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fb에서 박총 편집장이 올린 추천글을 보고 읽게 된 책이다.
아..
아닌가;
ㅋㅋㅋㅋㅋ..........
책의 기원이 늘 헷갈린다..
IVP 청년도록에서도 본 것 같고,
또 다른 책에서도 추천해준 것 같다...
원서는 99년에 번역은 2002년에.
크리스틴 폴 Christine D. Pohl
저자는 기독교 공동체에서 직접 사역한 경험을 토대로 '손대접' Hospitality (환대, 대접, 접대)에 대해 쓴 책.
어떤 잘... 정리되었다기 보다, 중간 중간에 맞는 말들이 너무 많아서 ㅎㅎ..
책 여기 저기 온통 찍찍 줄 그으며 읽었다.
머리말
사회의 주변인들과 함께 겪은 경험으로 해서 이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바라기는 그들의 은사와 필요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우리 곁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좀더 민감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족과 동료들, 동역자와 학교 친구들, 이웃과 교인들을 손대접하면서 나는 스스로 풍성해지는 것을 느낀다. 인간관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영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손대접은 또한 모든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p9-10)
나는 나그네에게 손대접하는 데는 유머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웃어넘기고, 선한 노력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때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구해 주시리라 믿으며, 이용당했음을 깨달을 때도 낙심치 않고 전진하는 능력이다(p10)
1부 신앙의 유산 기억하기
1장 옛 전통 새로 보기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곧 스스로가 나그네와 이방인이 되는 것으로, 그들 가운데 있는 연약한 나그네를 돌볼 책임도 갖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예수님은 친절을 되갚을 수 있는 가족과 친구들 외의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대접할 것과 되갚을 것이 거의 없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관대하게 영접할 것을 인간 주인들에게 강력히 권하셨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영접하셨던 것처럼 서로 영접하라고 권면했다. 그는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손대접을 "추구"할 것을 촉구했다.
초대 그리스도인 저자들은 서로 출신성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집을 개방하고 식사를 나누며 함께 예배를 드림으로써, 사회적, 윤리적 차이를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이 진리임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4세기 교회 지도자들은 성직자들에게 식탁에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맞아들이라고 경고했다.
종교개혁 시대에 마틴 루터는 핍박받는 신자들이 손대접받을 때 "하나님 자신이 우리 집에 계시면서, 드시고 누우시며 쉬신다"고 말했다.
(p19-20)
손대접은 아주 기본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언제나 가족과 친지들끼리는 서로 손대접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아 왔다. 기독교가 독특하게 공헌한 것은, 신세를 갚을 수 없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손대접할 것을 강조했다는 점이다(p21)
내가 방문했던 거의 모든 공동체들은 처음에는 개인, 가족, 혹은 몇몇 친구들이 주위의 궁핍한 나그네들에게 자신들의 집과 삶을 개방하면서 소박하고 미미한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점점 더 손대접을 많이 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손대접을 행하면서 손대접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종종 그들은 성경본문을 찾아보며서 도이와 방향을 부여받기도 했다. 어떤 공동체들은 수도원의 손대접 전통에서 통찰을 얻기도 했다. 손대접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문 앞 부랑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던 할머니나 아니면 외로운 아니들, 순회 설교자들을 위해 언제나 충분한 음식과 방을 마련해 두던 가족들이 자신들의 본이 되었다고 말했다(p26)
손대접을 할 때는 거의 언제나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지속적으로 손대접을 하려면 물질에 대한 욕구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방식을 영위해야 한다. 손대접을 가장 잘할 수 있는 환경은 개이넉 공간과 공적 공간이 겹쳐지는 곳이다. ... 손대접 종사자들은, 손대접은 신성한 관행으로서 하나님께서 손님/주인의 관계에 특별하게 임재하신다고 본다. 손대접을 하면 서로 축복을 주고받게 된다. 손대접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다고 고백한다. 열렬히 기도하며 혼자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사람들만이 손대접에 요구되는 것들을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p27)
