰다센을 만남

④ 이수정은 쓰다센으로부터 받은 한문 신약성경을 탐독하며 기독교 교리를 연구함

⑤ 도쿄 쓰키지교회의 성탄축하예배에 참석함 (1882. 12.)

⑥ 오사다와 함께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함

⑦ 로게쓰초교회에서 녹스 목사로부터로부터 세례를 받음 (1883. 4. 29.)

⑧ 일본에서 세례받은 첫 한국인 개신교 신자


(2) 이수정의 활동

① 제3회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에서 한국어로 공중기도, 신앙고백 함 (1883. 5.)

② 성경번역 착수 (1883. 5.)

③ 김옥균의 인솔로 일본에 와 있던 30여 명의 유학생들에게 전도

④ 한문 요리문답서를 교재로 하는 주일학교 개설 (1883. 6.)

⑤ 3명의 청년이 세례를 받음 (1883. 7.)

⑥ 신앙공동체 형성: 김익승∙박명화∙박영선∙이경필∙이계필∙이주필 등 7~8명이 중심

⑦ 미국인 선교사 초치운동 (일본인 선교사 반대함)


2) 성경의 번역∙출판∙반포


(1) 현토성경 번역

① 현토성경: 한문성경에 토가 달린 현토성경 활용 (번역하기 쉬운 토달린 성경을 완성하여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글성경을 번역하려 함 (1883. 6. 21. 경 신약 전체 완성))

② 번역저본: 브릿지맨과 쿨버트슨이 공역하고 1864년 상해에서 발행된 ‘신약전서문리’

③ 번역성경: ‘신약성서마태전’, ‘신약성서마가전’, ‘신약성서로가전’, ‘신약성서약한전’, ‘신약성서사도행전’ 등 5권의 단편 한한(漢韓) 성경이 각 1천부씩 출간됨


(2) 한글번역

① 마가복음을 이수정이 번역함

② 이수정이 참고한 자료: 일본어역 ‘마가전’, 만주에서 간행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 ‘예수셩교 요안니복음젼셔’, ‘예수셩교 뎨자행젹’ , ‘한불자젼’ 

③ 발행: 미국성서공회에 의해 1885. 2. 요코하마에서 마가복음 6천부가 간행됨 →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이 마가복음을 들고 제물포에 상륙 (1885. 4. 5.)


(3) 이후 출판 노력

① 누가복음 번역을 시작하였으나 출판 단계에 이르지 못함 (1884)

② 감리교 요리문답서 번역 → 1천부 인쇄 → 국내 반포

③ ‘천도소원’, ‘랑자회기’ 번역 → 아펜젤러 등에게 전달


(4) 이수정의 은거와 병사

① 갑신정변의 여파로 자객에 의해 상처를 입음

② 신약전서의 한글번역 계획은 취소되고 이수정은 귀국 후 은거하다가 병사함


3) 재일 선교사들의 역할


(1) 일본에서의 선교 활동

①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1858) 이후 선교사들이 들어옴

② 장로교의 헵번, 성공회의 윌리암즈, 개혁교회의 브라운,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③ 한문성경과 소책자를 이용해 사무라이에게 선교함

④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는데 효과를 거둠


(2) 일본교회의 성장

① 첫 수세자는 1864, 이후 1871년까지 11명이 세례를 받음

② 학생층 중심의 부흥운동 (1871) 이후 초교파적 기독공회가 조직됨

③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자 (1872) 선교사가 배가되고 교인이 59명에 이름

④ 교인 836명 (1877) → 5,000여 명, 선교사 150명, 신학교 7개, 학교 70개, 병원, 주일학교가 설립됨 (1870년대 말) → 300개 교회, 42,000여 명의 신자 (1890)

⑤ 성경번역: ‘마태복음서’ (1871), ‘마가전’ (1872), 신약전서의 일본어 공인역본 출간 (1880년)


(3) 일본에서의 한국 선교 활동

① 성경번역: 미국성서공회, 굴릭과 루미스 파견 → 이수정 등을 통해 한한성경 5종류 각 1천권(1884), 한글 마가복음 6천권(1885) 출간

② 성경 반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만주의 ‘예수셩교본’을 일본인 권서를 통해 한국의 개항장 중심으로 반포 (부산, 대구, 제물포)

③ 장로교 녹스 선교사: 이수정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수정의 선교사 요청서신을 전달해 한국에서의 교육사업, 의료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함

④ 감리교 매클레이 선교사: 중국에서 활동하던 중 해안에 조난되어 온 한국선원을 만나 한국선교를 계획 → 본국 총회에서 일본 및 한국에 대한 선교의 필요성 강조 (1872) → 초대 일본인 선교사로 부임 (1873) →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한국 방문 (1884. 6.)

⑤ 김옥균: 기독교를 정치적 세력 확장과 개화의 방편으로 이용하려 했으나, 김옥균을 통해 매클레이의 방한이 이루어졌고 이후 장로교와 감리교의 한국선교가 시작될 수 있었음


4. 미국 선교부의 한국선교 결정


1) 한미수호통상조약과 견미사절단의 파견


(1) 한미수호통상조약

① 신미양요 (1871) 이후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882. 5.)

②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내용은 없었으나, 미국측은 ‘학자’를 파송하여 “언어와 문학과 예술을 연구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고 인식함

③ 한국의 친선사절 (견미사절단 또는 보빙사)이 미국에 파견됨 (1883. 7.)


(2) 사절단과 가우처 박사와의 만남

① 견미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이동하던 중 기차 안에서 가우처 박사를 만남

② 가우처는 한국선교를 염원하게 되었고 선교비 2천 달러를 기부함 (1883. 11.)


2) 미국 개신교 선교부들의 한국선교 결정


(1) 18세기 말 미국 기독교의 분위기

① 18세기 말 제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해외선교의 열기가 고조됨

② 여러 교단에서 선교회를 조직하고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를 설립함

③ 전국신학교동맹이 결성됨

④ 초기에 내한한 선교사 중에는 이 운동에 자극받아 해외선교에 나선 이들이 많았음


(2) 미국 개신교단의 해외선교부 창설

① 신앙동우회 Society of Brethren (1806) 

② 미국회중교회 해외선교본부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1810) 

③ 침례교해외선교회 The Baptist Foreign Missionary Society (1814)


(3) 한국선교에 대한 반응

① 미국 각 교단의 선교본부에서는 한국선교에 대한 별다른 관심이 없었음

②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하는 미국인 선교사들은 의료와 교육을 통한 한국선교의 전망이 밝다고 봄


(4) 감리교의 움직임

① 감리교 기관지 The Christian Advocate와 해외선교부 기관지 The Gospel in All Lands는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선교사들의 호소문과 게재함 

② 감리교회 소속 스크랜턴 박사와 스크랜턴 대부인, 아펜젤러 목사 등이 한국선교사로 임명됨


(5) 장로교의 움직임

① 북장로교 선교부 임원 엘린우드, 즉시 선교사를 파견해야한다고 주장

② 브룩클린 교회의 평신도이며 장로교 선교본부 위원인 맥윌리엄즈를 움직여 한국선교를 위한 기금 5천 달러를 기부받음 (1884. 2.) → 많은 이들이 모금에 호응함

③ 의사 헤론을 한국선교사로 임명 (1884)

④ 언더우드를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함 (1884. 7.)

⑤ 의사 알렌이 한국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 (1884)


3) 매클레이의 방한과 알렌의 입국


(1) 매클레이의 방한 (1884. 6. 24. - 7. 8.)

① 방한 목적: 한국에서 교육과 의료 사업 허가

② 김옥균을 통해 교육과 의료사업 허가를 받음 

③ 주한미국공사관 근처의 경사진 지역을 매입함

④ 영향: 미감리회의 아펜젤러가 교육사업, 스크랜턴이 의료사업을 통한 선교를 목표로 각각 내한할 수 있게 됨


(2) 알렌

① 내한 과정: 의학공부를 마치고 의료선교사를 지망함 → 중국에 파송되었으나 제대로 정착하지 못함 → 유력인사들과 동료의사들이 한국행을 권함 → 1884. 9. 22. 서울 도착

② 여러 외국기관의 의사로 활동함


제5장 선교의 자유와 초기 선교활동


1. 선교사의 입국과 활동


1) 선교사∙선교부의 내한과 정착


(1) 미국 북장로회

① 중국에 있던 알렌을 의료선교사로 임명 → 입국 (1884. 9.) → 최초의 정주 선교사가 됨

② 언더우드를 교육선교사로 선발함 (1884) → 제물포 도착 (1885. 4. 5.) → 알렌이 세운 제중원에서 교사로 활동

③ 헤론부부 입국


(2) 미감리회

① 스크랜턴을 의료선교사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대부인을 교육선교사로 선발함 (1884)

② 아펜젤러 부부 제물포 도착 (1885. 4. 5.) → 갑신정변의 여파로 서울의 분위기가 호의적이지 않다는 미국대리공사 폴크의 충고에 따라 일본으로 돌아감

③ 스크랜턴 입국 (1885. 5.)

④ 스크랜턴 대부인, 아펜젤러 부부 입국 (1885. 6.)


(3) 영국성공회

① 중국에 있던 주교 3명이 한국선교부 개설을 요청 (1884)

② 중국 남부 복주에서 활동하던 영국성공회 선교회에서 중국인 2명을 중국에 파송 (1885 말) 

③ 울프 주교 한국 방문 (1887) →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지체 말고 본국 교회에서 선교단을 파송하는 조처를 취해 줄 것” 요청

④ 영국해군 군종사제 출신인 코르프 신부, 영국성공회의 첫번째 한국선교사로 파송됨 (1889. 11.)

⑤ 코르프, 와일즈, 랜디스, 트롤로프, 스목, 워너, 포우널, 데이비스 등 인천 도착 (1890. 9.)


(4) 호주장로회

① 울프의 서한이 호주에도 전달됨

②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 서울 도착 (1889. 10.)

③ 데이비스 병으로 사망 (1890. 4.), 메리 데이비스 호주로 귀환 (1890. 8.)

④ 데이비스의 희생이 호주장로교회 전체에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

⑤ 맥케이, 멘지스, 포오셋, 페리 등이 파송됨 (1891. 10.)


(5) 미국 남장로회

① 미국신학생 해외선교연맹 집회에서 언더우드와 윤치호의 강연을 듣고 데이트, 존슨, 레널즈 등이 한국선교를 결심함

② 남장로회 본부에서는 재정문제로 한국선교에 난색을 표했으나 언더우드와 그의 친구들이 3천 달러, 언더우드의 형이 2천 달러를 선교 기금으로 내놓음 → 한국선교 결정 (1892)

③ 테이트, 레널즈, 전킨, 테이트의 여동생, 데이비스, 레이번, 볼링 등이 첫 선교사로 임명되어 한국 도착 (1892. 11.)

(6) 남감리회

① 윤치호, 중국 상해에서 유학하다가 그곳 남감리회 선교부가 운영하던 중서서원에 재학 중 세례를 받음 (1885)

② 도미 후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수학하던 중 한국선교를 요청하는 강연을 함 (1888)

③ 귀국 후에도 남감리회 관계자들에게 한국선교를 요청함 (1895)

④ 리드가 선교사로 내한함 (1896. 5.)


(7) 캐나다장로회

① 게일이 토론토대학 기독교청년회(YMCA)의 후원을 받아 내한 함 (1888. 12.)

② 펜윅이 토론토 실업인들의 지원을 받아 내한함 (1889. 말)

③ 하디 / 에비슨이 토론토의과대학 기독교청년회의 후원을 받아 내한 (1890. 9. / 1893. 7.)

④ 매켄지가 캐나다 연해주 지역 장로교대학 선교협회의 파송을 받아 내한 (1893. 12. 18.) → 황해도 소래에 머물며  교인을 돌보고 교회건축에 힘씀 → 1895. 6. 사망 → 캐나다장로회 교인들의 한국선교에 대한 관심을 고조 시킴

⑤ 그리어슨, 맥레, 푸트 3인이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내한함 (1898. 9.)


(8) 미국 침례교회

① 엘라딩기념선교회에서 폴링, 가들라인 등을 한국에 파송함 (1895)

② 재정난으로 사업이 중단됨 (1901)

③ 캐나다인 펜윅이 사업을 이어받음 → 대한기독교회 조직 (1906) → 동아기독교 → 한국 침례교회 (해방 후)


(9) 성결교회

①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 한국선교 시작 (1907)

② 김상준, 정빈은 서울 종로 가옥에 ‘공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전도함 (1907)

③ ‘복음전도관’ 대신 ‘성결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 (1921)


(10) 구세군

① 창설자 부드가 일본에 들렀다가 한국인 2명으로부터 선교 요청 받음 (1907)

②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은 호가드가 내한함 (1908. 10.)


(11) 안식교

① 하와이 노동자로 이민선을 타고 가던 일행 중 유은현, 송홍조 등이 일본 고베에서 안식교 전도사 구니야에게 전도받고 안식교인이 됨 (1904)

② 손홍조는 국내로 돌아와 임기반 등과 함께 진남포, 용강 등지에서 전도하여 안식교회 설립

③ 구니야 전도사가 내한하여 선교활동을 도움 (1904)

④ 미국인 스미드 선교사가 내한하여 선교 (1905)


(12) 러시아정교회

①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한국선교를 명령함 (1897. 6.)

② 러시아공사관 안에 교당을 설치하고 공식예배를 드림 (1900. 2.)

③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인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선교활동이 위축됨 (1904)


(13) 플리머드형제단 Plymouth Brethren

① 일본인 전도자 노리마츠가 내한하여 조덕성, 신태일 등의 협력을 얻어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전도함 (1896)

② 일본에서 활동하던 브랜드가 내한해 서울 서소문에 선교부 개설 (1898)

② ‘성서성당’, ‘기독동신우회’, ‘기독신우회’, ‘그리스도인의 집회소’ 등의 명칭으로 불리며 교회조직을 부인하는 독특한 신앙공동체로 존속함 


(14) 일본교회

① 초기에는 한국에 나와 있는 일본인을 대상으로 전도하고 교회를 운영함

②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면서 일본의 국익을 선전할 목적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조선전도론’이 제창됨

③ 일본조합교회: 에비나, 와다세 등 극우파 인사들을 한국에 파송하여 한국선교를 개시함 (1909. 4.)

④ 일본의 조선통치를 지원하는 차원에서 한국선교를 추진함


(15) 의의

① 다양한 교파를 배경으로 선교가 진행됨 → 다양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지닌 교회들이 그대로 한국에 이식되는 형태로 선교가 추진됨 → 상호경쟁을 통해 교회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음 / 불필요한 마찰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함

② 한국선교 과정에서 한국인의 주체적인 수용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음


2) 의료선교


(1) 배경

① 정부의 태도와 사회의 편견 때문에 공개적인 선교활동이 쉽지 않았음

② 학교와 병원을 통한 간접선교 방식을 취함


(2) 광혜원(廣惠院 후에 濟衆院) 설립

① 알렌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수구파의 거두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과 명성황후 등의 신임을 얻음

② 홍영식의 집을 하사받아 광혜원 (곧 제중원으로 개칭)이라는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을 설립함 (1885. 4.)

③ 언더우드, 스크랜턴, 헤론, 엘러즈 등이 이곳에서 활동함

④ 알렌이 공사업무를 맡으면서 헤론이 제중원 업무를 이어받음

⑤ 에비슨에 의해 선교병원이 됨 (1894)

⑥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가 후원한 건축기금으로 남대문 밖에 새 건물을 마련하여 오늘의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함


(2) 시병원 (施病院)

① 미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이 민간진료소 시작 (1885. 9.)

② 시병원 개원 (1886. 6.)

③ 민간병원으로 발전시키려고 힘씀

④ 적극적으로 민중계층과 접촉하기 위해 궁궐과 외국공사관이 즐비한 정동을 떠나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병원을 옮김 (1894)


(3) 보구여관(保救女館)

① 하워드, 여성 대상 의료사업 전개 (1887. 10.)

② 시병원 안에서 시작했다가 정동에 따로 건물을 마련하고 보구여관이라 부름 (1888. 4.)

③ 봉건적 사회체제에서 소외된 여성들이 의료혜택을 받고 그 중 간호교육과 의료교육을 받는 사례도 나타남


(4) 그 밖의 의료 선교 활동

① 서울의 동대문, 애오개, 모화관 등지에 진료소 개설

② 성공회에서는 낙동병원 운영

③ 평양 기홀병원 (1893), 제중병원 (1895)

④ 부산 일신병원 (1893), 나병원 (1910)

⑤ 대구 동산병원(1899), 나병원(1913)

⑥ 선천 미동병원 (1901)

⑦ 전주 예수병원 (1904)

⑧ 함흔 제혜병원 (1908)

⑨ 원산 구세병원 (1908)

⑩ 개성 삼성병원 (1909)

⑪ 청주 진료소 (1912)

⑫ 강계 계레지병원 (1909)

⑬ 해주 구세병원 (1913)


(5) 의의

① 병원마다 한국인 전도인들이 배속되어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효과를 거둠

② 정부와 민중이 기독교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없애는 데 큰 도움이 됨


3) 교육선교


(1) 배재학당

① 아펜젤러,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고종으로부터 학교설립 허가를 받음 (1885. 11.)

② 2명의 학생으로 정식학교 개교 (1886. 6.)

③ 5개월만에 학생이 32명에 이름

④ 영어를 배워 출세하려는 목적에서 온 학생들이 많았음

⑤ 기독교인이 된 이들도 나타남 → 박중상 (1887. 7.), 한용경 (1887. 10.)


(2) 경신학당

① 언더우드(감리회), 고아원 형태로 교육사업 시작

② 고아나 극빈자 아동들을 모아 기술을 가르치는 고아원 설립 구상 (1886. 1.)

③ 정동에 한옥을 구입해 수리하고 학생 1명으로 고아원을 시작함 (1886. 5.)

④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다가 경신학당으로 개칭 (1905)


(3) 여학당

① 스크랜턴 대부인 (감리회), 이화여학당 설립 (1886. 5.)

② 엘러즈 (북장로회), 정동여학당 설립 (1887. 6.)

③ 여성들의 교육을 꺼리는 봉건적 관습 때문에 학생모집부터 쉽지 않았고, 초기의 학생들은 고아나 과부, 첩과 같은 소외계층이 대부분이었음


(4) 지방

① 기독교계 학교는 일반과목과 함께 성경과목을 포함시켜 복음전도의 기회로 삼음 


4) 성경번역과 문서선교


(1) 신약 번역

① 성경번역위원회: 서울의 선교사들이 조직 (1887) → 영국성서공회가 위원회에 로스역 성경의 개정작업 요청 (1889) →영국성서공회가 위원회에 로스역 성경의 개정작업 요청 (1889)

② 성결실행위원회: 산하에 ‘성경번역자회’ 조직 

③ 선교사들은 헬라어성경과 개정판 영어성경, 한국인 조사들은 대표자역본 한문성경을 저본으로 채택

④ 시험역본: 번약자회의 의견을 거친 성경

⑤ 공인역본: ‘시험역본’을 3년간 사용하면서 개정해낸 것

⑥ ‘신약젼셔’ 발간 (1906)


(2) 구약 번역

① 신약 번역이 끝난 1900년에 시작됨

② 레널즈, 김정삼, 이승두 구약 전체 번역 (1907 - 1910)


(3) 성경 번역의 의의

① 일반민중을 대상으로 번역함

② 한자 중심의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소외되었던 한글을 적극 수용하여 한글문화의 창출에 공헌함


(4) 찬송가

① 찬미가 (1892): 미감리회 선교사 존스와 로드와일러가 편집

② 찬양가 (1893): 장로교 언더우드가 편집, 서울 및 남부지방에서 주로 사용됨

③ 찬셩시 (1895): 리와 기포드 부인이 편집, 서북지방에서 주로 사용됨, 장로교 공인찬송가로 채택됨 (1902)

④ 찬미가 (1905): 남감리회의 윤치호가 편집, 애국가 등 충군애국적인 찬송가 세 편이 수록됨

⑤ 찬숑가 (1908): 찬송가 합동작업을 통해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 발행 → 1930년대 감리교가 ‘신정찬송가’

, 장로교가 ‘신편 찬송가’를 별도로 사용하기까지 초교파적으로 사용됨

⑥ 복음찬미 (1899): 대한기독교회

⑦ 셩회숑가 (1903): 영국성공회

⑧ 천도찬사 (1904): 영국성공회

⑨ 구셰군가 (1908): 구세군

⑩ 복음가 (1911): 셩결교회의 전신인 동양선교회

⑪ 부흥셩가 (1913): 셩결교회의 전신인 동양선교회


(5) 신문

① 죠션크리스도인회보 (1897): 아펜젤러가 발행한 한글신문

② 그리스도신문 (1897): 언더우드가 발행한 한글신문

③ 그리스도신문 (1905): 교회연합운동의 일환으로 발행된 장로회와 감리회의 연합 신문 → ‘예수교신보’ (1907)로 제호가 바뀌어 1910년까지 발행됨

④ 경향신문 (1906): 천주교회

⑤ 구셔신문 (1909): 구세군


(6) 영문 기독교잡지

① The Korean Repositionory (1892): 한국에서 간행된 영문잡지의 효시, 미감리회 선교사 올린저가 발간, 1898년에 간행이 중단됨

② The Korea Review (1901): 감리회의 헐버트가 The Korean Repository를 계승

③ The Korea Field (1901): 장로회의 빈튼, 장로회 선교부의 기관지

④ The Korea Methodist (1904): 미감리회와 남감리회 연합으로 간행

⑤ The Korea Mission Field (1905. 11.):  장로교의 The Korea Field와 감리교의 The Korea Methodist가 통합 창간됨 (1941년까지 발행)


(7) 한글 기독교잡지

① 신학월보 (1900. 12.): 미감리회 선교사 존스가 인천에서 발행, 교회소식 뿐 아니라 기독교 교리까지 실어 한국교회의 신학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함

② 은혜진리 (1904): 플리머드형제단 선교사 노리마츠가 발간

③ 예수교서회보: 빈튼이 발간

④ 엡웟청년회보: 정동감리교회에서 발행

⑤ 성경강론월보 (1906): 정동감리교회에서 발행

⑥ 가뎡잡지 (1906): 상동교회 청년학원에서 발간

⑦ 종고성교회월보 (1908): 영국성공회에서 발간

⑧ 대도 (1908): 양주삼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생과 해외교포를 대상으로 발간


(8) 단행본

① 예수셩교문답 (1883): 로스가 만주 봉천에서 간행

② 예수셩교요령 (1883): 로스가 만주 봉천에서 간행

③ 랑자회기 (1885): 이수정이 일본에서 강행

④ 셩교촬요 (1889): 아펜젤러가 국내에서 발행

⑤ 속죄지도 (1889): 언더우드가 발행

⑥ 라병론 (1890): 올린저가 발행

⑦ 미이미교회강례 (1890): 아펜젤러가 발행

⑧ 셩교촬리 (1890): 언더우드가 발행


(9) 삼문출판사

① 삼문출판사 설치 (1889): 올린저의 노력으로 배재학당 안에 설치된 인쇄소, 한글∙영문∙한문 활자를 갖추어 삼문출판사라 불림

② 미이미교회 인쇄소 (1899): 삼문출판사의 시설을 확충한 뒤 개칭함

③ ‘독립신문’, ‘협성회회보’, ‘경성신문’, ‘매일신문’ 등 일반신문도 이곳에서 인쇄됨

④ 1909년 경 폐쇄됨


(10) 조선성교서회

① 언더우드, 헤론, 올린저의 노력으로 설립됨

② 조선어로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와 정기간행의 잡지류를 발행하여 전국에 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짐

③ 대한성교서회 (1897), 조선예수교서회 (1915)로 개칭되었으며 대한기독교서회의 전신임


(11) 출판∙문서 선교 의의와 한계

① 의의: 기독교 복음전파, 일반 출판문화의 발전에 큰 공적을 남김

② 한계: 한국인 저작이 드물었음 → 한국의 기독교문화가 서구지향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었음


2. 연합활동과 선교정책


1) 선교부간 연합활동


(1) 연합선교부공의회 The United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 (1889)

① 미국 북장로회와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가 조직한 선교부간 최초의 협의체

② 목적: 조선땅에 개신교의 신앙고백과 장로교 정치를 사용하는 연합교회를 설립하는 것

③ 이후 캐나다장로회와 호주장로회도 가입함

④ 처음에는 치리권한이 없었으며, 선교에 관해 서로 협조하고 논의하기 위해 모인 협의체였음

⑤ 이후 정치적 권한을 갖게되어 (1901) 독노회가 설립(1907)될 때까지 한국 장로교회의 치리기구 역할을 함


(2) 한국복음주의선교회연합공의회 The Gen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 in Korea (1905)

① 장로교의 4개 선교부, 감리교의 2개 선교부가 결성

② 선교사업에 있어 협력을 기하는 것, 한국에서 유일한 하나의 복음주의 교회를 조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③ ‘대한예수교회’라는 통일된 명칭을 사용하자는 제안이 나옴

④ 교리통합위원회가 “한국에서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의 교리들을 조화시키는 작업에 어려움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캐나다교회가 마련한 교리를 이 나라 그리스도 교회 교리로 삼는 것이 합당함을 만장일치로 건의”함 (1906)

⑤ 한국교인들은 남감리회와 미감리회를 하나로 합하고 장로교회를 세워 2개의 교회를 설립하는 안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선교사들 가운데 일부 반대가 있어 적극 추진되지 못함

⑥ 의의: 에큐메니칼운동의 효시가 됨 → The Korea Mission Field, ‘그리스도신문’, ‘찬숑가’ 등의 통합 발간


(3)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서의 연합활동

① 미감리회와 북장로교의 연합활동이 활발했음

② 배재학당과 경심학교 통합운영 (1905)

③ 평양에서도 남여 중학교가 통합운영 됨 (1907)

④ 숭실대학 설립 (1906. 10.)

