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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

당신이라면 What would you do (2013.4.5.~11.)


이 책은 1992년에 쓰여진 책이다

번역된 건 2011.

 

저자는 존 하워드 요더(1927~1997)

 

원제는.

 

If a violent person threatened to harm a loved one...

WHAT WOULD YOU DO?

 

1부에서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평화주의자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하는가에 대해 존 요더가 이야기한다.

 

2부에서는 이와 같은 질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했는지를 살펴본다.

 

3부에서는 실제로 이런 상황에 처했던 경우를 보여주며 그 때 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하거나 순응하지 않고 제3의 방법을 선택했던 실화를 들려준다.

 

 

 

 

1부 진지하게 문제 고려하기

 

가령 한 범죄자가 총을 꺼내서 당신의 아내(또는 딸, 여동생, 어머니, 그가 마음먹은 누구든)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p31)

 

이 책의 주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 평화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어떻게 대답할지에 대해 찾아간다.

 

 

문제 이면의 전제들

 

결정론

일반적으로 이 질문은 방어하는 쪽에서 질문하는 사람 자신만이 어떤 결정을 하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제기된 질문은 잠재적인 희생자편의 어떤 결정권도 허용하지 않는다.(p32)

 

2. 통제

자신이 공격자를 막으려고 애쓴다면 막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p34)

 

3. 지식과 정보

당사자들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충분하고도 신빙성 있는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4. 개인주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나의 아내, 어머니 또는 딸) 역시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을 지는 존재이고, 따라서 내 결정 과정 가운데 고려되어야 한다.(p37)

 

5. 자기의()

이런 생각 뒤에는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 내 생각에 따라서 최선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자만하고 또한 자신이 판사, 배심원, 그리고 집행관의 역할을 할 도덕적 자격을 갖추었다고 지레 생각한다.(p37)

 

6. 다른 가능성들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서는 범죄자가 필요한 것보다 더 가진 사람들의 집에서 단지 자신의 굶주린 어린이들을 위해서 빵을 찾아다닌 장발장일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는 조금도 없다.(p38)

 

평화의 얼굴에서 보다 쉽게 이 문제를 설명한다. (평화의 얼굴 3)

 

문제에 대한 감정적 왜곡

 

(이 문제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간의 유대관계와 얽혀 결국 문제는 이성적인 동시에 감정적 차원으로 확대된다. ... 방어자 자신의 정체성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 야만적인 위협에 자신도 야만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암묵적으로 있는 것이다.(p39)

 

전쟁은 다르다

 

개별적 공격의 경우, 방어자의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공격을 한 사람이다. 옆에 있는 무고한 사람들을 해칠 위험은 비교적 적다. 더군다나 공격자의 집에까지 가서 그의 가족을 파괴할 일은 없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일이 현대 전쟁에서는 일어난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 대부분은 공격자나 폭행자(핵 공격에서는 이 구분이 분명하지 않을 수 있지만)가 아니다. 실제로 공격을 하는 전투기 조종사들이나 미사일 조작자들은 정작 공격을 결정한 고위 정치인들이나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화염 속에 있게 되는 대부분의 민간인들보다 해를 입을 가능성이 훨씬 적다.(p41-42)

 

전쟁 상황에서는 무엇이 공격을 유발하였는지, 어느 쪽이 무고한지에 대해 분명하게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방어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상위법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 나라의 대응이 합법적인 선을 넘은 과잉방어였는지 결정할 수 있는 통상적인 판례가 없는 것이다.(p43)

 

집안에 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 가족관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국가경제를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통신(通信)-감시(監視)의 복합체로 전환하여 가동하면 국민의 구체적인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자유’(다시 말해, 국가의 주권)를 지킨다고 하는 바로 그 노력이 대체로 진정한 자유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p44)

 

개인적 위협과 전쟁 사이에는 또 다른 차이가 있다. 만일 내가 나의 가족을 위협하는 사람을 죽인다 해도 그것이 또 다른 범죄로 확대될 가능성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실질적으로 악순환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제까지의 큰 전쟁들은 모두 지속될수록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파괴를 발생시켰다.(p45)

 

톨스토이는 그가 75년을 살면서 결코 어디에서도 한 아이를 그의 눈앞에서 살해하거나 폭행하는 완벽한 가설 속의 살인자를 만난 적이 없지만, 전쟁에서는 수백만이 용인된 살인을 저지른다고 대답하였다.(p46)

