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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일과 영성 (2017.3.19.)




일과 영성 (2017.3.19.).pdf



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일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저자인 팀 켈러는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 목사입니다. “대도시에서 가장 성공한 기독교 복음 전도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책 모임에 함께 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습니다. 참 좋은 책이네요. 최근에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은 책인 것 같습니다. 제 상황과 고민에 맞닿은 내용이 담겨 있어서 더 그런 것 같구요. 

저는 늘 그렇듯 진로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 또한 역시 늘 그랬듯 이 책 또한 뾰족한 답을 주진 않습니다. 어차피 뭘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삽니다. 허무주의에 빠져있거나 될대로 되라는 생각을 하는건 아닙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일이 아니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일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내가 좋아하면서도 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왔고 또 그렇게 선택해 왔던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하며 살자는 생각으로 어려워 보이는 일들에 먼저 도전해 왔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전문성이 부족했고 또 비기독교인과의 접점도 많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부족함들 매꿔가며 살아야겠습니다. 더 시간을 아껴 배우고 공부하며 살고 또 공동주거생활을 하려고 시도 중입니다. 사실 이런 시도와 노력이 적절한건지 확신은 없습니다. 괜히 내 한계를 초과해서 살려는건 아닌지, 그래서 인생을 낭비하는건 아닌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만, 왠지 해야할 것 같아서 또 왠지 하고 싶어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친구에게 편지 쓰는 형식으로 서평(?) 독후감(?)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너무 쓰고 픈 내용이 많아서 엄두가 안납니다. 그만큼 직장인들에게 위로와 또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추천합니다! 



읽은 날: 2017.3.18.-19.

정리한 날: 2017.3.19.


(아래 내용에서 괄호 속 쪽 수는 전자책 단말기 '크레마 사운드'에서 '원본보기'로 설정했을 때의 기준입니다)


들어가기 전에 - 리디머교회에서 답을 찾았다

 

본보기로 삼을 만한 모델은 거의 없었다. 있다손 치더라도 대다수 미국인들이 교회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었다. 어느 CEO는 책상 위에 늘 성경책을 올려놓았더니 더러 그 까닭을 묻는 이들이 나타나더라고 했다. 열심히 기도했더니 회사가 잘 돌아가더라고 간증하는 이들도 있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자선사업을 하고 여러 기관을 돕는 데서 기업 경영의 의미를 찾는 이들이 열에 아홉은 됐다. 목회자들과 직장인들에게 신앙을 일터에서 어떻게 적용하는 게 좋을지 물어보면, 흔히(혼자 일하는 전문직 종사자가 아닌 한)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전도는 자신의 은사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재빨리 덧붙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접근 방식들로는 신앙으로 일터를 변화시키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길이 없었다. (11쪽)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일터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낯섭니다. 사회가 다원화되고 다양한 직군이 생기면서 더 심해진 것 같기도합니다. 제 주변에도 대체로 그리스도인이 많은데 저와 비슷한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쪽 진로를 준비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아마 이 책에서도 일터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하긴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보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할 것 같습니다. 



프로필 - 일은 단순히 '밥벌이'가 아니라 소명이다

 

'개인적인 이해를 초월해서 어떤 존재를 섬기는 사명'으로 일의 본질을 재설정하지 않으면 부르심이란 의식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전반적으로 자기완성의 도구이자 자아실현의 수단이라는 노동관은 벨라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듯, 개인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 사회 자체를 붕괴시킨다. (20쪽)

 

루터교 신학의 원류는 모든 노동의 존엄성을 크게 강조한다. 일이란 하나님이 인간의 수고를 통해 인류를 보살피고 먹이고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하며 필요를 채우시는 도구라고 본다. 루터교 전통에 따르면, 일을 하는 순간 인간은 '하나님의 손가락', 즉 하나님의 사랑을 주위에 전하는 일꾼이 된다. 이런 사상은 일의 목적을 생계 해결에서 이웃 사랑으로 끌어올리는 동시에 입에 풀칠을 하자면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무거운 부담에서 해방시킨다. (22쪽)

 

아브라함 카이퍼처럼 칼뱅주의, 또는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이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일의 또 다른 측면을 부각시킨다. 피조물을 보살필 뿐만 아니라 방향을 정하고 틀을 잡는 게 일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개혁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노동의 목적은 하나님을 높이고 인류를 번성케 하는 문화를 창출하는 데 있다. 크리스천은 이웃을 사랑해야 의무가 있으며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본성과 인류를 번성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가르침을 준다. 무슨 일이든지 반드시 이런 인식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노동은 기독교 '세계관'을 쫓아야 한다는 뜻이다 (22-23쪽)

 

톨킨은 미술, 실상은 모든 일에 대해 기독교적인 통찰을 가진 인물이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달란트와 은사를 주셔서 인류를 염두에 두고 의도하셨던 일들을 사람들이 서로 도와 해내게 하셨다고 믿었다. 가령, 자신은 작가로서 실재의 본질을 전하는 이야기를 전달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채워 주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니글은 자주 느끼거나 어림짐작으로 추측해 보던 그 나무가 창조의 진정한 일부이며 더 나아가 세상에 사는 동안 자신이 사람들 앞에 펼쳐 드러냈던 그 작디 작은 조각이 참다운 세계를 보여 주는 환상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33-34쪽)

 

예술가들과 기업인들은 쉽게 니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낸다. 저마다 마음에 품은 독특한 세계를 향해, 더러는 너무 크다 싶은 비전을 품고 일한다.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아는 이도 흔치 않고 그 꿈에 다가섰다고 말하는 경우는 더 드물다. 톨킨처럼 지나치리만치 완벽주의적이고 꼼꼼한 이들은 니글과 자신이 영락없이 닮았음을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너나없이 니글이다. 다들 무언가를 성취하기를 꿈꾸지만 한편으로는 그걸 온전히 이룰 힘이 없음을 깨닫는다. 누구나 잊혀 가기보다 성공해서 영향력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름하는 건 인간의몫이 아니다. 땅 위의 삶이 전부라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언젠가 태양이 소멸될 때 남김없이 타 버릴 테고 그동안의 기억도 깡그리 스러지고 말 것이다. 모두가 잊힐 수밖에 없다. 세상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든, 얼마나 땀 흘려 가며 애썼든 그야말로 '제로'가 돼 버린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현재의 삶 밑바닥에, 또 그 너머에 참다운 실재가 있는 게 분명하다. 이생에서 끝나는 게 아니므로, 주님의 부르심에 답하기 위해 애쓰는 선한 수고는 지극히 단순하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하나가 영원무궁한 가치를 갖는다. 그게 바로 기독교 신앙이 주는 약속이다. (34-35쪽)

