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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증언 The Christian Witness to the State (2013.4.24.~30.)

 


요더의 첫 작품_

 

1964년에 처음으로 쓰여졌고, 87년에 2?이 나온 것 같다. 번역된 건 2012.

 

옮긴이의 글

 

왜 존 요더인가? 왜 우리 시대에 아나뱁티스트가 하나의 대안인가? 더 좁게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등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자면,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해야 한다. 거칠게나마 구분한다면, 관료적(magisterial) 종교개혁과 급진적(radical) 종교개혁이라는 큰 갈래가 있다. 전자에는 루터와 칼빈 등이 있고, 후자는 아나뱁티스트가 대표적이다.

명칭에서 보듯이 개혁 운동의 방향과 성격이 국가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른 분류다. 관료적 개혁은 국가의 도움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편이었다면, 급진적 개혁은 교회는 교회 내부의 힘, 곧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의 협력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관료적 개혁 내부에서는 만찬, 성상, 예배 형식 등으로 논쟁한 반면, 그들은 아나뱁티스트와는 국가에 대한 이해로 심하게 다투었고, 핍박했다.

따지고 보면 아나뱁티스트들은 새로운 교리나 이념을 주장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한 바를 예외 없이 철저하게 실천하자고 말했을 뿐이다. 오직 은혜로만, 오직 성서로만, 이라는 슬로건에 걸맞게 교회 내부를 개혁하고,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의 주장이었다.(p5)

 

이 책이 지닌 의의 중 하나는 요더의 초기 사상과 고민을 보여주는 것과 함께 종교개혁 운동 내부를 갈랐던 지점이 무엇이었는가를, 그리고 주류 개혁자들의 시선이 아닌 예수를 쫓다가 주류에 의해 쫓겨 다닌 삶을 살았던 소수의 시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p6)

 

요더가 말하려는 핵심을 간추려 보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듯싶어 정리해 보았다.(p6)

요더의 핵심 사상은 기독론에 있다. 예수가 주님이다! 예수가 주님이라면, 국가를 대하는 태도에서 있어서도 그분의 주되심(Lordship)을 인정해야 한다.

요더는 자연 신학 또는 자연 계시로 국가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인간의 합리성과 효율성 등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실제로 국가와 국가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처리할 때 상당히 유용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 안에 있어서 예수의 주되심을 침해하거나 제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요더의 생각이다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인을 위한 것이다. 국가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예컨대 산상수훈은 다름 아닌 기독교인을 위한 것이다. 이 말은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국가와 정치인들이 그대로 다를 것을 섣불리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국가는 창조 질서가 아니라 섭리와 보존 질서이다.

국가는 칼(sword)이다. 강제력(force)과 폭력(violence)을 말한다. 요더는 국가의 본질은 강제력 또는 폭력을으로 본다. ... 국가는 보존질서이기에 폭력의 사용을 하나님이 허용하셨다는 것이 요더와 아나뱁티스트들의 주장이다. 다만, 그것이 자기 한도를 넘어서는 것은 생명의 주님이신 분의 권위와 영역마저 침범하게 될 공산이 크고, 그것은 우상숭배이기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 책은 평화주의가 사회 참여를 하지 않으며, 또한 사회참여 방식으로 부적절하다는 왜곡에 대한 체계적인 반론이다. ... 십자가 신앙은 사회 참여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 방식은 사회을 효과적으로 바꾸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이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증언하기이다. 증언이란 성서가 말한 바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 살아낸 삶 자체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 세상과 다르게, 사상에 반해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 이상으로 더 강력한 선포는 없다.

