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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2013.3.29.)

 


이 책도 드디어 읽네.

 

철 지난 책.

 

나의 생각을 거슬러 보려고.

 

기성 제도에 그대로 순응하며 그것 따라 살아가길 선택하기 전에 한 번 더 고민해 보려고 읽었다.

 

누구를 위해 살까, 무엇을 위해 살까, 어떻게 살까, 우리 사는 세상은 어떤가..

 

중고책을 샀다. 거의 1/3가격으로. 이 책을 다시 되판 사람은 왜 팔았을까??. 중고책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돈이 필요해서 팔았을까, 별로 유익하지 않아서 팔았을까.

 

이 책은 20104월에 쓰여졌다. 대학을 거부한다는 선언을 3월 초에 했고 그 이후에 나온 책.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20101019_01200127000003_01L.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540pixel, 세로 309pixel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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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 사라진 물음과 이상한 물음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라고 물은 사람은 없었다. 언제부턴가 사라진 물음, “왜 대학을 가는가?” 그리고 이상한 물음, “왜 대학을 그만두는가?” 나는 세 장의 대자보에 다 담을 수 없었던 이 사라진 물음이상한 물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p20)

-> 왜 대학을 갈까?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공부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왜 대학을 갈까? 그런 친구, 동생, 후배, 직장 동료^^, 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참 공감하기가 어렵다.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드는데 왜 가는걸까? 돈 때문에, 주위의 시선 때문에, 사회에서 조금 더 대우 받기 위해, 한번 경험해 보고 싶어서 간다고.. ...

 

. 나의 이야기

 

나라고 별 수 있냐고, 인생이 다 그런 거라고, 굴리지 않게 취직만 하고 보자고 또 다시 주문을 외웠다. 쉽게 더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 수업을 찾아 들으며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피곤하게 논쟁할 일이 생기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우린 그냥 생각이 다를 뿐이라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며 적당한 거리 두기로 착하고 매너있게 관계를 유지하면 됐다(p30)

-> 고등학교 다닐 땐 대학만 가면 모든게 끝나는 줄 알았다. 거기 가면 하고 싶은 공부하면서 그렇게 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취업 준비는 해야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 그때 만큼 열심히 산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정말 억울했다. 스펙에 매달리자니 젊음이 서럽고, 다른 걸 하자니 뒤쳐질까 불안하고, 또다시 반복되는 행복하지 않은 이 나날들이. 삶을 다 짜내며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쉴새 없이 달려왔는데, 그런데 또 다시 왜? 라는 물음은 설 자리가 없었다. 아차, 한 눈 파는 순간 저만큼 밀린다는 불안감이 생각할 틈도 여유도 주지 않았다. 그저 잠깐 동안 가만히 멈춰서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그 두려움이 다시 똑같은 굴레 속으로 나 스스로를 밀어 넣었다. 그렇게 스무 살이 흘러가고 있었다.(p31)

 

진리는 학점에 팔아 넘겼다. ‘자유는 두려움에 팔아 넘겼다 정의는 이익에 팔아 넘겼다.(p35)

-> 학점을 잘 받기 위해 한번 들어보고 싶은 수업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긴 했다. 두려웠지만 두려움만 버리니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해될 건 없었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듣고 싶은 수업 듣고, 하고 싶은 일 하고, 마음 가는 일, 마음을 울리는 일 하며 자유롭게 살았다. 정의.

 

일단 멈춰야 했다. 내가 지금 이 때를 놓치고 만다면, 여기서 다시 멈춰서지 못한다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살았던 것처럼 대학 내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직장인이 되어서는 좋은 직장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내 아이는 그렇게 살지 않길 바라지만 또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점점 숨이 죽어가고 있었다. 묻고 또 물으며 죽고 싶을 만큼 고뇌했다. 그것은 내 인생을 건 물음이었기에.

