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읽는다.
출판되자마자 사둔 책인데 이제 읽음.
김두식 교수님이 인터뷰했던 내용을 모아둔 책. 한겨레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에 연재된 인터뷰를 모아둔 책.
20살 때부터 내 나름대로는 굴직굴직한 시기마다 이 분 책을 읽었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접하게 될지 궁금하다.
1장_ 경계를 넘어서며 핀 꽃들
섹스의 즐거움, 나눔의 행복 : 정혜신 ‧ 이명수
정혜신 “저는 명수씨가 바람같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살면서 그랬던 적도 있어요. 그러면 또 제게 얘기하고요. 근데 저는 그게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왜냐면 나랑 이명수라는 한 인간의 내면 세계는 천 개 정도의 조각을 계속 맞추어온 꽉 맞는 관계거든요. 그걸 맞춰가는 과정에서 면과 면 사이의 끊임없는 접촉이 있었고요. 나 아닌 누구와 어떤 접촉을 하더라도 그건 서너 조각 정도의 일부분에 불과한 거죠. 지금까지 우리가 나눴던 관계의 깊이와 양, 이런 것들보다 더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요.”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나오나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남과 다른 ‘부부’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독립된 개체인 두 사람 사이의 성숙한 관계’가 상위 개념이고, 부부는 그보다 애래 있는 일종의 틀에 불과했습니다. 부부인데 다른 사람과 그래도 되느냐의 식의 고정관념을 벗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틀을 넘어선 그곳에 묘한 탄탄함이 있었습니다. (p22)
→ 이런 관계가 되어야 할 텐데. 부부이기 때문에, 무엇이기 때문에가 아니라 깊은 관계이기 때문에 부부.
이명수 “이 친구가 예전에는 상담할 때 섹스 얘기가 나오면 실체를 잘 몰라서 얘기를 해잘 수가 없었대요. 그런데 저를 만나 서로에 대한 끌림 때문에 자기가 그런 걸 좋아하고 즐기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거죠. 그런 점에서 섹스가 우리 사이에서 대단히 중요하죠.
저희는 딸내미한테 열여덟 살부터 섹스하라고 얘기했거든요. 쇼핑 많이 하면 싸고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듯, 섹스도 많이 해보면 즐거움을 찾을 수 있죠. 유럽 여자들처럼 자기 침대에서 첫 경험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안정적인 상태에서 하면 더 몰두할 수 있잖아요. 딸아이가 1년쯤 여기 머물 때마다 홍대 클럽엘 갔는데 밤새 놀고 양평까지 전철 타고 오면 우리가 아침에 역까지 마중 나가곤 했어요. 화장은 번지고 술 냄새도 좀 나고 굉장히 피곤한 얼굴로 들어오는데, 너무 귀엽죠. 그럴 때 제가 가끔 묻죠. 했냐? 근데 딸내미는 아직도 안 했어요. 저는 동거를 반드시 해보고 결혼해라. 만약 살다가 아니면 바로바로 털기 힘든데 속궁합도 맞춰보라고 하죠. 허우대는 멀쩡한데 안 맞을 수 있는거잖아요.”
- 정선생님도 동의하시는 거죠?
정혜신 “그럼요. 동거는 당연히 필요하죠. 우리는 아이들 셋 모두에게 그렇게 말했어요.”
이명수 “큰 아들이랑은 청소년기부터 섹스에 관해 많이 이야기했어요. 그놈은 일찍부터 한 것 같은데, 만약 제가 꼰대 같은 아버지라서 그 아이를 앉혀 놓고 섹스가 청소년기에 갖는 중요성 따위를 얘기했다면 얼마나 웃겼겠어요. 이미 졸라 하고 있는데 말이죠. 아이들을 지나치게 방임한다거나 아이들에게 적용하기에는 과격한 생각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맞는 거 같아요. 우리 아이들은 열여섯, 열일곱 살이 되던 시점에 각각 ‘지구상에서 나처럼 행복하게 청소년기를 보낸 애는 없을 것’이라고 얘기했어요. 우리가 가장 뿌듯해하는 경험이죠.” (p31-32)
→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 이게 맞나 싶기도하고. 잘 모르겠다.
