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왜 샀을까?! 생각해보면 이것도 그냥 샀다..ㅋ.ㅋ
- 내 안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감정, 정서, 생각들을 표현하기. 이게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냥 글로,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더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 정직해지는 것이기에.
근데 별 5개짜리.. +_+.^^,
좋다.. VVIP 당첨.
근데.. 쪼금.. 아쉬운건 쫌 어렵다.
복잡한게 아니라, 확 와닿지 않는다고 해야할까?..
약간의 의역이 필요한듯.ㅠ
이 정리글은 쫌 심혈을 기울여 정리해야지.
이 책은 1972년에 헨리 나우웬이 쓴 책이다.
우리나라엔 99년에 번역 되었다고 적혀 있다.
머리말
고통받고 있는 세상의 상태(1장)
고통받고 있는 시대의 상태(2장)
고통받고 있는 개인의 상태(3장)
고통받고 있는 사역자의 상태(4장)
에 대해 다룬다.
사역자의 부르심은 자신의 시대가 처한 고통을 그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며, 그 깨달음으로부터 그의 사역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p10)
- 여기서 저자가 어떤 의미로 '사역자'라는 표현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이 문장에서 말하듯이..
자신의 시대가 처한 고통을 마음으로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일은 무엇이든 사역인 것 같다.
사역자.. 사역.
1장 단절된 세상에서의 사역 - 핵 시대의 인간이 추구하는 것
Ⅰ. 핵 인간이 당면한 어려움
핵 인간은 자신의 창조적 힘이 자멸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p17-18)
그는 필연적으로 알게 된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인간이 이 지상의 생태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그 복구 가능성마저 파괴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일부 인간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우리가 존재하는 한시적 기간이 아니라 역사 자체를 파괴할 가능성이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두번째 입니다(p18)
역사 심리학자 로버트 제이 리프톤은 핵 인간이 처한 어려움의 성격을 몇 가지 탁월한 개념으로 정의합니다.
1. 역사적 단절(Historical dislocation)
핵 인간에게는 창조적 삶을 사는 데 필수적인 연속 의식 (a sense of continuity)이 결여되어 있다. 핵 인간은 자신을 비역사의 일부로 여겨 '지금 여기(the here and now)'라는 바로 그 순간만을 중요시합니다.
...
인간이 희망이나 절망을 느끼는 것은 자신에게 미래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인식할 때만 가능합니다.(p20)
기독교의 설교는 대부분, 인간이 자신을 의미 있는 역사적 존재로 본다는 전제 조건에 근거하고 있다. ... 그 전제 조건에 따르면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고, 현재 우리 안에 살고 계시며, 미래에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오실 것입니다(p21)
- 현대인들은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나를 둘러 싸고 있는 큰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의식(역사의식이라고 하자.)이 없이는 희망도 절망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세계관의 부재도 유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창조-타락-구속에 대한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자.
2. 단편화된 이데올로기(Fragmental idealogy)
가치 체계가 아주 빠르게 바뀐다.
두 가지 경험 모두 각기 가치가 있고 장단점이 있는데, 왜 하나의 관점, 한 가지 사상, 그리고 불변의 한 가지 준거 틀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
우리 시대의 가장 현저한 현상들 중 하나는 다양하고도 상반된 사상, 전통, 종교적 확신, 그리고 생활 양식 등을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접하고 있다는 것.
(p21-22)
핵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진실하고 타당한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그는 순간적이며,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임기 응변적 삶을 살아갑니다(p24)
- 하나의 이데올로기(세계관)가 자리 잡지 못하는 원인이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고 그 이데올로기를 너무나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3. 새로운 불멸에 대한 추구 (A search for new immortality)
창조성의 원천은 바로 불멸 의식(a sense of immortality)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죽음 이후를 바라볼 수 없고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시공을 넘어서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창조의 욕구를 상실하게 되고 자신이 인간이란 것에 대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p26-27)
- 죽음 이후에 무엇이 없다면, 지금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창조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Ⅱ. 핵 인간이 해방되는 길
1. 신비주의적 방법
신비주의적 방법은 내적인 방법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내적 삶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 '존재의 근원', '침묵의 순간'과의 관계를 찾으려 합니다.(p30)
- 이 방법은 명상이나 정신 통일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 현대인은 자신이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2. 혁명적 방법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혹은 새로운 세상인가. ... 혁명가들의 목표는 보다 나은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p32-33)
3. 기독교적 방법
신비주의와 혁명주의는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려는 하나의 시도가 지닌 두 가지 측면입니다. 신비주의자는 사회 비평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성찰을 통해 그는 병 든 사회의 뿌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혁명주의자는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의 상태와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자신이 자신의 두려움 및 거짓된 야망과도 싸우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p34)
- 예수님의 방법은 신비주의와 혁명주의 두 가지가 혼재한 방법이었다. 자신의 죄를 돌아보면 사회 전체 죄의 기원을 알 수 있고,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다보면, 인간으로서 자기 모습을 돌아볼 수 밖에 없게 된다.
