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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10.2.16~7.22.)

 

 

우연히 교보에 들렸다가 우연히 교보에서 발견한 책_

 

치고는,, 너무 좋다.,.ㅎㄷ...

 

타이밍 대박_ 

 

 

교회 속의 세상 *

 

너무나 공감가는 문구 아닌가_

 

세상 속의 교회 *

 

너무나 소망되는 문구 아닌가_

 

 

 

머리말

 

 

이 책의 첫 부분 세 장은

 

'세상 속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속의 세상'이 되어버린 한국 교회의 '오늘'을 조망합니다

 

두 번째 부분 세 장은 교회가 세상에 모든 주도권을 내어주면서

 

'교회의 교회됨'을 잃게 된 '어제'의 역사를 소개하고

 

 그런 어두운 시대에 '교회의 교회됨'을 지키려 했던 작은 실험들의 공과를 탐구합니다

 

마지막 세 장은 ..한국 교회의 '내일'을 모색해 봅니다.

 

 

이 책은_ 이런 책..

 

교회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1장 교회 속의 세상: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후 교회에서 성장해 가는 동안 저는 여러 직분을 정하는 데 돈보다 더 큰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지위였습니다. 사회적 지위에 비하면 돈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호사인 사람은 교회에서도 똑같이 변호사로 대접받고, 의사인 사람은 교회에서도 똑같이 의사로 대접받습니다. 아무리 니앙 연륜이 짧아도 이른바 '사'자 돌림 직업을 가진 사람은 쉽게 목사님의 주목을 받을 수 있으며, 교회 의사 결정 구조에도 남보다 훨씬 빨리 접근할 수 있습니다.(p15)

 

왜 이럴까 왜 이럴까.. 가슴이 아프다...

 

이런 현상은 교회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사명과는 거리가 있습니다.세상 속에 있기는 하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공동체가, 어느새 철저히 세속화하여 '교회 속에' 세상의 가치와 기준이 들어오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속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 속의 세상'이 되어버린 세속화된 교회는 날로 그 힘을 축적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정치적 발언까지 시작합니다... 그러나 세속화된 교회들이 보여주는 정치적 발언이나 침묵은 언제나 '가진 사람의 편'으로 귀결된다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p16)

 

교회 속에 세상의 가치. 세상의 기준이 너무 큰거 같다..

 

그럴 수밖에 없을 ., 그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은 교회에 마음껏 영향을 주고 있지만,,교회는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거 그게 문제.,.,

 

 

목사님들이 목사 친구들 사이에서 가치관의 기본을 형성하는 동안, 대부분의 신자들은 불신자들로 가득 찬 세계를 살아갑니다. 이들 평범한 신자들이 주변 사람들과 '헌금,건축,잘나가는 목사님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란 전혀 없습니다.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관심의 초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런 명백한 관심의 차이 속에서 의사소통은 갈수록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p25)

 

목사님들과 신도들 사이의 괴리_ 거리감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유...

 

이 부분 앞뒤로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목사님의 모습과 기독교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너무나 정확하고,, 너무나 잘 표현되어있고,, 너무나 쉽게 설명되어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불신자들의 이미지는 크게 '이기적인 사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독선적인 사람'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남 말할 필요 없이, 이는 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해 갖는 부정적 인식은 각종 언론 보도보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 직접 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이런 행태에 기반을 둔 경우가 많습니다.(29,30)

 

나도.. 이런 사람이었고,,인거 같다.......

 

 

.

.

.

