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우웬의 책.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직접 쓴 책은 아니고 그의 수업을 들었던 제자?들이 수업 내용을 정리해서 엮은 책이다.
언제 쓰여졌는지 모르겠다. 2007년에 한국에서 출간됨.
머리말 - 영성 수업을 위한 훈련들
우리는 계속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감춘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 중 비교적 편안하게 느껴지는 부분과 긍정적 반응이 나오리라 생각되는 부분만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 생활은 아주 선택적이고 좁아진다. 마음의 훈련이 일정한 지도를 요구함이 분명하다. 그래야 두려움을 극복하고, 신앙을 심화시키고, 내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영성 지도자가 던져야 할 전형적인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당신의 기도 생활은 어떤가? 당신의 삶 속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 있는 공간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가? (p11)
→ 정말 맞는 이야기. 좋은면만 보여주고 싶어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받을 수 있는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것 같다. 칭찬받을 수 있는 이야기, 내가 잘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 솔직하게, 정직하게 살아가는게 참 어렵다. 어렵다. 그런 관계가 필요한데 나 자신과도, 다른 사람과도, 하나님과도 그런 관계가 필요한데. 서로 다 연관있는 것 같다. 어느 한 쪽에서 뚫어야 다른 관계에서도 솔직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성한 독서를 장기간 날마다 실천하면 우리의 정체성, 행동, 공동의 신앙생활이 변화된다. 성숙한 영성 지도자는 우리와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이 솔직하고 꾸준하도록 도와주며, 공동체적 해석의 시각을 더해 준다. 물론 성경에는 우리를 위한 개인적인 말씀이 있지만, 역사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면 나 자신의 의도를 떠받치려고 성경을 뒤지는 빤한 덫을 피할 수 있다. (p12)
첫 번째 시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1. 마음을 다스리다_ 매일 1시간씩 비워두기
당신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문을 당장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때로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이 너무 크고 자신의 고통에 지나치게 동화되어서, 의문들이 고통에 가려질 때가 있다. 고통이나 혼란을 일단 의문에 담아내거나 의문으로 표현했으면, 이제 거기에 답하기보다는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러므로 지도를 구하는 일차 과제는 당신 자신의 고민, 회의, 불안을 대면하는 것이다. 요컨대, 당신의 인생을 하나의 추구로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의 삶, 나의 삶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다. 우리의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친구이시고 최고의 길잡이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걸어야 할 여정이다. (p21)
→ 당장에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을 수 있다. 그게 인생.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어떻게 결론 날지 알 수 없지만 살아 가는 것.
그래서 어려울 때에 영적 도움을 구하려면 우선 추구 자체를 부인하지 말고 인정해야 한다. 괴로운 의문들을 던지고, 직면하고 삶으로 겪어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간단한 답을 내놓거나 받아들이려는 유혹, 하나님이나 교회나 전통이나 기타 자신이 옹호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느껴지는 것의 편한 옹호자가 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피해야 한다는 뜻이다. 경험으로 보건대 그런 허울뿐인 변증은 적대감과 분노를 일으키고, 결국 우리가 옹호하려는 그런 대상으로부터 우리를 점점 더 소외시킨다. 고통의 시기에 삶의 의문들이 당신에게 소용돌이치거든 조심하라. 쉬운 답이나 보장을 경계하라. 당신이 삶의 의문을 품고 살 때 친구가 되어 당신의 말을 들어줄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려고 하라. (p23)
의문을 품는 삶은 주류 기독교 사역에 역행한다. 지식을 주어 납득하게 하고, 기술을 주어 통제하게 하고, 권력을 주어 정복하게 하려는 것이 주류 기독교 사역이다. 그러나 영적인 경청 속에서 우리는 다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고, 통제할 수 없는 실체들을 발견하고, 우리의 희망이 권력의 소유 안에 숨겨져 있지 않고 연약함의 고백 속에 숨겨져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나?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나? 기도란 무엇인가? 내게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은 내게 어떻게 말씀하시나? 내가 속한 곳은 어디인가? 나는 어떻게 섬길 수 있나? 같은 영성 시도의 주요 의문들은 쉬운 답이 있는 의문이 아니라 우리를 실존의 말 못할 신비 속으로 더 깊이 끌어들이는 의문이다. 우리는 의문의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맞다, 과연 이것들은 의문이다. 의문을 제기하기를 주저하지 말라. 의문 속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의문을 품는 삶을 외면하지 말라. 혀 끝에 최종 해답이 없어도 걱정하지 말라.”
