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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세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2012.11.4.~2013.1.30.)

 


이 책은 어디선가, 누군가가 추천해줘서 샀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장교로 입대해 육사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 옥살이를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옥살이를 하면서 쓴 편지를 모은 책이다. 제목 그대로 감옥에서의 사색이 담겨있는데 지혜로움이 흘러나오는 글들이 많다.

 

 

고독하다는 뜻은 한마디로 외롭다는 것, 즉 혼자라는 느낌이다. 이것은 하나의 느낌이다. 객관적 상황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주관적 감정의 어떤 상태를 가리킨다.

자신이 혼자임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반드시 타인이 없는 상태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갖는 감정이다.

고독이란 고도의 로빈슨 크루소의 그것만이 아니라 개선하는 나폴레옹의 그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꽤 광범한 내용을 갖는 것이다. 결국 고독이란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만큼 내용이 미묘하고 모호한 셈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란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고독의 근거를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혼자라는 느낌, 격리감이나 소외감이란 유대감의 상실이며, 유대감과 유대의식이 없다는 것은 유대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고독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어차피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분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회란 모두살이라 하듯이, 함께 더불어 사는 집단이다. 협동노동이 사회의 기초이다.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함께 만들어낸 생산물이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 곧 사회의 이유이다. 생산과 분배는 사회관계의 실체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관계의 토대이다.

그러므로 고독의 문제는 바로 생산과 분배에 있어서의 소외문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만들어내고 나누는 과정이 무엇이 사람들을 소외시키는가? 무엇이 모두살이를 각살이로 조각내는가? 조각조각으로 쪼개져서도 그 조각난 개개인으로 하여금 흩어져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사람, 수많은 철학이 이것을 언급해왔음이 사실이다. 누가 그러한 질문을 나한테 던진다면 나는 아마 사유’(私有)라는 답변을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개인과 개인의 아득한 거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벽, 인간관계가 대안(對岸)의 구경꾼들간의 관계로 싸늘히 식어버린 계절....... 담장과 울타리. 공장의 사유, 지구의 사유, 불행의 사유, 출세의 사유, 숟갈의 사유....... (p27-28)

-> 함께 생산하고 함께 분배한다면 고독과 소외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실패한 공산주의의 방식 말고 다른 방식은 없을까.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은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 함은 사침(思沈)하여야 사무사(思無邪)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 1974.4.3.-(p85)

 

 

 

책에서 얻은 지식이 흔히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습니다. 그것은 실천에 의해 검증되지 않고, 실천과 함께 발전하지도 않는 허약한 가설, 낡은 교조(敎條)에 불과할 뿐 미래의 실천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입니다. ...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 믿습니다. -1979.6.20.-(p139-140)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주관의 양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고 객관적인 견해를 더 많이 손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바닥에는, 주관은 궁벽하고 객관은 평정한 것이며, 주관은 객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객관은 주관을 기초로 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각자가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이 발목 박고 서서 그 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 스스로 시대의 복판에 서기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시대와 역사의 대하로 향하는 어느 가난한 골목에 서기를 주저해서도 안되리라 믿습니다. -1980.7.28.- (p155)

-> 각자의 주관을 더 곤고히 해서 객관화 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사는 사회를 더 풍요롭게 할 것이라는 생각. 백퍼 공감.

 

창문이 고요한 관조의 세계라면 문은 힘찬 실천의 현장으로 열리는 것입니다.-1981년 세모에.- (p194)

 

한동안 헤어져 산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인간 관계이었든, 지금까지 자기가 처해 있던 자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휼륭한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1982.1.12.-(p195)

 

자기의 그릇이 아니고서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여우와 두루미의 우화처럼, 성장환경이 다른 사람들끼리는 자기의 언어가 아니고서는 대화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언어란 미리 정해진 약속이고 공기(公器)여서 제 마음대로 뜻을 담아 쓸 수가 없지만 같은 그릇도 어떤 집에서는 밥그릇으로 쓰이고 어떤 집에서는 국그릇으로 사용되듯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성장과정과 경험세계가 판이한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맨 먼저 부딪치는 곤란의 하나가 이 언어의 차이입니다.

같은 단어를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그런대로 작은 차이이고, 여러 단어의 조합에 의한 판단형식의 차이는 그것의 내용을 이루는 생각의 차이를 확대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예를 든다면 아마 책가방 끈이 길고 먹물이 든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간의 차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자는 대체로 벽돌을 쌓듯 정제되고 계산된 언어와 논리를 구사하되 필요 이상의 복잡한 표현과 미시적 사고로 말미암아 자기가 쳐놓은 의미망에 갇혀 헤어나지 못합니다. 도깨비이기는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파란색 도깨비와 노란색 도깨비를 구별하느라 수고롭습니다. 이에 비하여 후자의 그것은 구체적이고 그릇이 커서 손으로 만지듯 확실하고 시원시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단순화와 무리(無理), 그리고 감정의 범람이 심하여 수염과 눈썹을 구별치 않고, 목욕물과 함께 아이까지 내다버리는 단적 사고를 면치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983.2.7.- (p236)

 

대상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라보는 경우, 이 간격은 그냥 빈 공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선입관이나 풍문 등 믿을 수 없는 것들로 채워지고, 이것들은 다시 어안(魚眼)렌즈가 되어 대상을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풍문이나 외형, 매스컴 등,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인식고의보다는 나을지 모르나 무지보다는 못한 진실과 자아의 상실입니다. -1983.3.31.- (p246)

