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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 담금질 / 안희정 (2018.1.19.)



국감은 정부의 부정부패나 정책과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시쳇말로 정부를 조지기 위해서 무조건 까뒤집는 국감 질의문을 만들어야 하는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지난 신문을 뒤지며 뻔한 주제의 질문서를 의원이 쭉 읽고, 기자들이 이것을 또 쭉 받아쓰고, 그것이 다음날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해피닝이 벌어지곤 했다. 똥을 먹고 자란 돼지를 먹고 똥을 싸면, 그 똥을 다시 돼지가 먹는 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상투적인 비판을 국정감사라고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창피해서 차마 국감장 근처에 가지도 못했다. 국가나 국민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조차 민망한 ‘그들만의 정치리그’였다. (65)

당시에는 다당제라는 국회 시스템에 대해서도 허무감을 느꼈다. 자신의 적이 여당이냐, 야당이냐 하는 차이 때문에 의원들이 서로 비판하는 것이지, 만약 같은 당이었다면 이야기할 거리조차 안 되는 일을 갖고 연일 싸웠다. (65)

무릇 정치인이란 시대적 갈등, 사회적 갈등에 대한 해소책, 미래의 한국사회에 대한 비전, 그리고 이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견해와 원칙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치란 명망가나 재력가들의 직업 스케줄에서 마지막 스테이지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 정치란 부의 외연을 확대하거나 명예를 확보하고 지키는 수단에 불과해 보였다. (66)

몸도 지쳤지만 현실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환멸감 역시 점점 커져갔다. 동구권이 무너지고 사회적 좌표도 흔들리던 상황이었다. 그러면서 1년여 동안 겪은 여의도 정치판은 토지의 지력을 높여 소출을 얻기보다는 적당한 이미지 연출을 통해 ‘표’라는 열매만을 따먹는 몰염치한 농사일처럼 느껴졌다. (70)

어떤 정치인은 국정감사 때 휴게실에서 바둑이나 두다가도 방송카메라가 오면 국감장에 나와서 열심히 일하는 척해서 좋은 이미지로만 국민에게 비쳐졌고, 화려한 언변으로 여기저기서 멋있게 폼을 잡던 사람이 뛰로는 저급한 정치행태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 행태를 바로 옆에서 보면서 역겨워서 신물이 날 정도였다. 이래 가지고 정치가 역사의 변화발전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회의를 떨칠 수 없었다. (70)

가끔 친구들의 결혼식장에서 ,아이의 돌잔치에서 삼삼오오 만나 우리의 젊은 날을 추억하곤 했지만, 그것은 점점 퇴역군인의 빛바랜 군복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절망의 끝에 선 나에겐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실망감은 내 존재를 흔들 만큼 컸다. 나름의 자구적 논리로 나를 지탱했다. 정치고 인간이고 역사의 진보고 그냥 다 잊고 돈이나 벌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학선배가 시작한 출판사에 취직했다. (71-72)

공자는 죽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 일화를 전하면서 “나도 안 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길이었기에 나는 걸었다”고 말했다 한다. 공자 스스로도 인의 세상이 당대에 오지 않을 것임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길이었기에 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와 같은 공자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내 스스로의 마음속에 바꾸어 새겨놓았다. 
“우리 시대가 가졌던 가치가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 새로운 대안이 없어도 좋다. 사회주의가 무너져도 좋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던 도, 사람이 걸어야 할 바른 길, 사회와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이 가진 가치의 지형, 이것이 있다면 설사 불가능한 길이라도 그냥 가야 하는 것이다. 그 목표를 이루는 데 몇 개년 계획이 서 있느냐 아니냐, 구체적인 전망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와는 별개로 말이다. 역사를 짧은 한평생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하거나 승부지으려 하는 것은 치기일 뿐이다. 조급한 마음으로 단기간에 성과를 얻으려 급급하는 것은 객기일 뿐이다. 그저 스스로의 깨끗한 마음을 세워서, 인간을 믿고, 역사를 믿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갈 뿐” (81-82)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사람과 권력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한 제도가 바로 민주주의이다”는 것이 노무현식 민주주의의 개념 정리였다. (90)

국회라는 무대에서 주연은 국회의원이지만, 그 주연의 정치, 입법 등 의정활동을 기획하고 연출하고 실행하는 사람은 스태프들이다. 영화에 주연 배우만 등장한다고 그가 모든 기획과 연출과 제작을 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 개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이 무대 위 주연배우이지만, 전체적인 기획과 연출은 스태프들이 주도적으로 하도록 만드는 조직 리더십에 철저했던 사람이었다. (93)

생존의 논리만이 횡행하는 어지러운 상황에서는 무엇이 대의이고 원칙인지 파악하기 힘들다. 가치 혼돈의 난세일수록 무엇이 대의인지 판단하고, 그에 맞도록 단순명쾌하게 자기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노무현식 정치노선의 진면목일 것이다. (108)
 
역사적 정체성만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할 상황이 왔을 때 꾀를 내주지 못할 것 같아 답답하다. 그렇다고 아무리 꾀를 잘 낸다고 해서 단독플레이를 하거나, 주변 평이 안 좋거나, 역사적 정체성이 부족한 사람만 득실대는 것도 곤란하다.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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