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에 대한 책을 읽으려고 존 요더 총서를 그냥 다 사고 아무 생각없이 순서대로 읽었는데 읽다보니 이 책은 평화주의랑은 크게 상관 없어보이는..^^;;
교회,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회, 공동체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목은 교회, 그 몸의 정치
부제는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해야 할 다섯 가지 실천사항
Body Politics: five practices of th Chritian community before the watching world
1992년에 쓰여졌고 번역은 2011년에.
옮긴이의 글
『교회, 그 몸의 정치』, 이 한 권의 책은 우리가 궁금해하는 교회가 무엇인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의 의미가 무엇인지? 공동체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Lord)로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몸을 이루는 각각의 지체로서 구성원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서적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p14)
요더는 평생 하나님나라의 주인이자 평화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심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삶이 사회-정치-윤리적인 면에서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함을 제시하였다. (p14)
요더의 신학 중심에는 항상 규범(normatively)으로써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의 법을 실천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자리한다.(p15)
교회라면 곡 점검해야 할 실천 사항에 관한 글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실천 사항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1) 교회의 매는 것과 푸는 것/용서와 화해
(2) 함께 빵을 떼는 제자들/성찬식
(3) 세례와 새로운 인류/세례
(4) 그리스도로 충만함/은사의 다양성
(5) 바울의 교훈/열린 회의
안타깝지만 요더는 초대교회가 보여주는 원형으로서의 이러한 실천 사항을 콘스탄틴 이후로 거의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1) 마태복음 18장에 기록되어 있는 교회의 매고 푸는 것으로써 용서와 화해는 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당사자들이 직접 만나서 화해를 시도하는 분별력의 과정은 아예 개인의 자존심과 감정의 예민함에 모든 자리를 양보하였다. (2)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일상적인 식탁의 나눔은 더는 이웃과 공유되지 않는다. 예배 중의 성찬식은 존재하지만, 어려운 교회의 형제, 자매를 일상의 식탁에 초청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는 일은 흔히 목격되지 않는다. (3) 개인적인 구원의 고백으로써 세례식은 존재하지만, 새로운 인류는 존재하지 않는다. 찬송가 가사에서는 “주 예수 안에서 동서나 남북이 있으랴, 온 세계 모든 민족이 한 형제 아닌가?”라며 한 가족임을 고백하지만, 여전히 교회는 흑인, 백인,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자가 따로 존재한다. 부자는 부자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사회적・문화적 장벽을 그대로 갖고 있다. (4)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등에 나타나는 은사의 다양성은 교회에서 편중되어 있거나 거의 목격되지 않는다. 교회가 클수록 대부분 사람은 구경꾼으로 남아 있고 소수의 재능 있는 사람들이나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교회를 이끌어 간다. (5) 그리고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가운데 질서 있게 소통하는 교회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p16-17)
서론
아주 중요한 가치들에 헌신함으로써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그 어떤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공동체 역시 하나의 정치적인 실재이다. 곧 교회는 하나의 폴리스(polis) 곧 하나의 구축된 사회적 조직체로서의 성격을 가진다.(p29)
정치적이 된다는 것은 의사를 결정한다는 것, 역할들을 부여한다는 것, 그리고 권력을 나눈다는 것을 의미한다.(p31)
책의 부제목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 연구는 기독교 교회가 하나의 유기체인 폴리스로서 운영되도록 주어진 부름에 부응하기 위해 실천해야 할 간단한 다섯 가지 사례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p32)
1장 교회의 매는 것과 푸는 것
예수께서 랍비들이 하나의 작으로 사용하는 ‘매는 것과 푸는 것’이라는 용어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연관된 것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한다. 랍비들의 용법상 ‘매는 것’은 윤리적 판단이 필요한 질문에 답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아울러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무를 지우다”(obligate)는 단어의 어근에 여전히 그 뜻이 남아 있다. ‘푸는 것’(loose)은 의무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으로, 산상수훈의 시작부분에서 예수는 누구든지 계명 중에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loose)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명하신 이 행위에는 윤리적 판단과 화해라는 두 가지 차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p38-39)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아주 정치성이 농후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문자적으로는 ‘소집된 모임’, 혹은 의회라는 말로, 이를테면 경제인들이 지역 회의처럼 그쪽 사회 전체를 대변하려고 참석하는 모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39-40)
교회는 죄 범한 사람이 더는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기 이전에 반드시, 화해를 위한 이 세 가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a. 이 과정은 개인이 주도해야지, 목사의 역할로 생각해선 안 된다. 죄 범한 사람을 찾아가 대화할 사람은 목회자가 아니라, 그 사건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b. 이 절차의 의도는 관계의 회복이지 처벌이 아니다
c. 어떤 죄는 중하고, 어떤 죄는 경하다는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범죄든지 용서할 수 있지만, 사소한 범죄란 있을 수 없다.
