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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조선의 어둠을 밝힌 여성들 (2014.9.1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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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은 날: 2014.9.15.-10.14.


정리한 날: 2014.10.25.



이 책은 왜 샀더라; 어떻게 알게 됐더라; 가물가물하다. 방에 책이 쌓여가면서 이런 이유 없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무튼 이 책은 2009년에 쓰여졌고 한국엔 2012년에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저자 캐서린 안은 풀러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고 있는 재미 신학자이다. 책에서는 최초 거류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한 1884년부터 1907년까지 미국인 여성 선교사의 삶과 사역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장 미국 개신교회의 한국 선교, 1885-1907

1장에서는 초창기 미국 개신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다룬다. 광혜원이나 정동교회나 배재학당 이야기가 나오니 얼마 전 서울에 가서 봤던 것들이 떠올랐다. 하나 하나 기독교 선교의 역사가 담긴 건물들이었다. 책에서 읽기만 하는 것 보다 실제로 본 것을 떠올리며 읽으니 훨씬 와닿았다. 문화유적들을 돌아보는 건 생각을 생생하게 살아있게 해주는 것 같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처음에는 서구인에 대한 배척으로 선교 활동이 쉽지 않았으나 의료와 교육 활동을 통해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비서구권 국가로는 드물게 대부흥(평양)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장로교, 감리교 등 다양한 갈래의 개신교가 들어왔고 내륙 선교에도 힘썼다.

초창기 한반도에서의 선교 이야기를 읽다보니 뭔가 익숙하다. 이건 전형적인 제국주의 시대 이야기 아닌가?!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가난하고 조그마한 나라에 와서 고생하며 평생을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집이 그립지 않았을까. 생뚱맞은 곳에 와서 평생을 살아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2장 여성 선교사로서의 준비

2장에서는 19세기 말 한국으로 선교를 왔던 미국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이들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떤 이유로 선교를 오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본다. 19세기 개신교 부흥운동이 북아메리카를 휩쓸면서 미국에서 복음주의가 형성되었고 학생자원운동(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많은 선교단체와 선교훈련학교들이 세워졌고 많은 젊은이들이 선교를 떠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강조되었고 이에 따라 여성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한국에 파송된 여성들도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중산층에 속한 이들이었고, 학생자원운동을 통해서 영향을 받고 선교사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이미 선교사인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선교사가 된 사람들도 있었고, 회심의 과정에서 선교를 결단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19세기 후반에 출간된 선교 관련 문헌들도 영향을 주었다. 선교를 마음먹은 여성들은 주로 가르치는 일을 하거나 의료 경험을 쌓으면서 준비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국의 대학생 선교단체 운동에 대한 생각이 났다. ivf를 할 때 대학교에서의 선교활동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회 각 분야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고, 그들을 통해서 회복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한 학생자원운동(학생자발 운동이라고 읽었던 것 같다. SVM?)처럼 한국에서도 그 때의 그들처럼 학생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제는 대학생이 가진 특성이 조금 달라진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80년대 까지만 해도 대학생은 사회의 엘리트이고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집안의 경제 수준이 중산층 정도가 되어야 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사정이 쫌 다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대학을 나오고 있고, 집안의 경제 상황과 관계없이 대학을 나와야 어느 정도의 직장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경제 형편이 대학 입학에 미치는 영향은 줄어들고 있다. 이제는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사회의 중산층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지도층이나 엘리트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이들이 이렇게 떠날 수 있었던 것도 최소한 집안의 어려움이 없을 때 가능한 것 아니었을까. 사회 전체는 경제적으로 진보해 왔지만 그 가운데 빈곤은 더욱 심해졌다. 상대적 빈곤이라고 하는 것인데, 보통 상대적 빈곤이라 하면 상대적 박탈감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의식적인 차원을 떠나서도 빈부격차가 심한 곳에서는 절대적 빈곤이 발생하는 것 같다. 땅값이 오르고 집값이 오르면 집 없고 땅 없는 사람들은 그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을 가지기 힘들어진다. 땅값이 비싼만큼 노동의 가치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성장과 경제 성장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미국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오던 이 시기는 미국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였을 것 같다. 노예해방 이후 1927년 대공황이 오기 전까지 미국 경제가 성장하지 않았을까 (찾아봐야 아는; 지금은 그냥 짐작.). 한국도 경제가 한창 성장하던 때 기독교가 성장했었다. 어느게 선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기가 비슷하긴 한 것 같다. 