얘기를 듣다 보니 애초에 가졌던 ‘선’에 대한 고민은 어느새 잊어버렸습니다. 두 사람은 선을 지키면서도 동시에 선 자체가 녹아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삶의 오르가슴은 그런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 것 같았습니다. 자기 얘기를 할 때는 거침없지만 옛 배우자와 이웃에 대해 얘기할 때는 지극히 조심하는 배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함께한 저의 마음도 가벼웠습니다. 바로 이게 정혜신, 이명수가 말하는 ‘홀가분’이지 싶었습니다. (p34)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 저항하는 검열자 : 박경신
“작은 누나가 분단을 투쟁과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잖아요. 작은누나의 운동을 막으려고 가족이 이민을 갔는데, 결국 그 분단이 낳은 편견과 공포에 큰누나가 희생된 거죠. 사람들은 흔히 ‘좌파는 너무 이상적이다. 비판은 옳은데 방법이 틀렸다’고 얘기하며 방관자의 입장에 서요. 그런 핑계로 눈앞의 문제를 피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얼마나 나쁜 일인지 그때 알게 됐어요. 만약 제가 그때 적극적으로 작은누나를 변호하며 편견과 공포에 맞섰다면 큰누나도 ‘내 동생이 뭐가 잘못됐냐?’며 당당할 수 있었을 테고, 자살도 하지 않았겠죠. 지금도 책임을 느껴요. 그다음부터는 큰누나 몫까지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무슨 일을 하든 더 열심히 해요. 큰누나가 살지 못한 만큼 제가 대신 살아주는 게 죽은 사람에 대한 가장 올바른 추모라고 생각하는 거죠.”(p41-42)
모 아니면 도, 그래서 인생이 꼬였죠 : 고종석
괴상한 놈 하나 왔다 갑니다 : 유시민
현실 정치 10년을 한 다음 제가 졌다고 인정하는 거예요. 힘들어도 전망이 보이면 계속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졌어요. 지역 구도를 혁파하는 정당 혁신, 참여 민주주의, 정책 경쟁이 일어나는 정치를 목표로 10년을 했어요. 그런데 안 됐고, 될 가능성도 안 보이니까. 목표는 올바르더라도 대중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그 목표를 이룰 사람으로 저를 받아주지 않으니까, 이제 졌다! 내가 가진 모든 걸 갖고 할 만큼 해봤는데 저는 졌습니다! 인정하는 거예요.(p63)
우리 정치는 51퍼센트를 얻어야 생존이 가능하잖아요. 독일은 5퍼센트만 받아도 생존해요. 태양과 반대쪽으로 잎을 뻗고 싶어하는 놈도 5퍼센트만 받으면 살아남아요. 우리 선거제도에서는 다양성이 꽃필 수가 없어요. 노 대통령의 대연정은 권력의 절반을 한나라당에 내주더라도 선거제도만 바꾸면 이런 다양한 정당들이 자기 색깔을 유지한 채로 꽃밭처럼 흐드러질 수 있다는 얘기였어요. 저도 거기 100퍼센트 공감했고요. (p71)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무서운 사람 : 윤태호
→ 미생보기.
꼰대가 될 수 없어 행복해요 : 김조광수
- 감독님의 영화나 인터뷰를 보면 어두운 얘기는 피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별 얘기도 하나쯤 들려주시죠.
“예전 파트너에게 맞고 산 적도 있어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저의 로망이에요. 초반에 저를 많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끌려요. 그런데 그런 사람은 집착이 강하기 쉽죠. 자기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정신적으로 확 돌면서 손찌검을 하고, 그러고는 미안하다고 울면서 매달리고.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자들과 제가 똑같았아요. 그 순간만 지나면 그 사람이 너무 안타깝고 내가 구원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옆집의 신고로 경찰서에 간 적도 있는데, ‘당신들 호모야? 호모들이 드러내놓고 싸우기도 하는군’ 하면서 비아냥거리고. 그런데도 1년을 더 살았어요. 마지막에는 도저히 안 되겠다, 나부터 구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헤어졌죠. 왜곡된 사랑이었어요.”(p93)
당신이 굳게 믿는 그것이 진리일까 : 김연희
자기 일을 설명하는 김연희 씨의 태도는 지극히 담담했습니다. 손님이 한 명도 없는 날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 열두 명까지 상대하고 “시체처럼 쓰러져 기절하듯 잔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뭐든지 사고팔 수 있다는 생각은 신자유주의적인 것 아니냐? 사회경제적 약자가 억지로 성매매에 내몰리는 것 아니냐? 제3자인 성산업만 살찌우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줄줄 이어지는 저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간단했습니다. “세상에 안 그런 노동도 있나요?”(p101)
- 일하면서 느낀 한국 남자들의 특징이 있다면?
“말을 안 듣는다는 느낌. 외국 손님보다 배려심이 부족하고 거칠어요. 다들 정말 외롭고요. 자기가 집에 돈만 벌어다주는 기계 같다는 분, 연애 상담하는 분, 잠깐 친구가 필요하다는 분, 심지어 저하고 애니팡 게임만 하다가 그냥 가는 손님도 있어요.(웃음)”(p108)
- 성매매가 범죄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신이 굳게 믿는 것에 대해서 한 번쯤 물음표를 던져봤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p108)
2장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
함께 공부하면서 자신의 꼬라지를 알게 되죠 : 고미숙
2004년에 출간된 ‘아무도 기획하지 않는 자유’는 수유리의 작은 공부방에서 소수의 국문학 연구자들로 시작된 모임이 서울사회과학연구소의 사회과학자들과 결합해 ‘수유+너머’라는 연구 공동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역동적으로 보여준 ‘인류학 보고서’입니다. 소모적인 교수 임용에 매달려 ‘정력을 탕진’하느니 경제적 자립과 배움이 가능한 ‘열린 광장’을 만들겠다는 젊은 고전연구자 고미숙의 꿈은 곧 300평이 넘는 용산의 옛 정일 학원 건물로도 모자라는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었습니다. (p112)
- 요즘 SNS에서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일종의 ‘사냥’ 현상이 있잖아요. 사건만 터지면 모두가 나서서 미친 듯이 돌을 던지는 거요. 개인의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문제 같은데 명리학이 이런 문제에도 답을 주나요?