각 교회와 성도는 자신이 살아낸 것에 기초해서, 그리고 자신의 은사를 따라서 사회 참여를 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영역과 문제를 다루지 말라는 뜻도 된다. 그러면서 연대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p6-9)

 

 

머리말

 

우리의 목적은 기독교 평화주의가 실용적이거나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론적 성찰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래서 사회질서에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참된 사실인지를 분석하는 것이다.”(p12)

 

요더는 경계해야 할 점을 두 가지 지적한다. 하나는 민주주의라 할지라도 폭력이 질서유지의 궁극적 기본 원리로 작용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는 점이다.(p14)

 

교회에는 두 가지 의무가 있다. 그것 중 하나는 실제로 행동을 보여주는 것”(walk the walk)으로, 신앙 공동체 내부에 성 평등을 마땅히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말을 제대로 하는 것”(talk the talk)으로, 국가가 수용할 만한 정의로운 가치를 조성하려고 국가에 말을 거는 것이다.(p14)

 

 

머리말 1964년 판

 

 

1장 확인해야 할 문제

 

그리스도의 통치는 국가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억제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의무를 다하라는 것을 의미한다.(p19)

 

교회는 마구잡이로 희생자를 양산하는 전쟁 수단을 비판해야 할 뿐만 아니라, 긴장을 지역 내에서 해결하기는 커녕 더 확대하려는 전쟁 목적도 비난해야 한다.(p19)

 

안전보장 장치들이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있다. 실제로 근대에 있었던 모든 전쟁을 비판하는 원칙은 완전한 제자도의 윤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찬성하는 현실주의적 기초 위에 있다.(p20)

 

평화주의자들은 설령 국가 정책의 수단으로 강제력(적어도 군사력)의 사용을 포기하라는 기독교의 사례와 가르침을 근대 국가라도 따르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가정한다.(p21)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체제에 대해 적절한 방법으로 증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뿐만 아니라, 증언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과연 어떤 근거 위에서, 어떤 기준에 따라서 그것이 의무인지를 규명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p23)

 

2장 국가를 향한 증언의 근거

 

A. 신약성서의 증언에 따른 그리스도의 주되심

 

신약성서는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의 부으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세들을 이기셨다는 승리에 찬 단언을 한다. 이것이 주(Lord)라는 용어의 명확한 의미이다.(p25)

 

현재 시대는 죄가 특징이며 인간이 중심이지만, 도래하는 시대는 그리스도 안의 궁극적 길 속으로 역사가 진입하게끔 하는 구속적 실재이다.(p26)

 

B.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국가

 

여기서 국가란 어떤 특정한 하나의 정치적 패턴이 아니라 최종적 권위를 지니고 강제력에 호소하는 조직화한 사회라는 근본 현상을 말한다.(p30)

 

로마서 13장과 베드로전서 2장은 국가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가장 직접적이고도 긍정적으로 다룬다.(p31)

 

C. 유사한 동기

 

우리 시대에는 국가에 관심을 둬야 할 이유가 많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의 복지를 위해 매우 개인적이고 아주 구체적인 관심을 둬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국가는 시민을 위협할 수도 있고, 안녕을 실현할 수도 있다. 국가의 주장이 급속히 퍼질수록, 사회 경제적인 메커니즘을 조작할수록 우리 이웃의 안녕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가 불의에 반대하는 증언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p34)

 

D.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지금부터는 성서의 또 다른 출발점, 즉 구약성서의 증언에서 출발하자. 예언자들이 왕들에게 말하고자 할 때, 그들의 메시지는 두 가지였다.(p36)

 

a. 우상 숭배 고발.

 

외국 동맹국들의 요구와 잡혼, 또는 이스라엘의 미신과 옹졸한 신앙이든 건에, 이방 신 숭배는 왕들에게는 특별한 유혹이었으나 예언자들은 극도로 혐오했다. ... 민족주의를 우선하는 선택, 한 민족에 대한 선호, 다른 모든 국가에 대한 한 국가의 절대적 우위 주장은 이미 우상숭배이다.(p37)