 

문제는 많은데 대책은 없어 보입니다. 이런 교회의 현실을 알고 나서 슬품과 탄식을 느끼지 않을 기독교인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이런 슬픔과 탄식 속에서 대부분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침묵하는 길을 택합니다. 기도 외에는 해법이 없다고 느끼는 까닭이지요. 그러다 보니 교회 문제에 대한 침묵은 신실한 기독교인의 가장 중요한 표지처럼 자리잡았고 교인들은 갈수록 개인화, 파편화 되어갑니다. 교회 문제에 대해 교회에서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 독특한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문화를 깨기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애통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 슬품을 느껴 본 적이 없는 분들은 지금 조용히 이 책을 덮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현재의 교회 또는 교회 생활이 너무 만족스러운 분들은 당분간 그 행복을 더 깊이 누리시기를 권합니다. 이 책은 훨씬 나중에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지금 애통하는 분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다음 책장을 열도록 하겠습니다.(33)

 

 

교회문제에 대해 교회에서는 절대 말하지 않는 모습..

 

진짜 이 책은,, 교회에 대해 아픈 것이 있는 사람이 읽어야한다..

 

읽어야만 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아프지 않은 사람은 읽어서는 안된다..

 

읽어서는 절대 안된다..

 


2장 비전과 욕심: 방향을 거꾸로 잡은 교회

 

'사람의 성공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은 어느덧 하나의 신학이 되어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지요. 그런 분위기가 워낙 강하다 보니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듯이, 교회에 남아 있기가 무척 힘듭니다.(39)

 

하나님의 영광은 1차적으로 '나타난 영광',즉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무게, 탁월함, 훌륭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거나, 우리가 뭘 한다고 해서 양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구약이든 신약이든, 세상에서 뭘 잘함으로써 얻게 되는 명예와는 반대되는 개념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40)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하는 것..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공부하는 것 아닐까..

 

그 영광,, 그 무게 탁월함에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그 영광,, 그 무게 탁월함을 통해 공부를 하는게 아닐까.

 

 

성경에 나오는 인물중에는 누구 한 사람, 자기 노력으로 열심히 일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없습니다. 성경은 원래 그런 사람,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고, 모세가 민족을 이끌게 되고, 다윗이 왕이 되고, 다니엘이 예언하게 된 것은 자기가 소망해서, 비전을 가져서, 열심히 공부해서 그리된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들 중 누구 하나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사람조차 없습니다. 누가 국무총리를 할지, 누가 민족의 지도자가될지를 선택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걸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50)

 

성경에는 누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가.. 에 대해 언급이 없다..

 

요셉이 몇시에 자고 몇시에 일어났는지,,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으며

 

성적은 어느정도였는지...

 

그런거에 별로 관심이 없다..

 

성경은 그냥 하나님이 하신 일에 더 관심이 있고

 

그 하나님의 일에 사람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응답했는지에 관심이 있다.

 

한 사람의 능력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한 사람의 어떠함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성경은 "~을 하라"는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것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인생의 계획과 불명확성 앞에서 고민하느라, 정작 명확하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명령을 고민할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길이냐, 저 길이냐 하는 선택이 아니라 '지금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좀더 일찍 깨달을 수 있었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는 모든 순간이 두려움과 고통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의 시간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수많은 선택들의 시간,, 앞에서_

 

희망과 기쁨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선일씨와 관련해_

일찍이 선교사의 꿈을 품었지만, 예수 믿는 집안 출신도 아니고, 그를 지원해 줄 가족이나 교회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특출나게 잘해서 대단한 학벌을 갖춘 것도 아니며, 그럴듯한 사회적 지위도 확보하지 못하고, 그 흔한 미국 경험 한 번 해보지 못하여 영어 실력도 충분치 않은 34세의 미혼 청년으로서는 자기 꿈을 이룰 길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을 겁니다.(86)

 

저자가 본 김선일..의 모습..

 

아., 이 앞 뒤 부분을 보면서,,

 

읽는 내내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안타깝기도 하면서,,

 

아........ 난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왤케 나를 보는거 같지................ 

