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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

예수와 비폭력 저항 Jesus and Noviolence A Third Way(2013.3.22.)

 



이 책은.. ‘평화의 얼굴을 읽다가 추천(인용)이 많이 되어 있어서 사게 되었다. 얇은 책. 하루만에 다 읽었네.

 

저자는 월터 윙크

 

성서학 교수이다.

2003년에 쓰여졌고, 2003년에 번역되었다.

 

 

1장 비폭력 저항이 성공하는가?

 

비폭력을 주장하기 꺼려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선 비폭력이라는 용어 자체가 부정적이다. 즉 비폭력이란 용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들리며, 무엇인가 선한 일을 위해 전력투구하기보다는, 무엇인가 악한 일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비폭력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것에 반대하는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비폭력을 권력 앞에서 복종하라는 명령으로 간주한다.(p23)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비폭력을 분명히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비폭력 저항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갈등이 없기만을 바란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 체제가 바뀌어지기를 원할 따름이지, 그 체제를 바꾸는 일에 개입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p24)

 

교회가 억압당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그 대가를 지불하면서 살아오지 않다가, 서로 적대적인 집단 사이에서 중재를 하겠다고 나서면, 그것은 교회가 갈등에서 벗어난 채 어느 편도 편들고 싶지 않다는 이상만을 더욱 심어 줄 따름이다.(p24)

 

억압의 상황에서 중립성이란 언제나 현상유지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가짜 평화를 통해서 갈등을 없애는 것은 기독교의 목표가 아니다. 정의가 기독교의 목표이며, 이를 위해서는 때로 갈등이 더욱 심해져야만 권력자들이 진정한 변화를 초래하도록 만들 수 있다.(p25)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폭력을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체제의 폭력과 그 폭력이 억압당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적으로 일으킬 수밖에 없도록 만든 대응 폭력을 똑같은 차원에 올려놓는 짓이다. 청년들이 던지는 돌맹이가 경찰이 쏘는 총알과 참으로 같은 정도의 폭력인가?(p25)

 

나의 구원을 확보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 응답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이다. “내가 어떻게 덕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일에 내가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이다.(p26)

 

2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의 참된 의미
불의를 끝장내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비폭력에 관한 가르침을 단순히 실천할 수 없는 이상주의라고 치부해버린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다른 쪽 뺨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수동적이며 현관의 발 닦개처럼 남들에게 무조건 짓밟힐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되어, 많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불의 앞에서 겁쟁이가 되고 불의를 방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p27)

 

악에 대한 일반적인 대응 방법은 다음 세 가지이다. (1) 수동적 태도, (2) 폭력적인 대행, 그리고 (3) 예수님이 분명히 가르친 제3의 길, 즉 전투적인 비폭력(militant nonviolence)이다.(p30)

 

왜 제임스 왕의 충실한 학자들이 안티스테나이“resist not”, 저항하지 말라로 번역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제임스 왕은 사람들이 그를 비롯한 군주들의 부당한 정책들에 맞설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단지 두 가지 선택, 즉 도피하거나 싸우는 길만이 있다고 믿도록 만들어야만 했다. 우리는 저항하지 않거나, 저항하거나, 둘 중의 하나 밖에는 선택할 수 없다는 식이다. 그리고 제임스 왕의 번역자들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군주들의 절대권력을 인정하신 것처럼 보인다. 즉 굴복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 번역자들 역시 온순하게 이런 번역을 따르고 있다.(p31)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예수님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간단한 사례를 들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왜 오른쪽 뺨인가? ...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뺨을 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른손 손등으로 치는 방법이다. 이것은 주먹다짐이 아니라, 창피를 주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즉 그 의도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치욕을 주기 위함이며, 꼬락서니를 제대로 알도록 만들기 위함이다.(p32)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하급자들을 훈계하는 통상적인 방법이었다. 주인은 종들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녀를, 남자는 여자를, 로마인은 유대인들을 손등으로 때렸다. 이것들은 불평등한 관계들로서, 각각의 경우 보복을 한다는 것은 자살과 다를 바 없었다.(p33)