영성 수업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기본 추구를 인정한다. 영성 수업이 이루어지려면 의문의 정당성이 답의 가능성에 있지 않고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과 지평을 열어주는 의문의 역량에 있는, 그런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기쁨, 외로움, 두려움, 염려, 정서적 불안, 회의, 무지, 애정과 지지와 이해를 받으려는 욕구, 사랑받으려는 간절한 절규 등 일상생활의 모든 경험을 영적 추구의 본질적인 한 부분으로 인정해야 한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극한 좌절과 때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정확히 그것은 즉답이 아니라 새로운 의문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추구의 고통이 꼭 필요한 성장통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인간의 영적 발달의 원동력들을 선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의 먼 여정을 인하여 감사할 수 있다. (p25-26)
영성 수업의 주목표 중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이미 뭔가 내어줄 것이 있음을 깨닫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또한 받는 자가 되어 “네 안에 뭔가가 보인다. 너에게서 그것을 받고 싶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주는 자는 받는 자의 눈을 통하여 자신의 달란트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성 수업의 본질은 증언의 질이며, 증언이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요일1:1)를 선포하는 것이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친구들을 위하여 당신이 목숨을 버리고, 단어의 원뜻대로 ‘순교자’가 된다는 뜻이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당신 자신의 신앙 경험을 내준다는 뜻이다. 당신의 회의와 희망과 실패와 성공과 외로움과 상처를, 다른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인간됨과 의미 추구로 고민할 수 있는 하나의 정황으로써, 그들에게 내놓는다는 뜻이다. 대신 우리는 자신의 정서적, 정신적, 영적 가면들 뒤에 숨을 때가 많다. 자신의 고민들을 성장과 이해의 원천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 내놓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들, 회의와 불확실한 것들을 새삼 떠올리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분이고, 인간 경험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인생의 커다란 의문들은 답이 아니라 더 깊은 의문들로 이어질 뿐임을 뉘라서 고백하고 싶겠는가? 연약해져서 당당히 “나는 모른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영성 수업을 베풀거나 받으려면 공동의 추구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 자신의 깨어진 모습을 직시하는 용기, 지혜와 이해를 통하여 성장하는 이 역량을 활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p26-27)
→ 이런 관계를 맺어가야 할텐데...
심각한 고민과 초미의 의문을 지닌 사람들에게 나는 긍휼로 다가가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다 알 수 없는 문제의 답을 구하고 있다. 나도 답을 모르지만 당신의 추구를 돕겠다. 나는 해결책이나 최종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나도 당신만큼 약하고 유한하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자애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함께 우리는 공동체를 이룬다. 함께 우리는 영적 추구를 계속한다.”(p27)
→ 정말 맞는 말..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계속 고민해나가자 찾아가자.”
우리는 내면의 의문들을 정말로 주의 깊게 잘 듣지도 않고서 초조하게 해답을 찾아 이 집 저 집, 이 책 저 책, 이 교회 저 교회 돌아다닐 때가 허다하다. 이번에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이렇게 쓴다.
간곡히 권하노니 ... 당신 마음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 인내하라. ... 의문 자체를 애써 사랑하라. 답을 구하지 말라. 당신이 답대로 살 수 없겠기에 답은 올 수도 없다. 요지는 모든 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지금은 의문을 품고 살라.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답 속에 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 무엇이든 오는 것을 깊은 신뢰로 받으라. 그것이 당신의 의지에서, 당신의 가장 깊은 존재의 어떤 필요에서 오기만 한다면 그것을 떠안고 아무것도 미워하지 말라.
→ 빨리 빨리 해결할 수 없다. 숨기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하나님은 우리 삶의 중심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최종 해답이 있다는 환상을 벗기시고, 늘 더 깊은 의문들로 우리의 무장을 푸신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반드시 더 쉽거나 단순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정직하고 용감하며 진리의 지속적인 추구를 특징으로 하는 삶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의문을 품고 살다보면 답이 나올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문과 이슈들이 고독 속에 단련되고 성숙되는 사이에 단순히 의문 자체가 사라질 때가 더 많다. (p29)
→ 정직해지는 것, 솔직해 지는 것, 숨기지 않는 것. 아담 하와 에덴동산이 생각난다.
