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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

어린양의 전쟁 The WAR of the LAMB The Ethics of Nonviolence and Peacemakiing(2013.4.17.~24.)

 


어린양의 전쟁

저자
존 하워드 요더 지음
출판사
대장간 | 2012-10-12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20세기 후반 중요한 신학자들 중 한 명인 존 하워드 요더의 책...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이 책은 요더가 기획한 마지막 책이다. 2009년에 저작권이 등록됐는데, 사후에 누군가가 편집한걸까?

 

 

옮긴이의 글

 

이 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콘스탄틴주의의 산물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을 회복하며 실천해 나갈 것인지를 역사적 근거들을 바탕으로 논증을 펼쳐나갑니다.(p11)

 

이 책에서 비폭력은 하나님의 용서와 연관됩니다. 원수에게 복수하는 대신 용서를 베푸는 것이 바로 십자가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콘스탄틴주의는 폭력을 통한 변화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비폭력을 통한 혁명을 이루어 갑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한 우리는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예수가 주님이라는 것을 말과 삶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길입니다.(p18-19)

 

 

 

소개글 예수는 분파주의자(sectarian)가 아니다.

 

요더는 효율성보다는 충실함의 윤리를 위해 논증해온 것으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이 책에서 요더는 톨스토이, 간디,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이 어떻게 우주론적으로 회심했는지 묘사한다. 그들은 각각 하나님을 우주의 통치자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발맞추어 충성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믿었다.(p24)

 

라인홀드 니버는 비폭력을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그는 비폭력은 효율성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주의라고 말한다. ... 우리가 모두 정치경제적으로 다양한 억압의 형태(forms)를 사용함으로써, 부분적으로는 결속을 유지하면서, 정치경제 질서 안에서 살아가고, 강압적 방법을 통해 유익을 얻거나 고통을 당한다. ... 그는 책임 있는기독교 윤리는 국가 정책 안에서 무력의 필요를 인지해야만 한다고 논증한다. 국가 정책을 위해서 우리는 실용적이 되어야 하고, , 즉 비극적인 것과 애매모호한 것에 대해 강한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요더가 지적하는 것 처럼 니버가 기독교 윤리를 적용하는 시험대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복음 증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 정책에 타당한 것이다.(p26-27)

 

요더는 니버가 논하는 평화주의의 고정관념을 다음 네 가지 요점으로 분류한다.

1) 기독교 윤리는 교회의 증거를 위한 것이다. 기독교의 윤리적 타당성에 대한 시험은 국가 정책이 기독교 윤리를 채택할 것인지가 아니라, 기독교 윤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한지의 여부다.

 

2) 요더는 국가 정책들과 세속에 물든 교회들에 관해 현실주의 관점을 갖추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교회와 국가는 대체로 비폭력에 기초하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전쟁론에 기초하는 것도 아닌, 국가주의, 국가의 권리 또는 성전(聖戰)에 기초하여 행동한다고 논증한다.

 

3) 기독교 평화주의를 위한 규범은 절대적 법칙 또는 절대적 요소(심지어 비폭력적이지도 않은)도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이.

 

4) 요더는 그의 책 제목이 나타내고 있듯이, 끊임없이 국가를 향한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요구한다.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증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실용적인 것이 아니라 ... 그래서 기독교론적 고찰에 뿌리를 둔 기독교 평화주의자의 자리가 사회적 질서와 무관하다고 논하는 경우에 정말로 그러한지 분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가 법률중심주의나 완전주의적 절대를 따를 것이라 기대하지도 않고, 국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순종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p28-31)

 

-> 존 요더는 국가가 기독교적 방법을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삶의 양식(=문화, 윤리, 도덕)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회개하면 우리는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 후회, 슬픔 등을 생각한다. 그러나 [침례자 요한과 예수]께서 요구했던 것은 새로운 세계 속에서 살 준비가 된 의지의 재조정이라는 변형된 의미였다.

그분의 일관된 가르침은 상식이나 현실주의또는 이성의 표준에 따른 평가를 거부한다. 오히려 그것은 전혀 새로운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를 위해 회개 또는 회심의 도덕성을 설명한다. -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처방전이 아니다. 그의 가르침은 어떻게 사회를 최선으로 인도할 것인가에 관한 설명서가 아니라, 예수를 만난 후 인생이 변화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는 설명서이다.(p54)

 

전쟁이 옳거나 잘못됐다가 아니라, 우리의 안전은 우리의 군사적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 성서의 일관된 메시지는, 주변의 문화에 대항하여, 우리의 안전은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있고, 우리가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데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구출하신다. 전쟁을 치른 우리의 경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이다. 답은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 답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과 경험에 근거를 둔다.(p55)

 

요더는 라이홀드 리버가 주장하는 폭력의 유형론에 반대하여 비폭력의 효율성을 주장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 증거에 타당한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그는 국가 정책에 타당한 것을 그리스도인의 윤리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폭력이라는 실제를 국가 정책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에 전혀 거리끼지 않는다.(p12)

