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드디어 읽는구나.
이 책이 출간됐을 때부터 사고 싶고 읽고 싶었는데 드디어 읽는다.
글쓰기 방법에 대해서만 적힌 책인 줄 알았는데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 방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09년 8월에 초판이 발간되었다.
저자는 김기현 목사님.
글쓰기와 책 읽기를 즐기?시는 분.
많은 책을 쓰고
많은 책을 번역하신 분..
서문
1부는 그리스도인이 “왜 글을 쓰는가?”에 관한 대답이다.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하고, 내면을 치유하고, 지성을 계발하고, 관계를 소통하고, 세상을 변혁한다.(p7)
2부에서는 하나의 완성된 글을 쓰기 위한 과정을 따라 구성되었다. 글쓰기란 대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책을 읽고(6장), 읽은 내용을 메모하고(7장), 메모를 의지해서 개요를 작성하고(8장), 개요를 따라 문장을 작성하고(9장), 다 쓴 글을 퇴고한다(10장).(p7)
프롤로그 내게는 책이 필요하다
죄렌 키르케고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본받음’으로 정의한다. 그리스도와 사도를 본받아 그들이 겪었던 고초에 시달려야 할 제자가 교수가 된다는 것을 그는 한 마디로 난센스라고 조롱한다. 좀 좋게 말해 코미디요, 솔직히 말해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리스도는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지고 죽으시는데, 신학 교수라는 사람은 그 분의 죽음을 논문을 작성해서 교수가 된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따르지만, 결코 그리스도를 본받지는 않는다. 내가 지금 쓰고있는 글 역시 그리스도의 삶과 사랑을 본받는 것을 대체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나 스스로는 글을 쓰는 행위와 얻은 성과를 보고 마치 그리스도를 잘 본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공산이 무척 크다.(p11-12)
레슬리 뉴비긴의 말도 아프기는 매한가지다. ... “예수는 책을 쓰지 않고 공동체를 만들었다.” 우리 주님의 의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삶으로 살아내는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의 창조에 있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과 공동체를 동일시하셨다. 그랬기에 책이 아니라 사람에 관심을 두셨다. 그런데도 나는 사람보다도 책을 더 좋아하는 병통이 있다. 이 또한 주님의 의도에 반하는 쓸데없는 짓이 아닐까, 목사인 내가?(p12)
예수의 공동체는 다름 아닌 예수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공동체다. 그것이 예수를 살아내는 방법이자 핵심이다. 교회는 예수를 살고 말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기록한다. (p12)
결단코 책 쓰는 것을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치환하려 해서는 안되고, 그렇게 강변해서도 안 되지만, 일부라는 점마저 부정할 것까지 없다. 글을 쓰는 것 역시 제자도의 일부다. ... “요컨대 나는 하나님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나는 한 권의 책도 필요로 합니다.” 라고 말한 미로슬라브 볼프의 고백도 왜 내가 글을 써야 하는지 알게 한다.(p12-13)
-> 나도 이런 찔림이 있었다. 책만 읽고 있는다고 뭐가 바뀌나... 글을 쓴다고 뭐가 바뀌나.. 그 일부라는 점마저 부정할 것 까지는 없다.
글을 쓰고 책을 짓는 목적은 무엇인가? ... 그리스도인의 글쓰기도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증언하고 표현하며, 그 글을 읽는 이들도 생명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p14)
그럼 무엇을 쓸 것인가? ...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말과 일,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다.(p14)
글은 결국 그 사람이다. 무릇 모든 책은 저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책과 글은 쓰는 이의 인격이요 얼굴이다. 과장하여 슬 것도, 부끄럽다고 감출 것도 없다. ... 글쓰기는 내 속의 나, 이런 저런 가면 속에 감추어진 맨얼굴 그대로의 나를 찾는 도구다.(p15)
-> 정말 그런 것 같다. 글을 쓴다고 해서 100% 솔직한 건 아니지만 어쩌면 그 거짓됨까지도 그 사람의 모습이니.
왜, 무엇을 쓸 것인가? 이 말은 곧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것과 같다. 자기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글로 쓰면 된다. ...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지, 무엇이 온통 나를 사로잡고 있는지, 바로 그것이 내가 써야 할 바로 그 주제다.(p16)
말과 글이란 소통과 전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고 변모시킨다. 그리고 창조한다. 글짓기는 하나님이 하시던 창조의 사역을 이어가는 행위다. 하나님의 창조를 반영하고 모방하고 대신하고 계승한다.(p21)
1부 왜 글을 쓰는가
1장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한다
영과 몸이 온전히 통합된 사람이 영성이다. 영성 깊은 삶은 육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며, 육체를 탐닉하는 것도 아니다.(p25)
영성은 그저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삶의 정의는 ‘그리스도를 뒤따름’이다.