⑤ 연희전문학교 설립 (1915): 북장로회, 캐나다장로회, 미감리회, 남감리회 연합

⑥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의학교 (1913)

⑦ 평양연합기독병원 (1920): 제중병원 (북장로회)과 기홀병원 (미감리회)이 통합

⑧ 기독교청년회 YMCA (1903)

⑨ 장로회신학교 (1901): 평양에서 장로교의 4개 선교부가 참여

⑩ 협성신학교 (1905): 서울에서 감리교의 2개 선교부가 참여


2) 선교지역 분할협정


(1) 선교지역 분할협정

① 여러 교파 선교회가 진출하여 선교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선교회간 선교지역 분할협 정이 체결됨

② 대원칙:인구 5천 이상의 대도시(혹은 개항장)는 공동점유하되 그 이하의 도시와 지방은 당시 선교회의 지휘를 받는 교회가 설립되어 있는 상태를 보아 기득권을 인정함

③ 그외의 미개척지역은 새로 오는 선교회가 개척

④ 선교회의 지역관할권 강화: 지역 내 교인들이 교파를 옮기는데 선교회의 허가를 받아야함, 교역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이 다른 선교회에서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함


(2) 장로교 내의 분할

① 장로교연합선교공의회를 통해 이루어짐

② 남장로회, 충청도와 전라도를 맡게 됨 (1893)

③ 캐나다장로회, 원산과 함경도를 맡게 됨 (1898)

④ 호주장로회, 부산과 경남을 맡게 됨 (1909)


(3) 감리교 내의 분할

① 남감리회, 서울과 송도와 원산을 맡게 됨 (1901)


(4) 장로교와 감리교 사이의 분할

① 중부지역 (서울, 경기, 충청, 강원): 감리회와 장로회가 중복을 피하며 분할함

② 평안도와 황해도: 북장로회

③ 함경: 캐나다장로회

④ 경북: 북장로회

⑤ 경남: 호주장로회

⑥ 전라: 남장로회


(5) 결과

① 불필요한 마찰이나 재정낭비를 줄일 수 있었음

② 한계: 1930년대 노골화된 지방색에 의한 교권분쟁의 원인이 됨, 해방 후 한국교회 분열, 장로회와 감리회 외의 교파 선교회는 참여하지 못함


3) 네비어스 선교정책


(1) 네비어스 선교방법

① 자진전도, 자력운영, 자주치리

② 1890 - 1895년 사이 북장로회의 정책이었으나 다른 장로회도 이 정책을 수용함

③ 비판: 교회 외부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 태도를 보이게 만든 원인이 됨


4) 선교사들의 한국 종교 이해


(1) 문서를 통한 한국 이해

① 한국을 알리기 위해 영문으로 된 정기간행물과 책을 저술함

② 한국인의 풍물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서, 회고록, 선교 일화, 소설 등을 출간함


(2) 선교사들이 본 한국인들의 특징 1 - 학문과 학자를 존중하는 태도

① 선교사 존스, 한국인들이 “가르치는 직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있다고 봄

② 게일, 한국인이 “학문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라고 지적함

③ 당시 한국인들 가운데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이들이 많았고 한글은 뛰어난 문자였음

④ 선교사들이 보기에 평민들은 누구나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것처럼 비쳐짐

⑤ 존스, 금속활자와 거북선과 현수교 등을 예로 들면서 한국인들의 문화적 능력에 감탄함


(3) 선교사들이 본 한국인들의 특징 2 - 거지가 없었음

① 당시 한국의 서민들은 미국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 비참할 정도의 주거환경에서 어렵게 살고 있었음

② 미국 대도시에 있는 빈민들과 비교해 볼 때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도시에는 누구도 돌보지 않아 거리로 나앉을 정도의 사람들은 적었음

③ 어디를 가나 손님을 맞아 먹이고 재워줄 집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반도의 끝에서 끝까지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음


(4) 선교사들이 본 한국인들의 특징 3 - 한국인들의 종교

① 사찰이나 종교적 건축물을 도시 안에서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한국에는 종교가 없다는 견해가 유포됨 (1880-1890년대)

② 기포드, 유교적인 조상숭배, 도교적인 무당, 판수, 지관을 발견하고 한국종교에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 세 개의 종교가 혼합되었음을 지적함

③ 게일, 한국종교를 관통하는 현상은 귀신숭배라고 주장함

④ 존스, 한국에 있는 정령의 수를 8천만으로 계산하고, 사람보다 신들이 더 많다고 말함

⑤ 선교사들 입장에서는 유교와 불교보다 샤머니즘적 민간신앙이 기독교 전파의 큰 장애요인이었음


(5) 선교사들의 불교에 대한 생각

① 무속성과 국가와의 결탁, 부패, 쇠태 상태에 언급하며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킴

② 게일, 한국불교에 “온유함과 자비로움”이 있다고 말함

③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신봉되고 있었지만 열렬한 신자는 드물어 보임

④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불교적 가치관이 철학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종교적 영향력은 미미하다고 봄


(6) 선교사들의 유교에 대한 생각

① 한국인의 교육열과 지적인 우수성이 유교의 경전교육과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봄

② 유교가 강조하는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윤리는 기독교 윤리를 진지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고 봄

③ 언더우드, 기독교인들이 효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유교인들 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고 봄

④ 언더우드, 동아시아의 효 개념과 제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서 완성되었으며, 한국인의 천신신앙과 조상숭배는 기독교를 예비하였다고 해석함


3. 선교 과정에서의 갈등과 수난


(1) 알렌∙언더우드∙헤론∙헤론부인의 갈등

① 갑신정변을 직접 목도한 알렌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가급적 한국정보와의 충돌을 피하려 함

② 알렌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정주 선교사이면서 중국에서의 선교경험을 갖고 있다는 점, 갑신정변을 계기로 왕실의 신뢰를 받고 있었던 점 등을 들어 다른 선교사의 대부 역할을 하려 함

③ 언더우드는 교육선교를 통한 복음전도 강조하며 알렌과 갈등

④ 의과대학 교수까지 지낸 헤론은 전문의가 아닌 헤론이 제중원의 책임자로 있는 데 대해 불만을 품음

⑤ 언더우드와 헤론은 알렌의 생활이 사치스럽다고 비난함

⑥ 알렌은 언더우드와 헤론이 일을 회피하며, 병이 만연되고 있는데도 테니스를 즐기며 휴가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난함

⑦ 헤론 부인은 알렌이 기독교적 사랑이 결여된 “선교사로서 부적합한 인물”로 비난함

⑧ 알렌은  은 언더우드가 “위선자요 수다쟁이”라고 비난함


(2) 갈등의 원인

① 선교사들의 선교관 차이: 알렌은 당시 한국의 정황에서 직접전도하는 것을 반대, 언더우드를 비롯한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적극적인 선교 시도 → 알렌은 선교사를 사임하고 외교관으로 전직함

② 정치적 역학관계: 알렌은 갑신정변에서 수구파의 대표적 인물인 민영익을 치료해 왕실과 수구파로부터 신뢰를 받음,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은 일본에서 개화파인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만나 그들로부터 한국의 사정과 언어를 배울웠고 그들의 중재로 내한하여 친개화파적인 성격을 띰

③ 경험이 많지 않음: 대부분 20대 청년층이었으며 헤론과 언더우드는 한국이 초임 선교지였음 → 이들을 중재하여 갈등을 해소시킬 만한 인물이 없었음 (이에 비해 감리교의 경우 재일 선교사 매클래이가 원로로서 선교사들을 감독하여 큰 불화가 없었음)


2) 신∙구교간의 갈등


(1) 삼남지방 가뭄 (1888년 여름)

① 삼남지방의 극심한 가뭄으로 기근과 질병 만연

② 프랑스 공사 쁠랑시와 천주교 주교 블랑을 중심으로 구호대책위원회 구성

③ 언더우드가 구호금을 내고 구호대책위원회에 참여함

④ 천주교측, “개신교 목사들이 그들의 선전을 위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함을 명심해야 한다”며 경계함


(2) 황성신문사 난입사건

① 황성신문 잡보난에 어느 부처가 천주교에 입교하였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림 (1899. 4. 14.)

② 이에 불만을 품은 이택부 등 천주교 신자 수십 명이 사장 남궁억을 종현성당 (명동성당)으로 데려가 부처가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추궁함 (1899. 4. 23.)

③ 천주교측을 대표해 뮈텔 주교가 사과함


(3) 종현성당 구타사건

① 종현성당 신축현장에 구경갔던 개신교인 5명과 천주교인 사이에 충돌 발생 (1894. 4.)

② 아펜젤러, 뮈텔 주교에게 항의편지 보냄

③ 뮈텔, 무기를 소지한 침입자들이었다고 비난함


(4) 해서교안 사건

① 교안(敎案)의 의미: 기독교 신자와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쟁에 관한 안건이라는 뜻

② 서북지방의 관아와 천주교측 사이에서 생겨났으나 이 과정에서 신∙구교 간 갈등으로 비화됨

③ 신환포교안: 천주교인 김형남∙홍병용 등이 천주교당을 세우기 위해 개신교인 한치순∙최종신 등에서 건축기금 요구 → 개신교인 불응 → 이들을 감금, 구타 → 개신교측, 해주감영에 소송제기 → 체포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르각 신부가 중재에 내서 풀어주도록 함

④ 우질사건: 개신교인 이승혁의 소가 갑자기 죽음 → 옆집 천주교도인 김순명의 소도 죽음 → 김순명, 이승혁에서 소값 배상 요구 → 이승혁 불응하여 충돌 → 중앙 정부 외부 교섭 국장 이응익을 해서사핵사에 임명해 수습하도록 해주에 보냄 (1903. 1.) → 이응익, 수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서울로 되돌아 옴 → 프랑스공사 쁠랑시 중재 (1903. 11.)


(5) 황해도 신∙구교 충돌 원인 1 - 치열한 선교경쟁

① 신 구교가 서북지방 선교의 교두보로 황해도를 설정하여 치열한 선교경쟁을 벌였기 때문


(6) 황해도 신∙구교 충돌 원인 2 - 천주교측의 위세가 우위에 있었음

① 이 지역의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심했는데 천주교측에서는 주민들의 각종 민원을 적극 해결해주어 신뢰를 받았음

② 당시 천주교측의 위세가 개신교측을 압도하였고, 지방관아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었음


(7) 황해도 신∙구교 충돌 원인  3 - 문서논쟁

①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의 일환으로서 상대방의 교리를 비판하는 문서와 책자를 발간∙배포하고 신자교육용 교재 등으로 사용하여 갈등 유발

② 개신교: 예수텬쥬량교변론 (1908)를 통해 천주교의 교리가 비성서적이라고 비난함

③ 천주교: ‘량교명증문답’, ‘진교사패’를 통해 천주교 교리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동시에 개신교측의 주장이 비성서적이라고 주장 

④ 천주교측은 루터를, 개신교측은 교황을 비판함


3) 교폐문제의 발생


(1) 교폐(敎弊): 종교가 민간인에게 끼친 폐혜

① 한국교인 중 ‘양대인’이라 부르는 서양선교사들에 의지하여 양민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건이 발생함

② 한국정부의 주권을 무시하는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태도 때문에 교회와 관청 사이에서 마찰이 발생함

③ 교인들이 정부보다 선교사에게 사법적 처리를 요청하는 현상이 나타남

④ 선교사들에게 세속적 이권과 관련된 청탁을 하는 교인들이 생겨남


(2) 정길당 사건 (1901)

① 정길당: 원래 고씨였는데 일찍이 부친을 따라 러시아에 들어갔다가 그곳 국적을 취득하고 러시아정교회 교인이 되어 1890년대 초 귀국

② 정길당의 남편 안병태 및 안종학, 양규태 등과 작당하여 정교회 선교사라 선전하며 무리를 모으고 총으로 무장까지 한 후 양민들의 재물을 갈취함

③ 남포유생 백하수 등이 법무대신에게 그들의 죄상을 폭로하며 고소함 (1900)

④ 정기당, 안병태, 안종학, 양규태 등은 체포되었다가 러시아공사관에 이첩됨

⑤ 러시아공사관에 1개월 가량 구금되었다가 무죄방면됨


(3) 의의

① 교폐사건은 외세의존적 종교심리에서 발생

② 서양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지위에 의지한 특권의식이 교폐를 일으켰고 이러한 면에서 초기 기독교의 부정적 일면을 볼 수 있음


4) 수구세력의 탄압


(1) 영아소동 (1888. 6.)

① 선교사들이 한국유아들을 유괴하여 외국에 팔거나 실험대상으로 쓰고, 남색을 즐긴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서울 시중에 퍼짐

② 프랑스공사관에 근무하던 오봉엽이 아이들의 살과 피를 먹는 외국인들을 보았다고 소문을 퍼뜨림

③ 흥분한 군중들은 거리를 몰려다니며 외국인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사택, 병원, 학교를 습격함

④ 선교사들에게 고용된 한국인들도 유괴에 가담하였다고 생각하여 구타함

⑤ 이에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공사관들이 개입하여 한국정부에 항의하고 외국인 보호 요청

⑥ 정부에서는 고시문을 발표하고 순찰을 강화하여 군중의 소요를 진정시킴

⑦ 제물포에 있던 외국군대가 서울에 진주하여 무력시위를 벌임


(2) 평양기독교인 박해사건 (1894. 5.)

① 미감리회, 평양 개척선교사로 의사인 홀을 임명 (1892. 8.) → 환자들을 진료하여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돌아감 

홀, 윌 노블 평양에서 본격적인 진료활동 개시 (1893. 2.)

② 장로교, 마펫∙리∙스왈른 등 3인이 평양 개척선교사로 임명됨 → 평양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판 사람이 외국인에게 집을 팔았다는 이유로 관가에 체포됨 → 계약을 취소하고 평양을 떠남, 이 때 관청에서 동원한 군중들이 마펫 일행에게 돌을 던지며 시위함

③ 반응이 달랐던 이유 : 당시 정부는, 의료사업은 시혜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종교활동은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

음력 정월을 맞아 주민 김낙구가 마을을 돌며 우물제사를 지낼 비용을 걷다가 홀의 통역인 노병선에게 거절당함 (1894. 2.) → 마을 공동제의에 참여하지 않은 선교사 집은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 됨

④ 홀의 부인과 갓난아기가 평양에 도착함 (1894. 5.) → 평양주민들이 구경하러 몰려옴 → 김낙구의 아들인 김호영, 내방비장 신덕균 등은 선교사를 내쫓고 교인들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한 음모를 꾸밈

⑤ 장로교의 송인서, 신상호, 우지룡, 최치량, 한석진과 감리교의 김창식, 오석형, 이항선, 홍재응 등이 체포되어 심문받음 (1894. 5. 10.)

⑥ 배교하면 석방하겠다는 회유, 금품요구

⑦ 홀은 서울에 있는 스크랜턴에게 전보로 알림 → 스크랜턴, 영국총영사와 미국총영사에 알림 → 한국정부에 항의 → 평양감영에 교인들의 석방을 종용하는 전보를 보냄 → 교인 석방 (1894. 5. 11.)


(3)  의의

①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더욱 굳어짐

② 박해를 견뎌낸 교인들을 중심으로 더욱 견실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었음

③ 권력을 지닌 소수 지배계층의 종교가 아니라 박해받는 민중들의 종교로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됨


4. 교회의 설립과 사회변화


1) 신앙공동체의 형성


(1) 첫 개신교 세례

① 노춘경은 알렌의 통역으로 있으면서 그의 집 책상에 놓인 한문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몰래 가져와 읽음

② 언더우드로부터 성경과 교리서를 빌려 읽으며 종교집회에 참석함

③ 교리문답을 거쳐 언더우드의 집례와 아펜젤러의 보좌로 세례를 받음 (1886. 7. 18.)


(2) 소래교회

① 서상륜, 로스에 의해 전도인으로 파송받아 입국 후 2년 동안 70여 명의 개종자를 얻음 (1883)

② 갑신정변 여파로 서울에서 전도활동을 할 수 없어 동생 서경조가 사는 황해도 소래에 머무름

③ 주일마다 예배드리는 신앙공동체가 형성됨 (소래교회)

④ 서상륜, 소래교회 교인들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세례를 받도록 주선함

⑤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가 세례를 받음 (1887. 1. 23.)

⑥ 소래 출신 세례교인만 11명에 이름 (1887. 9.)


(3) 정동교회

① 정동교회 (1887. 9. 27.): 서울 정동의 언더우드 사택에서 2명의 장로를 비롯한 14명의 세례교인으로 조직


(4) 배재학당

① 국내 첫 감리교 세례: 배재학당 재학생 중 박중상이 세례를 받음 (1887. 7. 24.)

② 감리교 최초의 공중예배: 성경공부를 위해 ‘벧엘’이라 이름붙인 건물에서 오후예배를 드림 (1886. 10. 9.) 


2) 지역별 교회의 설립


(1) 감리회의 평양 선교

① 평양은 타지에 비해 양반계층이 적었고 신분차별도 덜하였으며, 무역과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이들이 많았음

② 미감리회: 의료선교사 홀의 평양 파송 결정 (1892)

③ 홀은 감리교회 (남산현교회), 교육사업 (광성학교, 정의여학교)과 의료사업 (기홀병원)을 시작함

④ 홀의 사망 (1894) 이후 노블이 사역을 승계함

⑤ 영변에 새로운 선교지부 설치 (1905)


(2) 북장로회의 평양 선교

① 북장로회: 마펫을 책임자로 하여 평양 진출 (1893)

② 널다리골교회(장대현교회)를 비롯해 여러 교회를 개척함

③ 숭실학교, 숭의학교, 장로회신학교 등이 세워짐

④ 제중병원이 문을 염 


(3) 북장로회의 황해도 선교

① 재령에 선교지부 설치 (1906)

② 서울 선교지부는 안악, 평양 선교지부는 해주를 맡아 선교함

③ 1906년 100여 개의 신앙공동체와 5,000여 명의 교인이 있었음

④ 황해도 중부와 북부는 재령에 설치된 선교지부에서 담당함


(4) 미감리회의 황해도 선교

① 해주와 신계를 중심으로 전개됨

② 연안읍교회, 해주읍교회

③ 해주에 선교지부 설치 (1909)

④ 구세병원 설립 (1913)


(5) 함경도 선교

① 북장로회: 게일(1892), 스왈른 (1894) 원산에 파송 → 광석동교회 설립 → 90명의 교인 출석 (1896) → 캐나다장로회에 이양 (1898)

② 미감리회: 올린저, 맥길 파송 → 전도사업과 의료선교 병행 → 남감리회로 이양 (1900)

③ 독립선교사: 하디, 펜윅

④ 원산 이남을 제외한 함경도 대부분을 캐나다 장로회가 관할하도록 함 (1908)

⑤ 캐나다장로회: 원산(1898), 성진(1901), 함흥(1904)에 선교지부 설치

⑥ 남감리회: 원산에 루씨여학교 설립


(6) 북장로회의 서울 선교

① 정동교회(새문안교회) 설립 (1887)

② 곤당골교회 (승동교회) 설립 (1893): 게일이 곤당골 한옥에 주일학교를 연 것이 기틀이 됨

③ 연못골교회 (연동교회) 설립 (1894): 리가 초가 한 채를 사들여 예배처소를 마련하면서 시작됨


(7) 미감리회의 서울 선교

① 정동감리교회(정동제일교회) 설립

② 중앙교회 (1890): 종로에 책방을 내고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전도함 → 중앙교회로 발전

③ 아현교회: 서대문밖 애오개(아현)에 스크랜던이 설립

④ 상동교회: 남대문안 상동에 스크랜턴이 설립

⑤ 동대문교회: 동대문 언덕에 스크랜턴이 설립


(8) 남감리회의 서울 선교

① 서울 남송현에 선교지부 설치 (1896)

② 경기도 고양읍에 남감리회 최초의 교회 설립

③ 서울교회(광희문교회) 개척

④ 남송현에 배화학당 설립 → 종교교회와 자교교회 태동


(9) 미감리회의 인천 선교

① 정동감리교회 교인 노병일의 전도로 시작됨 (1888)

② 내리교회 (1891): 아펜젤러, 용동(창영동) 언덕에 단층 예배당 건축


(10) 남감리회의 강원도 선교

① 남감리회, 나동식과 정동렬을 춘천에 파송함 (1898)

② 무스가 춘천을 방문해 퇴송골에 속회(감리교의 교회 조직) 형태의 신앙공동체 조직 (1901)

③ 춘천에 선교지부 설치 (1908)

④ 춘천예수교병원, 배영학원 설립

⑤ 원주읍교회 설립 (1905)

⑥ 선교지역 분할협정 (1909): 남감리회는 춘천 중심의 북부, 미감리회는 원주 중심의 남부 관할


(11) 북장로회의 충청북도 선교

① 밀러를 파송 (1901)

② 청주읍교회, 청남학교, 소민병원 설립

③ 선교지역 분할협정 (1909): 충주 등 북부지역은 북감리회, 청주 등 남부지역은 북장로회 관할


(12) 미감리회의 충청남도 선교

① 공주에 선교지부 설치 (1903)

② 샤프와 스웨어러를 파송해 공주를 중심으로 홍성과 천안 등지에 진출함

③ 스웨어러, 공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선교사 파송을 요청함 (1903)

④ 의료선교사 맥길 공주 도착 (1903. 7.)

⑤ 공주읍교회, 진료소, 영명학교 설립


(13) 남장로회의 충청남도 선교

① 선교사 불이 서천을 방문함

② 선교지역 분할협정 (1907): 서천, 금산, 보령, 부여의 일부를 제외한 충남의 대부분 지역을 미감리회가 관할


(14) 남장로회의 전라도 선교

① 데이트 선교사 남매, 전주에 정착 (1895. 11.)

② 전주교회 (전주서문교회) 설립

③ 의료선교사 해리슨 부임 (1896. 11.)

④ 신흥학교 (1901), 기전학교 (1902), 예수병원 (1902) 설립

⑤ 군산: 선교지부(1896), 구암교회,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군산예수병원 설립

⑥ 목포: 벨을 임명, 목포선교지부 설치, 양동학교, 영흥학교, 정명여학교, 프렌치기념병원 설립 (1898)

⑦ 광주: 벨, 양림동에 기지를 확보하고 의료선교사 오웬과 함께 광주로 이사, 이 후 선교사 사택,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및 광주제중원, 성경학원 등이 설립됨 (1905 - 1914)

⑧ 순천: 미국의 재력가 홧츠의 헌금을 받아 선교사 사택, 매산학교, 알렉산더 병원 건축

⑨ 1913년 전남 동부지역의 교인은 1,549명이었으며 1916년에는 2,507명으로 증가함


(15) 북장로회의 경상북도 선교

① 베어드, 경상도 전역에서 활동

② 대구: 선교지부 설치 (1899), 제중원 (동산의료원),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설립

③ 안동: 안동교회, 계명학교, 성소병원 설립


(16) 호주장로회의 경상남도 선교

① 부산: 데이비스(1890), 맥케이 (1891) 등 5명의 선교사 파송하여 부산진에 선교지부 설치, 일신여학교 설치 (1891)

② 진주: 배돈병원, 광림학교, 시원여학교 설립 (1905)

③ 마산: 창신학교, 의신여학교 설립 (1911)

④ 통영: 진명학교 설립 (1913)

⑤ 거창: 명덕학교 설립 (1913)


(17) 제주도 선교

① 이기풍 목사에 의해 시작됨 (1908)

② 금성리교회 (1908), 조천리교회 (1909), 성내교회 (1910) 등이 설립됨


3) 사회변동과 교회


(1) 교인의 증가와 그 원인

① 1888 - 1893년 완만하게 증가

② 1894 - 1896년 급증

③ 1905 - 1906년 급증

④ 원인: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교인 증가의 계기가 됨


(2) 전쟁과 선교

① 청일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평양에서는 교회가 피난민 수용소 역할을 함

② 동학농민전쟁 (1894 - 1895) 기간에도 교회가 피난처 역할을 함

③ 일본군이 서울에 진주한 직후 상동병원 지붕에는 성조기가 게양됨

④ 전쟁 중에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는 곳으로 교회 뿐 아니라 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이나 학교가 이용된 셈 → 교인 뿐 아니라 민중계층이 교회를 찾게된 계기

⑤ 기독교가 강대국의 종교로 인식되면서 민중계층 뿐 아니라 유식계층도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함

⑥ 독립협회는 서재필, 유치호 등 기독교인들이 주도함

⑦ 한성감옥에 투옥된 정치범들이 도서실에 비치된 기독교 서적을 읽으면서 기독교를 이해하게 됨

⑧ 언더우드와 벙커 주일마다 교대로 감옥에서 죄수들을 면회하고 상담함

⑨ 고위관리를 지냈거나 상당한 학식을 갖춘 이들이 대거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다른 유식계층의 개종을 유발함

⑩ 유식계층의 합류로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이 더욱 강화됨


제6장 부흥운동과 기독교 민족운동


1. 부흥운동과 교회의 성장


1) 원산부흥운동


(1) 남감리회와 캐나다장로회 소속 여선교사, 성경공부와 기도회 개최 (1903. 8.)

① 남감리회 여선교사 캐롤, 노울즈, 아운셀, 매컬리 등이 1주일간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갖게됨

② 하디가 성경공부를 인도함


(2) 하디의 고백

① 원산교회 교인들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 백인으로서의 우월의식, 권위주의 고백


(3) 원산집회 준비

① 프랜슨으로부터 원산에서 집회를 열고 싶다는 연락 받음

② 집회를 준비하는 뜻에서 원산에서 사역하는 한국인 전도인들과 선교부에서 일을 돕고 있던 한국인 직원들과 함께 매일 기도와 성경공부 모임을 갖기 시작함

③ 모임 중 최종손, 강태수이 자기 죄를 자백함


(4) 원산집회

① 원산장로교회에서 초교파적으로 1주일동안 열림 (1903. 10.)

② 프랜슨의 집회 후 한국인 교인들의 집단적이 회개운동이 일어남


(5) 타 지역 사경회 (1904. 1.)

① 개성 사경회(1904. 1.): 하디, 캐롤, 노울즈, 저다인이 인도함, 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죄를 자복함

② 강원도 동부 사경회: 하디가 지경터와 새술막에서 사경회 인도, “지난 3년 동안 전혀 변화를 보이지 않았던 교인들이 거의 다 회심을 체험”

③ 개성지방 연합부흥회 (1904. 2.): 하디, 개성 남부교회에서 10일간 진행함

④ 서울 자교교회 부흥회 (1904. 4.): 하디, 10일간 인도 → 배화여학교 부흥운동으로 연결됨

⑤ 서울 정동교회 (1904. 9.): ‘회개’와 ‘성신’을 주제로 설교

⑥ 평양 부흥회 (1904. 10.): 교회자립 열기가 고조되어 성미운동과 십일조운동이 전개됨

⑦ 인천 부흥회 (1904. 11.): 인천 제물포교회에서 1주일간 인도


2) 평양대부흥운동


(1) 평양대부흥운동의 준비

① 하디, 평양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의 연합기도회 인도 (1906. 8.)

② 서울에서 열린 존스턴의 집회 이후 평양의 선교사들과 교인들은 평양교회의 부흥을 위한 기도회를 염


(2) 장대현교회 부흥사경회

① 길선주 장로, 새벽기도회 인도

② 죄의 자백과 회개는 이후 이어지는 부흥운동의 가장 큰 특징이었음

③ 내면적 죄만을 고백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행위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용서를 비는 실천적인 회개운동도 함께 진행됨

④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에게까지 운동이 전파됨

(3) 부흥운동의 확대

① 평양부흥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평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음

② 서울 승등교회에서 길선주의 부흥회가 개최됨 (1907. 2.)

③ 의주에서 길선주의 부흥회가 개최됨 (1907. 8.)

④ 중국 요양과 봉천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장사정과 호만성 목사 등이 평양부흥회를 직접 목격하고 감


(4) 부흥운동의 긍정적인 영향

① 기독교의 신앙과 정신이 한국기독교에 뿌리 내리게 됨: 성령 임재에 대한 확신, 죄에 대한 고백, 심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해 한국교회가 체험

② 한국인 신자와 선교사간 이해 증진

③ 한국교회와 교인의 도덕성 향상

④ 성경공부와 기도가 고양됨

⑤ 교세가 급증: 1905년에 비해 1907년에 교회수 (321 → 642), 전도소 (470 → 1,045), 세례교인 (9,761 → 18,964), 학습교인 (30,136 → 99,300), 헌금 (13,528.67 → 53,197.85)


(5) 부흥운동의 부정적인 영향

① 한국교회의 비정치화 내지 몰역사성

② 선교사들은 한국교인이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함


3) 백만명구령운동


(1) 배경

① 선교사들은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을 전도운동의 호기로 파악함


(2) 전개

① 서울에서 교파와 계층을 초월한 대전도단이 조직됨 → 수만명이 참가하는 전도집회로 확산

② 날연보(day-offering): 전도운동을 하기 위해 물질적인 연보 외의 시간을 연보하는 방법으로 전도함

③ 문서전도: 수백만매의 전도지, 70만권이 넘는 마가복음서 쪽복음이 배포됨


(3) 결과

① 수많은 신자들이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긍심, 공동체 의식을 공고하게 느끼게 해줌

② 일제 침략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면이 있음


4) 교회 조직의 정비와 교세의 확장


(1) 교회조직 구성

① 당회, 노회, 총회로 구성

② 장로의 출현과 당회의 조직으로 한국인들이 행정, 치리, 예배인도에 참여할 수 있게 됨


(2) 장로공의회 결정 (1901. 9. 20.)

① 선교사 25명과 한국인 장로가 참여

② 영어회의와 한국어회의로 나뉨

③ 영어회의: 1907년 노회가 조직되기 전까지 선교사들로만 조직, 신학문제와 치리권 논의

④ 한국어회의: 입법권이 없는 토의 체제, 결혼, 감사절, 한글 간소화, 헌금사용, 가정예배, 성경공부 등 교인들의 실제 생활과 관련해 토의


(3) 노회 결성 (1907. 9. 17.)

① 장로회공의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노회 창립 선포

② 독립된 노회라는 의미에서 ‘독노회’라고 불림


(4) 장로회신경 채택

① 칼빈주의에 입각한 한편 웨스트민스턴 표준서들의 미국식 교회정치 규범을 따를 것을 전제함

② 인도 장로교회에서 채택된 내용(1904)을 근간으로 제정됨 

③ 한국인의 신앙고백이라기보다 선교사들의 의도대로 제정된 것


(5) 조선예수장로회 총회 창립 (1912. 9.)

① 7개 노회의 총대, 선교사를 포함한 목사 96명, 장로 125명 도합 221명이 모여 창립

② 초대회장에 서울의 언더우드 목사, 부회장에 평양의 길선주 목사, 서기에 서울의 한석진 목사, 부서기에 군산의 김필수 목사, 회계에 블레어, 부회계에 선천의 김석창 목사를 선임

③ 선교사 주도하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함


(6) 미감리회의 조직

① 서울 구역회 조직 (1897)

② 서지방회 (인천 중심), 북지방회 (평양 중심), 남지방회 (서울 중심)으로 분립됨 (1901)

③ 한국선교연회 조직 (1905. 6.)

④ 한국연회 창립 (1908. 3.)


(7) 남감리회

① 중국연회에 소속된 지방회 조직 (1897. 9.)

② 한국선교회로 확대 (1897. 12.)

③ 한국선교연회 조직 (1914)

④ 한국연회 설립 (1918. 10.)