->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 적당히 관심 가지는 걸로는 진실을 알 수 없고, 그렇게 살면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즐거운 마음으로 무엇을 궁리해가며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그 즐거움은 놀이이며, 궁리는 학습이고, 만들어내는 행위는 곧 노동이 됩니다. -1983년 세모에- (p271)

 

징역살이에서 느끼는 불행 중의 하나가 바로 이 한 발 걸음이라는 외로운 보행입니다. 실천과 인식이라는 두 개의 다리 중에서 실천의 다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실천활동을 통하여 외계의 사물과 접촉함으로써 인식을 가지게 되며 이를 다시 실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그 진실성이 검증되는 것입니다. 실천은 인식의 원천인 동시에 그 진리성의 규준이라 합니다.

실천이 없다는 사실은 거의 결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그것은 곧 인식의 좌절, 사고의 정지를 의미합니다.

...

징역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맨 처음 시작하는 일이 책을 읽는 일입니다. 그러나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시 한 발 걸음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

...

실천이란 반드시 극적 구조를 갖춘 큰 규모의 일만이 아니라 사람이 있고 일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흔전으로 널리 있다는 제법 익은 듯한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1984.3.1.- (p278-280)

-> 왤케 공감이 될까?^^; 나는 감옥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실천할 곳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걸까. 사람이 감옥에 있다고 해서 갇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지으면 갇히게 되는 것 같다. 마지막 단락의 저 생각. 나도 자주 하는건데.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는 거.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그가 몸소 겪은 자기 인생의 결론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특히 자신의 사상을 책에다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이끌어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무리 조잡하고 단편적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사상은 그 사람의 삶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하여는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p297)

-> 고개 숙여지는 글이다. 삶의 조건 삶의 조건을 그대로 두고 생각만 바꾸려 하는 것은 폭력이다. 그 사람의 삶에 더 관심을 가지고,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을 바꾸어 가는데 함께 하자.

 

이를테면 창녀와 그의 가난한 단골과의 관계가 곧 일부1/10, 도는 일처1/10부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일부일처제의 가정을 꾸릴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의 소외된 결혼형태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서울의 외곽에 빈촌(貧村)이 있듯이 일부일처제의 외곽에 있는 빈혼(貧婚), 즉 빈남빈녀(貧男貧女)들의 군혼(群婚)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성도덕의 문란이 만들어낸 윤리적인 차원의 문제로 파악하는 태도는 본말을 전도한 피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세들어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는 이처럼 아내를 또는 남편을 세들어 사는 그런 삶도 없지 않습니다.(p318)

 

젊은이들은 노동을 수고로움, 즉 귀찮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비하여 노인들은 거기에다 자신을 실현하고 생명을 키우는 높은 뜻을 부여합니다. 요컨대 젊은이들은 노동을 소비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소비, 에너지의 소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점 노동을 생산으로 인식하는 노인들의 사고와 정면에서 대립하고 있습니다. 공업노동, 분업노동의 경험은, 더욱이 상품 생산, 피고용노동인 경우 노동이 이룩해내는 생산물에 대한 총합적인 가치 인식을 가지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노동이 그 노동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준다는 인격적 측면에 대해서는 하등의 신뢰나 실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손으로 창조한 것을 자각케 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떠한 사회적 관련을 갖는가, 그리고 자기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어떻게 연대되는가를 실감케 하는 부단한 계기를 생활의 현장, 그 경제적 기초 위에 창조해내는 운동이야말로 민중들의 합의된 결단을 이끌어내고 지연, 혈연 또는 작업장이라는 한정된 범위를 뛰어넘어 공동의 터전을 이룩하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갈 농촌도 없고 뿌리내릴 터전도 없는 젊은이들에게 그들의 메마른 자세만을 꾸짖는다는 것은 소용 없는 일일 분 아니라 너무나 야박한 짓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노인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제가 젊은 사람들의 태도 중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은 젊은 사람들은 미운 사람이 시키는 일이나 별로 의미를 느낄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지극히 냉정한 태도를 지닌다는 사실입니다.

일 그 자체에 몰입해서 무슨 일이건 일이라면 장인(匠人)의 성실성을 쏟는 노인들의 이른바 무의식성에 비하면 젊은이들의 이러한 태도는 겉보기에 상당히 불성실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에 담겨 있는 강한 주체성은 의당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노인들에게는 없는 탄력이며 가능성입니다. -1985.2.5.- (p321-323)

-> 대박. 27년전인데 지금이랑 똑같다. 젊은이들의 주체성을 찾아낸 저자도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 요즘 세대도 여전한 것 같다. 나쁘게보면 불성실한 것이지만, 좋게 보면 주체성. 자기가 하고 싶은 건 정말 열심히 하지만, 아니다 싶은건 하지 않는 주체성. 신기하게 이 전에 읽은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랑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농촌으로 돌아가야하나..

 

엄청 긴 책인데 막상 정리하니까 얼마안되네. 옛날말이 많아서, 한자어가 많아서 읽기에 조금 힘이 들었다. 그렇지만 사색들은 대박. 지혜가 흘러흘러 나오는 책.

 

적용할 건,

책 읽으며 적용할 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실천할 것 생각해보기(p278)

말이나 글로 생각만 바꾸려 할 것이 아니라 삶의 조건을 바꾸어 가는데 함께하자(p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