헨리 나우웬의 말이다.
영적인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최대한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일깨워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서 영감을 얻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영적인 생활은 우리에게 훨씬 더 철저한 요구를 한다. 즉 그것은 시공간 속에서, 즉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p26)
영성이란 지금 여기서 예수의 삶을 살아내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내가 걸어온 지난 삶의 궤적은 예수의 이야기에 비추어 보아야 하고, 그분의 이야기의 일부다. 즉, 예수님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다. ... 내 삶의 이야기를 예수님 이야기와의 관련 속에서 기록하는 자서전, 그리고 기도에 살과 뼈를 입혀 몸이 되게 하는 기도문은, 나로 하여금 살아 있는 그리스도가 되게 하는 글쓰기다.(p26)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셨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 섞여 사는 것, 이것이 복음이고 영성이다.(p27)
영성은 몸으로 영을 사는 것이다.(p28)
영성이란 삶의 이야기다.(p28)
영성을 훈련하는 탁월한 글쓰기의 방편은 예컨대 일기, 자서전, 기도문 쓰기 등이다. 그 외에도 설교나 성경 공부, 경건의 시간 등을 기록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풍요롭게 한다.(p29)
자서전, 곧 자기 삶의 이야기는 우선 글감으로 탁월하다. ... 글쓰기가 어렵다고 느껴지면 자기가 가장 잘 알거나, 관심이 있거나, 배경지식이 풍부한 분야에서 글쓰기를 훈련하는 것이 좋다. 자기 이야기만큼 편안하고 만만한 주제는 없다.(p30)
삶의 이야기는 영성과 직결된다. ...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이야기의 일부다. 또한 우리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의해서만 해석 가능하다.(p30)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자기가 살아낸 것을 적어 보자. ... 자서전은 필경 과거 행적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유혹에 직면한다.(p32-33)
린다 스펜스는 글쓰기의 네 가지 장애물을 꼽는다. 첫째, “누가 내 인생에 관심을 둔단 말인가. 괜히 비웃음만 사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패한 베드로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희망을 발견한다. 그런 베드로가 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베드로가 되었다. 실수투성이 베드로에게서 우리의 자화상을 보고,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한 베드로는 좌절감이 아니라 희망으로 작용한다. 내 실패에서 내가 무언가를 배웠듯이 다른 누군가도 배울 것이다. 혹, 그가 비웃는다면 그건 그의 몫이고 그의 인격이다. 당신과는 무관하다.(p34)
둘째 “내가 잘 쓸 수 있을까. 그렇게 잘 쓸 것 같지 않은데...” 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걸작이나 대작이 아님을 기억하자. 내가 그리스도를 어떻게 살아냈는가를 말하려는 것 뿐이다. 나와 더불어 그리스도가 그 이야기의 주연이다.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나 아니면 누가 쓸 수 잇단 말인가? 내가 써야 한다. 내가 제일 잘 쓸 수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다.
셋째,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 해서는 안 될 것 같은데...”라는 우려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에게 기억하라는 말을 반복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하나님 이야기를 잊어버렸을 때, 그들은 타락했고, 심판을 받았다. 자기도취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다. 지난 시절에 있었던 일을 숙고하면서 그저 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생활 가운데 동행하시고, 간섭하시고, 때로는 멀찌감치 서서 침묵하시던 그분과 나의 이야기를 쓰면 된다.
넷째, “그냥 묻어 두는 게 더 나은 것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덮어 두고 싶은 비밀을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성숙하면서 새롭게 보는 안목이 형성되기 하고, 자서전을 쓰면서 그런 관점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쉽사리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타인을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한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평화를 얻을 수도 있다. 용기를 내라.(p35)
-> 블로그에 일기를 쓸 때 가끔 드는 고민들이 여기 다 적혀있네. 누가 내 인생에 관심이 있을까? 글도 잘 못쓰는데 읽는사람이 이해라도 할까? 이렇게 나 한테 신경쓰는데 너무 많은 시간(하루에 한시간 가까이)을 쓰는 거 아닌가? 굳이 적어서 밝혀야 할까. 없던 일로 그렇게 덮고 가면 안될까.