 

예수님의 청중들이 누구였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경우에서 예수님의 청중들은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고소하거나, 강제노동을 부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피해자들이었다. 그의 청중들 가운데는 이처럼 신분, 종족, 성별, 나이, 지위 등의 위계적 질서와 로마제국의 점령으로 인해, 그들이 당하는 치욕을 견딜 수밖에 없으며, 비인간적 대우에 대한 분노를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처럼 이미 치욕을 당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왜 왼뺨을 돌려대라고 가르치시는가? 왜냐하면 왼뺨을 돌려대는 행동은 그 압제자에게서 모욕할 수 있는 힘을 빼앗아버리기 때문이다. 왼뺨을 돌려대는 사람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좋다. (오른손 주먹으로) 다시 때려 봐라. 네가 처음 때린 것은 네가 의도했던 효과를 얻지 못했다. 나는 네가 나를 모욕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나는 너와 똑같은 인간이다. 너의 지위가 높다고 해서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너는 나의 품위를 떨어뜨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대응하면 그 때린 사람은 몹시 난처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순전히 논리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는 이제 더 이상 손등으로 칠 수가 없다. 이미 아무런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왼손으로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가 (오른손) 주먹으로 친다면 그는 스스로 상대방을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이처럼 손등으로 치는 것의 요점은 신분 계급 제도를 강화하고 불평등을 제도화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왼뺨을 돌려댄 사람을) 매질하도록 명령한다 해도, 그의 주장은 이제 취소할 수 없게 되었다. 즉 그 억압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이 하급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간주할 수 밖에 없도록 된 것이다. 이 강자는 약자를 비인간화 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긴 것이다. 이런 대응 방법은 수동성과 비겁함을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에게 도전하는 행동이다.(p33-34)

 

누가 너를 고소하여 네 겉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 즉 극빈자들은 겉옷 이외에는 담보물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유대 율법은 해질 무렵에 그 담보물을 되돌려줄 것을 엄격하게 요구하였는데, 그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덮고 잘 수 있는 것이 겉옷뿐이었기 때문이다. ... 부채는 1세기 팔레스타인의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예수님의 비유들에는 채무자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우해 애쓰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무능한 사람들에게 덮치는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이것은 로마제국 정책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즉 로마 황제들은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부자들로부터 무자비하게 세금을 걷었다. 그러자 부자들은 자기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비유동성 투자방법을 물색했다. 토지가 최고였지만 문제가 있었다. 즉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토지를 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아 자손들에게 상속하는 방식이었다. 적어도 팔레스타인네서는 토지를 파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돈과 곡식 등의 채무에 대해) 엄청난 이자를 매겨, 토지 소유자를 더욱 큰 부채 속으로 몰아넣어, 마침내는 그들이 토지를 팔 수밖에 없도록 만들 수 있었다.(p35-36)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들에게 속옷까지 넘겨주라고 가르치시는가? 속옷까지 벗어서 넘겨주게 되면, 그들은 완전히 벌거벗은 채 법정을 나서게 된다는 말이다. 당신이 그 채무자의 입장이 되어, 이 말씀대로 했을 경우 벌어질 우스운 꼴을 상상해보라. 그 채권자는 한 손에 당신의 겉옷을 들고, 다른 손에는 엉겁결에 당신의 속옷을 받아든 채, 당황해서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서 있을 것이다. 당신은 갑자기 그 공을 상대방에게 넘긴 것이다. 당신은 그 재판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었다. 법은 완전히 채권자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당신은 모욕당하는 것은 거부했으며, 동시에 그처럼 높은 이자를 받는 체제에 대해 정식으로 맞서서 항의를 표시했다. 당신은 결국 이렇게 말한 셈이다. “네가 내 옷을 갖고 싶다고? 좋다.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져가라. 너는 이제 내 몸 이외에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가져갔다. 다음에 네가 가져갈 것이 내 몸이냐?”