엄밀한 의미에서 나그네들은, 세상에서 안전하게 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본적인 관계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다. 가장 취약한 나그네들은 가정, 공동체, 교회, 직장, 국가에서 분리된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은 노숙자와 난민들 상태에서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정도는 덜해도 분리와 배제를 경험한다.(p28)
나그네를 대접할 때 우리는 어떻게든 그들을 우리와 연관돼 있는 장소 - 우리에게 의미와 가치가 있는 공간-로 영접한다. 그것은 우리의 집인 경우도 많지만, 교회, 단체, 민족 그리고 갖가지 다른 제도들인 경우도 있다. 손대접할 때 나그네는 안전하고 인격적이며 쾌적한 장소, 존중과 용납과 우정을 나누는 장소로 영접받는다. 잠시나마 나그네는, 생명을 부여하고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관계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한 환대는 상대방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 주고, 서로의 삶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열고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투명하게 드러내며, 시간과 자원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한다(p28)
2장 고대 자료와 성경 자료들
기독교 손대접만의 특징은, 영접하는 사람에게 유리하거나 이득이 있을까 하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고 "지극히 작은 자"를 관대하게 영접한다는 것이다.(p32)
고대사회는 대부분 손대접을 기본적인 도덕적 관행으로 여겼다. 그것은 인간의 복지를 위해 필요했으며 취약한 나그네를 보호하는 데 꼭 필요했다(p33)
그리스도인들은 뭔가를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을 대접함으로써 손대접을 통해 유익을 얻는 대신, 겉으로 보기에 만나도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듯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영접했다(p35)
이스라엘 사회만의 독특한 점은 거류 외국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것에 대한 명백한 법조항이 있었다는 것이다.
구약시대 손대접의 신학적, 도덕적 기초들은 이스라엘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 이스라엘이 나그네를 돌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은, 나그네로서 그들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묵상함으로 더욱 견고해져 갔다(p46-47)
예수님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손대접, 은혜, 희생을 가장 심오하고 인격적인 방식으로 연관시키셨다(p47)
손대접은 하나님의 손대접을 반영하고 재연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으로 중요하며, 인간의 필요를 채우고 인간관계를 진척시킨다는 점에서 실제적으로 중요하다.(p47)
서신서들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손대접이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이었음을 강력하게 증거해 준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손대접할 것과 손대접에 힘쓸 것을 명한다(롬12:13). 히브리서 저자는 공동체에게 아낌없이 대접하라고 도전한다(벧전4:9). 각 본문에서 손대접은 사랑, 곧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 나그네와 갇힌 자와 추방당한 자들에게까지 확장되는 사랑, 육체적·사회적 필요를 돌보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손대접을 행할 때 필요가 채워진다. 그러나 손대접이 육체적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그친다면 불완전한 것이다. 손대접에는 나그네나 손님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포함된다(p49).
초대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몇몇 측면이 합쳐져서 손대접은 기독교의 중심되는 실천사항이 되었다. 첫째, 함께 식사를 나눔으로써 초대교회는 문화적 경계선 문제로 씨름하게 되었다. 특히 이방인들을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놓고 씨름했고,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부자 신자와 가난한 신자들 사이의 긴장이 표면화되기도 했다. 식사는 서로 대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하라고 가르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기독교 공동체의 손대접은 분명한 메시지 - 평등, 변화된 관계, 공동생활 등-를 전달해 주었다(p50)
- 함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먹는 것 같은 수준의 삶을 공유하는 것..