d. 이 절차의 의도는 교회의 위신과 평판을 보호하거나 구경꾼들에게 죄의 심각성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죄 범한 사람을 공동체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그 사람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다(p40)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는 조건부가 달린 주기도의 유일한 간구이며 예수께서 보충 설명을 하신 유일한 부분(마6:14-15)이기도 하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는 것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이 있으며 이런 연결 관계를 나타내는 같은 말씀들이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서 다시 등장한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에베소서 4:32)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로새서 3:13)
(p42)
경험상, 이러한 절차 중 누군가 심각한 학대를 받는 상황이라면, 우선 이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러한 절차의 의도가(관계의) 회복이지 처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절차의 의도가 공동체의 위신과 평판을 보호하거나, 젊은이들에게 죄의 심각성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절차가 회중을 이끄는 리더들의 권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함도 아니다. 사실 이것은 목회적 특권이 결코 아니다.(p43)
곧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갈등을 일으키는 힘을 증진시키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화해를 위한 대화를 통해 서로 다른 차이들을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다. 갈등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왜냐하면, 갈등은 새로운 시각으로 새로운 자료들을 보도록 우리를 채근하기 때문이다. 상호 인간관계를 위해 갈등은 유용한 것이다. 갈등의 과정을 통해 사람은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각성을 하게 되고, 신뢰와 희망을 품게 된다.(p48)
인간이 된다는 것은 갈등 속의 존재로서 가해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의 빛 한가운데서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구속적인 대화 속에서 갈등과 직접 마주치는 것을 의미한다.(p56)
2장 함께 빵을 떼는 제자들
예수께서 의미하시고자 하신 것과 최초의 제자들이 이해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간에 성경의 기록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너희가 일상적인 식사를 할 때마다 주님을 기억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수께서 그날 저녁 축복하신 그 식사와 그를 기억하라고 요구하셨던 그 식사는 그들의 몸을 위한 음식으로 그들이 평상시에 함께 먹었던 식사였다.
일상적으로 음식을 함께 먹었다는 것은 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듯이 부활하시고 나타나신 주님과 음식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해준다.(p62-63)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우리에게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신실해졌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breaking of bread),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행2:42)고 기록하고 있고, 곧이어 “함께 떡을 떼고자 자신들의 집에서 모여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었다”(행2:46)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삶을 함께하는 중심으로서의 식사가 경제적 공동체 형성으로 범위가 확대되었다는 것 때문에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행4:32)고 기록한 것이다.(p64)
이러한 공동의 식사는 그리 혁신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사람들과 제자들이 함께 떡을 나누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기대해왔던 소원의 성취였다. 광야에서 있었던 만나 이야기는 히브리인들이 체험했던 해방 초기에 경험한 것이었다. 모든 실제적인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정기적으로 알려주는 평등의 정신에 근거한 희년은 모세의 여러 법 조항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하고 있다.(p65)
고린도교회에 보냈던 첫 번째 편지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 어떻게 교회를 운영해야 하는지 지침을 요구한 것에 대한 편지글 형식의 답변이다. 그들이 요청한 교회의 지침 중 대부분은 식탁 교제와 연관이 되어 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와 관련된 내용(행8장과 10장), 그리고 여러 계급으로 나뉜 식탁에 대한 내용(행11장)이 그것이다. 바울은 만약 그들이 식탁 교제에서 사회적 계층 분화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식탁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행위라고 설명하였다.(p66)