2. 기독교 민족운동의 전개


1)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 계몽운동


(1) 근대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형성

① 초기의 근대식 교육 기관의 상당수는 선교사들이 설립하고 운영한 기독교계 학교

② 서양의 과학, 기술, 제도 뿐 아니라 종래의 봉건적 전통질서와 달리 사민, 남여 평등을 가르치고 근로에 대한 인식도 새롭게 함

③ 자주, 자립 정신에 입각한 민족의식을 고양시킴

④ 운동회, 연설회, 토론회를 장려해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는 ‘근대적 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추게 하는 데 기여함


(2)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 내 단체를 통한 민족의식 형성

① 협성회 (1896):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직 → 토론회와 연설회 개최, ‘협성회회보’ 발간

② 엡웟 청년회 (1897): 감리회 청년단체로 토론회, 연설회 개최


(3) 교계 신문을 통한 민족의식 형성

① 죠션크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신문: 1897년에 창간됨 → 전통사회 속에서 한국인의 애국심이 결여된 것을 지적하면서 교육을 통해 애민, 애족, 애국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함


② 독립신문 (1896): 서재필에 의해 창간됨 → 일반인들의 국가의식과 민권사상을 크게 향상시킴

③ 대한매일신보 (1904. 7.):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등에 의해 창간됨 →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 기사를 많이 실었으나, 국가의 현실을 외면하고 개인구원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일 때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함


(4) 황성기독교청년회 YMCA (1903)

① 독립협회 해산 이후 사실상 명맥이 끊어진 계몽운동을 재개함

② 대중집회: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연설회, 토론회, 환등회 개최

③ 실업교육: 상업, 부기, 대수, 산술, 측량, 건축, 사진, 목공, 철공, 제화, 인쇄, 가구제작, 영어, 일어, 한어 등 교육


(5) 교회 내 청년회

① 정동엡웟회 (1897): 정동감리교회 내의 청년회

② 상동청년회 (1897): 상동감리교회 내 청년회, 상동청년학원과 공옥학교 설립, 야학과 강습소 운영, ‘가뎡잡지’ 발간

③ 국민교육회 (1904): 연동장로교회 내 청년회, 국민사범학교와 법학강습소 설립, 서적 발간, 사립학교 지원, 연설회 개최


2) 을사늑약 반대운동과 의열투쟁


(1) 을사늑약 반대운동

① 상동감리교회에서 열린 상동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계속해서 상소하기로함

②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가장 먼저 이름을 적어 대한문 앞에서 상소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해산됨

③ 종로에서 가두연설회를 개최하였으나 해산됨


(2) 헤이그특사사건 (1907)

① 이준은 당시 연동장로교회 교인이었음

② 선교사 헐버트가 고종의 신임장을 이준에게 전달함


(3) 일진회 배척

① 일진회 비난 성명: 정동엡웟회와 국민교육회 회원, 친일단체인 일진회 비난 성명 발표

② 서북지방: 일진회 사무소 찾아가 항의하며 간판을 내리게 함 (1907. 8.)

③ 원주: 해산된 구한국군 3백여 명과 기독교인 1천여 명이 일진회 공격

④ 강화: 일진회 간부였던 강화군수가 의병에 의해 살해 → 일본군, 평소 일진회를 규탄하던 감리교인 김동수와 그의 두 동생 처형

⑤ 이천: 감리교 전도사 구연영과 그의 아들이 일진회를 배척했다는 이유로 처형됨

⑥ 양근: 기독교인들과 일진회원들 사이 무력충돌 발생

⑦ 목천: 일본군과 일진회원들이 교회를 불태우고 교인 살해

⑧ 행주: 300여 호 주민들에게 자위단 가입을 강요하자 집단으로 기독교인이 됨

⑨ 고원: 수백명이 기독교인이 됨

⑩ 의주: 기독교인들이 선교사를 빙자하여 자위단을 배척함

⑪ 교회는 일진회와 자위단을 배척하는 단체로 알려지게 됨


(4) 의병활동

① 기독교인들이 의병운동에 적극 가담한 것은 아님

② 선교사들이 시종 의병들을 ‘강도’, ‘폭도’라 비판하며 부정적 입장을 보임


(5) 의열투쟁

① 상동교회의 전덕기, 정순만 등 ‘을사오적’ 암살 계획 → 불발

② 장인환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 저격 (1908. 3.)

③ 천주교인 안중근과 개신교인 우덕순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함께 거사함 (1909. 10. 26.)

④ 이재명 이완용 습격 (1909)

⑤ 정재홍, 박영효환영회에 참석하여 행사 도중 자결 (1907. 7.)


3) 항일경제운동과 국가를 위한 기도회


(1) 선교사들의 사업

① 알렌: 한국 최대의 금광인 운산금광의 채광권을 무상으로 하사받음 → 미국 광산업자에게 넘기면서 거액의 돈을 받음,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에 넘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함

② 언더우드: 석유, 석탄, 농기구 등을 수입하고 판매함

③ 빈튼: 백여 대의 재봉틀을 들여다 팜

④ 마펫, 리: 압록강 연변의 3천여 그루의 나무를 시금지불하지 않고 벌채하려는 이권에 관계해 물의를 일으킴


(2)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의 갈등

①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국통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려는 데 반해 한국인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음


(3) 신민회의 항일경제운동

① 서북지방 토착자본가 및 상공업자가 주축이 됨

② 소규모 토착자본을 규합해 강력하게 침투해 오는 일제의 자본과 상품에 대항할 만한 민족기업 설립하려 함

③ 주도자인 이승훈이 105인 사건에 연류되어 동력을 잃음

④ 의의: 배일의식이 강했던 많은 청년들이 평양 마산 자기회사에 입사하여 민족의식을 공고히 함


(4) 소상공업자의 움직임

① 일본상품에 대한 물매운동과 시장세 등 잡세 징수에 대한 항세운동

② 기독교 상인봉기운동 전개


(5) 국채보상운동

① 인천의 감리교회 부인들이 국미적성회를 조직하여 가족수에 따라 성미를 모아 헌금으로 냄, 회원이 500명에 이름

② 평남 삼화항 비석동교회 부인들이 패물과 식기를 팔고 바느질과 빨래로 품삯을 벌어 의연함, 소학교 학생들도 모금에 동참


(6) 기도회 개최

① 연동장로교회에서 ‘위국기도문’ 1만장을 인쇄해 배포하고 매일 오후 3~4시 국가를 위해 기도하도록 교인들에게 당부 (1905. 7.)


4) 신민회의 조직과 활동


(1) 신민회의 구성

① 1900년대 국내 최대의 항일비밀결사였음

② 중심인물 대부분 기독교인

③ 상동청년회와 같은 기존의 항일민족단체가 큰 역할을 함

④ 안창호, 양기탁, 이갑,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전덕기 등이 상동청년회와 관련된 인사들이었음

⑤ 서울에 중앙조직을 두고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지방조직 구축


(2) 신민회의 활동

① 민족의 의식개혁을 위한 계몽운동에 주력

② 대성학교, 오산학교 설립

③ 태극서관, 무역상사, 자기회사 설립

④ 중국 산동성 청도에서 회의를 열고 국회 독립기지 건설과 군관학교 설립 계획 (1910. 4.)


(3) 신민회 활동의 의의

① 한편에서는 선교사와 교회를 중심으로 탈정치적인 신앙부흥운동이 추진되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정치적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가 창립됨

② 정치적 ‘현실참여’ 문제를 놓고 한국교회가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를 보이는 시발점이 됨


5) 해외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1) 간도

① 북간도 용정촌: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한 바 있는 이상설, 이동녕, 정순만, 여준 등이 한인촌을 건설하고 서전서숙을 설립함

② 명동촌: 김약연 목사, 명동촌에 한인촌을 건설하고 명동학교 설립 (1908)

③ 연변교민회 (1907): 한국인들의 단결, 친목, 복리증진, 사상계몽등을 목적으로 김약연, 김영학, 구춘선, 문치정, 마진 등 기독교인들이 설립을 주도함

④ 간민회 (1909): 한국인들을 대표하여 관청과 교섭하며 중재역할을 함

⑤ 명동학교, 모범학당, 태광학교, 교향학교, 제동학교, 창동학교, 광성학교, 배영학교 설립


(2) 일본

①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김정식을 파송해 기독교청년회 조직에 착수함 (1906. 8.)

②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창립 (1906. 11.)

③ 성경공부, 종교집회, 한∙중∙일 학생연합기도회 개최

④ 동경한인교회 설립 (1909. 5.)

⑤ 재일항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함


(3) 미주

① 1902년 12월부터 1905년까지 5,567명이 하와이로 떠나 정착했음

② 한국인들의 하와이 이주는 감리교 선교사와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됨

③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설립 (1903) → 1914년까지 예배당과 전도처가 35개 설립됨

④ 신민회(1903), 혈성단(1906), 자강회(1906), 공진회(1906), 의성회(1907), 한인합성협회 (1907) 설립

⑤ 미국본토에서는 상항친목회(1903. 9.), 공립협회(1903. 11.) 창립 - 회원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음


6) 선교사와 민족운동


(1) 1890년대

①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기면서까지 한국왕실과 유착해 영향력을 행사함

② 외국인으로서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림

③ 정부로부터 호조 (여행증명서)를 받아 각지를 여행하며 이권에 개입

④ 주한미국공사는 선교사들의 정치적 활동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림 (1897)


(2) 1900년대

① 한국에 대한 일제의 지배가 강화되자 선교사들은 현실문제에 일정한 거리를 둠

②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본적이 됨

③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권위에 대한 복종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강조하고 과격한 민족운동을 비난하며 정교분리를 강조함

④ 비정치화선언 (1901. 9.)

⑤ 어떤 선교사들은 일본의 한국통치를 환영함 (문명국인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것이 부패한 한국정부의 통치를 받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함)


(3) 결과

① 자유사상과 민족의식을 일깨워 준 선교사들이 일제의 주권 침탈을 묵인∙방조한 점은 한국교인들에게 실망을 안겨 줌

② 헐버트, 항일운동에 참여함 (고종의 친서를 갖고 미국에 건너가 한국의 국권유지 호소, 헤이그특사 파견을 중재하고 후원)



3. 일제의 기독교정책과 탄압


1) 일제의 기독교정책


(1) 이토 히로부미의 기독교 회유 정책

① 선교사를 회유∙이용하여 일본의 한국 국권침탈에 대한 세계여론의 비판을 무마하고, 한국인들의 저항의식을 분열∙저지 시키고자 함

② 선교의 자유 공인, 선교사들과의 접촉 강화

③ 평양 감리교 교회당을 설립하는 자금으로 1만엔의 기금 지원

④ 한국 재판소의 최고 기관인 고등법원장에 일본 기독교도인 와타나베 임명

⑤ 종교 목적으로 사용하는 토지에 대해서 지세를 부과하지 않음

⑥ 교회 소속의 전답, 선교사들의 주택부지 등에 면세 특전


(2) 기독교 교육

① ‘회견각서’: 일제의 교육 방침에 따르겠다고 밝힘 (1908. 3.)

② 사립학교령 반포에 관한 훈령: 외국인이 설립한 학교는 사립학교령에 적용의 받지 않음


(3) 일제의 감시

① 헌병경찰을 이용하여 선교사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시

② 배일적인 태도가 보이면 트집을 잡고 압력을 넣음


2) 일본조합교회의 한국 전도


(1) 일본조합교회의 형성

① 해외선교위원회 미국본부의 선교사 그린이 고베에 파송되어 선교함으로 시작됨 (1869. 11.)

② 일본기독전도회사라는 선교단체 구성 → 조합기독교교회로 명칭을 바꾸어 독립교단 형성 (1886. 4.)


(2) 해외전도

① 한국에 전도사 파송 결정 (1903. 10.) → 서울에 한양교회 설립 (1904. 7.) → 평양에 기성교회 설립 (1907. 10.) → 전도대상은 일본인이었고 설립한 교회도 일본인 교회였음

② 와타세 쓰네요시, 한국인을 전도대상으로 해야한다고 주장함

③ “일한 양국인의 융화합동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봄


(3) 한국전도

① 제26회 총회의 신도대회를 통해 조선전도 결의 (1910. 10.)

② 조선총독부, 매년 기밀비에서 수천원을 익명으로 조합교회에 전도비로 지원함

③ 1913년 7월 경, 일본인 교회 4개처, 교인 500명, 한국인교회 44개처, 교인 약 3,500명으로 급증함

④ 3∙1운동 이후 교세가 급격히 줄어듬

⑤ 조선전도부 폐지 (1921. 10.) → 조선회중교회로 분리 (교회 35개처, 교인 2,955명)


3)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


(1) 안악사건 배경

① 안중근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 황해도 안악지방에서 무관학교의 설립자금을 모집하다가 친일분자의 밀고로 헌병경찰에 체포됨


(2) 안악사건 전개

① 사건을 날조, 확대해 160여명을 검거,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강요함

② 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데리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자금이라고 함

③ 이명근, 이승길, 김홍량, 김구, 최명식 등 16명을 공판에 회부함 → 5~15년의 징역형 선고


(3) 105인사건

① 배경: 일제 헌병경찰, 서북지방의 기독교 민족운동가들을 일소할 계획을 세움

② 전개: 서울, 평양, 선천과 같은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밀집해 있는 대도시의 기독교 지도자를 체포하여 사건 날조

③ 내용: 총독 암살

④ 영향: 신문 과정에서 신민회의 실체가 포착됨


(4) 서방세계의 반응

① 당시 한국기독교청년회(YMCA) 총무로 있던 질레트가 중국인 친구에게 이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편지를 보냄

그 친구가 이를 상해의 The China Press에 공개함으로써 알려짐

② 세계 언론은 특파원을 한국에 파견하는 등 비상한 관심을 보임

③ 1심 판결은 세계 언론의 세찬 비난을 받음 (증인과 증거물이 채택되지 않고 검찰측이 제출한 몇 가지 허위자백만 증거물로 함)

④ 2심에서 105명 중 99명을 무죄로 석방함


(5) 의의

① 허위성과 부당성을 세계에 알림으로써 일제의 올무로부터 항일민족세력을 보호할 수 있었음

② 고초를 겪은 다수 기독교인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양시킴 → 3∙1운동으로 이어짐

③ 기독교는 고통과 수난을 통해 성숙한 신앙을 갖게 됨




제7장 3∙1운동과 기독교 (1919~1925)


1. 3∙1운동과 기독교


1) 3∙1운동의 배경


(1) 3∙1운동의 원인

①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열망

② 종교탄압: 민족적 성향이 짙은 종교(천도교, 대종교 등)를 탄압함

③ 포교규칙 (1915): 포교자는 반드시 자격증 발급받아야 함, 예배당과 포교소를 설립∙변경할 때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함, 예배∙전도회∙사경회∙부흥회∙기도회 등을 방해하거나 경관을 파견하여 감시하고 트집잡음

④ 출판물 검열: 성서공회에서 발행한 팸플릿의 “조선의 형제여, 각각 마음속에 있는 악마를 격퇴해야 합니다”란 문구를 문제삼아 발매금지 처분 내림

⑤ 사립학교규칙 (1915): 학교에서 종교의식과 종교교육 금지, 일본어로 가르치도록 강요 → 1910년 829개교이던 종교계 학교가 1919년 5월 298개로 줄어듬

⑥ 신도나 조합교회와 같은 일본의 종교를 지원∙장려하여 민족적 종교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책을 펼침


(2) 교회의 성장

① 해외 한인들의 거주지역에 한국인 교역자를 파견하여 선교사업을 펼침

② 신학잡지 창간: 기독신보(1915), 신학세계(1916), 신학지남(1918)

③ 교파간 연합운동: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창설 (1918)

④ 3∙1운동 직전, 장로교인이 16만 명, 김리교인이 3만명, 기타교파까지 포함하면 20만 명에 이름


(3) 국내 기독교 민족운동

① 송죽회 (1913): 평양 숭의여학교에서 교사 황애덕의 주도로 비밀결사단체가 결성됨

② 한영서원 애국창가집사건 (1915): 개성 한영서원 교사 신영순∙이상춘 등이 국권회복을 고무하는 내용의 창가집을 편찬∙배포하다가 보안법 위반 및 불경죄로 체포됨

③ 조선국민회 (1917): 평양 숭실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이 자주독립을 위한 비밀결사를 결성함 → 적발되어 25명이 체포됨


(4) 국외 기독교 민족운동

① 신한청년단 (1918): 상해에서 “대한독립∙사회개조∙세계대동”을 목표로 결성됨 → 김병조∙손정도∙손병조∙조상섭∙여운형∙장붕 등 주요 인사 대부분이 기독교인 → 독립청원서 작성,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대표파견 → 재일 한인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하는 데 촉진제 역할 → 3∙1운동에 영향을 줌


2) 3∙1운동의 전개와 수난 


(1) 국외 단체의 활동

① 신한청년당: 여운형, 평북 선천에서 열리는 노회 출석을 명분으로 입국하여 이상재 ∙이승훈 등을 만나 국외정세와 국내에서 할 일을 보고 겸 토론하고 상해로 돌아감 (1918)

② 대한인국민회: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 발송, 민족자결주의원칙에 따른 약소민족 독립 결의 (1918)

③ 재일청년: ‘조선기독교청년회’와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친목회∙운동회∙웅변대회 등을 개최 → 유학생 항우회 망년회와 동서연합웅변대회에서 독립문제를 의제로 토론을 벌이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 → 2∙8 독립선언


(2) 국내 기독교계의 활동

① 선우혁이 이승훈∙양전백 등을 찾아가 독립운동 협의 (1919. 1. - 2.) → 평양∙선천∙정주 등 서북지역의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함

② 천도교와의 연합을 추진 (1919. 2. 7.)

③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 세브란스병원 제약주임인 이갑성 등도 강기덕∙김원벽 등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과 독립운시위운동 계획 → 기독교∙천도교∙불교의 연합전선에 합류

④ 비폭력 평화시위라는 방법론에 의견일치

⑤ 상당수 기독교인이 민족의식 뿐 아니라 신앙적 동기에서 이 운동에 참여함

⑥ 시위는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이 강한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어 3월 중순경까지 전국으로 파급됨


(3) 일제의 탄압

① 강서 학살사건: 1919. 3. 2. - 3. 사천교회 교인들과 원장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43명이 즉사, 20여 명이 중상을 입음

② 서울 십자가 학살사건: 1919. 3. 9. 다수의 기독교인을 체포해 교회로 끌고 가 십자가에 묶고 총검으로 찔러 죽인 사건

③ 수원 제암리교회 방화∙학살 사건: 일본군이 마을의 기독교와 천도교 신자 30여 명을 교회에 불러 모은 다음 교회 문을 폐쇄한 후 불을 지르고 사격하여 29명을 학살하고 민가 31호를 방화한 사건

④ 장로교의 피해 : 체포된자: 3,804 / 체포된 목사∙장로: 134 / 기타 기독교관계 지도자로 체포된 자: 202 / 감금된 남자신자: 2,125  감금된 여자신자: 531  / 매맞고 방면된 자: 2,162 / 사살된 자: 41  현재 수감 중인 자: 1,642 / 매맞고 죽은 자: 6 / 파괴된 예배당: 12

⑤ 총인구의 1.5%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인이 3∙1운동과 관련된 피검자의 17.6%를 차지


(4) 일제의 회유와 분열 정책

① 선교사와 한국교회, 교회 지도자와 평신도,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를 이간시킴

② 1920년대 교회 일각에서 이른바 ‘타협주의’∙’개량주의’의 노선을 걷게 되는 계기


3) 3∙1운동 참여의 의의


(1) 기독교인들의 참여 의의

① 성경을 통하여 정의∙자유∙평등∙해방 등의 이념을 체득한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토대로한 신앙의 기초 위에서 항일민족운동에 적극 참여


(2) 일반인들의 인식 변화

① 기독교인들이 선봉에 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당한 핍박과 희생을 목격한 민중들은 그들에 대한 반감을 거두고 존경하게 됨

② 3∙1운동을 통해 기독교가 민족종교로 인정받게 됨

③ 3∙1운동 이후 교세가 만회됨


(3) 초월적 신비주의 신앙운동

① 김익두∙길선주∙이용도 등 주로 부흥운동가에 의해 주도됨

② 기적과 이적을 동반한 열광적 부흥운동

③ 3∙1운동 직후 패배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창출된 신앙운동

④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재림 및 종말신앙으로 발전

⑤ 기독교인들의 현실도피적인 내세신앙이 정착되는 계기가 됨


(4) 계몽주의 신앙운동

① 3∙1운동 실패의 원인을 민족의 독립역량 부족으로 인식

② 적극적인 항일투쟁보다는 민족계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함

③ 궁극적인 목표는 기독교 정신으로 민족과 나라를 ‘개조’한다는 것

④ 1920~30년대 기독교 측에서 농촌계몽운동∙문맹퇴치운동∙절제운동∙야학운동∙문서운동∙여성계몽운동 등을 적극 추진하게 되는 이론적 근거


(5) 3∙1운동의 기독교사적 의의

① 민족의 독립과 자주는 한말부터 형성된 기독교인의 민족운동 이념과 일치

② 3∙1운동의 방법론인 ‘독립청원론’과 ‘비폭력평화운동’도 기독교 근본신앙과 현실인식에서 나온 것

③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강렬한 신앙적 동기에서 3∙1운동에 참여함

④ 내세지향적 재림신앙과 사회개조운동으로 발전함


2. 사회변화와 기독교 민족운동


1) 총독부의 정책 변화


(1) 문화정치

① 하세가와가 경질되고 사이토가 조선총독으로 임명됨 (1919. 8.)

② 내용: 헌병경찰제의 폐지와 보통경찰제 실시, 일반관리의 패검 금지, 한국인 관리임명 및 급여규정의 변경, 한글 신문의 허가

③ 한계: 경찰의 인원∙화력∙경비 등은 2~3배로 증가함, 한국인 관리를 회유∙매수하여 지배체제를 강화하고 민족분열 조장


(2) 한국교회에 대한 정책

① 선교사들이 ‘전선 선교사대회 진정서’ 제출 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함

② 포교규칙: 교회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꿈

③ 사립학교규칙: 기독교계 학교에서 종교교육 허용

④ 지방을 순시할 때 그 지역 선교사들을 만나 다과회나 오찬회를 베품

⑤ 외국관계와 국제여론을 의식해 선교사들을 회유하는 데 주력함


2) 사회주의운동과 기독교 


(1) 배경

① 선교사들을 둘러싼 ‘비행’∙’추문’이 언론에 보도됨

②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적 편견

③ 신비주의적 부흥운동


(2) 사회주의자의 기독교 비판 근거

①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수족, 자본주의의 주구로서 일제에 협력

② 현실에 대한 긍정과 복종을 강요하여 독립정신 말살

③ 과학사상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허위를 선전


(3)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운동

① 전조선청년당대회 (1923. 3.):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인하기로 가결함

② 경성신흥청년동맹회 총회 (1924. 1.): 반종교∙반기독교의 입장 표명

③ 12월 25일을 ‘반기독데이’로 명명

④ 김익두 목사와 같은 부흥사를 ‘고등무당’이라고 비난함


(4) 기독교계의 반응

① 냉소적인 태도, 타당성을 인정하는 반응, 기독교와 사회주의가 서로 조화될 수 있다는 반응


(5) 기독교인 출신 사회주의자

① 이동휘, 여운형

②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단체인 한인사회당에도 기독교인들이 상당 수 참여함


3) 국내의 기독교 민족운동


(1) 한국애국부인회

① 장로교 측, 감리교 측 애국부인회가 별도로 조직됨 (1919. 6.)

② 임시정부로부터 통합 권유를 받아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로 통합함 (1919. 11.)

③ 주요사업: 동지규합, 군자금 모금, 배일사상 고취, 결사대 조직, 독립운동요원 원조 등

④ 2,400여 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함

⑤ 연통제의 업무를 담당함


(2) 일제의 탄압

① 나남사건: 함북감독부 임시정부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 조직됨 → 일제에 발각되어 부감독 김인서 등 47명이 옥고를 치름 (1919. 12.)


(3) 대한독립애국단

① 서울에서 결성 (1919. 5.)

② 강원도∙전라도∙충청도에 지단을 두고 임시정부 지원

③ 핵심인물 대다수가 기독교인

④ 조선인관리 퇴직동맹계획: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을 모두 퇴직시켜 일제의 행정기능을 마비시키려는 계획 → 1920년 1월 일제에 발각되어 무산되고 대한독립애국단도 해산됨


(4) 대한민국청년외교단

① 서울에서 조직됨 (1919. 5.)

② 단원 대다수가 기독교인

③ 국외지부 설치, 조소앙을 비롯한 외교원의 파견, ‘외교시보’ 발간 등의 활동,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 연통부 역할 수행, 군자금 모금

④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결성과 활동 지도

⑤ 대한적십자회의 대한총지부를 설치하여 국내의 적십자활동 주도


(5) 대한민국애국부인회

① 혈성부인회 (1919. 3.)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1919. 4.)가 통합∙발족

② 회원 대다수가 기독교인

③ 투옥인사와 그 가족을 돕기 위해 조직

④ 정신여학교 재학생∙졸업생 다수가 참여

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일제에 탐지되면서 이 회도 적발됨


(6) 한민회

① 평양에서 조직됨 (1919. 10.)

② ‘독립신문’ 등 선전문 배포, 독립군의 국내 진공시 일제관리∙친일파의 암살, 공공시설의 파괴 등을 계획

③ 평남 영원군 온화면사무소 습격하여 현금 탈취, 서류 소각 (1920. 9. 18.)


(7) 강우규의 의열활동

① 대한노인동맹단에 가입하여 조직적 독립운동을 함

②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총독은 죽지 않고 수행원과 일경 30여 명의 사상자를 냄 (1919. 9. 2.)

③ 교수형 (1920. 11. 29.)


(8) 박치의의 의열활동

① 미국 국회의원들의 방한(1920. 8.)을 즈음하여 이들에게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려는 시도가 있었음 

② 선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일깨움

③ 박치의는 사형을 받음


(9) 김상옥의 의열활동

① 총독을 비롯한 일본 관리들과 친일파들을 제거하려고 암살단을 조직함 (1919. 12.)

② 사전에 정보가 누설되어 실행하지 못함

③ 의열단에 가담해 무기를 가지고 국내로 잠입

④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1923. 1.)

⑤ 권총으로 자결함


(10) 그 외의 의열활동

① 안경신: 광복군총영 결사대와 함께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려 함 (1920. 8.)

② 김예진: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짐 (1920. 8.)

③ 김익상: 총독부에 폭탄을 던짐 (1921. 9. 12.)


4) 국외의 기독교 민족운동


(1) 신한청년단

① 임시정부의 모체가 된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운영 함

② 핵심인물 김구∙김규식∙서병호∙송병조∙여운형∙장덕수 등이 기독교인

③ 단원의 상당수는 상해한인교회에 출석함

④ 외교활동: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냄,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


(2) 대한국민회

① 회원 대다수가 기독교인

② 1920년 8월 당시 연길현∙왕청현∙화룡현 등 3개 현에 10개의 지방회와 133개의 지회를 둔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단체

③ 무력투쟁을 위해 북간도와 함경도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

④ 연해주에서 무기 구입

⑤ 독립군 양성을 위해 징병제 실시

⑥ 연길현 명월구에 사관학교 설립 (1920. 7.)

⑦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등과 합류

⑧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사살 157명, 중상 200명 (1920. 7. 7.)

⑨ 연길현에서 대한신민간∙대한의민단∙훈춘한민회 등 기독교계 무장단체와 연합해 완루구전투∙고동곡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격파 (1920. 10.)


(3) 대한신민단

① 단장 김규면을 비롯한 단원 대다수가 기독교인 

② 신민회의 계승을 선언

③ 독립전쟁을 위한 교전단체임을 표방

④ 민주제에 의한 독립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함

⑤ 블라디보스토크로 본부를 이전하고 북간도에는 지회와 의사부를 둠

⑥ 수시로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임 

⑦ 봉오동 전투, 완루구전투, 고동곡전투, 어랑촌전투 등에 참여함


(4) 영향

① 훈춘사건 (1920. 10.): 독립운동기지가 초토화되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색출∙처형됨, 교회와 가옥이 소각됨

경건주의적 비정치화 경향이 나타남

② ‘기독교국가’ 미국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아 러시아에 의존하여 독립을 달성하려 시도함 → 사회주의자로 전향하는 사례도 생김


3. 교회의 문화운동


1) 교회 합동운동과 연합사업


(1) 배경

① 초교파 세계교회운동: 정쟁물자 헌금에 적극적이었단 미국의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교파를 초월하여 전후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자는 취지하에서 세계 30여 교파 교회가 참여함

② 국내의 반응: 교파교회로 정착한 현실을 외면한 물리적 합동을 걱정함

③ 1905년 교회합동을 강력히 요구했다가 교리적이 아닌 정치적 문제 때문에 실패했던 한국교인들은 선교사들이 주도한 합동운동에 섣불리 동조하지 못함


(2)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① 친목과 협력을 위한 협의체

② 조선예수교장로회, 미감리회, 남감리회 등 3개 교단 대표들이 참여

③ 전문 17개조의 헌법에서 각 교파의 교리와 정치 문제는 관여하지 못한다는 원칙을 확실히 함


(3)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①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혐의회와 선교사들의 연합공의회를 일원화해야한다는 의견에 따라 창설됨 (1924. 9. 24.)