大學. 대학은 크게 배우는 때이다. 큰 배움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큰 배움은 곧 큰 물음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정해진 몇 개의 직업 내에서 고르는 꿈도 아닌 꿈 말고, 진정 나의 꿈은 무엇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 물음을 물을 수 있을까. 돌아보면 오직 대학 시절만큼은 이 물음을 해결하라고 특권처럼 주어졌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이 큰 물음이 사라진 대학은, 대학 4년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 전체를 집어 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실까? 정말,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나는 끝없는 자문자답을 하고 있었다.(p36-37)

-> 나는 누군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정말, ivf 때문에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덕분에 멈춰설 수 있었다. 그게 없었으면,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었을까?

 

나의 적들의 이야기

 

내가 진정으로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내 꿈이 뭔지도 모른다.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세계화가 누구의 손에 돌아가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웰빙타령은 하면서도 내가 먹고 쓰는 게 어디에서 길러지고 누가 만드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제대로 연애할 줄도 모르고 자기를 성찰할 줄도 모른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의 삶에 닥친 수많은 실제적인 문제에 우리는 얼마나 당혹하고 무지한가?(p43)

 

그저 성적만 좋고 돈만 잘 벌고 영어만 좀 되면 모든 것이 간편한 소비행위로 해결된다고 학습한다. 삶은 직접 살고 스스로 해내는 것 아닌가. 그런데 돈을 벌고 쓰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한 세상에 살면서, 그것 외에 모든 것에 스스로 무능해져 버렸다. 머리만 과잉 발육 되어 온전한 인간성과 건강한 몸의 감각과 감성과 사회성과 내면의 생기가 퇴화되어 버렸다. (p43-44)

 

이런 말을 하는 나에게, 너는 반기업 정서반시장 정서에 물들었다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당신들은 반인간 정서반사회 정서가 너무 심하게 물든 것이 아닌가? 자연이 죽어가는 곳에 비즈니스는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사회 공동체가 해체되는 곳에 시장이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인간성이 무너지는 곳에 기업인들 살아남을 수 없지 않은가.(p48)

 

대학大學이라는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대학은 기업의 채용일제고사를 대신해 등급을 매기고 분류하는 시스템으로 복무하고 있다. 학생들끼리 무한경쟁을 시키고, 살아남은 자를 적당한 값에 기업에 넘기면서 말이다. 이것은 새로운 신분제다!(p50)

 

생각해보자. 정말 자존심 상하지만, 이건희 회장과 이명박 대통령의 모국어대로 대학을 하나의 기업이고 대학생을 제품이라 생각해보자. 삼성전자 휴대폰을 구입하자마자 절반이 불통이고 쓸 수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현대 자동차를 사자마자 절반이 급발진이고 주행 중에 연소장치가 나가버린다면 어찔할 것인가? 그런데도 리콜 조치도 손해배상도 안 해주고 사용자 탓만 한다면? 마땅히 그 기업은 망하거나 소비자 소송과 폭동사태에 직면하는 것이 당신들의 상식 아닌가?

탐욕사회의 작은 축소판이 되어 맹렬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된 대학. 거대 규모로 몸집은 커지고 돈이 있어야 교육도 연구도 최신식 건물도 가능하기에 국가와 시장 앞에 비굴해진 대학. 진리의 입은 닫고 자본을 향해 입을 쩍 벌린 공룡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 돈이 되는 학생들을 입 속으로 집어삼키고 있는 대학. 학생들의 눈치는 보지도 않는 대학. 취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과목이라고 평가되어 자기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만을 두려워하는 교수와 대학. 대학은 이제부터 차라리 진리의 전당이기를 당당하게 포기 선언하고 취업고시 학원이라고 천명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취직도 안 된 청년들을 리콜하든지 손해배상하든지 해야 하지 않은가. 민주화가 되고 21세기가 되고 세계화가 되었다면서 일자리 하나 주지 못하는 대학은 간판을 내려야 하는 게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p51-52)

 

우리 시대 가장 끔찍한 말의 타락 중의 하나가 교육인적자원부이다. 대한민국이 대학과 학교의 존재 이유로 내건 것이 교육인적자원이다. 교육이 인적자원을 만들어 내는 것인가? 그것이 한 나라 교육의 최대 목적인가?(p53)