 

무슨 일을 하든지 '진짜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도시, 빛나고 아름다운 세계,흥미진진한 이야기, 질서, 치유, 그밖에 무엇을 추구하든 '진짜'는 따로 있다.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이 고쳐 주실 미래의 새 세상이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걸 부분적으로나마 다른 이들에게 보여 주는 작업이다. 기껏해야 눈곱만 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더라도 그 나라를 실현해 가는 일이다. 지금 저마다 추구하는 온전한 나무 (아름다움, 조화, 정의, 위안, 기쁨, 공동체 같은)는 장차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제대로 마음에 새긴다면 평생 나뭇잎 한두 장 그리는 데 그친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않으며, 만족스럽고 기쁘게 일할 것이다. 성공에 도취되어 으스대거나 이런저런 차질에 흔들릴 까닭도 없다 (36쪽)


정말 위로되는 내용입니다. 늘 그런 고민이 있었습니다. 더 잘해야 할 것 같은 부담. 내가 하려는 일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록,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할 수록 그런 부담이 컸습니다. 이 글을 보면서 위로 받고 또 힘을 얻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면 그걸로 된거라고. 잘하지 못해도, 1등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이미 성공한거라고, 이미 다 이룬거라고. 그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성취하고 성공한다는 건 어찌보면 선물 아니 그냥 주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잘해서 성공할 수 있지만, 잘 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졌기 때문에 잘 한 것이라 결국 그런 주어진 상황 덕분이니 제 공로가 아닌 겁니다. 


이 땅 위의 삶이 전부가 아니다, 이 땅에서는 모든 것이 진행 중인거고 마지막날이 되어야 완성된다. 이 이야기는 책에 적힌대로 낙심하는 마음을 덜어주고, 성공에 따른 교만도 덜어주는 참 좋은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왜 일하고 싶어 하는가?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데 일이 꼭 필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왜 그토록 일하기가 어려운가? (어째서 열매가 없고, 무의미하고, 까다롭기 일쑤인가?)

 

어떻게 하면 복음을 발판으로 난관을 이겨 내고 노동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Part 1 일, 하나님의 황홀한 설계

 

Chapter 1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

행복하고 싶다면, 주님처럼 일하고 주님처럼 쉬라

 

성경은 입을 떼자마자 일에 관해 이야기한다. 노동이 얼마나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인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창세기 저자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일로 묘사한다. 우주를 빚어내는 광대한 프로젝트를 일주일 동안 진행된 규칙적인 노동으로 그려 내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최초의 인류가 낙원에서 일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질서정연한 주님의 창조 사역과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뿌리를 두는 이러한 노동관은 세상의 온갖 종교나 신앙 체계들과 명확히 구별된다.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고대 설화 가운데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대다수 문화와 설화들은 세계사와 인간사의 출발점을 우주적인 세력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투쟁의 결과로 그려 낸다. 바빌로니아의 창조 설화 '에누마 엘리쉬'만 하더라도 마르둑 신이 티아맛 여신을 쓰러트리고 그 주검에서 세상을 빚어냈다고 풀이한다. 이런 부류의 설명에 따르자면 눈에 보이는 우주는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세력들이 불안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창조는 갈등의 결과물이 아니다. 하나님에겐 적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존재와 그 권세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분의 수중에 있다. 그러므로 창조는 전투의 휴유증이 아니라 장인의 계획에 가깝다. 하나님은 참호를 파는 전사가 아니라 명품을 만드는 장인으로서 세상을 지으셨다. (40-41쪽)


일하시는 하나님. 기도할 때 자주 내뱉는 말입니다. 막연히 나오는 표현이었는데 이 부분을 보면서 정말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일하시는 하나님. 먹고 노는 신이 아니라 인간 세상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이후에도 창세기 내내 아니 성경 이야기 내내 일하셨던 하나님. 그런 하나님 이심을 깨닫게 됐습니다.


창조주께서 낙원에 일을 두셨다는 사실은 노동을 필요악이나 심지어 징계 쯤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기겁할 만큼 놀라운 진리다. 일을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류 역사에 끼어든 상함과 저주의 결과물로 보아선 안 된다. 노동은 하나님의 정원에 존재했던 축복의 일부다. 일은 음식, 아름다움, 쉼, 우정, 기도, 섹스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에 해당한다. 영혼을 고치는 약이 아니라 영양을 공급하는 밥이다.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하면 내면적으로 심각한 상실감과 공허감에 시달린다. 건강 문제를 비롯해 여러 요인으로 일터에서 밀려난 이들인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데 일이 얼마나 긴요한지 금방 알게 된다. (44쪽)

 

일은 축복!