유대교에서는 벌거벗는 것이 금기였으며, 그 수치는 벌거벗은 사람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그를 벌거벗게 만든 사람, 혹은 그 벌거벗은 몸을 본 사람에게 돌아갔다.(p37)

 

권세는 문자적으로 뽐내고 있다. 그 권세를 무력하게 만드는데 재치 있는 풍자보다 빠른 것은 없다. 그들의 힘에 놀라기를 거부함으로써 약자들은 비록 구조적 변화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대담하게 주도권(initiative)을 잡을 수 있다.(p38)

 

그는 현행법을 받아들이고, 그 부조리가 드러날 때까지 법대로 하자고 밀고 나가, 그 현행법들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부자들에게 드러낸다. 그는 벌거벗을 채, 사람들이 보는 앞에 걸어나감으로써, 채권자와 그 경제구조 전체를 완전히 적나라하게 벌거벗긴다.(p39)

 

누가 너더러 억지로 5리를 가지고 하거든

 

주요 도로 상에는 정기적으로 거리 표지가 놓여 있었다. 따라서 군인은 민간인에게 자기의 배낭(30~80kg)을 꼭 5리만 지고 가게 할 수 있었다. 그 이상을 지고 가게 할 경우에는 군법에 따라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이런 식으로 로마제국은 점령지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하지 않도록 했으며, 동시에 군인들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강제 노력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심지어 약속의 땅에서조차 예속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쓰라린 현실이었다.(p40)

 

거리 표지에 따라 5리를 간 다음에 그 군인이 할 수 없이 자기의 배낭을 돌려 받으려 할 때, 당신이 아니오. 내가 5리를 더 지고 가겠소라고 말하면 그 군인이 얼마나 놀라게 될 것인지를 상상해 보라. 왜 그러느냐?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이냐? 그는 보통 당신의 동족에게 강압적으로 자기 배낭을 지고 가도록 시킬 수 밖에 없었는데, 지금 당신은 그 일을 기꺼이 하면서 또한 멈추지 않겠다고 하니 어찌된 영문인가! 지금 누구 약을 올리겠다는 것인가? 당신은 그의 체력을 얕잡아보고 그러는가? 아니면 좀더 친절을 베풀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당신이 지고 갈 거리보다 더욱 멀리 지고 감으로써, 그 군인을 혼내주려고 그러는가? 당신은 그 군인을 고소할 작정인가? 말썽을 일으키려는 수작인가?

(이렇게 함으로써) 비굴한 강제징발의 상황에서 당신은 또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선택할 능력을 되돌려 받은 것이다. (p41-42)

 

비폭력적 행동이 비록 즉각적으로 압제자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폭력적 행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미친다. 마친 루터 킹 목사가 증거했듯이, 비폭력적 행동은 그들에게 새로운 자기 존경심을 갖게 하며, 자신들이 갖고 있는 줄 몰랐던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권고가 힘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찮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한평생 주인들에게 굽실거리며 등을 긁어주던 사람들, 또한 자신들의 역할이 열등하다고 내면적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작은 발걸음이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다.(p43)

 

이 세 가지 사례들은 악한 자에게 맞서서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선언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것은 수만 년 동안 (사회적) 환경을 통해 생물학적 위협에 대해 무분별하고 맹목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우리들 몸 속에 배어 있는 두 가지 선택, 즉 도피냐, 싸움이냐 대신에, 예수님은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이 새로운 길은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역사적인 돌연변이, 즉 적자생존의 원칙에 대한 반란으로 기록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악을 악으로 맞서서 대항하지 않는 길이 열린 것이다.(p44)

 

예수님의 제3의 길

도덕적 주도권을 장악하라

폭력에 대한 창조적 대안을 찾아라.

인간으로서 당신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을 주장하라

무력에 대해 조롱이나 해학으로 맞서라

치욕의 순환고리를 끊어라.

