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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관리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2013.6.24.-25)


이 책은 11년 겨울에 한창 화제가 되길래 그냥 사봤다.

 

그 때 사둔 책을 이제 읽는다.

 

초록색 색연필 들고 그냥 쓱쓱 읽었다. 꼼꼼히 읽진 않았고.

 

책은 1110월에 나왔다.

 

 

우리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새로운 환경, 낯선 것들과 만났을 때 비로소 우리 머릿속에서 새로운 생각들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나의 발전을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 새로운 생각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p21)

 

나의 발전을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서 새로운 생각을 많이 이끌어내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습관을 만드는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 나는 새로운 곳에 오긴 했는데, 어떤 새로운 것에 도전을 하고 있나? 하긴 지금이야 익숙해져서 그렇지 처음에는 모든게 새로운 도전이었으니. 밥 먹는 것, 옷 입는 것 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새로운 곳. 잘 온 것 같다. 고생을 해봐야. 새로운 것을 접해봐야 발전이 있는 것 같다.

 

침묵은 응시를 낳는데, 응시는 사물을 스쳐 지나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이다.(p35)

 

주어진 운명을 다르기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 이전에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다스리는 데 주력하라.”(p47)

 

우리의 삶에서 20대는 준비, 30대는 질주, 40대는 수확의 시기다. 20대에 준비하지 않으면 30대에 질주할 힘이 없다. 사회에 나가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들을 쏟아내기 위해서는 20대에 지구력과 근력을 키워야 한다. 많은 지식을 쌓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깊이있는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질주할 수 있는 몸을 만들어나가는 시기가 바로 20대인 것이다. 20대에 힘을 비축해두지 않으면 30대에는 질주는 커녕 출발선에 주저앉기 십상이다.(p91)

 

말의 신중함은 사실 후천적으로 기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바로 말을 시작하는 타이밍을 늦추는 것이다. 한 번 늦춤으로써 정제되고, 한 번 늦춤으로써 신중함을 인식시키고, 한 번 신중함으로써 한 번의 실수를 피할 수 있다.(p98)

-> 말조심, 입조심. 나이가 들수록 절실히 느낀다.

 

나를 분노하게 하는 일에 대해 즉각적으로 화를 내는 것은 분노의 상대를 확실하게 적으로 돌리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누군가 나를 화나게 했을 때 한번 숨을 고르고 상황을 돌아본 후, 다음 국면에서 문제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용기다.(p99)

-> 이제 전화받을 때는 이게 쫌 가능해진 거 같다. 얼굴보고 있을 땐 그게 될지 잘 모르겠지만; 한번 숨고르기. 좋은 습관인 것 같다.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말만 하고, 잘 아는 것만 말하는 것이 좋다. 타인의 기억에는 내 말이 모두 녹음되는 것이 아니라 인상적인 부분만 편집되어 남는다. 그의 기억에 나를 각인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있는 말을 가려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기가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충분히 바뀔 수 있다.(p102)

 

더 많은 생산이 자신의 것이 될 가능성이 없을 때 인간은 혁신을 추구하지 않았고, 생산성 증가는 더딜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인간은 가진 것을 늘리고 싶어도 수단이 없었다. 기술의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고, 자연이 생산성의 절대적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가진 것을 늘림으로써 행복해지려는 시도는 애당초 불가능했던 셈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상과 철학은 욕망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가진 것을 느릴 수 없다면 차라리 분모인 욕망을 줄임으로써 행복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축의 시대를 관통했던 인의, 무위자연, 무소유 등이 그런 사상이었고, 금욕적인 세속종교의 발달도 일정 부분 그런 한계에 기반했을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전후 상황이 역전되었다 부르주아혁명과 자본주의의 성립은 이윤 획득의 동기를 제공했고, 그 결과 폭발적인 생산성 혁신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부터 행복의 추구는 욕망 통제에서 가진 것을 늘리는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진 것을 늘리면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굳어지기 시작한 것이다.(p143-144)

-> .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긍정적 애티튜드를 만드는 출발은 내일부터 무엇인가를 하겠다가 아니라 내일부터 무엇인가를 하지 않겠다가 먼저인 셈이다. 즉 나의 목표를 이루는데 필요한 애티튜드는 버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p157)

-> 이곳 뿐 아니라 책의 다른 곳에서도 버려야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나는 새로운 문화, 대안되는 문화가 있으면 그걸 하느라 나쁜 습관은 자연스레 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뭐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니..