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남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길 가운데 하나라는 점만은 분명히 짚어 두고 싶다. 아울러 일을 통해 저마다 가진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파악하게 되고 그게 정체성 확립에 핵심 요소라는 점을 감안할 때, 노동은 자아 발견의 주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46쪽)

 

인간의 DNA에 내장된 일의 속성을 파악하는 건 자유에 대한 크리스천의 독특한 개념을 파악하는 데도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자유를 전혀 제한이 없는 상태 정도로 이해한다. 하지만 물고기를 생각해 보라. 물고기는 공기가 아니라 물에서 산소를 흡수하므로 물을 벗어나지 않아야 자유로울 수 있다. 물고기 한 마리가 강을 벗어나 풀밭을 탐험하러 나갔다 치자. 마음껏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사라지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잃을 것이다. 고유한 속성을 존중하지 않는 한, 물고기는 자유롭기는커녕 도리어 위태로워진다. 비행기나 새도 마찬가지다. 공기역학적인 원칙들을 거스르기가 무섭게 땅에 처박히고 만다. 그러나 거기에 순응한다면 자유자재로 치솟고 활강할 수 있다. 생명의 세계가 다 그렇다. 자유는 구속이 없는 상태라기보다 올바른, 다시 말해서 자신과 세계의 본질에 부합되는 한계 속에서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명령은 자유를 보장하는 도구들이다. 창조주께서는 바로 그 계명을 통해 인간을 지으실 때 의도하셨던 존재로 부르시기 때문이다. 주인이 가진 매뉴얼을 따르고 디자인을 존중할 때 자동차는 가장 잘 움직인다. 기름을 넣지 않는다 해도 벌금을 매기거나 감옥에 보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고유한 본질과 속성을 무시한 탓에 자동차가 고장 나고 부서질 따름이다.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결과가 때문에 고생할 게 뻔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 또한 주인의 매뉴얼, 즉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처신해야 제대로 작동되는 법이다. 거룩한 명령을 어기면,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영광을 돌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창조주께서 설계해 두신 본성을 거스르게 된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48장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사 48:17-18)

쉼과 더불어 짝을 이루는 일도 마찬가지다. 십계명에는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출 20:9)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일하는 존재로 지으셨으며 지금도 분명히 그 설계에 따라 살라고 부르시고 이끄신다. 짐스러운 명령이 아니라 자유로 이끄시는 초대다 (47-48쪽)

 

자유의 의미에 대한 좋은 설명입니다. 하고 싶은대로 마음껏 살 수 없는 이유이자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이유.



"일하기 싫어!"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세상 만물 가운데 특히 노동이 죄의 대가로 임한 저주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일 자체는 저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일하도록 지음받았고 일을 통해 자유로워진다. 하지만 삶이 통째로 일에 빨려들어 가는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그 한계를 존중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과 쉼의 균형을 잡는 신학적인 기초를 견고하게 다지는 작업이야말로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출발점이다. (51-52쪽)

 

쉼에 대한 고민. 쉼은 필요한 것이지만, 의도적으로라도 쉬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일과 쉼의 균형을 잡는 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과 쉬면서 사는 것의 차이는 어떻게 둬야 할까요?


 

Chapter 2 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그리스인들은 이 땅에 사는 한 노동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모든 일이 동등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몸이 아니라 정신에 유익한 일이 더 고상하며 덜 동물적이라고 믿었다. 몸을 가장 적게 움직이고 정신을 최대한 왕성하게 움직이는 부류를 가장 고상한 일로 쳤다. "그리스 사회구조 전체가 그런 세계관을 지탱했다. 엘리트들이 예술과 철학, 정치를 통해 정신을 수련하는 데 전념하도록 노예와 직인들이 노동으로 뒷받침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56쪽)

 

현대인들은 발끈해서 분통을 터트릴 얘기지만, 문자적인 노예 개념은 사라졌다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 이면에 숨은 마음가짐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왕성하게 작용하고 있다. 리 하디를 비롯한 여러 크리스천 철학자들은 장구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노동과 일이 차지하는 위치를 바라보는 그리스인들의 자세는 기독교회의 사상과 행위 규범 양면에 걸쳐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우리 시대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물려받은 건 이런 사조가 듬뿍 배어든 노동관이다. (57쪽)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이 땅에 존재하며 일종의 부섭정으로서 나머지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 역할을 하도록 부름받았다. 주님이 창조 과정에서 행하셨던 것처럼 혼돈스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며, 인간 본성을 사용하여 창의적으로 문명을 세우고, 친히 지으신 만물을 보살피는 일들을 나눠 맡게 된 것이다. 창조주가 인간을 지으시며 기대하신 가장 큰 역할이 바로 이것이다. (59쪽)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정원사였으며 신약에서는 목수였다. 주님이 일에 부여하신 엄청난 존엄을 담아내지 못할 만큼 하찮은 일은 없다. 몸으로 하는 단순한 노동도 신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활동과 조금도 다름없이 '하나님의 일'이다. 보통 하찮게 생각하는 청소를 예로 들어보자. 직접, 또는 누군가를 고용해서라도 집 안을 치우지 않으면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번식하고 결국 감염되어 앓아눕거나 목숨을 잃을 것이다. 창조주는 물질세계를 지으시고 인간들로 하여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방식의 노동을 통해 개발하고, 양육하고 보살피게 하셨다. 그 가운데 지극히 간단한 것들도 중요하긴 마찬가지다. 모두 다 구비되지 않으면 인생은 제대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50-51쪽)

 

 

인간은 노동을 하도록 지음받았으며 지위나 급여와 상관없이 일은 인류에게 존엄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사실이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은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광대하다. 이 원리를 제대로 깨닫고 나면 은사와 열정을 좇아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일자리가 줄어들어도 더 많은 기회에 대해 긍정적일 수 있다. 체면과 우월감이 사라지게 된다. 질투나 상대적 박탈감도 사라진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개척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신과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문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65쪽)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개척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는 확신과 만족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친구들로부터 심심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심심하다’는 말 안에는 외롭다, 우울하다, 재미가 없다, 허무하다, 할게 없다 등등의 말이 내포된 것 같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할 말이 없고 말문이 막힙니다. 어떻게 해야하지? 뭐라고 이야기해야하지? 무슨 말을 하지? 등등 고민이 됩니다.


저는 그냥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잘 놀기도 하고 또 일(꼭 회사에서 하는 일이 아니더라도)을 하는게 재밌습니다. 무언가 배우고 배운 것을 정리하고 생각하고 글을 쓰고 또 고민하고 이런 과정이 재밌고 저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왜냐면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때문이죠. 아무튼 이런 ‘일’을 하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고 재밌는데, 제가 이렇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한 두번이고 자꾸 하다보면 뭔가 잔소리하는 것 같고 자랑하는 것 같아 관두곤 합니다. 