② 설립의 목적과 취지는 교회의 ‘합동’이 아닌 ‘협동’에 있었음

③ 구성: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미감리회, 조선남감리회, 미국 북장로회, 미국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장로회, 캐나다연합, 회미감리회, 남감리회, 대영성서공회, 조선기독교청년회(YMCA)

④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로 개칭 (1931)

⑤ 해산 (1937): 이 당시에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조선예수교서회,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재일본 캐나다장로회선교회,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 등도 회원이었음

⑥ 회원 대표: 세례교인 5천 명까지는 1천 명에 1명씩, 그 이상은 5천 명에 1명씩 더하여 선출, 선교사 20명에 1명씩 선출, 1기관 1명씩 선출 → 한국교회의 대표가 선교사를 수적으로 능가함 → 연합공의회를 존속시키며 조선예수교⑦ 연합공의회와는 별도의 협의체 유지

⑧ 선교지역 분할문제를 비롯한 각 교파∙선교부 간의 선교정책에 한국인들이 참여할 수 있게 됨

⑨ 재일 한국인 선교를 관장하게 됨

⑩ ‘기독신보’, ‘주일학교잡지’ 등 정기간행물 발행

⑪ 세브란스병원, 평양기독교연합병원, 연희전문학교, 숭실전문학교 등 장∙감 연합기관의 운영에 참여

⑫ 일제가 종교탄압을 목적으로 제정하려던 ‘종교법안’에 반대해 제정을 10년간 유예시킴


(4) 의의

① 한국인의 참여와 비중이 점차 늘어남

② 국내외 선교사업에 한국교회가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됨


2) 기독교 문서운동


(1) 잡지

① The Korea Mission Field (1905): 선교사들이 발행한 영문잡지

② 신학세계 (1916):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발행

③ 교회지남 (1916): 안식교에서 발행

④ 활천 (1922): 성결교에서 발행

⑤ 사관 (1927): 구세군에서 발행

⑥ 현대 (1920), 젊은이 (1923), 사명 (1926): 일본 도쿄조선 YMCA에서 발행

⑦ 청년 (1921): 서울YMCA에서 발행

⑧ 주일학교잡지 (1925): 조선주일학교연합회의에서 발행

⑨ 진생 (1925):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엽합회에서 발행


(2) 개인지 또는 동인지 형태의 잡지

① 선민 (1919): 강매

② 신생활 (1922): 박희도

③ 천래지성 (1925): 최태용

④ 성서조선 (1927): 김교신

⑤ 신생 (1928): 유형기


(3) 의의

① 일제강점기에 창간된 기독교 신문과 잡지: 1910년대 21종, 1920년대 43종, 1930년대 49종, 1940년대 6종 등 119종에 이름

② 한국교회가 문서선교에 관심을 갖고 노력했음을 보여줌

③ 기독교계의 독서층이 두터웠음을 짐작케 함

④ 서구의 신학과 문화를 국내에 소개했을 뿐 아니라 한국적인 기독교 문화를 창출하ㅡㄴ 데도 기여함


(4) 조선기독교창문사

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저성인들이 모여 설립한 주체적 문서운동기관

② 기독교적 문화운동으로 제반 기독교의 서적을 간행 판매

③ 잡지와 기타 도서 간행 및 판매

④ 인쇄, 교육용품 판매

⑤ 강연단을 조직해 전국을 돌며 한국인 자본으로 설립된 문서선교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주식 모집

⑥ 초기에는 ‘조선기독교광문사’라 불림 (1922. 1.)

⑦ 창립총회 당시 주주는 1,257명

⑧ 신생명 발행 (1923. 7.): 일제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선교사 쿤스와 겐소 등을 발행인으로 등록했으나 실질적인 편집은 한국인이 맡음 → 일제의 압박과 내부적 변화로 1925. 4. 통권 21호로 폐간

⑨ 단행본 발행: ‘창세기강해’ (1923), ‘어린동무’ (김필례), ‘조선동요집’ (엄필진), ‘형제극’ (이석락), ‘오버디힐’, ‘한송이 백합’, ‘성경의 인물’, ‘바울과 그의 신앙’ (박승봉), ‘예수교장로회 예식서’, ‘현대의 성경 해석’ (포스딕), ‘기독과 실제문제’ (유형기), ‘신약의 역사적 배경’, ‘조선기독교급외교사’ 

⑩ 신역 성경전서 (1925) 발행: 성서개역위원회는 별도로 게일과 이원모가 독자적으로 번역한 사약(私譯), 조선어풍을 최대한 살림

⑪ 1930년대에 경영난으로 소멸

⑫ 의의: 민족주체적인 기독교 지성운동을 추진함


(5) 성경 개역

① 구약: 1911년 구약 전체 번역이 완료된 후 ‘개역자회’가 구성됨 → 1936년 개역이 완료됨

② 신약: 개역자회 조직 (1926) → 개역작업 완료 (1937)

③ 신양젼셔 관쥬 (1921): 성경 연구자를 위한 관주성경, 이익채가 편집

④ 관주 선한문 구약전서 (1926): 정태용, 조용규 편집


(6) 찬송가

① 찬숑가 (1908): 장∙감 연합

② 신정 찬송가 (1931): 찬송가위원회를 구성해 개정

③ 신편 찬송가 (1935): 장∙감 연합전선에 균열이 나타나 장로회에서 별도로 발행함


3) 기독교 교육사업


(1) 사립학교규칙 (1915. 3.)

① 일본어의 사용과 종교교육 금지가 핵심 

② 3∙1운동 이후 종교학교에서 종교교육을 허락함


(2) 조선교육령 (1922. 2.)

① 총독부에서 요구하는 학제와 재정을 갖춘 학교를 ‘지정학교’로 인가함

② 감리교계 학교들은 고등보통학교 인가절차를 밟음

③ 장로교계 학교는 대부분 이를 거부함

④ 인가를 거부한 장로교 학교들에 대해 상급학교 진학자격을 부여하지 않음

⑤ 일반학생들이 종교학교 진학을 기피하는 현상 발생

⑥ 종교계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폐지하라는 학생들의 반대시위가 빈번하게 일어남


(3) 주일학교

① 1920~22년 사이에 주일학교 학생이 30% 이상 증가함

② 조선주일학교대회: 1921년부터 4년마다 열림


4) 교파별 교회의 발전


(1) 성결교회

① 전국 각지에 교회 설립

② 서울의 성서학원을 통해 목회자 배출

③ 중생∙성결∙신유∙재림이라는 교리적 특징과 특수한 전도방법론으로 다른 교파에 흡수되지 않고 별도의 교회제도 구축

④ 경성∙대전∙경북∙경남 4개 지방회 조직 (1920)

⑤ 장로사를 두어 순회목회하도록 함

⑥ 교역자간담회 (1921. 4.): 목회자들의 협의기구 → 교역자회 (1924)

⑦ 고문회 (1921. 7.): 최고의결기구 → 이사회 설치 (1924)

⑧ 활천 (1923. 11.): 기관지

⑨ 실질적인 교회운영권은 선교사에게 있었음 → 총회 분규사건 (1936)


(2) 성공회

① 트롤로프를 중심으로 성장 (1911)

② 성미가엘신학원 설립 (1914): 강화에 설립, 첫 한국인 사제인 김희준 배출 (1915)

③ 조선성공회 헌장과 법규 제정 (1916): 교구의회가 최상권의 기구가 됨

④ 서울대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하여 1926년에 완공


(3) 구세군

① 서울 평동에 남자고아원인 육아원 설립 (1918. 12.)

② 아현동에 건물을 마련해 70여 명의 고아 수용 (1923) → 서울후생학원

③ 여자고아원인 여자실업관 설립 (1916) → 혜천원

④ 걸인과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 운영

⑤ 자선냄비 모금운동 시작 (1928)

⑥ 파송된 선교사관과 한국인 사관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


(4) 대한기독교회

① 펜윅 일선에서 은퇴 (1914) → ‘달편지’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함

② 만주와 시베리아 선교에 착수

③ 동아기독교교회로 개칭 (1921)


(5) 플리머드형제파

① 서울과 수원을 중심으로 소규모 신앙공동체 운동 지속

② 노리마츠, ‘성서강당’이란 집회소 설립

③ 은혜진리 창간 (1911) → ‘복음신보’ (1917)

④ 이후 ‘기독동신회’로 불림


(6) 일본조합교회

① 3∙1운동로 큰 타격을 받음: 3∙1운동 직전 59개 교회, 교인 15,005명이었으나 1921년에는 7개 교회 636명으로 격감

② 조선회중교회로 개칭 (1921. 9.)

③ 유일선을 대표자로 내세워 이미지 쇄신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해방까지 20여 교회가 남음


(7) 천주교회 

① 서울교구와 대구교구 설치 (1911. 4.)

② 원산교구 설치 (1920. 8.)

③ 평양대목구가 분리됨 (1927)

④ 청년회 활동: 경성교구천주교회청년연합회 (1922), 남방천주교청년회 (1924)

⑤ 천주교회보 창간 (1927. 4. 대구)

⑥ 별 창간 (1927. 7. 서울)

⑦ 5교구 연합으로 ‘가톨릭청년’ 발간


4. 해외선교와 해외 한인교회의 발전


1) 미주지역의 한인교회


(1) 한국인들의 미주 이주

① 알렌, 한국인의 이민을 허락하지 않던 조선정부 설득

② 존스, 한국인들의 이민 장려함

③ 한국 노동자 모집을 총괄했던 ‘동서개발상사’ 대표 데쉴러의 통역과 직원 대다수가 김리교인

④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총 7,400명의 한국인 중 상당수가 기독교인 (감리교인)이었음


(2) 하와이에서의 활동

① 한인전도회 (1903. 11.) 설립: 한국 감리교인들이 사탕수수 농장에 정착함과 동시에 모여 예배드림 → 정식교회로 조직됨 (1905. 4.) 

② 한국인 5,500여 명 가운데 10% 이상이 매주 감리교회에 출석함

③ 한국 교인은 하와이 전체 감리교인 중 64%를 차지함


(3) 성공회

① 1904년부터 호놀룰루와 하와이 섬의 코할라 지역에 같이 예배 드리기 시작함

② 중국인 성공회 성당인 성엘리자베스 성당 구내에 모임 (1907)

③ 한글학교 설립하여 한국어와 한문 등을 가르침 (1908)

④ 독자적인 성당을 마련하고 헌당식을 거행함 (1925. 5.)


(4) 교육

①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는 감리사의 협조를 얻어 소년들을 위한 기숙학교 설립 (1906)

② 한인중앙학교로 이름을 바꿈 (1913. 이승만)

③ 한인여학원 건립 (1915)

④ 한인기독학원으로 재조직 (1918): 남녀공학, 8년제

⑤ 신흥국어학교 (1923)


(5) 언론

① 포와한인교보 (1905. 11.): 월간지, 감리교회 소식지

② 태평양잡지 (1913. 9.): 교내외 기사 게재 → 한인교회보로 제호를 바꿈 (1914)

③ 한인기독교보 (1919) 발행


(6) 민족운동

① 임시정부 지원, 서간도 동포들에게 구제금 보냄

② 대한인국민회 등 상호부조와 민족운동을 위한 단체를 조직할 때 적극 참여함

③ 대한인동지회 (1921): 이승만이, 박용만이 이끌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조직을 장악하지 못하다 민찬호 등의 지지자를 규합해 설립 → 한인사회 분열


(7) 캘리포니아

① 로스앤젤레스 남감리회: 셔먼, 로스앤젤레스에 한인선교회 조직 (1904. 3.) → 예배, 주일학교, 성경공부반 운영

② 샌프란시스코 남감리회: 양주삼이 예배 인도 (1905)

③ 로스앤젤레스 북장로회: 방화중을 선교회의 최초 교역자로 임명, 클레어몬트에 저렴한 기숙사를 열고 한인 유학생들의 학업을 도와줌

④ 이승만이 로스앤젤레스에 오면서 교파연합이 무너짐 


(8) 미국 본토

① 캘리포니아 이외의 뉴욕∙시카고 등지에도 한인교회가 설립됨

② 일제강점기 동안 미국에서 한국인은 법적으로 일본인으로 분류됨

③ 선교 기관들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취급했고 친일본적인 태도를 보임 → 한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킴

④ 안창호∙이승만 등 기독교 민족운동가들의 활동을 지원함, 친일인사 스티븐스를 암살한 감리교인 장인환의 변호비용을 모금함


(9) 멕시코 이민

① 멕시코 이민은 이민 중개업자들이 꾸민 사기에 가까운 이민사업으로 한국 이민자들은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에서 노예와 다름 없는 생활을 함

② 이러한 사실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기독교인, 상동교회에 알려져 ‘황성신문’에 기고됨

③ 상동교회 담임목사 전덕기는 조사단을 멕시코에 보냄

④ 정부는 외부협판 윤치호를 현지에 파견함

⑤ 국내 여론이 악화되면서 멕시코 이민이 중단됨


(10) 멕시코에서의 선교활동

① 멕시코에 간 사람들은 대부분 비기독교인이었음

② 노동계약기간이 끝나고 자유를 얻게 되면서 신앙집회를 갖기 시작함

③ 멕시코 한인교회 조직 (1909. 5.)


(11) 쿠바

① 감리교인과 안식교인이 많았음

② 교파를 초월하여 한인선교회 조직 (1921. 10.)

③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쿠바 한인감리교회로 정식 설립됨 (1926)


2) 일본 선교


(1)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 사업

① 일본 선교: 일본에 있는 한국인 교포를 상대로 한 전도 및 선교활동

② 도쿄 한인 YMCA (1906. 8.)

③ 재일본동경조선예수교연합교회 설립 (1911):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 관장 (1926)

④ 일본에서의 전도사업: 도쿄, 간사이, 규슈 세 지방으로 구분되어 진행됨


(2) 일본 전도사업의 확대

①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선교부연합공의회는 다른 선교기관에 재정 및 인적 지원 요청

② 캐나다장로회에 재일 한인선교 참여 요청 (1927) → 선교사 영, 간사이지방 한인선교 착수


(3) 성결교회

① 창시자인 정빈∙김상준을 비롯한 초기지도자들이 성결교인 이었음


3) 만주∙시베리아 선교


(1) 만주∙시베리아 교회가 민족운동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배경

① 1900년대 초반부터 추진된 한국 기독교의 줄기찬 만주∙시베리아 전도

② 남만주 (봉천∙흥경), 동만주 (연길∙훈춘), 북만주 (길림∙신경∙하얼빈)으로 구분됨

③ 남만주는 평북지방의 장로교회와 미북장로회 선교부, 동만주는 함경도지방의 장로교회와 캐나다장로회 선교부, 북만주지역은 미감리회 선교부와 조선연회가 맡아 선교함

④ 시베리아와 동만주 지역은 남감리회가 맡아 선교함


(2) 장로교의 남만주∙시베리아 선교

① 이양자교회: 남만주 최초의 장로교회, 증안현에 설립됨 (1898) 

② 초기 남만주 선교는 선천 선교지부에서 주관함

③ 남만노회 조직 (1921. 4. 21.)

④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의 반종교운동, 만주를 근거로 삼고 있던 마적단의 습격, 3∙1운동 이후 심해진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남만지역 교회는 크게 성장하지 못함


(3) 시베리아선교

① 독노회에서 최관흘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함 (1909)

② 3∙1운동 직후 한인들의 이주가 늘어나며 교세 성장 

③ 시베리아노회 조직 (1922. 2.)

④ 공산당의 박해를 받아 노회 폐지 (1925) → 남만노회와 함북노회로 나누어 관리


(4) 장로교의 동만주 선교

① 캐나다의 선교부에서 착수

② 양무정자와 광제암에 교회 설립 (1906)

③ 남감리회, 와룡동교회 설립 (1907)

④ 남감리회, 모아산 교회 설립 (1908)

⑤ 장로교, 용정교회 설립 (1907)

⑥ 명동교회 설립 (1909)

⑦ 이후 남감리회가 철수하고 캐나다장로회가 간도 전 구역을 관장함

⑧ 간도노회 결성 (1921. 12. 1.) → 동만교회 (1925)


(5) 미감리회의 북만주 선교

① 미감리회 손정도를 중국 선교사로 파송 (1910) → 손정도는 독립운동을 하려는 민족적 동기도 강해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관여 함 → 손정도, 일경에 체포 (1912)되어  전남 진도에 유배됨

배형식 선교사로 파송 (1918)

② 남감리회가 관장하던 지역이 미감리회구역으로 편입되면서 교세 성장 (1923)

③ 다른 교파 선교부와 지역적인 중복현상 → 장∙감전도구역위원회를 통해 선교구역 확정


(6) 남감리회의 시베리아∙동만 선교

① 동만 간도지방 선교 착수 (1908)

② 북간도∙시베리아 지역 전도 재개 (1920)

③ 블라디보스토크∙연추∙니콜스크∙길림∙북간도의 5개 지방회와 17개 구역회로 발전함 (1922)

④ 만주쪽 보다는 시베리아에 더 많은 비중을 둠

⑤ 민족운동가들의 목회활동으로 이 지역 한인교회의 성격은 민족적 성향을 띠게 됨

⑥ 시베리아 지역 여선교회가 13개, 회원이 109명, 전도부인이 되어 활약하는 인원도 12명에 이름 (1925)

⑦ 볼셰비키혁명 이후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시베리아지역은 만주보다 더욱 심한 견제와 박해를 받음 (1920년대) 시베리아 선교는 퇴조하고 대신 간도지방에서 활기를 띰


(7) 성결교의 만주 선교

① 박기래∙박장환∙한치국 등 3인이 모여 예배 드리며 만주 선교의 기원이 됨

② 용정교회에는 세례교인 33명에 교인 총 89명이 있었음 (1931)


(8) 안식교의 만주 선교

① 안식교인의 만주 이주를 계기로 시작됨 (1910)

② 간도지방회 조직 (1925)

③ 간도성회로 승격 (1931)


(9) 천주교의 만주 선교

① 간도 호천포에 살던 함북 온성 출신의 김영렬, 베르모렐 신부에게 세례 받음 (1896. 5.)

② 간도의 부체골, 사기골, 삼원봉, 싸리밭굽, 학서골 등기에 공소(公所)가 생김 → 가옥건설∙토지개간 사업을 공동 추진

③ 브레 신부 간도 방문 (1897)

④ 연길현 용정과 화룡현 삼원봉 영암촌에 본당이 설립됨 (1909)

⑤ 간도지역 천주교인이 늘어나면서 원산교구가 분리됨 (1921)

⑥ 연길교구가 원산교구에서 분립됨 (1928)


(10) 만주조선기독교회

① 만주사변이후 모든 종교단체의 감시와 통제를 목적으로 종교통합이 이루어지면서 만주에 있던 교파교회들이 ‘만주조선기독교회’로 통폐합됨 (1942)


4) 산둥 선교


(1) 의의

① 한국교회가 외국인을 대상으로 외국에 나가 선교한 첫 사례


(2) 전개

① 한국 장로교회가 총회를 조직하면서 산둥 선교를 결정함 (1912)

② 김영훈∙박태로∙사병순 3인을 정식 선교사로 파송함 (1913)

③ 한국선교사들의 소속이 중국교회로 이명됨 (1916): 교회가 설립되더라도 그 교회의 소속을 한국교회가 아닌 중국교회로 하겠다는 의지

④ 어떤 선교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파송되어 낯선 언어∙음식∙환경으로 고통을 겪음

⑤ 내양에 새 교회당 건물을 마련함 (1920)

⑥ 내양에 성경학원 설립 (1921)


(3) 전도방법

① 좌당전도: 가옥을 매입하여 ‘복음당’이라 명명하고 전도문서와 예배시설을 구비해 놓고 전도

② 유행전도: ‘포도단’이란 전도대를 조직해 환등기∙유성기∙천막을 갖고 여행하며 전도

③ 유행전도를 통해 107개 지방을 순회하며 5만여 명을 대상으로 전도, 복음서 4,700권을 팜, 1년 동안 신입교인이 99명 생겨남 (1928)


(4) 한국교회의 지원

① 평양 여전도회, 박상순 목사 사택 마련 (1919)

② 평북 여전도회, 이대영 목사 봉급 부담 (1922)

③ 총회 여전도회, 이대영 목사 파송 경비 보조 (1925)

④ 대구 신명여학교, 평양 숭의여학교 학생, 풍금을 사서 내양교회∙즉묵교회에 기증


(5) 쇠퇴

① 중국의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선교사들이 귀국함

② 선교사 사택들은 약탈당하고 교회들도 다수 파괴됨

③ 중국인들의 한국인 선교사와 한인교회에 갖고 있던 반감

④ 중국 공산당의 우위

⑤ 제국주의와 결탁했던 서구 선교사에 대한 반감


(6) 의의

① 한국교회가 추진한 최초의 실질적인 타문화권 및 외국인 선교

② 선교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이 한국교회의 힘으로 마련되었다는 점

③ 복음을 통해 전통적인 한중관계의 악조건을 극복해감

④ 제국주의에서 자유로운 비서구 국가의 선교사로서 복음에 집중하는 선교활동이었음

⑤ 한국교회 특유의 신앙방식을 심어주었음

⑥ 복음수용 30년이 채 안 된 시기에 이루어짐


5) 상해와 남경의 한인교회


(1) 상해한인교회

① 영조계 서화덕로에 있는 미국 해군 YMCA회관에서 한국인 30여 명이 예배를 드림 (1914. 11.) → ‘우호한인예배회’라 부름

② 상해의 한국인은 200명 정도였는데 이들 중 40여 명이 집회에 참석함

③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교인이 늘어남

④ 자체적으로 조직과 규칙을 마련함 : 상해조선인예수교회임시장정 (1922. 1.)


(2) 상해한인교회의 침체

① 임시정부와 한인사회의 갈등과 암투, 일제의 방해공작 등으로 위기를 맞게 됨


(3) 상해 성결교회

① 가정집회 형태로 성결교회가 시작됨 (1931)

② 중일전쟁 (1937)으로 사태가 악화되어 전도사가 귀국하면서 폐쇄됨


(4) 남경한인교회

① 서병호, 언더우드의 소개로 금릉대학에 입학 (1914)

② 3∙1운동 이후 남경의 한인 유학생이 늘어나면서 교인이 늘어남

③ 독자적인 예배처를 ‘협진회’라 부름 (1922)

④ 남경의 한국인 102명 중 96명이 교인이었음 (1922)

⑤ 본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함

⑥ 중국의 공산군과 국민군의 전투로 유학생들이 남경을 떠나자 위기에 놓임 (1926-1927)

⑦ 장덕로 목사가 남경을 떠나 상해로 옮긴 후 남경한인교회는 해산된 (1928)


제8장 전환기 교회의 자기모색 (1926~1935)


1. 교회의 내적 갈등과 분규현상


1) ‘교파신학’의 형성


(1) 탁사 최병헌: 한국 최초의 신학자인 동시에 종교학자

① 죄도리 (1901): 한국인이 쓴 최초의 신학논문

② 성산명경 (1907): 유∙불∙선∙ 3교와 기독교의 진리를 비교 고찰한 최초의 비종교학 논술

③ ‘종교변증론’ 연재 (1909-1916):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발행한 ‘신학세계’에 연재 →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 만종일련 (1922)

④ 만종일련 (1922): 유∙불∙선 3교뿐 아니라 힌두교∙유대교∙이슬람교∙라마교 등 종교전통과 당시 한국사회에서 발흥하고 있던 신종교들까지 망라함

⑤ 타종교에 대해 결코 배타적∙독선적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종교가 하나로 성취된 바’가 복음이며 기독교라는 입장을 견지함


(2) 초기 한국교회 지식인의 의식

① 동양의 전통종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단절과 투쟁’이 아닌 ‘연결과 보완’으로 봄

② 이 같은 해석을 통해 동양의 종교문화적 풍토에 익숙해 있던 한국인들은 문화적 충격을 덜 겪으며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었음


(3) 선교사들의 의식

① 동양종교에 대해 ‘파괴적이고 독선적’이라고 봄

② 동양의 전통종교∙문화를 ‘미신적인 것’, ‘우상숭배 현상’으로 규정하며 ‘저급한’것이라 무시함

③ 2세대 선교사들이 내한하는 1920년대 접어들면서 더 심해짐


(4) 신학교육

① 초기 신학교육은 매서인∙전도부인과 같은 전도인 양성에 목적을 두고 시작됨

② 네비어스의 선교정책 중 자력전도 원칙에 근거한 것

③ 1900년 이전에 ‘신학반’ 형태로 발전함: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 한국인 전도인들을 대상으로 1~2개월 간 실시하던 단기 신학과정

④ 1900년대 초반 신학교로 발전함

⑤ 평양 장로회신학교 (1901): 마펫의 주도로 미북장로회∙미남장로회∙호주장로회∙캐나다장로회 연합으로 설립

⑥ 서울 협성신학교 (1905): 미감리회∙남감리회 연합으로 설립

⑦ 서울 성서학원 (1911): 동양선교회가 설립 

⑧ 성경대학 (1910): 구세군이 설립

⑨ 피어선성경학원 (1912): 조선예수교장감연합공의회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초교파적 전도인 양성기관

⑩ 교파마다 교과과정이나 교수방법에 특성이 있었음

⑪ 보편적 기독교 진리와 함께 교파교회의 특수한 교리와 신학을 강조하는 교과과정이 편성됨 


2) 신학적 갈등


(1) 여권문제사건 (1934)

① 장로교회에서 여성의 직제상 지위문제가 거론됨

② 감리교회에서는 여성문제에 대해 개방적이었으나 장로교회는 ‘여성안수’를 금지함

③ 함남노회 소속 22개 교회의 여성들이 여성장로직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 (1934)

④ 한남노회 산하 성진중앙교회에서 시무하던 김춘배, ‘기독신보’에 여성안수 금치는 차별이라는 글을 기고함 (1934)

⑤ 총회에서 연구위원을 선임하여 1년간 이 문제를 연구하도록 함

⑥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 녀자의 교회의 교권을 불허한 말씀은 2천년 전의 한 지방교회의 교훈과 풍속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보고함 (1935)


(2) 창세기 모세저작 부인사건 (1934)

① 전북노회장 고성모 목사, ‘만국주일공과(장년부)’ 내용 중 일부에 대해 지적 

② 공과내용 중 ‘(창세기가’ 히브리 오랜 신화를 근본 삼엇다는 문구와 창세기 저자가 확실치 못하다는 문구는 전선 ③ 교회에게 셩경을 하나님의 말삼으로 신앙하는 데 막대한 의아를 일으킴이오니 총회로서 지시하여 달라’고 헌의함

④ 연구위원들은 1년 후 1935년 총회에서 근본주의신학에 근거하여 창세기 모세저작론을 옹호 함


(3) 아빙돈성경주석사건 (1935)

① ‘단권성경주석’(1934)의 내용 때문에 장로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

② 아빙돈출판사 ‘성경주해서’를 번역한 것

③ 이 주석은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통용되었던 성서비평학을 사용하여 일반독자들에게 성서 주석의 현대성을 밝혀 줌’

④ 문서비평학 및 역사비평학 등 진보적 신학풍토에 어느 정도 익숙해 있던 감리교회에서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장로교회에서는 보수주의 전통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짐

⑤ 황해노회장 김응순이 총회에서 해당 성경주석을 구독하지 않을 것을 헌의함 (1935)

⑥ 총회는 이 주석이 ‘장로회의 도리를 불합한’ 것으로 규정하면서도 관련자에 대한 정치적 처리는 지방노회에 맡김


3) 교파간 갈등의 징후


(1) 장로회와 감리회의 교세

① 감리회는 전체교인 중 64.5% 중부, 서북의 교인을 더하면 97.7%로 영남∙호남∙관북의 교세가 미약했음

② 장로회는 보수적인 성향의 미북장로회 선교부∙미남장로회 선교부∙호주장로회 선교부 관할지역이 92.3%를 점유함


(2) 신편찬송가사건 (1935)

① 장로교측에서 조선예수교서회에서 ‘신정찬송가’(1931) 사용을 거부하고 별도로 장로교용 ‘신편찬송가’를 발행하기로 함

② 감리교는 ‘신정찬송가’를 사용하여 두 교회의 연합운동에 차질이 생김


(3) 기독신보사건

① ‘기독신보’는 1915년 창간된 장∙감 연합 초교파 신문

② 1921년 총 25만 2,875부를 발행한 이후 매년 15~20만부를 발행하며 교계의 영향력 있는 언론지로 성장함

③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필순 목사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계파간 갈등이 생김

④ 한국인 직원을 대거 채용해 선교사들로부터 ‘조선예수교서회’를 독립하려는 의지를 보임

⑤ 경기∙중부계의 진보적 인사들의 글이 자주 실림

⑥ 이사회에서 유억겸을 사장으로 임명 (1935) → 전필순, 이를 거부하고 사무실을 이전하여 ‘기독신문’은 개인신문이 됨


4) 선교사 배척운동


(1) 배경

① 심정적으로는 민족운동에 동의해도 본국 정부의 외교정책과 교회의 정치참여를 금지하는 정교분리의 신학적 배경 때문에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못함

② 총독부와의 우호적 협력관계는 의식 있는 한국인들의 우려와 비난을 사기도 함

③ 선교사들 중 상당수는 ‘문화통치’를 펼치는 사이토 총독에게 기대를 검

④ 한국 교인들의 정치참여와 민족운동을 교리적으로 ‘불순한 행위’로 규정하며 교회의 비정치화를 더욱 강하게 추구함

⑤ 2세대 일부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적 행태가 나타남


(2) 허시모사건

①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헤이스머, 평남 순안에서 병원 운영함 

② 헤이스머의 과수원 사과를 따먹은 한국인 아이의 두 뺨에 초산은으로 ‘도적’이라 써서 돌려보냄

③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통해 보도되고 반선교사 규탄여론이 형성됨

④ 사회주의 계열, 반선교사∙반기독교 운동 전개

⑤ 일본계 상애회라는 우익단체도 선교사 배척운동 지원

⑥ 헤이스머, 경성고등법원에서 징역 3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뒤 한국인에게 사과문을 발표하고 귀국


(3) 구세군 출교 (1926)

① 한국인 사관들이 구세군 만국사령관 부드의 내한을 계기로 ‘인종차별적 처우’’를 개선해 달라는 진정서 제출

② 진정서를 제출한 사관들 구세군에서 출교됨


(4) 경성성서학원 동맹휴학사건 (1925. 12.- 1926. 1.)