 

우리는 막연히 자신의 한계가 콘크리트와 같이 단단한 성벽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누구에게든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걸어가다가 주저앉는 자리가 바로 한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한계는 내가 걸어가다가 쓰러지는 바로 그 자리인 셈이다. 현재 우리는 그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섣불리 갈 수 있는 거리를 가늠해버린다.(p160)

 

삶의 본질이 바로 그와 같다. 혁명가의 삶은 늘 진취적이고 의욕이 넘치지만 안주하는 사람의 삶은 늘 회의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혁명가로 살아야 하고 이런 혁명가의 삶만이 자기가 주인인 삶인 것이다.(p160)

 

개인이 사회의 평범한 일원으로 살아가려면 사회시스템이 부여한 보편적 규범을 따르면 되지만, 사회의 문제를 포착하고 그것을 개선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보편성이 아닌 특수성을 가져야만 한다. 여기서 특수성이란 보편성을 넘어서는 초월성을 의미한다.(p161)

 

 

중요한 것은 이런 초월적 갈망들을 우회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갈망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변화를 열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걸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이다. , 초월에 대한 갈망이 생긴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중요한 단계에 돌입했다는 의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사회구조다. 청년들의 창조적 도전은 그들이 도전에 나섰다가 실패하더라도 사회가 그 의미를 평가하고 재도전의 기회를 주는 패자부활 시스템을 제공함으로써 활발해진다. 그리고 청년의 도전은 자신의 재능을 찾으려는 힘찬 여정을 축복하는 사회의 격려와 성원 아래 피어난다.(p165)

-> 패자부활전 주면 좋겠다.

 

초월의 일차적인 대상은 자기 자신이지 사회가 아니다. 사회(타인)에 대한 나의 의존을 극복하고 홀로 서려는 자아는 초월이지만, 무조건적으로 사회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은 독선이다.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사회를 초월하는 것은 사회에 대한 나의 의존성을 버리는 것이지 사회에 참여하는 나를 초월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p166)

 

열정이 끓어오르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고, 표현하려고 더듬거리지 않으면 말을 거들어주지 않는다. 하나를 가르치는데 세 개를 깨우치려 하지 않으면 더는 가르치지 않는다_ 논어 술이편(p167)

-> 나는 배울 때 어떤 자세인가? 열정이 끓어오르는가? 말을 하려고 더듬기라도 하는가? 더 알려는 욕심이 있는가.. 열정, 도전, 모험, 독함.

 

사람은 설령 그것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누구나 특정 분야에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효율성과 행복의 측면에서 우리는 당연히 잠재력이 가장 뛰어난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와 교육은 공부에 재능이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p195)

 

현실이 이렇다 해도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길은 다양한 체험 뿐이다. 체험을 통해 성과를 가늠해봄으로써만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p197-198)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다양한 분야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고, 문화예술을 접함으로써 자신의 영감을 테스트해볼 수도 있으며, 새로운 곳에 여행을 다니고 봉사활동에 참여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고 어울리는 재능이 있는지 가늠해 볼 수도 있다.(p198)

 

처음 가본 곳에서 만나는 낯선 환경,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는 당황스러운 상황, 다른 문화와 충돌하고 극복해나가는 경험만이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선물한다.(p198)

 

하늘이 어떤 이에게 장차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그 근육과 뼈를 지치게 하며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도록 가로막는데, 이것은 그의 마음을 움직여 그 성질을 단련시키며 예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을 더 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른 뒤에야 바로잡을 수 있고, 곤란을 당하고 뜻대로 잘 되지 않은 다음에야 분발하고 상황을 알게 되며, 잘못된 신호가 나타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내부적으로 법도 있는 집안은 제대로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외부적으로 적이나 외환이 없는 나라는 언제나 망하게 된다. 우리는 그 다음에야 우환이 사는 길이고, 안락이 죽는 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맹자>(p204)

 

우리가 자기완성을 위한 도전에 직면한다는 것은 내가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것은 나 스스로 장애물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도전과 응전의 과정에서 비로소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p205)

 

우리가 잘못된 선택이 아닌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늘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 즉 상황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independence on situation)이다.

....

선택의 딜레마를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택을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에게 선택을 강요하도록 놔두지 말고, 스스로 상황을 만들어가면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다양하게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p210)

 

상대를 경외하고 선망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이며, 이로써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p238)

 

예의란 아랫사람이 자발적으로 지키는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규격화하고 강요하는 것이 의전이다.(p239)

 

예의 메뉴얼을 어릴 때부터 몸에 익히는 것은 삶에서 중요한 태도를 형성한다. 이는 어릴 때부터 참고 통제하는 습관을 익히는 것이고, 그렇게 예가 갖추어져야 비로소 공부가 가능하다고 공자는 생각했다. 즉 예는 좋든 싫든 해야만 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내키지 않지만 할 일은 하는 태도와 인내심이 길러지며, 이런 인내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자신을 견제하고 다스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를 배우지 못하면 자제력과 인내심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p241)

-> 예의 중요성...