일기 쓰는 법
영적인 삶의 훈련들 중 하나로 일기 쓰기가 있다. 이는 당신이 읽고 있는 성경말씀, 당신의 기도생활, 영성 지도자에게서 경험한 것, 소그룹 토의에 참여한 것, 하나님이 당신의 삶 속에 하고 계신 일 등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묵상을 기록하는 것이다. 일기를 쓰고 묵상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 아니라 영적 성장을 목표로 한 활동이어야 한다. 시간이 가면서 일기 쓰기는 영성 개발의 꾸준한 훈련이 될 수 있다.
일기 쓰기는 영적인 삶의 더 깊은 의문들을 묻는 과정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 특정한 관찰과 설명과 개념에 대한 당신의 느낌을 기록하고, 기도와 경청의 정황 속에서 당신이 믿는 바를 선포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피드백은 개인의 일기 쓰기에 도움이 된다. 진정한 영적 삶을 추구한다면, 최소한 두 명을 골라서 당신의 일기를 일부 읽게 하고 영성 개발과 관련하여 의견을 들으라고 권하고 싶다. (p32)
2. 하나님의 음성을 듣다_ 순종하기
영적 훈련들이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기 시작하는 기술이고 기법들이다. 영성 개발이란 조각의 거장이신 하나님의 작업에 주의 깊게 주목하는 것이다. 내면의 사자가 드러날 때까지,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은 모든 것들이 서서히 깎여나가도록 잠자코 있는 것이다. 영성 지도란 어린 아이, 조각의 거장, 그리고 점차 드러나는 멋진 대리석 사자 사이의 상호 작용이다. 모든 지도자는 사실 드러나는 예술 작품에 환호하고 경탄하는 구경꾼이다. (p34)
대리석 덩이는 저절로 깎일 수 없고 조각가가 필요하다. 운동선수는 자기만의 트레이너나 코치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사람도 영성 지도자에게서 반드시 유익을 얻게 되어 있다. 우리는 다 자기기만에 빠지기 아주 쉽고, 자신의 무서운 속셈이나 맹점을 매번 다 감지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착각하고 있음을 어떻게 아는가? 내 취향에 맞는 성경말씀만 골라서 듣는 것이 아님을 어떻게 아는가? 누가 자기 마음을 판단할 수 있으랴. 누가 자신의감정과 통찰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 판별할 수 있으랴. 자기 마음의 욕망과 자기 생각의 추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기란 너무도 쉽다. (p40)
→ 이래서 사람이 필요하고, 서로가 필요하고, 공동체가 필요한가보다.
이런 엄격한 의미에서 영성 지도자란 상담자나 치유자나 분석가가 아니라 성숙한 동료 그리스도인이다. 책임을 다하여 영적인 삶을 살도록 나를 점검해줄 사람이다. 하나님의 활동을 분별하려는 내 끊임없는 씨름을 기도로 지원해줄 사람이다. 영적 지도자란 ‘영혼의 친구’ 또는 ‘영적 친구’라 할 수 있다. 지혜와 인도를 베풀어주리라고 우리가 믿는 사람이다. 영성 지도자와의 관계는 나의 당면한 필요, 특유의 성품, 외적 상황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영성 지도자를 격주나 매달 단위로 정기적으로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정도로 만족하는 사람들도 있다. 본질은 한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도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 거기서 하나님의 부름을 분별하게 해주는 것이다. (p41)
3. 하나님의 사랑을 받다 - 기도하기
우리는 때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라고 답한다. 좋은 일들을 하고 제법 성공하면 나 자신에 대하여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실패하면 우울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더 들어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이것뿐이다. “내 평생에 한 일을 보라 ... 보라, 보라, 보라. 나는 뭔가 좋은 일을 했다.”
또 우리는 “남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이 곧 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하는 말에는 대단한 위력이 있다. 사람들이 좋게 말해주면 당신은 아주 가뿐하게 활보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에 대하여 부정적인 말을 시작하면 당신은 슬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누군가 당신을 비방하면 그것이 마음속에 깊은 상처가 된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좋게 말하든 나쁘게 말하든,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를 결정지을 까닭이 무엇인가?