복음은 원래 여기저기 다니던 신자들의 사역을 통해 전파되었는데, 그들은 다른 이들의 손대접을 받으며 다녔다. 최초의 선교사들인 그들은 손대접하는 것과 그들의 메시지를 받는 것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각 도시의 손대접 잘하는 가정을 중심으로 복음의 메시지가 퍼져 나갔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손대접을 통해 순회 선교사와 지도자, 종교 때문에 추방당한 사람, 인근의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p50)
초대교회는 신자들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예배를 드렸다. 장소가 장소인만큼, 손대접은 자연스럽고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신자들 사이 끈끈한 가족적 유대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고 강화시켜 주었다.(p50)
초대교회는 궁핍한 나그네를 손대접함으로 주위 사람들과 구별되었다.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할 것 없이 나그네를 돌보는 것은 범상치 않은 예외적 행동이라고 인식했고, 그것은 기독교 복음과 교회의 신뢰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지가 되었다(p51)
우리가 처한 현재 상황은 손대접을 규범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했던 초기 기독교 상황과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우리는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관계와 정체성과 의미를 갈구하는, 산산히 부서진 다문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동이 잦고 자기 지향적인 오늘날의 사회는 외로움, 소원함, 소위 등이 그 특징이다. 때로 삶 자체에 대해 너무나 적대적인 듯이 보이는 문화에서, 폭력을 거부하고 삶을 포용하는 사람들이 강력한 증인들이다(p51)
3장 기독교 손대접의 간략한 역사
손대접이 번성하게 된 배경과 손대접이 거의 사라져 버린 동안의 사회상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시대에 손대접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더 잘 알 수 잇을 것이다(p57)
손대접에는 사람들을 영접할 약간의 공간과 초대하지 않으면 나그네가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는 장소가 포함된다(p57)
구약의 손대접 유산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먼저, 나그네를 영접하는 가정이 사회활동과 가정활동 양자의 중심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이 전통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이미 나그네를 돌보는 일은 각 가정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공동체 역시 손대접을 책임지고 시행해야 했다. 개개인의 관대한 반응 분 아니라 법으로도 손대접에 대해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 나그네들은 먼저 공적인 장소에서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p59)
손대접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영접하는 것, 동정심을 보이는 것, 평등한 대접 등은 모두 궁핍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보일 수 있는 적절한 반응이었다(p64)
중세(약500-1500년)에는 세 기관에서 손대접을 했다. 수도원과 순례자들을 위한 수도원의 여행자 숙박소, 병원, 그리고 교회와 평신도의 큰 집 등이었다(p66)
개인적인 손대접은 육체의 필요를 채워 주면서,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한 자락을 차지할 수 있는 인간적 관계를 제공해 주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급직원을 둔 전문 기관들은 환자/보살핌을 받는 사람들을 돌보아주기는 했어도, 그들을 일상적 활동과 관계에서 단절시켜 버림으로써 대로는 황폐한 결과들을 가져왔다.(p67)
16세기에는 봉건제도와 장원제도가 무너지면서 부랑자 문제가 절정에 달했다. 이동, 도시화, 전염병, 전쟁, 교역의 증가 등으로 시골 공동체들이 와해되고 "주인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 늘어났다. 전통적인 손대접은 점차 부랑자와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제대로 채워 주지 못하게 되었다. 16세기의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손대접 관행을 재규정했다. 그들은 중세 후기 손대접과 연관된 사치와 방종과 낭비를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들은 부자를 지나치게 대접하는 것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도와주는 것을 모두 거부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궁핍한 유랑자들을 돌보는 데 초점을 맞춘 성경적이고 초기 기독교의 교부적인 손대접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들은 손대접할 때 검소함과 분별력을 발휘해 질서정연하게 할 것을 강조했다.(p70)
손대접을 회복하려면 사역의 중심 장소로서의 가정을 되찾아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가정과 교회를 다시 연결시킴으로써 두 기관이 세상을 위해 협력하여 일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손대접의 미래를 위해 우리의 경제적 영역과 일상 일과의 관계를 창조적으로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가정 중심의 의미 잇는 손대접을 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집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 대부분의 집들이 규모가 작은 것에 비추어 볼 때, 몇 가정이 함께 살거나 손대접의 견고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역시 중요할 것이다.(76-77)
2부 전통을 다시 생각하라
4장 손대접, 존엄성, 인정받는 것이 지닌 힘
기독교 손대접에는 언제나 현상을 타파하려는 반문화적인 차원이 있다(p81)
