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에 미국에서 쓰여진 책.
우리나라엔 2000년에 번역되었다.
부제는 Learning to Live in God's Creation
저자 폴 마샬은 종교 박해 연구 학자이다.
세계관 책을 읽고 싶어 이 책을 읽었다.
어렵지 않고 이것저것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 책.
제1부 세상에 대한 두려움
1. 교회:따분한 복음?
처음에 나는 좀더 확실하고 경건하고 영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의무에만 집중함으로써 안전하게 행동하였다. 그렇게 하는 한, 양심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벽으로 둘러싸여 내가 살고 있는 세계의 대부분과는 고립되어 있는 듯한 답답함과 편협함과 좌절을 느꼈다. 다른 한편, 공부와 음악과 스포츠와 인간 생활의 다른 국면에 좀더 깊이 파고들면, 마음이 훨씬 편해지고 더 많은 행복감을 느꼈지만 양심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와 같은 ‘세상적인’ 추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 걱정했다. 이러한 활동에는 (대개) 전도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도도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그러한 활동들을 정당화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본질적으로 죄라고 할 만한 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도대체 왜 그러한 일에 참여해아 하느냐였다. 사도 바울은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고정 14:8)라고 말했다. 도대체 내가 예비해야 하는 전쟁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한 불안과 불편을 느꼈을 뿐이다. 나는 세상에서 나의 위치를 몰랐으며, 설상가상으로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p20)
우리 문화와 사회의 주요 유형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 형성되고 있다. 우리들은 섬처럼 떨어져 있는 우리만의 ‘하부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섬은 해변에서 자꾸만 더 멀어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뭔가 영향력을 미치려다 보면, 다른 누군가가 이미 제안한 것에 반응만 하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디즈니 영화사가 기독교 신앙을 시시하거나 악한 것으로 비추는 영화들을 만들면, 우리는 그 영화들을 보이코트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이코트는 우리를 더욱더 우리만의 껍질 속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내놓을 만한 대안이나 디즈니를 능가할 만한 영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디즈니 영화들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격언대로 “어릭석은 사람은 어둡다고 불평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촛불을 밝힌다.” 우리는 불평은 엄청나게 하지만 촛불은 거의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 흑암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p24)
종종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기보다는 수동적으로 죄를 피하려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것 역시 조심스럽게, 시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경기에 비유하자면) 경기 규칙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안전한 플레이만 하다가, 그만 졸전을 벌이고 마는 것이다. (p26)
제2부 세상에서의 우리의 지위
2. 창조와 책임
3. 죄와의 싸움
4. 구속과 삶
제3부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
5. 배움의 경이로움
마이클 조던은 언제나 규칙을 잘 지키기 때문에 위대한 농구 선수가 된 것은 아니다. 그가 위대한 농구 선수가 된 것은 그 규칙 안에 있는 가능성을 배우고 그 가능성을 실현해 낼 수 있는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파울 규칙이나 자유투 규칙을 안다고 해서 드리블을 어떻게 하며 패스를 어떻게 하며 덩크 슛을 어떻게 하는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규칙은 이기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가르쳐 준다. 규칙은 우리가 가야 할 정상적인 방향들, 우리 행동의 경계선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공을 가지고 경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 규칙들 안에서 가능한 수백만 가지의 경기 유형을 찾아내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 아무리 훌률한 심판이라 할지라도 선수로 뛰면 형편없는 선수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기를 시작할 때까지 우리는 그 ‘게임’의 온갖 복잡함과 잠재성을 충분히 알 수 없다. 예술에서도, 정치에서도, 교육에서도, 노동에서도 최종 결과가 미리 결정되어 있는 법은 없다. 당면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그 뜻을 행하고자 씨름할 때, 우리의 삶은 언제나 생생한 질문과 조사와 시도와 배움과 수정을 감싸안게 마련이다.