 

1부 비폭력: 생명과 사랑의 사례

 

1장 폭력의 신학적 비판


폭력에 대한 이론이 답해주는 것은 보복의 순환구조를 끊으려면 희생제물이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요더는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의 겸손이 필요함을 역설한다.(p13)

 

폭력 현상이 폭력의 원인, 기능, 목적에서 합리적이지 못하다면, 그 치료도 합리적일 수 없을 것이다. 치료는 원초적이고 기본적이고 유해한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신적으로 자기 정의를 내리고 자제하기보다는, 의미와 동기 부여의 깊이 있는 수준 위에서 행동해야만 할 것이다.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고한 자의 고난 받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p49)

 

폭력과 관계되는 것은 폭력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억제하고자 우리의 권력을 증대시켜야하는 식의 해결책은 엇다. 우리는 게임을 하듯이 파괴적 보복 행위를 깨부술 수는 없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의 특별 대화자가 던지는 정신적 의제(agenda)를 위해서 우리의 요구를 명확히 나타내고자 할 경우 우리가 어떠한 관용구를 사용할지라도 답은 십자가이다.(p73)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무력과 그리고 받아들여질 수 없는 무력 사이를 도덕적으로 구별할 수 있다는 주장과 관련된 고전적 형태는 소위 정당한 전쟁 전통이다. 그리고 정당한 전쟁 전통은 정치적인 철학자들, 기독교 신학자들, 그리고 외교관들의 손에서 수천 년 동안 천천히 발전되었다.(p78)

 

평가될 필요가 있는 것은, 다른 악을 막는다거나 더 큰 선을 위해 폭력을 행사해도 되는가에 대한 논증의 도덕적 중요성이다.(p83)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가장 간단한 논증이라는 것을 규정하고 폭력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계속하기 전에, 논증의 규정에 숨어있는 하부질문들이 있다.

...

(1)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것과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안내에서 우리가 매우 높은 수준의 정확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가정이 있다. ... 복잡하게 제도화된 상황들 안에서 매우 높은 수준의 정확성은 장담하기가 어렵다.

-> 폭력을 정당화하는 판단 기준이 정확하고, 객관적 자료가 정확하다는 전제

(2) 사람들은 정당화된 폭력 전달자의 적법함을 확인할 수 있다는 가정이 있다.

(3) 서로 대항하여 폭력이 가해진 서로 다른 가치들을 측정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이 존재한다는 가정이 있다.(p84-85)

 

폭력이 나쁜 것은 폭력이 가해지는 것이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점이다.(p87)

 

폭력의 신학적 비판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험은 공격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삶의 독특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집단 안에 들어있는 관심사들의 충돌로 말미암아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을 완화시키고, 파괴하는 행위는 단지 방향을 잘못 잡은 정치학도 아니고 또한 잘못된 변수를 지닌 많은 이익을 남기는 실용주의도 아니라고 사람들은 제안한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모든 신성모독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p87)

 

형제 살인(fratricide)은 죄 중 우두머리(the cheif)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주를 돌보는 데 자신의 동역자가 되도록 자신의 동료 인류를 만들어가는 것은 창조의 왕관이기 때문이다.(p88)

 

정당한 전쟁론은 권력의 소유를 전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첫 3세기 동안은 권력을 소유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다.(p88)

 

지배권력 없이 비폭력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에 대한 차선의 대안이 아니었다. , 그것은 구속의 승리에 참여하는 방법이었다.(p89)

 

2장 복음 갱신과 비폭력의 근원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점차적으로 카이사르의 전쟁을 거부하지 않게 된 데에는 많은 원인이 서서히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콘스탄틴적 전환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지만 말이다. 신자들의 작은 동맹을 만드는 대신에, 그들 각자는 제자도를 위임하기 전에 비용을 계산하였는데 계산했던 모든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다. 이교도나 유대인이 되는 것은 그 당시 많은 대가를 치러야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이래로,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은 모든 사람의 능력과 동기 수준에 맞게 재단되어야만 했다. 그들의 부활하신 주님이 그분 자신의 때와 방법으로 역사에 승리의 결론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는 대신에,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와 하나님이 동맹자라는 것과 역사의 진보는 로마의 보병군단에 의하여 집행된다는 것을 알았다.(p100-101)

 

우리가 더 넓은 범위의 사회역사적 틀 안에서 예레미야 이래로 유대민족의 비폭력을 해석하는 쪽으로 방향 잡을 때, 그 주제는 디아스포라와 회당의 유대교적 사회학에 적합하도록 독특하게 맞추어진 유대교의 세계관에 의존한다.(p103)

(1) 모든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2) 하나님은 우주 너머까지 다스리신다. ... 그 결과로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 없이 정의를 방어하실 수 있다. .

(3) 하나님은 예수의 거룩한 희생(sacrifice)의 죽음에 우리의 충실함을 사용하실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이 증언(testimony)이라고 부르는 것을 유대인들은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고 부른다.