 

유족의 뜻에 따라 기독교장으로 장례가 이루어진 후에는, 과연 그가 순교자인지에 대한 기독교 내부의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이 이상한 논쟁만큼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잘 보여 주는 것도 없습니다. 한 젊은이의 죽음 앞에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함께 울고, 함께 마음 아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 반드시 그 죽음의 '의미'까지 추적해 들어가야 직성이 풀리는 근본주의자들의 행태가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까닭입니다. 마지막 순간 김선일씨가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치지 않고, 오히려 반미와 반전의 메시지를 던진 것에 분노한 보수교회 지도자들은 그가 순교자로 추앙되는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90)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왤케 우리의 현실은, 2천년 전 예루살렘의 모습과 똑같지?...

 

그 안에서 자란 나도, 내 안에도 그런 모습이 있겠지?.....

 

3장 진보와 보수: 세상과 똑같은 좌우 대립

 

사랑과 정의, 평화를 실천하는 '교회의 교회됨',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는 '거룩한(구별된) 공동체의 존재'를 통해 사회에 충격을 던지는 방법이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은 보수 쪽에서도 진보 쪽에서도 별로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99)

 

빈곤은 국가의 책임이기에 앞서 교회의 책임입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모두 국가에 맡기며 불변의 전폭적 신뢰를 보내는 것은, 국가를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는 일종의 우상숭배 입니다. ... 초대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 '세상에 대한 대안으롯의 교회' 그 자체로 언제나 정치적일 수 있었습니다.(100)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제국을 향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라"고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101)

 

우리 공동체가 대안이 되면 된다... 우리가 살아내면,,, 삶으로 보여주면_

 

내가 살아내면,, 내가 삶으로 보여주면_

 

 

우리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그 "존재 자체"로 세상을 향한 대안이 될 수 있는 정치적인 공동체여야합니다. 초월성과 영원성의 입장에서 세상의 시스템 자체를 비판하고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세상을 향한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살인적인 경쟁 시스템 속에서 '적자생존'의 논리를 진리로 믿고 있을 때,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고, 슬퍼하는 사람이 위로를 받고,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만족을 얻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자비를 입고, 화평케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며,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의 체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것을 더 늘리고 지키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고 희생함으로써 세상에 충격을 던지는 정치여야 하는 것입니다.(105)

 

<10.2.19.> 


4장 콘스탄티누스: 세상을 교회 속으로 끌고 들어온 사람

 

마치... 작년 1학기때 들었던 기독교와 인류문명 수업을 다시 듣는 듯 한 기분?..

 

이분., 역사... 너무 잘 아는거아닌가ㅎㄷ.. 좋겠다.,.,  대학교 다닐 때 책 많이 읽을 수 있었어서..ㅠ..........

 

모르는 이름들 초 많이 나와서.. 꽤나 지루하긴 했지만.,ㅠㅠ 이 한 파트만 읽어도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 대해 한눈에 알 수 있을 꺼 같다.ㅎ.ㄷ...대박...

 

 

중요한 것은 이 사전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군기와 방패의 문양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십자가는 원래 로마제국에서 정치범을 처형하는 데 상요한 끔찍한 형구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형틀에 자신을 맡김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칼과 창에 의해 이룩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처음부터 칼과 창과 방패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말구유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최소한 알렉산더 수준의 집안에서 태어나 피바람을 통해 세계를 정복했을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군기와 방패의 문양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기독교를 오해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근거입니다.(P121)

 

 

4장의 초반부에 나오는 이 내용은 이 장의 결론,, 아니 이 책의 결론까지 이어질 중요한 전제 사실이다.

 

저자는, 콘스탄티누스 이후 기독교가 너무나 세상과 밀착되어 그 본질을 잃어버렸다고 본다..

 

읽다보니 그런거 같다...정말 이 내용 그대로라면,, 다른 모든게 딱딱 떨어진다.

 

근데,, 중요한 것은.. 이 내용이 너무 맞는거 같다..

 

예수님은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지 않는데... 그 십자가는 어마어마한 고통과 한계와 슬픔을 상징하는데...