 

자원이 아닌 나는, 꿈과 영혼을 가진 존재인 인간인 나는, 국가가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르는 두 가지 만행에 대해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배움에 대한 권한을 학교가 독점해 버린 것이다. 삶의 현장에서 서로를 통해 배우고 가르치는 만인의 권리는 자격증을 가진 교사에게만 점유되었다. 학교와 교사는 모두에게 똑같은 교육을 주입시키고 대학 입시라는 똑같은 잣대로 평가한다. 학생 모두를 시작부터 하나의 경쟁만을 위한 하나의 트랙에 밀어넣는다.(p54)

 

둘째, 공평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무교육이 실상 소수에게만 특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 부실한 먹이로 가둬 기른 말과 잘 먹이고 특수 조련된 말을 하나의 트랙 출발선에 세워 놓고 기회의 평등이라고 경주 결과를 받아들이라고 강제하는 게 평등인가? 왜 국가가 강제로 하나의 경주 트랙을 달리게 하고 어린 말들의 이마에 등급 낙인을 찍는가? 이 의무교육 체제는 인간다움의 평등을 높이기는커녕 남보다 더 빨리 시작하거나, 남보다 부모의 자산이 더 많은 사람이 유리한 결과를 얻게 만들고 있다. 그 사람이 받은 교육 비용으로 그 사람의 노동력에 가격표를 붙이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p55)

 

그런데도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조차 이 게임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모순된 현실이 나는 견딜 수 없이 슬프다. 그들이 학교 교육의 주술을 받아들이게 되면, 자신들은 학교를 잘 다니지 못해 가난하게 되었다고 믿게 된다. 자신보다 더 충실히, 더 많은 돈을 들여, 더 높은 학교에서, 더 많이 교육 받은 이들이 더 많은 특권을 가질 만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체제가 찍어낸 계급적 낙인을 스스로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낙오자들은 획일적이고 강제 의무적인 학교가 없었다면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p55-56)

 

학교 교육은 우리가 가르침을 받아야만 알게 된다고 믿게 하면서 스스로 해내서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p57)

 

사람마다 자기 나름의 재능이나 관심사를 가지고 장인성과 인간됨으로 존경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자급자립 기반과 공동체가 먼저 살아나야 할 것이다. 그런 터전이 되살아난다면 소박하고 자유롭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은 농부로 살아가면 될 것이다. 목수가 되고 싶은 사람은 대학을 다니거나 박사가 될 필요가 없다. 요리사도, 시인도, 출판하는 사람도, 까페 경영자도, 사진가도, 사회복지를 하겠다는 사람도, 뭔가 만드는 사람도, 대학 자격증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p64-65)

 

거짓 희망에 맞서다

 

우리 세대 모두를 김연아처럼 세계 경쟁 무대에서 1등으로 빛나라고, 너도 그럴 수 있다고, G세대로 띄우는 건 어떤 의도가 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탐욕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수많은 젊은이를 루저로 밀어뜨리는 것이고, 고유한 삶의 길을 하나뿐인 성공으로 부정하는 것일 수 있다. “젊은이의 진취성과 도전정신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이 양극화 현실과 복잡한 모순을 단순화해, 세계화된 자본권력의 트랙에 젊은 세대를 밀어 넣는 것일 수 있다. 너희들에게 기회의 평등을 주었고 실력껏 경쟁했으니 결과에 승복하라, 못하겠으면 값비싼 교육상품에 더 투자하라, 너는 루저이니 사회에 저항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민주화된 시대에 연아처럼되는 건 불가능한 현실이 아니라고 강변하기 위해 G세대, 알파걸, 엄친아와 엄친딸들에 대한 스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왔고, 계속 만들어 갈 것이다