(4)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 나라 사이의 평화는 하나님 자신의 때와 방법 안에서 그분에 의하여 성취될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이다. 때나 방법이나 모두 우리를 위해 결정된 것은 없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의로운 계획이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이유로 그 계획에 축복하는 것은 추측이다.(p103-105)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카이사르와 그의 제국에 대항하여 전체적으로 양극화되었다.(p107)

(1) 카이사르는 다신교와 우상숭배를 대표했다.

(2) 때때로, 카이사르 자신은 신과 거의 다름 없이, 제의적 방법으로 존경받았다.

(3) 군인의 삶은 규칙적으로 맹세하는 것을 포함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맹세 그 자체가 우상숭배이다. 다른 신의 이름으로 공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카이사르의 대리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5) 카이사르의 전체 생활양식은 부도덕하고 신성모독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교만, 악덕, 부도덕 그리고 다른 치명적 죄들이 극적으로 조장되고 그의 정원 안에서 과시되었다.

(p107-108)

 

콘스탄틴적 실수를 극복하는 것으로서 전체 기독교의 복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p112)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가장 구체적인 사회적 표현은 특별한 종교적 제의의 구조, 또는 사제의 직무, 또는 심원한 교리이다. 급진적 개혁자들은 대다수 종교의 그러한 구성 요소들을 중요성에서 거부하거나 또는 격하시켰다. 지역 교구 모임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직무의 엄격한 의미 안에서, 그들은 모두 감독제를 거부했다. 그리고 교구마다 사람을 배치하는 특이한 상황의 귀속시키기와 관련한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은 성직제도를 거부했다. ...

급진적 개혁자들의 이원론은 도덕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모든 것을 둘러싼 초월자가 아니고 인간의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으로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방식에서 유일신론은 무형적 도는 포괄적 형태라기보다는 더 인격적인 형태로 가까워진다. 영이신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회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에서 동떨어져 있는 존재의 단계처럼 취급되는 것이 아니다. , 영이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사회적도덕적 그리고 사람과 같은 능력으로서 영을 명명하는 것이다.(p113-114)

히브리적 비전은 이 세상과 더 실제적 세상 사이를 나누는 분할 중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선과 악의 세력 사이를 나누는 분할 중 하나이다. 스승의 우선적 임무는 모든 것을 완수해 내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도록 빛을 비추는 것이다. 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고 관상하기보다는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p115)

 

결국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기독교가 콘스탄틴과 결탁하여 세상의 권력을 차지한 방식을 반복하지 말고 작은 공동체 공동체들을 통해 세상 속에서 보여주라는 것이 요더가 말하는 결론인 것 같다. 이 책 뿐 아니라 다른 책에서도.

 

 

3장 희망의 정치적 의미

 

이 장에서는 톨스토이, 간디, 마틴 루터 킹에 대해 이야기한다.

 

간디는 금식, 기도, 성적 절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폭력의 능동적 포기가 더 완전한 인간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적대자를 향하여 회복하기를 열망하는 영적 권세를 발휘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p124-125)

 

간디는 그의 갱신된 복음적/힌두적 우주론에 맞는 사회적 전략들을 발전시켰다. ... 부정의한 법을 따르는 것을 거부해서 감옥에 가는 것은 (특히 민주적 사회 안에서는) 재판관과 입법자에게 가하는 도덕적 압력에 해당한다. 불법적 모임과 행진은 맹렬히 비난하는 것에 의하여 압제자들에게 그의 위법성의 베일을 벗겨버리는 일이 생기게 한다. 불법적 모임과 행진은 런던에 있는 신문 구독자들을 포함하여 대중의 주의를 집중시킨다.(p125)

 

(1) 사회적 토대는 공동 농장/학교/피정센터, 아쉬람(the ashram)이다.

(2) 전통적 종교 형태들은 전유되고 변형된다.: 금식, 행진, 매일 규칙적으로 드려지는 기도

(3) 간디의 저술은 신문기사의 성격을 지닌다.:간단하고, 기지가 넘치고, 반복적이고, 철저하게 대중적이다.

(4) 간디는 앵글로-색슨 법의 긍정적 가치에 호소한다.:인신 보호 영장, 재판에 대한 권리, 그리고 법원의 독립

(5) 적대자는 설득되었으나 패배하지는 않았다

(6) 시민 불복종은 방해나 강압이 아니라, 더 높은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며, 그와 협력하면서 억압을 합법화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다.

(7) 공정한 활동에 관한 강한 의식이 있다: 간디는 행동의 원래 목적 이상으로 요구하는 이익을 강요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권위들이 또 다른 편에서 공격받았을 때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8) 자기 훈련은 엄격하다: 만약 간디가 비폭력적 훈려에 실패했다면, 대중적 행동은 끝났을 것이다.

