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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Life of the Beloved (2013.5.22.~6.16.)


헨리 나우웬의 책.

 

94년도에 출판되었다. 번역은 95년에.

 

머리말

 

머리말에서는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 되는 만남을 소개한다.

 

아침 일찍 아파트를 떠나 군중 틈에 끼어 직장으로 향하고, 전철 안에서 조간 신문을 읽고 나서,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금융계 소식지를 만들고, 시끄러운 음식점에서 동료와 함께 점심을 먹고, 셀 수 없이 많은 전화와 팩스로 오후 시간을 소비한 후에, 다시 군중 틈에 끼어 안락한 보금자리로 돌아온다.

이러한 장소에서 이런 생활 리듬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택시들이 질주하고, 유리로 덮인 사무실 건물들이 하늘을 찌를 것이 솟아 있으며, 유흥 산업이 밤낮없이 호황을 누리는 세상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수년 동안 연구도 하고 기도도 하고 만남도 가졌는데 아직도 이런 세상에 대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단 말인가?(p20-21)

-> 나도 이런 비슷한 질문에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사랑받는 자가 되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우리 삶에서 가장 위험한 함정은 성공이나 명예, 권력이 아니라, 자기 거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네. ... 우리가 가치 없고 사랑스럽지 못하다는 목소리를 믿게 될 때, 성공, 명예, 권력은 쉽게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다가오지 그러나 진짜 함정은 자기 거부일세. 나는 내가 이 유혹에 얼마나 빨리 넘어가는지를 보면서 계속 놀라고 있네. 누군가가 나를 책망하거나 비판하는 즉시, 내가 거절당하거나 홀로 남겨지거나 버림받는 즉시 난 이런 생각을 하지. “그래,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이 또다시 증명되었군.” 주위 환경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다거나,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한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대신, 나 자신을 책망하려 한다네. 그것도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 말일세.(p26-27)

 

교만은, 자네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보이기 싫어서 자신을 더 높은 자리에 앉히려는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분석해 보면 교만은 무가치감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닐까?(p27)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다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서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그 진리를 구현하는 것이네.(p38)

 

사랑받는 자가 되어 가는 것이란, 그 진리 곧 위로부터 아래로 실제로 매시간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상사 속으로 계시된 그 진리를 붙잡는 것이네.(p39)

 

우리 존재의 목적과 기원은, 일상 생활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과 관계가 깊다고 굳게 확신하는 바이네. 우리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 우리가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진리가 자리잡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진리를 온전히 주장함으로써 가장 큰 즐거움과 평화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말하고 사랑하고 놀고 또 일하는 와중에서 생생하고 실제적으로 드러나게 되지.(p40)

 

우리 삶에서 성령의 역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나는 선택받은(taken), 축복받은(blessed), 상처받은(broken), 나누어 주는(given)이라는 네 단어를 사용하는 거시 도움이 됨을 알게 되었네. 이 단어들은 사제로서의 내 삶을 요약해 주기도 하지. 왜냐하면 나는 매일 공동체 구성원들과 식탁에 둘러앉을 때, 빵을 취하고 축복하고 떼어서 나누어 주기 때문이지. 또 이 단어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삶도 요약해 주네.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세상을 위한 양식이 되도록 선택받아서, 축복하고, 상처 입고, 나누는-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지.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단어들이 인간으로서의 내 삶을 요약해 준다는 점이네.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어디에선가 또 어떻게든, 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 입고, 나누는 행동이 있기 때문이지.(p41-42)

 

선택받은 자

 

영적인 삶의 첫 단계는, 우리의 전 존재가 이미 붙잡힌 바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네.(p43)

 