기도문이 은밀한 골방에서 나눈 하나님과의 대화라면, 자서전은 드넓은 광장과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낸 이야기다.(p38)
2장 글쓰기는 내면을 치유한다
사울이 분노의 감정을 처음부터 처리하지 못하여 제 자신이 분노의 제물이 된 반면, 다윗은 분노와 슬픔을 때로는 눈물과 통곡으로 걸러냈고, 때로는 시와 음악과 노래로 방출했다. 그것이 다윗의 건강함의 원천이었고 중심이었다.(p43)
다윗은 소극적으로는 억눌린 감정을 음악과 시를 통해 표출하고 해소시켰다. 내면에 나쁜 감정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설령 그것이 마음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도 바울의 말씀처럼 해가 지도록 악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다른 것으로 채웠다. 시편 1편의 묵상이 그 증거다. 히브리어로는 ‘하가’인데, 이것은 동양적 명상이 아니라 낭송을 의미한다. 낭랑한 목소리로 중얼 중얼 경전을 읊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선방의 스님들의 선보다는 선비들의 유교 경전 읽기와 유사하다.(p44)
사울은 다윗만을 생각했지만 다윗은 하나님만 생각했다. 사울은 평생 다윗의 꽁무니만 쫓아다녔다. 다윗은 어찌하든지 간에 하나님만을 추구했다. 사울은 다윗을 어떻게 하면 죽일 것인가에 골몰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어떻게 노래할 것인가에 집중했다. 사람은 생각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하는 대로 생각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묵상하여 사울을 닮지 않고 하나님을 닮게 되었다. 묵상으로 내면을 채우고, 시를 써서 내면을 정화하였다. 그것이 사울과 비교되는 다윗의 승리의 원동력이다.(p45)
분노의 폐해를 비교적 단기간에 그것도 매우 효과적으로 줄이는 법은 글쓰기다. 그에 따르면, 20분 정도 속 깊숙한 곳 이야기를 끄집어내 쓴 집단과 일상적인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쓴 집단을 비교해 보았더니 전자가 더 건강한 심리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p46)
3장 글쓰기는 사고를 계발한다.
그러면 왜 이다지도 신앙생활에서 지성이 중요한가? 생각하지 않으면 생각 당하기 때문이다. 인간 지성의 전당에는 주인이 있다. 그곳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지 못하면, 누군가가, 무엇인가가 주인 자리를 차지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는 법을 훈련하지 않으면 어느새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생각에 물들게 된다. 세상 풍조에 흡수되고 세상 가치를 좇아 살게 된다.(p59)
논리적인 글쓰기는 지성 계발과 글쓰기가 만나는 접점이다. 미국의 이공계 대학인 MIT는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무척 강조하고, 구내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글쓰기에 관한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었다. 왜 글쓰기를 중시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이 놀랍다. 그런 걸 질문 하는 것이 의아하다는 반응이다. 대학을 졸업하는 이들은 사회의 리더가 될 사람이고, 그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 중 하나가 글을 쓰는 것이니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p62)
무릇 모든 학문의 기초는 책 한 권을 제대로 읽는 것이다. 책 한 권 바로 읽지 못하는데 다섯 수레를 읽은들 무슨 소용 있을까. 오독과 왜곡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곁에 두고 아끼며 읽고, 몇 번이고 겹쳐 읽으면서 우리 정신은 자라게 된다.(p65-66)
4장 글쓰기는 관계를 소통한다
인간은 자연 세계와 모순의 상태에 빠져 있고, 동료 인간과도 대립하고, 내적인 자기모순에 사로잡혀 있고, 하나님에게도 반역을 꾀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른 모순관계의 근본이다. 때문에 구원은 ‘온전성’이다. 이렇게 소외되고 단절된 모든 관계를 회복하고, 소통시키는 것, 무엇보다도 어느 하나 빠짐없이 위의 네 가지 관계 모두가 제 자리를 잡는 것이다.(p70)
글쓰기는 소통 기술이다. 글과 글쓰기를 통해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한다. ... 글쓰기는 원천적으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격으로 쓰는 것이 봉쇄된다. 글 속에 글쓴이의 주관과 기질, 생각과 성품이 짙게 배어있어서 감출 수 없지만, 그것을 글로 정돈하면서 얼마간의 자기 객관화가 수반된다.(p70-71)
편지가 일견 낡고, 느리고, 귀찮고, 효율적이지 않아 보여도 기독교의 대화와 소통 방식이다. 설교와 가르침이 선포라는 속성상 일방적이고 때로 고압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반면 엽서나 편지는 격의 없이 교제하고 상담하기에 더 없이 좋은 수단이다.(p76)
내가 편지를 쓰는 것이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바는 필경 내가 이곳에서 잊혀진 채 지내고 싶지 않다는 것,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이 ‘바깥에’ 여전히 존재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내가 쓰는 편지는 부분적으로 이곳 수도원 울타리 안에 있는 나에게 관심을 쏟도록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내가 새로 개발한 방편일 수도 있다.(p78)
-> 군대에서 편지 쓸 때 이런 생각이 깔려 있지 않았을까? 나를 기억해 주기를, 생각해주기를 바라며.