2장 뿌리 없는 세대를 위한 사역 - 도망자의 눈을 바라보며
Ⅰ. 내일의 세대
1. 내향적 세대(The inward generation)
개인적인 것에 절대 우위를 부여하는 세대이며, 자아 속으로 움츠러드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세대입니다(p42)
어떤 권위나 제도, 외적이며 확고한 어떤 실체도 그들의 불안과 고독을 덜어 주거나 그들을 자유롭게 해줄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길은 내면으로 향하는 것입니다.(p44)
...
내향성은 결국 개인주의가 될 수 있고, 이 개인주의는 반권위주의적이고 반제도적일 뿐만 아니라 자기 중심적이며 물질적 안락함 및 욕구와 욕망의 즉각적 만족에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p45)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된 새로운 실체가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헌신으로 빚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가올 세대의 내향성은 고차원적인 위선이 될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영역의 실체를 발견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p45)
- 이 이야기 완전 정확한 것 같다. 자기 내면, 내면 속으로 움츠러들면서 그 이면에는 이기심이 존재한다.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만 보는 것. 권위를 부정하고 제도도 부정하고 그냥 자기 한 몸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것도 이 세대의 특징이 아닐까.
2. 아버지 상실 세대(fatherlessness)
이전에는 권위에 의해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했으나 지금은 그러한 경향이 많이 줄어들었다. 왜냐하면, 사람의 가치는 아버지들로부터 받은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p46)
아버지 대신 또래가 기준이 됩니다. 성인 세계 권력자들의 명령, 기대, 그리고 불만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많은 젊은이들이 동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말하는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p49)
아버지를 따르지 않는 것은 또래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전자는 죄 의식을, 후자는 수치심을 갖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다가올 세대의 문화는 죄 의식 문화 (a guilt culture)로부터 수치심 문화(a shame culture)로 뚜렷하게 전환됩니다.(p49)
- 이것도 정말 맞는 말. 점점 부모나, 권위 있는 사람들의 인정보다는 또래 집단에서의 인정받는게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이게 비단 사춘기 시절에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일생에 걸쳐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권위자(부모, 상관, 선배)의 이야기보다 자기와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진다. 옷 입는 거나, 물건을 사는 것(차나 집 레져용품 등)도 가치 판단의 기준이 또래 집단에 있다. 이런 현상은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 처럼, 사춘기에만 일어나는 게 아닌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취직을 하는 시기에는 직장의 수준을 비교하고, 결혼 할 시기에는 배우자를 비교하고, 집을 살 시기에는 집을 비교하고, 아이들이 자랄 시기에는 아이들의 성적으로 비교한다. 이렇게 비교하는 것도 또래 집단에서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닐까?
3. 강박적 세대
많은 젊은이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으며, 그들이 기존의 존재 양식을 따르는 것은 자신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p51)
그들은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고 있지만 효과적인 대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좌절감에 빠지게 되고, 종종 그 좌절감은 명확한 목적 없이 파괴를 행하는 맹목적인 폭력이나 세상을 벗어나서 자살을 행하는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p51)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과 그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부모 세대가 했던 것보다 그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그들에게는 비전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p52)
-으허..ㅋㅋ 완전 정확하다. 완전. 이 책 72년에 쓰여진 책 맞는가?!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세상이 이러면 안되는데, 사는 꼴이 이러면 안되는데.. 라는 생각은 있지만 뭔가 해결할 길은 막막하고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뭔가 해보자니 이 전 세대가 했던 것 만큼 잘할 수 있을진 모르겠고.
