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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영성에의 길 Finding My Way Home (2013.4.2.~5.22.)

  


헨리 나우웬의 책.

 

2001년에 출판되었고 번역은 2002년에.

 

당직설 때마다 조금씩 읽은 책이다.

 

 

1장 능력의 길

 

능력의 길은 실로 연약함의 신학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의 깨어짐, 유한함, 상처, 연약함을 바라보고 싶다. 그러한 시각이 이 땅을 여행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제공하기를 소망하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방식대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싶다. 나는 세 단어 즉 권력’(power), ‘무력함’(powerlessness), ‘능력’(power)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나는 먼저 억압하고 파괴하는 권력을 연구하고 싶다. 그런 다음 그 권력이 무력함을 통하여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 주고, 마지막으로 해방하고 화해시키며 치유하는 진정한 능력을 선포하고 싶다.

 

1. 권력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주목받고 있는지 아닌지, 인정받고 있는지 아닌지, 보상을 받고 있는지 아닌지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항상 우리 곁에 있는 사람보다 우리가 좀더 나은지 못한지, 그리고 좀더 강한지 약한지, 좀더 빠른지 느린지에 대해 우리 자신에게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우리의 동료들 대부분을, 성공, 영향력, 명성을 향한 경주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불안한 나머지,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떤 형태의 권력이라고 붙잡으려고 하지 않는가?(p24-25)

 

경제적정치적 불확실성이 두드러진 이 시대에 가장 큰 유혹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신앙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력 행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인간의 명령으로 대체하는 것이다.(p27)

 

2. 무력함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들과 그들이 땅을 파괴하는 악마적인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과거에는 어떠하였고 또 현재는 어떠한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심오하고도 완전한 신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무력함을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철저히 연약한 모습으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기로 선택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권력의 환상을 폭로하시기 위해,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의 왕자를 물리치시기 위해 그리고 분열된 인류에게 새로운 하나됨을 가져다 주시기 위해, 무력한 하나님은 나사렛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신적인 자비는 완전하고 순전한 무력함을 통해서 드러난 것이었다.(p28)

 

하나님은 완전한 연약함으로 권력의 장벽을 극복하시기 위해, 인간과 동일한 모습으로 인간이 되셨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이다.(p30)

 

3. 능력

재정적, 영적 연약함이 신적인 특권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통을 피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고통당하는 것이 더 낫다는 확신으로 유능한 의학적, 심리학적 도움을 받는 것을 미루거나 피하는 일도 종종 있다. 미래를 위한 신중한 계획이나 적극적인 모금 활동, 지적인 전략을 세우는 것이, 무력함이란 이상에 대해 믿음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져 눈살을 찌푸리는 경우도 간혹 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장애인 그리고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충분한 도움을 주지도 않은 채, 그들을 하나님의 특권을 받은 자녀들로 여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니체는 정확하게 이 연약함의 신학을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이 신학은 가난한 이들을 계속 가난에 머무르게 하며, 기성 종교 집단의 지도자들에게는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 비굴한 굴종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얽어매는 기회를 주었다고 한다. 실로 위험 가능성이 극도로 높은 무력함의 영성, 연약함의 영성, 작음의 영성이 존재한다. 특별히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하고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 가운데서 말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 손가락도 꼼짝하려고 하지 않는다”(23:4)(p34-35)

 

진정 연약함의 신학은, 하나님이 어떻게 완전히 무력한 모습으로 역사 속에 들어오심으로써 세상과 교회의 권력 싸움을 폭로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신학이다.(p36)

 

연약함의 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셔서 고개를 들고 자신있게 이 땅을 걸을 수 있도록 하셨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p36)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찬 분이셨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죄를 용서할 능력, 치유할 능력, 생명을 주실 능력, 다시 말해 모든 능력이 있음을 주장하셨다. 그분이 친구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이런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28:18-19)

 

능력이 주장되었고, 또 능력이 주어졌다. 하나님은 연약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권능을 부어 주시고, 예수님이 가지셨던 능력을 주고자 하신다. 또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유하며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고, 분열된 자들을 화해시키고, 공동체를 창조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도록 우리를 파송하기를 원하신다.(p37)