(9) 간디는 그의 대안적 사회 비전을 건설적 프로그램이라고 불렀다. 그는 영국의 압제(자본주의, 도시화)를 인도인의 압제로 단순히 대체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10) 간디는 불가촉천민에 관한 거부와 힌두교/무슬림의 적대에 관한 거부와 같은, 그의 백성과 함께 인기 없는 입장을 취할 자세가 되었다.(p126)

 

남부로 돌아가서 앨라바마주 몽고메리에 있는 덱스터 애비뉴 침례 교회의 담임목사직을 받아들인 킹의 선택은 미국 흑인들의 동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발적 행동이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로 보건대, 또한 킹은 모세와 간디 같았다. , 그는 그의 사람들과 동일시했다. 킹의 자격으로 볼 때, 그는 북부에 있는 어떤 대학이나 신학교에서 가르치거나 행정을 하도록, 아니면 북부에 있는 안정된 중산층 흑인 회중교회가 그에게 준비되었을 것이다. 그는 남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부에 사는 흑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의도에서 다시 돌아온 그의 자발적 행위는 그에게 차별 대우의 희생자들을 위해 연설할 수 있는 권위를 주었다.(p128)

 

그들 모두 수단과 목적의 정체성을 특별히 강조했고, 건설적 목적을 향한 파괴적 수단을 실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통상의 개념을 거부했다.(p130)

 

간디와 킹은 학자들이 아니었다. 그들 둘은 모두 백인 앵글로 색슨 계열 학교를 졸업했고, 모두 지적이고, 비판적이고, 종합적 사상가였지만, 이들 각자는 먼저 일반 대중을 향한 의사전달자였다.(p130)

 

 

4장 여호수아의 전쟁에서 유대 평화주의까지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보면, 모든 부족의 신은 용사들로 여겨졌다. 각 신들은 그들 자신의 나라를 방어했다. 그리고 최고의 신이 승리를 이끌어 냈다. 나라의 번영이나 불행은 그들 신의 강함이나 약함을 증명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그들 보호자의 해방하는 행동에 의하여 처음부터 규정되었다.

창세기 1장을 읽는 올바른 방법은, 지리학자나 생물하자가 지구나 생물의 기원에 대해 알려주는 설명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주와 공급자로서 하나님에 대한 특색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고자 고대 근동의 다른 우주생성론들과 창세기를 대조하여 읽는 것이다. 비슷한 방법으로, 야훼의 전쟁에 대한 설명의 올바른 읽기는 야훼의 전쟁과 우리 시대의 전쟁이나 또는 로마제국의 전쟁과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시대를 지배하던 타종교의 정당화와 야훼의 전쟁을 대조하는 것이다. 대조의 방법은 다른 나라의 신들과 구별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우리를 위해 점진적으로 정의하려는 독창성의 요소들이다.(p145)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이나 또는 야훼의 도움을 받았던 다른 때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공헌은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변함없는 부르심은 용맹하게 싸우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포악스럽게 싸우는 것도 아니다. 유일한 부르심은 야훼를 신뢰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뢰는 주변의 이교적 제국들과의 동맹을 포기하거나 그 제국들의 군사적 기술들(, 전차 등)의 사용을 단념하는 것을 포함한다.(p146)

 

거룩한 전쟁과 신적 통치가 위임된 왕권은 유대인의 국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런 이야기는 역대기의 기록시기에 의하여 히스기야와 여호사밧의 이야기 형식 이후 비폭력적 구원의 모델이 규범적이도록 하고자 앞선 시기로 이동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정치적 주권은 없는 채)에 있는 유대 안에서 유대인의 예배 하는 태도를 회복하도록 했다.(p151)

 

유대 평화주의의 모델은, 그리스도인들이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은 이후, 중세 시대를 지나는 동안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유대 평화주의의 모델은 우리가 사는 시대까지 그 상태로 이어졌다. 역설적이게도, 전 시기를 지나오면서 예수가 가르치신 방어하지 않는 도덕성의 방식을 유럽에서 가장 충실하게 대표하는 사람들은 실은 유대인이었다.

(1) 피의 신성함. 피는 생명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동물의 피조차도 의례적 상황을 제외하고는 흘려져서는 안 된다. 인간 동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사회에 반하는 다른 모든 죄에서 파생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다.

(2)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보복 행위의 패턴에 대해 회복하는 권한을 가질 수 있다면, 피 흘림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그 권한의 대상자는 메시아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메시아가 올 때, 평화의 시기가 될 것임을 안다. 만약 메시아 도래의 시기가 평화의 시기가 된다면 우리는 이미 평화 안에 거하는 동안에 메시아 도래 안에 참여한다. 평화 안에 거하는 행위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공헌이다.

(3) 열심당의 방침은 하나님이 분명히 명령하시지 않았고 축복하시지 않았다.

(4) 메시아의 도래에 앞서서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폭력적으로 행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의 도구가 되려고 애쓰는 것은 주제넘은 것이 될 것이다.