손대접 행위는 사회적 관심사와 도덕적 유대를 확립하고 강화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에서 무시되는 사람들이 영접받을 때라야 비로소 현상을 타파하는 손대접의 특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미 공동체 안에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만 영접하는 무기력한 손대접과는 대조적으로, "지극히 작은 자"를 영접하고 그들의 평등한 가치를 인정하는 손대접은 일반사회의 가치관과 기대에 대한 저항과 도전의 행동이 될 수 있다(p82)
인정과 존중의 추상적인 주장이나 헌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조금이라도 의미를 지니려면 구체적인 일상의 관계 속(가정, 교회, 공동체, 정치적 영역)에서 실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p83)
기독교적 손대접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영접함으로써, 계층을 구분하는 일반사회와는 반대 방향을 나아간다. 기독교 손대접은 일반적인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구해 주기 위해 사회구조라는 속박 안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대로는 그러한 사회적 상황에 분명하게 문제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손대접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최악의 결과가 오지 않도록 하면서 가장 궁핍한 사람들을 곤경에서 구해 주는 경우가 많다. 손대접은 사람들의 인간성을 부인함으로써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경계들에 저항한다. 손대접은 또한 사회적으로 버림받고 눈에 띄지 않는 사람들을 구해 주기도 한다. 때로는 나그네를 영접하는 바로 그 행동이 전체 사회에 비전을 제시하고 관계들을 변혁시키는 작은 증거가 되기도 한다(p84)
인간이 공통성을 지니고 창조된 것,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 서로 의존하며 고난의 경험을 나눈다는 것, 누구나 다 구속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 등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동정하게 하는 포괄적인 틀을 제공한다(p88)
손대접은 존중하면서 보살피는 것이다(p90)
손대접하는 사람들은 봉사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들과 더불어 자신들의 삶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
한 손대접 종사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손대접이... 당신 자신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봉사는 당신의 재능이나 기술이나 자원들을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임무를 행하는 것이 곧 손대접은 아닙니다. 손대접은 당신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p93)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상호관계, 인정, 용납, 동등한 관심 등을 표현하는 일이다. ...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는 보통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나그네와 주인의 출신이 서로 다를 때,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느끼는 친밀함은 사회적 경계들을 초월하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p95).
많은 사회집단은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익명으로 행해지는 국가의 보살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은 좁은 범위의 유대관계에 가끔씩 존재하는 강압적인 경향을 피하면서도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p107)
5장 우리 가운데 있는 나그네들
청교도 존 오웬은 나그네를 "우리가 그들의 상황에 대해 알기는 하지만 그들의 입으로 들어서 하는 것은 아닌" 사람들로서, 인간의 삶의 특징이자 삶의 위치를 정해 주는 관계에서 분리돼 있는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다(p110)
나그네는 "자리가 없는 사람"이다. 자리가 없다는 말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조직 (가정, 직장, 국가, 종교 공동체)으로부터 분리돼 있으며, 사람을 유지하고 지지해 주는 관계망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p111)
때로 우리는 미국을 상대적 나그네 사회로 묘사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정과 공동체에 깊이 관여하지 못하고, 대단히 이동이 심하며, 독자적으로 자기 계획을 추구하면서, 홀로 떨어져 자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귀중하게 여기며 엄격한 공동체를 결속하는 것에 신중을 기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나그네인 것처럼 느낀다. 뿌리는 없고, 관계는 끊어져 있으며, 어떻게 사람을 영접할지 누구를 영접할지 확실히 모르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나그네에 대해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을 나그네로 묘사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중대한 연고들을 과소평가한다. 우리는 대부분 경제적 유대와 시민으로서의 연고를 가지고 있다. 우리를 이름도 힘도 없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가족과 사회적 연계망들이 있다. 비록 오늘날 가족과 가정은 과거보다 덜 튼튼하지만, 우리는 여러 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연관을 맺고 사회에 소속될 수 있다.(p113)
개인적으로 반응할 수 없는 먼 곳에 사는 궁핍한 이들에 계속 접하게 되면, 우리는 그런 것들에 점차 둔감해질 수 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그저 아는 것만으로도 그 고통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바로 이웃의 가난한 이들과는 유리된 채 먼 곳의 가난한 이들만 지나치게 접하다 보면, 나그네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점점 불확실해지고 마지못한 것이 되고 만다(p115)