① 학원 당국이 ‘급비교육’을 시킨다는 취지 하에 ‘너무 노예시하여 허다한 근육 노동을 시킴’에 대해 학생들이 개선을 요구함

② 주동자들이 무기정학 처분 받음

③ 이러한 처분에 항의하며 교수탄핵운동을 벌이고 동맹휴학에 나섬


(5)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반응

① 선교사들의 반성을 촉구함


(6) 선교사들의 반응

① 한국 교인들과 새로운 관계정립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선교사들이 있었음

② ‘선교사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이곳에 와 있다’며 선교사들의 독자적 위상을 강조함


(7) 조선기독교봉역자의회 (1925. 12.)

① 모트의 내한을 계기로 선교사 대표 31명, 한국인 대표 31명이 모여 회의를 염


2. 교회의 자치∙자립 및 부흥운동


1) 감리교 합동


(1) 기독교조선감리회 성립 (1930)

① 남∙북 감리회가 합동함

② The Korea Methodist (1904): 남감리회와 북감리회의 합동 영문잡지

③ 그리스도인회보 (1905): 남감리회와 북감리회의 연합 한글신문

④ 협성신학교 (1907)

⑤ 협성여자신학교 (1920)


(2) 미감리회 교회진흥방침연구회와 교회진흥방침연구회 연합회의 (1924. 3.)

① 교회부흥을 위한 전도∙출판∙교육 등 사업과 공동예문 작성, 교회직제의 명칭 통일에 대해 토의


(3) 통합 연구

① 남북감리연합방침연구위원 선임 (1926. 6.)

② 남북감리연합기성위원 선임 (1926. 9.)


(4) 합동 이후

① 정치적 자치를 성취했으나 선교사들의 참여와 미국교회의 경제원조는 계속 되었음

② 중앙협의회: 한국교회와 외국교회 및 선교사와의 연락기구, 선교비 집행의 실무기구


2) 신앙부흥운동


(1) 1920~30년대 부흥운동의 특징

① 개인의 영적 지도력이 강하게 반영됨

② 길선주: 신유와 기적을 수반한 부흥운동

③ 김익도: 신비주의적 부흥운동

④ 이용도: 내세지향적 부흥운동

⑤ 1920~30년대 한국의 민족적 상황에서 표출된 현실극복의 신앙형태


(2) 김익두

① ‘기적’과 ‘신유’를 동반함

② 1919년 말 현풍집회에서 처음 나타남 → 영남집회 (1920. 4.)에서 많은 병자들이 집단적으로 치유받음

③ 황해노회의 이적불인 (1923) 헌의 → 총회에서 부결됨 (1924)

④ 지식계층이나 사회주의자들은 ‘고등무당’이라 비판함

⑤ 간도 용정과 이리에서 ‘반종교가’들이 집회를 중단시킴 (1926)


(3) 길선주

① 3∙1운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새로운 신앙∙사상적 변화과정을 거침

② 계시록만 7백독 하면서 말세신앙을 정립함

③ 현실에서 평화와 정의를 이루기에는 인간능력의 한계가 있으므로 ‘위로부터’ 하나님의 역사간섭을 통해 그것을 실현될 수 있으며, ‘위로부터의 역사간섭’이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봄

④ ‘말세’와 ‘재림’

⑤ 교회 내 청년층∙지식층과 사회주의 계열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음 (1926)

⑥ 장대현교회에서 배척받고 이향리교회를 세움 (1933)

⑦ 평남 강서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절명함 (1935)


(4) 이용도

① 3∙1운동 당시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2개월간 구금됨

② 1924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기까지 4차에 걸쳐 3년 이상 투옥생활 함

③ 1928년 12월부터 1929년 1월 사이 ‘중생’ 체험

④ 새벽기도 중 ‘교회 안에 가득 찬 악마들과 치열한 싸움’ 체험

⑤ 환상 중 ‘빨간 군대’의 습격에 대한해 싸우는 체험

⑥ ‘회개’와 ‘신생’

⑦ 황해노회 금족령 (1931), 평양노회 집회 규제 (1932), 평양기도단 해체 명령

⑧ 1933. 10. 33세의 나이로 별세


3) 자치∙자유교회 분립


(1) 자유교회

①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된 최중진

② 선교사들과 선교자금 운용∙선교기관 운영∙선교구역 조정 등의 문제로 갈등을 빚음

③ 장로교회에서 탈퇴하고 뜻을 같이하는 10여 개 교회를 규합하여 자유교회 설립 (1910)


(2) 조선기독교회

① 황해도 봉산에서 김장호 목사를 중심으로 창설 (1918)

② 자유주의신학 성경해석을 채용하여 설교함

③ 황해노해로부터 목사직 휴직을 받음

④ 자신이 시무하던 봉산 신원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선기독교회 창설


(3) 자치교회

① 이만집 목사,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대구 남성정교회에서 목회

② 1921년 5~6월 계성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사건 때 선교사측보다 학생 측을 동정함

③ 경북노회, 이만집 목사 정칙처분

④ 장로교회로부터 ‘자치’ 선언 (1923. 3. 18.)


(4) 마산예수교회

① 평양장로회신학생 박승명, 항일운동을 벌이며 옥고를 치른 인물

② 박승명이 여자문제로 구설에 오르면서 교회에 논쟁이 일어남

③ 교회 내 소장층∙노장층 간 갈등

④ 서북계와 영남계의 갈등

⑤ 사건처리 과정에서 호주 선교사의 고압적인 태도가 문제됨

⑥ 박승명과 추종교인들이 별도로 ‘마산예수교회’설립 (1928. 1.)


(5) 예수교회

① 감리교 소속 이용도 목사 중심으로 창설됨 (1933)

② 원산에 신학산이라는 신학수련기관 설립

③ 기관지 ‘예수’ 발간


(6) 조선기독교회

① 만주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교파를 초월한 ‘조선기독교회’를 창설함 (1935. 1. 25.)

② 선교구역 분할제도의 부작용을 없애려는 목회적 관심에서 창설됨

③ 길림에 신학교를 두고 독자적으로 목회자 양성


(7) 하느님의교회

① 동양선교회와 소장층 한국인 목회자 사이에 갈등이 나타남

② 소장층의 지지를 얻은 변남성 목사가 총회장에 당선되자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이사회는 변남성을 면직함

③ 이에 소장목회자 13명이 성결교회를 탈퇴하고 ‘하느님의교회’ 창설 (1936. 11. 29.)


4) ‘조선적 기독교’ 수립운동


(1) 김교신의 무교회주의운동

① 김교신, 일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의 영향을 받음

② ‘성서조선’ 창간

③ ‘성서’와 ‘조선’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새로운 신앙운동을 전개함 

④ 성서연구회는 기성교회의 의식∙조직을 따르지 않는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함

성서연구회는 무교회주의라 불렸으나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적 기독교 수립이었음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폐간되고 김교신을 비롯한 편집인과 구독자 13명이 체포됨 (1942)


(2) 최태용의 복음교회운동

① 개인잡지 ‘천래지성’을 창간하여 제도권 교회를 비판 (1924)

② 일본에서 복음주의신학자 다카구라에게 수학함

③ 귀국 후 ‘영과 진리’를 통해 ‘영적 기독교’란 논설을 쓰며 새로운 신앙운동을 전개함

④ ‘영과진리’ 독자들의 신앙집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며 신앙공동체가 형성됨 (1930. 12.)

⑤ 기독교조선복음교회 창설 (1935. 12. 22.): ‘복음적∙생명적인 신앙’∙‘학문적인 신학’∙’조선인 자신의 교회’라는 성격과 방향성을 가짐

⑥ 사상적 측면보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해석해야함


3. 기독교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1) 기독교인의 사회의식 변화


(1) 계몽적 사회참여 신앙

① 청년층∙지식층은 사회계몽을 통해 현실을 극복하고자 함


(2) 예루살렘국제선교협의회 (1928)

① 기독교와 타종교, 세속화, 선교개념의 재해석 등의 문제를 다룸

② 한국교회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명의로 가입

③ 국내 기독교 민족∙사회운동가들이 ‘혁신단체’를 결성하는 데 영향을 미침


(3) 기독신우회 (1929. 5.)

① 조병옥, 연희전문학교와 YMCA를 중심으로 사회개혁을 통한 기독교인의 현실참여를 주장함 → 기독신우회 결성 주도

② 신간회운동과 결부되어 조병옥이 체포되고 주도권 분쟁과 지역적 갈등이 표출되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함


(4) 적극신앙단 (1932)

① 기독연구회 (1926) → 적극신앙단

② ‘기독교의 민중화, 생활의 간소화, 산업기관의 시설, 조선적 교회 설립’을 추구

③ 이승만의 동지회 계열 중심이라는 당파성을 띰 → 동우회와 흥사단 계열로부터 비판받음

④ 자유∙평등∙개혁 정신을 실천하려 한 신앙운동이라 평가받음


(5) 한국교회 신조나 신경의 변화

① 남감리교회 도리급 장정 (1919): ‘16개조 사회적 신경’이 추가됨

② 감리교 교리적 선언 (1930):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창립할 때 채택됨,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으며’라 선언함 → 천국을 사후에 가는 피안적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로 규정

③ 기독교조선감리회 교리와 장정 (1931): ‘사회신경’ 수록

④ 12개조 사회신조 (1932):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채택, 반사회주의노선을 분명히 함


2) 6∙10만세운동과 신간회∙근우회


(1) 천세봉

① 경북 군위 출신, 서울의 양정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아현동의 성서학원 집회에 참석했다가 이명헌 목사의 설교를 듣고 성결교인이 됨 (1921)

② 성서학원 입학 (1925)

③ 1926년 6월 10일 고종의 인산행렬에서 ‘근화신국만세’라 쓴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현장에서 체포됨

④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행위가 정치적인 것이 아닌 신앙적인 것이라 주장함


(2) 신간회 (1927. 2.)

① 조병옥, 박동완, 이갑성, 조만식 등이 참여함 (교단이나 단체의 대표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참여)

② 제2차공산당사건 연루자 40%가 신간회 회원으로 드러나자 탄압함 (1928)


(3) 근우회 (1927. 5)

① 기독교계 여성 민족운동세력과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여성동우회의 합작형태로 이루어짐

② 1928년 이후 기독교 측 회원들이 탈퇴하고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적극적인 사회운동으로 방향이 전환됨


3) 농촌운동


(1) 배경

① 1910년대 시행한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지주층이 감소하고 소작농이 증가함

②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으로 농촌이 수탈당하면서 농촌에 기반을 두고 있던 한국교회의 사정도 악화됨

③ 1920년대 중반부터 교인과 헌금이 줄면서 교회도 위기를 겪음

④ 사회주의자들이 반기독교운동을 벌임

⑤ 교인 중에도 농촌경제의 파탄이 자본주의의 모순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생김


(2) 농촌운동

① YMCA 농촌부 설치 (1925)

② YWCA∙장로교∙감리교 농촌부 설치 (1928)

③ 합법적이고 온건한 노선 표방

④ ‘분배개선’ 보다 ‘생산증가’에 역점을 둠

⑤ 정신적∙도덕적 각성을 중시함

⑥ 문맹퇴치 → 단체조직 → 농사개량 → 지도자 양성의 순서를 따름


(3) 문맹퇴치

① 문맹퇴치를 위해 각지에 야학 설립 (장로교∙감리교)

② 간이교육 실시 (YMCA∙YWCA)

③ 서당∙글방∙강습소∙하기아동성경학교 등에서 한글과 산술을 가르침

④ ‘기독신보’에 농업난 신설

⑤ YMCA기관지 ‘청년’에 농촌난 신설

⑥ YMCA ‘농촌청년’ 창간 (1929)

⑦ 장로교 ‘농민생활’ 창간 (1929)

⑧ 단행본으로 ‘농촌지남’, ‘농촌요람’, ‘농촌총서’, ‘농촌부총서’, ‘조선농촌구제책’, ‘조선농촌교회사업’, ‘정말과 정말농민’, ‘뎡말나라연구’, ‘정말인의 경제부흥론’, ‘정말국민고등학교’가 출간됨

⑨ 농촌사업협동위원회∙YMCA∙감리교 ‘농사강습회’란 명칭으로 전국 농촌 순회하며 농촌개령과 농민계몽에 힘씀

장로교 ‘농촌수양회’란 명칭으로 농촌을 순회하며 농사개량과 농민계몽에 힘씀


(4) 단체설립

① 각 기관∙교단에서 교회 및 지방∙학생YMCA에 농촌부 설치

② 교인들은 농우회∙농무회∙진흥회 설립, 다수의 협동조합 조직

③ 수실전문학교 농과∙공주영명실수학교∙광주농촌실습학교∙마산복음농업실수학교∙송산고등농사학원∙신천농민학교∙통영고등농사학원 설립

④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농촌사업지도강습소(농촌사업협동위원회)∙고등농사학원(장로교)∙농민수양소(YMCA)∙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YWCA) 설립


(5) YMCA의 농촌운동

① 농촌실태 조사 (1923)

② 미국 YMCA에서 농업전문간사 파송 약속 (1924)

③ 농촌부 설치 (1925)

④ 한국 농촌지도자 육성에 중점 → 각 촌마다 3개월 과정의 ‘간이교육과정’ 개설 → 수료자들이 각지에서 농촌사업을 지도하도록 교육시킴 

⑤ 농촌사업을 중앙∙관북∙관서∙영남∙호남 등 5개로 조정하고 한국인 간사 1명과 북미 YMCA 국제위원회에서 파송한 농업전문가 1명씩 배치 (1929)

⑥ 영적 훈련기관(교회∙지역 YMCA∙고등농민학교), 교육기관(서당∙야학∙강습소), 협동기관(협동조합∙신용조합), 보건기관(보건소∙약방) 등의 육성

⑦ 신흥우, 적극신앙단과 개인적 문제에 휘말려 YMCA 총무를 사임하면서 YMCA 농촌운동도 쇠퇴함


(6)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 (1928. 4.)

① 아시아∙아프리카의 농촌선교에 대한 심도있는 토론을 통해 농촌과 농민의 중요성 커짐

②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농촌사업협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연합사업을 전개함


(7) YWCA의 농촌운동

①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 참석에 앞서 덴마크 농촌을 시찰하면서 많은 시사를 얻음 (1928)

②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의 소생, 농촌여성지도자 양성, 다른 기독교 단체와의 연대, 생활개선운동 등에 초점을 맞추며 농촌사업 전개

③ 8개 마을에서 계몽운동 차원의 농촌사업 추진 (1930)

④ 농촌부녀지도자수양소 개설 (1934): 가정관리∙가정위생∙아동복지∙초등역사∙지리 등을 가르침

⑤ 한국 YWCA가 일본 YWCA의 지부로 위상이 격하되면서 농촌사업 중단됨


(8) 장로회의 농촌운동

① 총회에 농촌부 설치 (1928)

② ‘농민생활’ 창간 (1929)

③ 1930년부터 10월 셋째 주일을 농촌주일로 제정

④ 매년 전국을 순회하며 농사강습회를 개최함

⑤ 고등농사학원 설치 (1933): 덴마크식 농민교육기관, 2개월 과정의 농업전문교육 실시


(9) 감리회의 농촌운동

① 감리회 인사 상당수가 YMCA와 YWCA에 적극 참여해 상대적으로 감리회의 농촌운동은 활발하지 못함

② 감리교신학교에 농촌사업과, 협성여자신학교에 농촌교육과 설치


(10) 의의

① 정치적 측면에서 기독교 농촌운동은 민족주의 계열이 전개한 실력양성운동을 대표할 만한 것이었음

② 경제적 측면에서 농사개량∙부업장려∙협동조합 설립∙서적 발간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을 벌임

③ 사회적 측면에서 문맹퇴치∙농민계몽∙여성계몽 등 분야에서 성과를 거둠

④ 종교적 측면에서 교회와 교인들로 하여금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됨


(11) 한계

① 당시 한국 농촌의 현안인 소작문제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는데, 이는 교인들 중 지주도 적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교회 자신도 지주였기 때문으로 짐작됨

② 농민생활의 개선보다는 농촌교회의 유지를 우선한 경우가 있었음 (감리교)

③ 농촌운동 참여를 둘러싸고 교회 내부에서 반대여론이 일기도 함 (장로교)


4) 절제운동


(1) 배경

① 일제강점 이후 술∙담배∙아편 등이 더욱 널리 퍼지고 공창까지 생기자 신앙적∙도덕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기독교인들의 절제운동이 전개됨


(2) 감리회

① 미감리회, 연회에 절제부 설치 (1912)

② 미감리회, 전국에 순회강연대를 파견하여 금주운동 전개 (1921)

③ 남감리회, 연회에 절제부∙사회봉사부 조직해 금주운동 전개

④ 감리교 청년조직인 엡웟청년회의 구제부에서 금주∙단연 및 소비절약 선전, 저축회 조직 등의 방법으로 절제운동에 참여함


(3) 장로회

① 총회에서 공창폐지사업 후원 결의 (1926)

② 미감리회 연회와 함께 미성년자 금주안 당국에 제출 (1929)

③ 장로교 청년조직인 면려회, 계독부 둠


(4) 구세군

① ‘구세신문’을 통해 금주운동 전개 (1921)


(5)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① 재한 여선교사들이 세계적 조직인 기독교여자절제회의 외국지부를 한국에 설치 (1911)

② 여자절제회 조직 (1923. 6.)

③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연합회 결성 (1924. 8.)

④ 53개지회와 3,217명 회원을 둔 단체로 성장 (1928)

⑤ 서적부: 잡지∙서적의 발행과 선전삐라∙포스터 제작

⑥ 소년부: 미성년자의 음주∙흡연 방지를 위한 지도와 ‘감화활동’

⑦ 곽청부: 공창폐지운동, 성교육

⑧ 회계부: 물산장려를 통해 각지의 특산품을 선전∙교환∙판매하고 연합회의 유지∙관리 담당


(6) 평양금주동맹회 (1920. 4.)

① 평양지역을 중심으로 금주강연회 개최와 금주선언서 배포 등의 활동을 함


(7) 금주단연동맹 (1927)

① ‘절제생활’을 창간하고 금주선전활동과 공동저축운동에 나섬


(8)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 (1932)

① 금주∙금연 및 풍속교정∙공창폐지∙저축장려∙미신타파 등의 사업을 계획하고 이를 위해 조사∙연구∙출판∙선전 및 강연회∙강습회 개최, 기금적립∙지회설치 등의 활동을 함

② ‘절제시보’ 창간 (1933)


(9) 절제운동의 방식

① 1920년대 초반까지는 순회강연 중심

② 이후 대규모 선전활동 병행

③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매년 1회 절제주일을 지정하고 연중 3회 금주문제에 대해 학습하도록 함

④ 공과교재에 절제에 대한 내용 삽입 (1917~41)

⑤ ‘금주가’가 ‘신정찬송가’에 포함됨 (1931)

⑥ ‘기독신보’에 ‘절제난’을 둠 (1921. 3.)

⑦ 기관지 및 동화집∙실화집 등을 발간하여 절제운동을 선전함


(10) 공창폐지운동

① 전조선선교사연합대회, 총독부에 공창폐지 건의 (1919)

② 호주장로회, 사이토 총독에거 공찬폐지 청원 (1920)

③ 혁청단 창립 (1923. 12.): 공창폐지를 목적, 계몽선전, 직업소개소 설치, 동정금 모금

④ 연합선교사회 매춘여성을 위한 의연금 모금, 강연회 개최 (1923)

⑤ 공창폐지기성회: 총독부에 공창폐지 진정 (1924), 12,000명의 서명을 받아 공창폐지안 제출하고 선전지 10만 매 배포 (1927) 

⑥ 구세군 교인, 유곽을 방문하여 매춘여성들의 실태를 살피고 고충을 들음 (1928)

⑦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와 구세군 ‘구제의 집’ 마련

⑧ 세브란스의전 학생 YMCA, ‘화류병’ 예방을 위한 강연회 개최 (1932)


(11) 소비절약과 생활개선을 위한 활동

① 감리회, 농촌부와 절제부의 연합사업으로 토산물애용∙염색장려∙미신타파∙혼인장례 간소화 등을 추진 (1929)

조선여자기독교절제회, 저금∙저축회와 각종 조합의 설립 등을 추진, 상품의 생산∙판매를 통한 야학운영∙빈민구제 등의 활동 (1931)


(12) 의의

① 한국교회가 조직적으로 전개한 대표적 사회운동

② 개인과 민족의 정신개조∙폐습타파를 위한 윤리실천운동

③ 당면한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

④ 여성의 역할이 부각됨

⑤ 민족운동의 성격


5) 사회사업


(1) 구세군

① 아현동에 설립한 여자육아원은 이후 혜천원으로 발전함

② 구세군 교인 고바야시의 지원으로 평동사관학교 안에 걸인 소년들을 수용하여 기술을 가르치는 남자육아원 설립 (1918) → 후생학원으로 개칭

③ 여자부양소: 천연동에 여성을 위한 직업훈련기관을 설립 (1926)

④ 겨울에는 걸인을 위한 숙박시설 운영 (1924) → 1927년 겨울에만 1,225가정 6,161명에게 15,223끼 식사 제공

⑤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운동(1928)을 통해 재원을 마련함


(2) 사회관

① 감리교 여선교회, 태화기독교사회관 설립 (1919)

② 여성들의 직업교육∙의식계발∙아동보건 등 다양ㅇ한 사업을 실시함

③ 지방: 고려여자관(개성)∙보혜여자관(원산)∙춘천여자관(춘천) 등이 설립됨


(3) 기타 사회사업

① 개인 차원에서 보육원, 양로원 건립

② 크리스마스 실 사업, 나환자 구제사업, 맹인구제 사업, 한글점자 완성 등 특수의료사업에서 선구적 역할을 함


4. 희년잔치와 기독교계


1) 장∙감 선교 50주년 기념사업


(1) 북미장로회∙미북감리회 선교부의 한국선교 50주년 기념

① 북장로회: 알렌이 1884년 내한

② 미감리회: 매클레이가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1884년 내한


(2) 감리회

① 연합감리사회(1933. 9. 7.)에서 구체화됨: 행사기간 (1934~35년), 영적∙물적 사업과 역사편찬을 기본사업으로 함, 장로교와 연합해서 할 만한 행사는 추진함

② 희년기념 4대사업 (1934. 1.): 영적사업 (부흥회∙대전도회∙강연회∙원탁회의∙서적 발행), 물적사업 (교회기본금 20만 원 모금), 선교실적을 선전하기 위해 한글과 영문으로 역사를 정리하여 논문∙책자 발간, 희년 기념행사 개최

③ 기념강연회 개최 (1934. 6. 19.-20.)

④ 시가행렬 (1934. 6. 24.)

⑤ 서울지방 연합집회: 50여 교회와 30여 학교의 교인∙학생 5천여 명이 모여 기념식을 마치고 서대문-종로-동대문-명동-정동에 이르는 깃발행진을 벌임

⑥ 동부∙중부∙서부 연합연회 기간 중 50주년 기념식 거행 (1935. 4. 28.)


(3) 북장로회 선교부

① 희년기념 목사대회 (1934. 6. 27. - 7. 1.)


2) 천주교 창설 150주년


(1) 천주교의 성장

① 서울∙대구는 프랑스계의 파리외방전교회

② 평안도는 미국계 메리놀외방전교회

③ 함경도∙만주 지역은 독일계 성베네딕투스회

④ 전남은 아일랜드계 성콜룸바노외방전교회


(2) 청년들의 활동

① ‘별’과 ‘천주교회보’ 창간 (1927) → ‘가톨릭청년’으로 통합됨 (1933)

② 서울교구청년연합회(1922): 사회사업, 교육사업 추진

③ 성모병원 개원 (1936)

④ 남대문상업학교 (1922) → 혜화동 이전 후 동성상업학교로 개편 (1931)


(3) 150주년 기념행사

① 천주교조선교구설치백년제 (1931. 9. 24. - 26.): 3,000여 신자들이 참가

② 천주교조선전래 150주년 기념축하식 (1936. 10. 2. - 4.): 5,000여 신자들이 참가


제9장 일제의 박해와 기독교의 투쟁 (1936~1945)


1. 민족말갈정책과 기독교


1)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1) 군사적 파쇼체제 등장

① 배경: 한국의 민족운동, 세계 경제 공황

② 전개: 만주침략(1931), 상해침공(1932),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2) 황국신민화 정책

① 신사참배, 궁성(동방)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 ‘창씨개명’, 일본어 상용

② 내선일체론: 한국민족은 일본민족과 운명을 같이하는 일본민족 속의 일부이며, ‘흥아적’ 민족해방의 대상이 아니라 일본민족과 함께 아시아 제 민족을 서구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주체’


(3) 한국인에 대한 황민화

① 조선교육령 개정(1938), 육군지워병제도 도입(1938), ‘창씨개명’ 실시 (1940),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결성(1938), 경찰서∙주재소 중심의 시국좌담회 개최


(4)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활동

① 중일전쟁 1주년을 맞아 결성됨 (1938. 7.)

② 황민화의 중심기구로, 도∙부군도∙읍면∙정동리 및 관공서∙학교∙회사∙종교단체에 하부연맹 결성

③ 실천요목: 매조황거요배, 신사참배려행, 조선제사려행, 황국신민서사낭송, 국기존중게양려행, 국어생활려행 등 21개 항목 설정


(5) 수탈 정책

① 물적 수탈: 국방헌금 징수, 저축 강요, 애국채권의 강매, 유기∙철기 등 금속 생활집기의 공출

② 인적 수탈: 조선육군특별지원병제도(1938)∙국민징용령(1939)∙학도동원령(1943)∙징병령(1944)∙여자정신근로령(1944)


2) 종교단체법


(1) 종교법안 (1898)

① 제14회 제국의회에 상정됨

② 목적: 국가가 종교를 감독하여 사회질서의 안녕을 해치지 않고 또한 신민의 의무를 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일 뿐 아니라 그 직무에 속한다 (수상 야마가타의 제안설명)

③ 종교계의 거센 반대운동으로 제정되지 못함

④ 종교단체법 통과 (1939): 종교단체와 그 교화활동에 대해 정부가 감독을 엄중히 하고 황도정신∙신국사상 등 이데올로기 고취를 목적으로 함


(2) 종교법안 제정 반대운동

① 조선예수교장로회 (1926): 종교법안 심사위원회 구성 → 총독부에 종교법안 제정 반대의사 잔달 →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에 “우리 조선교회에서도 종교법안을 반대함”이란 내용의 전보 발송


3) 일제의 기독교 정책


(1)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이유

① 천황숭배와 신사신앙을 축으로 하는 정치∙종교∙문화적 이데올로기가 기독교와 조화∙공존할 수 없었기 때문

② 한국교회가 민족운동과 연계된 배일적 세력이었기 때문

③ 기독교가 선교사들을 매개로 그들과 영국∙미국 등 서구제국과 연결되어 있어 강압적 통제가 쉽지 않았기 때문


(2) 일제의 방해∙분열 공작

① 신사참배 거부 → 선교사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몰아감 → 반선교사 여론 부추김

② 한국교회와 선교사 사이의 유대관계를 단절 시키려 함


(3) 영향

① 선교사들의 교육∙의료 선교활동이 부진해짐

② 일부 선교사는 간첩혐의로 구속되어 허위자백을 강요받기도 함

③ 본국 정부의 훈령에 따라 대부분 선교사들 철수 (1940. 10.)