 

이것들이 마치.. 승리를 보장하는 부적처럼 된 거 아닌가.무튼 이 뒤의 내용들., 이 더 와닿는다__

 

 

초대교회 신자들은 나무 십자가보다는 오히려 세례의 상징인 물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중요한 것은 나무로 만든 형틀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이 상징하는 구원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4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카타콤 지하묘지의 벽에서 발견되는 상징들은 주로 종려나무 가지, 비둘기, 물고기 등입니다.(P123)

 

 

십자가든 성경이든 그 자체로는 그저 하나의 물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물질을 위해 내 생명을 거는 순간, 그 물질은 하나의 우상이 되고 맙니다. 기독교인들의 신앙대상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지, 하나님이 표상되었다고 믿어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예수의 십자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 위의 예수'입니다. 특히나 예수와 분리된 십자가 그 자체는 아무 의미 없는 하나의 형틀에 불과합니다.(P125 )

 

 

 전투를 전후하여 보게 되었다는 신의 환상, 전투의 승리, 그리고 그 신에 대한 전폭적인 의존의 시작...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이 노골적으로 기복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외적인 성공여부에 따라 신앙의 성패를 판단하는 것은 사실 기독교의 뿌리를 흔드는 것입니다.(P129)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도들에게 특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다른 신을 믿는 자들에게도 인정되는 수준의 종교 자유를 인정한 것에 불과합니다.(P129)

 

 

우리 나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도나투스 논쟁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잘 모르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입니다. 해방후 한국 기독교계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P135)

 

 

음.; 여긴 오늘 아침에 읽었음에도., 까마득..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무튼., 이 부분을 보면 우리나라 교회사도 알 수 있다.,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이책은 사회부를 위해 만들어진 책임........ㅎㄷㄷ...

 

 

해방이 되자 순교를 각오하고 감옥에 갔던 신도들 중 일부가 겨우 살아나오게 됩니다. 이들이 이른바 '출옥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출옥 후 바로 귀가하지 않고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한 뒤 1945년 9월 20일 "신사참배한 사람들은 최소한 2개워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을 요구하는 '한국교회 재건 기본 원칙'을 발표합니다.도나투스파의 요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매우 관대한 요구 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이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류에 속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이들을 총회에서 축출함에 따라 결국 '고신파'라는 새로운 교단을 시작하게 됩니다. 박해를 이기고 출소한 사람들이 오히려 소수파로 몰리고 주류에 의해 축출된 역사는 도나투스파에 대한 처리와 흡사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고신파'는 적어도 이단으로 몰리지는 않았고 정부의 탄압도 없었다는 점입니다.(P137)

 

 

 

테오도시우스의 기독교 국교화는 콘스탄티누스가 시작한 기독교 공인 정책의 완성이었지만, 관용 정책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서구 유럽에 종교적 관용이 다시 인정되려면 최소한 1200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P143)

 

 

기독교가 국가 권력의 위치에 서게됨에 따라 국가 방위 또는 통치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 자체에도 지켜야 할 것이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우선 국가로부터 돌려받은 재산도 지켜야 했고, 교회 위계질서 내의 신분도 지켜야했습니다. 언제든지 끌려가 매우 끔찍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던 소수자의 입장에서, 어느 날 갑자기 통치 계급의 일원이된 기독교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차피 언제든지 빼앗길 수밖에 없는 재산과 지위만을 가지고 살던 나그네 입장에서, 이제는 '지켜야 할 뭔가'가 너무 늘어나 자기 몸무게를 지탱하기도 힘들어진 공룡으로 변한 것입니다.(P145)

 

 

가진게 많아지면..진짜., 뭔가 삐그덕 삐그덕 거린다..

 

한달전,, 돈이 없을 때.. 가 차라리 좋았지.. 사회부 캠프 회비 겨우 내던., 그때가 차라리 좋았지..