예수의 지상 목회가 시작된 이래로 그의 제자들은 교회 예배의 실행과 관련된 간단하지만 중요한 두 가지 차원의 일을 식별할 수 있어야 했다. 첫 번째 차원은 기록상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별로 중요시 여겨지지 않았던 사회적 사실, 곧 예수그리스도의 새로운 ‘가족’(family)으로 세워지기 위해 자신들의 직업, 가정, 가족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가족은 예수께서 친히 가족의 머리 되시는 소비의 공동체이다.(p66-67)
두 번째 차원의 의미로 처음부터 공동의 식사를 통해 제시되는 것은 감사이다. 성찬식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감사를 드림’이라는 아주 단순한 의미가 있는데, 이는 감사기도가 드려진 식사를 말한다. 유대 가족들의 매 식사에는 예배행위가 따라온다. 제자들의 무리가 식사를 준비할 때, 예수는 규칙적으로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감사의 말씀으로 기도를 드렸다. “축복의 근원이 되시며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 우리에게 빵을 나눌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p67)
이러한 두 가지(식탁 교제와 감사) 기본적인 의미 위에 복음서는 유월절을 기념하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유월절은 1년에 한 번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을 기념했던 식사 형태를 띤 예배 행위이다. 비록 복음서들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연대기적 관점에서 하나로 통일시키기는 쉽지 않지만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의 맥락에서 진행된 이벤트였다. ... 이러한 연결고리를 살펴볼 때, 이는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고 기뻐하는 전체 히브리인들의 전통을 올바로 이해하고,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끊임없이 눌린 자를 해방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충성을 다해야 함을 확실하게 하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p68)
‘떡을 떼는’(breaking bread) 주제가 신약성서 어디에 기록되어 있든지 그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물질적 생활을 사람들이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다. ... 성찬식은 하나의 경제적인 행동이다. 빵을 함께 나누는 것을 올바로 실행하는 것은 경제적인 윤리와 관련된 문제이다. (p69-70)
가난하게 살겠다는 수도사들의 맹세는 궁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선 수도원은 건물 및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수도사들의 생활은 거의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토지를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고, 거지들은 항상 환영을 받았다. 손을 벌리는 일에의 헌신(혹은 프란시스코 회의 경우에는 구걸하는 것)은 경제연합의 또 다른 표현이 되었다.(p74)
나사렛의 한 회당에서 있었던 강단 설교에서(누가복음 4장), 예수는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이사야 61장을 인용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희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p75)
희년은 생산적인 자본이 평등해지도록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곧 모든 사람(더욱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가정이) 이 자신의 땅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9p76)
모세의 비전에 따라 50년마다 땅의 소유주를 다시 배당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고 얼마 뒤에 생겨난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눔에서도 선구자들이었다는 것이다.(p76)
더 넓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비전 안에서 결론을 짓자면 희년의 메시지는 결코 현실적이지 못하다. 자본주의를 포함한 모든 경제적 질서에는 어떠한 용서의 범주들과 빚을 면제해주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이러한 형태 중의 하나가 이자가 적거나, 아예 이자가 없는 무이자 대출이다. 공공의 도로, 학교, 그리고 복지를 위한 후원 자금이 또 다른 예이다. 국제적인 규모의 형태로써 최근 여러 해 동안 국제 은행들이 함께 노력함으로써 수억 불이나 되는 빚을 면제해 주었던 것이 좋은 예이다.(p77)
3장 침례(세례)와 새로운 인류
침례(세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람을 소개하고 이들을 구성원으로 가입시키는 행위이다. 이 삶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은 이들이 이전에 가졌던, 혹은 이들이 선택했던 정체성에 대한 모든 한계를 초월했다는 것이다.(p84)
바울은 그런 것보다 더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곧 그는 아주 다른 두 그룹의 사람들이, 두 문화가, 서로 다른 역사가 새로운 인류, 새로운 창조로 흘러가야함을 말하고 있다.(p87)
바울과 관련된 사도행전의 내용 중 이방인들과 관련된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 것이(14장) 루스드라에서의 사건이고, 두 번째 것이(17장) 아테네에서의 사건이다. 바울의 메시지는 유대인의 하나님이 그의 청중들을 이미 진행하고 계신 약속의 이야기, 곧 유대인의 이야기로 초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 바울은 유대인의 세계관을 비유대인의 언어로 이방인들에게 전달하였다.(p88)
