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리를 따르는 삶이 존재하는가 - 리처드 존 노이하우스
진리에 대한 질문을 덮어 둔 채 사회를 운영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진리라는 질문에 파고들기 시작하면 갈등과 대립에 봉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대화를 종결시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들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과 함께 정확히 그 반대가 사실이라는 점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이자 대화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동력은 진리에 대한 질문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간다운 것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p24-25)
진리를 소유하는 것보다는 진리에 사로잡히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길을 걷는 문제입니다. (p25)
→ 저자의 말처럼 진리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자기가 붙잡고 있는 가치관이 없다면, 질서가 없다면, 그게 더 혼란스럽고 그게 더 대립과 갈등을 유발하는게 아닐까 싶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담론 속에서, 특히 학문적인 배경 속에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을 참 불편하게 만듭니다. 특별히 진리에 대한 물음이 종교와 도덕적 진리에 대한 질문으로 접어들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도덕적 진리라고? 그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개념들이야”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도덕이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이들은 극도로 엄격한 마음의 동기를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덕의 문제는 직감의 문제입니다. 도덕의 문제는 우리가 강하게 느끼는 것이 무엇이지에 관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의 도덕적 진리가 있고, 제게는 저의 도덕적 진리가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로 취하면 되는 것입니다. (p27)
→ ‘도덕’이라는 단어에 옳은 것, 바른 것이라는 이미지가 큰 것 같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도덕, 윤리 같은 단어가 ‘삶의 방식’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심에 거리껴지는가 또는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도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화가 상대적이듯이 도덕도 상대적이지 않은가? 어떤 나라에서는 도덕적인 행동이 다른 나라에서는 비도덕적인 것 아닌가? 결국 가치관의 문제이고, 선택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가치관을 선택하는가,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가. 여기서 저자도 그런 의미로 말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일종의 믿음 체계를 필요로 합니다. 이를 세계관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인간사와 행동양식들을 하나의 맥락에서 바라보게 하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무엇을 찾아 헤매는지, 어떤 곤경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믿음 체계를 가져야 하며, 사물과 현상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600년도 더 이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주여,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우리의 영혼은 쉼을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믿음 체계를 골라 잡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아무거나 믿게 된다는 것이다.”
체스터턴의 말이 맞았습니다. 우리 시대가 바로 이 말의 산 증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으로 인해 20세기 초 인류가 어떤 위대한 믿음 체계를 수립해 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위대한 기능적 종교가 탄생하였고,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어떤 놀라운 이론들이 쏟아져 나왔는지. 마르크스, 프로이트, 다윈을 생각해 보십시오. (p35-36)
→ 하나님의 진리를 선택하지 않는 것은, 다른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사회적 삶 속에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만연한 그 많은 종교적 광신을 한 번 보십시오. 하나둘씩 서로 반목하게 될 것이고 결국 세상은 피 흘리는 전장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우려를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역사가 이를 증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 불일치를 두고 서로를 죽이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합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뜻을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정도는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내와 관용을 베풀어야 하고, 서로에게 정중해야 하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했던 의문을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질서를 어떻게 잡아가야 하는가’라는 명제는 반쯤 쥐었다가 때론 놓아 버릴 수도 있는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적으로 답하고 실천해야 하는 위엄 있는 명령이 되어야 합니다. (p41)
→ 다른 의견,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하는가는 늘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내 생각은 이렇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 생각을 듣고 그러고 난 뒤에 끝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근데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내 의견을 고집하거나 다른 사람 의견을 수용하면 그건 내가 가진 진리를 포기하는 것 아닌가. 어려운 것 같다. 또 애매한 부분이 있다. 모든 것이 성경적 진리로 똑 부러지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니. 이렇게 해도 될 것 같고, 저렇게 해도 될 것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2. 진리의 시간 - 오스 기니스
진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그것 없이는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삶을 끌어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삶을 선하게 만들기 위해 진리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도 진리는 절대적으로 핵심입니다. 자유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쟁취한 자유를 지속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인 미국과 같은 사회에서, 자유롭게 살고 그 자유를 유지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진리에 대한 이 현실적인 도전에 진지하게 맞서야 합니다. (p47)
진리를 믿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것이 그럴듯한 철학이어서가 아니라 확고한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세속적 믿음이나 동양적 믿음과는 달리 진리가 바로 믿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집니다. 인격적이며 무한한 능력의 하나님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분은 진리를 말씀하시고 진리에 따라 일하십니다. 그의 말씀하심과 행하심은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과 진실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궁극적으로 진리란 유대인에게나 그리스도인에게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p55)
→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가 뭘까. 확실한 진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는 죄인이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 말고 일상 가운데 소소한 이야기 중에 진리가 따로 있을까. 자유케 할 진리란 뭘까. 생활 습관, 예를 들면 어떤 음식을 먹는가, 어떤 곳에서 사는가, 관계할 때 생기는 차이는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 과정에서 진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은 상대주의를 떠받듭니다. 하지만 그들의 상대주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대개 이중 잣대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면서 현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들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는 상대주의를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에는 명백한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상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진리라고 말하고 싶어도 그러한 일관성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p59)
