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왜 샀을까?
그냥 샀다..
별 이유 없이..
원래 읽을 차례 아닌데.ㅋ..
책꽂이에 꽂혀 잇는 것 보고 그냥 일고 싶어서 읽었다.
고통의 문제...
하나님이 선하시다면 사람은 왜 고통을 겪어야 할까? 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은 C.S.루이스가 1940년에 쓴 책이다.
머리말
제1장 서론
1. 고등종교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는데 기독교에는 그 외에 한 가지 요소가 더 있다.
1) 누미노제(세속 영역을 초월하는 존재)의 경험
누미노제의 경험은 공포감과 경외감을 준다.
2) 자신이 도덕법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p31-32)
3)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령한 힘과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도덕의 수호자를 동일시
3) 한 유대인이 태어나 자신이 바로 자연에 출현했던 그 두려운 존재이자 도덕법을 부여한 존재의 아들이라고, 또는 그 존재와 '하나'라고 주장
제2장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이 선하다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에게 완벽한 행복을 주고 싶어 할 것이며, 하나님이 전능하다면 그 소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피조물들은 행복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존재이거나 능력이 없는 존재, 또는 선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존재일 것이다."
...
여기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선하다', '전능하다', '행복하다'는 말에 여러 가지 뜻이 있다는 사실부터 밝혀 내야 합니다
...
이 장에서는 '전능'의 개념에 대해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선함'의 개념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p42)
전능이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
믿지 않는 사람과 논쟁하다 보면 "하나님이 존재하며 그가 선한 분이라면 왜 이러저러한 일들을 하시지 않느냐"는 말을 흔히 듣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식의 일들은 하나님이 하실 수 없다고 말하면, 즉시 "하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는 줄 알았는데"라는 응수가 돌아오지요. 여기에서 '불가능성'의 문제가 대두됩니다.(p42)
일상적으로 불가능하다(impossible)라는 말에는 대개 '...하지 않는다면(unless)'이라는 구절이 숨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글을 쓰고 있는 이 방에서는 바깥에 있는 거리를 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즉, 제가 시야를 가리는 저 건물 너머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이 집 맨 위층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면 거리를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p42-44)
상호 모순되는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약한 피조물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도 하실 수 없습니다(p44)
불변하는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에 따른 결과 및 전체 자연질서는 일상의 삶을 제한하는 한계인 동시에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해 주는 유일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연질서 및 자유의지와 맞물려 있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습니다.(p53)
- 고통은 자연질서의 일부분이므로 그것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
제3장 하나님의 선함
하나님의 선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생긴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보다 지혜로운 분이라면 많은 문제에서 우리와 다른 판단을 내리실 것이며 선악의 문제에서는 더더욱 다른 판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선하게 보이는 일이 그의 눈에는 선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고, 우리에게 악하게 보이는 일이 그의 눈에는 악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도덕적 판단이 우리의 판단과 판이하게 달라서 우리에게 '검은 것'이 그에게는 '흰 것'이 될 정도라면 그를 선하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p59)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려면, 도덕 기준이 낮은 사람이 자신보다 현명하며 도덕 기준도 더 높은 사회에 편입되어 그들의 기준을 점차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p60)
1. 새로운 도덕적 판단은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판단의 파기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리라 기대되었던 주인'처럼 다가옵니다.
2. 그럴 때 자신이 혹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3. 새 기준을 인정할 때 수치심과 죄책감이 따른다.(p62)
하나님의 '선함'은 우리의 선함과 다르지만, 완전히 다르지는 않습니다. 이 두 가지는 흰 색과 검은 색처럼 다른 것이 아니라, 완벽한 원과 아이가 처음 그린 바퀴 그림이 다른 것처럼 다릅니다. 제대로 원 그리는 법을 배우고 난 아이는 자기가 처음부터 그리려 했던 것이 바로 그런 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p62)
하나님의 선함을 친절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1. 시인들을 통해서도 사랑은 단순한 친절보다 더 단호하며 탁월한 것이라는 점, 이성간의 사랑조차 "무시무시한 용모의 군주"라는 점을 배울 수 있다.
2. 사랑 안에 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친절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며, 사랑의 다른 요소들과 분리된 친절은 그 대상에게 근본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 대상을 경멸하는 사태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3. 친절은 그 대상을 제거하는 일에도 서슴없이 동의합니다. 우리는 동물에게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면하게 해 주려는 목적으로 동물을 죽이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친절은 고통을 면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 대상이 선해지든 악해지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4. 우리는 별 관심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무조건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와 연인과 자녀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보이며, 그들이 다른 사람과 불화를 일으키는 비열한 방식으로 행복해지느니 차라리 고통받는 편을 바랍니다(p64-65)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우리에게 먼 존재인 동시에 그 누구보다 우리와 가까운 존재입니다.