④ 남아 있던 선교사들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에 억류되어 포로 취급 받으며 일본인과 교환됨 (1942)


2. 신사참배 문제


1) 신도(神道)와 신사 문제


(1) 신도

① 일본에서 발생한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들로서 이를 뒷받침하는 삶의 태도 및 이데올로기

② 기원: 고대 일본인의 ‘가미’(神)에 대한 신앙과 제사의식

③ 자연현상, 경이적인 자연물, 신화적 인물, 역사적 위인, 조상들의 영, 절대적인 권략자들을 ‘가미’로 숭배함

④ 고등종교인 불교에 눌려 종속적 위치에 머무름


(2) 신도의 발전

① 17~18세기 일본 유학자들, 일본의 고유한 것을 찾기 위해 고전을 연구하면서 신도에 주목 (복고신도(復古神道) 제창)

② 신도사상에 입각한 배외적 국수주의와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등장해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함

③ 모든 신사를 국가의 종사로 하고 사격제도를 마련하여 신사에 공적 지위 부여

④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결부시켜 침략전쟁 수행과 식민지 지배에 이용됨


(3) 한국에 미친 영향

① 개항장의 일본인들이 내적 단결과 풍속유지를 위해 거류지에 신사 설립을 주도함

② 병탄 이후, 총독부의 지원하에 관∙공립적인 성격이 강화됨

③ 문화침략이나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 신사신앙을 강요함


(4) 1910년대

① 조선신궁 건립 (천조대신과 메이지 천황을 받듬)

② 일반신사에도 관∙공립적 성격을 강화하고 건립을 장려함

③ 한국인에게 신도사상과 천황숭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함

④ 천황사진∙교육칙어에 대한 배례와 동방요배∙신사참배 등을 강요함


(5) 1920년대

① ‘동아일보’ 사설에서 기독교와 제사문제를 다루면서 일본의 3종 신기(神器) 숭배를 비판함 (1920. 9. 24. - 26.) → 발매금지∙무기정간

② 강경공립보통학교 생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함 (1924. 10.)

③ 진좌제 참가 거부 (1925. 10.)


2) 신사참배의 강요


(1) 기독교계 학교의 신사참배 거부

① 전남 광주 (1932. 1.):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를 개최하고 학생들을 참석토록함 → 기독교계 학교 거부

② 평양 (1932. 9.): ‘만주사변 1주년기념 전몰자위령제’를 열고 참가하도록 함 → 기독교계 10개 학교 불참

③ 원산 (1933. 9.): 진성여자보통학교, ‘만주사변 2주년기념 순난자 위령제’ 참가 거부


(2) 평양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거부사건 (1935. 11.)

① 평남도청에서 열린 도내 공∙사립 중등학교 교장회에서 도지사가 교장들에게 평양신사 참배 요구

② 숭실학교 교장 맥큔, 숭의여학교 교장대리 정익성,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 등이 이를 거부함

③ 총독부와 도당국, 교장 및 학생들의 참배여부 명확히 회답하도록 요구함

④ 교장파면 및 강제폐교도 불사하겠다는 방침 발표

⑤ 숭실학교 맥큔과 숭의여학교 교장 스누크, 끝까지 거부하여 파면됨


(3) 일제가 주장한 신사참배의 논리

①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

②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인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이 되게 하는 데 있다. ③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들 이모두 함께 신사참배를 통하여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3) 교회의 대응


(1) 장로회 제21회 총회 (1932. 9)

① 결의: 교회학교의 학생이 신사 및 여러 제식에 참배하는 것과 일요일에 송영 등에 관하여 할 수 없다


(2) 교회 내부의 이견 

① 신사참배에 비록 종교적 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일제당국이 애국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므로 학교를 유지하고 기독교교육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이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연희전문학교 교장 언더우드)


(3) 북장로회 - 폐교

① 숭실중학, 숭실대학, 숭의여학교 (1938. 3.)

② 대구의 계성학교∙신명여학교, 재령의 명신학교, 선천의 보성여학교∙신성학교, 강계의 영실학교, 서울의 경신학교∙정신여학교 등


(4) 남장로회

① 가장 강경한 반대입장을 표명함

② “한국학교에 대한 정책” (풀턴성명) 발표: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신사참배를 시키기보다는 차라리 학교를 폐쇄

③ 폐교: 광주의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목표의 영흥학교∙정명여학교, 순천의 매산남녀학교, 전주의 신흥학교∙기전여학교, 군산의 영명학교


(5) 호주장로회 선교보

① 신사참배를 하거나 신사참배를 하도록 가르칠 수 없다는 방침을 채택함

② 학교 폐쇄 (1939. 1.)


(6) 감리교, 캐나다선교회

①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간주해 별다른 마찰이 없었음


(6)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1938. 9.)


(7) 천주교회

①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에 불과하다는 일제의 성명을 그대로 인정하고 교리를 수정하면서 신사참배를 허용함

② 로마교황청, 천주교 신자들이 신사에 참배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림 (1936. 5.)


(8) 감리교회

① 총리사 양주삼, 총독부 초청 좌담회 참석 후 일제의 입장을 수용하기로 함(1936. 6.)


3. 기독교계의 훼절과 수난


1) 기독교계의 변질


(1) 시국설교 및 기도회 (1937. 8.)

① 승동교회에서 내선일체를 재인식할 것과 일본의 전승을 매일 아침 기도할 것 등을 결의함

② 일제의 반응: “장로파가 이러한 행동으로 나와서 사상적 대전향을 보인 것은 일찍이 보지 못한 현상”이라며 환영


(2) 신문

① ‘기독교보’ 사설 “기독교의 국가봉사”에서 “총후만전을 도모하여 황운을 부익하라”라고 주장 


(3) 평양

① 친일적 목사들인 ‘기독교친목회’ 조직

② 일본 기독교와 연계하며 부일적 활동 전개


(4) 서울

① ‘경성기독교연합회’ 조직 (1937. 5.) → ‘종교보국’ 서약 → ‘조선기독교연합회’ 결성 (1937. 7.)


(5) 장로회 신사참배 결의 (1938. 9.)

① 일제에 대한 교회의 적극적 협력을 약속한 전향성명

② “국민정신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함”

③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결성 (1939. 9.) → ‘총회중앙상치위원회’ 조직

④ 장로회 지도요강 발표 (1939. 11.): 실천방책으로 신사참배∙궁성요배∙황국신민서사 제창 등을 규정


(6) 감리회

① 혁신안 발표 (1940. 10.): ‘총후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실체제에 순응함은 아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라는 내용을 담음

② 민주주의∙자유주의의 배격, 일본정신의 함양, 일본메소디스트교회화의 합동, 일본적 복음의 천명, 나아가 개별교회 애국반의 활동강화와 “교도로 하야금 지원병에 다수 참가케 할 것”을 규정함


(7) 조선구세군

① 조선구세단으로 개칭 (1940. 11.)

② 일본구세단과 긴밀히 협력하며 ‘순일본적 지도이념’ 및 기구의 확립을 선언


(8) 조선성공회 (1940. 12.)

① “일본정신에 의한 보편적 성향” 표방


(9) 일본교회

① 일본기독교연합회장과 일본메소디스트교회 감독을 겸임한 아베가 방한하여 ‘기독교의 신체제’란 주제로 간담회 개최


(10) 일본교회로의 예속

① 장로교 →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1943. 5.)

② 감리교 →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 (1943. 8.)

③ 동아기독교∙성결교∙안식교 해산명령


2) 기독교계의 부일 협력


(1)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연맹 (1939)

① 각 노회별로 지부연맹을 조직해 부일협력에 나섬


(2) 전시물자 및 인력동원에 대한 협력

① 상치위원회, ‘애국기(전투기) 헌납’ 결의 (1941. 8.) → 비행기 1대와 기관총 7정 대금인 150,317원 50전 전달 (1942. 2.)

②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금속∙유기∙교회의 종 헌납 

③ 각종 시국강연회에 교인 동원



3) 기독교인의 부일 행각


(1) 일제에 협력

① 평북노회 신사참배 결의 (1938. 2.)

② 평양노회와 평서노회 시국순응∙일장기 게양∙동방요배 등의 실행 결의 (1938)


(2) 배교

① 전북 금산의 이칠봉, 신사참배 거부방침에 불만을 품고 배교

② 경남 하동 읍내동교회, 120여 명의 교인 중 40여 명이 비상시국에 ‘외국종교’를 믿을 수 없다며 배교

③ 황해도 해주 강태동교회, 관리자 박봉근을 비롯한 교인 20여 명이 예배당 폐쇄

④ 강원도 이천, 전도사 최봉준 배교

⑤ 경남 밀양 조평리교회, 기독교가 일본정신과 상용될 수 없다며 예배당 폐쇄

⑥ 전남 보성, 기독교교리가 “국체에 반하는 것”이란 이유로 교인들이 배교하면서 교회를 ‘대일본정신도장’으로 개칭하고 그 안에 가미다나를 설치함


(3) 논설을 통한 부일활동

① 박희도, 친일잡지 ‘동양지광’ 발간 

② 신흥우, “일본을 사랑하기 때문에 제국의 국책에 충실히 순응, 협력, 돌진하라, 이것이 우리들 조선 기독교도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이라 역설함

③ 최태용, “우리는 가장 사랑한느 것을 일본국에 바치도록 신에게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징병제 실시가 그것이다”라 주장함

④ 유각경, “어머니 자신부터 가질 ‘야마도다마시(일본정신)’”

⑤ 박마리아, “자식둔 보람, 어미된 면목”

⑥ 김활란,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


(4) 조선임전보국단 참여

① 윤치호: 고문

② 신흥우: 상무이사 겸 총무부장

③ 유억겸: 이사

④ 구자옥: 이사


4. 기독교인의 항쟁


1) 항일민족운동


(1) 기독교인들의 반일적 모습

① 장로교와 구세군, 일제가 강요한 ‘애국적 운동’에 냉담함

② 반전∙반일적 언동으로 처벌 받은 신자가 생김

③ 궁성요배, 신사참배, 시국좌담회 개최 등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었음

④ 황해도 해주의 감리교 전도사 김만식과 전라남도 나주의 기독교계 개량서당 교사 김영환은 “전쟁은 죄악”이라 비난

⑤ 강원도 이천의 감리교계 유치원 보모 전영신, 일본군 위문을 위한 천인침을 미신적 행위라며 금지시킴

⑥ 평안남도 중화에서 열린 도제직회 때 교회 제직들이 시국좌담회 개최∙일장기 게양∙동방요배 반대

⑦ 평안북도 강계의 기독교계 영실학교, 시국강연회에 학생 20여 명이 고의로 결석함


(2) 수양동우회

① 안창호의 흥사단 계열의 국내조직

② 겉으로는 인격수양∙민족개조를 표방한 친목수양단체였으나 속으로는 민족의식 고취와 민족실력 배양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표로 삼음

③ 수양동맹회 (1922)와 동우구락부(1926)가 합동한 단체 → 동우회로 개칭함 (1929)

④ 서북계 장로교인들이 많이 참여함


(3) 흥업구락부

① 기독교인들이 조직함 (1925)

② 이승만의 동지회 계열의 국내조직

③ 겉으로는 산업진흥을 표방했지만 속으로는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국내동지 확보, 계몽활동 전개를 통한 독립운동 지원이 목적


2) 민족문화 수호운동


(1) 한국어

① 성경∙찬송가 및 각종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보급하고 한글강습을 실시함

② 이윤재: 안동교회 장로, ‘우리말사전’ 편찬, 맞춤법통일한 제정, 한글보급운동

③ 김윤경: 정동교회 장로, ‘조선문자급어학사’(1938) 저술

④ 장지영: ‘조선어전기’(1924), ‘조선어철자법강좌’(1930) 저술, 조선어연구회 조직

⑤ 최현배: 새문안교회 집사, ‘우리말본’(1935), ‘중등조선어법’ (1936), ‘한글바른길’(1936), ‘한글갈’ (1940) 저술


(2) 한국사

① 남궁억: ‘동사략’, ‘조선이야기’ 저술

② 안재홍: ‘조선상고사감’ 저술

③ 홍이섭: ‘조선과학사’ 저술

④ 함석헌: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성서조선’에 연재

⑤ 김원근: ‘해동명공유사’, ‘조선사학대가’, ‘조선고대명공열전’, ‘조선풍투기략’ 등을 ‘청년’에 연재

⑥ 백낙준: 예일대 박사학위 논문으로 ‘한국개신교사’를 제출 - 한국인이 정리한 최초의 기독교 통사


(3) 한국지리

① 김교신: 양정고보(서울), 송도고보(개성), 영생여고보(함흥) 등에서 지리박물학 교사로 한국의 역사와 지리를 가르침


(4) 모곡리 무궁화사건

① 개요: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을 위해 그들의 국기인 일장기와 국화인 벚꽃을 보급하려는 데 대항하여 강원도 홍천 모곡감리교회의 전도사 남궁억 등이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배포하려하자 이를 탄압한 사건


3) 신사참배 거부운동


(1)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방향

① 신사참배 강요금지 청원운동: 일제 당국이나 영향력 있는 기관∙인물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

② 신사참배거부 권유운동: 일제의 강요에 끝까지 저항하며 신앙과 교회를 지키려 함


(2) 신사참배 강요금지 청원운동

① 개인적 차원에서 전개됨

② 한계: 일제가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음, 일제의 권력구조를 인정한 체제 내 운동

③ 의의: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종교탄압에 맞서 그 부당성을 폭로∙경고함


(3) 박관준 장로

① 수차례 총독에게 청원서와 경고문을 보내 신사참배 강요의 부당성을 지적

② 경찰에 끌려가 취조받음

③ 일본으로 건너가 구세군 사령관 야마무로 중장, 일본기독교회 장로 히비키 중장, 정우회 대의사 마쓰야마, 전 조선 총독 우가키 등을 방문하여 진정

④ 일본제국의회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 반대, 국교를 신도에서 기독교로 할 것, 신사참배 강유 등 악법 실시 강요와 양심적 교역자 투옥을 철폐할 것 등의 내용을 담은 경고서를 단상에 투척 (1938. 3. 24.) 체포되어 투옥


(4) 김선두 목사

① 일본에서 정우회 외정부장이자 중의원 의원이 마쓰야마 장로, 궁내대신 차관 세키야, 정계와 군부의 원로인 히비키 장로 등을 만나 진정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저지하려 함


(5) 신사참배거부 권유운동


(6) 이기선 목사

① 신사참배 거부 권유 → 경찰 검속

② 만주 안동 방문 (1940. 3.) → 신사참배 거부 결의


(7) 한상동 목사

① 신사참배를 긍정하는 노회를 파괴하도록 할 것

② 신사불참배주의 신도로 신노회를 조직할 것

③ 시사참배를 긍정하는 목사에게 세례를 받지 못하게 할 것

④ 신사불참배 동지의 상호원조를 도모할 것

⑤ 가정예배 및 가정기도회를 힘써 개최하며, 한편 개인전도 등의 수단으로 동지들을 획득할 것


(8) 주남선 목사

① 거창∙함양∙합천 등지의 교회를 순회하며 신사참배 거부 역설

(9) 주기철 목사

① 1938년부터 1944년까지 4차에 걸쳐 검속되어 7년간 옥고를 치르다 옥중에서 순교함


5. 선교사들의 철수


①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외교공관에 외교관을 제외한 대다수의 미국인들을 철수하도록 지시함 (1940. 10.)

②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 마리포사호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감 (1940. 11. 16.)

③ 귀국전 402명 → 귀국 후 119명 → 태평양 전쟁 후 37명

④ 전쟁 발발 후 구미인들은 가택연금을 당하거나 수용소에 수용됨

⑤ 선교사와 선교부의 재산은 일본 당국에 의해 적산으로 선언되어 당국의 관리 하에 들어감


제10장 해방과 새로운 출발


1. 해방과 교회 재건


1) 조선기독교남부대회


(1) 일본기독교조선선교단

① 일본기독교조선선교단은 일본의 종교통합정책에 의해 강압적으로 만들어 짐 (1945. 7.)

② 일본기독교조선선교단 지도자들은 교단을 유지하기를 원함 (통합된 교회, 정치적 상황 적응)

③ 명칭을 조선기독교단으로 바꾸고 남부대회를 소집함 (1945. 8. 8.)


(2) 남부대회

① 남한의 교단만 참석함

② 장로회와 감리회의 대표자들만 참여함


(3) 조선기독교남부대회 (1945. 11. 27. - 30.)

① 임원진 선출

② 일제강점기 순교자에 대한 추도회

③ 임시정부 지지 입장 발표

④ 선교사 내한 요청

⑤ 38도선 문제의 해결과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진정

⑥ 기독교공보 발행: 주간신문으로 창간 (1946. 1.)


(4) 조선기독교남부대회 해체 (1946.)

① 감리교 지도자들의 감리교 재건 선언, 경남노회 재건 (1945. 11.), 전북노회 재건 (1945. 12.)

② 통일에 대한 여망으로 남한교회만의 조직인 남부대회의 정당성 확보가 어려워짐


(5) 조선기독교연합회

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전신

② 장로교∙감리교∙성결교∙구세군, 재입국한 각국 선교부, 대한성서공회, 대한기독교청년회(YMCA),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를 포함한 기독교 기관 대부분이 참여함

③ 한국기독교연합회로 명칭을 바꿈 (1948)

④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견함


2) 교회의 재건


(1) 감리회

① 재건파: 감리교회유지위원회 조직 (1945), 1939년 이후 만들어진 제도 및 규정 일체를 부인함

② 복흥파: 특별총회 개최 (1946), 일제 식민통치에 순응하면서 교회를 맡았거나 남부대회에 적극 참여한 사람들


(2) 장로교

① 남한 지역 노회 재건이 완결됨 (1946)


(3) 자숙

① 옥중성자(출옥성도): 회개와자숙∙정화운동을 통해 교회를 재건하고자 함. (이기선∙채정민∙한상동)

② 5대 원칙: 신사참배를 행한 목사에게 최소 2개월 동안 휴직하고 통회자복할 것을 요구

③ 수적으로 열세여서 교회 재건작업에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음

④ 자숙을 전제로 한 교회 재건 원칙은 한국교회 전체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함

⑤ 친일과 신사참배문제를 기독교 정체성 확립 차원에서 바라보기보다 교회제도의 유지 차원에서 해석함


3) 선교사의 입국


(1) 선교사들의 송환

①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선교사의 재산은 총독부가 지정한 사람의 관리에 들어감

② 국내에 있던 선교사들이 영국과 미국 거주 일본인과 교환 형식으로 강제 송환됨(1942. 7.) → 국내에는 서양 선교사가 한 명도 남지 않게 됨


(2) 송환 선교사들의 활동

① 언더우드: 미국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해줌, 해외선교부에서 한국 담당 임시 책임자로 활동함

② 애비슨: 기독교인 친한회를 조직함,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지원하도록 미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함

③ 헐버트: 한미협회의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함


(3) 선교사들의 귀국

① 미군정청의 요청: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선교사 파견을 요청함 (1945. 11.)


4) 신학교의 재건


(1) 북한지역

① 평양신학교: 총회의 대행기구인 북한의 5도연합노회가 직영 신학교로 삼음

② 성화신학교: 북한지역 감리교 목사에 의해 설립됨 (1946. 9.)

③ 북한 당국과 갈등을 겪으면서 시련을 겪음


(2) 남한지역 - 장로교

① 조선신학원: 새로운 교수로 송창근∙최윤관∙한경직∙공덕귀 등을 초빙함 (1945. 9.)

② 고려신학교 설립 (1946)

③ 장로회신학교 설립 (1948)

④ 감리교신학교 재건됨 (1946. 2.): 실질적 운영권은 재건파가 독점함

⑤ 서울신학원 설립 (1948. 9.): 복흥파가 세움

⑥ 교단 통합 이후 서울신학원은 감리교신학교로 흡수됨 (1949.4.)

⑦ 성결교: 경성신학교 재건 (1945. 11.)

⑧ 구세군: 구세군사관학교

⑨ 성공회: 성미가엘신학원

⑩ 초교파 피어선기념성경학원, 연희대학교 신과대학, 중앙신학교, 대한신학교, 한국성서학원

⑪ 안식교: 삼육신학원

⑫ 루터교: 루터신학교

⑬ 그리스도교회: 그리스도신학교

⑭ 미국침례교: 침례회신학교


2. 분단과 기독교


1) 남한교회와 정부 수립


(1) 미군정과 교회

① 남한교회, 군정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함

② 교회는 미국유학생과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집단이었음

③ 미군정의 한국인들 중에는 미국 유학의 경험이 있거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정부의 공무원으로 있다가 군정처에서 일하게 된 기독교 인사들이 다수 있었음

④ 선교사와 선교사 2세들이 미군정과 교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함

⑤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기독교를 통해 공산주의와 맞서려고 함


(2) 신탁통치에 대한 태도

① 한국교회 대다수는 친이승만계 노선을 따름

②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 조직 (1945. 10.): 남부대회가 조직함

③ 그리스도교연맹 (1947. 7.): 이승만 지지, 전민족적 통일과 자주독립, 민주주의 실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음

④ 기독교신민회 (1945. 12. 1.): 개신교와 천주교를 망라해 구국운동에 참가할 것을 선언함, 사회민주당 세력이 주축

⑤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유일한 기독교 단체

⑥ 기독교민주동맹(1947. 2.): 좌익 진영에 합류한 유일한 개신교 세력 → 정부 수립 이후 지하에서 활동하다가 등록취소 처분 받음 (1949. 10.)


(3) 기독교적 국가 재건 구상

① 임시정부 요인 환영대회 (1945. 11.): 김구, 김규식, 이승만 기독교 국가 필요성을 이야기함

② 초대 국회 개원식 (1948. 5.): 국회의장 이승만, “하나님과 애국선열과 삼천만 동포 앞에” 선서하고 국회의원이자 감리교 목사였던 이윤영에게 기도할 것을 부탁함

③ 제1공화국의 국가의식이 기독교식으로 진행됨

④ 초대 국회의원 208명 중 44명이 개신교인 (약 21%)

⑤ 제1공화국 장∙차관 242명 중 38%가 개신교인


2) 북한정권하의 기독교


(1) 사회주의 정권 성립과 교회의 반응

① 김일성, 신앙의 자유와 신앙인에게도 정치∙경제생활에서 동등한 권리를 보장함

②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전 많은 종교인들이 종교적,정치∙경제적 이유로 월남함

③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조직 (1945. 8. 17.): 조만식∙오윤선 등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우익계열이 조직함

④ 기독교사회민주당 조직 (1945. 9.): “민주주의 정부의 수립과 기독교 정신에 의한 사회개량”을 강령으로 함

⑤ 조선민주당 (1945. 11. 3.): 조만식, 통일전선 조직체, 당원이 수 십 만에 이름 → 신탁통치문제로 통일전선적 성격이 사라짐 


(2) 북조선기독교도련맹

① 인민위원 선거일 문제로 임시인민위원회와 교회가 충돌

② 재건파: 모든 형태의 정치참여 거부

③ 장로교: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함

④ 김일성, 북조선기독교도련맹(조기련) 조직 (1946. 11. 28.)


제11장 6∙25전쟁과 교회


1. 전쟁과 교회


1) 6∙25전쟁


(1) 6∙25 전쟁이 기독교에 미친 영향

①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혼을 위로하고 구호의 손길을 기다리던 사람을 도와줌 → 이 세상에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보여줌

② 국가 안보를 위한 반공적 신앙과 개인의 생존을 위한 현세구복적인 신앙을 강조함


(2) 전쟁 단계별 교회에 미친 영향

① 개전초기 북한 인민군이 남해안까지 진출했을 때, 압록강까지 진출했을 때: 많은 교인들이 살해되고 납북됨

②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집혔을 때: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함

③ 휴전협정을 체결할 때까지: 휴전을 강력하게 반대함


2) 교회의 반응


(1) 남한교회

① 대한기독교구국회 결성 (1950. 7.): 선무∙구호∙방송 같은 일을 담당함

② 기독교연합전시비상대책위원회: 미국 대통령, 유엔 사무총장,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내는 편지를 채택함

③ 정전반대 신도대회 (1951. 7.): 휴전은 유엔의 희생을 무효로 하는 것이며, 태평양을 혈해로 만들 것이라고 경고함

④ 북진통일 기원대회 (1953. 6.): 서울 기독교인 7천여 명이 참석함

⑤ 구국기독신도대회 (1953. 6.): 부산 충무로 광장에 1만여 명이 참석함

⑥ 한국교회의 휴전 반대운동은 세계교회의 입장과 어긋남


(2) 북한교회

① 서울 탈환 환영예배

②궐기대회 (1950. 8. 5.): 평양 서문밖교회, 정의의 성전에서 하루 속히 승리하도록 예배하고 기도하자고 호소함

전승기도회 (1950. 8. 13.)

③ 북조선기독교도련맹: 무기 구입 헌납운동, 전쟁 지원과 협력

④ 전쟁 후 북한에 남은 교인들은 교인의 집을 예배처소로 정하여 비공개적으로 신앙생활을 함


(3) 외국 교회

① 한국기독교연합회, 국제선교협의회와 국제문제교회위원회에 북한군의 남침을 알리고 미국 및 국제종교기구들의 긴급 도움을 요청함

② 세계교회협의회, “한국 상황과 세계 질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함 → 세계 질서 유지의 차원에서 북한의 침략에 맞서서 신속한 결정을 취해 줄 것과 회원국들의 “경찰 행동”을 허가해 줄 것을 권고함

③ 동구권 교회와 중국 교회,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의 성명에 대해 항의함


3) 구호활동


(1) 외국 교회와 기독교 외원단체

① 구호활동: 전재민 응급구호, 고아원 운영과 해외입양, 전쟁미망인 원조, 주택 복구, 교육, 보건의료, 지역사회 개발

② 외국민간원조단체연합회 결성 (1952): 10개국에서 온 59개의 외원단체들이 가입함 (1958. 11.까지), 미국교회에 속한 단체가 가장 많음


(2) 구호내용

① 아동구호: 고아사업, 고아원 수용, 해외 입양(기독교아동복지회, 스완슨복음전도회, 기독교선명회, 홀트아동복지회)미망인 지원: 미망인 시설건립 지원, 운영비 보조, 뜨개질 같은 기술교육, 소비성 물품 공급 (국제연합한국재건단, 기독교세계봉사회, 간리교, 동양선교회, 메노나이트, 월드비전, 캐나다연합교회, YWCA, 메리놀수녀회)

피난민 정착사업: 월남 피난민과 반공포로 대상

② 급식 구호사업: 영양실조에 걸린 아동과 노인 대상 (기독교세계봉사회, 구세군)

③ 피난민 건강: 의수족 제공, 산파교육, 결핵퇴치 (기독교세계봉사회)


(3) 의의와 한계

① 의의: 한국 교인들이 구호활동과 사회봉사의 현장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됨 → 한국교회와 기독교 시민단체들이 ② 북한지역을 포함한 세계 전역에서 구호 및 봉사활동을 하는데 큰 자원이 됨

③ 한계: 구호품 분배과정에서 교회가 다툼의 장이 됨, 미국을 일종의 구세주 국가로 여기게 만듬, 한국교회가 친미적 태도를 가지는 데 기여함


2. 전후의 종교상황


1) 새로운 종교현상


(1) 기도원과 신비 체험

① 성령체험의 표시로 방언∙예언∙입신∙신유 등의 신비스런 종교현상이 중시됨

② 기도원 이외에 사설 제단과 인수 기도소들이 생김

③ 하나님의성회, 성령세례와 방언∙은사, 신유를 강조함


(2) 통일교와 전도관

① 등장배경: 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통화 팽창 등으로 인한 사회불안

② 종류: 김백문의 야소교이스라엘수도원, 문선명의 통일교, 박태선의 전도관, 나운몽의 용문산기도원

③ 야소교이스라엘수도원: 김백문이 해방 직후 경기도 파주를 근거지로 세움, 초기에 문선명이 함께함

④ 통일교: 문선명이 김백문의 문하를 벗어나 평양에 교회를 개척 (1946), 전쟁 중에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통일교를 설립함 (1954), 예수를 영적 구원만을 성취한 자로 규정하고 자신을 육적 구원을 성취할 재림주 또는 메시아로 암시함

⑤ 전도관: 박태선 자신을 동방의 의인 또는 감람나무로 호칭하면서 감람나무가 나타나면 이 세상은 끝이라고 예언함

⑥ 한국기독교연합회: 통일교와 전도관을 ‘사이비한 신앙운동’으로 규정 (1955. 7.)