 

가능한 선택들

비극

공격자의 계획이 성공하는 경우(p47)

 

2. 순교

어떤 고통은 그것이 나쁜 것으로 인식됨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 안에서 그 존재 이유를 갖는다. 어떻든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죽을 것이다. 따라서 마치 무고한 죽음을 모든 상황에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절대로 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하면서 이 문제를 논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p48)

 

. 순교자로서 희생자

이러한 살해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이다.(p49)

 

. 순교자로서의 방어자

내가 공격자를 죽이지 않고, 공격자가 원래 의도했던 희생자 대신에 나에게 공격을 집중하도록 개입하는 것이다. ... 희생자가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자신의 목숨을 무릅쓰는 이 행위를 만일 당신이라면의 질문에 대한 첫번째 논리적 대안으로 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결국,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신자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과 연관되어 이 세상 악에 대한 승리의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p49)

 

3. 또 다른 출구

 

. 자연적인 출구

나의 어머니나 딸 또는 아내를 공격하려는 사람을 볼 때, 아마도 나는 공격자를 감정적으로 무장해제 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제스처나 설득력 있는 도덕성을 보여주거나, 도는 내가 전혀 해를 끼칠 수 없는 무방비 상태를 증명하는 등 그를 심리적으로 무장해체 시킬만한 것들이야 할 것이다. 그를 죽이지 않을 정도의 힘이나 꾀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원한다면 돈을 건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중간에 끼어들어 희생자를 도망가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p50)

 

. 섭리에 의한 출구

하나님(혹은 다른 신)이 예측 불가능한 방법으로 구해주는 것.

 

4. 시도된 살인

 

. 성공하는 경우

방어자가 공격자를 살인하는 경우

 

. 성공하지 못한 경우

희생자가 살해될 뿐 아니라 방어자인 나도 살해될 것이다.(p53)

 

또 다른 해결책에 대한 다른 시각

 

폭력에 의존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가정과 함께 하나님의 뜻밖의 구원에 대한 기대가 기독교 선교사들의 전기에서 특히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놀랍다. 심지어 시대적으로 평화주의나 무저항에 대한 체계화된 이론이나 전통적 가르침이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한 반응들은 세계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종교적 인식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폭력이라는 엄격한 원리에 의한 강제적인 결과가 아니다.(p56-57)

 

신적 섭리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는 단순히 피할 길을 때때로 마련해 준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불어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의미이다.(p58)

 

성공적 살인을 택하는 것은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견되지 않는 창조적 대안들과 하나님의 개입이 일어날 수 없다는 가정에서 나온다.(p58)

 

부활에 대한 기독교 신앙은 부활이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건일 뿐 아니라 인간의 경험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본보기임을 보여준다. 부활 신앙은 우리가 보기에 타개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드러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일하실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기에 어떻게 일하실지에 대해 내가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 파괴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하나님께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p59)

 

파괴적 공격의 위협 때문에 방어적 폭력 이외에는 어떤 해결책도 없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덜 폭력적인 결과를 낳을 가능성은 늘(최소한 논리적으로든 잠재적으로든 간에) 존재한다.(p60)

 

더 구체적인 기독교적 차원들

 

원수를 향한 기독교인의 사랑은 숭고한 휴머니즘의 한계를 넘어선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기독교인의 답변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대하신 것처럼 또는 내가 대접 받기를 바라는 대로 공격자를 대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p63)

 

2.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결심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유대감을 약화시킨다.

복음서에 기록된 다양한 진술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집과 방 뿐 아니라 부모와 처자식까지도 버리라고 요구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적어도 우리에게 도덕적 책임 또는 남자다움의 첫째가는 기준이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도 기꺼이 할 수 있다는 가정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한다는 것이다.(p64)

 

3. 죽은 자의 부활, 지옥과 천국, 그리고 영생에 대한 기독교의 이해를 바탕으로 기독교인은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지침을 얻을 수 있다.