분명 나그네를 영접하는 데는 위험이 따른다. 나그네들이 때로는 축복과 선물을 가져다 주기도 하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타락하고 혼란한 세상에서 나그네들은 궁핍하겠지만, 때로 그들은 상대방을 이용하거나 예기치 모한 골치 아픈 일을 일으키며 의도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다(p117)
우리는 단순히 자신의 안전 때문에 위험과 모험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가족과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들, 특히 아이들과 다른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위험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p118)
위험을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은 좀더 공개적으로 손대접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덜 인격적인 방법으로 손대접하라는 말이 아니라, 좀더 공적인 자리에서 손대접을 시행하고 덜 사적인 곳에서 계속 영접해야 한다는 의미다. (p119)
위험을 줄이는 다른 방법은 초기 기독교 관행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곳에서 온 그리스도인을 실제로 손대접할 때, 서먹함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구조와 제도를 개발했다. 초대교회에서는 다른 신자들이 보내는 추천서를 이용했다. 또한 그들은 간단한 테스트를 이용하기도 했다. .. 그들은 너무 오래 머물거나 게으르거나 삶이나 대화를 통해 거짓됨이나 부도덕함을 드러내면, 더 이상 그들을 손대접하지 않았다(p120)
수도원 공동체는 나그네를 자신들 한가운데로, 아주 조직적인 환경 속으로 영접했다. ... 기도시간, 성경읽기 시간, 함께 식사를 나누는 시간을 통해 나그네들을 더욱 알게 되고 그들의 성품과 의도를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었다(p120-121)
나그네의 낯설음을 줄이는 후대의 예는 18세기 감리교도들이 소그룹 모임을 중요시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친밀한 소그룹 조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그네가 오면 이웃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그네가 공동체 일원이 되면 서로 책임지고 도와주었다(p121)
- 낯선 사람을 받아들일 때 어려운점.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 위험을 감수하기도 해야겠지만, 여러사람이 함께, 공동체가 함께, 조직과 시스템 속에서 함께 맞는다면 위험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나그네들에게 우리의 집은 고사하고 가장 기본적인 양식과 안전마저 제공하지 않을 수 있는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서로의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낯선 존재임을 강조하면 된다. 나치군대는 유대인들의 "타자됨"을 무턱대고 과장함으로써 그들을 낯선 사람들로 만들었다. 인종청소의 논리는 다른 문화나 공ㅇ동체를 완전히 별개의 이질적인 것으로 보는 데에 있다. 이민자와 난민들에 대한 현대의 적대적인 묘사는 나그네를 위험스러운 타자로 여기고 있음을 반영한다(p122)
- 나그네..를 받아들이던가, 그게 싫으면 위험한 사람으로 그래서 심하면 이 사회에 없어야 할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6장 주변인 손대접
영접받아야 하는 취약한 나그네들은 보통 사회의 주변적인 인물들이다. 중요한 인간관계와 사회적 제도들로부터 분리돼 있기 때문이다(p131)
교회사에서 손대접이 가장 활기차게 시행되던 시기는 주인들 스스로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주변인이었던 때였다.(p132)
가장 영향력 있는 손대접은 의식의 경계선상이나 주변, 아니면 사회질서의 밑바닥에 있는 주인들이 베푼다. 그 주인들은 본질적으로 문지방 혹은 다리가 되는 사람들이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더 큰 사회와 연관돼 있지만, 시제로는 사회적 상황과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는 점에서 그 사회와는 별개인 사람들이다. 이러한 주변성과 의식의 경계라는 중대한 차원들이 없으면, 주인과 나그네의 관계는 기존의 사회적 관계와 지위, 계급조직을 강화하는 보수적인 기능을 하는 경우가 많다. (p132-133)
- 손대접을 베푸는 사람이 아웃사이더일 때 (아니 그 경계선에 서 있을 때) 가장 적절한 손대접을 베풀 수 있다. 애매모호한,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 중간지대에서 어정쩡 하게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닐까 싶다...
손대접 이야기의 어려움 중 하나는, 많은 주인들이 주변적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p137)
손대접을 하려면 물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자원이 많을수록 주인들은 더 많이 손대접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자원을 갖게 되면 주인들은 일반사회 및 그 사회의 권력이나 지위와 더 밀접하게 연관을 맺게 된다. 이렇게 되면 궁핍한 사람들을 관대하고 인격적으로 대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이 땅의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은 서서히 약화된다(p142)
손대접하는 데 많은 물질이 들지는 않는다. 음식이나 시간이나 장소나 돈이나 그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려는 마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p143).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더 흔쾌히 손대접을 하는 경운, 그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요인들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음식과 쉴 곳과 도움을 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경우가 많다. 종종 그들의 삶은 중산층보다 덜 개인적이며 일상생활에서도 그들 주위에는 더 많은 식구와 이웃들이 북적된다. 그들 대부분은 재산과 소유물도 아주 적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의 삶은 판에 박힌 일상에 덜 지배받기 때문에 더 많은 방해를 수용할 수 있고 도한 기꺼이 수용한다.