나에겐 이런게 여러개 있는데, 아니 거의 삶의 전 영역, 특히 관계 부분에 있어서 이런 생각을 많이한다. 교회..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고 암튼 사람들과의 거의 모든 관계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게 아닌데 뭔가 잘못된 것 같긴한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뭔가 해보려 해도 더 잘 할 수 있을 지 모르겠고. 생각해보니 그 뿐 아니라 진로 문제에 있어서도 그렇다. 뭔가 대안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은데 잘 할 수 있을까? 흐지부지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고. 만남 모임도 마찬가지.
Ⅱ. 내일의 지도자
1.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지도자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새롭고도 철저하게 행해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p54-55)
내일의 사역자에게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가장 근본적인 과제는 사람들이 새로운 내적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 직면할 수 있는 엄청난 혼란을 해소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지만,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영적 지도자가 될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댈 대부분은 대규모 조직의 관점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합니다. 사람들을 교회, 학교, 병원 등에 불러모으는 일에 익숙하고, 서커스 감독처럼 쇼를 진행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깊고 의미 심장한 영적 움직임에는 익숙하지 않으며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p55-56)
여기서 핵심이 되는 말은 '정확한 표현'입니다. 자신의 내면의 삶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고, 자신의 다양한 경험에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여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자아의 희생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계시며,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계시고, 자신보다 더 많이 치유하실 수 있는 손을 가지신 분을 모시는 내면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p56-57)
- 내 안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감정, 정서, 생각들을 표현하기. 이게 참 어려운 것 같다. 그냥 글로,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더중요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 정직해지는 것이기에.
자신의 경험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도 정확한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신앙을 정확하게 표현함으로써,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그것을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p57)
사람 대 사람의 깊은 만남이며, 그 만남에서 목회자는 자신의 믿음과 의심,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두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내놓아 그들이 자신의 혼란을 헤치고 자신의 확고한 생명의 중심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p58)
그러므로 설교란 하나의 전통을 전달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공동체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주의 깊고도 세심하게 분명히 말함으로써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내가 추측하고 있던 바를 말씀하시는군요.", "당신은 내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바를 표현하셨어요", "당신은 내가 두려움 때문에 마음 뒷전에 감추고 있던 것을 앞으로 끌어내셨어요", "예, 정말 그렇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주셨고, 우리의 상태를 알고 계십니다" 등등 말입니다.(p58)
가르침은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경험을 정확히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확고하게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을 발견할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p59)
- 나의 혼란과 고민, 걱정을 정확하게 표한하고 그 과정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 지 이야기하는 것. 지금 지금은 그게 뭘까?
2. 긍휼의 사람으로서의 지도자
아버지를 상실한 세대는 새로운 종류의 권위를 찾는데, 그것은 긍휼(compassion)이다.
기독교 지도자는 먼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 주었던 바로 그 긍휼의 마음을 사람들이 신뢰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p60)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때 우리는 사랑에 대한 갈망 및 세상에 만연해 있는 잔인함이 자신의 충동 속에도 뿌리 내리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p60)
이러한 긍휼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긍휼이 내부 집단의 압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언어와 국가, 부와 가난, 교육을 받은 자와 무지한 자 사이의 경계를 무너드리기 때문입니다. 또한 긍휼은 당파를 만드는 무서운 행위로부터 사람들을 이끌어내,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이웃이 될 수 있는 넓은 세계로 그들을 이끌어 줍니다(p61).
사랑 없이 주는 빵이 평화를 가져오기는커녕 전쟁을 초래할 수 있는 것처럼, 긍휼이 없는 전문성은 용서와 하나님의 왕국을 진실되지 못한 것으로 만들 뿐입니다.(p62)
3. 묵상의 사람으로서의 사역자
내향적이며 아버지를 상실한 세대는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필사적으로 원하지만 신뢰할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돌발적이고 강박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p63)
기독교 지도자는 그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어떻게 창조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참된 변화의 집행자가 될 수 있을까(p63)
비평적인 묵상가가 될 수 있는 기독교 지도자야말로 가장 진실한 혁명가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들을 참된 복음으로 검증함으로써 기독교 지도자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을 수 있고, 공포 때문에 강박적인 사람들을 인도해 그들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창조적 행동을 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p65)
- 복음으로 검증한다는 말이 무슨말일까? 기독교 세계관으로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일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인가? 어떻게 창조적 행동을 하도록 할 수 있다는걸까??