 

돈이 생긴. 지금..은.,아., 이 돈을 어찌해야나., 고민 할 수 밖에__

 

이 지켜야만 하는 뭔가.,들., 어찌해야나.,ㅎ.,,,,,,,,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이냐를 본격적으로 정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소수파였던 유대인, 유대인 중에서도 소수파였던 예수님은 그럴 힘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생명을 걸고 소수의 길을 걸었고 대부분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정통과 이단을 정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에 관하여 다양한 네개의 이야기를 생산해낸 초대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성경 해석에 그리스 철학을 끌고 들어왔던 초대교회의 교부들도 아니었습니다. 정통과 이단을 정하는 최초의 주권을 가진 사람은 이들 중 누구도 아닌,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였습니다.(P151)

 

유사 이래 모든 제국은 폭력의 기반 위에서 세력을 확장햇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온몸으로 가르치셨습니다. 폭력으로 폭력을 이기는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폭력을 이기는 새로운 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를 자신의 모습으로 대체함으로써, 이전 로마 황제들이 무식한 박해 방법으로는 결코 얻어내지 못했던 기독교의 세속화라는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P152)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자꾸만 언젠가 올 미래 시점으로 밀어내 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부분은 슬쩍 넘어가고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만을 기다리게 만든 이런 변화는 기독교인들이 현실의 국가권력과 결탁한 것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  이 땅에서는 세상 나라의 시민, 죽으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콘스탄티누스가 교회에 끌고 들어온 세속화의 결정체입니다.(P152)

 

 

 태어날 때부터 모든 사람이 당연히 국가-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시스템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믿는 구별된 사람들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출생과 동시에 전 국민이 자동적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공동체는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신앙고백도 요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P153)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통치자가 되어 기독교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에서 승리한 뒤 진심을 개종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콘스탄티스가 그런 길을 책했다면, 그는 그의 적들을 절대 이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 목적을 이루기 전에 살해되었을 가능성도 높고, 그의 권좌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의 길과 그리스도의 길은 다릅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실제로 그런 길을 택했다면 세계사는 완전히 달라졌겠지요. 그는 세상의 관점에서 실패한 통치자가 되었겠지만,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진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비참한 죽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출발점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P155)

 

예수님이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  그건 너무나 급진적이고 혁명적이었기에 세상적 권력이 없었던 소수자의 자리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10.3.1.>


5장 16세기: 세상이 교회를 지배한 시절

 

이 장에서는 교회가 국가와 결탁해.. 어떤 일을 했는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보여준다.

 

종교 개혁 시기에 구교든 신교든 얼마나 폭력적이었나 하는 사실을 보여준다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잘 기억이 안나지만 아니 읽을 때도 너무 역사적인 사건이 많이 나와서 지루하기도 하고 기억에도 잘 안남았지만

 

읽고 나서는 .. 아.. 이건 뭔가 이게 진짜 기독교의 모습인가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정의를 외치며 행하는 폭력,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미명하에 이뤄진 만행...

 

 

올바른 교리 못지않게 올바른 수단도 중요합니다. 창검을 손에 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이 자신들의 승리를 기원할 때 하나님은 누구의 편을 드셔야 했을까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독교인들을 죽이는 현장에서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갑옷을 입고 어느 한편에서 칼을 휘두르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그런 예수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요? 이런 폭력이 하나님의 이름 아래 자행된 것은 '나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라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나의 편'이라는 확고한 믿음은 기독교인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근원인 동시에 남을해칠 수 있는 위험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P193)

 

역사를 아는게 왜 중요할까. 왜 저자는 세장에 걸쳐 방대한 양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을까..?!

 

역사는.. 사람이 써내려간 역사는, 사람이 행동한 것을 기록한 역사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고 지금도 어쩌면 반복되고 있을 수 있다..

 

역사는,, 지금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자 그 지금을 살고 있는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다.

 

혹시 지금 우리는 이러고 있지 않은가.