만약 침례(세례)를 받는 사람이 개인의 내면적 경험인 거듭남의 새로움을 지적으로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외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이라고 한다면, 강제적으로 침례(세례)를 받게 하는 것을 거부하고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옳은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침례교인’들의 관점은 그들이 설명하고자 하는 인류평등주의를 자연스럽게 담아내지 못하는데, 이는 이들의 관점이 사회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상징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상징적 관점으로는 세상을 새롭게 만들지 못한다.(p92)
침례(세례)는 새로움과 함께함의 의미를 이미 존재하는 사회계층화 및 계급화와 명쾌하게 상대화함으로써 새로운 사람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p92)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는 대위임령에 복종할 계획도 제대로 서 있지 않았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자신들의 집에서 함께 모여 빵을 떼었고, 그 결과 자신들이 우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이방인들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함께 모여 집회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건과 더불어 신학이 펼쳐진다. 사건에 이어 신학을 점검하고, 그 신학을 이끌어 가려면 교회의 질서를 다시 조정해야만 하는 일이 생겨났다. 선교활동은 그 이론에 앞서 있었다.(p99)
예수가 이 세상에 오기 이전에, 침례(세례)는 회개와 죄 씻음을 의미했다. 곧 ‘너희는 과거를 뒤로 놓고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p103-104)
복음은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침례(세례)는 이를 기뻐하며 축하하는 것이다.(p104)
만약 기독교 침례(세례)가 사람의 정체성, 이해, 그리고 행동에서 변화(사도들은 이것을 ‘회개’라고 불렀다) 가능하다는 것을 선포하고 이를 축하한다면,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끼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p105)
다원화된 사회에서 회심한 사람에게 침례(세례)식의 의미는 자신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초청 메시지에 대한 응답이자 그 운동에 합류하기 원한다는 그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이다.(p107)
4장 그리스도로 충만함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몸에 있는 각 지체가 나름대로 독특성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의 인준을 받아 구실을 하는 그룹관계라는 새로운 방식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로 충만함” (the fullness of Christ)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p117)
에베소서 4장에 바울이 사용하는 은유라고 여겨지는 시편68편의 이미지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지는 은사의 분배는 그리스도 승리의 한 부분이다.(p120)
은사의 다양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승리하시고서 얻으신 선물로 그의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포로들을 자신의 열차에 태워 이끌어 가시는 야훼/아도나이이신 하나님의 승리 과정의 한 부분으로 삼으신 것이다.(p121)
몸에 달린 손과 눈은 ‘개별적’인 것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고 독특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몸의 지체들과 함께 붙어 있을 때만, 자신에게 소임과 생명과 존귀함을 실행하고 소유할 수 있다.(p121)
바울은 사람의 능력 혹은 역할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은사(gift)이기 때문에, 한 사람의 화려함과 능력에 집중하지 않게 하려고 이 단어를 겸손과 연결시켜 놓았다. 한편 베버는 권위를 행사함으로써 화려하고 위압적이고, 자기 독창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설명하고자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p125)
또 다른 혼동은 천직이나 그 누가 따라갈 수 없는 선천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천재성(giftedness) 혹은 재능(gift)에 대한 현대적인 용법에서 비롯되었다. ... 전문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명성을 인정 받고, 봉급을 받음으로 기능적으로 그 독립성이 유지된다. 그러나 바울의 은유는 독립성과는 반대로 상호책임과 상호의존을 강조하고 있다.(p127)
타락한 세상의 한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업적도 없는 각 사람이 존엄하다는 것을 은혜로 보증하면서 새롭게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조직을 반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유기적 조직체에 구조적 연속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드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동등하긴 하지만 각자에게 전혀 다른 능력을 부여함으로 구조적 연속성을 나타내셨다.(p129)