당신은 또 “내가 가진 것이 곧 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네덜란드 사람이고, 자상한 부모를 두었고, 좋은 교육을 받았고, 건강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라도 잃는 순간, 즉 가족이 죽거나 내 건강이 나빠지거나 재산을 잃는다면, 나는 내적 어두움에 빠질 수 있다.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라든지 ‘남들이 나에 대해서 하는 말이 곧 나’라든지 ‘내가 가진 것이 곧 나’라는 식으로 자신을 정의하려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되면 삶은 기복의 연속일 때가 많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좋게 말하면, 내가 좋은 일들을 하면, 내가 많은 것이 있으면, 나는 아주 흥분하여 기분이 상승된다. 그러나 상실이 시작되면, 어떤 업무를 내가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갑자기 깨닫게 되면,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는 것을 알게 되면, 친구들을 잃으면, 나는 구덩이에 빠져든다.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런 지그재그식 접근이 몽땅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당신도 당신이 하는 일이나 남들이 당신에 대하여 하는 말이나 당신이 소유한 것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 사랑에 담긴 모든 부드러움과 힘으로 당신에게 들려주시는 그 말씀을 당신이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내 유일한 소원은 “너는 사랑받는 자라!”는 이 말씀이 당신 존재의 구서구석에 울려퍼지게 하는 것이다.
위에서 그리고 안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은 “너는 내 사랑받는 아들딸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부드럽게 속삭이거나 또는 큰 소리로 외친다. 그 음성을 듣기란 정말 쉽지 않다. “너는 쓸모없다, 못생겼다, 무익하다, 비루하다, 반대 증거를 내놓지 않는 한 너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다”라고 외치는 소리들이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부정적인 소리들이 하도 크고 집요하다 보니 정말 그렇게 믿기 쉽다. 바로 자기거부의 덫이다. 도망자가 되어 당신의 가장 참된 정체를 피하여 숨게 하는 덫이다. (p49-50)
→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하는 일.. 유능하게 잘 하는 일이면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지는데 아니면 주눅든다. 남들이 뭐라고 하면 사실에 대해서만 들으면 되는데 존재를 친다. 내가 가진 것, 외모, 입고 있는 것, 재능 등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없어지면 주눅든다.
자기거부는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이다. 우리를 사랑받는 자로 선포하시는 거룩한 음성을 그것이 반박하기 때문이다. 우리 실존의 핵심 진리는 사랑받는 자로 표현된다. 우리는 한계와 영광을 둘 다 지닌 피조물로서 사랑받는 존재다. (p52)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서 우리는 자신이 사랑받는 자임을 어떻게 주장할 것인가? 내 경우는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들으신 바로 그 말씀을 날마다 되풀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말씀은 나와 당신에게 주는 말씀이기도 한 까닭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날마다 몇 분이라도 기도하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묵상하라. (p57)
4 예수님의 마음을 닮다 - 사랑하기
애덤이 어떻게 사고했는지 확실히 모르지만 나는 애덤에게 마음, 진정한 인간의 마음이 있음을 점차 확신하게 되었다.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마음임을 나는 불현 듯 깨달았다. 자신을 온전히 내 손에 맡김으로써 애덤은 신뢰하는 마음으로 내게 엄청난 양의 하나님의 사랑을 주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애덤에게 내 사랑을 아낌없이 주고 있었다. 말이나 행위를 훨씬 넘어서는 친밀함이 있었다.
육체적 정서적 지적 도덕적 삶에 온통 주의가 팔리면 마음이 최고라는 것을 잊을 위험이 있다.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물론 부모, 가족, 나 자신, 세상을 신뢰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깊고 직관적인 지식이 있는 듯 보이는데, 그 마음의 지식은 우리가 점차 획득하는 여러 사고 체계에 눌리고 흐려지기 일쑤다.