(5) 고난은 신적 경륜 안에 놓여 있다. 신실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유대교적 역사 이해에서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지만 신비이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죄로 벌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고난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을 방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럴 때, 고난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벌을 방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떤 때는 고난 받는 것을 징벌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제자훈련 또는 연단, 영의 순화로 생각한다. 다시 고난을 막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떠한 설명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고난받음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사건을 통제하는 틀 안에 있다. 하나님이 고난의 일들이 일어나도록 하셨기에, 우리는 고난 받는 것들을 막으려고 무기를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p155-158)

 

 

5장 예수: 급진적 정치 행동의 모델

 

예수의 사상이나 가르침, 그리고 그의 행동이나 정치적 인물로서의 경력 사이에는 구분이 없었다. 마치 예수 시대 당시 종교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에 구분이 없었던 것과 같다.(p159)

 

복음이라는 용어는 바로 소식을 뜻한다. 침례(세례) 요한, 예수 그리고 예수가 복음전도자로 보냈던 열두 제자의 첫번째 메시지는 하나님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급진적 정치 행동의 첫 번째 전제는 실재하는 하나님이 상황을 올바로 해놓고자 실제로 인간의 사건에 개입하고 있다는 확신이다.(p160)

 

예수의 산상수훈은 이러한 새로움의 의미로 시작한다. ... 어떤 상황에서는, 율법을 성취하는 것을 급진적으로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 우리가 포기하도록 요구받는 것은 살인이나 간음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 다른 상황에서, 급진성은 밖을 향한다. ,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원수를 포함하여 무차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된다.(p161)

 

누가복음을 시작하는 노래는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기대를 매우 잘 묘사한다. 그들은 낮은 사람들을 높여주고 높은 사람들을 낮아지게 할 해방자를 기대했다.(p162)

 

침례 요한의 설교는 다가올 변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회개에 관하여 묘사한다. , 하나님나라는 빈곤한 사람들과 공유될 것이다. 요한의 청중 중에서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성급하게 물었던 사람들은 정확하게 로마의 압제자의 대표자들이었다. 그들은 세리들과 군인들이었다.(p163)

 

예수는 일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일종의 폭력적 해방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청중에게 그들이 압제받는 상황에 관심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와 의로움에 대해 말하면서 청중이 기대하는 정치적 언어를 사용했다. 예수는 지역정치를 통제하는 헤롯과 사두개파를 공격했다. 예수는 수많은 군중을 끌어들였다. 그 군중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왕으로 세우기를 원했던 사람들이었다. 또한 예수는 그에게 헌신된 훈련된 제자들의 무리를 구성했다. 예수는 그가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선포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만약 예수의 관심이 종교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에서 분리시키고 오직 종교적인것만 다루는 것이었다면, 이 중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p163)

 

예수는 자신을 해방자로 보았다. 예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의 새로운 원칙들에 관한 전달자가 되도록 조직했다. 예수는 국가나 전쟁에 대하여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폭력을 사용했다면, 의미상 모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와 예수가 뒤에 남겨놓은 공동체는 원수사랑, 떡을 나눔, 낮은 자를 높여줌 같은 정치적인 새로움을 실현시켰다.(p164)

 

예수가 하나님은 신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 신약성서에 더 광범위하게 드러나는 주제는 없다. 예수가 팔레스타인에서 목회하는 동안, 그는 청중에게 비용을 계산해보지 않고 예수의 운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경고했다. , 예수처럼, 그들은 사회와의 갈등, 그리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포함하여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만약 예수의 운명이 세상의 권력 구조가 감당할 수 없는 의로움을 실현시키는 것에 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와 동일한 과정의 일부분이 되기를 기대하야만 할 것이다.(p165)

 

바울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권력 구조는 악마가 아니라 창조물(인류의 안녕을 목적으로 하는, 그러나 타락했고그로 말미암아 압제적인)이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권세들을 따르지 않는다. 그들을 무장해제한다. 그리고 권세들의 손에 죽으심으로써 그들의 노예상태에서 우리를 구하신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는 권세들을 복종시키시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권세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 20세기가 지난 후에, 이것은 우리가 급진적 사회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급진적 사회 인식은 시대의 우주론을 분석하고, 타락한 권세들의 우상숭배의 요구들을 공경하는 것이 거부 되었을 때, 어떻게 제자들이 대단히 작은 공동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는지를 보여준다(p167-168)

 

묵시문학의 요점은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 안에서 젊은 교회들의 자신감을 지키는 것이었다. 교회들의 현재 고난은 교회들이 내버려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러한 세상에서 묵시문학은 역사읽기의 다른 표준적 방법들보다 역사적으로 더 실제적이다.(p168)

 

이렇게 살아야하나? 두렵다.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기존 구조 속에 들어가지 않고 그 구조가 창조의 모습대로,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오기를 소망하며 행동하는 것. 오늘날에는 어떤 일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근데 그 일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효율적인걸까? 안전하고자하는 나의 욕망인지, 진짜 의문인지 헷갈린다.