아무튼 이 때의 이런 상황,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한국에 복음이 전해졌고 내가 알고 있고 그런 것 아닐까. 다 하나님의 뜻 아래 있었을 감사한 일이다. 

3장 한국을 향하여

3장에서는 한국으로 오는 여정에 대해 설명한다. 미국에서 한국까지 오는데는 긴 시간이 걸렸는데, 대개 미국 중서부나 동부에서 출발했기에 북미 대륙을 횡단하는데만 7-10일이 걸렸다. 태평양을 건너는 배 안에서도 질병이나 멀미 등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선교사들은 일본에 도착한 후 한국의 상황을 보고 입국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제물포와 부산은 한국에서 가장 자주 이용하는 항구였지만, 외국인의 눈에는 항구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75명의 선교사는 부산에 가까워지는데도 “항구와 비슷한 것”도 볼 수 없었다. 부산항에 완전히 들어와서야 작은 초가집과 벌목 상태로 방치된 낮은 산을 볼 수 있었다. 제물포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백사장 대신에 황량한 갯벌”만 눈에 들어왔다. 바다가 끝나는 지점에도 접안시설이 없었다. 파도가 조금만 높아도 배를 댈 수 없었다. 파도가 낮은 틈에 배를 대면 승객들은 푼돈을 받고 갯벌을 건너게 해주는 허드렛일꾼들의 등에 업혔다. (p91)

제물포에 내린 뒤에도 서울까지 약 40키로미터를 더 가야했다. 이 거리를 선교사들은 나귀나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1900년 제물포와 서울 사이에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까지 20여 년간 선교사들은 나귀와 가마를 이용해 이 길을 다녔다. 

선교사들은 당시 서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전체적으로 서울은 내가 본 도시 중에서 가장 지저분하고 열악하다. 거리에 넘쳐나는 오물은 말할 거리도 못 된다.” 낮은 흙집이 오밀조밀 붙어 있는 지저분한 도시가 서울이었다. 지붕을 짚으로 덮은 집이 많았고 기와를 얹은 집은 드물었다. 거리는 “짐을 실은 소를 몰고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좁았다. 구멍과 질펀한 도랑들 때문에 더 비좁았다. 도랑에는 가정에서 흘려보낸 흙과 물이 모여들었다.”더럽고 냄새나고 비좁은 건 문제가 아니었다. 거리에는 가마니로 덮어놓은 시체들이 놓여있었는데, 더러는 참수된 주검도 있었다. 개천에서는 반쯤 혹은 거의 벗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p96)

4장 조선 사회와 여성 선교사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 다른 차별 대우를 받았다. 얼굴을 드러내고 밖을 다닐 수 없어 낮에 길거리에서 여성을 보기 어려웠고 이동 할 때는 가마를 타야 했다. 

선교사들은 여성을 열등하게 보는 이원론이 여성차별을 불렀다고 보았다. 그러나 개중에는 한국 남성들의 저급한 도덕성 때문에 이런 관습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한 한국 남성은 조지 존스에게 남자들이 아내를 격리하는 것은 아내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같은 남자를 못 믿어서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아나벨 니스벳 같은 여성 선교사도 이런 모습이 한국 남성들의 도덕성이 낮아서라고 보았다. 남성들의 낮은 도덕성 때문에 여성을 격리하는 관습이 필요악으로 부과되었다는 얘기다. 호머 헐버트는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이러하나 도덕적 환경에서라면 극동에서 여성 격리는 저주가 아니라 차라리 축복일지도 모른다. 이 관습을 즉각적으로 철폐하면 사회가 나아지리라는 일부의 생각과 달리 도리어 도덕적 혼란이 초래될 것이다. (p118-119)

신부는 혼례 후 최소한 며칠간은 마치 목석 마냥 침묵을 지켜야 했다. 신분이 높을수록 침묵의 관습은 더 엄격하게 지켜졌다. 남편이 아내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것은 한 주나 몇 달이 지난 뒤였다. 그 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아내는 필요한 말을 할 때만 입을 열었다. 말없이 순종하는 모습을 신부의 미덕으로 여겼을 뿐 아니라, 신랑이 신부에게 무관심한 것 역시 미덕으로 여겼다. 남자가 아내를 동반자나 애정의 대상으로 여기면 놀림과 조롱감이 되었다. 많은 여자가 애정 없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결혼하여 충분히 불행한 상태인데, 한국 남자들은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첩을 들여 불행을 가중시켰다. (p121)

한국 가정은 여자를 하찮게 여겼기에 여자아이에게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 “여성에게 형식적인 예의를 갖추는 것이 관습이기는 했으나… 여성에게는 영혼이 없거나 이름을 가질 만큼 소중하지 않다고 여겼다.” 따라서 한국 여성들은 아버지의 딸, 남편의 아내, 아들의 어머니로 불리며 이름 없이 평생을 보냈다. (p124)

이처럼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았지만, 가정에서 종교적인 영향력이 있었다.