몸과 정신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쉽게 마음으로 말할 수 있고, 그리하여 지적으로 똑똑한 많은 사람들이 다다를 수 없는 신비로운 삶을 드러낸다. 이것은 신비로운 삶, 곧 마음의 삶이 실존의 아주 시초부터 하나님에게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하나님께 속한 자다. 우리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류 속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죽어서도 우리는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된다. (p69-70)
끝으로, 애덤은 내게 공동체에 대하여 뭔가 가르쳐주었다. 함께 일하는 것이 혼자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혼자 힘으로 해내려고 안달하는 세상에 있다 왔으나, 여기 너무도 연약하고 무력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하는 애덤이 있었다. 게다가 나 또한 혼자서는 애덤을 도울 수 없었다. 애덤도 나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라르슈 데이브레이크에는 브라질,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에서 온 남녀노소의 사람들이 애덤을 비롯한 장애인들을 중심으로 한 집에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 중의 가장 약한 고리인 애덤이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그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그의 필요와 연약함 덕분에 우리는 참된 사랑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워낙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모인 까닭에 애덤이 거기 없었다면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약함은 우리의 힘과 구심점이 되었다. (p71)
두 번째 시간 - 책 속에서 하나님을 보라
1 성경으로 기도를 배우다 - 기도의 시간・장소・방법
끊임없는 기도의 실천은 세 가지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우선 우리의 모든 필요와 요청을 가지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다음에 우리의 끊임없는 상념을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대화로 전환시킨다. 마지막으로 묵상과 명상적 삶이라는 매일의 훈련을 통하여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운다. (p83-84)
바울의 가르침대로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이 쉬지 않고 하나님만 생각하거나 의식적으로 그분께 말한다는 의미라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끊임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딴 생각들은 버리고 하나님만 생각한다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산다는 뜻이다. 하나님만을 위한 시간을 따로 떼어내는 것은 영적인 삶에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 즉 멋진 생각, 흉한 생각, 고상한 생각, 저질적인 생각, 교만한 생각, 창피한 생각, 슬픈 생각, 기쁜 생각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이루어지고 표현될 수 있을 때에만 기도는 끊임없는 기도가 될 수 있다. 이렇듯 끊임없는 생각이 끊임없는 기도로 바뀔 때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독백에서 하나님 중심의 대화로 나갈 수 있다. 그러려면 우리의 모든 생각을 대화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렇다면 핵심 질문은 우리의 생각이 무슨 내용인가라기보다 우리의 생각을 누구에게 내어놓는가가 된다.
우리가 더 이상 생각을 혼자만 품고 있지 않고 과감히 말로 표현하고 고백하고 나누고 대화에 가져간다면,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어떻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창피한 생각이든 유쾌한 생각이든 그것을 고립 상태에서 끄집어내서 하나님과의 대화나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 끌어들이면, 당장 그 순간부터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일단 그 모험을 감행하여 수용을 경험하면, 우리의 생각들 자체가 새로운 질을 받아서 기도로 변화된다. (p87-88)
→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님께 이야기하기. 표현하기. 이야기하기.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 느껴지든 그렇지 않든 조용히 듣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기도란 주로 경청과 기다림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 겸손한 정신, 고요한 영의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우리의 생각을 가슴으로 내려가게 하여,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선다. (p90)
아침이나 밤에 30분간 기도하거나 낮에 10분간 기도하거나 저녁식사 전후에 짤막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과 하나님 안에 우리 삶이 기도의 삶임을 잊어버리기 시작한다. (p92)
기도란 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무익한’ 시간이다. 내가 하나님께 아주 무익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내 통제 소관이 아니라서 그렇다. 내 기도에서 무엇이든 유익한 것이 나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기산이 가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점점 열매가 많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기도 하려고 떼어놓은 시간은 내 소관이지만 결과는 내 소관이 아니다. (p94)
이렇게 꾸준히 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것을 놓치고 싶지 않게 된다. 당장 감정적인 만족이 없을지라도 말이다. 10분 동안 내내 딴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계속한다. 그들의 고백은 이렇다. “내 생각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내게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나도 기도할 때 늘 대단한 생각이나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마음과 생각보다 크시기에 나는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믿는다. 기도의 커다란 신비는 내감각이나 지식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크다. 기도의 자리에 거할 때, 그 안에 안겨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이 나보다 크심을 믿는다. 결국, 그렇게 할 때 나는 아주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p98)
2 나에게 하나님은 누구인가 - 하나님에 관한 4가지 진리