 

 

2부 정당한 전쟁과의 대화: 상호 학습의 사례

 

6장 정당한 전쟁과 비폭력: 분열, 대화 또는 상보성(complementarity)

 

여기서 나의 의도는, 두 개의 체계가 언뜻 보기에 모순된 것으로 인정됨에도, 정당한 전쟁과 비폭력이 같은 담론의 세계에 속하고, 또 다른 사람의 존엄성과 관련된다는 것을 논증해 줄 대화를 위한 의제를 투영하는 것이다. 그 의제는 다음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1) 일부 사상가들은 이미 내가 서술하는 것과 유사한 상보성(서로 보충하는 성격)을 제안했다(propose: 견해를 제시하다.) -> ‘정당한 전쟁론을 지지하는 편과 비폭력을 주장하는 편의 논리가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한 점이 있고 서로 보완하는 성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부 사상가들은 이미 내가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는 뜻.

(2) 비폭력은 정당한 전쟁에 대한 생각을 더 솔직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3) 정당한 전쟁에 대한 사고는 비폭력을 좀 더 훈련하도록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정당한 전쟁론에 호소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증명이라는 짐을 지게 된다. 그리고 정당한 전쟁론은 일련의 기준들이 규정해야만 하는 바로 그 짐이다.(p176)

 

평화주의와 정당한 전쟁은 둘 다 폭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p185)

 

7장 평화교회와 주류 기독교 사이의 변화하는 대화

 

기독교 역사 안에서 취해온 지배적인 신학적 입장은 정당한 전쟁의 전통이다. ... 효과적 질문은, 전쟁이 원인, 권위, 의도, 마지막 수단, 차별, 균형, 그리고 정당하고 필요한 수단들에 관한 정당한 전쟁 요구사항들과 만나지 않을 때, 누가 그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p196)

 

젊은이들이 베트남에 가기를 거절했을 때, 실제로 그것은 모두에게 외로운 개인적 결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루터교회와 가톨릭교회 고위층 사람들은 원칙상 젊은이들을 지지했다. 이것은 의문을 지닌 젊은이들이 일부 전쟁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정직해지려고 노력했음을 보여줬다. 또한, 교회 지도자 중 일부는 그러한 젊은이들을 지지하던 당시에, 지도자들이 존중했던 것은 개인적인 양심이지 정당한 전쟁 기준의 객관성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개신교의 몇몇 목소리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 공격이 가해진 직후에 바로 불거져 나왔지만, 국가와 동맹국들은 서둘러서 국제연합을 조직하고, 전쟁 이후 평화 구조를 보증하려고 움직였다. 오직 1950년대 후반에 가서야 정당한 전쟁 기준에서 볼 때, 히로시마의 폭격은 잘못된 것이고, 도시를 향해 미래에 핵무기를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주된 목소리들이 다시금 나왔다.(p196-197)

 

복음이야기 자체는 예수가 도덕적 순수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적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더 폭넓은 상황 속에서 예수를 해석하는 기초로서, 더 깊이 있게 살펴볼 것은, 주목할 만한 학문적 태도가 다음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유대인들은 예레미야 이래로 하나님이 왕권과 전쟁을 역사 안에서 정의를 위한 그분의 관심도구로서는 포기했다고 믿었다. 자신들은 정당하게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고 하는 마카비가문과 열심당, 그리고 로마제국과 함께 빈틈없이 연합전선을 펴는 헤롯당과 사두개파는, 권력이 없는 신앙 공동체로서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 집단과 비교해보면 아주 작은 소수 집단에 불과했다. 예수의 평화주의는 하나의 혁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기록한 기자의 비폭력에 관한 강화였다.(p214)

 

4세기 이래로, 전쟁에 관해 신학자들이 승인하는 이유 중 일부는 크리스텐둠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확신이었다. 그러한 콘스탄틴적 원리는 그 이후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 결과, 특정한 국가들과 특정한 정치 제도들이 그런 신정 정치의 망토의 역할을 떠맡았다.

상당히 점진적으로 그리고 최근의 세대에서만, 심지어 근대성의 신랄함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대항문화적 복음에 부합하여 자원봉사적 실천으로서 그리스도인 실천의 비전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현존하는 권력의 신호를 수신하지 않는 소수자의 입장임을 의미한다.(p214)

 

16세기의 아나벱티스트들이 비움의 충만이라고 불렸고, 또는 초기 던카드 형제단(Dunkards)이 완전한 사랑이라고 불렸고, 또는 19세기의 선구적인 농부 설교자들이 겸허함(humility)이라고 불렸던 것, 또는 19세기 동시대의 웨슬리언들이 성화라고 불렸던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하여 밀접하게 연관되면서도 서로 구별할 수 있는 표지를 드러낸다. 이 인간의 존엄성은 세상의 권세가 무력으로 확립되도록 요구된다고 느껴지는 유혹에서 신자들을 자유롭게 한다.(p216)

 