부인들이 “산신과 물신을 경배하기 좋아하나” 남편들은 그저 아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이수정은 한국에서 여성의 종교적 영향력이 막강하니 미국 선교부가 한국 여성에게 전도하려면 여성 선교사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선교사들은 한국 여성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선교 초창기부터 잘 알고 있었다. (p127)

선교사들은 음식과 주거 생활에도 적응해야했다. 

버사 올링거가 1887년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가 본 유일한 서양식 건물은 중국 상인이 소유하고 있던 외국 물품 잡화점 뿐이었다. 한국의 가옥, 특히 일반적인 초가집은 위생 면에서나 편의면에서나 썩 좋지 않았다. 부엌과 우물은 변소에서 불과 몇 발자국 거리에 있었다. 부엌에는 미국식 요리에 필수적인 오븐이 없었다. 한국 가옥의 또 다른 특징은 난방 장치였다. 한국 가옥은 부엌에서 불을 때서 열기가 관을 통해 온돌 아래로 들어오는 식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겨울에는 아주 효율적이었지만, 여름에는 집 안에서 산 채로 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인들은 이렇게 좁고 낮은 집에서 살았다. 집에는 가구도 몇 점 없었다. 따뜻한 온돌 위에서 잠도 자고 앉아 있기도 했다. 밤에는 솜으로 된 아주 얇은 요를 깔았다. 선교사들이 한국 가옥에서 본 유일한 가구는 요를 넣어두는 나무장뿐이었다. (p132)

한국인들은 세균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가정에서 생활하수를 흘려보내는 도랑과 하수구로 거리가 아주 지저분했다. 덮개조차 없는 하수구에 파리와 모기떼가 몰려들었다. 세균과 질병이 퍼지는 것이 당연했다. 가장 큰 문제는 오염된 물이었다. 우물은 마을에서 나오는 구정물이 흘러내려가는 좁은 물길 바로 옆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상수원이 오염되는 건 당연했다. 그 결과 장염, 발진열, 말라리아, 천연두가 만연했다. (p133)

적절한 의료 조치가 없는 탓에 한국인은 치사율이 아주 높았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사망률이 높았다. 세균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격리하려 하지도 않았다. 병에 걸린 아이가 건강한 아이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놀았다. 수두는 흔한 병이었다. 엄마들은 모든 아이가 이 병에 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가 스스로 견뎌낼 때까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p134)

5장 선교 터전 마련

서울에 정착한 선교사들은 선교사들이 모여 지낼 공간을 마련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오기 전 일본과 중국에 있는 선교 단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그 양식을 따랐다. 선교사 단지는 그들에게 필요한 안정감을 제공했다. 초창기에는 한국인이 외국인을 어떻게 대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관 근처에 벽으로 둘러싸인 안전한 택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길에 붙어 있는 더러운 도랑들과 떨어진 곳에 세웠다. 선교 단지를 구축한 덕분에 집중된 지역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도 쉬워서 힘이 낭비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p142)

시간이 지나 한국에 정착하는 선교사의 수가 많아지고, 선교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지방에 거주하는 선교사들의 수도 늘어났다. 지방의 주거환경은 더욱 열악했는데, 선교사들은 서양식 주택에 적합한 자재를 구하기 어려워 아예 한옥을 사서 그 집의 자재를 이용하기도 했다.

개척기에 집을 새로 짓거나 개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 목수들이 서구식 가옥을 본 적이 없었기에 선교사가 직접 나서서 건축 과정을 지휘해야 했다. 선교사들은 건물 조감도와 설계도면을 주고 작업을 일일이 감독했다. 정직하지 않은 납품업자들이나 능률이 떨어지는 인부들과 흥정도 해야 했다. 서구식 건물을 지을 수 있는 한국 건축업자가 없어서 중국인을 고용했는데, 납품을 속이고 계약을 위반하고 공사 중에 대금을 올리기 일쑤였다. (p155)

또한 주거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도 당시 한국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해야 했다.