“억압된 측면이 폭력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언어 폭력이 제일 쉬우니까요. 옛날에는 열대여섯 살에 결혼을 했잖아요. 연애나 짝짓기 때문에 고민할 시간이 없었고 그때쯤 당연히 결혼하고 성욕도 해결한 건데, 지금은 그게 완전히 차단됐어요. 결혼적령기가 이제 서른세 살이더라고요. 옛날의 딱 두 배가 된거죠. 에너지가 제일 활발할 때 딱 갇혀 있게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에너지가 어디 가나요? 우주적으로 절대 사라지지 않아요.
이 시기를 너무 모범적으로 넘기면 중년에 폭발해요. 중딩도 문제지만 50~60대도 안정적이지 않아요. 돈과 권력을 갖는 나이이다 보니 주로 성과 관련한 사고를 치죠.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자기도 몰라요. 그렇게 자기를 모르면서 하는 행위가 많아질 때 명리학적으로 ‘흉하다’고 해요. 명리학적으로는 돈이 갑자기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오면 그것도 흉하다고 하죠. 명리학, 의역학의 핵심은 자기 운명을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 조절하는 데 있어요. 대단한 공력이 필요하죠. 그런데 이걸 훈련할 기회가 전혀 없어요. 그런 훈련 없이 그저 참고 또 참고 억누른 사람이 40대에 성공을 해요. 성공해봤는데 허전해. 맛있는 걸 먹어도, 집이 아무리 커져도 충만함이 없어. 그럴 때 자기성찰로 나아가면 그나마 출구가 있는데 그런 경우는 드물고, 대개 성이나 도박으로 가요. 그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예전에는 ‘도덕적으로 어떻게 저럴 수가’ 했는데 이제는 그냥 안타까워요. (p115-116)
→ 빨리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
“고전문학은 무조건 지구력 있는 놈이 살아남는 거예요. 재능이고 테크닉이고 다 필요 없어요. 성실함 말고는 다른 게 없어요. 한문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선배들의 혹독한 수련을 받았죠. 석사 논문을 쓸 때까지 제가 겪은 글쓰기 훈련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수련으로 제 인생이 바뀌었어요. 1년 동안 단 한 번도 세미나에 빠지지 않았어요. 그렇게 돌파하니 선배들이 제가 독문과 출신인 걸 의식하지 못했어요. 공부의 기초를 집중적으로 훈련받은 그때가 내 인생 최고의 시간이었어요.”(p118)
→ 몰입. 이 사람도 몰입한 때가 있었다.
- 공동체가 항상 이상적일 리는 없을 텐데 혹시 배신을 당한 적은 없나요?
“매일매일이 배신의 연속이죠.(웃음) 배신을 많이 하기도 하고 많이 당하기도 해서 저는 ‘배신의 달인’이에요. 다들 공동체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모였다가 엄청난 번뇌를 겼었죠. 그러면서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됐고, 명분으로 만나고 명분으로 헤어지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감정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어요. 불교의 승가공동체, 유교의 강학원, 기독교의 수도원뿐만 아니라 바둑이나 무술을 배워도 함께 먹고 자면서 공부를 하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의 꼬라지를 알게 되고, 나라까지 떨어지기도 하죠. 그러다 문득 이게 인류가 살 수 있는 최고의 삶인 것을 알게 되죠. 번뇌가 곧 보리라는 게 이런 거구나. 이런 걸 겪지 않고 깨달음이 오나 싶어요.”(p121)
난 프티부르주아, 죄책감은 사라졌다 : 유시주
- 여러 번 거절하다가 결국 소장 제의를 받아들인 이유는 뭐였죠?
“상임이사는 창립 후 5년이 되면 조직을 떠나는 지병이 있어요.(웃음) 의미 있는 작업을 시작해 튼튼한 토대를 만들지만 떠날 때는 완전히 내려놓는 훌륭한 분인데, 희망제작소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다들 예상했죠. 상임이사가 떠나기까지의 과도기에 제가 일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무엇보다 일 욕심과 아이디어가 많은 상임이사가 투하하는 ‘폭탄(일거리)’을 막을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다행히 저는 운동권 시절 자라를 보고 놀란 적이 있기 때문에 솥뚜껑을 봐도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어떤 교리, 권력, 위대한 인물에도 100퍼센트 빠져들지 않아요. 인간은 누구든지 불완전하고, 불완전한 인간이 만드는 어떤 조직도 불완전하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상임이사가 굉장히 훌륭한 분이기는 하지만, 저는 충성심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았어요. 저는 소리 내서 싸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저만의 방식으로 조직 내부를 조정하면서 상임이사의 폭탄을 막았죠.”