그들의 경험 속에 그들의 경험과 모순되는 것들이 있고, 그들의 갈망 속에는 경험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월성의 신호입니다. (p61)
3. 살아 있는 신 : 진리의 배타성 - 티머시 켈러
만일 누군가가, “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압니다”라고 말했다면, 그 말은 곧 “저는 진리를 알고, 영적 실재가 누구인지를 아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만일 제가 믿는 이 진리를 당신이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그것은 분열을 조장하고 편협하며 다원적인 사회를 파괴하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현대 사회의 사람들이 정통 신앙, 특히 기독교 신앙을 꺼리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진리의 배타성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p69)
진화 과학자들은 당연하게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아, 바로 자연 선택 과정에서 인간에게 굳어져 버린 행동 양식이야.”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조상들이 살아남는 데 어떤 식으로든 기여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성향을 지속적으로 선택했고, 그래서 그런 믿음 체계를 가지게 된 것이라는 논리입니다.(p74)
즉, 우리의 믿음 형성 기능이나 도덕 충동이 진화의 산물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 주지는 못하고 다만 생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논리는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우리 내면에 있는 믿음 형성 기제가 하나님과 도덕에 대해서 말해 주는 바를 신뢰할 수 없다면 왜 같은 기제를 가지고 진화가 진실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왜 다른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이들의 믿음에는 수술용 메스를 들이대면서, 스스로의 것에는 그렇게 하지 않을까요?
...
“만일 우리 내면의 모든 것에 진화의 산물일 뿐이라고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 형성 기제가 진실을 말해 주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생존을 돕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인지 능력이 진리가 무엇이라고 말해 줄 거라 기대할 수 없다. (p75-76)
결국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진화론에 호소해 폐지시키려 하면, 결국 모든 것을 설명으로 폐지시키고 맙니다. 따라서 설명으로는 종교를 악화시키지도 폐지시키지도 못합니다. (p77)
장님과 코끼리 이야기는 장님이 아닌 누군가의 관점에서 쓰여졌습니다. 코끼리의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모든 장님이 코끼리의 한 부분만을 만져보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장님들과 같이 당신도 장님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아무도 진리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다른 이들보다는 더 많은 지식을 가졌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종교도 진리 자체를 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당신이 다른 그 어떤 종교도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그 영적 실재에 대해 우월하고도 포괄적인 지식을 갖는 것입니다. (p80)
→ 모든 종교가 틀렸다고 이야기하려면 자신은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 또는 조건을 알고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만일 “나는 어떤 종교가 진리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겸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아무도 진리를 알 수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현실주의가 그 어떤 종교보다도 우월하다는 점을 교조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주장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이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주장을 동일하게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p81)
당신이 제게 ‘아무에게도 전도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곧 저를 전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가진 서구 백인식의, 계몽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사유화된 종교 이해로 말입니다. (p82)
그렇다면, 편협성이란 무엇입니까? 편협성이란 진리를 주장하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편협성이란 같은 관점을 갖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이 사람들은 원시적이야. 계몽이 덜 됐어’라고 생각한다면, 또 그들에 대해 농담이나 일삼는다면 그것이 편협한 것입니다. 현실과 종교에 대한 여러분의 관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스스로 얼마나 회의적인지도 관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은 근본주의자입니다. 간단히 말해, 배타적인 진리 주장은 편협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말하거나, 아무도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혹은 모든 종교가 동일하기 때문에 진리 주장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무도 배타적인 진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은 일관성이 없는 주장이며, 많은 경우 위선적인 주장입니다. (p82-83)
이 서사가 주는 의미는, 우리는 아무도 경멸하거나 무시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은혜의 서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누구에 대해서라도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다시금 도덕과 성과주의 서사로 돌아갔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p88)
여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수께끼 같은 일이 있습니다. 왜 기독교가 결국 로마 제국을 지배하게 되었을까요?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저마다 신을 가졌습니다. 상당히 개방적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도 진리를 소유하지 않았고 모두가 저마다의 신을 가졌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났고, “우리는 참 하나님을 안다”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그리스-로마 세계가 좀더 관용적인 세계관을 가졌고, 그리스도인들은 좀더 편협한 세계관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살았던 방식과 그리스-로마 사람들이 살았던 방식을 보면 정확히 반대입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가난한 사람은 경멸당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계에서 가난한 이들은 사랑받았습니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여성은 무시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세계에서 여성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로마 세계는 인종과 계급을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세계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함께했고 이것이 그리스-로마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2세기 전염병이 돌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 안에서 죽어 갔고 거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버림받은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도시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이방인 이웃들을 돌보느라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절대적으로 가장 좁은 세계관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진리를 소유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p89-90)
→ 그리스도의 방식이 언제나 옳다. 선하다.