...
누군가의 말처럼, 재산과 손대접 사이에는 역비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확실히 우리가 재산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록, 나그네를 손대접하는 것을 망설이게 될 수 있다.
(p144)
가장 생색내는 태도는 손님이 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도울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신학자 앨런 보삭은 "사랑 없음의 극치는 우리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라고 썼다(p148)
모든 사람이 나그네일 경우, 공동체나 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몇몇 나그네가 주인 역할을 맡아야 하는 상황도 있다. (p151)
많은 상황들을 통해 우리는 주변성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주변성은 우리가 더 낫고 더 자비로운 주인이 되도록 해줄 것이다. 가난과 궁핍함도 그렇지만, 장애를 경험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는 강력한 선생이다. 다른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사는 것도 도움이 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별난 존재가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경험들은 우리의 마음을 꽁꽁 닫히게 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를 부드럽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게 하며, 필요와 상처와 은사들을 더 잘 인식하게 만들 수도 있다.(p152)
3부 실천의 회복
7장 손대접의 연약성: 한계, 경계선, 유혹
손대접은 한정된 범위의 공동체에 의존하지만, 언제나 더욱 많은 사람들을 보살피도록 그 공동체들에 압력을 가한다.
...
손대접에는 항상 어려움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그 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손님뿐 아니라 주인의 행복도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점에서 한계와 경계선의 문제가 불거진다. 육체적·정서적 힘, 공간, 음식, 그외 자원들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따금씩 이러한 것들을 기적적으로 채워 주시지만, 주인들은 어떻게 자원을 분배하고 에너지를 사용하며 사역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여전히 힘든 선택을 해야 한다(p155)
대부분의 공동체들은 처음에는 경계를 짓지 않으려 하고 가능하면 많은 범위의 사람들을 영접하려고 한다. 그러다 계속해서 손대접을 하려면 지침, 곧 경계선들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경계선들을 여전히 용납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유한함에 대한 양보이며, 그러한 경계를 정한 것 때문에 치러야 했던 대가와 손실에 대한 아쉬움이 늘 있었다(p156-157).
손대접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불의의 결과로 야기되는 부족함 가운데 시행되며, 그러한 부족함과 하나님의 풍성함과의 관계는 상당히 복잡하다(p158-159)
손대접이 사회 전체적으로 널리 시행되지 않을 때, 또는 자원이 공평하고 적절하게 분배되지 않을 때, 개인적 손대접으로 모든 필욜ㄹ 다 채울 수는 없지만 약간의 필요는 충족시킬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돌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예다.(p161)
우리들 대부분은 풍족하게 살고 있다. 부족하게 살고 있지 않다. 특히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자원이 부족한듯이 행동한다. 우리는 가진 것을 나누기도 전에 충분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한다. 문제는 자원의 양보다는 기꺼이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p164).
접다는 "사람들에게 뭔가 대단한 존재인 척하는 것", 그래서 "완벽한 집에 있는 완벽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다음 글을 보면 손대접의 초점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내 것을 먼저 챙기지 않고 어떻게 하면 당신을 위해 베풀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이고, 또는 '들어오세요. 이게 우리 사는 모습이랍니다'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p174)
손대접이 오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자비로운 주인과 손대접 공동체들은 자신들이 때로는 "이용당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나그네를 영접한다. 이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 (p179)
죄와 불의와 상처로 왜곡된 세상에서 손대접을 한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은혜와 지혜가 그만큼 필요하다. 나그네에게 실제로 손대접을 베풀기 위해서는 영적, 도덕적 직관력, 기도로 성령께 의지하는 것, 전통적으로 축적돼 온 지혜, 각 상황에 대한 실제적인 평가 등이 필요하다(p180).