복종을 거부하고 열등한 위치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체제의 불의를 폭로하라

힘의 역학을 통제하라

압제자에게 수치를 안겨 그가 회개하도록 만들라

한 걸음도 물러나지 말라

권세로 하여금 준비되지 않은 선택을 하도록 만들라

당신 자신의 힘을 인정하라

보복하기보다는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라

압제자로 하여금 당신을 새롭게 보도록 유도하라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소용이 없도록 상황을 만들라

불법을 위반한 것에 대한 처벌을 기꺼이 감수하라

옛 질서와 그 규칙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라

 

우리가 먼저 폭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도 의식적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작정하지 않는 한, 창조적인 비폭력은 진정한 의미의 도덕적 대응 방법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비폭력은, 나의 경우에서 분명히 그랬던 것처럼, 비겁함을 가리기 위한 핑계일 것이다.(p52)

 

언제나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유럽과 미국의 평화운동가들의 태도인데, 그들은 비폭력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다. 비폭력은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다. 비폭력은 생활방식이다. 최종적인 목적인 인간성이다. 생명이다.(p53)

 

3장 비폭력 행동 원리

 

이 장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솔 알린스키의 비폭력 공동체 행동원리들을 나란히 비교한다.

힘은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당신의 적들도 당신이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의 대중들의 경험을 결코 벗어나지 말라

가능한 한, 적이 경험한 것을 벗어나라

당신의 적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규칙에 따라 살도록 만드라

조롱은 당신이 지닌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좋은 전술은 당신의 대중이 즐기는 전술이다

너무 오래 끄는 전술은 방해물이 된다.

계속 압박하라

위협 자체가 보통 그 위협의 실체보다 더욱 겁나게 만든다.

전술의 중요 전제는 상대방에게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는 작전을 개발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부정적인 측면을 충분히 세게 또한 깊이 누르면 그 옆구리가 터지게 된다

성공적인 공격의 댓가는 건설적인 대안이다

표적을 선택하여, 꼼짝 못하게 만들고, 의인화하여, 양쪽으로 분열시켜라.

 

예수님의 비폭력을 단순히 우리의 원수를 이기기 위한 테크닉으로서 주장한 것이 아니라, 원수조차도 정의로운 사람이 될 가능성을 끝까지 열어놓은 채 원수에 대항하는 정의로운 수단으로서 주장한 것임을 분명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즉 양편 모두가 승리해야만 한다(p61)

 

4장 비폭력 저항의 효과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로서, 현실적인 권세의 폭력, 즉 사상자가 되는 것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사상자의 수는 폭력적 혁명으로 인한 사상자 수에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p65)

 

권세가 사람들로 하여금 비폭력은 성공하지 못한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권세에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p67)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모든 정부의 거의 2/3가 또 다른 쿠데타로 축출되는데,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 민간정부에 권력을 이양하는 경우는 고작해야 1/20이다.(p67)

 

나는 교회가 정당한 전쟁”(Just War) 이론을 구실로 내세워 대대적인 폭력을 정당화한다고 해서 과거에 교회가 뒷짐지고 방관했던 태도를 속죄할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어떤 전쟁도 오늘날에는 정당한 것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 엄청난 사상자와 잔학성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p68)

 

5장 원수 사랑과 십자가의 영성

 

원수에 대한 사랑

예수님의 제 3의 길은 원수에 대한 사랑이 그 핵심에 놓여 있다.(p71)

 

우리 시대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참다운 기독교 신앙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 원수에 대한 사랑은 그 원수 역시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하는 것이다.(p72)

 

나는 오늘날 궁극적인 종교적 질문은 더 이상 종교개혁자들의 질문, 내가 어떻게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고 말하겠다. 그 대신에 내가 어떻게 나의 원수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이다. (p73)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원수들로부터 구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만이 우리를 그 둘로부터 구원하는 길을 열어준다.(p73)

 

우리가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교활한 오만함 때문인데, 이런 때 우리는 마치 우리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이미 벗어났다고 생각하거나, 인류 역사에서 우리들만큼 극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일찍이 없었다고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당면해야 할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p75)