만일 여러분의 근본이, 자신의 적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분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이 가진 자기 이미지의 핵심과 종교가, 자기를 죽이려 한 적들을 위해 기도하고 희생하고 그들을 사랑한 그분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배타적인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포용적인 삶의 방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진리는, 낮은 자리로 임하시어 자기를 반대한 사람들을 위해 그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죽으신 하나님입니다. (p91)
→ 다른 의견, 기독교의 진리에 반대되는 주장에는 어떻게 대처해야하나? 그 주장은 주장대로 반박하고 사람은 사랑하는 것? 그러면, 죄의 문제, 악의 문제, 예를 들면 살인이나 도둑질 하는 등의 사회에서 말하는 범죄 행위는 어떻게 대해야하나?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상처를 주는 건 어떻게 대해야하나?
4. 신의 언어 : 과학자가 믿음의 증거를 제시하다 - 프랜시스 콜린스
동물의 왕국에서 인간은,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을 가진 유일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원칙을 깨뜨릴 자유가 있는 듯 하지만 그 원칙 아래 살아갑니다. 옳은 행동이 있고 그른 행동이 잇습니다. 인간은 옳은 행동을 해야 하고 그른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 원칙을 깨뜨릴 수도 있습니다.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면 변명을 합니다. 이것이 곧 우리가 원칙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옳은 것을 어겼을 때에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p106)
5. 신무신론자와 생명의 의미 - 알리스터 맥글래스, 데이비드 헬팬드
6. 진리의 증거에 사로잡힌 과학자
7. 무신론의 심리학 - 폴 비츠
새로운 환경에 동화되고자 하는 사회적 욕구 때문에, 심리학계의 일원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직업적 욕구 때문에 그리고 편안한 생활 방식을 원하는 개인적 욕구 때문에 무신론은 명백히 최상의 선택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들을 돌이켜보면 저는 솔직하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다시 무신론자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마치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 것과 같이 들립니다. (p184)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유행과도 같은 피상적인 동기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매우 근본적이고 불편한 심리적 원천이 자리잡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결함이 있는 아버지라는 가설을 세워 말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 개별 사례 이면에 놓인 그들의 깊은 상처와 어려움, 그 복잡성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가 그들을 버리고, 거부하고, 미워하고, 기만하고 혹은 신체적으로나 성적으로 학대하였기 때문에 무신론자가 된 사람들의 경우, 거기에는 뭔가 이해할 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아이가 그 아버지의 연약함 때문에 그를 미워하게 되었거나 혹은 절망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결국 아이는 그저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 아버지에게 사랑받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p198-199)
8. 니체 vs. 예수 그리스도 - 달라스 윌라드
9. 살아 있는 기계 : 로봇은 인간이 될 수 있는가 - 로드니 브룩스, 로잘린 피카드
10. 종말의 의미 - 제레미 백비
11. 순전한 그리스도인 - 톰 라이트
12. 왜 인권은 종교 없이 불가능한가 - 존 워윅 몽고메리
13. 테레사 수녀가 내게 가르쳐 준 것
14. 전인적 인간을 위한 총체적 복음 - 로날드 사이더
앞쪽에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생각을 많이했다. 변증이 필요한 때였나보다. 신이 없다고, 생각이나 가치관이 다를 수 있다고 하는 세상에서 품고 살아야할 많은 이야기가 담긴 책.
20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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