나에게 G세대는 ‘Global Caste’의 약자로 여겨진다. ‘글로벌 카스트’, 세계화된 신분계급제도 말이다. “세계를 상대로 자신감 있게 당당히 경쟁해야 하는 G세대의 절대 다수는, 실상 시급 4,000원짜리 알바를 뛰어 1년짜리 어학연수나 가는 참담한 글로벌 카스트 세대이다. 글로벌 시장만능주의는 우리의 자격증도 세계 경쟁 시스템으로 재편시키고 있다. 외국 명문대 유학, 교환학생, MBA 등으로 서열화는 더욱 잔인하게 진행된다. 이제 세계는 계급 차이를 넘어, 국경을 넘어, 위에서부터 바닥까지 피라미드로 단계 단계 구분지어지듯 글로벌 카스트로 나뉘는 것이다. 같은 국경 안에 있다 해도 다른 카스트 사람들과는 통하지 않는다. 어떤 가난한 나라의 대학 졸업자도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같은 나라 사람보다는 잘 사는 나라의 대학 졸업자에게 더 많은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아이티나 방글라데시의 상층 계급은 뉴욕과 파리의 상층 계급과 더 잘 통하지 자기 나라 하층 계급과는 다른 행성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p74-75)

 

진보적 요구라고 내세운 것들이 실상 보수적 흐름을 강화시키는 결론으로 빠질 수 있다. 지구 시대에 고르게 부자인 삶의 꿈이 진정한 진보일까?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핀란드처럼 될 수 있을까? 그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선진화가 되어야 하고, 3만 달러가 필요하고, 그러니 더 많은 경제성장과 국익추구가 필요하다는 데 힘이 실려버리지 않는가?(p79-80)

 

보수는 괴로워하지 않고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고, 진보는 괴로워하면서 아이를 경쟁에 밀어 넣는다”, “보수는 아이가 명문대생이기를 바라고, 진보는 아이가 의식 있는 명문대생이기를 바란다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대학을 나오지 않고 주류적으로 살지 않아도 억울하거나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다른 삶이 존중되는 사회적 가치를 먼저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p80)

 

이러한 나의 대학 거부 행동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 이상하다. 우리가 당연한 듯 따르는 지금의 이 학교 제도와 대학 현실이 정말로 극단적인 게 아닌가? 엄청난 돈을 들여 12, 16년씩 삶을 바친 결과가 진리, 자유, 정의이기는커녕 취업도 안 되는 허구적 권위인 종이 쪼가리 한 장이니 말이다. 그런데도 끝도 없는 자동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것처럼 그 한 길로 나아가겠다는 것이 정말 극단적 선택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이 나는 겨우 대자보를 붙이고 1인시위를 하면서 학교를 그만 둔 최소한의 저항밖에 하지 않았다. 분신자살이나 총기난사를 한 것도 아니다. 대학을 자퇴하지 않는 학우들과 양심적 사퇴를 하지 않은 교수들을 비난한 것도 아니다. 재능 차이와 능력 차이와 적정한 경쟁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당장 학교 제도를 폐지하고 모두 대학에 가지 말자고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극단적인가? 올해 2010년은 안중근 의거 100주년이다. 서른 한 살 안중근 청년이 하얼빈에서 쏜 총성이 침묵의 동아시아를 뒤흔들었을 때, ‘일제가 얼마나 강한 줄 아느냐, 민족해방과 아시아 평화는 혼자서, 테러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두 함께 국내에서 현실적 요구를 걸고 연대해야만 한다당시 이렇게 논평한 지식인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별반 다른 상황은 아닌 듯 하다.(p81-82)

 

그대는 진리를 알려고 하는가, 진리를 살려고 하는가. 그대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가, 길을 걸으려고 하는가. 그대는 사랑을 배우려고 하는가, 사랑을 하려고 하는가(p84)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가난한 마음이 없다면, 그런 자기 내어줌의 실천이 없다면, 그 많은 지식과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p87)

 

우리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만들어 지는 것만이 아니다. 스스로 겪고 만나고 헤매고 상처받고 저항하고 사랑한 만큼 만들어진다.(p88)

 