 

우리는 우리의 압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이 변화되도록 해야만 합니다.(p79)

 

그분의 가르침은 최소한의 예의를 전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속에 신적인 특질이 들어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민족 전체가 그런 경우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누구나 그 과거와는 상관 없이 변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다.(p80)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 같은 용서를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할 수 있고, 구원하고 변화시킬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억압자들을 하나님의 통치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는 것으로서, 그들의 현재의 모습만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변화된 미래의 모습도 보는 것이다.(p81)

 

2. 새로운 질서에 맞서는 수단들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는 항상 대화를 열어놓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항상 상대방을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생겨난 망상을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p84)

 

폭력은 충분히 급진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폭력은 일반적으로 통치자들만 바꾸지 그 통치 자체는 바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 즉 모든 형태의 지배체제와 그 체제를 영속화시키는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신화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혁명이란 무슨 소용이 있는가?(p84-85)

 

3. 법의 지배에 대한 존중

 

억압적인 법에 대항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법의 지배를 존중하는 태도를 간직한다. 폭력적 혁명가들은 그들 자신이 확립하고 싶어하는 질서 자체를 훼손시키는 모순에 빠진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불법이라고 선언할 바로 그런 수단들을 동원해서 권력을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p85)

 

우리는 공정한 법 정신과 조항에 의해 유지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우해 합법성을 기초로 하여 시작해야만 한다.(p89)

 

4. 폭력을 뿌리뽑는 일

 

예수님의 제3의 길은 우리 자신의 영혼 속의 폭력을 뿌리 뽑을 것을 요구한다. 무엇에게 저항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에 대한 대항세력(counter-force)으로 맞서야만 한다.(p89)

 

(권세의) 가면을 벗기려 할 때 우리가 가장 쉽게 받는 유혹은 우리가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는 의식(self-righteousness)이다.(p89)

 

5. 법이 아니라 선물

 

예수님의 제3의 길은 법이 아니라 선물이다. 그 길은 우리가 반드시 가야하는 필연적인 길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가 그 길을 가도록 요구된 길이 아니라,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능력을 얻은 길이다. “당신은 그 길을 가야만 합니다가 아니라,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이다.(p93)

 

폭력은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라도 피해야만 하는 절대악이 아니다. 폭력은 심지어 근본 문제가 아니라, 단지 불의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증상일 뿐이다. 그리고 평화는 최고의 선이 아니다. 평화는 오히려 정의로운 사회질서의 결과물이다.(p94)

 

6. 십자가의 길

 

십자가는 롭 로버트슨이 지적한 것처럼, 이런 악들을 다룬 그분의 방식이기도하다. 예수님이 그처럼 십자가에서 처형된 것은 그분이 실패한 반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불의와 폭력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고난을 당하기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p97)

 

십자가는 죽음이 우리가 겪을 최대의 악이 아니라는 뜻이다. 십자가는 내가 내 행동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은 채 신실하게 행동할 만큼 자유롭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난으로부터 새로운 현실을 위한 고귀한 씨앗을 싹트게 하실 수 있다.(p98)

 

6장 비폭력 저항 훈련의 필요성

 

밀폐된 사회에서의 자유라는 전염병이라 부른 것을 키워나가는데, 이것은 공식적인 허락을 무시하고 마치새로운 사회가 가까이 도래한 것처럼 살아감으로써 가능하다.(p107-108)

 

 

 

폭력. 내 일상을 둘러싸고 있는 폭력엔 어떤 것이 있을까? 억압적인 것, 강압적인 것들을 폭력이라 할 수 있을까? 책에서 이야기하는 예시들을 보면 당연히 폭력이라고 이해가 된다. 가난한 자를 상대로 돈을 받아내려는 것, 법에 의거해 약자들을 핍박하는 것,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 당연히 폭력으로 보인다. 그런데 희안하게도 내 삶으로 돌아오면 폭력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내가 폭력을 받고 있는건지, 내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설마 폭력이 없는건가?