지옥, 즉 살아있을 동안 자기중심적이고 피상적이었던 삶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세계 그래서 그 무의미했던 삶이 연장되거나 재확인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생각해보라. 이러한 신앙의 전제하에서 질문자에게 공격자를 죽이는 것은 그들을 그러한 어두운 운명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것은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기회도 그에게서 빼앗는 것이 될 것이다. 반대로 그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의 창조자를 곧 만나게 될”(종교적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기독교의 견해이다)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공격자를 죽이는 것은 궁극적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을 막아서 이 세상에서 내가 구원해야 하는 어떤 이를 곧바로 지옥으로 인도하는 것이 될 것이다.

 

4.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삶을 단지 일관된 윤리적 입장이나 어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일련의 규칙으로가 아니라 나누고 싶은 은혜로운 특권으로 본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나쁜 짓을 피할 수 있는가?” 뿐 아니라 어떻게 내 이웃의 삶에 화해/조정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삶의 지표로 삼는다.(p65)

 

5. 기독교인이 순교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대하신 방식에 동참하는 것이다.

신약성서와 그 이후의 기독교 증언은 적어도 순교가 기독교인들이 때로는 따를 필요가 있는, 어떤 의미에서 정상적인 길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p66)

 

6. 기독교 신앙은 자기중심적 결단을 불순종의 도구로 삼아 창조자로부터의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고한다.

 

결국, 나는 어떤 정신병자나 범죄자가 나의 아내나 아이들, 여동생이나 어머니를 공격하려 한다면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아들이 위협을 당했을 때 하셨던 것으로 인해, 또는 믿음으로 나의 아버지 된 아브라함이 부활을 믿었기에 순종으로 자신의 아들을 포기하는 희생을 했던 것으로 인해 내가 해야 할 바를 알고 있다. (p67)

 

2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기

 

기독교인들이 할 수 없는 어떤 일들 - 레오 톨스토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들이 있는 것처럼 도덕적으로도 불가능한 행동들이 있다. 사람이 산을 들어 올릴 수 없고 선량한 사람이 아기를 죽일 수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으로서 삶을 사는 사람은 폭력적 행동에 동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불가능한 행동을 함으로 인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에 대해 상상해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p71)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불안 때문에 법이라는 강력한 무기에 의해 보호된 삶을 지속하면서 결국, 그들의 지적 능력으로 동료에게 폭력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넘쳐나는 악을 해명하는 대신에, 그 오류를 방어하는데 사용하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p74)

 

기독교의 가르침은 한 인간이 그에게 생명을 주신 분의 뜻을 행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뿐, 이러저러한 인간의 행동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고 오히려 기독교가 지양하는 잘못된 예에 불과하다. 우리 중 누구도 상상 속의 아이를 해하려 하는 상상 속의 범인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역사의 연대기와 우리 시대를 채우는 온갖 끔찍한 사건들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로부터 일어났고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 사람들은 인간의 행동이 가져오는 불확실한 미래의 결과들을 생각 속에서 미리 볼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p75)

 

너무 늦었는가?- S.H 부스-클리본 S.G. Booth-Clibborn

 

질문: 만일 기독교인들에게 전쟁이 잘못된 것이라면 왜 구약성서에서 하나님 자신은 이스라엘을 적에 대항해 전투와 승리로 이끄셨습니까?

 

답변: 유대인들은 율법과 심판의 시대에 살았습니다. 반면 우리는 은혜와 자비의 경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 백성이 놀랄만큼 지독한 무지함에 싸여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p78)

 

 

이스라엘

교회

부르심의 차이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빌립보서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행동의 차이

신명기 7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마태복음 538~44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배의 차이

레위기 17:8,9

너는 또 그들에게 이르라 이스라엘 집사람이나 혹은 그들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 번제나 제물을 드리되 회막문으로 가져다가 여호와께도 드리지 아니하면 그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마태복음 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질문: 이론상으로는 모두 좋지만 인간의 잔악함이 당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해하려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저 옆에 서서 수수방관 하실 겁니까?

 

답변: 우선 제시된 예는 상황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살인을 하는 개인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가족을 해하려 하지만, 전쟁상황에서는 가련하고 무죄한 사람들이 가축 떼처럼 쫓겨 다니며 그들의 의사와 반대로 신을 믿지 않는 정부에 의해서 서로 살육하도록 내몰린다는 것입니다.

...