기술적이고 재정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평양 관청의 반대와 미신도 극복해야 했다. 사람들이 평양이 아주 큰 배라고 믿었기에 우물을 파려고 구멍을 내면 배가 가라앉을 수 있다며 꺼렸다. 평양 관리들은 아동병동 건축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로제타 홀은 “구멍을 벽돌과 시멘트로 처리하여 평양이 가라앉지 않게 한다”고 사람들을 안심시킨 뒤에야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결국 그는 아동병동 건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 건물은 평양에서 깨끗한 물을 공급받는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p159)

서양에서 온 선교사들은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개척기 선교사들은 몇 개월간 인내심을 가지고 식료품을 기다리곤 했다. 거리는 먼데 교통은 불편한 탓에 물품이 도착하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화물은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그야말로 전 세계를 돌아왔다. 태평양을 건너지 않으면 수에즈 운하를 지나 대서양을 건너야 하는데, 이어 인도양을 지나 황해로 들어오는 항로를 거쳤다. 그러면 사람이 등에 지거나 나귀 등에 실어 내륙 지방으로 운반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초기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주문한 물품을 받기까지 거의 1년을 기다려야 했다. 날씨가 좋은 때는 4개월 정도가 걸렸지만, 지체되기 일쑤였다. 아니벨 메이어 니스벳은 16개월 만에 주문한 식료품을 받았다. 상자는 도착했지만 잃어버린 물품과 부서진 물품이 있었고 주문 자체가 잘못된 것도 많았다. 선교사들 중에는 화물선을 통째로 잃어버리기도 했다. 1900년에 윌리엄과 애니 베어드 부부의 주문품을 싣고 오던 일본 증기선이 바다에서 화염에 휩싸여 침몰하고 말았다. (p165)

여성 선교사들은 옷에 관해서는 자주 언급하지 않았다. 옷 때문에 심각하게 고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은 다른 물품과 마찬가지로 옷도 미국에 있는 대형 백화점에서 주문했다. 보통 휴가 기간에 옷을 비롯한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물품 2-3년 치를 주문해서 미국에서 가져왔다. 많은 여성이 바느질을 하거나 재봉틀을 사용할 줄 알았기에 옷을 직접 만들어 입기도 했다. (p167)

제물포에서 서울까지 옮기고 짐을 부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인부 하나가 안락의자와 가재도구를 이것저것 옮겼다. 또 다른 인부는 세면대를, 또 다른 인부는 간이 침대를, 또 다른 인부는 2-3미터쯤 되는 의자를 날랐다. 아주 무거운 물품은 범선을 이용해 한강을 거쳐 마포나루까지 실어날랐다. 마포에서부터 3킬로미터까지는 우마차에 실어 운반했다. 정말 힘들었다!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어떤 물건은 땔감용 나무로 만들기도 했다. 난로 하나는 고철로 만들었다. 내가 쓰는 옷장은 다리가 두 개밖에 없었다. (p169)

1885년 첫 감리교 선교사들과 함께 한국에 온 아펜젤러 가족도 서울에 있는 집으로 쓰던 오르간을 가져왔다. 오르간이 도착하자 엘리 아펜젤러는 기쁨에 겨워 고향에 편지를 썼다. (p169)

이처럼 선교사들은 일상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최소한의 삶도 당시 한국인들의 삶에 비하면 호화로운 삶이었다. 이 때문에 본국 선교부와의 사이에서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이런 비판 때문에 여성 선교사들은 때때로 한국 생활을 변호하고 설명하는 편지를 썼다.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선교사들이 한국식 생활을 당연하게 여겼다가는 살아남을 수도 없고 사역도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설명했다. 그는 전도양양한 젊은 선교사 윌리엄 매켄지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매켄지는 소래에서 1년간 한국인과 어울려 한국 음식을 먹고 살다가 죽고 말았다. 릴리아스 언더우드는 일정한 수준의 생활과 음식을 유지하지 않고는 서양인이 한국에서 건강하고 생산적인 삶을 사는게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장로교 선교부 총무가 1889년에 그들이 사는 한옥 상태를 보고 징계를 내린 일을 언급하며 보조적인 선교사 사택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한국을 방문한 총무는 흙벽으로 된 비가 마구 들이치는 집을 보고 놀라서 “선교사들은 아주 비싼 재산이므로 하찮은 보호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선교사들에게 말했다. (p174-175)

6장 여성 사역의 출발, 1884-1889

한국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오히려 여성 선교사들이 필요한 영역은 많았다. 우선, 여성 의료 선교사들은 여성을 진료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한국의 의료진은 대부분 남성이었기에 여성들은 의료 혜택을 받지 못했는데, 여성 선교사를 통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 여성들은 교육을 받기도 어려웠는데, 이 역시 여성 선교사들을 통해 학교가 세워지면서 많은 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여학교의 성장과 발전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조혼 풍습이었다. 여자아이들은 보통 12-13세에 시집을 갔다. 선교사들은 이 관습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교과목을 따라올 만하고 잠재력 있는 학생을 발견할 즈음에 놓아줘야 했기 때문이다. 조혼 풍습 때문에 여학교는 수년간 초등학교로만 운영되었다. 이화학당 선교사들은 1904년이 되어서야 중등교육을 시작할 수 있었다.