 

연약함의 신학은 하나님이 권능을 부어 주시는 신학이다. 그것은 유약한 이들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의 빛을 밝히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하게 하는 사랑의 능력을 주창하는 남녀들을 위한 신학이다.(p37)

 

그렇다. 우리는 가난하고, 온유하고, 슬퍼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며, 평화를 이루며, 적대적인 세상에 의해 항상 핍박받는 자들이다. 그러나 유약하거나 학대받아도 가만히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것이며, 이 땅은 우리의 기업이다. 우리는 위로를 받으며, 배부를 것이고, 자비함을 입으며,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볼 것이다. 이것이 능력, 진정한 능력,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다.(p37-38)

 

힘을 통한 능력에서 무력함을 통한 능력으로 옮겨가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p38)

 

4. 결론

 

첫 번째 훈련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는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는 남자, 여자, 아이들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이다. 육체적, 지적, 정서적인 온갖 형태의 가난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반대로 가난한 이들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으며, 이전보다 더욱 많다. 어둠의 권세가 더욱 잔인한 모습으로 끔찍한 음모를 꾸밀수록 가난한 자의 울음소리를 점점 더 커질 것이고, 그들의 고통은 점점 더 현저해질 것이다.(p39)

 

두 번째 훈련은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가난한 자들을 진정으로 돌보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리라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필요할 때 그리고 필요로 하는 만큼, 재정적, 정서적, 육체적 도움을 받게 되리라 확신하게 된다. 나는 우리가 돈, 시간, 재능을 가지고 도울 준비가 된 사람들이고 확신한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가난이란 상황을 둘러싸고 있는 혼돈 속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새로운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우리가 행동으로 옮기기에 앞서 우리의 삶의 모든 토대를 전부 망라해야 한다면, 어떤 놀라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에 약간 별난 모험을 감행한다면, 미처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많은 문들이 우리를 향해 열릴 것이다.(p40)

 

세 번째 훈련은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기쁨으로 인해 놀라는 훈련이다.(p41)

 

가난한 이들에게 초점을 맞춘 눈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공급받을 수 있다고 신뢰하는 마음과, 항상 기쁨으로 인해 놀라워하는 영혼을 소유할 때, 우리는 진정한 능력을 행하는 자가 되어, 기적을 행하고 증거하면서 이 어둠의 골짜기를 걸어갈 것이다.(p41)

 

우리가 손에 벽돌을 가지고, 내 것인지 네 것인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동안, 작은 권력 싸움은 점점 큰 권력 싸움으로 확대될 것이고, 큰 권력 싸움은 미움, 폭력,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래로부터 우리 삶을 본다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어디에서나 벽돌을 손에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히 벽돌을 내려놓고, 손을 비우며, 그것들을 진정한 피난처이시며 진정한 산성이 되시는 유일하신 그분께 올려 드린다면, 우리의 가난은 우리가 위로부터 오는 능력, 치유하는 능력, 우리 자신과 우리 세상에 진정한 복이 될 능력을 받도록 문을 열어 줄 것이다.(p42)

 

 

2장 평안의 길

 

존재에 근거를 둔 평안

 

아담의 평안은 무엇보다도 존재에 근거를 둔 평안이다. 아담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삶의 순간순간마다 다른 이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 그의 은사는 온전히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다. 아담의 일과를 행하도록 하기위해, 저녁 식사를 하도록 그를 돕고, 그를 잠자리로 데려가기 위해 집으로 달려가는 매일 저녁, 나는 내가 아담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와 함께 있는것임을 깨닫는다. 아담이 무언가를 원한다면, 그것은 내가 그와 함께 있는것이라고 믿는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나에게 매우 큰 기쁨이라는 사실이 놀랍다.(p51)

 