무엇보다도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소망과 약속의 표징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p66)
지도자는 기도의 사람, 기도해야 하는 사람, 항상 기도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서 메시아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이며, 숨겨진 것을 드러내고, 구체적으로 잡지 못하던 것의 실체를 파악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p68)
기도의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구체적 이유는, 그가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정확하게 표현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혼란으로부터 빠져 나와 그들도 명료하게 인식하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긍휼을 통해, 사람들이 배타적인 내부 집단을 벗어나 전인류의 넓은 세계로 나아가도록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비판적인 묵상을 통해, 이 세대의 강박적인 파괴성을 다가올 새 세상을 위한 창조적 사역으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p68-69)
기도..의 사람.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ing.
3장 소망 없는 사람을 위한 사역 - 내일을 기다리며
Ⅰ. 해리슨 씨의 상태
1. 비인격적 환경
2. 죽음에 대한 두려움
3. 삶에 대한 두려움
Ⅱ. 해리슨 씨를 내일로 인도하는 방법
한 인간이 지닌 신비는 너무나 크고 심오해서 다른 인간이 완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리슨 씨를 내일로 인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지도자가 되어 사람들을 광야로부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을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p87-88)
우리는 곤경에 처한 사람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그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중요한 문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비인격적인 환경 가운데 놓여 있는 사람에게 인격적 반응을 하는 것입니다(p88)
1. 인격적 반응
과거와 미래의 공허함은 결코 말로 채워질 수 없으며 오로지 사람의 존재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오직 그럴 때만 소망이 싹틀 수 있는데, "아무것도, 아무도 없어요"라는 해리슨 씨의 불평에 대해 적어도 한 가지 예외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망 때문에 그는 "어쨋든,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라고 속삭일 것입니다.(p90)
- 우와... 정말 맞는 말이다. 누군가 기다린다면, 한 사람이라도 나를 기다린다면 살맛나는 하루..하루가 될 텐데.
2. 삶 가운데서의 기다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리더십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환경의 익명성과 무관심을 벗어나서, 사람들에게 자신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p90-91)
사람은 자기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온전한 정신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정말로, 인간의 정신은 그 육체가 쇠약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육체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임종을 눈앞에 둔 어머니는 아들을 보기 전까지는 생사와의 투쟁을 포기하지 않고 숨을 이어갑니다. 아내와 자식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군인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너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면 삶의 투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p92-93)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데, 그 이유는 내일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 하는데 그 대상이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p93)
- 기다리는 사람.. 나도 나도.. 기다리는 사람이 되자..
3. 죽음을 넘어선 기다림
해리슨 씨는 죽는 거슬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정죄받는 것과 자신의 고립이 영원히 연장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대한 해리슨 씨의 개념은 여러 가지겠지만, 자신의 존재가 전적으로 거절되는 것이라는 개념이 가장 컸습니다. 그러나 해리슨씨가 존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렇다면 해리슨 씨는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에 저항하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자기 혼자만이 아니며, 죽음의 순간에 혼자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p96)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는 말은 죽음을 뛰어넘는 것이며, 믿음과 소망은 끊어질지라도 사랑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가장 심오하게 표현한 것입니다(p97)
존이 해리슨 씨의 안내자 또는 인도자가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사실, 존이 해리슨 씨의 마비 상태에 자발적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해리슨 씨의 마비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해리슨 씨를 다시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존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참여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p98)
Ⅲ. 크리스천 리더십의 원칙들
우리는 해리슨 씨와 존의 만남에서 크리스천 리더십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원칙은 개인적 관심인데, 이것은 동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것을 우리게 요구합니다. 두 번째 원칙은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삶이 힘든 시기에도 변함 없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 원칙은 항상 내일을 기대하는 적극적 소망입니다. 그 소망은 죽음의 순간도 넘어서는 것입니다.(p99)
1. 개인적 관심
고통받고 있는 인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태도가 있다면, 바로 무관심입니다.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얘기에 귀기울여 주고, 격려의 말을 해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거나 더 이상 도울 능력이 없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곤경에 깊이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비극입니다. 그런 목회자들은 애정이나 분노, 적대감이나 동의를 표현할 능력이 없거나 표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p99-100)