8장 고든 잔(Gorden Zahn)은 옳다:정당한 전쟁과 함께 십리(Second Mile)를 걸어가기

 

나는, 이론적인 제시 면에서, 정당한 전쟁 전통의 약속들을 고려하는 것 이상으로 정당한 전쟁 전통의 일관된 실패 기록을 강조해 왔다. ... 그리스도인 세대들이 자신들의 주님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는 믿음 안에서 서로를 파멸하는 것이 가능함을 발견하는 상황에서, 교리가 그런 학자적인 인정이나 장려를 받을만한지에 대한 ... 질문들은 남아있다.(p222)

 

모든 진지한 대화는 그런 종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에큐메니컬한 대화(에큐메니컬한 증언) 중 부득이하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해석하는 매우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에 대비하여 그것이 정당하다는 인상을 주는듯한 위험성을 각오해야만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생각이 내 안에서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솟아난다.

가장 영향력있는 대담자의 용어를 보면, 대화를 시도하는 이러한 에큐메니컬한 준비에 따른 손실들 중 하나는, 영성이나 세계관의 문제들을 무시하거나 제외시키는 일을 감수하고라도 대화를 윤리적 문제만으로 범위를 좁히려는 경향이다. (p224-225)

-> 글 흐름과는 별 관계 없을 수 있지만, 좋은 마인드인 것 같아서 적었다.

 

 

9장 리사 소울 카힐(Lisa Sowle Cahill)은 관대하다:평화주의는 규칙들과 예외들이 아니라 회심과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카힐은 기독교 평화주의가 폭력과 비폭력의 이론적 분석에서 나오기보다는 대개 그리스도인의 회심과 공동체의 경험에서 흘러나온다고 썼다. 정당한 전쟁론자들은 종종 이 점을 간과한다. 정당한 전쟁론자들은 평화주의를 폭력에 대항하는 절대적 규칙(규칙에 근거한 예외들을 근거로 하는 정당한 전쟁론의 거울 이미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p240)

 

 

3부 효율적 평화 만들기의 실천사항들: 폭력에 대해 적극적 대안을 제안하는 사례

 

10장 갈등에 관한 연구

 

우리가 회해의 메시지를 지닌 실제성을 현실 속에서 더 충실하게 만들 때, 우리가 다양한 학문 분야에 참여하는 것은 타당하다. 심지어 다른 학문에 참여하는 것은 부득이한 것이다.(p252)

 

사회를 서로 다른 관심사를 가진 다양한 집단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은 적대적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성서적 비전에 더 부합된다. 그리스도인들은 4세기에 상당한 분량의 현실적인 성서적 비전을 포기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나라를 카이사르에 의해 이루어진 평화로 축복함으로서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고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p254)

 

눈에 보이는 사회적 행동으로써 갈등을 다루는 훈련에 대한 가장 단순한 그리스도인의 접근은,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가 보여주신 안내이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18:15) 화해의 의도는 대부분 직접적 대면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지 회피되지는 않는다. 만약 필요한 것이 있다면, 범위는 넓어질 수 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18:16) 그 의도는 승리가 아니라 온전함과 공동의 약속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사람의 순응함에 관한 진심어린 마음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p255)

 

폭력과 관계된 통상적 역사 편찬은 군대가 했던 것에 종종 초점을 맞추어왔다. 이것은 우리에게 국가의 운명은 군대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이제 일상적인 사람들의 공동체 구조에 관한 역사 편찬은 다른 종류의 사실들을 기대한다.(p257)

 

우리가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은 파괴적이지 않은 유형들에 우리의 공격성 있음을 알게 해주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 본성 중 이러한 부분은 순화되거나 풍성한 과실을 결실하도록 이끌어줄 수 있다. 그 결과, 서로를 향해서보다는 다른 적대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고, 우리 자신의 세력권을 정당하게 방어하기보다는 다른 이유들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p267)

 

동물의 기본적 공격성에 관한 요소 중 일부는 타락했거나 파괴적인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반면, 그 요소 중 어떤 것들은 근본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인간 공동체의 갱신에 대한 힘과 구조를 제공하는 데 사용될 준비가 될 수 있다.(p267-268)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이다. 누군가의 자아를 받아들이는, 그리고 하나님에 의하여 많은 사랑과 은사를 받은 자신과 같은 창조물들이 자아를 공유하는 상당히 포괄적 방법이다.(p269)

 

 

11장 창조, 언약 그리고 갈등해결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안에 있는 이방인 신자들이 유대교의 생활방식을 따라야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물음에 직면해야만 했다. 그런 이슈가 생긴 이유는 초기 유대인 기독교 선교의 성공 때문이었다.