8장 손대접을 위한 장소 만들기
손대접을 위한 구체적인 환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영접은 언제나 물리적 공간, 사회적 관계, 특별한 의미와 가치들을 결합시키는 "장소"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손대접을 위한 장소를 만든다는 것이 물리적 환경을 만들거나 변화시켜서 몇 사람을 더 받아들일 공간을 만든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여건을 형성하는 인간관계와 헌신이 그곳의 환대하는 분위기 여부에 영향을 미친다.(p181)
손대접을 회복하는 예비단계는 즐거운 주일 저녁식사를 회복하는 것이다. 음식 준비는 최소화하고, 음식과 교제의 행복한 겨합을 반가워할 사람을 의도적으로 몇 명 더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가정들은 몇 사람을 초청해 주일을 경축하고 특별한 행사를 함독신자는 독신자끼리 힘을 합해 다른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손대접을 위한 자리를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다(p187)
손대접하면서 자녀들을 키운 많은 가정의 간증을 들어 보면, 그로 인해 아이들의 삶이 매우 풍성해졌다고 회상한다. 아이들의 삶은 손님들이 그들의 가정에 가져다 준 선물이나 기술이나 경험들 때문에 훨씬 더 충만해졌다. 자녀들은 몇몇 손님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키워 가면서 상심한 마음을 쉽게 치유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은 남보다 일찍 성숙하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깊은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p188)
영접은 공동체가 살아있다는 한 가지 증거다. 다른 사람을 우리와 함게 살도록 부르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며, 함께 나눌 진리와 평안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는 한 가지 표지이다(p192)
9장 손대접의 영적 리듬
손대접을 하려면 우리는 불확실성, 우발적인 사건, 인간의 비극들을 받아들일 여유가 있어야 한다.(p203)
손대접은 하나의 사역이라기보다는 생활방식이자 우리 자신을 나누는 태도다. 대부분의 손대접 종사자들에게 손대접을 베푸는 일은, 하나님께 신실하고 성경과 주위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노력에서 비롯된다.(p204)
나중으로 미룰 수 없는 일들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손대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재평가하게 된다. 일 지향적인 많은 이들은 예상치 않았거나 편치 않은 손님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신중하게 재고해 보아야 한다. "계획된" 손대접 시간에는 문제가 크게 불거지지 않지만, 상황이 좋지 않은 때 사람들이 오게 되면 문제는 좀더 곤란해진다(p212)
사람들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 환영의 마음을 전달한다. 하지만 함께 음식을 먹는 경험 전체(요리, 식사 그리고 이후의 설거지)가 모두 손대접의 중요한 표현들이다. 사람들에게 허드렛일이나 활동들을 함께하자고 청하는 것도 그들이 편안하게 느끼도록 하는 좋은 방법이다(p213)
손대접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생활을 장려해야 한다. 이것은 종사자들을 지지해 주고 외부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어하는 장소를 만들어 낸다. 아무리 손대접에 능하다 해도, 많은 수의 나그네를 손대접 하는 데는 공동체가 중요하다. 그 일은 개인이나 개별 가정이 감수하기에는 너무 많고 고되며 너무 빈번하게 일어난다. 기독교 공동체들 (교회, 손대접을 위한 공동체, 가족들로 이루어진 소그룹)은 손대접에 요구되는 것들을 줄이고, 짐을 나누며, 기쁨을 배가시킬 수 있다. 라르쉬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역자에 따르면, 그 누구도 완전히 기진맥진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스스로 페이스를 유지하고 일을 나눠하며 휴식을 위해 잠시 일을 중단해야 할 때, 다른 사람들을 의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p217)
손대접하는 사람들은 그 일 자체가 풍요롭다는 것을 발견한다. 손대접하는 삶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일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사람들을 영접할 때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들에 의해 양분을 공급받으며, 손대접하도록 격려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의해서도 영양분을 공급받는다(p222)
휴.
길다.
눈도 팔목도 아프군.ㅠ.
읽으며, 정리하며 적용거리가 생겻다.
지금 바로 하는게 좋은거지만.. 나중에 할 적용거리가 먼저 생각나서 남겨둔다.
1)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공간 마련하기. 공동체 생활로 너른 집 마련
2) 즐거운 주일 저녁 식사 회복 - 손님을 초청해서 함께 식사하기.
201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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