외롭고 쓸쓸한 마음 달래는 편지쓰기를 경계하고 푸는 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하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그로 말미암은 분리의 시초가 하나님과의 관계 두절에 있음을 환기한다면 되겠다. (p79)
5장 글쓰기는 세상을 변혁한다.
하나님이 언어로 세상을 창조하시듯, 인간도 언어로 세상을 창조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창조의 흉내 내기다.(p82)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언어가 묵시다. 묵시의 언어와 칼럼의 논리 정연한 언어는 분명 외관상 다르지만, 그것이 세상을 개혁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성서의 언어와 글은 세상을 변혁한다. 글쓰기 역시 고통으로 뒤채는 세상과 내면을 재창조하는 데 일조한다. 그것이 글쓰기의 힘이다.(p94)
2부 어떻게 글을 쓰는가
6장 독서
내게 “글쓰기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데, 대답은 한결같다. 우선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다. ... 첫째는 많이 읽기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하지만 다독이 능사도 아니다. 읽어도 많이, 넓게 일어야 하지만 한 권을 읽어도 제대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이 읽고, 바르게 읽어야 한다. 읽어도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독서 규칙이다. (p103)
공감하는 부분은 맞장구쳐주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전달하려는 정보와 지식에 뭔가 오류가 있는지를 찾고, 찾는 데서만 그치지 않고, 왜 저자가 이런 잘못을 범했는지 책 전체를 정밀하게 검토하고 나름 해답을 모색한다. 이렇게 읽어야 책 한 권을 제대로 소화하고, 서평쓰기에도 편리하다.(p104)
또 한 가지 방법은 같은 주제의 다른 책을 함께 또는 비교하면서 보는 것이다. 이는 독서의 최고 정점이며, 글쓰기에 더 없이 유용하다.(p104)
글쓰기를 위한 세 번째 독서 방법은 쓰면서 읽는 것이다. 행간에 쓰는 것이다. (p106)
7장 메모
다산 정약용은 아들들에게 독서하면서 그냥 읽지 말고 부지런히 초서를 하라고 신신당부한다. 초서는 읽는 책에서 중요한 부분을 가려 뽑아 쓴 것이니 오늘날의 독서 카드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아들들은 그런 걸 굳이 해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번거롭기 이를 데 없고, 이게 실제 무슨 도움이 될까, 효용성도 잘 믿겨지지 않을 것이다. 처음 하는 이들은 카드를 만다는 것이 수고롭다. 독서마저 더뎌진다.