 

혹시 지금 나는 이러고 있지 않은가..

 

위에 있는 이글에 이어 담대하게도 이단 이야기가 나온다.. 참 담대하게도..

 


6장 중세의 이단: 먼저 실험을 시작한 사람들

 

 기독교는 매우 배타적인 종교입니다. 그 배타성은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에 기인한 것입니다. 원래 그 거룩함은 원수를 사랑한다든지, 오른편 뺨을 때리는데 왼편까지 돌려댄다든지, 아무도 모르게 남을 구제한다든지 하는, 세상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양식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런 남과 다른 행동양식을 가진 사람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배타성을 다른 종교에 대한 배제로만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많았고, 그런 배제는 기독교 내부로까지 이어져 끝없는 분열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남을 배제할 권리를 지닌 '정통'기독교라는 것이 예수님 시절부터 확실한 원형을 지니고 있었던것은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인보다는 오히려 경건한 유대교 신자에 가까웠습니다. 이런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 기독교는 이후 계속적인 내부 투쟁을 거치면서 무엇이 전통인지를 만들어 나갔고, 다수에 의해 정통으로 선택받지 못한 입장은 이단이 되었습니다.(p220)

 

교회가 스스로 세상과 구별되려고 하는 노력보다 누군가를 구별하려고 하는 노력이 더 큰건..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구별되려는 노력보다 배제하려고 하는 노력이 더 큰건.. 나도 우리도 마찬가지인 거 같다..

 

소수 종파에 깊이 빠진 분들을 한번 애정을 가지고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대개 교회에 대한 강한 열정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현실 속의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하다 보니, 제대로된 교회를 찾아 순례를 시작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소수 종파에 깊이 빠졌던 분들은 거기 실망해 뛰쳐나온 뒤에도, 비슷한 스타일의 소수 종파를 찾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걸 보면 이단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은 교회다운 교회를 만드는 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P229)

 

으., 참 맞는 말인데,,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건 참 어려운거 같다.. 나 자신부터가....

 

이런식으로 해서 어느세월에.....

 

그래도... 끝까지 끝깢.,.. 이게 모두가 사는 길..

 

 

 

<10.7.18.>


7장 질문 바꾸기: 고통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는 교회

 

 어떤 사람이 서울에서 강화도로 가다가 떼강도를 만났어요.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두 빼앗고 마구 두들겨 패서 반쯤 죽여 놓고 가버렸습니다. 마침 그때 강남의 큰 목사님이 심방가는 길에 바로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 버렸습니다. 잠시 후에는 집권당 소속 지역구 의원이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막 휴전선을 넘어온 남파 간첩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강도 만난 것 보다 더 큰일을 당하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간첩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까지 감아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차에 태워 근처 병원으로 데려가서 간호까지 해주었습니다. 하룻밤을 같이 자면서 말입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20만원을 꺼내어 병원측에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봐 주세요.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오는 길에 갚아 드릴게요' 하며 부탁하고 떠났습니다.(눅10:25 이하 참조) (P237)

 

.. 성경을 풀어낸 이야기.. 으아., 대박이다.. 진짜...

 

이 장에서는 이런류의 성경 해석이 많이 나온다..

 

근데 하나하나 너무 공감되는,, 메시지를 뛰어넘는 성경해석..ㅎㄷ...

 

 또 하나를 보면,,

 

"옛날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3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든 일이 있습니다. 그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과부들이 많이 있었지요.그런데도 하나님은 엘리야 선교사를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과부에게도 보내지 않고 동두천에 사는 어떤 동성애자에게만 보내주셨습니다."

 "한국 전쟁 때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도 장티푸스 걸린 환자들이 많았건만 그들을 단 한 사람도 고쳐주시지 않고, 북한의 김일성 장군만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P249)

 

이 부분은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에게 하신 이사야서 말씀을,,

 

우리 현실에 맞게 번역한 것..