책의 이 내용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건 무얼하든 이런 이야기를 알고, 이런 세계관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 하찮은 일은 없다는 인식을 하며 살면 ‘심심함’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뭘하든 의미 없는 일은 없으니, 그 일을 마음껏 즐기면 되지 않을까요? 


물론 함께해달라는 표현일 수 있으니 그걸 외면하기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되겠지만…


 

Chapter 3 일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수단이다

일터에서 주님의 매뉴얼을 따라 야심차게 일하라

 

첫째로, 하나님은 "땅에 충만하라", 즉 수를 늘이라고 명령하신다. … 인간이 땅에 충만하게 되는 건 동식물이 세상에 가득해지는 것과는 의미가 생판 다르다. '출산'이 아니라 '문명'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개체수가 증가되길 원하신 게 아니라 세상에 인간 사회가 가득하길 기대하셨다. 창조주는 한 마디 말씀으로도 수많은 주거지에 인간이 득실거리게 만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인류에게 사회를 발전시키고 세워 가는 걸로 일을 삼게 하신 것이다. (68-69쪽)

 

둘째로,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며' 더 나아가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셨다. …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세상을 경작하는 책임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정복하라는 분부는 명백히 온 천지와 거기에 속한 자원들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착취하고 폐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으라는 명령이 아니다 (69쪽)

 

성경이 가르치는 일의 개념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면 주어진 자원에서 가치를 창출하려는 소망이 솟게 마련이다. 원재료를 가져다주시고 함께 만들고 키워 내는 특권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한, 무슨 일을 하든지 메마르지 않는 창의성을 가지고 임할 수 있는 것이다. (74쪽)

 


Chapter 4 일은 목적이 있는 소명이다

자신만을 위하지 말고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땀방울을 흘리라

 

지금까지 창세기를 훑으면서 일의 의도와 존엄성, 패턴을 살펴보았지만 신약성경, 그 가운데서도 특히 바울의 서신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세상을 섬기라는 부르심을 통해 일의 목적을 분명히 하셨는지 더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흔희 '부르심'으로 번역되는 단어가 성경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부터 먼저 짚어 보자. 신약성경의 목회서신들에서 '부르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칼레오는 보통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되라는 하나님의 요청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 (롬 8:30, 고전 1:9). 온 세상에 거룩한 메시지를 선포함으로써 주님을 섬기라고 부를 때도 쓰인다(벧전 2:9-10).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부르시기도 한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크리스천 공동체와도 친교를 맺게 하는 초대다(고전 1:9, 엡 1:1-4, 골 3:15). 실은, 교회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 자체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의미한다. (79-80쪽)

 

직업을 선택하기에 앞서 던져야 할 질문은 "무얼 해야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지금 가진 능력과 기회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과 이웃의 요구를 늘 의식하면서 최대한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을까?"이어야 한다. (83쪽)

 

투표를 하거나, 공직을 맡거나, 아빠엄마가 되는 것처럼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만한 사회적 역할이나 책무도 마찬가지다.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주님이 인류에게 선물을 나눠 주시는 수단이다. 소박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시골 농장의 소녀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응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루터가 설파하다시피, "하나님은 소젖짜는 여자아이의 일을 통해 친히 우유를 내고 계신다." (87-88쪽)

 

순전히 은혜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은 일에 관해 또다른 통찰을 준다. 옛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행위로 구속을 받으려 애썼던 반면, 대다수 현대인들은 직업적인 성공에서 구원(자존감과 자부심)을 찾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오로지 높은 보수와 지위를 보장하는 자리에 연연하며 비뚤어진 방식으로 그런 일들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일에 기대어 자신을 입증하고 정체성을 지키라는 압력에서 해방시켜 준다. 이미 인정받고 안전해 졌으므로 달리 애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단순노동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와 고상해 보이는 일거리를 부러워하는 마음가짐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제 일은 종류와 상관없이 인류를 값없이 구하신 하나님과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수단이 된 까닭이다. (90쪽)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는 주요한 방법 가운데 하나는 '능숙한 사역'이다. 하나님이 일을 주신 목적이 인간 공동체를 섬기게 하는 데 있다면, 그 뜻을 받드는 으뜸가는 길은 주어진 과업을 끝낼 뿐만 아니라 제대로 해내는 것이다 (94쪽)

 

유나이티드에어라인 811편이 곤경에 빠졌을 당시, 크로닌은 승객들한테 꼭 필요한 대단한 은사, 즉 오랜 경험과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다. 재난을 코앞에 둔 이들에게는 기장이 동료들과 얼마나 사이좋게 지내는지, 또는 어떻게 다른 이들과 신앙을 나누는지 따위가 중요치 않았다. … 결정적인 문제는 파일럿으로서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기체를 안전하게 조종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갖췄는가 하는 것 뿐이었다. … 일을 하면서 다양한 경로로 하나님과 접촉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 현재 진행중인 창조 과정에 동참하는 게 크리스천의 사명이라고 할 때, 그 사역을 떠받치는 기반은 '능숙함'이 되어야 한다. 각자 가진 달란트를 최대한 노련하고 능숙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능숙함은 가장 기초가 되는 자질이다. 그러다 보면 부와 명예가 따라오기도 하지만 그게 최종 목표는 아니다 (96-97쪽)

 

'능숙한 솜씨는 곧 사랑의 표현'이라는 원리를 적용한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의 이런 속성을 파악한 이들도 여전히 성공하고 싶어 하지만 일중독에 빠지거나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이유로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그게 사실임을 믿는다면 다수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일과 더 많은 보수를 얻을 수 있는 일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할 경우, 의당 보수는 줄어들지라도 더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쪽을 골라야 한다. 해당 분야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남을 돕는 일이 아니더라도 모든 노동은 본질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행위다. 크리스천은 굳이 직접 목회를 하거나 비영리 자선단체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스스로 하는 일을 통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97쪽)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것. 국회에서 일하면서, 좋은 생각과 좋은 마음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세상은 굉장히 복잡다단하고 그 속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능숙함,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실력을 기르려는 시도들이 종종 매정하게 보이거나, 성공을 위한 아집으로 변질되진 않을까 걱정한 적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전문성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고 더더욱 성장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Part 2 일, 끝없이 추락하다