하나님은 멀리 계신 하나님, 겁내고 피해야 할 하나님, 복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에 아파하시고 인간의 모든 씨름에 동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 그것이 정녕 기쁜 소식이다. 그 말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일부러 우리와 함께 있기로 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친밀한 관계에 들어선다. 하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연합하여 사시고, 우리의 기쁨과 아픔을 나누시고, 우리를 변호하고 보호하시며, 삶 전체를 우리와 함께 겪으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가까우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나의 지혜, 그리고 그보다 더 친밀하게 나의 조력자, 나의 목자, 나의 연인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다는 것을(요1:14) 우리 마음과 머리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긍휼의 하나님으로 바로 알 수 없다. (p102-103)
하나님에 관한 두 번째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되 인격적인 방식으로 계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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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는 아주 친밀한 단어다. 가장 좋은 번역은 ‘아빠’다. 아바라는 말에는 신뢰, 안전, 당당함, 소속, 그리고 무엇보다 친밀함이 묻어난다. 흔히 아버지라는 단어에 뒤따라오는 권위, 권력, 통제의 뉘앙스는 없다. 아바에 암시된 것은 우리의 부모형제, 배우자, 친구, 연인에게서 오는 감싸주고 세워주는 사랑이다. (p104)
하나님의 세 번째 측면은 받아들이기 아주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은 찾을 수 있는 분이자 또한 숨어 계시는 분이며, 임재하시는 분이자 또한 부재하시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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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빚어지기를 의식적으로 구한다면, 그 점을 깊이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어디이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언제인지 나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대단한 유혹이다. 그러나 어떤 기독교 지도자나 사제나 목사, 어떤 수사나 수녀, 어떤 영성 지도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특별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인간의 어떤 개념이나 예측으로 제한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보다 크시며, 완전히 자유자재로 친히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곳에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p107-108)
→ 하나님은 사람이 종잡을 수 없는 분...이라고 하면 보다 이 의미가 분명할 것 같다. 하나님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분이시기에.
우리의 기도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네 번째 진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그 선한 목자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까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샅샅이 뒤지는 그 여자다. 하나님은 꼼짝도 않고 집에 남아서, 자식들이 찾아와 못된 행동을 사죄하고 용서를 애원하면서 더 잘하겠다고 다짐하기를 바라는 족장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매불망 자식을 기다리고, 달려나가 맞이하고, 끌어안고, 간곡히 타이르고, 신신당부하여 집으로 들이는 아버지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원하는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기 원하신다. (p111)
3 말씀을 듣는 습관 - 영적 독서・영적 글쓰기
지적인 현대 세계에서 영적인 독서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무엇을 읽든지 모두 분석과 토론에 붙이는 경향이 있다. 말씀을 분해할 것이 아니라 내 가장 깊은 존재 안에서 말씀을 종합해야 한다. 읽는 내용이 내 생각과 같은지 다른지를 따질 것이 아니라 어떤 말씀이 나에게 직접 주시는 것이며 나만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직결되는지를 물어야 한다. 말씀을 흥미로운 대화나 논문의 잠재적인 주제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꼭꼭 숨은 구석들에까지 기꺼이 말씀이 뚫고 들어가게 해야 한다. 여태까지 어떤 다른 말도 들어간 적이 없는 그곳들에까지 말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말씀은 비옥한 땅에 뿌려진 씨가 되어 결실을 맺을 수 있다.(p126)
세 번째 시간 - 공동체 안에서 이웃을 보라
1 영적 공동체 만들기 - 용서와 축하가 있는 곳
집이라고 언제나 편한 것은 아니다 공동체는 쉽지 않다. 모든 공동체 안에는 수용의 치유와 깊은 배신이 함께 벌어진다. 우리 인간성의 훌륭한 면과 아픈 상처가 모두 드러나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공동체의 열두 제자를 하나씩 지명하시면서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도 포함시키신다(눅6:16). 배신은 신뢰를 깨뜨린다는 뜻이다. 배신자란 ‘넘겨준다’는 뜻이다. 공동체 안에는 당신의 신뢰를 배신하거나 당신을 괴롭히거나 원치 않는 일로 넘겨줄 사람이 늘 있게 마련이다. 공동체가 생기는 순간 문제도 같이 생긴다. 일찍이 어떤 사람은 “공동체란 당신이 가장 함께 살고 싶지 않은 사람 늘 살고 있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당신의 비위에 거슬리거나 요구가 너무 많은 사람이 당신의 공동체 안 어딘가에 늘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꼭 한 사람만 배신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가 그 사람일 수도 있다. 당신이 그 사람일 수도 있다. 문제는 공동체 내의 어느 한 사람이 아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본의 아니게 또는 자신도 모르게 늘 서로 고생으로 넘겨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내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사람이나 나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은 늘 있는 법이다. 공동체란 모두가 함께 살면서 서로 사랑하고 항상 잘 지내는, 뭔가 감상적이고 이상적인 장소나 시간이 아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다. 오히려 우리는 공동체란 완전한 정서적 조화를 요구하지도 않고 가져다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더불어 살면서 깨닫게 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돌봄을 받아들이려 하는 장을 제공해주는 것이 공동체다.