두 번째로, 막연한 가정을 사실적 근거로 대체한다면 수없이 많은 기독교 가정들이 어떠한 범죄자들에 의해서도 침범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그들의 믿음에 따라서 보호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찰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혹시나 실제 폭력이 발생한다 해도 마태복음 5장과 로마서 12장은 여전한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여전히 순종해야 합니다.(p80)

 

왜 조금 더 생각해보지 않는가? - 데일 브라운 Dale Brown

 

가설적 질문으로는 가설적 대답밖에 기대할 수 없다. 가설적 질문이라는 것은 결과를 조작할 수 있도록 제기되기 때문이다. 가설적인 대안들은 게임의 두 당사자 양 방향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p101)

 

가설적 질문들을 제기하면서, 많은 사람이 한 개인의 행동을 가지고 그의 전쟁에 대한 견해로 직접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만일 어떤 이가 자신의 아내를 방어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가 반드시 방어적 전쟁을 신봉한다고 가정한다. 한 평화주의자가 자신의 아내를 방어한다고 해서 그것이 즉각적으로 공격자의 아내와 친척들을 향해 폭탄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평화주의자들은 경찰의 공권력 행사를 옹호하지만, 여전히 모든 전쟁에는 반대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사회가 보호해야 할 시민을 위협하는 범죄자들에게만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과 현대 전쟁에서 드러나는 대로 범죄자들과 함께 무고한 사람들도 무차별적으로 죽이는 전쟁을 구분하고 있다.(p105)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데일 아우커만 Dale Aukerman

 

나의 소원대로 행하기를 바라는 것과 실제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소망은 나의 비폭력적 대응을 더 쉽게 유도할 수 있다.(p113)

 

그리스도가 나를 돕고 계시기 때문에 나는 그 공격자를 사랑하고, 축복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선의를 베풀어야만 한다. 이러한 순간에 이것을 행할 수 있는 창조적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결코 수동저긴 태도가 아니다. 나는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두려움에 떨어 꼼짝하지 않고 그냥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

우리가 예수를 주로 여긴다면, 우리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총을 소지하지 않을 것이다.(p114)

 

 

3부 과연 효과가 있을까?

 

우리는 효과적인 비폭력적 방어를 하기 위해서 (1) 근본적으로 적으로서 우리와 마주하는 사람의 인간성을 존경해야 하고 (2) 대화의 문을 여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p170)

 

내가 나 자신을 무장해제하는 과정에 있다면 나는 타인의 인격을 무장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개인적 공격을 마주한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두려움과 상처받을 수 있다는 감정의 한 가운데서, 파괴하고자 하는 의지와는 다른 그 무엇이 수면에 올라오고 나의 행동은 그것을 반영하게 된다. 나는 더 자유롭게 상대방의 생각이 바뀔 수 있는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파괴하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p170-171)

 

복음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은 불의한 자나 의로운 자 모두에게 비를 내리게 한다.”(5:44-45) 나와 마주한 사람이 적이든 친구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분 때문에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귀하다고 여기시는 사람에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신 하나님이 무조건 사랑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천국의 도래와 함께 이스라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지위는 끝이 났다. 우리는 모두 같은 부모 하나님 안에서 나와 모두 같은 부모 하나님 안에서 나와 모두 같은 사랑을 받는다. 비폭력 속에서 나는 공격자가 나처럼 사랑받는 사람임을 알게 되고 상호간의 안전에 대한 관심에서 행동한다. 나의 행동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듯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믿음의 결과이다. 비폭력은 내가 그러한 사랑에 헌신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p171)

 

 

 

_^^;

 

평화의 얼굴’ 3장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라리 그 부분을 다시 읽는게 나았을까?^^;

비슷한 내용인 것 같은데 이 책에선 엄청 힘겹게 읽었다.

요더책 어렵다.

 

정리하면서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이 떠올랐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를 휴전중인 우리나라. 북한의 잘못이 명백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평화를 외치는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쁜 사람도 용서해야하나, 잘못한 사람은 책임져야 하는거 아닌가, 자꾸 위협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 아닌가? 이 책 뿐 아니라 요더의 다른 책들도 읽었지만 이렇게 해야지!’라고 명쾌하게 정리되거나, 다짐하게 되는건 없다. 다만, 이 내용들이,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옳다는 생각은 떨칠 수 없다. 이게 맞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남을 미워하도록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 심판하도록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도록 지음받았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하나님이 처리하실 것이다. 배짱 두둑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사랑.하는게 필요한 것 같다. 배부른 마인드가 필요한 것 같다.