나의 과거의 삶 대부분은, 나의 가치는 나의 행동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근거해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그것을 확고히 했다. 학위와 상을 받았고, 출세도 했다. 그렇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는 약간의 성공, 약간의 명예, 약간의 권력밖에 없는 외로운 정상을 향한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나 나는 느리고 무거운 숨을 내쉬는 아담 곁에 앉아 있을 때, 그 여정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향성의 길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경쟁과 겨룸이 두드러지며, 강박 관념과 망상에 사로잡히게 되고, 의심, 질투, 원한, 복수의 순간들로 얼룩져 있다. 내가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일들은 사역이라고 불린다. ‘정의와 평화의 사역’, ‘용서와 화해의 사역’, ‘치유와 온전함의 사역이라 일컬어졌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말들과 실제 경험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그러한 경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평화를 위해 일하면서 전쟁을 원하는 사람들처럼 성공, 명성, 권력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 사이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이루고자 하는 평화가 전쟁처럼 이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인 우리가 서로의 가장 깊은 가치를 짓밟는다면, 어떠한 대안이 있겠는가?”(p51-52)

 

기도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며 그저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아담은 계속 그 사실을 나에게 가르쳐 주고있다.(p53)

 

2. 마음에 근거를 둔 평안

 

어쨌든 우리는 수세기 동안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은 지성이라고 믿어 왔다.(p53)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지성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 우리에게 특별한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하는 능력(p54)

 

내가 말하는 마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신뢰, 소망, 사랑이라는 그분의 선물을 가져오시는 우리 존재의 중심을 뜻한다.(p55)

 

2. 공동체를 형성해 내는 평안

 

내가 라르쉬에서의 삶을 통해 발견한 가장 깊은 통찰 중 하나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를 한 가족으로 함께 부른다는 사실과 가장 장애가 심한 이들이 우리의 함께함의 진정한 무게 중심이라는 사실이다.(p57)

 

아담은 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자랑할 수가 없다. 아담은 절대로 치료되지않을 것이다. 그의 계속되는 발작으로 보아서는 의학적으로는 상태가 점점 더 악화될 것만 같다. 내세울 만한 성공도 없고, 그를 돕는 모든 사람은 지극히 작은 일만 할 뿐이다. 그의 삶에서 내가 치지하는 부분은 아주 아주 적다. 어떤 이들은 그를 위해 요리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빨래를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안마를 해주고,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기도 하며, 그를 산책시키고, 수영을 시키고, 차에 태워 주기도 한다. 그의 혈압을 재고, 정기적으로 약을 먹도록 돌보는 사람도 있고, 그의 치아를 점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모든 도움에도 불고하고, 아담은 변하지 않고 때로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로 빠져 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그를 중심으로 평화의 공동체가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분명 그 빛을 바구니 속에 감추어 두고 싶어하지는 않는 공동체이다. 아담이 형성해 낸 평화의 공동체는 단지 아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p60-61)

 

아담은 내가 서서히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평안에 대한 무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것은 거센 경쟁, 어려운 사고, 개인적인 스타의 지위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서로 함께 거하며 조화롭게 함께 일하는 것에 근거를 둔 평안이다. 또 우리 모두가 안전하게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첫사랑에 대해 말하는 평안이다. 우리를 연약한 사람들과 교제하는 공동체로 불러내는 평안이다.(p61)

 

당신과 나는 돈을 나누어 주고, 시위 운동에 참가하고, 해외 사역 계획을 세우고 그 외 다른 모든 것을 위해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도 우리가 고대했던 평안은 여전히 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냉랭해지고, 비통해지며, 화가 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물러나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생존이라는, 좀더 쉬운 역할로 제한시키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단의 유혹이다.