1.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사랑
1) 하나님은 우리가 일정한 특성을 갖추게 될 때까지 결코 만족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2. 인간이 동물에게 느끼는 사랑
1) 인간은 주로 자신을 위해 개와 교제한다
2) 주인이 개를 사랑하는 목적이 성취되려면 개도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주인을 사랑해야 하며, 개가 주인에게 봉사할 수 있으려면 주인도 또 다른 방식으로 개에게 봉사해야 합니다.
3) 개가 자연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냄새와 습성을 보면 사랑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개를 씻기고 대소변 훈련을 시키며 도둑질을 하지 않도록 가르쳐서 마침내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냅니다
4) 우리는 그 주인이 이 모든 노력을 들이고 개에게도 그러한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오직 개가 고등동물(조금만 노력하면 충분히 사랑스러워질 가능성이 크므로 그런 노력을 기울여도 아깝지 않은 동물)이기 대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3.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1) 아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만든 것을 약간은 미안해하면서, 혹시나 억압이 될까 봐 아무 제재도 가하지 않거나 심지어 정신적 독립에 방해가 될까 봐 아무 훈계도 하지 않는 아버지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크게 오해하게 만드는 상징입니다
2)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가진 자와 순종하는 자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아들을 자기가 원하는 모습을 만들어 가기 위해, 아들보다 뛰어난 지혜로 판단하건대 좋다고 여겨지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권위를 사용합니다.
(p71-72)
4. 여성을 향한 남성의 사랑
1) 이스라엘은 아내로서 부정을 저질렀지만, 하늘에 계신 남편은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시절을 잊지 못하십니다.
2) 이스라엘은 길가에 버려진 자신을 발견하여 옷을 입혀 주고 치장해 주고 사랑스럽게 만들어 준 연인을 배반한 떠돌이 가난뱅이 신부입니다.
3) 사랑은 본질상 그 연인을 완벽한 존재로 만들고자 한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무관심한 나머지 '사심없이' 우리의 복지에 신경 쓰신다는 뜻이 아니라, 두렵고도 놀라우며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p74)
우리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이기를 그만두시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본성상 지금 우리의 인격에 있는 흠들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그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p76-77)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그 영혼을 찾으신 결과로 나타난 하나의 양상 내지는 현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인간에게는 오직 좀더 나은 반응을 할 것인가 못한 반응을 할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p82-83)
하나님이 될 것이냐,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함에 반응함으로써 그의 선함을 공유하며 그를 닮은 존재가 될 것이냐, 비참한 존재가 될 것이냐, 우리는 이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p87)
제4장 인간의 악함
우리 인간은 왜 그렇게 많이 바뀌어야 하는가? -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아주 악해져기 때문.
요즘 사람들은 인간의 악함에 대해 인정하기 싫어한다. 왜냐하면
1. 대부분의 사람들이 친절 외의 덕목은 그다지 좋게 여기지 않으며 무자비함 이외의 악덕은 그다지 나쁘게 여기지 않게 되었기 때문.
2. 수치심은 위험하고 해롭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악함을 자각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가피한 것으로, 하나님의 선함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로 보게 됩니다.
...
똑같이 타락햇다는 사실을 간파할 줄 아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참으로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일입니다(p96)
1. 남들과 비교해볼 때 모든 이에게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Y보다 크게 못할 것이 없으며 혐오감을 주는 X보다는 확실히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 Y의 겉모습이 그의 참모습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느냐는 그 자신과 하나님만 아는 문제입니다.
2. 자신의 죄책을 덮기 위해 공동의 죄책이라는 개념을 이용한다.
-> 자신이 개인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참으로 깨달은 사람만이 공동의 죄책을 생각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며, 그때에는 공동의 죄책을 놓고 아무리 많이 생각한다 한들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p100)
3. 시간이 흐르면 죄가 말소된다.
-> 죄책을 씻어주는 것은 회개와 그리스도의 피이다.(p101)
4. 수가 많으면 안전하다
-> 인류 전체가 악의 고립지대일 수 있다.
5. 보다 높은 차원의 사회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 인간 종족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알 수 있다.
6. 모든 덕목을 친절 한 가지로 축소시키려 한다.