 

b. 이스라엘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역사

예언자들을 따르면, 야훼 하나님은 민족들을 창조하고 그들 각각의 자리와 운명을 부여하시고 나서도 그들의 행동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이 있다. 이것은 그들 자신보다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때때로 이방 통치자들이 한 일은 이스라엘을 축복하거나(특별히 이사야 50장의 고레스) 혹은 이스라엘을 종종 징계(이사야 10)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일한 의무는 다른 수단을 동원한 방어를 포기하거나(이사야 30,31), 심지어는 포로가 되는 것을 수용(에례미야 21)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침묵하시면서도 강함을 배우게 하려는 섭리가 작용한다고 받아들일 뿐이다.(p37)

 

 

3장 교회 증언의 형식

 

A. 증언으로서 교회의 실존

 

교회는 국가가 왜 존재하는지를 국가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이해가 교회의 발언을 정당화할 뿐 아니라,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한다.(p39)

 

교회의 신실함의 첫 번째 단계이자 교회가 앞으로 말하게 될 모든 것의 정당성을 평가하는

기준은 제자도의 기준을 교회가 순종하는 것이다.(p39)

 

교회는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이다. 교회의 참된 실존, 즉 교회 회원들의 형제애적 관계, 형제들 간의 필요와 다름을 다루는 방식은 정녕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본보기이며, 또한 본보기가 되어야만 한다.(p40)

 

정치적이라는 용어를 교회보다는 국가에 적용하는 근대적 용법은 논쟁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아주 잘 확립되어 있다. 그러나 성서의 사상에서 보자면, 교회는 정확히 정치적 실재이자 폴리스(polis)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적 이해는 왜곡을 가져온다. 신구약성서 언어에서 교회(qahal, ekklesia)라는 단어는 본시 그 단체(body)의 심의회(a deliberative assembly)의 정치를 가리킨다. 옛 언약에서 제의적이고 사제적인 요소들에 대한 경멸이 최근의 일부 신학에서 많이 사라졌다. 그래도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성서 언어가 제의적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정치적(왕국, 메시아, 새 예루살렘, 시민권)이라는 말은 여전히 참이다. 그러므로 근본적 의미에서 보자면 교회는 진정으로 정치적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국가보다 더 참되고 더 올바르게 질서를 유지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p41)

 

교회는 특히 교육과 의료라는 특정 분야와 사회적 관심이 요구되는 다른 영역에서 세속 권력자들도 제도화하고 일반화활 수 있으리만치 그 유용성이 입증된 창조적이고 실험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 필요를 채워주는 안내자(pilot)’ 역할을 계속 수행하였다.(p44)

 

기독교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직 제도나 회의 단체가 아니다. 도리어 많은 교단에서 사용하는 언어인 평신도(ayman)’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주인인 모임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을 사회에서 보존하면서도 사회와 일차적으로 접촉하고 사회에 복음을 증언한다.

 

교회가 모델 사회가 되어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을 제일 첫 자리에 두는 암묵적인 증원 외에도, 기독교 모임은 그 구성원이 아닌 그룹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도덕적 기준을 발전시키는 데 간접적으로나마 엄청난 공헌을 할 수 있다. 헌신한 교회 회원이 아닌 청년들에게 부분적으로 기독교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정직하고 근면한 그리스도인이 준수해야 할 사회적 가치를 통해서, 어떤 사회적 악에 참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영적이거나 논리적 헌신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반적인 도덕적 가치에 기독교적 정신은 점차 스며드는 도덕적 삼투압이 생겨날 것이다. 물론,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이다.(p45)

 

그런데도 우리에게 할당된 과제는 국가가 작동하는 방식에 교회가 어떻게 좀 더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p45)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이라는 고백이 우리가 국가에 대해 발언하는 이유를 제시하며, 국가가 계속 존재한다는 성서의 증언은 우리로 하여금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증언하게 한다.(p46)

 

1. 국가에 대한 증언은 교회의 분명한 확신을 나타내야 한다.(p46)

2. 교회의 증언은 자신의 행동과 일치되어야만 한다.(p46)

3. 교회는 무언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발언해야 한다. 도덕적으로 중요한 모든 주제와 그 주제의 전 영역을 다루는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p47)

 