 

간디도 킹 목사도 3.1운동도 기어이 변화를 만들어 냈다. 비폭력 저항 방식이 별로 효과 없는 방식이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폭력적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권리를 위한 투쟁을 해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살면서, 죽을 때까지 언제 폭력을 행사할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상황이 주어질 지 모르겠다. 어쩌면 없을 수도. 그러면 비폭력저항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까? 쓸데 없는 일일까? 아니다. 평화주의는 다름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쟁에 대해서 폭력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만 그 바닥에는 다름에 대처하는 방법과 다름을 대하는 마인드가 깔려 있다. 욱 하지 않고, 받은대로 주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을 사랑하는 건 어떤 것일지, 저 사람은 왜 저런 행동을 하는건지 한 번 더 생각하고, 서로에게 최선인 방법을 택하는 것 이게 평화주의자들이 가진 마인드인 것 같다.

김두식 교수님이 생각난다. 그 분의 책을 읽으면서 평화주의에 대해 찾아보게 되었고, 이렇게 시간과 돈과 노력을 들여 읽게 되었다. 그 분의 책에서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관용이다.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는 것.

 

평화의 얼굴에서 평화주의와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헌법의 풍경에서 헌법에서 말하는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해야한다고 말하는 것도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법조계를 비난하는 것 같지만 결국엔 그들이 그럴 수 밖 없는 상황과 시스템을 이야기하는 것도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에서 보수적인 기독교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과 이단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도

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청소년, 여성, 장애인, 노동자, 성 소수자 등등의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욕망해도 괜찮아에서 모범생들이 왜 저럴까에 대해 살펴보는 시각도

 

모두 다 관용하자는 이야기다.

나와 다른 남을 사랑하자는 말이다.

저자가 일관되게 말하는 그 관용이라는 것이, 평화주의와 밀접한 것이라고 추측_하는데^^,

그런 점을 볼 때, 내가 평생 폭력을 행사할 일이 없다하더라도 평화주의에 대한 공부는 중요한 것 같다. 나와 다른 남을 대할 때 평화주의자의 마인드로, 관용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평화주의를 아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하나님 나라가 나의 일상 생활 속에서 임하길, 또 우리 살아가는 사회 관계 속에서, 북한과의 관계 속에서, 전 세계에 만연한 증오와 폭력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웰컴 투 하나님 나라

 

2013.4.27.

 

 

F.B. 책공망

 

정말 오랜만에 올랍니다. 한 달 만..; 요즘 게을러져서 ^^;

 

이 책은 대장간에서 나온 존 요더 총서 두번째 책입니다.

 

당신이라면?

 

가령 한 범죄자가 총을 꺼내서 당신의 아내(또는 딸, 여동생, 어머니, 그가 마음먹은 누구든)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p31)

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책입니다.

 

1부에서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평화주의자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하는가에 대해 존 요더가 이야기합니다.

2부에서는 이와 같은 질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했는지를 살펴봅니다.

3부에서는 실제로 이런 상황에 처했던 경우를 보여주며 그 때 폭력적인 방법으로 저항하거나 순응하지 않고 제3의 방법을 선택했던 실화를 들려줍니다.

 

역시나 존 요더 책은 어렵네요^^;;; 머리가 나쁜거 같기도 하고 ..ㅠㅠ 읽을 땐 힘겨웠는데 정리해보니 별거?^^;;아닌 거 같기도하고...ㅋㅋ

 

저 질문에 대한 대답 이 외에도 왜 평화주의를 따라야하는지, 왜 폭력을 사용하면 안되는지에 대해 들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폭력을 행사할 일이 전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화주의에 대한 이해는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점점 다양해 지는 사회 속에서 나와 다름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에 평화주의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주의는 나와 다른 사람, 나를 억압하는 사람, 우리를 억압하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순응하거나 상대를 해치는 방법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닌 제3의 방법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에서도 그 사례들을 이야기하구요. 왜 저럴까? 한 번 멈춰서서 생각하고 다른 방법으로 대하는 것,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 서로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우리가 생각하던 천국,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_^

 

p.s. 김두식 교수님의 평화의 얼굴’ 3장에 이 책의 내용이 상당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