 

Chapter 5 아무리 일해도 열매가 없다

밤낮없이 매달려도 입에 풀칠하기조차 버겁다

 

죄는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인생뿐만 아니라 공적이고 사회적인 삶, 특히 일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창세기 1-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일을 하도록 인간을 지으셨지만, 죄에 오염된 노동은 '고통스러운 수고'(창 3:17)에 지나지 않는다. 일 자체는 저주가 아니지만 총체적으로 죄의 저주 아래 놓인 인생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낟알을 얻으려 땀 흘려 땅을 일궈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기 일쑤다(창 3:18). 정원을 가꾸는 게 인간은 온갖 노동과 문화를 세우는 작업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언은 사람이 하는 모든 일과 수고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종종 물거품이 되고 말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일에게 닥친 저주 가운데 하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108쪽)

 

행복해지려면 일이 필요하다. 피조물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하게 하려고 일을 주셨으므로 인간은 스스로 성취할 수 있는 세계를 잠깐이나마 내다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죄에 빠지면서 일 또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열매를 간절히 바라지만 성에 차도록 얻을 수 없으며 처절한 실패를 겪는 사례도 부지기수다. (115-116쪽)

 

크리스천들은 친히 지으신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소망과 깊은 위안을 찾고 온몸을 던져 일하며 열매를 구할 때마다 가시덤불이 자라나는 이 땅의 현실에 무릎 꿇지 않을 힘을 얻는다. 아울러 이생에서 하는 일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노동의 실체가 아님을 알기에 또한 온전할 수도 없음을 받아들이다. (117쪽)

 


Chapter 6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

그저 성공의 쳇바퀴를 따라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

 

(전도서 말씀)

 

그렇다면 성경은 직업 선택과 관련해 어떤 지혜를 주는가? 첫째로, 여럿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는 사치를 누리는 처지라면 잘할 수 있는 일에 뛰어들라고 가르친다. 달란트와 능력에 맞아야 한다. 그건 마치 잠재력의 씨앗이 가득 뿌려진 정원을 가꾸는 작업이나 매한가지다. 능숙하게 사역할 여지를 극대화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둘째로, 노동의 주목적이 세상을 섬기는 데 있으므로 이웃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쪽으로 나갈 필요가 있다. 일이나 조직이나 사업이 남들을 더 낫게 하는지 아니면 인성의 가장 나쁜 측면을 자극하는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133쪽)

 

셋째로, 될 수 있는 대로 그저 가족과 인간 공동체, 그리고 자신만 생각할 게 아니라 활동하고 있는 분야의 유익도 도모해야 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따르면, 하나님은 피조물을 가꾸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경작자들을 키워 내셨다. 우리 역시 단순히 일하는 차원을 넘어 피조 세계를 보살피는 인류의 능력을 확대해 가는 데 노동의 목표를 두어야 한다. 지금 하는 일을 가능한 한 더 낫고, 더 깊고, 더 깔끔하고, 더 노련하며, 더 고상하게 처리하는 방식을 보여 주기 위해 자신을 갈고 닦는데 힘을 쏟겠다는 건 꽤 훌륭한 목표다 (134-135쪽)

 

고생스러운 노동 없이 누리는 평온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평안이 없는 수고도 마찬가지다. 일과 평온은 둘 다 필요하다살면서 어떻게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잡느냐 하는 문제는 성경이 다루는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다. 우선, 돈과 권력을 우상으로 만드는 성향이 있음을 인식하고 되새겨야 한다고 지적한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고 한 전도서 4장 4절이 대표적이다. 둘째로, 돈을 덜 버는 한이 있더라도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전도서 4장 8절을 보라.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 (137쪽)

 


Chapter 7 탐욕의 수단으로 변질되다

고생해서 이만큼 일구었는데 이걸 포기할 수는 없어!

 

(에스더)

 

죄에 물든 마음에서 비롯된 욕망들은 현실 세계에 긴장을 불러오고 결국 붕괴에 이르게 한다. 스스로 중요한 존재가 되려는 교만한 갈망은 필연적으로 경쟁과 분열, 갈등을 일으킬 수 밖에 없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집중하는 삶이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 일치와 사랑을 빚어내기란 불가능한 노릇이다. 그런 마음가짐은 스스로 숭배의 대상이 되든지 집단을 우상으로 삼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간다. 인류가 그토록 애타게 구하는 영광과 관계는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공존할 수 있다. (143쪽)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남을 유익하게 하겠다는 순수한 동기만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려 한다. 한없이 다정하고 윤리적으로 훌륭한 이들도 이기적인 욕구나 두려움, 또는 영예를 얻고자 하는 갈구 앞에 쉬 무너진다. 인간과 세상이 망가지고 깨어졌음을 인정한다면 제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꾸준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한쪽을 콕 찍어서 이웃을 섬길 뜻을 품고 일하는 '좋은 사람'으로 규정하고 다른 한편을 가리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제 한 몸만 생각하는 '나쁜 인간'으로 단정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너나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이기적인 DNA와 경쟁을 추구하는 교만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145쪽)

 

저마다 일하는 분야마다, 또는 관련 있는 영역마다 도려내야 할 썩은 자리가 허다하다고 했다. 그런 일에 뛰어들면 수입이 줄거나 출세의 사다리를 오르는 속도가 떨어질 수 있으며 경력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갈등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되물었다. 그저 궁궐에 들어가는 데 그칠 게 아니라 거기 머물며 온 힘을 다해 모든 규정들을 바꿔 놓으라고 했다. 섬기라는 것이다. 고귀한 자리에 오른 게 바로 그 일 때문인지 누가 알겠는가! (149쪽)

 

에스더를 단순한 본보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화살표로 본다면, 그리고 예수님을 표본이 되는 스승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개인적으로 그런 일을 행하신 구세주로 인식한다면 저마다 자신이 주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깊이 묵상하면 정체성이 달라진다. 스스로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참다운 가치를 지닌 인물임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얼마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일도 훨씬 덜 이기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 영향력, 이력서, 거기서 얻는 이득을 포함해서 일하는 삶과 관련된 온갖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모험을 할 수도 있고, 소모해 버릴 수도 있고, 통째로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만큼 자유로워진다. (158-159쪽)