비록 이론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지라도 내 생활과 삶에 적용하고, 시대 문제의 본질을 직시하고, 불의에 저항하고, 진정한 나를 찾아 살아내는 것에 관심을 둔다. 나는 아는 만큼 살아내고 있는가? 문제는 이 아닐까?(p88)

 

진정한 스승은 나와 같이 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처럼 벌고 먹고 쓰고 산다면, 나처럼 아는 것을 곧바로 실천한다면, 그러면, 이 고통에 찬 세상이 좋아지리라고, 그리고 어떤 위대한 일에도 자기희생 한다는 생각도 없이, 대가도 보상도 없이, 진정한 자신을 찾아 매 순간 행복한 마음으로 사이좋게 해나가자고, 그렇게 살아보이는 삶의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p88-89)

-> 나를 따라 오라 했던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했다. 함께 살며 자기의 말을 들려주고 행동을 보여주었다. 나는 어떻게 하고 있나? 나를 드러내자, 나의 삶을 더 보여주자. 부끄럽지만, 부족해 보이지만 나처럼 벌고 먹고 쓰고 실천하며 살자_고 용기를 내자. 또 잘.. 살자.

 

나는 정말이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고 예산 부족을 탓하며 서슬 퍼렇게 항의하던 교수들에게 조목조목 묻고 싶다. 그렇게 확보한 기금으로, 우리 학부모들의 피땀 어린 학자금과 노동자와 농민과 서민들의 세금으로 무얼 해왔는지, 그 연구성과라는 것이 도대체 우리 시대 모순의 본질을 얼마나 밝혀냈는지, 또 밝혀낸 만큼 자신은 얼마나 더 진실한 삶 쪽으로 걸어갔는지 눈물로 묻고 싶은 것이다.(p89)

 

끝도 없는 비교경쟁에 체력은 떨어졌다. 열정도 생명력도 고갈되었다. 이미 모두 방전시켜 탈진하게 만든 상태에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네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라지만 스스로 좋아하는 걸 찾아보고 시도해볼 만남도 방황도 도전과 부딪힘도 허용되지 않았다. 스스로 길을 잃고 모험하고 찾아볼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나마 좋은 부모님은 좋다는 책을 억지로 떠 먹이고 좋다는 체험교육으로 뺑뺑이를 돌리신다. 그마저도 너무 피곤하고 짊어지고 가기에 무겁다는 걸 아시는지. 학교 수업과 학원에 다녀와서, 휴일에 강제된 좋은 체험까지 하고 나서, 내가 뭘 좋아하지? 내가 잘 하는게 뭐지? 생각하려고 하면 이미 생각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열어 놓지 않았고, 다른 길을 찾으려 하면 그 때마다 불안하게 만든다. 분노하다가도 이내 겁에 질려 포기하게 된다.(p93)

 

그러니 우리, 가슴 뛰지 않는다고 가슴 치지 말자. 원래부터 잘 뛰고 있던 가슴, 가슴 아프고 가슴 시린 그 모든 가슴이 숨 좀 쉬게 열어 두자. 머리는 계산이지만, 가슴은 직관이기에,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머리를 잠시 멈추고 진정으로 내 가슴이 부르짖고 있는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보자.(p95)

 

제발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 주십시오. 당신의 몸을 빌어 왔지만 그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신성하고 고유한 존재이지 당신의 소유가 아닙니다. 아이를 위해 좋은 부모가 되려 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사십시오. 당신이 하고 싶은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끔찍이 아끼고 믿고 잘해준 아이의 내면에 지금 무슨 일이 생겨나고 있는지 아시는지요. 당신은 결코 아이의 내밀한 영혼을, 아이만의 상처와 비밀을, 그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부모 앞에서 태연히 웃고 있는 고뇌를 알 수 없고 알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집단적 두려움에 질린 부모들의 두려운 사랑으로 두려움에 가득 찬 아이로 만들어 내지 마십시오(p100-101)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우리 세대는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지식과 정보로 무장했다는데, 지금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지 확신이 없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존재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다는데, 나는 살아남기에 급급하다.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존재보다 개인의 자유와 선택의 자유가 늘어났다는데, 나는 갈수록 꼼짝없이 얽매이고 자율성을 잃어간다.(p106)