바울의 비전이 요구하는 변화(transformation)는 몇 사람들, 특히 재능이 있는 독점적인 여성 몇 명이 또 다른 몇 명의 남자들과 역할을 나누는 정도여서는 안 된다. 곧 그것은 목회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재교육하는 모습이 되어 한 사람이라도 은사가 없다고 하지 않고, 한 사람도 부름받지 못함 없이, 한 사람도 능력을 부여받지 못함 없이, 그리고 그 누구도 권세를 부리는 모습이 없는 목회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만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에 대해 가치 있는 삶을 인도’하고자 했던 바울의 비전을 따라 사는 것이 될 것이다.(p138)
5장 바울의 교훈
바울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발언권을 부여하셨으므로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 발언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미 말을 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발언할 수 있도록 양보하라고 교육하고 있다.(p142)
바울이 14장에서 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는가 바울이 의미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는 아마도 별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소식에 그리 밝지 못한 교회의 맨 뒷줄에 앉은 한 여자가 사람들이 한 말에 대하여 알지 못하자 자신의 옆에 앉은 사람에게 뭔가를 물어보기 위해 잡담하듯이 한 행위에 대하여 언급하는 듯하다. 바울은 이처럼 개인적 상황에서 나온 질문은 공적인 문제를 다루는 전체 모임의 안건으로 삼기보다는 집에서 다루도록 하라고 기록한 것이다.(p143)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말씀하시며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잠재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소중하게 듣는 것은 인도주의 차원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된 그 무엇, 곧 이미 창조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난 그 무엇을 확언하기 위함이라는 요한의 말씀(요1:9)을 아주 잘 표현한 것이다.(p152-153)
과연 여러 곳에서 개최되는 지역 모임에서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있는 똑같은 자유, 그리고 합의에 따라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똑같은 자유를 갖게끔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생기는 다양성이 무질서를 초래하지는 않을까 하는 질문이 생긴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위협을 느끼는 가부장주의자들이 늘 경계하는 표준화된 두려움이다. 이에 대한 작지만, 이치에 맞는 답은 성령께서 모든 사람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신다는 믿음 곧 권력의 분산이 답이다. 이러한 분권화는 지역의 필요와 상황에 맞게 실제적인 유연성과 전체적인 문제를 직접 적용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p154)
가부장제의 중앙집권적인 통제방식은 진정한 연합을 창조해내지 못한다. 군주제의 칙령은 세심한 경청을 통해 일을 진행하는 것보다 속도는 훨씬 빠르지만, 대개는 잘못된 것들이다. 다수결의 원칙에 근거한 투표나 선거는 비록 결정을 빠르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정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소수들에게 패배의식과 이해가 되지 않는 분쟁의 소지를 그대로 남겨두게 된다.(p154-155)
6장 결론
은사의 다양성은 사회적 과정 속에서 겸손한 사람들의 능력을 고양하고 계급제도의 종말을 고하게 할 수 있는 모델이다. 성령 안에서 시행되는 대화는 민주주의 개념인 발언권의 기초이다. 죄를 범한 사람을 매고 풀기 위한 권고는 갈등 해결과 양심을 고양하기 위한 토대가 된다. 침례(세례)는 빵을 뗌을 통해 사회 속에서 서로 다른 인종을 받아들이도록 하며, 경제적인 책임을 함께 지게 한다.(p158)
근본적으로 ‘세상을 거스르지’ 않는 교회는 세상을 위해, 그리고 세상에 대해 말할 가치가 없다. 회심과 세상과 분리하는 것은 내세를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사물의 한가운데에 이미 적절하게, 구속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p168-169)
2013.5.6.
F.B.
책공망
존 요더의 책 입니다.
평화주의에 대한 책을 읽으려고 요더 총서를 다 샀는데 이런?책인 줄 모르고 얼떨결에 읽게 되었네요^^;
이 책은 교회(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갖추어야 할 다섯가지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1) 교회의 매는 것과 푸는 것/용서와 화해
(2) 함께 빵을 떼는 제자들/성찬식
(3) 세례와 새로운 인류/세례
(4) 그리스도로 충만함/은사의 다양성
(5) 바울의 교훈/열린 회의
책에서 따로 이야기하고 있는건 아닌데, 이렇게 목차를 보고 있으니 다섯가지의 공통점이 있네요.
‘다름’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공동체의 룰을 벗어나 잘못한 사람
나와 경제적 수준이 다른 사람
다른 문화적 환경 속에서 살던 사람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
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요더의 다른 책을 읽으면서 어렵다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것 처럼 ‘나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생각해보면 평화주의가 그렇게 멀리 있는 이야기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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