2) 교회와 정치의 관계

① 군종제도: 미군 군종들의 건의로 1951년 2월부터 시작됨

②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 1952년 선거에서 선거운동을 위해 3,500여 교회에 위원회를 조직, 국가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기대가 들어있었음

③ 부통령 선거 - 함태영: 정치적 기반이 없었지만 ‘100만 기독교 신자를 배경으로’ 출마함

④ 1956년 선거에서는 정보와의 유착관계에 대한 반성으로 특정후보 지지 움직임이 줄어듬


제12장 교단 분열과 새 교단의 탄생


1. 장로교의 분열


1) 예수교장로회(고신)


(1) 경남노회

① 자숙안 제시: 목사∙전도사∙장로 교회에서 사직, 자숙 기간이 종료되면 시무투표를 통해 진퇴 결정 → 내부반발로 폐기

② 고려신학교 개교 (1946. 9.): 보수적, 평양신학교 계승을 표방함

③ 노회장이 된 김길창을 중심으로 고려신학교의 인준을 취소하고 신학생 추천을 금지함 (1946. 12.)

④ 한상동이 반발해 노회를 탈퇴하자 경남노회 소속 교회들이 지지 성명을 발표함 → 출옥성도 중심의 교회재건안을 재확인함 → 고려신학교를 다시 지원함

⑤ 신도 의례와 관련된 문제로 경남노회가 분열됨 (한상동, 김길창)

⑥ 김길창 측은 경남법통노회, 한상동 측은 고신파(고려파)로 나뉨



2) 기독교장로회


(1) 조선신학교 설립

① 김재준∙송창근∙채필근 등의 주도하에 설립됨 (1940)

② 조선신학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퍼져 있었음


(2) 조선신학교 학생들의 진정 사건

① 신학 교육에 불만을 품은 신학생들이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 일동”이라는 명의로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함 (1947. 4.)

② 내용: 근대주의 신학과 성경의 고등비평, 자유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신학을 배척함 (김재준의 강의에 대한 비판)

③ 김재준의 입장: 성경의 정확무오함을 강조함


(3) 장로회신학교 설립

①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설립됨 (1948. 6.)

② 총회에서 직영 신학교로 인준됨 (1949)


(4) 총회신학교 설립

①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직영을 취소하고 설립됨 (1951. 9.)


(5) 제37회 총회 (1952. 4.) 

① 성경유오설을 주장하는 자는 권징조례에 의하여 시정∙치리하도록 각 노회에 지시할 것을 결정함

② 김재준의 면직을 경기노회에 제안, 김재준에 동조한 캐나다장로회 소속 선교사 스코트의 본국 송환 결의

③ 경기노회 반발: 총회의 조치가 불법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함 (1952. 5.)


(6) 제38회 총회 (1953. 4.)

① 제37회 총회의 결정을 재확인함


(7) 조선신학교측이 새 교단을 만듬

① 캐나다연합장로회 선교부 지지

②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이라고 함 (1954)


3) 예수교장로회(통합)와 예수교장로회(합동)


(1) 세계교회협의회 창립대회 이후의 갈등

①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창립대회 (1948)에 참여한 김관식, 세계교회협의회 가입을 제안함

② 박윤선, 세계교회협의회에 가입하는 것은 교리적 위반이라고 함 (1950)

③ 경남법통노회에 속한 교회의 후원을 받은 국회의원 22명, 세계교회협의회가 공산주의를 용납하는 기관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함 (1951)


(2) 세계교회협의회 2차 총회 이후의 갈등

① 김현정, 세계교회협의회 지지: 세계교회협의회가 지향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은 교회 합동을 의미하는 유니온(union)이 아니라 연합을 의미하는 유니티(unity)라고 함

② 명신홍, 세계교회협의회 반대: 교리적으로 혼합주의적이며 용공적이라고 보고함


(3) 연구위원 선정 후 연구 진행

① 한경직∙전필순∙유호준∙안광국∙박형룡 등 8인이 선정됨

② 세계교회협의회에 대한 한국교회의 선택적 참여를 권장함

③ 미국 복음주의협의회 및 세계복음주의연맹과 관련을 맺은 인사들은 세계교회협의회 참여에 부정적 입장


(5) 경기노회 총대사건

① 에큐메니칼 측과 복음주의협의회 측이 각각 총대 명단을 제출함

② 에큐메니칼 측은 통합, 복음주의협의회 측은 합동이라 불림



2. 감리교의 분열


(1) 감리교의 분열

① 1940년대: 재건파와 복흥파의 분열

② 1950년대: 총리원과 호헌파의 분열

③ 1970년대: 총리원과 갱신총회의 분열


(2) 총리원과 호헌파의 분열

① 계기: 감독(류형기)와 관련된 갈등으로 분열됨


(3) 경기연회의 이탈

① 1960년대에 감리교는 본부를 중심으로 한 교권의 횡포, 인사행정의 난맥상, 파벌 간의 대결 등으로 진통을 겪어옴

② 경기연회, 연합총회를 만들어 독자적인 교단 형성 (1975)


(4) 갱신총회, 연합총회, 총리원

① 감독 선출을 둘러싸고 갈등이 생김

② 김창희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총리원

③ 갱신총회

④ 연합총회


(5) 통합

① 서울 광림교회에서 통합총회를 개최함 (1975. 11.)


3. 성결교와 침례교의 분열


1) 성결교의 분열


① 한국기독교연합회와 복음주의협의회에 가입함

② 장로교가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된 것과 마찬가지로 성결교 내에서도 에큐메니칼 진영에 속한 인사들은 사회사업을 중시한 반면 복음주의협의회 지지자들은 복음의 순수성을 강조했음

③ 한국기독교연합회와 복음주의협의회 두 기관 동시 탈퇴와 관련해 이견이 있었음

④ 복음주의협의회 지지자들이 성결교회보수동지회를 만들어 두 연합기관에서 탈퇴함

⑤ 보수총회 측은 예수교대한성결회(예성)

⑥ 기존 성결교는 기독교대한성결회(기성)



2) 침례교의 분열


(1) 동아기독교회

① 제36차 대화회를 통해 동아기독교회 명칭을 회복함 (1946. 9.)


(2) 대한기독교회

① 경북 예천 지역을 중심으로 과거의 체제를 옹호하는 10여 개의 교회가 분립함 (1947)


(3) 선교 자금을 둘러싼 교권 투쟁

① 주류: 안대벽

② 비주류: 다른 교단에서 영입되어 온 사람


4. 새로운 교단의 등장


(1) 나사렛교회

① 19세기 말, 20세기 초 감리교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국의 성결-오순절 운동 과정에서 등장함

② 유래: 예수 그리스도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한 복음서에 근거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나사렛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믿음에서 붙여진 이름

③ 1948년 미국 유학파 출신이자 부흥사였던 정남수가 국내에 흩어져 있던 몇몇 성결교 집단들을 미국 나사렛교회와 연계시킴

④ 미국인 선교사 오웬스, 나사렛신학원 세움 (1954)


(2) 오순절교회

① 해방 이전 영국 선교사들을 통해 오순절 계통의 교회가 세워짐

② 미국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 체스넛이 내한하면서 오순절계 교회들이 교단의 형태를 갖춤

③ 하나님의성회: 1914년 기존의 오순절계 교단인 하나님의교회에서 인종문제로 백인들이 분리되어 나와서 세운 교단

④ 물세례와 구별되는 성령세례를 강조함, 방언을 비롯한 각종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며 열정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함

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라는 이름의 교단이 국내에서 정식으로 출범함 (1953)

⑥ 순복음신학교 출신의 조용기와 최자실이 개척한 천막교회가 세계 최대 규모의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발전

⑦ 성령세례 이외에도 신유, 전천년주의적 예수 재림, 물질적 축복 등을 핵심으로 삼음

⑧ 1970년대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많은 보수적 교역자들이 그 교회의 예배와 교역 방법을 모범으로 삼기 시작함

⑨ 신유의 이적을 추구하고 물질적 축복을 간구하는 것이 보편화됨

⑩ 1980년대 초 조용기의 설교와 성령운동이 이단사이비 시비에 휩싸이며 교단이 분열됨 →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라는 교단을 만듬

⑪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와 예수교대한하나님의성회(예하성)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라는 이름 아래 재결합함 (1991)

⑫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회원교단으로 가입함 (1996): 장로교(통합)가 조용기와 오순절 운동에 대한 비판을 철회함으로써 가능해짐


(3) 루터교

① 미국 루터교 미주리 시노드, 한국에 선교사 파견 (1958)

② 성경무오설을 믿으며 보수적 신학을 견지함

③ 대중매체를 통한 초교파적 선교에 주력함

④ 방송선교 (루터란아워), 출판 사업 (컨콜디아), 베델성서연구, 기독교통신강좌

⑤ 한국루터교선교회 출범 (1971) → 기독교한국루터회로 발전


(4) 친우회 (퀘이커)

① 17세기 영국에서 시작한 소종파

② 성경, 교리, 성례전, 교직제도, 교회 건물 등 전통적인 요소보다는 모든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인 “내면의 빛”을 듣는 데 주안점을 둠

③ 한국의 경우 교세가 미약했고 함석헌 이외에는 활발한 사회참여 활동이 보이지 않음


제13장 교회의 성장과 발전


1. 교회 성장의 현상들


(1) 교회의 성장 

① 1960년부터 1990년 사이에 교회 수가 7배 이상 증가함

② 오순절교회의 성장: 1만 명 (1950년대)에서 20만 명 (1980년대)로 성장

③ 성결교회의 성장: 10만 명 (1950년대 말)에서 60만 명 (1990년대)

④ 침례교의 성장: 교회 수 2백여 개 (1960년대)에서 1천 교회 넘어섬 (1984) 이후 매년 1백 교회 증가

⑤ 장로교 통합과 합동 측은 교인 수가 각각 1백만 명을 넘김 (1970년대)

⑥ 장로교 고신은 교인 수 20만 명을 넘김 (1970년대)

⑦ 감리교의 성장: 1970년 - 1978년 사이 교인이 29만 명에서 60만 명으로 증가


(2) 100주년 기념행사

① 한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범 교단 차원의 협의체가 만들어짐 (1981)

② 100주년기념탐(인천 연안부두), 선교기념관(양화진), 순교자기념관(용인) 건립됨

③ 예수교장로회(통합), 감리교: 교단 차원의 기념관 건축

④ 사랑실천운동 전개: 무료 개안수술 전문병원 설립후원, 헌혈운동, 불우아동 결연사업 특별후원, 전국재소자 불우가족 돕기운동, 결핵환자 자활촌 조성운동

⑤ 한국기독교100주년선교대회: 감사와 회개, 성장과 갱신, 평화와 통일, 세계 선교 등을 주제로 여의도 광장에서 열림, 선교대회 기간 중 국내외에서 350만 명 이상 참가

⑥ 순교자추모예배, 기념대공연, 여성대회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1985년 10월까지 연이어 개최됨


(3) 서울올림픽

① 세계 선교를 위한 좋은 기회로 삼음

② 25개 교단 및 2백여 선교단체, 88서울올림픽전도협의회 조직

③ 대회 기간 중 38개국 언어로 된 3백만 부의 전도지, 10만 개의 오디오테이프, 40만 부의 성경, 한국 문화와 한국 기독교 전래의 역사 등을 소개하는 비디오테이프 3천 개 배부


(4) 성장 둔화

① 1980년대에 들어 성장 속도가 둔화됨

② 1990년대 중반 이후 개신교의 교인 수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남



2. 교회 성장의 사회적 배경


① 도시 속에서 소외감과 정체성의 위기를 느낀 사람들에게 종교는 소속감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좋은 장이 됨

②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기독교인의 수가 증가함

③ 분단과 개발독재 상황이 조성한 심리적 불안감, 정치경제적 불균형, 사회적 불만 ,가치관의 혼란은 종교가 전반적으로 성장하는 데 유리한 여건을 조성함

④ 종교 속에서 소속감과 연대감, 공동체 의식을 느꼈고 뚜렷한 가치관과 삶의 의미를 발견했으며 사명감과 희망을 얻었고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음

⑤ 경제 이익의 분배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현세적∙물질적 축복을 약속하며 강력한 보상적 기제로 작동함


3. 교회 성장의 원인들


1) 부흥운동과 교세확장 운동


(1) 개신교 선교 80주년 (1965)

① “3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 아래 온 겨레가 모두 복음을 듣게 하자는 운동이 진행됨

② 농어촌과 도시, 학원과 군대, 개인과 집단 등 여러 분야를 대상으로, 교단별 혹은 연합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됨

③ 모든 기독교 교파와 교단이 동참하여 진행한 최초의 전도운동

④ 해방 이후에 개최된 최초의 대규모 부흥집회


(2) 1970년대 교세확장운동

① 장로교 합동: 1만 교회 운동 전개

② 장로교 통합: 연 300교회 개척 운동

③ 감리교: 5,000교회 100만 신도운동 (1974)

④ 성결교도: “1만 교회 300만 신자”를 목표로 십자군 전도대 운영

⑤ 장로교 기장: 2,000교회 성장 계획 (1975)


(3) 양적성장

① 물량주의: 신자 수, 교회당의 크기, 헌금 액수, 예산 규모 등 가시적 수치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을 중시하여 그 확장에 관심을 가짐

② 대표적인 방법: 군전도, 부흥전도집회


(4) 1970년대 부흥운동

① 각 개교회, 지방회, 노회, 교단이 경쟁적으로 부흥전도집회을 열었음

② 초교파적 대규모 집회가 개최: ’5천만을 그리스도에게’ 빌리 그래함 (1973.), 엑스플로 - CCC 주최 ’74 (1974. 8.), 77민족복음화성회 (1977), 80 세계복음화대회 (1980)

③ 특징: 성령 체험 강조, 현실적인 복 약속


(5) 기도원

① 부흥집회를 상시 개최할 수 있게 만든 장치

② 성령체험과 개인적 문제 해결의 장소로 인기를 끔

③ 300여 개(1980년대 중반)에서 600개 이상(1990년대 초반)으로 급증


(6) 영향

① 교단 내부의 결속력이나 기독교 전체의 협력관계를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됨

② 교회의 인적, 물적 자원이 개별교회의 유지와 확장에 집중되는 이기적인 개교회주의를 낳음


2) 교회성장론의 도입


(1) 교회성장론

① 교회의 설립과 확장을 위해서 신학적 원리에 사회과학 및 행동과학을 결합시킨 이론

② 동질 집단이나 아노미 현상을 이용한 집단 개종 주장

③ 선교를 개인전도가 아닌 대중운동 차원에서 전개하고 토착문화와 충돌하지 말고 그것을 이용하라고 가르침

④ 평신도를 훈련하여 교회성장에 동원하고 교회 밖의 파라처치 기관들과 연계


(2) 슐러의 교역이론

① 종교란 “기쁨이 충만한 삶의 수단”이 되는 신을 믿고 그 능력을 누리는 행위

② 교역이론의 핵심: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부드러운 신학, 희망을 주는 부담 없는 설교, 전도하며 성장하는 교회

③ 경쟁력 있는 교회, 크고 찾기 쉬우며 주차하기 편리하고 좋은 프로그램이 있으며 평신도가 열심히 참여하고 자기선전을 잘 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함


(3) 교회성장주의의 한계

① 교회성장을 상업주의로 접근

② 물량주의와 경쟁을 조장

③ 외형적 성공을 이상화시킴

④ 십자가 정신을 망각시킴


(4) 다양한 프로그램의 등장

① 철야기도회를 비롯한 여러 가지 형태의 기도모임 개최

② 평신도를 대상으로 한 성경공부 및 제자훈련 프로그램

③ 구역 혹은 속회 조직 강화

④ 전 교인을 각종 선교회나 친교활동 조직으로 묶어 다양한 행사 제공


(5) 평신도 성경공부 프로그램

① 종류: 벧엘 성서연구, 크로스웨이 성서연구, 트리니티 성서연구, 한스 웨버 성서연구 방법론

② 체계적인 성경연구 교재와 방법들을 이용하여 전교인을 대상으로 한 성서대학을 개설 →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실시

③ 영향: 교인들에게 정체성과 소속감을 갖게 함, 전도에 대한 사명감을 심어주어 동기를 유발함, 교회에 활력을 불어넣음


3) 파라처치 운동


(1) 학원선교를 위한 단체

① 1950년대: 한국기독학생회 (IVF), 한국대학생선교회 (CCC), 장로교(고신) 계열의 학생신앙운동(SFC), 자발적 학생운동으로 출발한 죠이선교회(JOY)

② 1960년대: 네비게이토,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③ 1970년대: 예수전도단(YWAM), 친미방공주의 성향의 한사랑선교회


(2) 구조

① 학원선교 단체의 목표: 제자화

② 중앙 지도자 밑에 중견 간사, 소장 간사, 학생 회원이 있는 중앙집권적인 조직 구조를 형성함

③ 학생 자치조직이 아니라 학생에게 선교하고 학생들을 동원하여 선교하기 위한 조직이었음


(3) 학원선교단체의 영향

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성경공부 교재를 만듬

② QT교재, 전도에 사용할 수 있는 ‘사영리’나 ‘브릿지’ 같은 전도지 개발

③ 체계적인 신앙훈련을 통해 많은 교역자, 평신도 지도자, 선교사를 배출하여 한국 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함


(4) 학원선교단체의 한계

① 보수적인 신학, 개인 구원과 좁은 의미의 선교 및 경건에 집착하여 사회의 제반 문제들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무관심했음 → 장기화된 군사독재 및 물량적 성장 위주의 경제개발이 야기한 온갖 문제들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관해 구체적인 대답을 주기가 힘들었음

② 다른 학생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 속에 사는 경우가 많았음

③ 졸업한 후에도 사회에서 역동적인 활약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음

④ 기존의 교회와 갈등을 일으킴 → 학원복음화협의회 설립 (1990): 대형교회와 학원선교 단체들 간의 협의체


(4) 진보적인 복음주의 운동

① 기독교문화연구회: 실천적으로 “민중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선구적인 단체

② 하나님 나라, 기독교 문화, 해방신학, 마르크스주의 등을 공부하며 빈민촌에 기초 공동체를 만들어 탁아소를 운영하고 농촌활동, 공장활동 등을 통해 현장 속으로 나아감

③ 대학기독신문: 기독교문화연구회의 기관지 (1986 - 1989)

④ 1987년 대통령 선거를 맞이해 공정선거감시와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복음주의청년학생협의회가 결성됨

⑤ 복음주의청년연합회와 한국기독학생회(IVF) 내의 진보적 학생모임인 연합학생회와 같은 사회참여적 단체들의 탄생으로 이어짐


(5) 문화 사업

① 학원 선교 단체들은 선교의 수단으로 찬양집회를 적극적으로 이용함

② 온누리교회 청년 수십 명이 시작한 경배와 찬양은 목요일 저녁마다 수천 명이 모이는 대형 집회로 성장함

③ 청소년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다른 문화예쑬 영역, 영상∙영화∙연극∙춤 등이 선교와 예배에 이용되기 시작하고 전문화된 문화사역 단체가 조직됨


(6) 유학생 운동

① 코스타: 미국 유학생을 위한 하계 신앙 수련회에서 시작됨 (1986)

② 국제복음주의학생연합회로 발전함

③ 북미,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러시아 등 한국 유학생이 있는 세계 각국에서 개최됨

④ 유학생 이외에 이민자들도 참석하는 신앙 집회로 발전함


4. 해외선교


(1) 해외선교

① 최초의 해외선교: 최찬영, 김순일을 태국에 선교사로 파송 (1956)

② 교단과 교회의 주도 하에 이루어짐

③ 1980년대부터는 학원선교 단체나 해외선교 전문 단체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급증함

④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 해외선교 활성화 (1989)

⑤ 선교지가 다양해짐: 동남아시아와 대만(1960년대), 한인 교포가 많은 곳으로 진출 (1970년대), 아프리카와 중동 인도 인근지역으로 확대 (1980년대), 중국 (1992년 이후)


(2) 한계

① 경쟁적으로 사업을 진행함

② 충분히 훈련받지 못하거나 사명감이 부족한 사람이 파견됨

③ 교단이나 선교기관과 협조하지 않고 각 교회가 임의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일이 발생함


제14장 다양한 교회 활동


1. 성경과 찬송가의 발행


1) 공인 성경


①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1952): ‘셩경젼셔’를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표기법만 수정한 개정판

② 성경전서 개역한글판 (1961): 옛 용어나 표현들을 고치지 못함

③ 신약전서 새번역 (1967): 대한성서공회,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역하되 쉬운 현대어 경어체 사용

④ 공동번역 성서 (1977): 대부분의 개신교단에서 이 성경 사용을 반대함

⑤ 성경전서 표준새번역 (1993): 현대적 구어체에 가까운 말로 번역, 보수 교회는 반발(장로교 합동), 장로교(통합, 고신, 기장), 감리교와 기독교성결회는 긍정적 반응을 보임

⑥ 성경전서 개역개정판(1998): 한자어를 우리말로 바꾸고 장애인과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을 바꿈


2) 다양한 현대어 성경


① 영한대조 신약전서 (1948): 류형기, 영어 개역성경을 번역함

② 쇼트바이블 (1958): 김재준, 영어 발췌 신약성경을 구어체로 번역함

③ 신약 현대인의 성경 (1977): 영미권의 ‘리빙 바이블’을 토대로 함, 전도에 목적을 둠, 각 성경의 제목을 풀어씀, 미터법 표시, 구어체 사용

④ 현대인의 성경 (1985): 축자영감을 주장하는 교역자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나 전도용 혹은 참고용이라 정의하여 신학적 논쟁을 피했음

⑤ 쉬운성경 (2001): 초등학생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듬

⑥ 우리말성경 (2005: 통일에 염두를 두고 북한에서 사용 중이 성경의 표현을 참고함


3) 예배용 찬송가


(1) 해방 전 교단별 찬송가

① 찬숑가 (1908): 장로교와 감리교 합동 간행

② 신뎡찬숑가 (1931): 감리교 사용

③ “신편” 찬송가 (1945): 장로교 사용

④ 부흥성가 (1930): 성결교

⑤ 복음찬미: 동아기독교회

⑥ 성회송가: 성공회

⑦ 구세군가: 구세군

⑧ 찬미가: 안식교


(2) 해방 이후 찬송가

① “합동” 찬송가 (1949):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가 찬송가합동연구위원회를 조직하고 공동으로 사용할 찬송가를 편찬함 

② 새찬송가 (1962): 장로교 고신과 합동 측

③ “개편” 찬송가 (1967): “합동” 찬송가를 새롭게 편집함, 한국 가사와 곡조를 증보 (27편의 한국인 저작 찬송가 포함)

④ “통일” 찬송가 (1983):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계, 하나님의성회, 복음교회, 구세군, 루터교 등 총 20개 교단이 참여

⑤ “통일” 찬송가 신작증보판 (1995): “통일” 찬송가에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찬송 130여 편 추가

⑥ “21세기” 찬송가 (2007): 곡 선정과 판권문제로 인해 분란이 있었음


2. 신학 교육


(1) 장로교

①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교)

② 교려신학교

③ 총회신학교

④ 총회신학교 사당동 캠퍼스 (합동)

⑤ 장로회신학교 광나루 (통합)

⑥ 서울장로회신학교 (통합)

⑦ 대구∙광주∙부산∙대전∙전주 지역에 지방 신학교 설치


(2) 감리교

① 감리교신학대학

② 감리교대전신학교 (1954) → 목원대학교 (1972)

③ 협성대학교


(3) 성결교 

① 서울신학대학교 (1965)

② 성결대학교: 예수성결교회


(4) 침례교

① 침례신학대학교 (1973)


(5) 오순절 계통

① 순복음신학원, 한세대학

② 루터대학

③ 그리스도신학대학, 서울기독대학: 그리스도교단

④ 성공회대학

⑤ 나사렛대학

⑥ 삼육대학: 안식교


(6) 초교파

① 아세아연합신학대학 (1974)

② 피어선성서학원 → 피어선성서신학교 (1981) → 평택대학교 (1996)

③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④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⑤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⑥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7) 종합대학 내

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② 이화여자대학교

③ 계명대학교

④ 배재대학교

⑤ 숭실대학교

⑥ 전주대학교

⑦ 한남대학교

⑧ 호서대학교


(8) 전국신학대학협의회 (1965. 5.)