 

예는 타인에게 나를 대하는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나의 습관화된 태도의 일종이다.(p241)

 

고민을 하지 않는다거나 고민이 없다는 것은 안주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더 이상 달라질 것도 없고 나아질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고민은 나은 선택을 위한 의례다. 자발적인 것이건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닥친 것이건 고민은 더 나은 결과를 낳기 위한 진통이다. 어떻게든 더 나은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p266)

 

공자는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고 했다. 이는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구절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지나는 뜻이다. 인류가 세상에 글을 남긴 이래 공부에 대한 말 중에서 이보다 압축적이고 탁월한 것이 또 있을까. 공부를 생각할 때 뼈에 새겨두어야 할 구절이다.(p276)

 

글을 쓰는 연습으로 가장 먼저 할 일은 좋은 글이 아닌 잘 쓰인 글을 필사하는 것이다. 글이 내공을 담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글쓰기 연습에서 중요한 것은 문장을 다루는 능력이지 작가의 영감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305)

 

시민의 본래적 의미는 물려받은 재산이나 권력이 아닌 스스로의 능력으로 축적한 것들에 대한 권리의식으로 무장한 집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p330)

 

체제는 세습적인 권력 혹은 자본이 수호하는 기득권 계층과 이것에 저항하지 않으면 새로운 성장이 불가능한 자수성가형 계층의 대립구도라고 볼 수 있다.(p330)

 

문제는 이 시스템에서 수혜를 받고 있는 주류들이 스스로 문제를 고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시스템을 고칠 수 있는 힘은 주류에게 있지만, 주류가 스스로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시스템을 포기할 리 없다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딜레마다. 이때 시민의 자각과 힘이 중요하다. 지금은 낫과 창의 시대도 혁명의 시대도 아니다. 그리고 인류가 만들어온 사회시스템 중에서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체제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는 시스템을 고쳐서 영속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시민의 임무가 될 것이다.(p331)

 

소셜네트워크에서 주고받는 관계는 우리의 욕망, 의지, 불안, 무의식, 위선의 총합이다. 없는 생각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었지만 애써 눌러왔던 생각과 말들이 터져나온 것이라는 뜻이다.(p341)

 

지금 청년들에게는, 지금까지 없던 것을 새로 창조하는 천재성이 아닌 기존의 것들을 통합해서 재조합하는 통섭의 능력과 안목을 키우고, 인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p360)

 

변화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스스로 변화하는 것이다. 가만히 서서 지나가는 KTX를 보면, 마치 야구공이 지나간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신발을 벗어들고 같은 방향으로 달리면 객차가 보이고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면 사람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를 알려면 KTX에 직접 올라타야 한다.

변화는 스스로 변화하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무지개와 같다. 매일 스스로 변화해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 아침과 다른 저녁을 맞는 사람에게 변화하는 패러다임 혹은 세상은,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느린 장면이 된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 앉아 습관처럼 연예기사나 살피면서 무의미한 논쟁을 벌이고, 매일 갖는 술자리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탄만 늘어놓는 사람에게는 번쩍!’ 하고 지나가버리는 번갯불처럼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p363)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좌절과 체념에 빠져 있다. 청년이 희망이라는 말을 포기한 지 오래고, 사회 전반적으로 우울과 체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다. 결국 볕이 든다는 역사성을 믿으며 변화의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기다림을 넘어 변화를 부르는 역할을 자임해야 한다. 체념 대신 희망을, 기다림 대신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간절한 시대다.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취해야 할 <주역>의 기본원리는 계사전의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구절에 모두 녹아 있다. 이 아홉 글자의 뜻을 우리말로 풀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영원하다는 뜻으로, 이 말은 사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선언이기도 하다. 여기서 궁하다는 것은 난관에 부딪혔다는 뜻이다. 우리는 커다란 난관에 부딪히면 대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좌충우돌하거나 상황을 원망하며 자포자기한다. 아마 지금 청년들의 처지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주역>막히면 변하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 스스로 변하는 것이 해법이라는 뜻이다. 바위가 길을 막고 있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굶어죽기를 기다리지 말고 두더지가 되어 굴을 파든지 나비가 되어 날아갈 궁리를 하라는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뚜벅뚜벅 걸어가 꽝 하고 부닥쳐야 한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겨지더라도 그냥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는 말라는 정언명령이다.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렇게 변하면 결국 통하게 될 것이니, 늘 그렇게 통함으로써 영원하라는 말은 실로 감격적이기까지 하다.(p367)

-> 궁지에 몰리면 변하라. 멋진 말이다. ...