 

Chapter 8 일이 인생의 전부가 되다

인생이 통째로 일에 빨려 들어가 망가지다

 

루터는 여기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신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 합리화하거나 의로움을 입증하려 한다면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종교인들은 윤리적 덕성이나 예배 행위, 사역 따위에서 '사랑과 은혜, 선의'를 구하는 반면,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손에 넣거나 큰 기쁨을 누리는 데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기본적으로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거짓 신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것이다. (166쪽)

 

과거와 현재의 전통문화들은 주로 전승과 종교를 통해 체득하는 윤리적 절대 기준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한다. 지혜는 부모나 제사장, 통치자처럼 권위를 가진 인물들의 입을 거쳐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된다. 이러한 문화들은 구성원들에게 공동체 안에서 아들과 딸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부족원과 국민으로서 저마다 맡은 역할과 의무를 받아들이고 성실하게 완수하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자연히 가족과 인종, 국가라는 개념이 위태로우리만치 중요해진다. (171-172쪽)

 

지금으로부터 대략 5백여 년 전에 서구사회에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과학이 발전하고 계몽주의라는 철학 사조가 힘을 얻으면서 현대사회는 종교니, 부족이니, 전통이니 하는 우상들을 끌어내리는 대신 이성과 경험, 개인의 자유 따위를 세계관 전반을 지배할 궁극적 가치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이성'이라는 현대적 가치에는 몇 가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과학과 기술의 중단 없는 전진을 통해 구현되는' 진보라는 이상이다. 현대인들은 "과학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행복한 시대가 가까워지며 역사와 정치가 올바른 궤도를 찾게 될 것"이라는 신념을 받아들였다. 흔히들 과학만이 단순한 추측이나 감정이 아니라 증거를 바탕으로 결과를 끌어내는 철저하고도 실증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현대적인 세계관으로 보자면 모든 현상은 자연적이므로 반드시 물리적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관점은 대중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막대한 문화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 대다수 현대인들은 객관적이고 반박할 수 없는 '과학적 증거'가 없이는 공개석상에서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만 주면 과학기 그동안 제기된 모든 질문에 답안을 내놓고 온갖 문제들 또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게 현대인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174-175쪽)

 

계몽주의에 대한 잘 정리된 글입니다. 저도 이 글에서 설명한 것 처럼 ‘이성’을 많이 의지하는 편입니다. 어떤 방식이 더 효율적일 지, 객관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이런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하고 결정하는 편입니다. 이러한 생각 역시 역사와 시대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걸 인식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개인이 우주의 중심이며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176쪽)

 

19세기 후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작품이 나오면서 서구사회 전반에 문화적 변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니체는 세계대전의 공포가 세계를 휩쓸기 훨씬 전부터 과학이 반드시 인류의 진보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사상(신흥종교의 사이비 신앙)은 우상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적인 근거가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 과학은 단지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려 줄 뿐,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고도 했다. 인간은 친절하고 이타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지만 또한 잔인하고 폭력적이 될 수도 있다. 과학은 다만 권력을 수중에 넣은 이를 위해 봉사할 따름이다. 니체의 이론에 따르면, 과학이 어느 정도 더 나은 세계로 안내하리라고 생각하는 건 턱없는 확신에 불과하다. 오히려 무력 충돌이나 환경 파괴, 과학기술을 강력한 사회통제 수단으로 악용하는 독재자의 출현으로 암울한 미래가 펼쳐질 공산이 더 크다. (179-180쪽)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아무도 인류의 보편적인 '목적'이나 목표 따위를 주장하거나 거기에 동조할 수 없으므로 가진 건 오로지 '수단'이나 기술뿐이다. 건전한 인생이나 바람직한 인간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이 없으므로 저마다 권력을 소유하려는 개인적인 경쟁만 남는다. 기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무엇이든 하게 되어 있다. 과학의 앞길을 안내하고 한계를 지어 줄 더 고상한 이상이나 윤리적 가치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182쪽)

 

복음은 지금 이곳에서 영감을 잃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충족감을 느끼며, 신실하게 일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첫째로, 복음은 일과 관련해서 맥락이 전혀 다른 대안을 내놓는다.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무엇이 인간을 풍요롭게 하는지 설명하는 세계관이나 내러티브가 이끌어 가는 방안이므로 한결 생생할 수 밖에 없다.

둘째로,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파트너가 되어 세상을 돌본다는 새롭고 풍성한 노동관을 제공한다. 이러한 성경의 개념은 단순한 일에서부터 가장 복잡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알든 모르든 다른 이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이 노동에 관해 가르치는 신학 원리를 정확하게 깨달은 크리스천들은 모든 이들이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고 기꺼이 참여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서 다르게 일할 방법을 찾는다.

셋째로, 복음은 인간의 마음과 관련한 지혜로운 조언뿐만 아니라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온갖 건강한 지침들을 통해 대단히 새롭고도 민감한 윤리 기준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복음은 일을 하는 동기를 백팔십도 바꿔 놓을 뿐 아니라 상황이 좋든 나쁘든 늘 함께하는 신선하고 강인한 힘으로 심령을 가득 채워 준다 (189쪽)

 


Part 3 일과 영성, 복음의 날개를 달다

 

Chapter 9 복음의 관점으로 일을 이해하다

회사 신우회에 참석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말라

 

본질적으로 거대 서사, 즉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고, 무엇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렸으며, 그걸 다시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스토리다. 이렇게 커다란 질문들에 대한 기본적인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에 대답하려면 세상을 설명하는 스토리, 곧 모든 사물에 관한 내러티브, 한마디로 세계관을 채택해야 한다. (195쪽)

 