① 신학 증진, 신학 교육 기관 사이의 협력, 신학 교육의 수준 향상을 목적으로 내세움


(9) 한국기독교학회 (1973)

①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한국신약학회, 한국구약학회, 한국조직신학회, 한국교회사학회, 한국실천신학회, 한국기독교윤리학회 설립


3. 기독교 언론 및 학술 연구 단체


(1) 신문

① 기독교공보(1946): 해방 이후 발간된 최초의 기독교 신문, 조선기독교남부대회 기관지, 6∙25전쟁으로 폐간됨

② 기독교공보 복간 (1951): 장로회 총회가 복간함 → 장로교(통합) 기관지 → ‘한국기독공보’로 이름을 바꿈

③ 기독교보 (1955): 고신

④ 기독신문 (1960): 합동

⑤ 크리스챤 (1960): 초교파

⑥ 연합기독신보 (1965): 초교파

⑦ 복음일보, 기독일보 (1960. 10.): 기독교 일간지

⑧ 국민일보 (1988):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창간


(2) 월간 잡지

① 새벗 (1952): 어린이 잡지, 대한기독교서회

② 새가정 (1954): 여성잡지, 대한기독교서회

③ 기독교사상 (1957): 대한기독교서회

④ 새빛 (1967. 9.):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잡지

⑤ 영단 (1946): ‘성서신애’(1973)라는 이름으로 간행됨, ‘성서연구’와 함께 ‘성서조선’의 계보를 이어감


(3) 기독교 교양지

① 신앙세계: 초교파

② 신앙계 (1967): 여의도순복음교회

③ 빛과소금 (1980): 온누리교회, 두란노서원

④ 기독교교육 (1961): 대한기독교교육협회에서 발간한 월간 잡지

⑤ 월간목회 (1976): 교역자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현대적 교육을 연구∙개발할 것을 목적으로 창간

⑥ 목회와 신학: 교역자를 위한 신학적 내용 다룸

⑦ 현대종교 (1982): 기독교적 신흥종교를 중심으로 각종 신종교를 다룸

⑧ 교회와 음악 (1963): 한국 최초의 교회음악 전문잡지


(4)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 또는 정간된 경우

① 제3일 (1970):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는 역할을 하다가 폐간 명령 받음 (1974)

② 야성 (1951) → 현존 (1969): 신군부에 의해 폐간 (1980)

③ 기독교사상: 북한선교를 주제로 삼았다는 이유로 6개월 정간 (1982)


(5) 방송

① CBS (1954. 12.): 한국 최초의 민영방송

② 극동방송 (1956): 두 번째 민간방송

③ 아세아방송 (1973): 선교방송으로는 세계 최대의 가청지역을 확보하고 있는 FEBC에 의해 설립됨 (후에 극동방송을 인수함)

④ CTS (1995)

⑤ CBS-TV(2002)


(6) 연구단체

① 크리스챤 아카데미 (1965):  인간화의 실현에 목표를 둠, 양극화 해소를 위한 대화 정신의 생활화, 민주화, 중간 집단의 육성 등에 힘씀

② 한국신학연구소 (1973): 한국적 신학의 창출, 신학 연구를 통한 한국교회의 진로 탐색, ‘신학사상’ 펴냄

③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9): 한국기독교산업문제연구원과 한국기독교학술원 통합,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정의롭고 민주적인 한국 사회의 건설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함

④ 한국기독교사연구회 (1982):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1990)로 발전


4. 기독교 문화


(1) 문학

① 한국기독교문학인클럽 창립: 한국기독교문학선집 간행 (1955)

② 극작: 주태익∙이보라

③ 아동문학: 강소천∙박화목∙임인수


(2) 소설

① 황순원의 ‘움직이는 성’ (1973): 1960~70년대 사회상을 개인주의와 기독교, 샤머니즘이 상호 충돌하고 긴장을 유발하는 상태로 파악, 당대 한국인의 심성이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하고 있음을 지적

②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1979): 어릴 때부터 신앙을 가졌던 주인공의 순탄치 않은 신앙이력을 통해 세속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의 조화 없이는 어떤 가치도 존속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줌, 현실보다 내세 구원에 집중해있던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비판

③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 (1981): 한 실존 인물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체험적인 차원에서 기독교를 다룸

④ 이청준의 ‘벌레이야기’ (1985): 기독교의 용서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다룸

⑤ 조성기의 ‘라하트 하헤렙’ (1985): 자신의 신앙적, 실존적 체험에 바탕을 두고 신앙의 본질과 다룬 본격적인 기독교 소설

⑥ 조성기의 ‘에덴의 불칼’

⑦ 조성기의 ‘야훼의 밤’: 집단적인 광신주의를 고발하고 순수한 기독교의 원형을 탐구 , 기독교문학상 수상

⑧ 이승우, ‘에리직톤의 초상’, ‘태초에 유혹이 있었다’: 타락과 구원,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문제 등을 성찰함

⑨ 김성일, ‘땅 끝에서 오다’, ‘제국과 천국’: 호교적 관점에서 기독교 사상을 소설화하는 데 힘씀

(3) 시

① 김현승 ‘절대고독’ (1968), ‘견고한 고독’ (1970): 신의 존재와 인간의 고독이라는 모순적 상황을 비장하게 형상화 함

② 박두진 ‘사도행전’ (1973), ‘포옹무한’(1981): 시를 포함한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그의 목표였음을 보여줌

③ 박목월 ‘크고 부드러운 손’(2000): 신과 인간 존재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하다가 타계하기 전 몇 년간은 거의 신앙시만 씀


(4) 음악

① 1950년대에 음악대학, 군악대, 음악 단체의 책임자와 활동가들이 대부분 교회 출신이었음

② 필그림성가단 (이동훈 지휘), 오라트리오성가단(박태준 지휘), 성종합창단 (곽상수 지휘)

③ 교회음악의 토착화 시도: 나운영과 박재훈 (1950년대), 문성모 (1980년대) 국악양식 창작

④ 박동진의 판소리 ‘예수전’: 극작가 주태익의 사설에 기존 판소리에서 가락을 뽑아 마든 것,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함, 복음 전파의 도구로 사용됨

⑤ 기독교적 노래들이 운동권 가요로 사용됨 → 한국 민중교회운동연합회, ‘민중복음성가’ 펴냄 (1990)


(5) 미술

① 김기창 ‘예수의 생애’: 예수의 일생을 다룬 연작화 형식, 30점으로 구성, 조선 인물화의 화풍, 예수를 갓 쓰고 한복 입은 선비의 모습으로 그림

② 장운상 ‘동심’

③ 김흥종 ‘성탄’ 

④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발족 (1965)

⑤ 1980년대에는 민중신학과 민중미술의 영향이 기독교 미술에 미쳐 전통적인 성화풍 그림 대신 민중의 현실을 목판화 등 다양한 민중미술 기법을 통해 표현하려는 노력이 있었음


(6) 건축

① 1940년 중기까지 서양식, 일본식, 한옥식, 혼합식으로 지어짐

② 1950년대 이후: 네오고딕양식 유행 (영락교회)

③ 1980년대: 현대식 건축

④ 건축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없는 가운데 지역 환경과 소통하지 못한 채 마구 건립됨

⑤ 환경 파괴를 극소화하며 주변과 조화롭게 소통하는 가운데 교회의 예배신학에 따라 적절한 내부공간을 구축하고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가구를 배치하려는 경향을 보임

⑥ 교역자가 목조건축술을 배워 한옥식으로 축조하는 사례가 있었음


5. 연합운동


1) 천주교와 개신교의 연합활동


(1)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

① 개신교 지도급 목사와 장로 상당수가 천주교로 개종 (한인수, 정춘수, 이형근)

② 군종제도: 군종제도가 창설되는 과정에서는 협력하였으나 창설된 이후에는 대결함


(2) 천주교와 개신교의 관계 개선

①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 발표’ (1964): 제2차 바티칸공의회 중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함 → 일치위원회 발족 (1966), 개신교를 열교가 아닌 형제의 종교로 받아들임

② 개신교, “기독교와 다른 종교간의 대화” 모임 개최: 각 종교의 지도자와 천주교 신부 및 평신도 초청

③ 교회일치 기도주간 제정 (1968): 천주교와 개신교가 번갈아 가며 일치기도운동 전개

④ 성서 번역 작업: 공동번역 성서 완성 (1977)


(3) 신학

① “현대 성서학의 동향” 심포지엄 (1971. 5.):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학자들이 참여하여 토론을 벌임

② ‘하나인 믿음’ 번역∙출간 (1979): 독일의 천주교 신학자와 개신교 신학자가 만든 공동 교리서

③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학적 접근” 심포지엄 (1984): 발표문과 토론문이 ‘신학사상’에 실림

④ 겨레문화연구회 창설 (1985): 개신교와 천주교의 신학자, 국어학자, 역사학자들이 모여 기독교 문화의 토착화와 에큐메니칼 운동을 추구함

⑤ 민주화 운동 연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 유신 압제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도회와 시위 주도


2) 개신교 교회일치운동


(1) 한국기독교총연합회

①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사업에 교회협의회에 가입하지 않았던 교단들이 함께 사업에 참여함 →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탄생 (1989)

② 장로교∙성결교∙오순절∙침례교 계열의 36개 교단과 6개 기관 (한국기독실업인회,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 한국장로회총연합회, 한국기독교교회청년협의회, 한국기독교여성협의회, 전국기독교직장선교협의회) 참여

③ 한국교회가 지나치리만큼 정치에 참여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패한 정권과 야합하는 등 교회 본연의 궤도에서 좌우로 이탈했던 것을 자성해야 한다는 창립 취지문을 채택함

④ 보수 교단 및 기관들 사이의 교류 및 협력 사업을 토대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

⑤ 주요 활동: 이단 및 사이비 종교의 척결, 단군상 철거 운동, 한미동맹 강화, 북한정권 민주화


(2) 한국기독교연합준비위원회 (2000. 7.)

① 교회협의회와 한기총의 통합 움직임

② 한국교회 일치를 위한 교단장협의회 구성

③ 교회협의회와 한기총의 통합 시도

④ 부활절연합예배 공동개최 (2006)


제15장 변화하는 북한교회


1. 사회주의 속의 생존 모색


① 6∙25 전쟁 중 종교시설이 철저히 파괴됨

② 미국에 대한 적개심 고취: 전쟁 중 미군의 학살 만행을 고발하고 선교사를 그 앞잡이로 연결시킴

③ 종교허무주의 확산: 신자들은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내놓고 다니지 못함

④ 조선기독교도련맹(조기련) 조직 → 기독교인을 사회주의 건설에 끌어들임

⑤ 기독교인들은 개인적 혹은 비공식적인 작은 신앙공동체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함

⑥ 가정교회: 평안북도 선천과 정주, 황해도 신천 등 전쟁 이전에 기독교가 융성했던 지역에 200여 개의 가정교회가 허락됨 (1968)

⑦ 기도교인 가운데 월남가족, 반공단체 가담자, 지주∙친일파 등과 관련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적대적인 계급으로 분류됨 → 북한 당국 뿐 아니라 이웃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했음

⑧ 주체사상 등장: 종교 유물의 문화예쑬적 가치는 인정했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함



2. 사회주의적 교회의 생성


1) 1970년대의 상황


(1) 주체사상 유일사상화 작업

① 주체사상의 유일한 해석자인 김일성에게 절대권위 부여

② 지도와 인민의 결합 강조  → 수령의 절대적인 유일 지배체제 구축 → 초인간적인 존재에 의존하는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

③ 수령∙당∙인민이 “사회정치적생명체”를 이루어 개개인의 육체적 생명을 초월하여 영생한다고 주장 → 종교의 필요성을 없애고자 함

④ 사회주의 헌법: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반종교선전의 자유를 가진다


(2) 북한 교회의 대외적 활동

① 국제적 기독교 단체를 서구 세계와 교류하기 위한 좋은 수단으로 판단함 → 세계교회협의회, 기독교평화회의, 아시아기독교평화회의 가입

② 조기련, 정치적 성격의 성명서 발표


(3) 신학교 재건

① 평양신학원 개원 (1972)

② 3년제 신학교

③ 한 학기당 입학생 수가 10여 명


2) 대외교류의 확대가 가져온 변화


(1) 해외 기독교인 북한 초청

①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간 대화 (1981): 민족의 화해와 단결, 조국 통일을 위한 첫 역사적 회합, 대남사업 관련 책임자를 참가시킴 → 조국통일을 위한 민족연합


(2) 북한의 기독교 통계

① 기독교인 1만 명, 천주교인 800명, 평양지역 가정교회 30~40개, 목사 30명, 전도사와 직분자 200명

② 조기련에 가입하면 정부로부터 공인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음 ↔︎ 오랫동안 개별적으로 신앙생활하는 데 익숙해 조기련에 가입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함


(3) 성경과 찬송가

① 성경: 공동번역 등 남한의 성경을 참고하여 조선문화어 표기법에 따라 개역

② 찬송가: “신편” 찬송가를 악보 없이 가사만 북한식 표기법을 바꾸어 편집


3. 사회주의적 교회의 정착


1) 교회 건립과 기독교에 대한 재평가


(1) 교회 건립

① 조기련, 정치적 필요와 외부의 요구로 교회건립 (1980년대)

② 한국과 서구의 기독교인들이 교회건립의 필요성을 강조함

③ 봉수교회, 칠골교회, 정백사원(러시아 정교회)

④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의 결정과 감독 아래 실행됨

⑤ 교회는 남한 및 서구와 교류하며 외부로부터 많은 돈과 구호물자를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함


(2) 문익환과 임수경∙문규현의 북한 방문

①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고 문익환 (기독교 장로회 목사), 임수경 (천주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문규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신부) 북한 방문 (1989)

② 남한의 기독교인 가운데 고난을 무릅쓰고 통일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


(3) 종교에 대한 재평가

① 학문적 탐구 증가

② 김일성 종합대학에 종교학과 설립 (1988)


2) 주체사상, 사회주의적 기독교, 변화하는 상황


(1) 주체사상과 기독교

① 김일성: “사람들이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는” 기독교 정신과 자신의 주체사상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함

② 김정일: 종교가 “서로 사랑하면서 평화롭게 살라”고 가르치는 것은 “좋은 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음


(2) 주체사상연구소 (박승덕 소장)

①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에서 개최된 주체사상 관련 학술대회 및 북미 기독학자 연례회 등에 참가해 주체사상과 기독교의 공존 가능성을 말함

② 주체사상은 “기독교의 본질을 새롭게 해명”하는 사상으로서, 인간구원과 인간해방에 기여하는 인생관이라는 차원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찾는다고 말함

③ 콘스탄틴 황제 이후 국교화된 기독교가 착취계급의 이익에 복무하고 피착취계급의 자주성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했음

④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 기독교는 “기독교 본연의 자세와 사명에 맞게 점차 민중의 편으로 돌아서고 있다”고 봄

⑤ 현세천국, 현실참여, 사회구원 등에 대한 현대 신학의 관심을 높게 평가함

⑥ 사회적 집단의 생명은 무한하다는 주체사상의 집단주의적 영생관이 기독교의 영생을 포괄하는 “영생의 념원이 실현되는 참된 길”이라고 주장함


(3) 예배의 변화

① 김일성 배지를 착용하지 않기 시작함

② 성가대 가운을 입고 성가곡집을 사용함


제16장 새로운 신학의 모색


1. 한국적 신학의 등장


1) 토착화 신학


① 류영모: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을 포괄한 독창적 사유의 세계 창출

② 유동식: 복음을 이해하기 위해 도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함

③ 전경연: 복음이 토착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문화가 토착화된다고 하면서, 기독교가 동양에 전해지더라도 서구교회의 전통과 신앙고백을 이식하는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함

④ 이장식: 복음은 문화 가운데 그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순수한 복음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함

⑤ 윤성범: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환웅∙환검(단군)이 하나님이며 이러한 삼신사상은 동방교회 삼위일체론의 영향이라고 주장함

⑥ 박봉랑: 민족 문화나 전통, 신화는 기독교의 계시와 단절되어 있으며 성서만이 “기독교 계시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

⑦ 변선환: 종교 간 대화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보수적인 교단 지도부에 의해 희생됨


2) 민중신학


(1) 신학자들의 활동

① 1970년대,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민중신학을 태동시킴

② 서남동: “부자와 가난한 자, 누르는 자와 눌린 자 사이의 화해는 있을 수 없음”을 강조 → “성령론적 통시적 해석학”이라는 독자적인 방법론을 제시함 (성서는 절대적 표준이 아니라 하나의 전거)

③ 안병무: 민중을 에수 사건의 중심부에 둠

④ 현영학: 탈춤에서 “종교적 비판적 초월성”을 찾음

⑤ 김용복: 민중의 고난과 자기해방의 이야기를 민중 사회전기 개념을 통해 해석

⑥ 서광선: 무속신앙에서 민중신앙의 형태를 드러내는 작업을 함


(2) 민중신학 정립

① 국제신학심포지엄 준비과정 (1979):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주최하고 아시아기독교협의회 협찬, 민중신학이라는 용어로 합의함 → ‘민중과 한국신학’(1982) 발표

② 한국이 낳은 고유 신학


(3) 이후

① 1990년대 들어 민중신학의 열기가 퇴조함

② 한국민중신학회와 민중신학연구소 등이 중심이 되어 맥을 잇고 있음


2. 새로운 신학의 수용


1) 해방신학


(1) 해방신학

① 오랜 식민 통치와 군사 독재로 국민의 절대 다수가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던 1960~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교회에서 등장한 신학 사조의 하나

② 1968년 컬럼비아의 메델린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를 기점으로 등장함

③ 구조화된 대량 실업과 문맹, 막대한 외채,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종속적 대외관계와 부패한 국가 권력에서 찾음

④ 교회와 신학이 지배 체제의 유지에 기여하는 것과, 신학자들이 부조리한 현실을 외면하고 사변적인 관념에 빠진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함

⑤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하는 귀납적 신학 방법론 제창

⑥ 구원론, 교회의 본질과 기능, 하나님과 그리스도 이해, 은총과 죄악 등 여러 주제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함

⑦ 현실 사회의 억압과 종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해방신학의 핵심 과제


(2) 국내로의 유입

① 진보적 성향의 사제와 신학자에 의해 1970년대 초반부터 국내에 소개됨

② 함세웅 ‘해방신학의 올바른 이해’, 문동환의 글,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 번역∙출간


(3) 해방신학에 대한 비판

① 민주화운동과 반미운동이 확산되자 신군부는 관변 학자를 동원하여 막으려 해씀

② 통일교의 통일사상연구원, 국민윤리학회, 내외정책연구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 소속된 보수우익 성향의 학자들이 해방신학을 비판하고 국민을 대상으로 무료 강좌를 염

③ 보수언론매체도 위험성을 알림

④ 해방신학을 신학이 아닌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로 간주함

⑤ 기독교 신학이 특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함

⑥ 해방신학은 성경이 아닌 역사적 상황 분석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정당한 신학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함


(4) 해방신학에 대한 관심

① 가톨릭의 진보 진영, 교회의 정치 참여를 설명하고 지지해 줄 신학적 기반을 찾고 있었음

② 개신교, 해방신학을 둘러싼 논쟁이 전개됨

③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해방신학에 대한 신학적, 사회적 관심이 급격히 퇴조함


2) 여성신학


(1) 여성신학

① 1960년대 여권운동의 열풍과 더불어 등장 → 1975년 세계 여성의 해를 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됨

②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과거의 관행과 교리들에 대한 비판 작업을 활발하게 전개함

③ 기독교의 남성중심적 신 관념을 폭로함


(2) 국내로의 유입

① 국내에는 1970년대 후반 소개됨

② 교회 안의 성차별 시정운동은 1920년대부터 전개되어 옴

③ 교회여성연합회 (1968): 여성신학 관련 강좌를 개설하여 교회 여성의 의식화 작업을 시도함

④ 여성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단체 등장: 한국여신학자협의회 (1980), 한국여성신학회 (1984), 기독교여성⑤ 평화연구원 (1989), 아시아여성신학교육원 (1989), 여성교회 (1989)


(3) 한국여신학자협의회

① 목표: 가부장적 교회 문화의 청산

② 의제: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는 여교역자의 처우 개선,여성 안수 허용, 성차별 구조 및 관행의 타파, 남성 중심적 신학과 성서 해석에 대한 비판

③ 활동: 여교역자실태조사사업, 여성신학의 확산을 위한 통신교육 및 강연회, ‘한국여성신학’과 같은 학술지 발간

④ 교회 안의 문제 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적극 참여함


(4) 한국여성신학회

① 여성신학의 이론적 토대를 확립하는데 비중을 둠

② 이화여자대학교와 성공회대학교에 각각 부설된 여성신학연구소를 통해 심화됨


(5) 기독여민회

①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의 접목 시도

② ‘민중여성의 눈으로 읽는 성서’


(6) 1990년대 이후

① 거시적인 사회변혁 프로그램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여성문제에 강조점을 두는 여성운동이 부상함

② 여성교회 (1989): 남성중심적 예배 형식이나 성직자 중심의 위계구조와 달리 평등하게 어우러질 수 있는 실험적인 교회 공동체 모델 제시

③ 여성 안수문제: 장로교 (통합) 여성안수 허용

④ 21세기, 성과 여성의 몸, 교회 여성의 정체성 등과 같은 주제로 관심 영역이 이동함

⑤ 기독교성폭력상담소: 교회안의 성폭력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발함


3. 보수 신학의 전개


1) 새로운 신학의 도입


(1) 한국 보수교회 신학의 배경: 미국의 매킨타이어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적 근본주의 운동


(2) 신복음주의

① 미국의 보수적 교회, 1940년대부터 현대사회의 변화에 적응하려는 노력을 함

② 근본주의의 폐쇄성과 분리주의를 극복하고 지성적으로 기독교 전통주의를 변호하며 사회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 표현됨

③ 비판: 신학과 과학을 조화시키려 하며 사회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점 등을 들어 신복음주의가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하나라고 비판함


(3) 한계

① 주류 학문세계와 소통하지 못하여 지적 게토에 빠짐

② 민주화를 성취해가는 역사의 현장으로부터 소외되어 감


(4) 신칼뱅주의

① 카이퍼: 우주의 어느 곳도 하나님의 주재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결국 온 우주가 하나님 나라라고 봄 → 온 우주가 하나님 나라 → 기독교인은 이 세상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되게 할 의무를 지닌 셈

② 바빙크: 일반은총론을 강조

③ 하나님 나라의 시공간적 성격: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 가는 피안의 세계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무엇


(5) 기독교 세계관 운동

① 미국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저술을 통해 한국에 소개됨

②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P)를 중심으로 기독교 세계관 관련 각종 번역서가 출간됨

③ 기독교학문연구회(1984), 학생신앙운동(SFC), 한국기독학생회(IVF) 등 대학 선교단체를 통해 집중적으로 연구되고 전파됨

④ 영향: 유물론 등 각종 비성경적 세계관을 비판 → 기독교적 대안 제시, 기독교인의 신앙과 삶에서 이 세상의 중요성을 부각시킴


(6)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영향

① 기독교 문화운동: 세속적 대중문화를 비판하면서 기독교적 대안문화 창출

② 기독교 학문운동: 기독교적 학문과 인재를 통해 세상을 변혁

③ 기독교 대학 설립운동



2) 새로운 신학과 사회 참여


(1) 로잔언약

① 배경: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 → 모든 영역에 성경적인 가치관이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깨달음

② 주요 내용: 복음전파와 사회참여를 모두 “그리스도인의 의무”로 규정함

③ 대회에 참석한 한국 대표들도 서명함


(2) 서울선언

① 아시아선교협의회 창립 (1975)

② 서울선언 내용: 사회 구조까지 변혁시킬 수 있는 복음의 구속적 능력을 선포하는 것이 선교의 과업


(3) 영향

① 복음전파와 사회참여 사이에서 고민하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줌


제17장 넓어지는 선교의 지평


1. 노동자와 빈민을 위한 선교


1) 도시산업선교


(1) 도시산업선교의 시작

① 대한예수교장로회 (1957): 서울 영등포 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함

② 기독교대한감리회 (1961): 인천

③ 대한성공회 (1961): 강원도 황지 탄광지대

④ 한국기독교장로회 (1963)

⑤ 구세군대한본영(1965)

⑥ 기독교대한복음교회 (1973)

⑦ 모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 교단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


(2) 산업선교의 방식

① 예배, 성경공부, 봉사활동 같은 전통적인 방식을 이용함

② 1960년대 후반: 노동자 교육, 노동조합 지도자 훈련, 노동조합 조직 지원 같은 노동운동에 개입

③ 도시산업선교로 명칭을 바꿈 (1968)

④ 1970년대: 정부나 사회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했던 노동자들을 교회가 산업선교를 통해 돌봄

⑤ 1980년대 이후: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노동운동을 이끌어감 → 산업선교의 영향력 감소


(3) 산업선교 활동에 대한 탄압

① 기독교도시산업선교위원회 총무 조승혁,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고문당하며 조사 받음 (1972. 7.)

② “노동자 인권유린에 대한 성명서” 발표 (1974. 1.): 정부, 노동조합 및 노사 문제는 조합 및 사용자 사이의 문제이므로 종교 단체가 직접 관여하지 말 것을 요청함


(4) 산업선교의 신학적 근거

① “산업선교 신학선언” 발표: 도시산업선교가 산업화 사회에서 짓밟힌 인권을 회복시키며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의 계약(마 20:13)을 이행하도록 하는 일

② 고역을 무겁게(출5:9)하고 그들을 괴롭히고 학대(출 3:9)하는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정신을 따라 시정하려는 선교활동임을 천명함


2) 도시빈민선교와 농민선교


(1) 도시빈민선교

① 지역사회개발사업: 성공회, 전쟁피난민이 모여 있던 부산 반송동 “산동네”에 마을회관 건립 → 맥클라렌이 한국을 떠나면서 진전되지 않음

② 연세대학교 도시문제연구소 설립 (1968. 9.): 도시빈민선교 실무자 훈련, 주민 스스로 자신들의 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선교방법론 제시

③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조직 (1971. 9.): 답십리에 센터 설치

④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 해체 (1979)


(2) 농촌선교

① 가톨릭농민회 조직 (1966) → 전국 단위 활동 (1972)

② 크리스챤 아카데미 (1974): 농민 운동가의 이론적 기반 마련

③ 한국기독교농민총연합회 창설 (1982. 3.) → 한국기독교농민회 (1989)

④ YMCA의 활동: 신용협동조합, 양곡사업, 시범부락 개발


2. 인권 및 민주화 운동


1) 1960년대


(1) 4월 민주항쟁

① 서울 새문안교회 청년, 교계의 정화 촉구

② 감리교총리원 이사회: 부정선거에 가담한 교역자 조사

③ 한국기독교연합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4∙19에 대한 성명 발표, 정부개혁, 국민의 기본권 보장, 부패척결, 법치주의 확립


(2) 5∙16 쿠데타

① 한국기독교연합회: “군사혁명”이라 부르며 “공산침략에서 구출”하고 부정부패로부터 “재건하기 위한 부득이한 처사”라는 지지 성명 발표

② 기독공보: “우리는 권위 있는 정부 밑에 있게 되어 행복하다”고 아부함 (1961. 5. 29.)

③ 한경직∙김활란 등 교회 지도자: “혁명정부의 국제적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도미함


(3) 한일 국교 정상화

① 강신명, 강원룡, 김재준, 한경직 등 215명의 교회 지도자: 국국기도회를 열고 반대하는 성명서 발표


(4) 삼선개헌 (1969)

① 김재준∙함석헌∙박형규 등 에큐메니칼 진영 교회 지도자: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참여

②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개헌반대 입장 밝힘

③ 김윤찬∙김준곤∙김장환 등 보수 기독교계 인사: 김재준의 개헌반대 활동을 성직의 권위를 도용하는 일이라 비판함

④ 대한기독교연합회: 성명을 통해 박정희의 “용단”을 환영하며 삼선개헌을 지지함


(5) 학생 운동

① 한국기독학생총연맹 (KSCF), 학생사회개발단(학사단): 학생신분을 감추고 공장과 건설 현장, 채석장 등지로 찾아가 당시 노동 현장을 체험함


2) 1970년대


(1) 남산 부활절예배 사건 (1973)

① 개요: 서울 남산의 야외 음악당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릴 때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전단지가 배포된 사건

② 결과: 박형규와 한국기독학생총연맹 회원, 빈민선교 활동가들이 국가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됨


(2) 인권선언 채택 (1973. 11.)

① 배경: 남한 부활절연합예배 사건 및 그후의 시위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인권탄압 사례 발생

② 내용: 인권탄압의 해결에 기독교인이 나설 것을 촉구

③ 영향: 기독교가 비기독교인의 민주화운동과 만나 연합하는 계기가 됨


(3) 긴급조치 선포

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시국기도회를 갖고 긴급조치 철회와 유신체제 폐지 등을 요구함


(4) 기독교계의 인권운동

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창설 (1974. 5.)

② 목요기도회 시작: 긴급조치 위반 혐의 기소자들을 위한 기도회 (1974. 7.)

③ 시국선언문 발표: 한국기독교장로회 (1974. 9.), 장로교(통합), 기독교대한김리회, 진보적 신학자 66명 (“한국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 1974. 11. )


(5) 민주구국선언 발표 (1976. 3. 1.)

① 천주교와 개신교 지도자들이 정치 지도자와 함께 발표함

② 긴급조치 철폐, 유신헌법 철폐, 박정희 정권 퇴진 등을 요구함

③ 정부, 정부 저복을 선동한 사건으로 규정해 주동자를 입건함


(6) 조찬기도회

① 수백 명의 교역자와 기독교 정치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박정희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모임

② 박정희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반공사상을 요청함

③ 대통령 조찬기도회 (1968) → 국가조찬기도회 (1976) 개칭


3) 1980년대


(1) 광주 민주항쟁

① 김의기: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에서 투신함

② 김종태: 기독교인 노동자, 신촌 네거리에서 분신

③ 임기윤: 감리교 목사,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하여 계엄합동수사단에 연행되어 의문의 죽음을 당함


(2) 민중교회

① 기독교 사회변혁운동의 한 축을 이룸 (1984)


(3) YMCA

① 시민사회운동 영역 개척


(4)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협)

① 교역자들에게 기독교 사회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됨

② 기독교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역할을 수행함


(5) 한국복음주의협의회

①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 (1986. 3.)


3. 통일운동


(1) 1950년대

① 반공노선


(2) 1960년대

① 남한 사회에서 자유와 사회정의를 구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하자는 주장이 등장함


(3) 1970년대

① 통일 논의는 교회 전체보다 진보적 기독교인 개인 차원에서 전개됨

② 민주수호국민협회: 성명서에서 통일을 위해서는 민중의 참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밝힘


(4) 1980년대

① 민중이 분단극복과 통일운동의 주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

② 통일을 교회의 선교과제로 인식함

③ 기독교장로회: 통일이 교회의 선교적 과제임을 천명함

④ 장로교(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 선포 (1986)

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설치 (1982) →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 발표


4. 민주화 이후의 시민운동


(1) 환경

①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설립 (1981) →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출범 (1996): 공해 반대, 생테계 보전, 환경친화적 삶, 경건과 절제


(2) 기독교윤리실천운동 (1987)

① 개인의 삶, 교회, 사회, 국가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 윤리를 실천함으로써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나아가 사회문화 저난을 기독교적 이상에 접근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음

② 검소절제운동, 교회갱신운동, 음란문화추방운동 등을 펼침


(3)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① 새문안교회 출신이 창설 주역을 담당함

② 토지와 주택문제 해결에 활동을 집중 → 경제정의문제, 정치개혁, 제도개혁, 환경문제, 통일문제 등으로 범위를 넓혀감


(4) 노동 문제

① 한국교회외국인노동자선교위원회 설립 (1992)

② 한국교회외국인노동자선교협의회 (1993. 9.)


(5) 북한 관련

① 남북교류에 대한 법적 보장

②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1990)

③ 사랑의 의약품 보내기 운동 (1991)

④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나눔운동 (1993. 4.)

⑤ 한민족복지재단,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유진벨재단

⑥ 한국기독교북한동포후원연합회 (1997):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통해 일치를 모색하고 대북 지원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15개 교단과 기독교 단체가 참여함


21세기를 향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