우리가 선택받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은 거절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네. 지금같이 경쟁적인 세상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지. 선택받는 것에 관한 나의 모든 기억은, 다른 누군가는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네. 축구 팀에 뽑히지 못했을 때, 보이스카우트 순찰대의 리더로 뽑히지 못했을 때, 혹은 서품식에서 수석 사제로 뽑히지 못했거나 특별한 상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을 때, 항상 눈물과 함께하는 미소가, 미소와 함께하는 눈물이 있었네. 언제나 경쟁과 비교가 있었네. 얼마나 자주 이런 말이 필요했는지... “네가 뽑히지 못했다고 해서 훌륭하지 못한 것은 아냐. 단지 다른 누군가가 조금 더 낫다는 것이지.” 그러나 거절당했다는 느낌이 워낙 강해서 그런 말도 거의 위로가 되지 못했네(p46)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택함받았다는 것은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네. 다른 사람을 제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포함시키기 때문이지. 그들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겨 거부하는 대신, 그들만이 가진 독특함을 인하여 그들을 받아들인다네. 경쟁적인 선택이 아니라 긍휼로 인한 선택이지. 우리의 지성으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기가 아주 어렵네. 우리의 지성은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걸세. 아마도 우리의 마음만이 이해할 수 있을 걸세.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 ‘선택받은 재능혹은 선택받은 친구들에 대해 들을 때마다 거의 자동적으로 엘리트를 떠올리게 되고, 자신이 질투, , 분노에 가까운 느낌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네. 때론 다른 사람들이 선택받았다는 생각이 공격, 폭력,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네.(p47-48)

 

세상이 우리를 택하지 않을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진리를 과감하게 다시 알려야만 하네. 우리가 선택받느냐 마느냐가 부모님, 형제 자매, 선생님, 친구들에게 달려 있는 한, 우리는 효용성과 통제라는 기준에 따라 우리를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면서 우리 목을 조이는 세상의 노예가 되네. 이러한 인식을 개선하는 작업은 힘든 과정이며 일생이 걸리는 과업이라네. 세상은 끈질기게 우리를 자기 회의, 낮은 자존감, 자기 거부, 침체라는 암흑으로 잡아당기고 있기 때문이야.(p49)

 

거절과 거부로 둘러싸여 있을 때 우리가 선택받은 사실을 어떻게 놓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먼저, 상처받거나 감정이 상하거나 배척을 당할 때마다 자신에게 과감히 이렇게 말해야 하네. “이 느낌이 아무리 강하리라도 이건 나 자신에 대한 진리가 아냐. 지금은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나는 날 귀히 여기셔서 영원 전부터 사랑받는 자로 부르시고 그 영원한 품에 안전하게 품고 계신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야.”(p50-51)

 

두 번째로는, 자네에 대한 진리를 말해 주고, 선택받은 자라는 자네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을 상기시켜 주는 장소와 사람들을 계속해서 찾아야 하네.(p51)

-> 누가 있을까? 설교? 말씀?

 

세 번째로, 자네가 선택받은 사실을 계속해서 감사해야 하네. 무슨 말이냐 하면, 자네를 선택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자네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 주는 모든 사람에게 고맙습니다로 응답하라는 말일세(p51)

 

우리는 감사하기로 결단할 수도 있고 비통해하기로 결단할 수도 있어. 그 순간에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도 있고, 또 우리의 그늘진 면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지. 계속 그늘진 면만 보기로 고집한다면, 결국 암흑 속에서 머물고 말 걸세. 나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매일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네. 우리 공동체의 핵심 구성원들인 정신 지체 장애인들은 비통해할 이유가 아주 많다네. 그들 대부분은 깊은 외로움, 가족이나 친구들의 배척, 생애의 반려자를 만나고 싶다는 성취되지 않는 욕망, 항상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로 인한 끊임없는 좌절을 경험하네. 그러나 그들은 비통해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생활 속에서 받은 많은 작은 선물들 저녁 초대, 며칠 동안의 수련회, 생일 축하, 무엇보다도 우정과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공동체 생활-에 대해 감사하려고 하지. 그들은 비통함을 넘어서는 감사를 선택했고, 이는 정신 지체 장애인은 아니더라도 동일한 선택을 하고 살아야 하는 그들의 모든 조력자에게 큰 감동과 희망의 근원이 되지. 우리가 계속해서 빛을 구한다면, 점점 더 빛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네. 감사하기로 마음을 먹을 때마다 새로운 감사거리를 찾기가 더 쉽다는 사실에 나는 너무나 매료되고 있네. 사랑이 사랑을 낳듯이 감사는 감사를 낳지.(p52-53)