초기 여성 교육 사역의 또 다른 방해물은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는 이화학당보다는 장로교 여학교에서 일하던 선교사들이 더 심각했다. 예를 들어 앨러스는 한국에 오자마자 학교를 인수한 릴리아스 호튼 언더우드가 “한국어를 전혀 몰랐고 학생들은 영어를 몰라서 학교는 고종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유지되었다고 고백했다.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모르니 문제가 지속되었고 학교 발전에도 장애가 되었다. 여성 선교사들은 교사에게 필요한 언어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선교사들 중에서 그나마 언어를 가장 빨리 습득하는 사람도 여성이었다. (p202)

여성 교육 사역은 이후 수년간 한국 여성의 지위를 급격히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인이 되었다. 여성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과격한 사회개혁과 남녀평등을 기치로 내걸지는 않았지만, 여성 교육 자체가 한국의 문화와 사회 체제를 거스를 만큼 충분히 급진적이었다. 여성 선교사들은 여자아이들을 교육하고 몸소 모범을 보임으로써 부지부식간에 한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는 19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한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p203)

7장 전도 사역과 여성 사역의 확대, 1890-1907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고, 선교사들이 현지 문화에 적응함에 따라 선교사의 가정을 통한 전도 사역이 확장되었다. 한국인들이 선교사 가정에 방문하기도 하고 선교사들이 한국인 가정에 방문하기도 했다.

가정 방문으로 얻는 효과 덕분에 여성 선교사들은 심방을 정기화하고 조직화했다. 집중적인 심방 사역을 위해 매년 특정 절기와 달을 따로 떼어두는 등 장기 계획을 세웠다. 특정한 시기에는 이웃 전체나 마을 전체를 방문하는 계획을 짜기도 했다. 여성 선교사들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이런 조직적인 심방이 여러 번 나온다. 메리 기포드는 3개월간 한국인 조사와 함께 59개 가정을 117회 방문했다고 보고하면서 그해 가을 심방 계획을 소상히 밝히기도 했다. 애니 배어드도 1893년에 정기 오후 심방을 통해 부산 일대를 가가호호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고 보고했다. (p226)

여행은 힘들고 불편했다. 남성 선교사들은 여성들이 순회 여행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지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여성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에 나섰다. 무엇보다 시골에 있는 교회와 여성들이 여성 선교사들이 방문하길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작은 촌락과 선교 거점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도 순회 선교사에게 들은 미미한 성경 지식에 의지하여 신앙을 지키는 이제 막 태어난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다. 선교사들이 없을 때는 선교 거점에서 단기 성경훈련을 마친 지역교회 지도자들이 제한된 지식으로 회중을 가르쳤다. 그러나 시골 교회 여인들이 남성 선교사나 한국인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항상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듣는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녀유별 관습 때문에 여성들은 발 뒤에서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남성 교사에게 대꾸를 하거나 질문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시골에 있는 여성 신자들은 여성 선교사와 권서부인이 방문해서 인격적으로 대하고 가르쳐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마거릿 베스트는 1899년에 장기간에 걸친 시골 여행을 끝내면서 시골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여성이 많지만 목자가 없는 양떼와 같다고 보고했다. (p228)

8장 의료사역과 교육 사역, 1890-1907

여성선교사들은 또한 장애인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실로 장애인, 특히 시각 및 청각 장애자 교육에 앞장선 선구자였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시각장애인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애가 있는 이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기 일쑤였다. 한국 어디에서도 시각 장애인을 교육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이 이뤄지지 않았다. 여성 선교사들은 이들을 위해 소규모 모임을 만들고 교육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장애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시작됨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p298-299)

나가는 말

개화기 당시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있게해준 책이었다. 또한 당시 우리나라의 문화와 지금의 문화가 얼마나 다른지를 체험할 있었다. 정말 많은 것이 순식간에 바뀐 100 년이었던 같다. 

2014.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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