성경적인 세계관은 독특하게도 인류의 본질과 문제, 구원을 관계적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음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어 그 관계를 망가뜨렸다. 그러므로 구원과 은혜를 통해 옛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199쪽)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독특한지 새삼 놀랍다. 오직 크리스천의 세계관만이 세상의 일부나 특정 집단이 아니라 죄(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상태) 자체를 문제로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회복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죄는 온 천하를 총체적으로 감염시켰으므로 세상은 영웅과 악당으로 구분 지을 수 없다(그렇게 한다면 인간은 분명 전자가 아니라 후자 쪽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순진하게 유토피아를 꿈꾸든지, 냉소적이 되어 환멸에 빠진다. 이도저도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그만큼 악하지 않은 무언가를 악마로 몰아가거나, 충분한 능력을 갖지 못한 무언가를 우상으로 만들 것이다. 결국 다른 세계관들이 벌이고 있는 씨름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다 (201쪽)

 

복음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기업에는 확연히 구별되는 비전이 있다. 독특한 방식으로 고객들을 섬기고, 적대적인 관계와 착취가 없으며, 생산물의 탁월함과 품질을 대단히 강조하고, 설령 수익이 줄어들지라도 조직의 현장에서 일상적인 기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에 '골고루 미치는 윤리적인 환경이 갖춰져 있게 마련이다. 복음적인 세계관을 좇는 비즈니스에서 이윤은 수많은 구성 요소들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208-209쪽)

 

던 플로우라는 친구는 자동차 영업의 관행을 제쳐 두고 복음의 스토리라인을 따랐다. 업계의 전형적인 내러티브는 최대한 고가에 차를 팔아넘기라는 것이어서 세일즈맨들 역시 가장 높은 가격을 지불할 것처럼 보이는 고객을 알아보고 구슬리는 방식으로 수입을 올렸다. 던은 고객 하나하나에게 가장 품질 좋은 차량을 판매하는 데 초점을 둔 비전을 품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금방 눈에 들어왔다. 협상력을 갖춘 백인들보다 여성들과 소수민족들이 더 비싼 값을 치르고 자동차를 구입하고 있었다. 던 플로우는 모든 차량에 동일한 수익률을 적용하기로 결심했다. 누구나 같은 비용을 내고 차를 가질 기회를 보장해 준 것이다. (209쪽)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건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눈치를 보며 동료들과 빈둥거리지 않는 선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고 사무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수준도 아니다. 오히려 복음적인 세계관에 담긴 의미, 그리고 일하는 삶 전반과 손길이 미치는 조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곰곰이 성찰한다는 뜻에 가깝다. (209-210쪽)

 

복음적인 세계관(피조물 가운데 그 무엇도 우상화하거나 악마로 취급하지 않는)은 저널리스트를 특별하게 준비시켜서 공명정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보도하도록 이끌어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른 세계관들은 한쪽은 지나치게 신뢰하는 반면, 다른 편은 좀처럼 믿으려 들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세계관을 바닥에 깔고 있든지, 복음적인 내러티브를 가졌을 때에 비해 천진난만하리만치 긍정적이거나 과도하다 싶을 만큼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분위기를 띤다. (211쪽)

  

놀랍게도 이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아이비리그 학교들을 처음 세운 설립자들은 "구원의 증표는 높은 자존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본 인간은 한없이 낮고 천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겸손한 자각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이들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자비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엄격한 청교도들'이었음을 지적한다. 델반코 자신은 크리스천이 아니었고 세속 문화가 엘리트들을 겸선하게 만드는 토대가 되길 기대했지만, 지극히 명민했던 터라 성공적이고 부유한 이들의 자만심을 견제할 자원이 크리스천의 세계관에 있음을 인정할 줄도 알았다. 하지만 오늘날 누구도 제힘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으며 부와 재능과 권력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라는 크리스천의 사상은 현대 문화 속에서 전반적으로 사라지고 있다. 대신 '능력주의의 어두운 속성'이 활개를 치며 그 어느 때 보다도 불공평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214-215쪽)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근거로 하늘나라를 그리워할 뿐만 아니라 온전히 회복된 물질세계를 꿈꾸며 속속들이 낙천적인 마음가짐을 갖게 한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빚어진 예술가들은 감상에 치우치거나 쓰디쓴 절망을 곱씹는 행태를 보이지 않는다. (216쪽)

 

크리스천 의료인은 전인적인 인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신앙은 환자의 육신을 보살피는 데 그치지 않고 인류애와 독창성을 발휘해 치료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223쪽)

 

성경은 회사를 운영하고, 하수도를 청소하고, 환자를 보살피는 일에 관해 하나하나 구체적인 지침을 주는 핸드북은 아니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데 긴요한 문화, 정치, 경제, 윤리를 비롯해 광범위한 이슈들을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 세계관은 금방 눈에 들오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시대의 문화에 토대를 놓는데 크게 기여했다. 현대인이 하는 일(특히 서방사회의)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나 사상, 즉 과학기술의 진전, 자본주의를 이끌어 가는 민주적인 기풍, 인간의 천부적인 자유를 경제자유와 시장발전의 기초로 보는 사고방식 등은 전반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불러온 문화적인 변화에 힘입은 바 크다. (224쪽)

 


Chapter 10 일에 대한 이원론을 배격하다

이건 세상 일이고 저건 하나님 일이라는 이분법을 배격하라

 

일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섭리를 전달하는 도구로 보는 성경의 노동관은 대단히 중요하다. 크리스천의 세계관이 가진 차별성에 집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엘리트주의와 파벌주의를 제어해 주는 까닭이다. (232쪽)

 

설령 그릇된 세계관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과 창조, 인간의 본성, 구원의 필요성 같은 성경적인 세계관의 몇 가지 측면들을 파악하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게 '일반 은총'이라는 교리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작동시키는 시스템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자리에 거룩한 스토리를 심어 두셨다. 하나님과 선을 인식하는 이런 부류의 지식을 '일차적 신념'이라고 부른다. 의식과 지성, 문화적으로 체득하는 '이차적 신념' 같은 요소들의 극렬한 저항을 받기는 하지만, 누구나 어느 수준까지는 일차적 신념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237-238쪽)

 