- 어떤 방식이죠?
“‘네’ 해놓고 뭉갤 때도 있었고요. 크게 충돌해서 한 번은 사표를 쓴 적도 있어요.(웃음)”(p127-128)
→ 뭔가 나랑 비슷한 것 같다.
칼기 피격과 스승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 김대진
연습실은 의식의 세계라 교육의 결과를 확인할 방법이 없고, 무대에 올라야 평소에 내가 주문한 것들이 어느 정도 받아 들여졌는지 확인할 수 있죠. 의식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다 입력시켜, 무의식의 세계에서 어떤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도와주는게 교육이에요. (p138)
→ 무의식을 바꾸는 것. 툭 건들어도 툭 튀어나오게 만드는 것. 거의 존재를 바꾸는 수준? 그러고보니 그런 것 같다. 학교에서 하던 공부도 내 머리 속의 생각 흐름, 체계를 바꿨던 것 같고, 여기서 했던 훈련들도 행동을 바꾸어 놓았다. 무한 반복의 힘인가 싶기도 하다.
흔히 말하는 정석 코스, 즉 예원, 예고 나온 애들이 피아노 치는 게 다 흡사한 이유가 거기 있어요. 우리는 남과 다를까 걱정하고, 외국 애들은 남과 같아질까 걱정하죠. 물론 그림이 되려면 일단 액자 안에 들어가야 해요. 남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성이라는 틀을 갖춰야하죠. 그러나 액자 안에 들어가면서도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이 아니라 난생 처음 본 그림이라는 느낌을 줘야 해요.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액자 만드는 방법만 가르친게 아닌지 반성하고 있어요. (p140)
인기 없을 땐 어떻게 살 거냐. 그게 제일 중요해요 : 신대철
자존심이 편집장에게 미치는 영행 : 이충걸
언어는 존재의 집이기 때문에 말을 후지게 하면 존재 자체가 남루하게 느껴져요. 사실 언어가 예전에는 권세였잖아요. 나라가 망하려면 말부터 망하거든요. 언어는 신령한 거예요. 형체가 없는 음악이 우리 마음을 만지는 것처럼, 언어도 알 수 없는 기호가 합쳐짐으로써 우리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잖아요. 붕대로 싸맸다가 칼로 베었다가. 그만큼 언어는 절대적이죠. (p168)
→ 언어에 이런 의미가 있었구나.
어느 날 부끄러워졌어요. 내 위악과 공격성이 : 변영주
김동원 감독의 권유로 기생 관광 다큐를 만들러 제주도에 내려갔어요. 그때는 제주도의 특급 호텔 지하마다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한 요정이 있었거든요. 거기 일하는 언니 한 명을 소개받아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았는데, 알고 보니 그 언니의 어머니가 위안부셨어요. 위안부 어머니의 수술비를 마련하려고 공장을 다니다가 성매매 여성이 된 거였죠. 아, 이게 정말 여성의 운명인가 생각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계시던 ‘나눔의 집’까지 찾아가게 됐어요.(p176)
날것처럼 살아 있지만 그 위험을 아는 관찰자 : 김성희
- ‘먼지 없는 방’에는 반도체 공정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지루해하는 독자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복잡하고 위험한 반도체 공정에 대해서는 애정씨도 처음 입사해서 30분 정도 배운 게 전부예요. 자기가 다루는 설비만 해도 공부할 게 너무 많아서 전체 공정은 곧 잊어버렸죠. 남편이 죽고 소송을 하면서 비로소 클린룸이 유해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돼요. 저는 독자들도 애정 씨와 똑같은 경험을 하기를 원했어요. 처음에는 어려워서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애정 씨의 캐릭터에 감정이입이 되면서 앞부분을 다시 찾아 읽었다는 독자들도 많아요. 여고 3학년 때 취업한 열아홉 살 친구들이 복잡한 공정을 배우며 ‘이걸 다 읽으라는 거야?’ 하고 느꼈을 버거움을 독자들도 똑같이 느끼는 거죠.”(p187)
→ 와.. 이런 발상.