 

예수님이 우리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아니 어떤 사람이 이런 사실을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다녔다면 그 사람은 무사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동성애가 죄란 얘기야, 아니란 얘기야? 당신은 왜 거기에 대해 단순하게 답변을 못해? 당신 좀 이상하지 않아?"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이렇게 답변하고 싶습니다. 저는 남의 죄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솔직히 저의 내면에 있는 죄의 본성과 싸우는 것만도 몹시 힘든 일이기 때문에 굳이 남의 죄 문제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나마 이성애자로 태어나서 이런 유혹들에 대해 털어놓으면서도 교회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P250)

 

동성애.. 이 장의 주요 내용은,, 흐름은 동성애이다. 아니 동성애로 대변되는 소수자에대한 배려에 대해, 그들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말한다.

 

그들이 어쨋냐 이전에 나는 그 사람에게 어떤사람인가?..

 

이것이 착한 사마리아 이야기의 핵심이고,,

 

지금도 유효한 진리이다..

 

나는.. 내 옆에 있는 그 한사람에게 어떤 사람인가.,

 

 

상처를 입어 본 적이 없고, 그래서 남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교회 간판을 단다고 해서 다 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우선 질문을 바꿔 보아야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친구입니까? 남들에게 말 못할 자신의 고통을 당신에게만 이야기하는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있나요?(P261)

 

나는..

 

<10.7.22.>

 

 


8장 샬롬의 공동체: 교회의 교회됨을 위하여

 

 그런데 이런 상상을 해봅시다. 여기 한 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사람들은 보험을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갑자기 죽거나 다치거나 직장을 잃게 되면 당연히 교회의 모든 사람이 달려들어 남은 가족을 돕고 그들의 생계를 함께 책임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회에는 예수님이 그토록 경계하셨던 부자도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성도들 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과 물질을 나누다 보면 엄청난 부를 축적할 길이 없는 까닭입니다. 이 교회의 성도들도 틈날 때마다 복음을 전하지만, 굳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한두 명 전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몰려드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더 큰 과제입니다.


9장 나가는 글: 실험하는 교회

 

 이 장에서는 저자가 교회에서, 선교단체에서 경험 했던 실험 이야기가 나온다..

 

재정 공동체, 자취방 공동체, 십일조를 떼어놓은 것, 지정헌금..공동 육아, 공동식사...  등등등..

 

수많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장의 목차..는

 

실험의 기준, 예수그리스도

말씀을 나누는 공동체

돌봄의 공동체

실험의 핵심은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것

 

이다..

 

 

재정을 떼어서 서로를 돕는 공동체.. 공동 펀드.. 도 지정헌금도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실험의 핵심은.. 지금 시작하는 것..

 

거창한 무언가를  준비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학을 공부한 적 없는 평신도 한 사람이 작은 머리를 쥐어짜 내며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저에게는 이 작업 자체가 능력을 벗어나는 어려운 실험이었습니다.

이 책이 끝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창조적인 상상과 용기있는 실험이 시작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P326)

 

그리고.. 책의 가장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는 이 책을 쓰는 것 자체가 실험이었다고..

 

자신과 같이.. 창조적이고 용기있는 실험이 시작되기를 바란다고..

 

정말.. 대학 교수의 신분으로 이런 책을 쓴다는 것 자체.. 너무나 용기있는 행동이고 창조적인 실험인 것 같다.

 

법 공부하기에도 빡빡한 일정인데...

 

 

나는..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가?!.

 

어떤.. 용기있는 행동을 하고 있는가??..

 

교회를 교회로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만들기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책..을 다읽은지도 한달.. 읽기 시작한지는 6달이 지났는데

 

아.. 아직도 너무 좋다..

 

너무 설레고..

 

이 책은,, 진짜 꼭 꼭 읽어봐야는 책.....

 

빨리 규원이한테 읽혀야겠다..ㅋ.ㅋ.

 

-201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