B. 교회의 사회적 증언과 개인에 대한 증언의 관계

정치인과의 의사소통은 어떤 점에서 목회적이다. 이를테면, 각 개인은 인격으로, 하나님의 목적으로 대우받을 권리가 있다. 하나님의 의로움이 함축하는 바를 그에게 말해 줄 때 그는 심판받을 존재일 뿐만 아니라 존경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이다.(p50-51)

 

C. 민주주의

이 연구의 목적은 비폭력적 저항 자체가 옳다는 사례를 논증하기보다는 신약성서가 말하는 비폭력적 저항의 관점에서 국가에 대한 발언이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사회적 책임의 맥락이 변해서 성서의 관점이 틀렸을 뿐 아니라, 오로지 루이 14세만이 말할 수 있었던 짐이 곧 국가이다를 모든 시민이 주장하는 사회에서 성서의 입장은 사실상 부적절하고 터무니없다는 최근의 극단적인 주장을 정밀하게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다.(p53)

 

만약 우리가 민주주의란 근본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사회 질서라는 신화적 설명을 거부할 수만 있다면,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발언할 여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지고, 그것을 기쁘게 여길 것이다. , 권위의 탈중심화, 지역 유권자들의 지방의원 선출, 그리고 권위의 남용에 관한 헌법과 사법의 통제는 절대왕정 시대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비판을 경청하도록 힘을 행사하는 요소들이다.(p54)

 

투표자 스스로 진정으로 정당한 결정이라는 생각을 하려면 유권자에게 선택 가능한 모든 것을 제시하고 결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양당 체제는 결코 이럴 때 포함되지 않는다. 양당 체제에서 유권자들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투표가 아니라, 두 개의 경쟁적인 소수 독재 정치 중에서 덜 반대할 만한 것을 선택할 뿐이다.(p55)

-> 진보와 보수 프레임의 문제.

4장 윤리 이론에 대한 일반적 숙고

 

A. 교회와 세상, 그리고 이원성의 자리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에 권고하고 비판하는 유형을 주제로 토의하기 전에, 우리는 방법론에 포함할 태도와 방법을 논의해야만 한다.

 

국가에 대한 접근방법 중 가장 중요한 공리는 기독교 윤리학은 기독교인을 위한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다.(p58)

 

그리스도인을 위한 기독교 윤리와 국가를 위한 기독교 윤리 사이의 차이는 영역이나 차원의 이원성이 아니라 반응의 이원성에서 비롯된다.(p63)

 

B. 이상, 원리, 그리고 상황윤리

 

그리스도인은 이상적 사회를 어떻게 설명하고 창조할 것인가에 관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그 국가가 타락한 사회 안에서 최선의 책임을 다할 것인지를 말한다.(p64)

 

C. 일반 계시

 

버터필드는 기독교적 신념만이 역사의 사실을 참으로 공정하게 이해하게 해준다고 인정한다. 첫째, 이것은 무엇보다도 공정한 객관성, 자신과 분리된 진리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헌신하게 되면 자기 방어를 근본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특별히 기독교의 용서라는 미덕은 역사적 갈등 속에서 외견상 악한 사람일지라도 전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종종 선을 행하는 것을 보게 해 준다. 셋째, 회개의 미덕은 길을 잘못 들어선 역사를 향한 비난 일부분이 자신과 자신의 계급, 혹은 민족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한다.(p68)

 

 

5장 정치적 판단의 척도

 

A. 신약의 메시지에 의하면, 국가나 혹은 더 일반적인 사회 조직은 교회의 사역을 위해 존재한다. 그 반대는 아니다.(p69-70)

 

국가와 정치인들을 향한 비판적 발언을 포함하여 교회가 사회를 향한 증언의 타당성은 교회가 자신의 핵심 메시지를 얼마나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는가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초청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이들이 사랑으로 살도록 요청하는 일이다.(p70)

 

구약과 신약에서 예언자들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선포하였다.(p71)

 