3장_ 사연의 속살, 그 깊은 우물들
케니 지의 <미러클>을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꿈 : 강기훈
- 사건을 처리한 판검사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제가 원래 혈압이 좀 낮습니다. 특히 밤이면 혈압이 많이 떨어져요. 며칠 전 밤에 병원에 실려 갔는데 레지던트는 제 혈압을 보고 비상상황이라고 생각했어요. 주치의가 퇴근하면 레지던트가 ‘밤의 권력’인데, 하필 공명심에 불타는, 뭐가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애가 온 거예요. 제가 ‘평소에도 그러니까 혈압에 대해서는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절대 듣지 않아요. 얘가 중심정맥을 잡겠다고 어깨에 구멍을 뚫는데 수십 번을 해도 못 잡는 거예요. 저는 굉장히 아픈데 얘들은 절대 환자를 보지 않죠, 얘들의 시선은 구멍을 뚫는 데만 가 있어요. 겨우 성공해서 한 방울씩 처방을 늘려가다가 아침에 심장 쇼크가 왔어요. 주치의가 나중에 보고 황당해하면서도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해서 사고가 나는 것보다는 그래도 쇼크가 오든 말든 뭘 하다가 실수하는 게 레지던트 입장에서는 덜 혼날 일’이라고 설명하더군요. 그게 프로토콜이에요.
검사도 똑같아요. 대한민국에서 ‘사’자 붙은 직업 중 가장 뭔가를 하고 싶어하는 애들, 공명심에 불타는 애들이 검사예요. 여자 검사들도 있지만, 여전히 거기는 수컷 세상인데, 대한민국 수컷들은 권력을 쥐면 휘두르고 싶어 안달이거든요. 그게 메커니즘이죠. 검사들이 정치권력의 눈치를 본다고요? 아니에요. 걔들은 자기 논리대로 움직여요. 자기 조직의 논리가 자기 논리이기도 하죠. 그 논리를 가지고 일을 저지르면 조직 안에서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아요. 뭐라도 일을 벌여야 올라가는 거예요. 실존적으로 고민해봐야 소용없고요, 걔들을 움직이는 건 딱 한 가지예요. 뭐라도 하겠다는 공명심.”(p206-207)
→ 와... 공명심. 그러고보니 공명심. 나도 무언가 해 보려는 공명심 때문에 일을 벌이는 건 아닌가.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뭘 자꾸 하려는 것 아닌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텐데. 나를 존중하고 자아를 세우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상처를 돌아보며 내 삶과 화해하고 싶어요 : 문부식
그 무렵 문부식은 어떤 모임에서든 밤 11시만 되면 어김없이 자리를 떠나곤 했습니다. 민주화운동 보상 신청도 하지 않은 전직 사형수가 편의점 ‘알바’를 위해 자리를 뜬 뒤에도 저를 포함한 <당대비평>의 다른 편집위원들은 대부분 자리를 지켰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한때 운동권 언저리를 맴돌았으며, 지금은 주로 교수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부식은 그때 느꼈던 적막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눈이 많이 오던 겨울밤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 술 한잔 걸치고 집에 왔지요. 혼자 자전거 타고 편의점으로 가다가 미끄러져 공중에 떴다가 자빠지고 난 뒤 생각했어요. ‘이런 젠장, 내 인생은 뭐지?’ 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어울리던 친구들과 저는 다른 인생이었던 거죠. 그동안 지녀온 지적 자존심이 삭풍과 함께 날아가버린 것 같은 쓸쓸함.”(p217)
→ 마음이 참...... 나도 이런 삶을 살까.
‘운명에 대한 질투’는 내가 안고 갈 십자가 : 공지영
- 트위터에서 사라진 지 불과 20일 만에 복귀하셨어요. 놀라운 상처 복원력입니다.
“저의 복원력은 딱 하나예요. 난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워. 시간이 아까워. 제가 모스크바에 가서 호텔에서 남편에게 맞고 나서도 파란 아이섀도 바르고 혼자 박물관에 갔거든요. 맞은 것도 억울한데 그것 때문에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쌍용차와 관련한 중요한 일정이 많이 남아 있었어요. 그래, 내가 ‘죽일 년’이라도 좋으니 나는 ‘의자놀이’를 팔아야겠어. 어떻게 욕해도 나는 팔 거야. 추석 전에 도움이 되게 할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왔죠. 매사가 그래요. 상처 입을 걸 알고 나서면 오히려 다치지 않아요. 상처 입지 않으려고 하면 다치더라고요. 강한 에너지는 집착하지 않을 때, 욕심부리지 않을 때 나와요.”(p229)
→ ㅎㅎㅎ 나도 이런 생각한 적 많은데..ㅎㅎ
내 인생에서 가장 추운 시기는 바로 지금 : 하종강
둘째 줄에서, 최소한 비겁해지지 않으리 : 이상호
- 고발뉴스를 보면 삼성을 많이 비판하더군요..