고독이 공동체를 앞서는 것, 공동체가 고독에서 나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딸임을 모른다면, 우리는 자신이 특별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한테서 기대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처음부터 공동체를 결성하려고 든다면, 우리는 그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서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참된 공동체는 “나도 너무 외롭고 너도 너무 외로우니 우리 함께 뭉치자”는 식으로 외로움이 외로움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혼자 있기가 두려워서 생겨나는 관계들이 많이 있지만, 그런 관계는 하나님과의 고독만이 채워줄 수 있는 필요를 궁극적으로 채워주지 못한다.
공동체는 고독과 고독의 만남이다. “나도 사랑받는 자이고 너도 사랑받는 자이니 우리 함께 집을, 환영받는 곳을 지을 수 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다. 좋은 일이다. 별로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힘들다. 그래도 우리는 공동체 안의 서로에게 충실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집을 지을 수 있고, 하나님의 집 안에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낼 수 있다. (p151-153)
공동체 생활의 훈련 안에 용서와 축하라는 쌍둥이 선물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열어서 꾸준히 사용해야 한다. 용서란 무엇인가? 용서란 내 모든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용서하려는 자세를 말한다. 용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나를 사랑함을 안다. 하지만 너는 나를 무조건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까.” 나도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전부 채워주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인간은 아무도 그럴 수 없다. (p158)
우리의 심령은 만족과 완전한 교감을 갈구한다. 그러나 당신의 남편, 아내,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자녀 할 것 없이 인간은 모두 유한하기에 만인이 희구하는 수준의 사랑과 수용을 베풀 수 없다. 원하는 것은 그렇게 많은데 얻는 것은 그 일부밖에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내게 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계속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제한된 방식으로밖에 나를 사랑할 수 없는 당신을 용서한다. 내 모든 바람에 부합하지 못하는 내 아버지를 용서한다. 특히 요즘은 이것이 엄청나게 중요하다.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끊임없이 부모, 친구, 교회를 비판하고 있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에 차 있다. 그들은 무한한 사랑을 유한하게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p159)
→용서.. 용서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완전한 사랑을 심령에 갈구하는 자들로서 우리는 서로가 그 완전한 사랑을 일상생활 속에서 주거나 받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야 한다. 무조건 상대방 곁에 있어주고 싶은 우리의 소원은 우리의 많은 필요 때문에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우리의 사랑은 늘 드러난 조건들과 무언의 조건들의 제약을 받는다. 용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가 하나님이 아닌 것을 용서해야 한다! (p160)
2 세상을 품고 나가다 - 각양 은사대로 섬기기
사역이란 본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로 하는 것이다.
사역은 나에게 뭔가 있어서 그것을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피차 연약한 사람들끼리 베풀고 받으며 함께 유익을 누리는 것이다. 사역은 쌍방적이고 공동체적인 경험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들 속에서 사역하는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p174)
감사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의 선물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선물을 알아보고 받으며, 그들의 존재와 기여에 대하여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우리에게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주려는 열망이 있다. 주는 쪽이 되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망각하는 것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기쁨은 자기들도 우리에게 뭐가 줄 것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나는 평생 장애인들을 돌볼 수 있고,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들에게 더 큰 기쁨은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자기들의 특별한 선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다. 내가 강연 출장에 빌이나 라르슈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내가 그들을 얼마나 잘 보살피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 그들도 뭔가 기여할 수 있고, 나와 함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그러는 것이다. (p175-176)
하지만 우리가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거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있어 주면 때로 그 결과로 고통과 아픔이 덜어질 수 있으나 그것은 우리가 곁에 있어주는 주된 이유는 아니다. 사역이란 병든 자, 죽어가는 자,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되 그들의 연약함과 우리의 무력함 속에서 용감하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문제를 풀 수 없고 그들의 의문에조차 답할 수 없다.