 

왜 내가 남이 되려고 하는가? 나는 남을 이겨 앞서가기를 거부한다. 오직 나를 이겨 진정한 나 자신의 삶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나에게 부족한 것은 좋은 벗들로 대신하고, 내가 잘하는 것은 서로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p110-111)

 

주어진 몇 개의 잘 나가는 직업에서 꿈을 찾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것은 루저가 되는 지름길에 다름 아니다. 직업이라는 형태는 수도 없이 바뀐다. 단 하나를 위해 경쟁하는 꿈, 실용적인 꿈, 주어진 꿈, 오염된 꿈은 너무 금세 폐기처분 되어 버린다. 좋은 부모님과 괜찮은 선생님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 내가 뭘 잘하는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먼저 찾으려고 애쓰지도 말자.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운 삶인지, 어떻게 살면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 찾아가자. 그렇게 삶에서 시작하다 보면 내 인연의 때에 맞춰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될 것이고 나와 맞는 직업을 골라가면 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내 안에 얼마나 빛나는 그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한 번 탐구해 보지도 않고, 끝없이 밖으로 뛰어다니고 남의 시선에 상처 받고 경쟁하면서 돈 없으면...”이라는 학습된 두려움에 서둘러 자신을 팔아 버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 아닌가.(p111)

-> 참 감사한 대학시절을 보냈다. ivf 덕분에 멈춰 설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게.. ivf 덕분에 일정이 빡빡해져서 왜? ? ?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던... 무엇이 더 필요한지, 더 가치 있는 일인지 고민하고 선택하는 과정, 그 경험이 참 귀한 것 같다.

 

돌아보면 불온한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꿔왔던 것 같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불온한 생각,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불온한 생각, 돈이 주인이 아닌 인간이 주인인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불온한 생각, 정의와 평등의 세계를 실현하겠다는 불온한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거대한 주류 질서를 뒤엎고 세계를 이만큼 진보시켜왔다고 나는 생각한다.(p113-114)

 

매 시대마다 분명 그 시대만의 모순과 과제가 있었다. 그때마다 젊은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동의 과제를 저마다 자기 몫으로 나눠 가지며 고뇌하고 저항하고 상처받으며 분투해 왔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 세대는 과제도 사명감도 부여 받지 못한 채 개인으로 떠돌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사회 밖으로 내던져져 있는 것만 같다. 지금 우리 사회에 모순이 없는 걸까? 시대적 과제가 사라진 걸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시대는 세계화된 자본권력의 시대가 아닌가. 전 지구적 빈부격차와 사회 양극화,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미국의 전쟁과 테러저항, 사회적 영혼의 불안이 깊어지고 있다. 그로부터 우리 젊은 세대는 너무나 상처 받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p114)

 

사실 자격증으로 한 존재를 판별하는 이 시스템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것인데, 우리는 이것이 영영 바뀌지 않을 것이며 유일한 것이라고 답을 내리고 있다. 지난 수 만 년간 아이들은 삶의 현장에서 직접 경험하면서 세계를 배웠다. 긴 인생의 길 위에서 부딪치는 크고 작은 역경과 문제들을 스스로 헤쳐 나왔고 상처 속에서 인생을 깊이 느끼고 실패 속에서 생각하면서 가장 자기답게 사는 지혜를 길러 왔다.(p116)

 

억압 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상처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p117)

 

슬프고 가슴 아프면서도 두근거리는 이야기.

울면서 읽은 이야기..

 

그나저나 나는 뭐하고 살지..?^^...

아직 인연의 때가 아닌가...

 

열심히 살자. 치열하게 살자. 독하게 살자..

 

 

책 후반부에 보면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 공동체에 감사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곳 뿐 아니라 책 여기 저기에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ivf (비슷한) 이야기도 나오고

대안공동체..이야기도 나온다.