-> 우리의 결단에 따라 이렇게 되기도 하고 저렇게 되기도 하면 하나님의 복음은 무슨 의미가 있나? 하나님의 복음이 진짜 능력 있으면 우리가 나쁜쪽으로 생각하더라도 참 회복을 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우리가 선택받았다는 진리를 주장하고 계속 널리 알릴 때,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겨 주고 싶은 깊은 열망을 곧 발견하게 되네. 우리는 자신이 선택받은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낫고 귀하거나 가치 있다고 느끼는 대신, 그들 역시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지. 다른 사람들 역시 선택받았음을 발견하는 것, 그건 선택받은 사실이 주는 커다란 기쁨이네.(p54)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각각의 독특함 안에서 각각의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네. 우리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비교하지 않는 이 사랑을 경험하려면, 또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이 아니라 형제 자매들과 함께할 때에도 안전감을 느낄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 자리를 찾아야만 하네.(p55)

 

 

2. 축복받은 자

 

나는 나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네. 그리고 자네도 똑같은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네. 요즈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하지. “우리는 서로를 인정할 필요가 있네.” 인정받지 않고는 잘 살기가 어렵네. 누군가를 축복한다는 것은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정이지. 그것은 칭송이나 칭찬의 말 이상이고, 누군가의 재능이나 선행을 지적해 주는 것 이상이네. 또 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하는 것 이상이지. 축복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사랑받는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확정하는 것이네. 덧붙이자면, 축복은 그것에 담긴 실재의 모습을 창조해 내지. 이 세상에는 서로를 비난하는 일이 너무나 많은 것처럼, 서로를 칭찬해 주는 일도 많네. 축복이란 칭찬과 비난의 구분을, 미덕과 악덕의 구분을, 선행과 악행의 구분을 넘어서는 것이지. 그것은 다른 사람의 근본적인 선함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가 사랑받는 자 되었음을 일깨워 주는 것이네.(p58-59)

 

선택받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네. 우리는 또한 계속되는 축복을 필요로 하네. 그것은 우리는 사랑 많으신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분은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고 오히려 삶의 순간마다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신다는 말씀을 끊임없이 새로운 방식으로 듣게 해주는 축복일세.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와 라헬, 이들 모두가 축복을 받았고, 그래서 믿음의 아버지요 어머니가 되었네. 그들은 길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여정 가운데서도 축복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살았지. 예수님 역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고 나서 축복의 음성을 들으셨네.(p62)

 

우리 존재의 표면에서 찰랑거리는 작은 파도들 때문에 이리저리 휘청거린다면, 조작적인 세상의 희생자가 되어버리기 쉽지만, 우리를 축복하는 깊고 부드러운 음성을 계속해서 듣는다면, 진정한 소속감과 안정된 행복감을 가지고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네.(p63)

 

-> 축복하는 말. 축복의 말 말하는게 생활화 되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그렇게 바뀌면 주위 사람들이 좀 더 행복하지 않을까.

 

먼저, 기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지.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기도가 축복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점점 더 좋은 방법이 되고 있네. ... 내가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장소로 갔을 때, 진정한 기도의 노동이란 잠잠한 가운데 나에 대해 진실을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 기울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p65)

 

하루에 30분씩 사랑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지속해 나간다면, 서서히 자네가 의식하지도 못하는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할 걸세.(p66)

 

귀를 기울이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나 좋은 글들을, 예를 들어 시편이나 기도문 같은 것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네.(p67)

 

함께 거하는 삶을 계발하라는 것이네. 이는,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자네에게 다가오는 축복을 주의 깊게 의식하라는 말일세. 현대 생활의 문제는, 너무 바빠서(엉뚱한 장소에서 인정받고자) 우리가 축복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네. 가끔 사람들은 우리에게 칭찬을 하지. 그러나 우리는 , 별 말씀을, 그런 건 잊어버려요 아무것도 아닌 걸요...”와 같은 대답을 하면서 그 칭찬을 슬쩍 무시해 버리네. 겸손의 표현으로 보일지 모르는 대답이지만, 사실 그 대답은 진정 우리가 주어진 축복을 받아들일 만큼 준비된 상태가 아니라는 표시네. 우리와 같이 부산한 사람들이 진정으로 그런 축복을 받기란 쉽지 않지. 아마도 그런 축복을 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또한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없어져 버린 슬픈 결과가 생겼는지도 모르지.(p68-69)

 

축복받은 사람의 특징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 항상 축복의 말을 한다는 것이네. 자네가 축복받았다는 사실에 접하게 될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하거나, 그들의 장점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그들의 아름다움과 진실함을 이끌어내는 일이 얼마나 쉬워지는지 알면 놀랄 걸세. 축복받은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을 축복하네. 그리고 사람들은 축복받기를 원하네.(p71)