B. 강제력의 사용은 경찰 기능, 즉 공정한 사법 절차를 따르고, 의회가 승인한 법규를 지키고, 어떤 상황 속에서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보호하는 기능으로만 제한해야 한다.(p71)

 

C. 위험은 국가 권력이 자신의 직무인 경찰력을 행사하는 데 좀처럼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p71)

 

D. 기독교의 사회비판은 유용하다거나 적어도 믿을 만한 대안이라고 항상 말해야 한다. 이 비판은 국가에 완벽한 사회를 세우라는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가시적으로 드러난 구체적인 폐단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이다.(p73)

 

우리가 국가에 요구하는 것은 모든 악의 총체적인 제거가 아니다. 즉각 밝힐 수 있고, 구체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악을 가능하면 제거하라는 것이다.(p74)

 

기독교의 사회비판은 하나님나라 안에서 그 기준을 발견하기 때문에(왜냐하면, 다른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적용하는 논리적 결론은 하나님나라이다(p75)

 

E. 기독교적 증언은 헌신한 교회 회원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록 제자도의 길을 선택하지 않은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그리고 그것에 동조하는 사람들 사이에 도덕적 삼투가 이루어져, 마침내 정직함과 상호존중, 근면과 깨끗한 사고, 욕심이 없음과 관용의 태도를 창조한다.(p77)

 

F. 사회적 이슈들에 관한 기독교의 발언은 때로는 인기가 거의 없는 측면을 떠맡는 것을 예상해야 한다.(p78)

 

G. 전통적인 루터교를 연상하는 방식의 국가 수용은 일반적으로 유용한 대안 중에서 가장 적은 이상과 진보를 취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결과를 낳는다. 현실주의적인 기독교의 사회비판은 항상 가장 높이 도달할 수 있는 목표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정부에게 비폭력적 저항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가 가능한 안의 범위에서 가장 정의롭고 최소의 폭력적인 활동을 하도록 요구한다.(p80)

 

 

6장 정치적 판단의 예증

 

A. 국제 갈등

 

모든 정의는 한 편에만 있다는 식의 정치적 상황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가능한 모든 강압 수단들의 무차별적 사용을 정당화할 만큼 바람직한 정치적 목적이란 없다.(p86)

 

자신의 국가나 블록은 전적으로 선하고, 대적자는 전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의 오류는 상위의 도덕적 권위나 법의 규칙, 심지어 기독교적 가치로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려는 노력으로 더욱 악화된다.(p86)

 

정부의 법률적 승인(혹은 적어도 유엔 회원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합헌성, 안정성, 인권 존중, 약속의 충실한 이행, 등이 국민에게 장점이 되는 안의 범위에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가능하다. 만약 이 제안을 시종일관 적용한다면, 그리고 상대적으로 선한 특정한 국가들의 클럽기능을 적용하는 것으로 정의된다면, 얼마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논거로부터 몇몇 정권의 비존립(카스트로 정권과 같이 기존의 정권을 파괴하는 필연성)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다.(p86-87)

 

B. 국제 정부

 

C. 국제법

 

D. 전쟁의 윤리학

 

우리의 전체적인 논지는 국가의 경찰 기능은 어느 정도 합법적이지만, 전쟁은 부당하다는 것이다.(p90)

 

 

7장 도표로 표현한 고전적 선택들

 

A. 중세의 견해

 

고전적인 로마 카톨릭의 사상이 이바지한 점은 유형론적으로 보자면 이중 기준(double standard)이다. 이 접근 방법은 도덕적 요구를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차원으로 이해한다고 보면 좋겠다. 카톨릭에서 이 두 차원은 중대한 모든 윤리학의 영역에 적용되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특별히 악의 문제, 보복, 용서와 같은 문제이다. 이 입장은 보복이나 용서를 각기 다른 등급의 척도로 설명한다. 그 척도의 중심에는 보복과 공격이 정확하게 비례(눈에는 눈, 이에는 이)하는 정의의 차원이 위치한다.(p111)