7. 기독교를 지나치게 도덕적으로 해석하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 하나님은 도덕적 선을 넘어서는 분이다. 도덕법의 요구를 인정하고 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력을 다 기울여 본 후에 자신의 실패를 정면으로 직시하게 된 사람이 아닌 한, 도덕법을 초월할 수 없다.(p108)
8. 인간은 죄를 지울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간접적으로 창조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p108)
->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이 왜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경건하지 못한지 자문한다면, 무지하거나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철저하게 경건해지기를 바라지 않은 탓이라는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p109-110)
제5장 인간의 타락
인간이 지금처럼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게 끔찍한 피조물이 된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스스로 이런 모습을 초래했기 때문입니다(p115)
인간이 처음 저지른 죄의 결과를 하나님이 기적으로 제해 주실 수도 있었다.
1.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무한히 죄의 결과들을 제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이 일은 우리에게 별 유익이 되지 못한다.
2. 세상이 그처럼 계속해서 신의 간섭을 통해 지탱되고 교정된다면, 어떤 중요한 것도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지 않은 세상,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확실성을 잃음으로써 눈앞에 있는 선택사항 중 무엇을 택해도 아무 상관이 없는 세상, 따라서 선택사항이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를 잃는 세상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p118)
현대 과학은, "우리는 인간이 덕 있고 행복했던 태곳적 상태에서 타락하기는커녕, 오히려 야수 같고 미개한 상태에서 서서히 향상되어 왔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 그러나 최초의 인간들은 외설적이고 흉포하며 잔인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사실무근한 주장입니다(p121)
1. 현대의 미개인들도 그런 사람은 아니다.
2. 초기의 인간들이 남긴 물건을 근거로 그들이 우리 시대에 그와 비슷한 것을 만드는 사람들과 모든 점에서 똑같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p121)
죄라는 개념이 가능하려면 위반할 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의 '집단 본능'이 관습으로 구체화되고 그 관습이 법으로 굳어지기까지는 수세기가 걸렸을 것이므로, 최초의 인간이 최초의 죄를 범할 수 없다.
-> 최초의 죄는 이웃에 대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죄, 즉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였다.(p123-124)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스스로 부패했으며, 따라서 지금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선이란 본질적으로 우리를 치료하며 바로잡아 주는 선을 의미한다(p145)
제6장 인간의 고통 Ⅰ
왜 하나님은 이처럼 가장 못된 인간들이 동료들을 괴롭히는 경우를 그토록 엄청나게 많이 허용하시는 것이냐?(p149-150)
고통은 두 가지 의미로 나눌 수 있다.
1. 당사자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인지되는 감각
2. 당사자가 싫어하는 모든 경험.
왜 치료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는가?
1.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 온 의지를 되돌려 드리는 일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본질적으로 가혹한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p152)
제7장 인간의 고통 Ⅱ
인간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완결짓는 데 필요한 여섯 가지 명제
1. 고통스러운 경험의 유익은, 고난받는 당사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며 그의 고난을 목격한 사람들은 동정심을 품고 자비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p185-186)
2. 시련이 구속의 필수 요소라면,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이 이미 구속되었거나 더 이상 구속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시련이 멈추지 않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p191)
3. 기독교가 말하는 자기 양도와 순종의 교리는 순전히 신학적인 것으로서 정치적인 주의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p192)
4. 우리는 모두 확고한 행복과 안전을 갈망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본성상 그것을 허락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기쁨과 쾌락과 즐거움은 널리 퍼뜨려 놓으셨습니다(p193)
5.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최대치의 고통에 도달했다는 것은 그가 우주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에 도달했다는 뜻(p194)
제8장 지옥
하나님의 자비가 그처럼 큰데도 왜 지옥은 여전히 존재하느냐
악을 묵과하는 것은 악을 무시하는 것이며 악을 선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p205)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 당에서 살 때보다 더 인간다워진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은 인간성을 박탈당한다는 뜻입니다(p210)
제9장 동물의 고통
제10장 천국
천국은 하나의 도시이자 몸입니다. 그 축복받은 사람들은 영원토록 서로 다른 존재로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p253)
하나님은 창조하셨습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만드셨고, 그 구별된 존재들이 그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으며, 단순히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연합을 이루게 하셨습니다(p254)
부록
고통의 원인을 받아들이고 직시할 때, 갈등을 통해 성품이 강해지고 정화될 뿐 아니라 고통도 때가 되면 대개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p262)
고통은 영웅의 자질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많은 이들이 그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p263)
20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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