그 방향이 맞는 것 같다. 대안을 만들어서 그 삶을 보여주는 것.

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몸으로 부대끼면서 배우는 것도 다 맞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게 살면 마음 편할 것 같다. 그렇게 되는데 재정적인 어려움은 있겠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돈이 없어도, 가난해도 죽진 않았으니. 돈이 그렇게까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치 있는 일이고 그래서 힘들어도 힘이 날 것 같다.

막상 시작한다면 누구랑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이 넓은 대한민국 땅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시도 하고 있을테니 어디 가서든 함께 하고 싶습니다하면 안받아주려나. 돈만 포기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고민이다. 여전히 고민이다.

우연히 지나가다 마주친 이 트윗 때문에.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캡처.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524pixel, 세로 150pixel

 

고시봐서 중앙정부에 가면 그런 논객, 신문 한 트럭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

 

이 한 문장이 발목을 잡는다.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그 영향력이 참 크다는 걸, 조직생활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ivf를 할 때도 그랬고, 군대에 와서도 그렇고.

한 사람의 인격과 능력을 넘어서 조직 안에서의 위치가 가져다 주는 것(이걸 권력이라고 하나?)이 있다. 또 그것에 영향을 받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전화 한 통의 위력 같은 비공식적인 방법 뿐 아니라,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만을 활용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진짜 논객, 신문 한 트럭보다 많은 것 같다.

 

누군가는 여기에 있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근데 막상 조직에 들어간다 해도 할 수 있는게 많을까 싶다. 그래봤자 조직의 한 구성원일 뿐인데..

그리고, 내가 하고 싶다. 해야지.라고 결정해서 그냥 되는 것도 아니고. 엄청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하고 될지 안될지도 모르고,,

시스템과 제도의 넘사벽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동화되어버리거나 포기하고 나오게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 있겠지, 누군가 하겠지.. 하고 쓰윽.. 지나치고 싶다.

그냥 적당히 지내며 나에게 주어진 바운더리 안에서 살고 싶다.

그게 편할 거 같고, 고생 덜 할 것 같아서..

나는 별로 머리도 안 좋고..

중요한건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니까.

 

이 고민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고민 때문에 꽃피고 날 좋은 봄날에 모니터 앞에 앉아서 몇시간 째 이러고 있다.

이 고민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해 보지 않은 일, 겪어보지 않은 일을 두고 고민하는건 참 쓸데 없는 짓인 거 같다.

경험해 볼 수 없다면, 경험해 본 사람들한테 물어서라도 알아야지..

많이 많이 물어봐야 겠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내 주님의 십자가

아직도 난 너무도 모르니

그 고난의 비밀 몸으로 배우게 하사

주님 가신 길 따르게 하소서.

 

부활절..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고 떠나셨다.

덕분에 그를 믿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이뤄질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소명은 무엇일까.

내가 죽기까지 순종해야할 십자가는 무엇일까.

하나님 나라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꽃피는 날의 고민..

 

 

_ 책 한켠에 메일주소가 있었다/

나중에 메일 한 번 보내봐야겠다.^.^..

kimyeseul-@daum.net

 

 

F.B. 책공망.

 

이 책도 철지난..^^^;;; 이제야 읽네요.

 

대자보를 통해 대학을 거부한 김예슬 선언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책으로 풀어냈습니다.

곳곳에서 고민의 흔적, 사색의 흔적이 보이는 책..

 

저는 이 책을 진로에 대한 고민 때문에 읽게 되었습니다.

진로..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때문에.

뭐 딱히 해결된건 없는데요..^^;

 

저자는, 멈춰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게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멈춰섬이 너무 긴거 아닌지, 종종 두렵긴 하네요..

나는 이 다음에 크면 무엇이 될까?

여전한 고민입니다.

아마 평생할 고민이 아닐까 싶은.

 

일상이 중요하지만, 무엇이 되든 상관은 없지만, 무엇인가는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조차 선택이니..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사는 게 인간다운 삶인지, 어떻게 살면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는지를 먼저 찾아가면 인연의 때에 찾게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