그러나 이제는 기본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그가 처한 상황에 개입해야 하며, 남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그의 고통스러운 상황에 전 인격으로 참여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상하거나 상처 입고 심지어는 파멸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합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의 처음이자 끝이 되는 핵심은 남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순교란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들과 함께 웃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고통스럽거나 즐거운 자신의 경험들을 다른 사람들이 마음껏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 그들이 스스로의 상태를 분명히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p100-101)
불난 집에서 아이를 구하면서 화상 입을 각오도 하지 앟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고독과 절망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서 그 와 유사한 고통을 경험하거나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 고통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 고통을 없애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p101)
-... ... 정말.. 정말 맞는 말이다. 멘붕할 위험을 감수하는 것, 나의 경험 나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
많은 사람들은 그들 중 단 한 사람에 대한 염려 때문에 사방으로 그를 찾아다니는 지도자를 신뢰할 것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잊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의 표시라는 이 이야기는 "그분은 우리를 정말로 돌보십니다"라는 말의 예화로 많이 사용됩니다.(p102)
2.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믿음
절망과 죽음에 직면해서도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크리스천 리더십의 두 번째 원칙입니다.(p103)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뿌리 깊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경험에서 새로운 약속을 발견하고, 모든 만남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으며, 모든 일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얻습니다.(p104)
3. 소망
기독교 지도자는 소망의 사람이며, 궁극적으로 그의 힘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자신감이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기대가 아니라 그가 받은 약속에 기인합니다(p105-106)
- 약속..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 회복하실 것이라는 기대.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멸망해 가는 사람과의 만남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도, 개인적인 관심을 가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심리적 능력이 지니는 한계를 초월합니다. 이 소망의 근거가 한 개인의 영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계시되신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은 삶에 대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던 역사적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p106)
소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안전한 장소를 떠나 알려지지 않고 두려운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p107)
결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함께 그들의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며 교제함으로써 자유의 길로 함께 나아가라고 도전받고 있습니다(p108)
이 장을 읽는 내내... 생각나는 사람이 있는데, 그 관계가 있는데 정말.. 딱?들어 맞는다.. 현명한 지혜로운 사람이다. 참.. 다행이다.
4장 외로운 사역자의 사역 - 상처 입은 치유자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먼저 돌보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준비되는 것입니다.(p110-111)
Ⅰ. 상처 입은 사역자
1. 개인적 외로움
기독교적 삶의 방식은 외로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보호하여 값진 선물로 소중히 간직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
외로움에 대한 뼈아픈 인식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고, 존재의 경계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외로움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지키고 간직해야 할 선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외로움은 우리의 내적 공허함(inner emptiness)을 명확히 보여 줍니다(p113)
- 외로움이 선물이라니. 외로움이 선물이라니..
많은 결혼이 파국으로 치닫는 이유는 남편이나 아내가 자신의 외로움을 완전히 해결해 줄 것이라는 희망이 실현되지 않기 대문입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결혼 생활의 친밀성 속에서 자신의 외로움이 사라지리라는 순진한 꿈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역자가 이런 그릇된 기대와 환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인간 이해의 원천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진정으로 섬길 수 없습니다. (p114)
2. 직업적 외로움
사역자의 삶에 생긴 외로움의 상처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사역자는 인간으로서의 고독을 느낄 뿐 아니라, 사역자로서 자신의 직업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음을 자각하기 때문입니다.(p114-115)
Ⅱ. 치유하는 사역자
자신의 상처를 치우의 원천으로 삼는다는 것은 개인적인 고통을 피상적으로 공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깊은 인간의 상태에서 오는 것이라고 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p118-119)
치유는 어떻게 일어날까요? 기독교 사역자에게 주어진 치유의 사명과 관련하여 '돌봄' '긍휼' '이해' '용서' '교제' '공동체' 등등의 말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이제 나는 '환대(hospitality)'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
환대라는 미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편협한 마음을 깨뜨리고 낯선 사람에게 자신의 집을 개방하게 됩니다.(p119)
환대가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인이 자신의 집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주인은 예상치 못했던 방문자가 두려움 없이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환대에는 두 가지, 즉 집중(concentration)과 공동체(compunity)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p120)
1. 환대와 집중
환대란 손님에게 주의를 집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려면 먼저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이 우선 이루어져야 하는데, 자신의 필요와 걱정과 긴장 등에 마음을 빼앗길 때는 그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p120)
다른 별개의 목적 없이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집에서 편안함을 느껴야 합니다. 즉 그는 삶의 중심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환대를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인 집중은 명상과 묵상으로 이어집니다.(p121)
- 환대를 하려면 주인이 안정되어 있어야 한다.