다산은 이런 태도를 엄히 꾸짖으며 이렇게 말한다. “무릇 한 권의 책을 얻더라도 내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채록하여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p111)
메모는 책을 제대로 읽게 해줄 뿐만 아니라 글을 쓸 때 절실한 자료다. 메모해 두지 않으면 읽은 책이 내 것이 될 수 없으며, 글쓰기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p112)
그럼 왜 굳이 메모가 필요한가? 첫째, 기억력의 한계 때문이다. ... 둘째, 독서의 효율을 증대시켜 준다. ... 셋째, 글쓰기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 넷째, 메모 자체가 글쓰기이고, 훌륭한 연습이다(p112-113)
독서카드는 책을 읽으면서 인용하거나 유용할 듯한 정보를 정리하는 것이다. 저자와 책명, 쪽수, 그리고 제목을 붙인다. 그리고 읽어야 할 책과 구할 자료 목록을 적어둔다. 테마별 카드는 정보에 적절한 제목을 달거나 아니면 본인이 쓰고자 하는 글의 소주제를 제목으로 삼으면 된다. ... 저자별 카드는 여러 명의 저자를 중심으로 글을 쓸 때 필요하다. ... 작업카드다. 글을 진척시키는 과정이나 흐름을 적어두는 것이다.(p114)
8장 개요
과할는지 모르지만 개요 작성에 글쓰기 전체 시간의 절반 가까이 할애해도 된다. 그만큼 촘촘히 개요를 작성하면 시간의 낭비도 막고, 글의 짜임새도 알차게 된다.(p126)
개요를 작성할 때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첫째, 글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 둘째, 내용의 중복과 누락을 방지해 준다. ... 셋째, 글의 균형을 유지해 준다. (p128
9장 문장
문장과 문체에 욕심을 내기 전에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제 스스로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문장은 그것을 잘 전달하면 일차 소명은 달성했다. 비록 문장은 졸렬하여 내세울 것 하나 없어도, 의미를 잘 전할 수 있는 글쓰기의 최소 규칙에 대해 몇 자 적을 수는 있을 듯하다.(p142)
좋은 문장이 무엇인지는 시인이나 소설가에게 배우기 바란다.(p142)
좋은 글을 많이, 깊이, 되새김질하며 읽고 읽으면 절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다.(p144)
인용은 자신의 생각에 권위를 부여한다. ... 인용문을 소재로 언어 활용의 폭이 넓어진다. ... 분량을 채울 수 있다.(p145-146)
철학이 문장에 주목한다면, 글쓰기는 문단을 주시한다. 왜냐하면 문단이 글쓴이가 전달하려는 생각의 최소 단위이기 때문이다. 한 문단은 한 가지 생각을 담는다. 문단은 적어도 한 문장 이상으로 구성된 것으로 한 가지 생각을 나타내는 글의 단위를 말한다.(p148)
10장 퇴고
퇴고의 원칙은 둘이다. 하나는 일관성이다. ... 다른 하나는 전달력이다.(p158)
이 책과 함께 워크북에도 손을 댔다.
다 적은 건 아니지만,, 각 장마다 조금씩 적었다.
읽고나니 뭔가 깔끔한 기분이다. 구석 구석 정리도 잘 되어 있고, 읽기도 쉽고 ^_^ 좋은 책인 것 같다. 조금 아쉬운 점은, 저자가 직접 기록한 메모라든가, 글쓰기 관련 스캔본이 없다는거. 그런 시각자료가 있으면 조금 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글읽고 글쓰기는 고되지만 재밌다는 거. 저자가 이 책 어딘가에 적어든 말인데 정말 공감. 나도 재밌어서 일년?째 이러고 있다. 많은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엉성하게 정리하고 일기쓰고 있지만 어쨌든 재밌다. 재미.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살아야 병이 안날 것 같다.
그리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글 읽고, 글 쓰는게 무가치한 일이 아니구나, 의미 있는 일이구나.
적용할 것, 써먹을 것은 엄청 많은데 그 중에서 ‘나’에게 적용할 것은 뭘까? 아직은 별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어서 말이다. 일기쓰기는 하고 있고, 독서카드 만들기도 이런식으로 하고 있고, 편지로 상담?하기도 하고 있고. 일기를 쓸 때 내가 어떤 삶을 살아냈는지, 내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는지에 대해 고민해봐야겠다. 편지쓰기를 적절히 활용하고.
F.B.책공망
‘글쓰는 그리스도인’을 소개합니다.
책은 1,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그리스도인이 “왜 글을 쓰는가?”에 관해 대답합니다. 글쓰기는 영성을 훈련하고, 내면을 치유하고, 지성을 계발하고, 관계를 소통하고, 세상을 변혁한다.(p7)
2부에서는 하나의 완성된 글을 쓰기 위한 과정을 소개합니다. 글쓰기란 대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책을 읽고(6장), 읽은 내용을 메모하고(7장), 메모를 의지해서 개요를 작성하고(8장), 개요를 따라 문장을 작성하고(9장), 다 쓴 글을 퇴고한다(10장).(p7)
결단코 책 쓰는 것을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 치환하려 해서는 안되고, 그렇게 강변해서도 안 되지만, 일부라는 점마저 부정할 것까지 없다. 글을 쓰는 것 역시 제자도의 일부다.(p12-13)
이 책을 통해 다른 유익한 정보도 많이 얻었지만, 한 가지 위로를 받았습니다.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 또한 제자도의 일부라는 것.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건 어떻게 보면 소극적이고 최전방에서 한 발짝 발을 뺀 것 같아 보이지만, 이 또한 예수를 살아내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
각자 다양한 은사를 활용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 운동이겠죠..?^^, 나른한 오후 남은 하루도, 일주일도 마무리 잘 하시길...^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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