우리는 피차의 연약함과 쌍방적인 사역 속에서 감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아파하시며 고통의 한복판에서 우리를 감사와 긍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문제와 의문 속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줄 수는 있다. 거기서 기쁨도 얻게 될 줄로 믿으면서 단순히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즐겨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을 성공하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라고 부르신다.”(p179)
겉은 화려하지만 이면에는 사역의 필요가 절실한 사람에게 당신은 두려움 없이 말을 건다. 자신이 사랑받는 자임을 알면 당신은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만지고, 치유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그들 또한 사랑받고 선택받고 축복받는 자임을 알려줄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과 감사를 보이되 우리의 힘이나 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고통의 한복판에 같이 있어줌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것이 사역의 신비다. (p180)
물러남의 훈련은 편한 곳과 쉬운 오아시스를 떠나도록 우리를 부른다. 부름 받았다는 것은 늘 가는 중이고, 늘 이동 중이고, 늘 찾는 중이고, 늘 바라는 중이며, 늘 앞을 내다본다는 뜻이다. 우리의 소명에는 특정한 직업의 길이 요구될 수도 있다. 소명은 구체적인 일이나 업무로 눈에 보이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것으로는 국한될 수는 없는 일이다.
영적인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직업이 아니라 소명이다. 직업을 소명 자체로 취급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결국 ‘평범하고 당연한 곳’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내 상처들이 동료 순례자들과 함께하는 추구를 지속하도록 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토머스 머튼에게 물러남은 대학교를 떠나서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마르틴 루터에게 물러남은 수도원을 떠나서 개혁가가 되는 것이었다. 디트리히 본회퍼에게 물러남은 안전한 미국에서 고국으로 돌아가 나치의 포로가 되는 것이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에게 물러남은 흑인의 ‘평범하고 당연한 자리’를 떠나서 민권 운동을 이끄는 것이었다. 테레사 수녀에게 물러남은 수녀원을 떠나서 캘커타의 ‘가난한 자들 중에 가장 가난한 자들’을 돌볼 기관을 세우는 것이었다. 장 바니에에게 물러남은 학계를 떠나 라르슈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물러남이란 대단할 것 없는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서 충실히 인내하는 것이다. 거창한 망상을 버리고 시장터에서 자신의 사역에 충실히 임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자유로운 사역을 위해서 자발적인 낮아짐의 행위로써 자신의 직업과 안전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물러날 것조차 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비자발적으로 이미 물러난 상태다. 그들의 도전은 ‘평범하고 당연한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존재 상황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는 것이다. 그들이 답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내 강요된 물러남을 어떻게 하면 자발적인 것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각 개인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물러남의 의미가 무엇이든, 그것은 사역에 꼭 필요한 선결 조건이다. (p184-185)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사역은 무엇일까? 당신의 시간을 어디에 써야 할까?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되 혼자 가지 말라. 삶의 좋고 궂은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법을 배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비록 문제와 고통이 끈질길지라도 어려움 당한 사람들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가라. 당신의 마음이 깨어지게 하라.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의 본에 의지하라. 그러면 당신은 하나님의 힘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그러면 주변 사람들 속에서 메시아를 만나게 될 것이다. (p186)
부록1 - 영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담은 책
“고독 없이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영적인 삶이란 혼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려면 고독이 필요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상호 책임을 다하게 해줄 신실한 공동체가 필요하다. (p193)
이 책은 영성 지도자들과 영성 수업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양쪽 모두를 위한 것으로, 헨리의 지혜와 신학적 묵상을 만나는 동안 당신에게 개인적인 묵상과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를 격려하고자 함이 그 본뜻이다. (p196)
부록2 - 영성 지도자를 찾는 법
너무 좋은 책이다. 두고두고 읽을 책. ★★★★★
201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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