 

 

3. 상처받은 자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이네.(p73)

 

우리의 상처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무언가를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일 걸세. 고통과 아픔은 단순히 우리 삶의 성가신 방해거리가 아니라는 말일세.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의 독특성과 우리에게 익숙한 개성에 대해 알게 해주지. 내가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이야기하는 것은 나에게 있는 독특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네. 그래서 자네가 자유롭게 자네의 깊은 아픔에 대해 나눌 때, 나는 큰 특권을 누린다고 느끼지. 또 내가 자네에게 나의 연약한 부분을 열어 보일 때, 그것은 내가 자네를 신뢰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네.(p75)

 

이제는 상처의 경험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보겠네. 이미 말했듯이 이건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고 자네와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보통 내면의 상처, 다시 말해 마음의 상처로 경험 되는 것이네. 많은 사람들이 육체적정신적 장애로 고통을 겪고 있으며, 또 경제적 빈곤, 집 없는 사람들,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할지라도, 내가 매일 가장 크게 의식하는 고통은 상한 마음의 고통이라네. 나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연인들, 친구들, 동료들 사이의 깨어진 관계로 인한 커다란 아픔을 매일 보고 있네. 서구 사회에서 가장 괴로워 보이는 고통은 거절당하고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 홀로 남겨졌다는 느낌으로 인한 고통이네. 중증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우리 공동체에서 가장 큰 고통은 장애 자체가 아니라, 쓸모 없고 무가치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다는 느낌으로 말미암는 것이네. 다른 사람에게 특별히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말을 할 수 없거나 걷지 못하거나 혼자서 먹을 수 없다는 사실보다 인정하기가 훨씬 고통스럽다네. 우리들은 분명히 거대한 상실을 경험할 수 있네. 그러나 더 이상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곧 삶을 포기하게 되지. 본능적으로 우리는 함께 생활함으로써 삶의 기쁨을 누린다는 것을, 또 삶의 고통은 함께 사는 일을 잘 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네.(p76-77)

 

때로 확실히 성(sexuality)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를 경험하게 되는 것 같네. 나와 내 친구들의 분투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얼마나 우리의 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네. 우리의 성은 교제에 대한 깊은 갈망을 드러내 주지. 육체에 대한 욕망(접촉하고 싶고, 안기고 싶고, 안전하게 붙들려 있고 싶은)은 마음의 가장 깊은 갈망에 속하는 것이네. 인간이 하나됨을 추구한다는 아주 구체적인 증거이기도 하지. 우리가 그토록 심한 고뇌를 경험하는 지점은, 정확히 이 교제에 대한 갈망과 관련이 있네. 우리 사회는 너무나 단절되어 있고, 가정 생활은 육체적정서적 괴리감으로 인해 찢어지고, 우리의 우정은 어쩌다 한 번 만나는 정도요, 친밀하다는 관계들은 중간에 뭔가 가로막고 있는 것 같고 가끔은 너무나 실리주의적이어서, 우리가 진정으로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란 거의 없네. 나는 내 몸이 얼마나 자주 긴장 상태가 되는지, 얼마나 늘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사는지, 완전히 편안하다는 느낌을 갖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네. 내가 살고 있는 토론토 교외로 돌아와 뽐내듯 서 있는 거대한 저택들, 더 편리한 소비 생활을 위해 널려 있는 쇼핑센터들, 아주 매력적인 방식으로 편안함과 기분 전환을 약속하는 멋진 간판들(이 모든 것의 이면에서는 숲이 파괴되고, 시내가 말라 버리고, 내 주변에서 사슴과 토끼와 새들을 몰아내는 행위가 자행되고 있겠지)을 보면, 내 몸이 치유의 손길과 위안을 주는 포옹을 갈망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감각을 자극하고 확대시킬 때, 또 우리의 깊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이 대개 다소 유혹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가 무지막지한 환상과 무모한 꿈들과 혼란스러운 느낌과 생각들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듯하네. 우리가 가장 쉽게 상처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우리가 가장 갈급해하는 가장 연약한 부분이기 때문이네.(p77-78)

우리가 어떻게 이 상처에 반응할 수 있겠는가?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싶네. 첫째는 상처와 친해지는 것이고, 둘째는 그 상처를 축복 아래로 가져다 놓는 것이네.(p79)