“삼성에 의해 장악된 미디어 환경에서는 독립적인 목소리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에요. 광고뿐만 아니라 협찬과 후원이 어마어마한 규모인데, 요즘은 삼성 없이는 드라마를 만들 수 없다고들 해요. 하지만 드라마는 우리 일상과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어야 하잖아요. 예전의 <전원일기>를 보면 소값 파동, 추곡수매 같은 일상의 걱정, 근심, 분노, 위로가 담겨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드라마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시놉시스를 들고 대기업에 찾아가서 돈을 땡겨와야 해요. ‘남녀 간의 삼각관계 드라마를 만든다’고 하면, 삼성은 ‘애니콜이 새로 나왔으니 대기업 스마트폰 디자인실에 근무하는 사람들로 하자’고 설정을 바꾸는 식이에요.<전원일기>는 농약, 제초제 말고는 간접광고 할 게 없으니 사라질 수밖에 없죠. 방송에서 보여주는 모든 것이 삼성의 영향권에 있다고 보면 돼요. 거울이 거울 역할을 못하는 거죠.”(p255)
→ TV, 드라마의 영향력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이런식의 이미지 메이킹도 가능하겠다. 드라마는 참 무서운 도구인 것 같다. 되도록 보지 말아야할 세뇌 교육의 교과서.
“한열이 형이 2학년 과대표, 제가 1학년 과대표였는데, 경영학과는 학생 수만 많을 뿐 의식 수준이 낮아서 학생회도 친목회에 가까웠어요. 1987년 6월 9일에도 한열이 형이 ‘내일부터는 시민들이 나올 테니까, 딱 오늘까지만 홍보전에 같이 나가자’고 저를 꼬였어요. 그러면서 자기는 제일 앞줄에 서고 저는 그 뒷줄에 섰죠. 제일 앞줄과 둘째 줄은 완전히 달라요. 첫째 줄이 99의 부담을 진다면 둘째 줄부터는 그 부담이 1로 줄어들죠. 그날 저의 바로 앞에서 한열이 형이 최루탄을 맞았잖아요. 그가 없었다면 제가 맞았을 상황이었죠. (눈물이 글썽) 나이가 들수록 둘째 줄의 의미를 자꾸 생각하게 돼요. 가장 비겁한 게 둘째 줄인데, 기자는 직업적으로 둘째 줄에 설 수밖에 없어요. 첫째 줄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 노동 환경과 비정규직 문제를 제기할 때, 기자는 아무리 훌륭해도 그걸 전하는 둘째 줄밖에 못되니까요. 남의 삶을 통해 말하는 거간꾼에 불과하죠. 20대 때부터 한열이 형의 삶을 반추하다가 2003년 <시사매거진 2580>에서 배달호 열사를 취재하면서 확신을 갖게 됐어요. 내가 첫째 줄에 서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둘째 줄에서 비겁해지지 말자!”(p257-258)
→ 이 사람도 역사의 순간에 있었던 사람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이 책에는 역사의 순간에 있었지만 이름 몰랐던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 기자 하는 동안 조직 내에서 충돌이 많았죠?
“보도국 3년 차에 어느 자치단체장의 불법 레미콘 공장 운영 비리를 고발했어요. 그 보도가 나가고 며칠 뒤 경제부에서 그 자치단체가 경제를 살리고 있다는 기사를 내더군요. 예나 지금이나 늘 잘나가는 어떤 선배가 쓴, 이른바 ‘반까이 홍보기사’였죠. 그때 제자리에서 일어나 보도국을 쭉 둘러봤어요. 내 기자 삶에서 본받고 싶은 선배가 하나라도 있는지 찾아보려고요.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가만히만 있어도 올라가기 마련인 ‘성장 컨베이어벨트’에서 내려왔어요. 외교부에 출입할 때는 부산항 입구에서 미국 핵잠수함이 급부상하다가 민간 어선과 충돌한 사건을 추적했는데, 대통령이 방미하는 시기라며 위에서 보도를 막은 일도 있었어요. 외교부도 저를 비토(veto)하고 저도 보도국이 싫어서 <시사매거진 2580>에 자원해서 나갔죠.”(p261)
내 묘비명은 인권운동가였으면 좋겠네 : 인재근
당신은 어른이 되는 데 성공했나요? : 천명관
4장_ 찬찬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진영 논리의 틈바구니에서 팩트를 찾는 야인 : 김종배
집안일 많이 하며 죄악을 씻고 있어요 : 박노자
- 오슬로대학의 교수 생활은 어떻습니까? 연구 업적에 쫓기는 삶인가요?