 

병사 전역전 교육 시간 중에 이 책을 읽었다. 나의 역할은 교육장에 있으면서 이상이 있을 때 보고 하고 인원체크하고 전파사항 있으면 전파하고 이정도? 그런데 병사들이 많이 안왔다. 원래 인원의 반틈 정도만 왔다. 이 책을 읽는 와중에 고민에 빠졌다. 소속 대대에 전화를 하는게, 영외자에게 전화를 해서 오도록 안내해 달라는게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전역을 일주일 앞둔 이들이 서로 얼굴 붉힐 일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고민을 해봤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건 아니지만, 이 교육 시간들이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와 나의 상황(중간에 끼인?^^;), 나의 생각(전역 앞둔 사람들을 배려해주고 싶은 마음)을 전달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말할 기회가 없어 유야무야되어 버렸지만.

밀폐된 사회에서의 자유라는 전염병이라 부른 것을 키워나가는데, 이것은 공식적인 허락을 무시하고 마치새로운 사회가 가까이 도래한 것처럼 살아감으로써 가능하다.(p107-108)

자신감. 당당하게 걷기_가 필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한 번 해 보는 것. 근데 이런 마인드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면 오래 못 살 거 같다. .. 피곤해_

 

이 책에서 말하는 대안적인 방법에 대해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 봤는데 잘 안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런 모델이 많이 부족해서 그런가보다. 이런 문화를 접해본 적이 없으니. 사회문제에 대해, 사회 제도에 대해 항의할 때도 이런 예수님이 알려주신 방식대로 하면 좋을텐데. 아니 그렇게 하는게 현명한 방법인 것 같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그사람을 이기거나, 그 사람을 굴복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까지도 변화시키는 것이 목적.

 

이 평화주의의 길이, 예수님의 방법이 북한 문제에도, 통일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겠지. 그런데 이런 비폭력 저항이 국가의 차원에서는 어떻게 적용되어야 할까? 조직이, 제도가 어떻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을 하지?!! 할 수 있을 거 같긴한데.

 

F.B 책공망.

 

예수와 비폭력 저항

마태복음 538-42절 말씀을 토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비폭력 저항이라는 방식을 알려 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문제나 권위, 권력에 대해 자기의 소리를 낼 때, 저항하거나 순응해서 따라가는 두 가지 방법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저자는 예수님이 또 다른 길을 알려주셨다고 합니다(3의 길).

도덕적 주도권을 장악하라

폭력에 대한 창조적 대안을 찾아라.

인간으로서 당신 자신의 인격과 존엄성을 주장하라

무력에 대해 조롱이나 해학으로 맞서라

치욕의 순환고리를 끊어라.

복종을 거부하고 열등한 위치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체제의 불의를 폭로하라

힘의 역학을 통제하라

압제자에게 수치를 안겨 그가 회개하도록 만들라

한 걸음도 물러나지 말라

권세로 하여금 준비되지 않은 선택을 하도록 만들라

당신 자신의 힘을 인정하라

보복하기보다는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라

압제자로 하여금 당신을 새롭게 보도록 유도하라

무력을 사용하는 것이 소용이 없도록 상황을 만들라

불법을 위반한 것에 대한 처벌을 기꺼이 감수하라

옛 질서와 그 규칙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라

 

이런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요_ 자세한건 책 참고하시길..^^;

얇은 책이고 쉽게 쓰여진 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습니다_

 

책을 읽으면서,

저의 주위에는 어떤 폭력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잘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리고 사회문제에 대해 저항하고, 항의하는 방법도 조금 더 지혜롭게 하면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구체적인 방안은...^^;;;;..

북한문제와 통일 문제에도 이 비폭력 투쟁이 적용될 수 있을건데, 어떻게 적용되면 좋을지..도 잘 떠오르진 않았고.^^;;;

 

짧은 책인데 생각하고, 고민하고, 찾아내야 할 질문 거리들이 많네요 ㅠㅠ

아무튼.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합니다 . . ^^,

2013.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