 

상처에 대한 첫 번째 반응은 그것에 정면으로 부딪혀서 그것과 친숙해 지는 것이네(p79-80)

 

상처가 우리의 선택받음과 축복받음만큼이나 우리 존재와 밀접한 것이라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 상처와 친해져야 하네(p80)

 

인간의 고통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기쁨과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곳으로 이르는 수단이 될 수 있다네. 나는 그것이 분명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네. 영적인 삶, 즉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삶이 지닌 위대한 비밀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이(즐거움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아픔이든, 건강이든 질병이든) 우리의 인간성에 대한 완전한 인식으로 향하는 여정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네. “좋고 아름다운 모든 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으로 인도한다고 서로에게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네 그러나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럼으로써 영광을 얻는다는 사실을 알지 않는가?”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보살핌은, 우리의 상처를 기쁨으로 이끄는 문으로 만들도록 기꺼이 서로를 도와주는 것이네.(p82-83)

 

상처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은 그것을 축복 아래로 갖다 놓는 것이네(p83)

 

상처를 저주 아래 놓고 산다는 것은, 우리의 아픔을 통해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확인한다는 말일세. 나는 항상 내가 쓸모 없고 가치 없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지금 내게 일어난 일로 보아 그것을 확신하게 되었어라고 말하는 것이라네.(p83)

 

알코올 중독자나 폭식증 환자 치료 프로그램 같은 것은 상처를 축복 아래에 둠으로써 그것을 새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되게 하는 방법들이네. 모든 중독 증세가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만, 우리의 의존성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는 신뢰를 표현하는 순간마다, 고통의 근원이 희망의 근원으로 바뀌게 된다네.(p85)

 

4. 나누어 주는 자

 

우리는 나누어 주는 삶을 살기 위해, 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도 받았네(p89)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될 때에야 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받은 사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로 들리네. 주는 행위가 있어야, 우리가 단순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다른 사람을 위한 삶 안에서 궁극적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서 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받는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네.(p89)

 

진정한 기쁨, 행복, 내적 평화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생긴다네. 행복한 삶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지. 그러나 그 진리는 대개 우리가 상처에 직면할 때 발견하게 되네.(p93)

 

우리의 재능에 초점을 맞출 때면, 우리의 진정한 은사는 우리의 행위보다 우리 존재 자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네. 진정한 질문은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 줄 수 있는가?”라네. 이웃을 위해 무언가 고칠 수 있다는 것, 친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충고를 할 수 있다는 것, 동료에게 지혜로운 상담을 해 줄 수 있다는 것, 환자를 치료하거나 교구민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선물이 있지. 그것은 우리의 모든 행동을 통하여 빛나는 우리의 삶이라는 선물이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주어야 하는 가장 큰 선물은 내 삶의 기쁨, 나의 내적인 평안, 나의 침묵과 고독, 나의 행복감이라는 사실을 점점 깨닫고 있네. 나 자신에게 누가 나를 가장 잘 도와주지?”라고 물을 때, “나와 함께 자신의 삶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네.(p96)

 

로빈에 대한 자네의 사랑, 친구들에 대한 친절,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대함이 작은 겨자씨와 같다고 확신하는 자신을 상상해 보게. 후에 많은 새들이 둥지를 틀 강한 나무가 될 겨자씨 말일세. 또 상상해 보게. 자네의 미소, 악수, 포옹, 키스가 전 세계에 걸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작은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마음 깊이 확신한다고 말일세. 모든 작은 사랑의 움직임이 새롭고 더 큰 원을 이루는 파문(잔잔한 연못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처럼)을 일으킬 것이라 상상해 보게. 상상, 또 상상해 보게. 낙담하거나 화를 내고 분노를 일으키거나 복수심에 불탈 수 있겠는가? 미워하거나 파괴하고 죽일 수 있겠는가? 찰나와 같은 현세적 실존의 의미 문제로 절망할 수 있겠는가?

보잘것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나누어 주는 행동 가운데서 풍성해질 양식이 되기 위해 선택받고 축복받고 상처받은 존재가 되었음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면, 자네와 나는 기쁨에 넘쳐 춤을 출 걸세.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걸세. 오히려 우리의 전 존재를 다른 사람을 위한 선물로 만들고 싶은 소망의 절정이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향한 삶을 살게 될 걸세(p106-107)

 

 

2013.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