“노르웨이는 위대한 초일류국가 대한민국만큼 선진화가 안 됐잖아요. (웃음) 동료들이 4시면 퇴근해요. 밤늦게까지 일하는 저에게 동료들은 두 가지를 묻곤 했어요. 언제 이혼하냐, 왜 근로기준법을 어기냐? (웃음) 누가 시킨다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처럼, 연구도 직업적인 관심을 가지고 자기가 좋아서 해야죠. 국가나 학교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연구는 성매매와 같습니다. 한국에서는 미국의 권위 있는 잡지에 논문이 실리면 몇 천만원 씩 주기도 한다면서요? 정신분열입니다. 자기 영혼을 그렇게 파는 교수는 성매매보다 백배 천배는 나쁜 짓을 하는 거죠.”(p302-303)
어느 날 부장 교사가 제게 육탄 공격을 : 송인수
“토플 점수 반영을 금지하는 특목고 입시제도가 도입되면서 관련 학원의 매출이 급감했어요. 우리가 특목고 입시정책과 관련해 여러 차례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됐고,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자기주도학습전형으로 정책을 변경하면서 외고 대비 중학교 영어 사교육은 성장세가 꺾였죠. 하지만 영어가 꺾이자 수학 사교육이 문제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전국 단위 표본조사를 통해 중고교의 수학 기출문제를 싹 다 뒤졌어요. 진도를 벗어나는 범위에서 문제를 출제했는지, 난이도가 지나치게 높지 않은지 두 가지 척도로 재보니 상당수의 중고교 문제에 엄청난 선행 요소가 있었어요. 바로잡으라고 촉구하니까 교과부가 교육청들과 협의해서 전수조사에 나섰죠.”(p313)
→ 시민단체의 힘? 공무원 조직 사회에서는 아랫사람이 이렇게 하려면 한 세월 걸리는데... 시민 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운동을 시작할 때 몇 가지 전략이 있었어요. 첫째, 사교육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계층을 불문하고 온 국민이 피해자이기 때문에 이념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는다. 둘째, 사람들과 소통할 때 어려운 말을 쓰지 않고 보도자료에 경어체를 쓰는 등 설득과 겸손의 방법론을 택한다. 셋째, 통계와 데이터로 말하지 ‘쌩주장’을 하지 않는다. 단일 주제로 23차 토론을 한 적도 있습니다. 지긋지긋하게 팠지요. (p314)
“윤지희 공동대표의 권유에 따라서 2010년 중2 아들과 둘이서만 10박 11일 해외여행을 했어요. 정말 생살 뜯어내듯 바쁜 일정을 포기하고 떠난 여행이었어요. 아내가 따라오려고 하기에 제가 그랬죠. ‘당신하고는 문제 없잖아. 당신이 오면 우리 둘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이 아이도 나를 직면해야 하고, 나도 이 아이를 직면해야 해.’ 옆자리에서 충돌도 하고 대화도 하면서 아들과 가까워지는 계기를 만들었어요. 나중에 제 생일에 아들이 편지를 보냈는데 ‘아빠도 인간이고 남자이고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것을 느꼈어요.’라고 썼더군요. 소통이 되니까 저의 가치관도 받아들여서 지금 고1인데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소책자가 있으면 친구들에게 나눠주려고도 해요. 힘든 여행이었지만 다녀오기를 잘 했어요.”(p317)
→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연락도 안되는 낯선곳으로 가서, 다른 사람과 시간을 보낸다는 것.
“처음으로 담임을 맡았는데, 학급 15등 이내 학생들 집에 전화해서 불법찬조금을 20만 원씩 걷어야 했어요. 각 학급에서 300만 원씩 열두 반 총 3600만 원을 모아 회식비, 야간 자율학습 수당, 교장 ‧ 교감 수당 등으로 썼을 거예요. 제가 ‘양심 때문에 못하겠다’며 야간 자습과 희망 자율이니 전체 학생을 강제로 남기는 것은 불법이라고 거부했어요. 그러자 어느 날 부장 교사가 회의 중에 저와 언쟁하다가는 다른 교사들은 모두 나가게 하고 육두문자와 함께 ‘나도 널 선생이라고 하지 않겠다. 너도 날 선생이라고 부르지 말라’며 저에게 돌진하더군요. 사사건건 반대하는 제가 그만큼 미웠던 거예요. 제 옆자리이던 그분을 피해 두 달 동안 교무실 대신 아무도 없는 지하 보일러실로 출퇴근하면서 지냈지만, 저의 교사 인생은 그때 처참하게 망가진 셈이었어요. 자긍심이 바닥난 파산 상태에서 거의 기어서 간 게 선교한국대회였죠.(p317-318)
- 좋은교사운동에 헌신하면서 정작 본인은 교직을 떠난 게 아이러니입니다. 정치권의 부름도 있지 않나요?
“운동은 갈수록 커지고 누군가는 그 일에 집중해야 했죠. 그러나 단순히 일이 많아서 퇴직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운동이 힘을 가지려면 강력한 희생 공동체에 기반을 두어야 해요. 중심에 선 사람이 희생하지 않고 이익을 보면 주변은 설득할 수는 없죠. 교직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 저의 퇴직은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었습니다. 요즘 저는 사무실에서 데이터와 씨름하며 공장을 돌리는 공장장처럼 살아요. 디테일에 하자가 있는 운동은 구호만으로 성공하지 못하거든요. 민간 교육부라는 자부심을 갖고 책임 있는 자료를 만들려고 노력하죠.