갈등은 삶과 성장의 표시이다. , 살아있는 유기체는, 특별히 메시지 선포의 대상인 주님께서 책임지시는 교회 같은 유기체는, 우연이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각 상황의 본성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사람들과 남들이 대립할 것이고 새로운 물음들이 해결될 필요가 있기에 갈등은 피할 수 없다. 모든 갈등이 성공적 선교나 창조적 문화 성장의 결과는 아니다. 방어적인 사회와 축소하는 문화는 또한 갈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갈등이 올바르게 다뤄질 때, 대부분의 갈등은 삶의 이정표이고 삶의 원천이다.(p278)

 

 

12장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역사와 신학의 관점에서 본 갈등

 

나의 논쟁의 첫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나타는 갈등을 다룬다. ... “그리스도의 법에 의하여 요구되는 진행 절차는 다음과 같은 필수적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1) 발의는 개인적이다. 만약 당신의 형제가 당신에게 죄를 지었다면 당신은 그에게 혼자 가야한다.

(2) 교섭(overture)은 화해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목적은 형제를 꾸짖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 고통을 가하거나 그를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 그를 얻는 것이다. , 교제의 회복을 통하여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다.

(3) 진행 절차는 기독교 공동체에 뿌리를 둔다. 내가 나의 형제에게 가야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예감(hunch)이나 푸념 때문이 아니라, 동일한 공동체의 지체로서 우리의 공동 책임감 때문이다.

(4) 행동은 구속력이 있다. 일단 이러한 과정이 수행되면, 그 결과는 역사적으로 유효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땅에서 묶는것은 하늘에서도 묶이는상태가 되고, 땅에서 풀리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리는 상태가 된다.

(p283-285)

 

당대의 사회 내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에 수반되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방식은 무엇인가?(p289)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차별하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다.(p291-292)

흠이 없거나 나무랄데가 없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차별하는 것을 포기하고 똑같은 조건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가 우리의 친구들을 사랑하듯이 똑같은 방법으로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질을 본받는 바로 그것이 완전의 핵심이다.(p292)

 

그리스도인의 갈등방식의 첫 번째 기초는 특별한 갈등이 발생된 이해관계의 해석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이해에서 기인한다.(p292)

 

완전의 이해에서 다음에 언급되는 특징은 종 됨(servanthood)이다.(p292)

 

제자들이 종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가 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갈등에 관여하는 그리스도인 방식의 두 번째 표식은 이해관계나 상황에 관한 분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속한 한 사람이 예수의 방식을 반영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는 갈등을 피하지 않았다. 사실 예수는 때때로 갈등을 선동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예수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단순히 약함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권세를 통하여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그의 의지에 강요된 유혹을 포기했다.(p293)

 

 

13장 교회와 변화: 폭력 대 비폭력 지향 행동

 

비폭력적 행동은 여하튼 참여이지 후퇴는 아니다. 비폭력적 행동은 참여의 형태로, 모든 진지한 비폭력 행동 전략들이 해왔듯이, 기존의 질서 안에 있는 폭넓은 형태의 압박을 견디면서 동시에 그것을 대체할 것을 찾는다. 모든 진지한 비폭력적 행동 전략들은 압박을 견디어 왔다. 마틴 루터 킹의 저작은 미국 법정의 유용성에 관한 강력한 확신을 포함하고 있고, 미국의 체제에서 특정한 부정의에 대항하는 미국 의회에 호소한다. 그 밖에, 킹의 활동은 선거를 인정하고 사용하는 것과 의회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려고 법정에 요구하는 것에서 강력한 투자를 전제로 한다.

간디는 킹이 나중에 하려고 했던 것보다는 소송에 대해 덜 의지하는 편이었으나, 간디는 자신의 정치적 정당을 만들었고, 그 정당은 후에 집권당이 되었다. 그 전에, 간디는 먼저 남아프리카에서 아쉬람과 대중 저널리즘 같은 강력한 교육 수단이 마련되도록 했다. 간디와 킹 둘 다, 주눅들거나 타협하려는 마음 없이, 돈을 사용했고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하려고 했다.(p311)

 

 

14장 정치학: 그리스도의 해방하는 이미지들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독특한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는 야훼께서 해방자이기에 해방자가 될 수밖에 없다.(p340)

 

15장 갈등, 조정 그리고 화해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위한 신학의 비평적 관점

 

1부에서는 비폭력에 대한 이야기, 2부에서는 정당한 전쟁론과 비폭력과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3부에서는 평화 만들기를 실천하는 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읽는데 어려워서 건진게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중간 중간 새로운 생각과 마인드를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예수와 비폭력의 저항그 책이 더 깔끔하게 정리된 거 같다. 어렵지도 않고.

 

f.b 책공망

 

어린양의 전쟁

 

존요더의 마지막?책으로 보입니다. 1부에서는 비폭력에 대한 이야기, 2부에서는 정당한 전쟁론과 비폭력과의 상관 관계에 대해서, 3부에서는 평화 만들기를 실천하는 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어렵고 어렵습니다 ㅠㅠ

번역이 어려운건지 원래 어렵게 글을 쓰는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려워서 별로 건진?게 없네요^^;

 

링크_

블로그에 읽으면서 담아 두고 싶은 내용들을 적어뒀습니다. 참고하시길.

 

201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