나는 당신에게 이 어두운 세상을 헤치고 당신을 인도해 줄 작은 빛을 주는 온유한 마음을 가진 조용한 안내자를 소개해 주기 위해, 아담과 그의 평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담은 어떠한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가 받는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전적인 빈곤함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기력이 점점 더 쇠하고 더 쇠하고 더 쇠하여 간다. 미세한 감염,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 발작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혀를 삼키는 사고, 그리고 다른 많은 작은 사건들은, 그를 갑자기 우리 곁에서 데려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가 죽는다면, 아무도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가져다 주는 빛은 얼마나 찬란한가! 그러므로 나는 아담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말한다. 평안을 위한 사역을 포기하지 말라. 당신이 추구하는 평안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을 항상 기억하라. 엄청난 전쟁의 소음들, 불행에 대한 극적인 묘사, 인간의 잔인함에 대한 선정적인 표현들 때문에 혼란스러워하지 말라. 신문, 영화, 전쟁 소설은 당신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평안에 대한 진정한 바람을 일으켜 주지는 못한다. 그것들은 오히려 부끄러움, 죄책감, 무력감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런 느낌들은 평안의 사역을 시작하는 동기로는 가장 좋지 않은 것들이다.

평안의 왕자에게 눈을 고정시키라. 자신의 신적인 능력에 집착하지 않으신 분, 돌을 떡덩이로 변화시키는 것이나 높은 꼭대기에 뛰어내리는 것이나 큰 권세로 다스리는 것을 거절하신 그분, “가는한 사람, 온유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그분, 절름발이, 불구자, 소경을 어루만지신 그분, 용서와 격려의 말씀을 하시는 그분, 홀로 죽으시고, 거절당하시고, 멸시 당하신 그분에게 말이다. 가난한 자와 함께 가난하게 되시고, 약한 자와 함께 약한 자가 되시며, 거절당한 자들과 함께 거절당한 자가 되신 그분께 눈을 고정시키라. 그분 예수님이 모든 평안의 근원이시다.(p62-64)

 

눈에 보이는 평안은 없고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자멸하는 길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 이미 우리가 찾고 있는 평안을 주셨다고 믿는다면, 이 평안이 인류의 상한 토양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그 씨앗이 빨리 자라 우리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질병들을 치유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p66)

 

3. 결론

 

 

3장 기다림의 길

 

누가복음의 서두 부분은 나에게 하나님에 대한 기다림을 묵상할 수 있는 장면들을 제시한다. 반면에 누가복음 마지막 장들은 하나님의 기다림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조망을 제공해 준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기사에서 기다리는 사람 다섯 명을 만나게 된다. 사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시므온, 안나가 바로 그들이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기사는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 준다.(p70)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다림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자신과는 다를 수 있는 타인을 두려워하고, 내면의 감정이나 불편한 감정을 두려워하고, 또한 불투명한 미래를 두려워한다. 두려워하는 사람들인 우리에게는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나 힘들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우리에게 현재 있는 곳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강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아마도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수많은 파괴적인 행동이, 우리에게 어떤 위험이 닥치리라는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p71)

 

누가복음 초두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인상적이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기다리고 있다. 마리아도 기다리고 있다. 예수를 데리고 갔을 때 성전에 있었던 시므온과 안나도 기다리고 있다. 복음의 시작 장면 전체가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바로 처음부터 이 모든 사람은 이런저런 형태로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에게 말할 좋은 무언가가 있다는 말씀을 듣는다. 이는 사가랴, 엘리사벳, 마리아, 시므온, 안나가 그들에게 일어날 새롭고 좋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음을 가리킨다.(p72)

 

기다림이란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자세요, 신실하게 남아 있던 이스라엘의 작은 무리의 자세였다.(p73)

 

2. 기다림의 본질

 

기다림은 결코 무에서 유로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어떤 것에서 그 이상의 것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다.(p74)

 

기다림은 능동적이다. ... 그들은 자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들이 서 있는 그 땅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다. ... 우리가 씨앗이 당에 심겼으며 무언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확신 가운데 기다린다면, 이것은 우리의 기다리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능동적 기다림이란 그 순간까지 온전히 그 곳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있는 그 곳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그 곳에 있기를 원한다는 확신을 가진 채로 말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매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임을 믿으면서 그 순간까지 그 곳에 거하는 사람이다.(p75)

 