 

두 수준 간의 차이는 소명의 차이이다. 인류는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뉘며, 그들 사이의 편차는 정확히 그들이 서 있는 도덕적 의무의 수준에 있다. 진실로 성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 상위의 수준에 속해 있어야 마땅하다.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경제적정치적 역할에 책임적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이 없거나 또는 아주 약해야 한다.(p112)

 

B. 고전적 루터교 견해

 

루터교는 창조 질서(order of creation)”를 말한다.(p114)

 

모든 사람을 양 차원에 위치시킨다.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이웃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온갖 악한 방법에 인내하는 비폭력적 저항자들이 되어야 한다.(p115)

 

C. 칼빈주의적 신정정치

개혁주의 전통은 원래부터 어떠한 종류의 이원론이라 할지라도 거부한다.(p116)

 

칼빈주의적 전통의 청교도 사회는 고리대금의 거부와 같은 신약 윤리의 특정 원리를 일반 사회에 적용하도록 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기독교화된 사회를 만들고자 한다. 따라서 규범은 순수 정의의 수준을 넘어선다.(p117)

 

D. 자유주의적 평화주의

 

청교도-비국교도 전통에 서 있는 자유주의적 평화주의는 이원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개인에게나 사회 양자 모두에게 오직 한 규범만이 존재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개인과 사회 직무를 구별하는 루터교나 다른 종류의 사람들로 서로 구분하는 가톨릭의 입장은 묵인될 수 없다.(p118)

 

E.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우리가 다루는 이 주제를 가장 철저히 연구한 현대 사상가가 라인홀드 니버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모든 견해로부터 중요한 요소들을 수용하여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p119)

 

정의가 상대적이고 도구적 개념일뿐 고정되고 분명하게 정의되는 규범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p121)

 

두 개의 정의의 선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들이 정확히 인과응보와 등가의 수준, 위인지 아래인지를 묻는 것은 헛된 질문이다. 사실이 수준과 정확히 등가의 것은 실제적인 확실성으로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p122)

 

-> .. 이 장 쫌 쉽게 이해하고 싶으나 한계 다음 기회에...;

 

8장 국가의 이론적 이해

 

A. 로마서 13장과 국가 제도

 

대부분의 전통적인 유럽 신학은 로마서 13장과 그와 유사한 성서의 표현에서 국가를 창조 혹은 섭리 안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를 따라 제정된 신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는 실증주의적(positivistic)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다. 일부 루터교 전통에서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보게 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국가는 하나님이 제정한 것이므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에 현존하는 어떤 국가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바로 그 때와 그 곳에 존재하도록 의도하신 국가라고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기독교는 국가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 즉 하나님의 통치로 받아들여야 한다.(p131)

 

국가를 신적 기관으로 이해하는 다른 가능성을 우리는 정통주의적(legitimistic)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는 개혁주의 전통 내에서 수용하여 더욱 발전하였다. 정통주의자들은 성서적인 것과 합리적인 고찰을 결합한다. 그리고 로마서 13장에서 하나님이 국가를 신적인 기관으로 완성하려는 처방들의 기본적인 윤곽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요구들을 충족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진지하게 시도하는 국가는 정당하며,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국가, 특히 정의와 박애라는 하나님의 기준에 반하는 국가로 자신을 계속 확립하고자 할 때에 그것은 비국가(non-state)이며 오로지 파멸되어야 할 가치만 있을 따름이다.(p132)

 

논리적이고 성서적으로 적합하게 해결하는 실질적인 약속은 두 개의 관점을 혼합하거나 통합하는 시도가 아니다. 그들이 딛고 서 있는 전제가 부적절하다는 점을 발견하는 길이다. 양쪽 모두 로마서 13장은 하나님이 특별한 섭리 혹은 창조적 행위로 국가를 설립하고 제정했다고 단언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렇다면, 논쟁은 그것이 이상적인 국가를 제정했는가 아니면 경험적인 국가를 제정했는가에 관한 것 뿐이다.(p133)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지침을 실제로는 국가에게서 받는다는 뜻에서 그리스도인은 국가에 순종하라고 부름 받지 않았다. 마치 국가가 그곳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하듯 행동하고, 반역하지 말라는 단순한 의미에서 복종하도록 부름 받았다.(p134)