자기 연민이 아니라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 자기 자신 안으로 칩거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있는 모습 그대로 행동하고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p122)
인간이 뒤로 물러서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외로운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자신의 상태, 즉 그 모든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비참함도 직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p123)
우리 자신의 중심에서 삶의 닻을 내릴 수 있는 안정된 장소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마련된 공간으로 들어와 두려움 없이 자기들의 춤을 추고 자기들의 노래를 부르며 자기들의 언어를 말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위험하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그들을 자유케 하는 존재가 됩니다(p123)
2. 환대와 공동체
자신의 외로움에 익숙해져 이젠 자신의 집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역자는 손님들을 환대하는 주인입니다.(p123)
손님이 자신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환대에 필요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p124)
이것이 어떻게 치유의 사역이 됩니까?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온전함을 줄 수 있다는 그릇된 환상을 제거해 주기 때문입니다.(p124)
진정한 환대를 받을 수 있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의 상처가 절망과 비통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여행을 지속하도록 해주는 표시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p124)
자신의 외로움을 가지고 사역자를 찾아오는 사람은 자신의 외로움이 이해되고 공감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그것을 회피할 필요가 없고, 그것을 인간의 근본적 상태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p124)
자신들에게 두려움이나 고독, 혼란이나 회의가 전혀 없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 바로 그릇된 가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통들은 우리 인간의 상태에 없어서는 안될 상처들로 이해될 때에만 창조적으로 처리될 수 있습니다.(p125)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역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내자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인내를 통해 소망의 표적이 처음으로 가시화됩니다. 고통을 회피할 필요가 없고 그 고통이 삶에 대한 공동의 추구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할 때, 그 고통은 절망의 표현에서 소망의 표적으로 바뀝니다.(p125)
환대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근본적인 나약함을 고백하고 소망을 나눔으로써 결속을 도출해 내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인간의 화합 차원을 넘어 노예 상태에 있는 자신의 백성을 자유의 땅으로 부르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유대교 및 기독교 전통의 핵심입니다(p125-126)
기독교 공동체가 치유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곳에서 상처가 치료되고 아픔이 경감되어서가 아니라 상처와 아픔이 새로운 비전을 위한 출구나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맺음말
사역자에게 있어서 환대란, 자신이 어디에 서야 하고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들어올 수 있게 하고, 그들이 가까이 다가와 그들의 삶이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계되는지 물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손님들로부터 기꺼이 영향을 받겠다고 할 때마다,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위험성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의 추구로 위험을 분담할 때라야 새로운 생각이 도출되고, 새로운 비전이 모습을 드러내며, 새로운 길을 보게 됩니다.
2년 후, 10년 후 또는 20년 후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고통받고 있으며, 그 고통을 나눌 때 우리가 전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사역자의 부르심은 자신의 많은 손님들에게 이 전진에 대한 신뢰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 신뢰감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려는 열망이 점점 커지며, 인간과 세상의 완전한 해방이 앞으로 오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p130)
- 고통을 함께 나눌 때 전진할 수 있다. 단순한 진리....
정말 주옥같은 글들이다.
버릴게 없다
꼭꼭 씹어먹어야지.
고마움에 안아주고 싶은 책.
2013.1.3.
'기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손대접 Making Room: Recovering Hospitality as a Christian Tradition(2012.12.13.~20.) (3) | 2013.06.04 |
---|---|
세상의 길 그리스도의 길 (2010.8.26~29.) (0) | 2013.06.04 |
사랑에 항복하다(09.1.12~17 / 10.9.21~10.23.) (0) | 2013.06.04 |
복음이 나를 결정한다 (2012.6.20-21.) (0) | 2013.06.04 |
바울의 선교 vs 우리의 선교 Missinary Methods: St Paul's or Ours? (2012.11.17.~20.) (0) | 2013.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