성경은 모든 인간 지식이 경건한 형태로 포장되어 있는, 신적 영감을 받은 백과사전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 토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성경은 하나의 특별한 메시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누구시며,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실존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으며 어떻게 그리고 왜 악을 행하고 고난을 당하는지 그리고 가장 특별하게는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준비하고 성취하셨는지에 대해서 말해 준다. 이것이 인간 생활의 중심이자 경계선이다. 이것은 인간의 삶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를 통해서 무슨 의미인지를 배워야 할 책임은 여전히 우리 인간의 몫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배움은 그저 임무나 책임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다. 배움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배움은 우리가 타고난(즉 하나님이 주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준다. 배움은 삶이 지니고 있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분별력을 증가시키는, 따라서 우리에게 창조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한 가지 방법이다. 배움은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드높여 준다. 배움은 우리의 관점을 확대시켜 둔다. 배움은 우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며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해준다. (p83-85)
6. 일에 대한 조망
7. 쉼에 대한 성찰
일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자기의 삶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그들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들의 사업과 노력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 외의 다른 모든 관심사와 방해물과 활동을 배제시킨다. 그들은 일을 탁월하게 해 내는 것과 완벽주의와 생산성에 모든 생각이 고정되어서 질식당하여 숨을 쉴 수 없다. 그들은 광적인 활동에 사로잡혀서 쉬지도 못하고 몰두한다. 아마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p111)
많은 사람이 재정적인 면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고생하고 있으며 과중한 재정적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그들은 오래도록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라고 촉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재정적인 짐이 더 무거워지지는 않는다. 예수님의 촉구는 일을 그만하거나 노력을 중단하거나 관심을 그치라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재정적인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고, 굴욕이나 재정적인 불행을 당할까봐 강박적으로 걱정해서 일에만 빠져 지내지 말라는 뜻이다. (p113)
→ 세상의 제도가 엉망인데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다고 해결이 되나. 가난하게 살 것을 감수하고 잘못된 것을 바꿔가야지. 오래동안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고 사람구실을 할 수 없는데.
8. 놀이의 즐거움
제4부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
9. 자연 세계
10. 우리의 정치적 책임
11. 상상력과 예술
허기진 관광객이 교회에서 식사를 한다고 해서 복음에 더 가까워지겠는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관광객은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온 좋은 선물(즉 훌륭한 음식)을 대접받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그들의 생각도 바뀔 것이다. 아마도 자신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은밀하게 바뀔 것이다. 적어도 이 세상 어디엔가는 요리를 잘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교회는 행복한 추억의 장소가 될 것이다. (p185)
12. 창의성과 테크놀리지
책임 있는 기술적인 솜씨는 선물인 동시에 소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있는 재료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형성하는 인간의 과업이다. 그것은 유용하게 쓰이는 상상력이며 솜씨이다. (p192)
제5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소망
13. 예배와 우상 숭배
창조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졌다. 그리고 바르게 사용할 경우 복을 가져오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소망의 최종적인 원인이나 평화의 토대나 사랑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서 신뢰하거나 의지할 수는 없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신실함과 정의와 자비를 의지할 때에만 적합한 자리를 찾게 된다. (p217)
14. 변화된 전도
조각을 하거나 자동차를 수리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아기를 돌보거나 농장을 가꾸거나 야구를 할 때, 우리의 일차적인 의도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우리는 그러한 일이 선하고 유익하며 사람들에게 봉사가 되고 기쁨이 되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 그 일이 재미도 있으면서 보상도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그러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
만약 우리가 모든 예술과 일과 추리 소설 쓰는 것과 법률을 제정하는 것을 단지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하려고 한다면, 온갖 문제가 발생하고 말 것이다. 우리의 예술은 선전으로 전락할 것이다. 사람들이 꼭 필요한 사업상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일터에서 우리와 대화하기를 피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글쓰기 작업이나 직업이나 그 일을 그 자체로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우리가 그들 자신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많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복음주의자들을 전염병처럼 피하는 이유다. 그들은 뒷덜미를 잡혀서 오랫동안 지루한 얘기를 들으면서 ‘전도받거나’ 갑자기 교회에 끌려나가는 일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 (p234-235)
15. 인내와 오래 참음
16. 새로운 창조 세계
17. 기다림의 시간들
성경은 큰 틀, 세계관을 이야기하지만 구체적인 일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큰 이야기 안에서 일상 속 작은 이야기들은 내가 틀려가며, 잘못해 가며 만들어 가는 것. 조급해 하지 말고, 답답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서 살아가자.
2014.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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