기다리는 사람은 인내하는 사람이다. ‘인내라는 말은, 우리에게 나타날 어떤 것이 숨겨져 있다는 믿음으로 그 상황 가운데 기꺼이 살며, 그 곳에 머무르고자 한다는 의미이다. 인내하는 삶이란 현재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며 그 곳에서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p76)

 

우리가 그러한 힘든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바라는 일들을 일어나게 해서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뭔가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의 소원들이 어떻게 우리의 두려움과 연관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두려움은 우리의 삶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을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수많은 기다림은 끝이 있는 기다림이다. 우리의 기다림은 미래를 통제하는 방식인 것이다.(p77)

 

그들의 소망이란 어떤 일이 성취될 것이라고 신뢰하는 것이지만, 그 성취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그들의 소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p77)

 

끝을 알 수 없지만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은, 삶을 향한 아주 혁신적인 자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소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통제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두려움의 근원으로부터 옮기셔서 사랑으로 우리를 빚으시며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안으시리라는 확신 가운데 사는 것이다.(p78)

 

3. 기다림의 훈련

 

우리는 어떻게 기다리는가?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기다리는 것은 홀로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p79)

 

가정과 공동체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된 일을 소리 높여 지지하고, 축하하고, 확인해 주는 곳이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확인해 주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 함께하는 것, 약속을 근거로 모이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표현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이 바로 기도가 의미하는 바이다. 기도란 약속 주변으로 함께 모이는 것이다.(p80)

 

함께 기다리는 것, 이미 시작된 일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 그것의 완성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결혼, 우정,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이다.(p81)

 

4.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기다림

 

5. 행동에서 수난으로

 

예수님의 삶의 첫 번째 부분은 행동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주도권을 갖고 계셨다. 그분은 말씀하셨으며, 선포하셨고, 치유하셨으며, 여행도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넘겨지시자마자, 어떤 일에서든 당하는 사람이 되셨다. 그분은 체포되었으며, 대제사장에게 이끌려 갔고, 빌로도 앞으로 끌려갔다. 또 가시관을 씌움받았으며,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분이 제어하지 않은 일들이 그분에게 행해졌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수난의 의미이다.(p85)

그분은 단순히 아버지가 하라고 보내신 일을 함으로써만이 아니라, 그분에게 행해지도록 허용하신 이들이 이루어지도록 하심으로써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셨다.(p86)

 

6.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새 생명

 

4장 삶과 죽음의 길

 

1. 예수님의 시각에서 본 죽음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장차 그 자체로 열매 맺게 될 것으로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에게는 엄청난 유익이 될 것으로 보셨다. 그분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더 위대한 어떤 것에 이르는 통로였다.(p97)

 

내 죽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풍성한 열매가 되게 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내 삶의 열매를 거두어들일 수 있도록 내 죽음이 그들에게 선물이 될 수 있을까?”(p98)

 

2. 예수님은 누구신가?

 

3. 당신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당신을 사랑하셨고, 당신이 죽은 후에도 당신을 사랑하실 것이다.(p100)

 

당신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임을 믿기 위해 그리고 그 다음으로 당신의 형제 자매들 역시 서로에게 속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임을 알도록 돕기 위해 이 세상에 보냄받았다. 당신은 화해의 백성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보냄받았다. 당신은 당신과 이웃들 사이에 놓은 장벽-지역적으로, 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을 허물기 위해, 도한 치유하기 위해 보냄받았다. 두려움에 기초해서 세워진 모든 구분, 분리 그리고 장벽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과 가슴에 하나됨이 있었다.(p101)

 

당신이 하나님의 마음에서 선택받았다면,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들도 선택받았음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p101)

 

4.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당신과 나에게 주어진 가장 근본적인 요구 중 하나는 우리 삶이 어딘가를 향한 일련의 움직임 혹인 이동임을 발견하라는 것이다.(p103)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사도들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으로 충만해서 예수님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고, 그들의 삶은 점점 밖을 향해, 앞을 향해 나아갔다. 그들은 담대하게 일어서서 주변 모든 나라에 복음을 선포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존재이며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새로운 자유를 발견했고, 박해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p105)