 

B. 신약에서 국가의 두 얼굴

종종 사용되는 설명의 패턴은 무저갱에서 나온 악마적 짐승에 대한 비전을 설명하는 계시록 13장도 로마서 13장과 마찬가지로 대등한 구조를 이루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국가에 복종하라는 권면으로 본다. ... 국가는 아주 신중하고 정직한 질서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로마서 13장에서 명령한 복종이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는 하나님의 법에 직접적으로 반역하는 묵시록의 짐승으로 상징적으로 표현되었다. 국가의 권위나 존재의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 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할 만한 가능성도 존재한다.(p134-135)

 

차라리 우리는 로마서 13장과 계시록 13장은 모든 국가의 활동의 두 측면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듯하다. 어떤 국가를 보더라도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동기가 결합하고, 자기를 영화롭게 한다. 칼을 휘두르는 것은 항상 어느 정도의 불신앙을 나타낸다.(p136)

 

C. 있는 그대로의 국가

 

국가 이론에서 먼저 출발한 방법론의 단점은 존재와 당위 사이의 구별을 명료하게 하는 능력이 본래 갖춰지지 못했다는 것이다.(p139)

 

D. 다른 영역인 것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과 곧바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인간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와 구별된 윤리적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p141)

 

우리가 이 영역을 전통적인 로마 카톨릭과 같이 도덕 신학과 구별되는 도덕 철학이라고 지칭하든지, 혹은 루터교와 에밀브루너처럼 창조의 질서라고 하든, 디트리히 본회퍼처럼 위임통치(namdates)’라고 하든, 라인홀드 니버와 같이 그레코 로만의 정의의 개념이라고 하든, 혹은 자연법이라고 하든, 그것은 대수롭지 않다.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정의에 대한 다른 기준을 1) 예수 그리스도와 별개로 알 수 있으며, 그리고 2)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무언가 다르다고 암묵적으로 혹은 노골적으로 주장한다.(p141)

 

 

9장 교회/세상 이분법의 오용

 

 

A. 경건주의의 망령

 

서구 교회들과 그들의 선교에서 교회는 사회 윤리에 관심을 두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상의 흐름이 있었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간의 차이점이 넓게는 개인 윤리, 특별히 술, 담배, 그리고 춤과 관련해서 아주 강하고 부정적으로 그려졌다. 이 선 너머에 있는 더 넓은 사회 현상에 나타나는 도덕적 차원이 존재한다는 아주 제한적인 자각이 있었지만, 실상 기독교는 그러한 문제들에 거의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확고한 확신을 하고 있다.(p149)

 

경건주의가 사회적이나 정치적 윤리에 무관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p150)

 

명백하게 그들은 우리 시대가 아니라 그들 시대의 사회적 사안에 직면했다. 그들은 규약을 작성하고 핵실험 금지협정을 협상하거나 경제학자를 훈련하기보다는 학교를 만들고 노예를 자유롭게 하였고, 언어를 훈련하고, 간호사를 양성했다. ... 그들의 시대에 그들에게 유용했던 선택에 따라 그들은 사회 윤리적 사안들에 반응하였고, 그것은 창조적이고 독창적이었다.(p150)

 

경건주의는 항상 명확한 정치 철학을 갖고 있었고, 그 철학에 일치한 행동을 하였다.(p150)

 

만약 경건주의의 정치 윤리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면, 그것은 틀림없이 어느 쪽’(whether)이냐가 아니라 어떻게’(how)의 문제에 있다. 만약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불개입의 오류가 아니라 잘못된 종류의 참여일 것이다.(p151)

 

 

 

 

201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