일반 은총의 개념이 없으면 크리스천들은 스스로 문화적인 게토에 들어앉아 자급자족 하는 데만족할 가능성이 높다. 크리스천 의사에게만 치료를 받아야 하고, 크리스천 변호사에게만 일을 맡기고, 크리스천 상담가의 말만 듣고, 크리스천 예술가의 작품만 즐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에 선물을 쏟아부으시면서 상당 부분을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맡기셨다. 모차르트는 예수를 믿었든 아니든, 선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문화를 두루 연구해야 한다. 거룩한 형상을 좇아 지음받은 피조물인 인간은 어디서든 주님의 진리와 지혜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239-240쪽)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의 문화와 직업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죄에 대한 관념과 시각이 두터워지면 누가 봐도 기독교적이라고 할 만한 일마저 우상숭배로 변질될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음을 틈틈이 떠올리게 된다. 일반 은총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면 명백히 세상의 일과 문화라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요소가 항상 깃들어 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247쪽)

 


Chapter 11 일을 하는 동기가 바뀌다

높은 보수나 칭찬을 위해 일하지 말라

 

인격에 대한 독특한 정의(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는 존재)와 전례가 없는 사랑 개념(세상의 기원이며 목적이고 숙명)을 기반으로 기독교 신앙은 사상사와 문화 발전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기독교적인 인간관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 만인의 지지를 받는 인권 철학은 결코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므로 문화적, 윤리적, 인격적 상태를 떠나 존중과 사랑을 받을,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가졌다는 시각을 고수한다. 이런 윤리 원칙의 전면적인 특질은 놀랍기 그지없으며 기독교 이전의 문화에서는 이런 부류의 관념이 생성된 적이 없었다. 페리가 주목하고 다른 학자들이 강력하게 뒷받침하듯, 인권 의식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 있다는 기독교 신앙을 토양으로 성장했다. (261-262쪽)

 

어떻게 하면 지혜로워져서 훌륭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성경은 지혜를 쌓는 데는 몇 가지 길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로,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알아 가야 한다. 주님의 너그러운 사랑이 추상적인 교리에 그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실재가 되어야 상황에 과민하거나 무감각하게 반응하도록 몰아가는 근심과 교만이라는 양대 세력에 덜 휘둘린다.

둘째로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잘못된 결정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의 실체와 뜻을 이룰 능력이 없음을 절감하지 못하는 데서 비로소딘다. 성경은 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 드러내서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 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못하게 막아 준다.

셋째로 경험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어리석은(우상들 탓에 현실을 보지 못하는) 심령은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사실, 인생의 굴곡은 그릇된 추론에 빠지게 만들기 일쑤다. 교만한 이들은 실패할 때마다 남을 탓하는 반면,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은 다른 이들의 책임까지 끌어안고 자책을 거듭한다. 성경말씀이 주는 지식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파악하지 못하면 경험에서 배울 게 없지만, 주님의 성품과 자신의 실체를 깨달으면 세월이 흐를수록 인류 본성과 스스로 몸담고 살아가는 시대, 말의 힘과 쓰임새, 인간관계가 작동하는 원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이들이 모두 지혜가 되어 결정을 내리는 데 기준을 제시한다. (265쪽)

 

그렇다면 성령님은 어떻게 임하셔서 지혜를 베푸시는가? 조용히 앉아서 음성이 들리길 기다려야 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회심한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유대인의 까다로운 규정들과 문화적인 관습을 따르게 해야 하는가를 두고 초대교회 리더들이 논란에 휩쓸렸다. 조직의 정책 문제를 둘러싼 씨름이었다. 본문은 해법을 찾을 때까지 치열하게 논쟁하고 논의했음을 보여 준다. 이윽고 결론을 낸 제자들은 답안을 매력적인 표현에 담아 각 교회에 전달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는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았노니"(행 15:28). 다시 말해,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 고민하고 검토한 끝에, 성령님께 맡기겠다는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267쪽)

 

크리스천들은 일을 즐길 자유를 얻었다. 주님을 섬기듯 일하기 시작한다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선에서 일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높은 보수와 칭찬을 받는 게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지 않는다. 일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주요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70쪽)

 

크리스천은 인정사정없다는 소릴 들어서는 안 된다. 반듯하고 따뜻하며 이웃에게 헌신적이란 평판을 얻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기꺼이 용서하며 화해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절절하게 느껴져야 한다. 앙갚음하거나 신앙이 깊은 체하거나 악의를 품는 기색이 없어야 한다. (274쪽)

 

크리스천은 너그럽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는 일터에서 다채로운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 경영자들은 직원이나 고객들에게 시간을 쏟고 자금을 투자해서 너그러움을 드러낼 수 있다. 소규모 자영업자들은 수익률을 줄여서 고객과 이익을 나누고 직원들에게 더 많은 급여를 줄 수 있다. 일반 시민들도 경제 수준이 고만고만한 이들에 비해 조금 더 많은 시간과 돈을 뗴어서 베풀면 된다. 소박하게 살고, 잠재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수준을 낮추기만 하면 다른 이들에게 재정적으로 너그러움을 보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276쪽)

 

크리스천은 또한 난관과 실패 앞에서도 평온하고 침착하다는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는 인격적인 품성을 개발하는 데 복음의 자원을 끌어다 쓰고 있는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276쪽)

 

크리스천은 일터에서 함께 일하는 다른 신앙을 가진 이들을 똑같이 존중하고 대우해야 한다. 동시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수님을 자신 있게 인정해야 한다. 양쪽 극단에 있는 이런 실수들을 피한다면, 대단히 비범하면서도 건강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278쪽)

 

본질적으로 부패가 없는 구조 안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크리스천이라 할지라도 통상적인 업무 처리 방식에 대해 광범위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하다. 특히, 저마다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서 어떻게 하면 (신앙 공동체와 일터에서) 더 많은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을지 늘 탐색해야 한다. (279-280쪽)

 

Chapter 12 새로운 능력으로 일하다

구원의 확신을 가슴에 새기고 열정을 품고 일하라

 

에필로그

리디머교회가 하고 있는 '일과 신앙을 하나 되게 만드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