 

5. 열매 맺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관계는 하나의 신비다. 이미 죽었지만 사랑했던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는 것도 가능하다. 때로는 죽음이 친밀함을 더 깊게 한다.(p106)

 

열매가 항상 연약함의 결과는 사실은 흥미롭다. 두 사람이 친밀함 가운데서 서로에게 연약해질 때 아이가 잉태된다.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아주 정직하고 긍휼히 여길 때 그리고 서로의 실수와 약함에 대해 마음을 열고 연약해질 때 평화와 화해를 경험한다. 씨앗은 흙이 잘게 부서진 땅에 떨어져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p108)

 

우리의 약함과 나이 많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둘러싸서 우리를 돌보도록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에 대해 저항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우리를 보살펴 주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긍휼, 사랑, 섬김의 은사를 발휘할 기회를 준다.(p109)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7. 죽은 이를 기억하는 방법 배우기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관해 보여 주시기 위해 오셨으며, 자신의 죽음이 실패자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실 기회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눈을 고정하고 있다면, 또한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 본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짐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죽음 그 자체는 멋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끔찍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과 우리가 알고 사랑한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은 완전히 바뀔 수 있다.(p11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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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헨리 나우웬의 글은 멋지다.

아프지만 아름답고, 은은하지만 빛이 난다.

 

그가 말하는 것처럼 온갖 형태의 가난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과연 이 난무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알면 알수록 막막할 따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력함의 길을 선택했고, 그 대신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셨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몇 백년이고 기다렸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유독 그 문제에서 만큼은 내가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불행의 지름길인 것 같다. 인내로서 기다리고 하나님이 이루실 일들을 기대하며 살자.

 

F.B. 책공망

 

헨리 나우웬의 영성에의 길입니다.

 

네 장에 걸쳐 네 가지의 길(능력의 길, 평안의 길, 기다림의 길, 삶과 죽음의 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손에 벽돌을 가지고, 내 것인지 네 것인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동안, 작은 권력 싸움은 점점 큰 권력 싸움으로 확대될 것이고, 큰 권력 싸움은 미움, 폭력,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아래로부터 우리 삶을 본다면,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어디에서나 벽돌을 손에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히 벽돌을 내려놓고, 손을 비우며, 그것들을 진정한 피난처이시며 진정한 산성이 되시는 유일하신 그분께 올려 드린다면, 우리의 가난은 우리가 위로부터 오는 능력, 치유하는 능력, 우리 자신과 우리 세상에 진정한 복이 될 능력을 받도록 문을 열어 줄 것이다.(p42)

 

눈에 보이는 평안은 없고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자멸하는 길 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 이미 우리가 찾고 있는 평안을 주셨다고 믿는다면, 이 평안이 인류의 상한 토양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그 씨앗이 빨리 자라 우리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질병들을 치유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p66)

 

기다림은 능동적이다. ... 그들은 자기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그들이 서 있는 그 땅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다. ... 우리가 씨앗이 땅에 심겼으며 무언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확신 가운데 기다린다면, 이것은 우리의 기다리는 방식을 변화시킨다. 능동적 기다림이란 그 순간까지 온전히 그 곳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있는 그 곳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는 그 곳에 있기를 원한다는 확신을 가진 채로 말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매 순간이 바로 그 순간임을 믿으면서 그 순간까지 그 곳에 거하는 사람이다.(p75)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관해 보여 주시기 위해 오셨으며, 자신의 죽음이 실패자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실 기회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눈을 고정하고 있다면, 또한 복음서를 주의 깊게 읽어 본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짐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죽음 그 자체는 멋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끔찍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과 우리가 알고 사랑한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는 방식은 완전히 바뀔 수 있다.(p114-115)

 

각 장마다 핵심 내용을 담고 있는 글들이 아름다워서 그대로 적었습니다 ^^,,

혹시나_ 이제는 희망이 없고 소망이 없다고, 포기하고 그냥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면 읽어보고 힘내시길..^^,

 

2013.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