→ 무슨 운동이든 누군가 희생해야 하는 것 같다.
나를 키운 8할은 허접스러운 B급 문화였다 : 김창남
386 무용담은 사양합니다 : 이진순
- 학생운동 시절에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제가 잘못한 것만 열거해도 엄청나죠. 예를 들면 지금 사는 성수동은 제가 야학했던 동네예요. 야학에는 두 종류가 있었어요. 교회 같은 데서 하는 검정고시 야학과 우리가 하던 노동 야학. 노동자들은 주로 검정고시를 위해 야학에 왔어요. 그런데 거기다 대고 검정고시를 꼭 봐야 하냐면서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만 했죠. 그때 그냥 검정고시나 제대로 가르칠걸 하는 후회가 돼요. 흔히 386들은 자기가 잘못한 거는 말 안 하고 고생한 무용담만 얘기하는 경향이 있는데, 옛날에 뭐했는지가 뭐가 중요해요.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죠.”(p339)
- ‘제3의 힘’ 또는 386세대가 정치 분야에서 실패했다면 그 이유는 뭘까요?
“룸살롱에 왜 갔냐 같은 건 화두가 아니고요. 기성 정당의 논리와 자기를 구별하는 정체성이 없기 때문에 실패한 거예요. 5 ‧ 18을 맞아 광주에 내려갔으면 선배 정치인이 끌고 갔다고 해도 ‘저희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치기라도 보였어야죠. 재수 없어 터진 사건이 아니에요. 정치인뿐 아니라 우리 세대 중장년층, 1960~1970년대에 태어난 박정희의 아들딸이 갖는 일반적인 성취지향성의 문제예요. ‘일단 내가 살아남아야 하고 힘을 가져야 해. 일정한 직급에 올라가면, 그때 가서 우리 회사를 이렇게 바꿀 거야’하고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그 과정에서 자기가 변하는 건 생각하지 못한 거죠. 제가 요즘 이런저런 운동을 하고 싶다고 하면, 정말 도와줄 줄 알았던 선배 중에 ‘네가 대학교수 정도는 돼야 어디 얼굴이라도 나오지’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게 기존 문법을 따라가는 과정에서 모두들 상상력을 잃어버렸어요. 끊임없이 자기 상상력을 반납하면서 기존 페이스를 따라간 거죠.”(p340)
조용한 신중함으로 진심을 전달하다 : 박선숙
- 내성적인 성격이라 대변인 일이 힘들지 않았나요?
“100명 가까운 거친 남자 기자들이 있는데 여자로 혼자 들어가서 벌벌 떨었어요. 기자들도 그때의 제가 엄청 불쌍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제 별명이 ‘무상녀(무작정 상경 소녀)’였어요.(웃음) 누구랑 시선이 마주칠까 봐 고개도 못 들고 지내는데, 어떤 기자가 와서 ‘여기 있는 사람들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다’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정말 위로가 됐어요. 이번에 제가 인터뷰를 거절하자 김 교수님이 ‘나쁜 사람 아니니 한 번만 만나달라’고 하셨죠? 낯가림이 심한 편인데 1995년 당시와 똑같은 그 말을 전해 듣고 제가 또 넘어갔어요.(웃음)”(p351)
칼 든 후배 앞에서의 약속이 오늘의 나를 : 김흥신
페미니스트로 살았으되 사랑이 최고더라 : 유숙열
역사책을 읽은 것 같다. 60~70년대에 태어나 80~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의 역사가 담긴 책이다.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실(미 문화원 방화 사건이나 유서대필사건 등)은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 속의 사람들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다.
그 시절을 살던 20대와 나와는 다른점이 많은 것 같다. 낯선 단어들이 많다. 운동권, 체포, 고문 등. 불과 20~30년 전인데. 사람들 참 뜨거운 마음을 품고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며 살았던 것 같다.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바꿔가려하며. 그 사람들이 오늘을 사는 이야기는 솔직히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 아니, TV 드라마에 나올 법한 신데렐라도, 백마 탄 왕자 이야기랑도 거리가 멀다. 뭔가 쫌 구질구질 한 것 같기도 하고 쓸쓸하기도.(사진들이 흑백이라 그런가?)
읽고보니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쓰지만 영근 삶을 살아온 30인의 인생 이야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등장했구나.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린다 싶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며 읽었는데 이틀만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어떻게 살까. 잘 모르겠다. 다들 마음 속에 따뜻함과 열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냉소와 쓰라림도 있는 것 같다. 그냥 그렇게 사는게 인생이려나.ㅎ 답이 없다. 노답이다.
뭔가를 할 땐 몰입해서, 뒤 없이 열심히 해야겠지만, 할 일이 없다고 하지는 말자. 항상 다른 길이 있다.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사람의 길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Proverbs 20:24)
이 책도 쫌 좋다. 역시!
2014.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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