 

과거 인류가 조개무지를 만들던 시절에, 사람들은 강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맨손으로 잡으려 했다. 그러나 매끄러운 비늘 때문에 물고기를 자꾸 놓치게 되자, 나뭇가지에 뾰족한 돌을 매달아 창을 만들었고 사람이 더 들어갈 수 없는 깊은 곳에 사는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해 생선가시로 낚시를 만들었다. 변화한 것이다. 만약 이들이 비늘 때문에 물고기를 잡을 수 없다고 상황을 탓하며 그냥 주저 않아버렸다면 인류의 오늘도 없는 셈이다. 그렇게 인류는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늘 변하고 변해왔으며, 그렇게 변함으로써 지금까지 통하여 번성하고 있다.(p368)

 

추격을 끝내자 목표가 사라진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선두, 일등, 일류를 외치며 달려왔지만 막상 선두가 되자 국가적사회적 가치관의 부재와 혼재의 시대를 만나게 되었다. 남의 것을 모방하고 추격하는 데에만 길들여져 온 우리의 문화가 제일 앞줄에 서면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p371-372)

 

문제는, 앞서 달리는 깃발이 있을 때는 그것을 보고 달리는 데 익숙하지만, 앞에 깃발이 없을 때 자신이 깃발을 들고 나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길을 찾는 방법을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것이다.(p373)

 

우리는 길을 찾아본 경험이 없다. 길이 없는 곳에서 질주하면 절벽에 떨어지거나 늪에 빠질 수밖에 없다. 선두의 역할은 추격이 아니라 길을 찾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시대성의 결여다. 그리고 이 고민이 바로 갈등의 핵심이다.(p373)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스펙경쟁에 목매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과거 산업사회로의 전환기에 논 한 마지기를 더 확보히기 위해 기를 쓰던 농경시대 자본가의 시대착오적인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때다.(p378)

 

시대의 요구는 시대의 과잉이 아닌 결핍과 일치하며, 그 결핍은 다음 세대의 필수 덕목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청년들은 현재 대표적 과잉 중 하나인 무모한 스펙전쟁이 아니라 대표적 결핍인 공공성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사회적 건강성에 헌신함으로써 차세대 리더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을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과거에는 잘난 사람의 리더십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대중의 팔로우십이 중요한 시대다. 예전에는 유아독존이더라도 만 명을 먹여살리는 한 명의 인재가 팔로 미(follow me)’를 외치면 9,999명이 뒤를 따라 뛰었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 공공의식이 없는 리더십에는 대중이 곧 염증을 느낀다. 어떻게든 성공만 하면 되고,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고, 잘나고 똑똑하면 모두가 따르던 리더십에 염증을 느낀 대중들이 간절하게 공공의식을 가진 공감형 리더십을 요구한다. 때문에 공공의식을 교육받지 않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성공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국가지도자건 사회지도자건 팔로 미가 아닌 위드 미’(with me)‘를 말하는 사람, 함께 가고 헌신하며 먼저 실천하는 사람이 리더로서 인정을 받는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모두가 개인의 성공을 위해 질주하는 스펙경쟁의 시대에 오히려 공공의식을 몸에 익힌 사람이 승자가 되는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지금 청년세대가 미래의 리더가 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기성세대와 같은 탁월성이 아닌 공공의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p384-385)

-> 탁월하기도하고 공공의식도 있으면 더 좋다고 생각하겠지..? 겸사겸사.,

 

이것은 조류인 제비, 즉 미물인 짐승도 거주와 생계와 교육의 삼박자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중요한 원리를 보여주는 예다. 제비도 이런데, 하물며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평생을 일해도 좋은 집은 고사하고 내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 작은 집 한 칸 장만할 수 없다면,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고 가르칠 수 없다면,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인간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p390)

 

가난을 대물림하기 싫어 대를 끊겠다는 비탄보다는, 문제를 알았으니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결의와 공분이 필요하다.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대열의 전면에 서는 청년이 바로 새로운 시대의 리더가 될 수 있다. 혹시라도 자신이 여건상 유리한 고지에 있다면, 그럴수록 더 사회의 이면을 바라봐야 하고, 소외되고 약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공감력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청년들이 미래의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길이다.(p390-391)

-> 결의와 공분. => 결심과 분노. => 독함?^^,

 

전제에 충실한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유형이건 무형이건 모든 존재에는 존재이유가 있고, 그것이 바로 전제이며, 전제에 충실하면 그 자체로 균형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국가는 국가의 원리인 헌법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 즉 존립의 대전제다. 그런데 만약 국가가 헌법어신을 충실히 구현하지 않거나 의미를 왜곡한다면 그 국가는 존립의 근거가 사라진다. 그런 국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닐 것이다.

군대는 국토를 방어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 대전제인데, 만약 군대가 지켜야할 대상인 자국 국민에게 총을 겨눈다면 전제를 부인한 셈이고, 그런 군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역시 정의가 아닐 것이다.

의학은 생명은 존엄하다는 명제를 지켜야 하고, 만약 존엄한 생명의 가치를 저버리면 의학은 정의롭지 못하게 된다. 또 정의로워야 한다는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사법부는 존재이유를 상실하게 된다.(p391-392)

 

열심히 살자.

 

2013.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